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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로망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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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로망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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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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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뷰]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창비)
▲ 백가흠의 신작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창비)
“아이는 옷장에 숨어 떨어져나간 자물쇠 구멍으로 방 안을 엿본다.”(「웰컴, 베이비!」) 이러한 관음증적 시선으로 독자는 백가흠의 소설을 읽는다. 그 검은 구멍 사이로 펼쳐지는 폭력, 강간, 살해, 시체 유기 등 자극적이고 패륜적인 사건들은 불쾌한 느낌과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구멍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현실과 모종의 ‘가학-피학’적 관계를 맺고 있고, 공모에 대한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곤혹스러움이다.

그 대표적인 불편함과 곤혹스러움은 아마도 백가흠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근친 상간적’ 성관계이다. 그의 첫 작품집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에서 변주되는 폭력과 섹스의 연쇄반응을 작동시키는 힘은 신경증적 남성 판타지에 기대어 있다. 연적(戀敵)인 아버지에 의해 금지된 어머니를 향한 성애적 욕망을 어머니의 대리물인 여자들에게서 갈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폭력이 사용된다. 소설 속 남자들이 여자들에게서 얻고자 하는 성적 쾌감은 ‘어머니와의 성교’이기 때문에, 여러 편의 소설에서 여자들은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연상(年上)의 여자들(「귀뚜리미가 온다」, 「2시 31분」)이고, 이들에게서 강조되는 성감대는 유아기적 고착을 엿볼 수 있는 젖가슴(「광어」, 「배꽃이 지고」)이다.

백가흠의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반응은 전복의 쾌감과 그에 따르는 불안과 혼돈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판타지가 병리적이라 할지라도 견고한 아버지의 법과 질서를 교란시키고자 하는 충동과 파괴에는 아노미 공간을 휩싸는 흥분과 열기가 뒤따른다. 그런데 작품집 『귀뚜라미가 온다』에서 신경증적 남성 판타지는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남근 중심적 억압과 폭력을 재생산하는 가족 로망스로 봉합되는 한계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아들들은 그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완벽한 가족’을 이루려는 근본적인 가족 로망스에 포획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전도와 파괴는 단지 일시적일 뿐이고 근본적인 교란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최근에 발표된 백가흠의 새로운 작품집 『조대리의 트렁크』에서도 가족 로망스에 기댄 판타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매일 기다려」는 가출한 불량청소년들은 힘없고 가난한 노인을 등쳐먹는 반인륜적 사건을 서사화하고 있다. 철거를 앞둔 빈집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 연주를 비롯해 여섯 명의 아이들이 모여든다. 노인은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배급받아 아이들을 먹이고, 폐지를 모아 판돈으로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한다. 그러나 막돼먹은 아이들은 노인을 영악스럽게 이용하고 웃음거리로 만들 뿐이다. 집 얻을 돈마저 아이들의 강도놀음에 빼앗겨 결국 노인은 전철역과 지하도를 전전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물론 아이들은 나쁘다. 그런데 노인은 정말 아무 죄도 없이 아이들에게 이용만 당한 것일까?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노인은 “행복의 조건인 집과 돈이라는 것도 가족이 있을 때 더욱 그 가치가 빛난다”는 가족 로망스에 사로잡힌다. “가족의 탄생”을 열망하는 노인에게 아이들은 막돼먹었을지언정 자신의 로망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웰컴, 마미!」에서 돈으로 신생아를 사서라도 행복한 가정과 결혼생활을 유지하려 했던 진숙씨의 몰지각, 「굿바이 투 로맨스」에서 강간비디오로 협박을 해서라도 여자를 감금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 남자의 과대망상 등 자기기만의 로망은 진실을 은폐하고 폐기처분해 버리는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애인지 어른인지 분간되지 않는 ‘애-어른’이 아무렇게나 방치되고, 그래서 또 다른 ‘애-어른’을 낳고 버리는(「웰컴, 베이비!」, 「웰컴, 마미!」, 「매일 기다려」) 윤리의 사각지대에 놓은 ‘정글’의 삶을 추동해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로망의 법칙이 아닌 무엇으로 헐벗은 삶을 견인해나갈 것인가? 백가흠은 『귀뚜라미가 온다』에서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은폐된 폭력을 폭력적으로 드러내 판타지가 가리고 있는 분열과 광기를 폭로하고 있다면, 『조대리의 트렁크』에서는 폭력과 광기로 견고해진 ‘주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구-도주선을 찾고 있다고 보여진다.

자물쇠의 구멍에서 눈을 떼고, 대리기사 ‘조대리의 트렁크’로 눈을 돌려보자. 「조대리의 트렁크」에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사업가 장영수는 “시스템의 문제”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실패에 직면해 있다. 장영수는 세상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고, 울분에 아내를 살해하고, 노모를 유기한다. 한편 조대리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결혼도 하지 못했고, 안정된 직장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돈도 없고, 치매든 노모만 있다. 조대리의 ‘찌질한’ 현실은 장영수의 ‘피폐한’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동일한 조건 속에서 장영수가 자살을 감행한다면, 조대리는 장영수가 승용차 트렁크에 유기한 그의 노모를 등에 업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여기서 ‘두 노모와 한 명의 아들’로 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가족, 또는 가족이라는 범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새로운 집합의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죽은 동성 애인의 아들을 기르는 미스터 홍(「웰컴, 베이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여자 유도 선수 유진과 민숙(「사랑의 후방낙법」),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힌 남자의 가학적 폭력 아래 친구가 되는 영숙씨와 미주(「굿바이 투 로맨스」). 이들의 관계에서 동성애 코드가 읽혀지고, 그것이 또 하나의 판타지를 구성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의혹은 확정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아직 비결정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굿바이 투 로맨스」에서 영숙과 미주는 남자의 가학적 폭력이 쾌감을 얻는 도착된 성감대를 알아차리게 된다. 남자는 나체사진과 강간비디오를 빌미로 그녀들에게 치욕스러운 수치심을 주고, 거기에서 최대치의 성적 쾌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남자의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는 최대의 무기는 굴욕감과 수치심을 굴욕감과 수치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력화’(無力化)시키는 것이다. 벌거벗은 채 당당히 끌어안고 잠든 두 여자는 더 이상 남자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만을 감행하는 약자들이 아니다. 「사랑의 후방낙법」은 또 어떤가? 서로 끌어안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연습상대가 되어 온몸으로 날아가 매트로 떨어지는 ‘후방낙법’의 사랑법이라는 메타포를 보여준다. 이들이 공유하는 정서의 진폭은 이성애/동성애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사랑/동정/연민/공감의 스펙트럼으로 분화되고 있다.

「웰컴, 베이비!」에서 눈과 귀가 없이 태어나 버려진 갓난아기에게 남자인 미스터 홍은 자신의 빈젖을 물린다. 고양이울음소리를 내던 갓난아기는 미스터 홍의 빈젖을 물고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친다. 이 기이한 만남과 이질적인 것들의 접속. 폐쇄된 세계의 출구를 찾기 위한 백가흠의 도주선은 이질적인 접속, 새로운 배치로 나아가고 있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는 말한다. “예술과 철학에서 사유는 순진무구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운동이다.”(『철학이란 무엇인가』). 왜냐하면 카오스를 재단할 수 있는 면을 작도하는 일은 기존 질서의 한계 지점에서 발생하는 사건이고, 실패를 전제로 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백가흠이 작도해나가는 평면은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이질적인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백가흠의 소설은 낯설고, 새롭고,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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