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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광염 소나타(1930)- 범죄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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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광염 소나타(1930)- 범죄와 예술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4.01.29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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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범인들은 천재 이야기에 솔깃하다. 나와는 다른 비범한 인간에 대한 경외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웬만한 실수쯤은 천재니까, 그 정도는 봐주자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무리 식민지 조선 시대라고 해도 말이다. 백성수라는 인물이 있다. 일단 부모 이야기를 해보자. 천재는 유전자가 아무래도 다를 테니까.

아버지는 작곡가로 시쳇말로 알코올 중독자다. 술이 들어갔을 때 그는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그와 반대로 어머니는 헌신적이다. 아마도 신앙도 깊을 것이다. 부모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자. 더 나와봤자 아버지의 야만과 어머니의 사랑 외에는 없다.

백성수는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피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고 유복자로 태어난 성수 나이 30 살이 되던해  어머니는 병들었다. 성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약 짓고 병원에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그럴 돈이 없다. 그의 눈에 담배 가게와 그 안에 있는 약간의 돈이 보인다. 사람은 없고 그 돈이면 의사를 청할 수 있다. 기회를 잡은 성수는 가게를 털었고 잡혔고 감옥에 갔다.

옥에서 나왔을 때 사망한 어머니 분묘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성수는 분노했다. 그래서 그 담배 가게에 불을 질렀다. 통쾌한 복수. 그 모습을 동네 사람뿐만 아니라 쇠락한 예배당에 들렀던 작곡가 K도 보았다.

잠시 후 성수가 헐레벌떡 예배당으로 들어왔고 K는 숨죽이고 그의 행동을 지켜본다. 마침 그곳에는 낡은 피아노 한 대가 있다. 그가 친다. 악보도 없이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건반을 두드린다.

C샤프 단음계 알레그로로 시작하는,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에서 발견할 수 없는 힘과 야성이 넘쳐났다. 이른바 ‘광염 소나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K는 성수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천재 작곡가를 알아본 것이다.

▲ 범죄를 통해 예술을 완성하는 천재의 재능은 현재의 도덕 기준으로는 용서될 수 없다.
▲ 범죄를 통해 예술을 완성하는 천재의 재능은 현재의 도덕 기준으로는 용서될 수 없다.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편안한 상태에서 나오는 곡은 너무나 평범하다. 광염 소나타를 작곡한 작곡가의 곡치고는 너무 수준이 떨어진다. 그런 어느 날 성수는 야밤한 시간에 볏집 낟가리를 발견하고 불을 지른다.

무서운 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거대한 화염에 성수는 흥분한다. 담뱃가게를 불 질렀을 때 오는 광기가 되살아 난 것이다. 그 흥분된 마음으로 미친듯이 곡을 써 ‘성난 파도’라는 걸작이 완성됐다.

그 후 마을에서 몇 차례 불길이 일었고 이는 모두 성수가 한 짓이다. 그러나 여러 번 불을 지르자 이제 불도 성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불 지르고 나서 쓰는 악보는 힘이 없고 그저 기계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다리 아래에 노인의 시체가 있다. 그는 피하지 않고 시체에 올라 타서 주먹질을 한다. 옷을 모두 찢고 급기야 시체를 들어 저쪽으로 던지기까지 한다. 시체는 다시 이쪽으로 던져지고 마침내 머리가 깨지고 배가 터지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다.

불 대신 시체 놀이로 흥분이 고조된 성수는 ‘피의 선율’이라는 또 엄청난 대작을 완성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성수의 곡은 다시 예전처럼 힘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시간’이다. 묘지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시신을 꺼낸다. 젊은 여자의 시신을 능욕하는 성수. 그는 죄를 짓지 않고는 좋은 곡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재와 범죄행위와 예술이 삼위일체로 움직인다.

범인들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정신세계다. 이쯤되면 소나타를 안 들으면 안 들었지 그의 범죄행위를 속된 말로 좌시할 수 없다. 그러나 K와 음악인들은 그의 재능이 너무나 아깝다. 더구나 그는 광인이지 않은가.

감옥에 가둬 죽이는 대신 정신병원에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의 만행은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천재를 살리고 예술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천재를 죽이고 예술을 버릴 것인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는 이처럼 극단적 심미주의로 가득 차 있다.

: 소설을 읽고 베토벤을 들었다. ‘영웅’이니 ‘운명’이니 하는 작품 속으로 빠져드니 과연 천재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 소설에도 베토벤이 두어 번 언급된다. 아마도 그의 광기와 백성수의 광기를 비교하기 위함일 것이다.

영웅이나 운명에 버금가고도 남을 ‘광염 소나타’의 악보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어쨌든 천재가 범죄를 통해 천재적 예술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작곡가 K는 반문한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이 천재에게 벌을 주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리고 스스로 답을 내린다. 천재를 구하는 것이 옳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천재를 이 세상에서 제거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적어도 우리 예술가들에게는.

독자들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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