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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돈(豚,1933)- 분이와 불쌍한 암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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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돈(豚,1933)- 분이와 불쌍한 암퇘지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3.10.27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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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돼지는 측은지심으로 다가온다. 동물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유년 시절 겨울 어느 날의 일 때문이다. 백 년도 더 묵은 팽나무 위에서 돼지의 비명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구경삼아 올라갔는데 나중에는 질려서 내려왔다.

마당의 가운데에 가마니를 깔아 놓고 어른들은 빙 둘러섰다. 어린 나는 더 잘 보기 위해서 나무를 탔던 것인데 그때 돼지의 아픔을 느꼈다. 네발이 묶인 돼지는 쉽게 죽지 않았다. 노련한 도살꾼이 없었기도 했겠지만 백 근이 넘는 돼지는 이승의 하직을 괴성을 지르며 버텨냈다.

도끼날로 만신창이가 됐어도 그 돼지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나중에는 날 선 식칼이 멱을 땄고 커다란 그릇에는 붉은 피가 벌컥벌컥 쏟아져 내렸다. 그 와중에도 돼지는 날카로운 소리를 멈추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것이 ‘돼지 멱따는 소리’인 것을 알았다.

처참했다. 돼지고기를 먹겠다는 군침 도는 환상은 깨졌다. 결국 검은 돼지는 죽었다. 그릇의 피를 사람들은 먹었다. 피 묻은 입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꺼내 간이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하얀 소금을 찍고 한 입 베어 물고는 막걸리를 마셨다. 그 모습을 나는 고스란히 보았다. 이효석의 <돈(豚)>을 읽으면서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팽나무와 간과 멱따는 소리만이 나를 지배했다.

▲ 사랑하는 분이는 도망을 갔고 큰 재산인 돼지는 죽었다. 식이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 사랑하는 분이는 도망을 갔고 큰 재산인 돼지는 죽었다. 식이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슬픈 추억이었고 그 일 이후로 검은 돼지든 흰 돼지든 돼지를 보면 그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돈>은 돼지 이야기지만 잡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행이다. 각설하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은 식이다. (식칼이 나왔으니 식이인가. 우스갯소리는 집어치우자.) 식이는 종잣돈을 모아 어린 새끼 돼지 두 마리를 샀다. 수퇘지는 곧 죽었다. 남은 암퇘지도 행여나 그렇게 될까 봐 더 애지중지 키웠다.

방에 데려와 한 달간 같이 살았다. 하나밖에 없는 그릇에 물을 떠다 먹였다. 그렇게 키우고 나니 겨울이 됐고 제법 암퇘지 모양이 났다. 해서 씨를 받기 위해 핏돈 오십전을 내서 읍내 종묘장을 찾아 나섰다.

이미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터라 이번에는 기필코 씨를 배야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어디 그게 식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냐. 수퇘지는 붉은 입에 거품을 물고 암퇘지 주위를 빙빙돈다. 구경꾼들의 마른 침이 넘어간다.

하지만 식이네 암퇘지는 너무 어리다. 황소와 암탉처럼. 그래서 수퇘지는 일이 쉽지 않다. 급기야 암퇘지는 도망까지 간다. 겨우 잡아서는 빌어먹은 짐승 하면서 식이는 사정 없이 매질을 한다.

바들바들 떠는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아플까만은 식이는 무안하기도 하고 분이 풀리지 않았다. 곧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매질을 하고 다시 우리 안에 암퇘지를 처넣는다. 겨우 일이 성사됐다.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 식이는 분이를 생각하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분이는 들이대는 식이를 못 본채 하더니 급기야 늙은 아비를 홀로 두고 도망을 갔다.

청진이나 서울 어디로 갔다는 소문이 돌지만 확실치 않다. 돈 10원을 박초시 집으로 부쳐 왔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일도 마쳤겠다 식이는 읍내 성으로 들어가 남은 돈으로 명태도 사고 석유도 한 병 샀다.

버스가 지나간다. 식이의 눈이 번뜩인다. 혹 저 버스 안에 분이가 타고 있지 않을까. 라남( 함북 청진)에서 버스 차장 시험이 있다는데 거기로 뽑혀 들어갔나. 마음이 꿀꿀한 식이는 한동안 집으로 가지 않고 읍내 주변을 돌고 있다.

심란하다. 확 자신도 분이를 따라 도망가고 싶다. 여직공이 소원인 분이와 같이 공장에 다니면서 알콩달콩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 기찻길도 있고 다른 길도 눈에 들어온다.

두 줄의 길이 새삼스럽게 식의의 마음을 붙잡는다. 아무 길이나 따라서 가고 싶다. 그때 경적이 울린다. 잠깐 식이는 아차싶다. 분이를 떠 올리다 그만. 한방에서 키웠고 한 그릇에 먹였던 불쌍한 돼지는 기차에 치여 죽고 말았다.

: 돼지는 살림 밑천이다. 잘 키우면 면사무소 서기가 세금을 미납했다고 밥솥을 가져가는 일을 면할 수 있다. 새끼를 치면 쏠쏠하게 용돈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젊은 식이는 보아왔다.

그래서 어린 돼지를 샀고 씨를 붙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도망간 분이 생각에 일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종잣돈으로 산 씨 붙인 돼지가 죽었으니 식이의 마음이 얼마나 속상할까.

작가는 식이와 분이를 맺어 주기는커녕 비극으로 작품을 끝맺었다. 왜 그랬을까. 희망 없는 암울했던 시대의 아픔을 대변한 것은 아닐까. 너무 앞서 나갔나. 아니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슬픈 인생사.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 간의 아픈 사랑.

시골에서 살았던 나는 돼지의 씨 붙이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소들의 그것은 호기심으로 몇 차례 본 기억이 있다. 지금은 다 인공수정으로 처리하니 구경꾼들에게는 볼거리가 하나 사라져 아쉬울 뿐이다.

사족으로 팽나무에서 내려온 나는 한동안 마당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핏자국을 닦고 마을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날 저녁상에 올라온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큼지막한 돼지고기를 찾아서 부지런히 수저질을 했고 입가에 기름기를 닦을 때는 아침상도 이랬으면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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