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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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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
  • 의약뉴스
  • 승인 200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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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화려한 휴가>, <마이파더>

   
▲ 직접적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지는 않지만 최근 몇 년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픽션에 대해 다큐멘터리가 갖는 도덕적 우월감이 있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현실-역사세계와 맺고있는 직접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흔히 극영화는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매개를 거쳐 가공된 이차적 진실인 반면 다큐멘터리는 어떠한 매개과정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직접적이고 투명한 재현형식이라 여겨진다. 물론 ‘객관성’ ‘진정성’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고전적 믿음이 의문시되고 다큐멘터리야말로 픽션보다 더 은밀하게, 광적으로 조작적이라는 입장까지 제기되는 현실이지만 평범한 관객의 시선에서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객관성’ ‘진실성’ ‘사실성’과 강력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윤리적인’ 형식이다. 다큐멘터리의 윤리성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을 전적으로 폐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신화화된 믿음이 이론적으로 폐기처분되더라도 진실을 다루는 형식으로서 다큐멘터리의 담론적 권력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은 그래서 가능하다.

직접적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지는 않지만 최근 몇 년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실미도> <그때 그 사람들> <말아톤> <그놈 목소리>에서 <화려한 휴가> <마이파더>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든 지극히 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든 이 영화들은 저마다 다큐멘터리의 영역인 ‘현실-사회세계’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주장해왔고 ‘실화를 토대로 했다는’ 이 영화들의 태그라인은 그자체로 충분한 아우라를 발휘해왔다. 왜? 실화라지 않는가! 어지간한 작가의 상상력을 초라하게 만드는 극적인 사건들로 넘쳐나는 한국사회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기 보물창고인 ‘실화’들은 분명 시장 안에서 강력한 마케팅 포인트이다. 관객은 이 극적인 이야기들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는 점에서 기꺼이 강력한 몰입과 동일시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여기에 제작자들은 소재의 민감성을 은근히 자극하며 흥행에 도움이 될 논쟁이 불붙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에 관한 논쟁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테마가 바로 영화의 윤리적 태도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허구적 미학형식인 영화에서 윤리를 따지고 사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여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지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실화’임을 주장하는 한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작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화가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설명하고 관객은 그에 따라 영화를 선택하고 정서적으로 동화, 혹은 이화된다. 아직까지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몇가지 사례를 돌이켜 볼 때 관객은 <그놈 목소리>나 <화려한 휴가> <마이파더> 같은 영화들을 보며 때로 전율하고 때로 죄책감이나로 연민을 느끼며 영화에 강렬하게 몰입하였다. 이러한 강렬한 몰입이 실화라는 믿음에 의해 한층 강화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떠오르는 한가지 의문은 이 영화에 대한 정서적 몰입의 계기가 과연 사실에 기반한 진정성뿐일까 하는 점이다. 이 영화들은 소위 그들이 주장하는 ‘윤리’의 문제에서 진정 ‘흥행’이나 ‘마케팅’에 대한 계산없이 윤리적이고자 했을까? 이런 의문 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그놈 목소리>에서 짧은 순간 강렬하게 스크린에 반향되던 강동원의 목소리이다. 화면에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스타 강동원. 그는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않으면서도 단 한번의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영화적으로 이 영화의 살인범 ‘그놈’은 도덕적으로 동일시의 여지가 전무한 존재이다. 그러나 강동원이라는 매력적인 스타의 육체를 빌어 등장하는 ‘그놈’의 목소리는 프로타고니스트(유괴된 아이의 부모) 대 안타고니스트(그놈)라는 대립구조 속에서 납치된 아이의 부모에게 정서적 동일화를 요구하는 영화의 기본틀을 근본적으로 교란하며 요동친다. 도대체 이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매력적인 스타에게 그놈의 목소리 연기를 시켜야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케팅을 위한 전략 외에는 그 어떤 윤리적, 미학적 논리도 찾아볼 수 없는 스타마케팅의 극악한 사례이다. 그러고서도 영화는 여전히 입바른 ‘윤리’를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 납치범의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장면 역시 굳이 그 이유를 발견하기 어려운 선정주의의 극치일 뿐이다.

