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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팡세(1670)-두 종류의 인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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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팡세(1670)-두 종류의 인간에 대하여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4.02.15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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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클레오파트라의 코,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혹은 지구의 표면이 달라졌다거나 세계의 얼굴이 바뀌었다거나 고대 지중해 역사는 달리 쓰였을 것이다 등 등’.

이 유명한 말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온다. 그러나 문장의 연속선 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단편적인 단상의 결과물이다.

다만 이 문장 바로 위에 ‘인간의 헛됨을 완전히 알고 싶은 사람은 사랑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그 원인은 이른바 그 무엇인지 알수 없는 것이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사람들이 알 수 없을 만큼 하찮은 그 무엇이 온 땅과 왕들과 군대와 전 세계를 흔든다.’

그리고 뒤이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나온다. 군대나 흔든다는 표현으로 보아 로마와 이집트의 전쟁이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나 성격 등과 엮여 있다고 추론할 수 있기는 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보다 더 유명한 말은 누구나 다 아는 바로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쓴 것인데 잠깐 인용해 보자.

‘나는 손, 발, 머리가 없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사유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돌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에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규제에서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 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앞서 클레오파트라의 코처럼 생각하는 갈대 역시 수많은 문장 즉 900여 개의 단장 가운데 나온 말이다. 이것은 잘 짜여진 논문처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가운데 나오지 않았다.

앞뒤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순서가 정확히 맞는 것은 아니다. 이는 <팡세>가 미완성의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숱한 대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순서도 흐름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파스칼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철저한 신의 신봉자라기보다는 교육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기독교에 반대하는 것을 적극 반박하는 호교론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 없는 인간의 비참, 이것은 인간성의 타락에 있다. 신을 믿지 않고 인간 스스로 살아가는, 신의 간섭과 억압을 거부하는 이런 사람을 파스칼은 살면서 주변에서 많이 봐 왔을 것이다.

그런 인간의 삶은 비참하고 절망적이라는 것이 파스칼의 판단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방황하면서 신 없는 인간의 비참을 느낄 때 인간은 위대하다. 그렇다면 신의 위대함을 보여줄 신의 존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 파스칼은 신을 아는 사람과 신을 모르는 사람, 두 종류의 인간을 언급했다.
▲ 파스칼은 신을 아는 사람과 신을 모르는 사람, 두 종류의 인간을 언급했다.

여기에 파스칼은 신의 존재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있다 없다의 문제처럼 명료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본질은 물론 존재 여부조차 알기 어렵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인간에게 이롭다고 파스칼은 주장한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더 효과적인 대응이 있을까. 훈련과 습관으로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 신앙은 신의 선물이며 겸허하게 신의 은총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신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중개자)인 예수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파스칼은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현상처럼 명확하게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게 고민이다. 여기서 나온 이론이 바로 숨은 신이다.

신은 숨어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소수의 구원받은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부름을 받은 자는 눈뜨게 하는 충분한 빛이 있고 버림받은 사람들은 눈멀게 하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파스칼은 신의 축복을 받은 다시 말해 신 있는 자들의 복됨과 신의 저주를 받은 신 없는 자들의 비참이라는 두 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신 있는 인간의 위대함, 이것은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그러기에 더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를 거론한다. 종교에 대한 불신을 존경심으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파스칼이 말하는 호교론이다.

기독교에 대한 공격에 비이성적으로 맞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호소하는 것, 이성으로 설명되지는 않으나 이성으로 호소하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파스칼의 호교론은 다른 호교론과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강요나 협박이 아니고 인간을 관찰하고 나약한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신의 개입 없이도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 사유를 의미하는 <팡세>는 프랑스어를 빛낸 가장 위대한 책으로 칭송받는다. 니체는 유일하게 논리적인 기독교인으로 파스칼을 정의하면서 무궁무진한 가르침을 주었다고 칭송했다.

기독인이든 무신론자든 읽어서 좋은 경구들이 무궁무진하다. 종교와 상관없는 인간관계에 유용한 말들 촌철살인 할만한 경구들이 후반부보다는 전반부에 가득하다.

책의 두께 때문에 망설이는 독자라면 서론만 읽는다는 마음으로 독서하면 무난할 듯싶다. 거기에 파스칼의 진면목이 다 들어 있다. 일상에서 유용한 파스칼의 말들을 몇 개 파편적으로 옮겨 본다.

어차피 책 자체가 그런식으로 불완전하게 편집돼 있으니 아무 페이지나 펼쳐 들어도 상관없다.

“자연스러운 문체를 만날 때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한다. 한 작가를 만나리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한 인간을 만나는 것이다. 반대로 훌륭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보면서 인간을 만나리라 기대했는데 한 작가를 만나면 크게 놀란다.” 그 당시에 파스칼은 문체를 생각했다.

“나를 에워싼 이 우주의 무시무시한 공간들을 본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의 한 공간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할 뿐, 무슨 이유로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내가 위치하고 있는지, 무슨 이유로 나에게 허용된 이 짧은 시간이 나를 앞선 모든 영원과 나를 뒤이을 모든 영원 사이에서 다른 시점이 아닌 바로 이 시점에 지정되었는지 모른다.” 파스칼의 사상의 깊이가 이 정도다.

“인간에게 자신의 생애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영원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그리고 여기 적는 마지막 문장을 주목해 보자. “기독교도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성실한 인간이라도 되자. 그리고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 두 종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신을 알기에 마음을 다하여 신을 공경하는 사람과 신을 모르기에 마음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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