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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곳은 전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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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곳은 전방이다
  • 의약뉴스
  • 승인 2012.11.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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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11시. 밤은 고요하다. 고단한 하루를 끝낸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다.

그러나 전방의 밤은 여전히 시끄럽다. 대남방송은 지칠 줄 모른다. 거기다 대북방송까지 겹쳐지니 웅성웅성하는 소음이 마치 싸다고 외치는 시장바닥 같다.

대북방송은 그렇다 쳐도 대남방송의 내용은 한심한 수준이다.  장군님을 칭송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내용이 먹혀 들 것이라고 믿는 그쪽 수뇌부의 판단이 한심스러웠다. 이곳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삐라도 마찬가지였다. 조잡한 그림에 조잡한 종이질이 그쪽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방송을 듣고 그런 삐라를 보고 마음을 바꿔먹고 행동에 옮길 남쪽 병사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한명도 없었다.

그에 비해 대북방송은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집었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내용은 내가 들어도 설득력이 있었다. 굶주린 병사가 철책근처에서 자유를 찾아 월남할 수 도 있겠다 싶었다. 대화중에 간혹 들려주는 음악도 우리 것은 세련됐다.

하지만 상대편은 촌스러웠다. 문제는 그쪽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알고 있다는데 있었다. 정보의 차이였다.

나는 학생들이 말로만 듣던 대남방송의 실체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그들의 긴장하는 표정에서 눈치 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이들의 모습을 일지에 생생히 기록했다.

1986.3.13일
“대남방송에 학생들이 긴장했다. 아주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에 총 쏘면 사정거리 안에 있는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번에 온 학생들은 조금 순진한 것 같다. 지난주에 온 학생들에 비해 이념의식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훈련 중 양키용병 교육 반대나 미군철수 같은 구호를 외치거나 단체행동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전투화를 끈을 풀지 않고 침상의 한 쪽 구석에 앉아 있기도 하고 내무반 통로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모포를 걷고 자는 학생들의 침구를 정리해 주기도 했다.

학생 불침번이 있었지만 나는 형이나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자상한 행동을 했다. 첫 날이 중요했다. 모든 사건 사고는 첫날에 많이 일어났다. 처녀성을 의심하는 새신랑 처럼 나는 전방에서 학생들이 맞는 첫날밤을 그 정도의 긴장감을 갖고 대했다.

이 밤이 무사히 지나면 일주일이 아무 탈 없이 지나갔다. 조교의 최대 임무는 학생들이 안전하게 교육을 잘 받고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특히 내가 맡은 구대원 20명이 아프지 않고 사고치지 않고 토요일 오전 식사를 마치고 11시쯤 버스에 올라 수고 하셨습니다 하고 손 흔들어 주고 인사를 받는 일이었다.

그들을 태운 버스가 왔던 길을 따라 뿌연 먼지를 날리며 멀어져 가면 그 때 또 한주 가 지나갔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시간 후 불침번 인수인계 후 나는 비로소 전투화를 벗었다.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다시 내부반에 들어와 학생들의 자는 모습을 한 번 더 점검했다. 숫자를 세고 불침번에게 다음 불침번이 누구인지 확인시키고 인수인계 내용을 점검했다.

그 사이 학생들은 군용담뇨가 익숙하지 않는 듯 걷어차기도 하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거친 꿈속에서 뒤채기도 했다.

침상에 일렬로 머리를 나란히 누운 학생들은 한결같이 장발이었다. 긴 머리가 귀를 완전히 덮었고 어떤 학생은 어깨 부근까지 내려와 있기도 했다. 억압됐던 신체에 베푸는 자유방임이라고나 할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머리하나 자기 마음대로 기르지 못한 것에 대한 반항심이었다.

잠깐 끊어지는 대남방송 중간에 콩을 볶는 것 같은 M16 소총소리가 들렸다. 인근 부대에서 하는 야간 사격 훈련일 수도 있고 전초대대나 수색대대에서 모의 침투훈련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겁주기 위한 시위용 사격 일 수도 있었다.

두 번째 불침번을 서는 학생이 내가 세면을 마치고 돌아오자 물었다. 총소리가 무슨 의미죠? 나는 말했다.

이곳은 전방이다. 전방 중에서도 최전방이다. 완전무장한 수 십만의 세계 최고 전투병력이 서로 코 앞에서 대치하고 있다. 순간의 방심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나는 전방은 후방과 달리 늘 전쟁을 염두해 두고 있다, 이것이 우리 조국이 처한 현실이다고 나직이 말했다. 나직이 말했지만 조용한 실내에서 학생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였다. 학생들은 자는 것 같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누워 있지만 그들이 잠자는 시간은 자정이 넘어야 했다. 그들은 귀를 세우고 정말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공포를 느끼면서 첫날밤을 보냈다.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을수록 나는 편안한 훈련을 즐길 수가 있다. 겁을 먹은 학생들은 통제에 수월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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