   
▲ 분명히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사건으로서의 광주를 상기시키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된 역사적 경험을 불러와 다양한 ‘해석들’을 시도하게 한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의 정서적 소구력은 온전히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진실에 기반한 것인가?
종결되지 않은 사건인 광주항쟁을 다룬 <화려한 휴가>는 좀더 복잡하다. 분명히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사건으로서의 광주를 상기시키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된 역사적 경험을 불러와 다양한 ‘해석들’을 시도하게 한다. 혹자는 이 영화를 통해 기억의 뒤편으로 보내버린 광주를 떠올리며 역사와 인간, 사회에 무관심해진 현재의 자신을 자책하고 혹자는 이 영화가 ‘사실’을 지극히 축소하거나 평면적으로 ‘현상’을 보여주는데 그쳤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광주라는 한국현대사의 트라우마에 대해 무지했던 이들에게는 억압된 역사가 복원되어 공적인 기억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오는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한편의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사회적 기능의 최대치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며 강렬한 정서적 몰입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껴야했다. 인적없는 밤거리에 트럭을 몰고나와 “우리를 잊지말아주세요!”라고 절규하는 여주인공의 목소리는 ‘잊지말아야 할 것을 잊고 있던’ 나의 죄책감을 자극했고 죽은 인물들이 모두 환하게 웃는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여주인공이 죽은 듯 퍼렇게 안색이 변하며 시무룩하게 생기를 잃는 판타지적인 엔딩부는 살아있는 자들의 부채의식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잊혀진 광주를 현재로 소환해 온다. 이러한 영화적 체험은 기본적으로 ‘광주’라는 한국현대사의 트라우마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배제하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그만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현물로서 이 영화의 효과는 지대하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역시 <그놈 목소리>에 대한 의문과 비슷하다. 과연 이 영화의 정서적 소구력은 온전히 영화가 다루고있는 역사적 진실에 기반한 것인가? 영화의 제작자인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는 “자고로 먹물이 나온 얘기는 재미가 없다”며 철저하게 평범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하려했다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향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 영화에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은 최후의 순간까지 시민군과 함께 도청을 사수한 강직하고 의로운 군인으로 등장한 ‘국민배우’ 안성기라는 존재다. 과문한 나로서는 당시 현장에 이런 인물이 실존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영화사에서 안성기라는 배우가 쌓아온 이미지와 극중 역할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의 비중과 상징적 역할을 감안할 때 그의 역할은 단순히 평범한 개인들 중의 하나를 넘어서 지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유인택 대표는 ‘먹물’들이 등장하면 재미없다고 하지만 기실 이 영화에서 안성기의 비중은 과거 유인택 대표가 제작한 영화들에 등장하던 지식인들의 역할과 아주 많이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사건의 실체를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대중들 속에서 그들은 냉정한 관찰력과 이성으로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관객에게 제공하는 존재들이다. 안성기의 역할이 문제적인 것은 단지 그가 평범한 대중들 속에서 독보적인 영웅의 이미지를 구축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안성기로 대변되는 (시민군의 편에 선) 의로운 군인과 악한 진압군의 이미지를 중요한 극적 대조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정당성없는 신군부의 폭압과 이에 맞선 민중의 봉기라는 광주항쟁의 근본적 갈등의 성격, 혹은 전선을 모호하게 흐려놓는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영화 초반을 지배하는 억지스런 코미디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의 공허함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이들 ‘평범한 시민들’은 그들의 자연스런 일상의 모습이 아닌 억지스런 코미디를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을 뿐이다. 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보여주겠다는 다큐멘터리적인 욕망은 관객들의 눈을 붙잡아놓을 ‘극적인 순간’에 대한 드라마의 요구와 상당부분 배치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란 무수히 많은 ‘극적이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져있고 영화적인 구성에서 이러한 일상은 대개 편집해야 할 ‘죽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실화에 바탕한 '사실적'인 이야기를 표방하지만 그 '사실적인 것'은 드라마적 요소를 위해 진작에 희생되어야 한다. 이제 지루하고 때로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이기도 한 ’보통사람들의 일상‘은 코미디 속으로, 혹은 김상경과 이요원, 안성기라는 세 인물이 맺고있는 멜로드라마적 비극성이라는 장르의 관습 속으로 증발되어버린다.

   
▲ 소위 실화에 기반한 영화들에서 관객의 정서적 몰입은 실화에 기반한 영화의 진정성에 대한 반응인가? 아니면 ‘실화’라는 당의성을 걸친 대중장르의 구조가 유인하는 대로 표출되는 지극히 표준화된 감정적 반응인가?
여기서 다시 한번 물어보자. 관객이 흘린 그 많은 눈물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광주라는 역사적 과거가 현재화되는 순간의 충격과 자각이라는 특수한 체험 때문인가? 아니면 뻔히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통속적이고 비극적인(신파적인) 운명 때문인가? 물론 두가지 동기가 교묘하게 섞여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실제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극히 일부만 보여주고 있으며 그조차도 별다른 해석없이 기계적인 묘사를 하고있다는 판단에 이르면 관객들이 경험한 재미와 감동의 많은부분은 사실상 코미디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장르적 관습에서 기인했다고도 볼 수 있다. 혹시 우리는 실제로는 슬랩스틱적인 유머와 신파적인 멜로드라마에 정서적으로 반응했으면서도 ’광주‘라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반응했다고 착각하고 있는건 아닌가?


미국에 입양된 한국계 주한미군이 사형수 친아버지를 찾아나선 실화를 다룬 <마이파더>역시 이와 유사한 혐의가 있다. 제작사 씨네라인 석명홍 대표는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윤리적 고민을 수없이 거듭했음을 누누이 밝혔다. 그러면서 영화에 대한 자신들의 진정성만큼은 반드시 이해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한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나는 석명홍 대표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상당부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제작자의 의도와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 이 영화의 정서적 소구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60분을 기점으로 확연히 갈라진다. 전반부는 제임스 파커라는 입양아 출신의 주한미군이 사형수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신파적이거나 극적인 장치를 가급적 배제하면서 제임스 파커의 상황과 내면에 집중하는 이 초반부는 사실상 “좀 지루하다”는 관객의 반응이 집중된 부분이다. 반면 아들을 향한 사형수 아버지의 구구절절한 부정을 표현하기 위해 신파적 요소들과 조폭영화적인 관습을 대폭 도입하는 후반부는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기위한 장르 관습이 적극 가동되는 부분이다. 사실상 이 부분이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겠다. 소위 실화에 기반한 영화들에서 관객의 정서적 몰입은 실화에 기반한 영화의 진정성에 대한 반응인가? 아니면 ‘실화’라는 당의성을 걸친 대중장르의 구조가 유인하는 대로 표출되는 지극히 표준화된 감정적 반응인가? 과연 이 영화들을 본 관객은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실화에 기반한 이 영화들은 다른 노골적이고 뻔뻔스런 대중장르영화들에 비해 얼마나 더 윤리적일 수 있는가? 질문과 대답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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