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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우주, 무한한 K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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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우주, 무한한 K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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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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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뷰]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2007)

   
▲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2007)
김연수의 새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발터 벤야민의 미완성 대작 『파사젠베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발터 벤야민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자료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원하는 에세이를 기획하고, 인용과 몽타주의 방법으로 저작을 채워나갔다.

기념비와 공식문서에 기록된 역사에 회의감을 느꼈던 그가 망각된 기억과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모색한 방법론이었다. 김연수는 데뷔작『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부터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가면’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텅 빈 기표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가면 아래 맨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알레고리, 메타 픽션, 하이퍼텍스트, 문헌학, 박물학 등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기법을 추구해왔다.

새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김연수는 자신의 목소리를 최대한 자제하고 수집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나열하는 식의 몽타주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필연적 세계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우연적 존재’가 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병치해나가는 과정에서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역설적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 어느 곳에서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죽음보다도 더 우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해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학생들이 죽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건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떠들어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손을 흔들어가며 외쳤다.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필연적인 결과에 비하면 내가 살아남은 건 너무나 우연에 가까웠다. 그 죽음이 필연이라고 떠들어대면 떠들어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우연에 가까워졌다. (p.122)


소설 속 화자 또는 이야기 편집자는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간 학생이 전투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토끼몰이식’ 살해를 당했던 ‘1991년 5월’ 투쟁에서 살아남은 운동권 대학생이다. 돌연한 죽음이 사고/우연이 아니라 생존이 우연으로 전도된 삶은 무방비 상태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현실이 유지될 때, 주체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살아남았다는 ‘죄의식’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사이에서 번민하던 화자는 ‘방북 학생 예비대표’ 자격으로 독일로 떠나게 된다.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남아 있다”는 암호를 주술문처럼 간직한 채, 이제 그는 필연적 현실(분단과 국가보안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바깥으로 자발적으로 뛰쳐나온 ‘우연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꿈처럼 비현실적인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공식문서의 이름을 버리는 망명자, 혹은 또 다른 꿈/환상으로 투신하는 몽상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망명자와 몽상가의 길보다는 이야기 수집가의 길에서 자신의 출구를 찾고 있는 듯하다. 화자는 동서양의 역사를 종횡무진 횡단하며 망명자와 몽상가의 길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 밑그림을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그림을 그려나간다. 마치 『파사젠베르크』를 집필하며 벤야민이 매혹되었던 정교한 조직의 철제골조 구조물을 연상시키는 스케일의 이야기 몽타주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학병 징집에서부터 유신시대 간첩단 사건, 한일 조직폭력 간의 히로뽕 커넥션, 1980년 광주항쟁, 더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유태인 수용소와 베를린에 머물었던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일화에 이르기까지 ‘시네마스코프’처럼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 작가 김연수
유태인 수용소의 “죽음의 나팔수”였던 독일인 헬무트 베르크가 망명가의 삶을 보여준다면, 김제 갯벌을 메워 논밭을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었던 화자의 할아버지나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마르크스주의/대마초/자살의 삶을 택한 정민의 삼촌은 몽상가의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잔인한 현실을 꿈으로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곧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도망치는 ‘망명’이라고 본다면, 망명자와 몽상가의 길은 곧 하나로 겹쳐진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이 둘이 겹쳐진, 곤혹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이길용/강시우’이다. 일용노동자에서 민주투사로, 또 다시 안기부의 프락치로, 그리고 간첩으로 오인(誤認)받으며 북으로 간 남자. 그는 죽음과도 같은 고문의 시간을 보내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프락치로 세뇌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동일한 논리로 안기부에서 프락치 교육을 받으며 또 다시 운동권 세력으로 의식화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연출하는 인물이다.

그는 프락치인가 간첩인가 아니면 마리화나에 취해 있는 영화 예술인인가? 화자는 이 남자의 정체성 또는 진실에 대해 어떤 증명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자신의 이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필름과 마지막으로 건넨 사진 한 장에 진실과 거짓, 사실과 환상을 뒤섞어 하나의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단 하나의 실낱같지만 확실한 무엇이 있다.” 그러므로 “행복의 얼굴” 또는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 한 그는 살아 있으리라는 짐작과 함께.


강시우가 화자에게 건넨 붉은빛 노을 사진과 같은 것, 다시 말해 현실의 바깥과 ‘나’의 바깥에서 외로운 존재들이 쏘아 올리는 텔레파시/이야기로 세계는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입체 누드사진’의 순환은 이러한 연결과 관계를 유머러스하게 은유하고 있다. 무한한 우주 저편의 누군가를 상상하며 지구의 소리를 녹음한 레코드판을 우주선에 실어 보낸 칼 세이컨이 그러했듯이, 무한한 우주의 무한한 K들이 무한한 이야기를 쏘아올리고 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그 무수한 K들 가운데 한 명이 보내온 이야기이다.


혹자가 말하듯이, ‘1991년 5월’은 김연수 소설의 출발점으로 역사와 진실을 회의하게 된 분기점이다. 많은 이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 혹은 죄의식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김연수는 계속해서 문제 제기와 함께 ‘역사적 개입’이 가능한 서사적 공간을 일구어왔다.

이러한 개입은 그를 작가 이전에 동시대의 한 인간, 문득 우연적 존재가 된 인간의 살아남기 위한 고통스런 방편의 일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김연수의 끊임없는 개입은 폐쇄적으로 고립되어 가는 과거의 시간이 살아 숨쉬며 미래로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하게 한다. 여기에서 화석화되어가는 과거의 시간/진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김연수의 기억/기록 방식의 힘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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