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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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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민족
  • 의약뉴스
  • 승인 2008.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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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삼십대 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나의 약국을 찾아 왔다.

그녀는 먹는 피임약 한 갑을 사더니 하루 한 알씩 복용하는 분량을 무시하고 서너 알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또 한 갑의 피임약을 요구했다.

심상치가 않았다. 정신이상자가 아니면 깊은 사연이 있으리라. 여인에게 음료수를 따라 주며 말문의 빗장을 열어 본다.

그녀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혼기를 놓치고 지금은 소규모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 , 늦은 밤이었다. 무더위와 모기 등살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녀는 기숙사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곳엔 평소 친절하게 대해 주던 외국인 취업자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함께 공놀이를 하는 등 스스럼없이 지내 온 터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그날 밤 , 그녀는 그들에게 능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 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슴인지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옷에 묻은 흙먼지는 털어 내면 그만이지만 가슴에 번진 노을빛 아픔은 해가 진 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일로 임신이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피부가 검은 동남아 불법 취업자의 혼혈아를 낳는다는 것은 처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백의민족 , 단일 배달민족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약국을 찾아 다니며 피임약을 사 먹기 시작했다. 뒤늦게 피임약을 먹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상식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슬픔과 울분을 삭이고 싶었다. 피임약을 삼키면 악몽의 순간까지도 지워질 것만 같았다.

임신의 염려가 사라진 지금은 백의민족의 순결을 더럽혔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며 울먹였다. 외롭지만 하얀 빛이었던 여인의 가슴은 분노의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듯 했다. 지그시 아래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영혼이 걸쳤던 흰옷 ( 白衣 )을 되찾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희다 (白)’의 어원은 ‘히 (太陽, 年)’에서 비롯되기에 흰 옷을 숭상한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흰 옷은 하늘나라 사람을 표상 하는 옷으로도 통한다. 흰색은 영혼 불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흰색은 결백과 순수와 성결 ( 聖潔 ) 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백의 ( 白衣 ) 를 걸친다고 한다.

웨딩드레스가 순백의 의상인 까닭은 신부의 순결을 의미하며 신부가 쓴 하얀 베일은 악령을 멀리 쫓기 위함이라 한다.

흰색은 더러움을 타기 쉬워 그만큼 악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는 굳이 자신의 영혼이 걸쳤던 백의를 찾으려 했나 보다.

이 여인은 겉모습보다 아름답고 고결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를 대하는 나의 가슴은 설렘으로 떨고 있었다. 그녀는 성도덕이 문란해지고 정조관념이 사라진 이 사회의 마지막 동정녀라고 생각되었다.

그녀의 영혼을 감쌌던 백의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 외양은 어떤 모습일까. 비록 웨딩드레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수 있는 눈송이같이 성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구한 피임약을 한마디로 거절하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호소와 원망이 교차하고 있다.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 취업자의 고용을 묵인하는 이 사회를 원망하는 눈빛이었을까.

경제성장의 제물로 짓밟힌 여인을 대하면서 민족의 순수한 혈통은 외적의 침략에 의해서만 금이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언어와 피부 빛이 다른 취업자들은 새로운 사회 병을 안겨 주고 있다.

피임약 껍데기를 버리고 떠난 빈 자리엔 안타까움만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잊어버리기엔 슬픈 충격이지만 , 하루속히 망각의 강물에 아픈 기억을 띄워 보냈으면 좋겠다. 아픈 세월만큼 보다 의연해진 모습으로 거듭 태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녀가 찾는 백의는 생명과 영혼의 부활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흰 가운을 걸칠 때면 , 치욕의 순간을 잊지 못한 채 자학하며 방황하던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 그녀도 지금쯤은 아픔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새겨진 백의를 걸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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