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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두 발 중 한 발은 땅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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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두 발 중 한 발은 땅에 붙었다
  • 의약뉴스
  • 승인 2013.05.0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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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내가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마음은 계단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가야 하는데 행동은 그러지 말자고 자꾸 다짐하고 있었다. 이불속에서 꼼지락 거리는 습성처럼 시간은 흘렀고 나는 돌계단이 아직은 차갑다고 여겼다.

나는 마침내라고 표현할 정도로 결심을 하고 일어섰다. 그런데 이번에도 도서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내려간 계단을 다시 올라왔다.

올라오면서 나는 단지 걸어만 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고 그래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계단의 숫자는 53에서 멈췄다. 나는 2년 동안 이 계단에 앉아 플라톤을 뒤적였고 구호를 외쳤고 함성을 질렀고 담배를 피웠고 꽁초를 계단에 비볐다.

계단이 내게 준 정신적 각성과 위로와 끊어 오르는 열정과 냉정은 계단 그 이상이었다. 계단수를 다 세고 나서 나는 계단에게 진 빚의 일부를 갚았다는 생각을 했다.

부채에서 벗어났을 때 느끼는 작은 해방감 같은 것이 몰려왔다. 겨우 계단의 수를 셌을 뿐인데도 이랬다.

내친김에 나는 계단의 길이를 재고 싶었다. 줄자가 없었으므로 나는 걸음의 보폭을 1미터 정도로 정하고 숫자를 세면서 이번에는 옆으로 걸었다. 그랬더니 내 발걸음은 23에서 멈췄다.

폭이 23미터이고 계단수가 53개인 이 ‘자유와 평화의 계단’에서 나는 30분 정도 더 앉아 있었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록 해가 직사광선으로 내리 쬐고 있다고는 하지만 얼음 덩어리와 같은 계단에서 그렇게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일어섰다. 이번에는 다시 올라오지도 옆으로 가면서 숫자를 세지도 않았다. 어디 정해진 곳을 향해 가는 사람처럼 나는 미련 없이 계단을 떠났다.

나는 도서관쪽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기숙을 찾지는 않았다. 시험이 끝났으나 기숙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도서관에 있을 것이다. 한 번 결심하면 오래가는 것이 기숙의 태도였다.

거의 빈 도서관을 혼자 독차지 하고 기숙은 의기양양하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서 책이 주는 몰랐던 지식에 감탄하면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릴 것이다.

그가 어떤 공부에 도전하든지 그는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나는 그런 확신이 섰다. 영리하고 의지가 있는 기숙이었기에 전공과 무관한 사시도전도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서관을 지나 나는 후문으로 걸어 학교를 빠져 나왔다. 등 뒤로 막 집회가 시작되는지 둥둥 거리는 북 소리가 났고 손 마이크로 외치는 구호소리가 들렸다. 나는 3일 후 상봉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화천에서 내렸다.

그리고 버스를 갈아타고 민통선 두어 정거장 앞에서 내려 13초소를 통과했다. 길고 긴 5번 도로가 수평선처럼 펼쳐졌다.  나는 3시에 초소를 통과했으므로 6시 귀대시간 까지 내무반에 도착하는데는 무리가 없다는 것을 재고 있었으므로 걸음을 서둘지 않았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지는 않았지만 직각보행을 할 필요는 없었다. 멀리서 60트럭이 굉음을 내고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거나 뒤에서 지프차가 오는 낌새가 느끼면 그때 나는 군인으로 돌아왔다.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나는 민간인에서 다시 군인이 됐고 이런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 들였다.

걸으면서 나는 천리행군에 대해 생각했다. 들리는 말로는 걸으면서 존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다. 걷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두 발 중 한 발은 언제나 지상에 있는 걸음걸이는 못할게 없었다.

나는 낙오자가 생긴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귀로 흘렸고 400킬로미터 정도는 쉽게 주파할 수 있다고 오만한 생각을 했다. 낙오는 커녕 걸으면서 보여지는 새로운 풍광에 대한 기대감이 일기도 했다.

파로호를 한바뀌 도는 코스가 포함됐다고 했다. 비록 겨울이고 흰눈에 덮여 있어 출렁이는 파란 잔물결은 볼 수 없지만 그 광경 만큼은 장관일 것이다. 나는 중공군의 피로 얼룩진 파로호를 떠오리면서 막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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