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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소녀와 지혜로운 샤먼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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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소녀와 지혜로운 샤먼의 공존
  • 의약뉴스
  • 승인 2007.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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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리뷰] 이상은 13집 《The Third Space》
   
▲ 이상은 13집 《The Third Space》
이상은의 13집 《The Third Space》가 나왔다. 수록된 노래의 제목을 빌자면 ‘제 3의 공간’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The Third Space 제 3의 공간’엔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비밀의 문이 숨어있다.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늘 새롭게 살아가는 법, 새로운 인식과 창조로 이어지는 예민한 감성을 살려내는 방법. 그는 우리에게 신비로 가득한 비밀의 화원으로 가는 샛길을 호들갑떨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그 속삭임을 들은 사람은 춤추기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색색의 전구가 반짝이는 배에 올라타면 된다. 마치 크리스마스 전날 우연히 인형의 모임에 참여하게 된 강아지 이달고처럼 장난감들의 대열에 슬그머니 끼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흘러 닿은 곳이 <The Third Space>다.

<담다디>에서 <언젠가는>으로, 또 <공무도하가>로 이어지는 이상은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흔히 말하듯 1988년 강변가요제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아이돌가수가 자의식을 가진 아티스트로 변모했다로 요약하면 되리라. 조금 더 덧붙인다면 미국과 한국, 일본, 영국을 오가면서 국적을 가지지 않은 자유로운 보헤미안으로, 조금 더 사려 깊은 눈을 가진 이의 말을 빌자면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감성을 가진 추방된 유배자’로 설명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핵심은 대중가수에서 아티스트로 변모다. <미운오리새끼>처럼 이해하기 쉽긴 하다. 그러나 실제 과정은 조금 더 복잡할 것이다. 아이돌 대중가수에서 자의식을 가진 아티스트 사이. 이 두 존재 양식 사이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열어나가는 건 과연 어떤 과정일까. 홍대 앞이란 공간과 대중음악의 공간 사이에서, 한국과 일본 미국이라는 나라들 사이. 결국 어느 쪽도 아닌 이상은이라는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그 모든 경계에 서서 말하기를 선택하는 쉽지 않은 여정을 본다. 이 어려움이 이상은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조건의 하나라면 이상은이 열어준 문의 열쇠를 하나 찾은 셈이다.

음반의 사운드는 다채로우면서도 편안하다. 균형이 잘 잡힐 때 느껴지는 편안함이다. 단순히 어쿠스틱한 사운드라는 말로는 많이 부족하다. 이상은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상업적이지 않고 지금 트렌드하고 많이 닮아 있는 포뮬라한 대중가요의 공식을 따르지 않고 미묘하게 다른데 순수해 보이면서도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듣고 아 새롭다고 느껴야 하면서 동시에 쉬워야 하면서 사운드는 진보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미션 임파서블을 거의 완벽하게 수행한 것은 6집 《공무도하가》의 프로듀서 이즈미 와다와 이상은의 오랜 음악적 동반자 다케다 하지무 그리고 전작인 11집 12집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복숭아 프로젝트의 이병훈, 이 3인의 한 일 연합 프로듀서-편곡자 군의 공이다.

   
▲ 음반의 사운드는 다채로우면서도 편안하다.
첫 노래인 <Nocturne>부터 <Nocturne>의 우리말 버전 <야상곡>으로 끝을 맺을 때까지 모두 12곡의 노래들은 단정하면서 다양한 색감을 빚어낸다. 그러나 이 다양한 색채는 화려한 질감을 만들어내는 대신 마치 수채화가 색을 덧입힐수록 투명하게 그 스케치를 드러내는 것처럼 이상은만의 독특한 정서를 선명하게 뽑아내는 역할을 한다. 결국 나는 단아하면서 다채로운 사운드의 향연 속에서 이상은의 노랫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 노랫말은 소녀풍의 로맨티시즘이나 심각한 아티스트의 내면 이야기도 몽상가의 실현 불가능한 꿈 이야기도 아니고 매일의 고된 생활에서 길어온 민중의 질박한 언어도 아니다. 이건 이상은이 일상에서 새로운 감수성을 가지고 창조한 그의 언어다. 마치 <제 3의 공간>에서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또 다른 곳이 있다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건져 올린 다름이고 이 다름은 바로 매일의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며 살아온 충만한 하루하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에세이 아트북 『이상은 Art & Play』의 목차를 보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노래들은 이러한 성실한 모색의 과정이 밑바탕에 깔려있기에 다른 울림을 만든다. 흔히 말하는 예술가로서 자의식 과잉이 빚어내는 불편함과 반복적인 자기 복제가 풍기는 지루함이 사라진 제 3 지대에서 그는 자기만의 색깔을 덧입혀간다. 색을 덧입힐수록 더 투명해지는 수채화처럼 말간 그 투명함을 들여다보면 하나하나의 색깔들이 다채로운 체험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잘 읽을 수 있다. 그에게 매일 매일의 일상은 축복이고 그 과정에서 두려움과 고통 역시 yes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하는 마법이다. 평범하게 스쳐가는 모든 것이 그의 더듬이에 걸리고 그 모든 것이 새롭게 읽히는 것.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몸으로 익혀가는 과정이다.

나는 이 <The Third Space>에서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혹은 견디며 살아가는 생활인의 내공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창조의 고통을 이겨내는 전통적인 작가의 방법이 아니라 꿈꾸는 소녀와 지혜로운 늙은 샤먼이 그- 그녀의 속에서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긍정하는 지를 본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것 혹은 하나의 단계를 넘어가면 그 전의 것을 잊거나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것이 이상은이 오랜 세월 닦아온 밝아진 눈으로 발견해 낸 <The Third Space>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그가 가진 이 섬세한 결들이 가지를 내고 잔뿌리를 뻗어가는 지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느끼는, 또 이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들이 느끼는 축복이 아닐까 한다. 매번 이처럼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주는 이상은에게 굿전이라도 듬뿍 안겨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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