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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한쌍이 물망초 위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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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한쌍이 물망초 위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9.18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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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길지 않게. 아주 짧게. 여보, 잠깐만. 점례는 돌아섰다. 손에는 여전히 망치와 정을 들고 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아프지 않게. 전 아픈 건 싫어요. 아픈건 이제 참지 않을래요. 점례는 유마의 눈을 피했다. 유마는 점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정신이 돌아왔던 것이다. 마당에는 여름날의 햇살이 가득펼쳐 있었다. 꽃들은 사방에서 아우성쳤고 나비들은 우아한 날개짓으로 서로를 희롱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당신 약속을 지켜줄게. 당신은 내게 동지 이상의 그 무엇이었어. 내 부모와 같은 존재. 피를 나눈 가족. 그래서 결정도 쉽게 내린 거야. 그 약속 지킬게. 아프지 않게. 당신은 벌레와 아픈 것을 제일 싫어했어. 다른 것에는 강한데 왜 그런지 그게 의아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겠어. 당신에게 아픈 것은 바로 생의 마지막 작별이었거든. 흰 나비 한쌍이 물망초 위에서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한 놈이 달려들어서 훼방을 놓았다. 짧은 순간 빛이 흰 날개를 갈랐다. 점례는 따끔한 무언가가 목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나비가 잠깐 목에 왔었나 봐. 점례는 나비와 함께 아주 짤라의 순간 자신의 그림 앞에 섰다. 하늘을 날고 있는 점례와 유마. 하늘 거리던 브라우스는 광목의 흰 옷으로 변했고 서구식 바지는 검은 긴 치마로 바뀌었다. 유마는 권총대신 일본도를 들었다. 웃으면서 구름을 헤쳐가던 유마는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구름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나는 약속을 지켰어. 길지 않고 아주 짧게 처리했어. 유마는 자신의 말을 지킨 것에 만족했다. 난 약속을 지켰다고. 한 번의 내리침으로 족했다. 그는 칼에 묻은 피를 닦지 않고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신음 소리가 들린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프게 해드렸어요. 그리고 한 번 더 점례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내려준 생명을 향해 나비처럼 빠른 동작을 취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는 고개를 숙였으나 기세는 여전했다. 정말로 길어. 오늘은 왜 이리 길지. 유마는 그 길로 다시 내무총리 대신의 관저로 향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오전에는 허탕을 쳤으나 오후에 그러지 않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가는 길이 제법 익숙하다. 그런데 허리춤의 칼은 유난히 무겁다. 피의 무게 때문인가. 유마는 다시 총리의 방 앞에 섰다. 비서가 깜짝 놀랐다. 파리한 얼굴의 유마가 손에 피를 묻히고 아버지 면담을 요청했다. 총리 각하께서는 안 계십니다. 너도 죽고 싶으냐. 유마가 피 묻은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쇼와 덴노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나도 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말이지. 언제 오니. 그건. 그거 넌 안다는 말이지. 조금 기다리면서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누구랑 갔느냐. 육해군 두 장군과 함께였습니다. 유마는 대기석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서가 잠시 후 다가와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직접 닦으려는 듯이 내민 손을 거두고 유마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다, 내버려 둬라. 이것을 아버지께 보여 드려야 한다. 어디쯤 오고계신지 그거나 알아봐 줘라. 그는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군복 입은 그 앞에서는 모두가 부하라도 되는 듯이 그는 짧고 굵은 말을 내뱉였다. 비서는 전화를 하기 위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유마는 고개를 저었다. 거칠게 흔들었다. 앞머리가 흘러내려 눈을 가렸다. 항복이라고. 안돼. 말도 안돼. 아버지라도 항복을 말한다면 이 칼이 용서치 않으리라.

유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난 쇼와 덴노외에는 누구의 신민도, 누구의 아들도 아니다. 이제부터 나는 오로지 천황의 아들일 뿐이다. 그는 군복 상의에 걸린 덴노의 훈장을 어루만졌다. 훈장값을 해야지. 항복이라니. 종전도 글러 먹었어. 이천만 국민 아니 1억 인이 죽는다해도 멈출 수 없어. 덴노 반자이. 유마는 벌떡 일어서서 벽에 걸린 쇼와 사진을 향해 오른손을 척소리나게 올려붙였다. 그 옆에 걸린 욱일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기압이 들어간 날세 동작이 그렇게 보이도록했다. 태평양 군함위에서,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기에서, 만주 산악고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람이 없어도 그것은 펄럭인다. 이제 내가 왔다. 진작 여기에 있었어야지. 있을 자리에 있을 때 사람은 힘이 생긴다. 최후통첩이다. 아버지. 항복을 건의해선 안 됩니다. 두 장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면 아니 입안에서 맴돌기만 해도 이 유마 호사카의 일본도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는 혀를 깨물었다.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명령이었다. 입안에서 피의 맛이 감돌았다. 그것을 삼키고 나서 그는 다짐했다. 길은 오직 하나였다. 길게 뻗은 그 길옆에는 어떤 샛길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길로 가려 한다면 이 칼을 피할 수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그날 아버지는 관저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마는 다시 집으로 갔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오자 어느 정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피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피가 낭자한 채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 그는 어머니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정과 망치, 그리고 노을을 받은 석탑에 반사된 옅은 빛이 부처의 얼굴에 가 닿아 있었다. 유마는 두 사람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하나의 관에 넣었다. 말이 관이지 이불에 싼 것이었다. 그는 장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오려는 그를 그러지 말라고 곧 돌려 보냈다. 아무일 없다. 네가 할 일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 지하실에서 삽을 가지고 온 유마는 자신이 직접 땅을 팠다. 땀이 비오듯이 흘렀다. 늦은 저녁 무렵 유마는 두 사람의 매장을 마쳤다. 방도 대충 정리했다. 다음날 잠에서 깨었을 때 유마는 거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순간 돌았던 정신이 제자리를 잡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은 지나갔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한 행동과 결과를 간단히 설명하고 날이 새는 즉시 파리로 떠난다는 작별 편지를 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편지를 읽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덴토의 항복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자신이 육군대장이었을 때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자고 맹세한 부하 한 명과 함께 할복할지 말지 고민에 쌓여 있었다. 

여기는 파리. 일본을 떠나온지 삼 년이 지났다. 전쟁은 끝났다. 항복이라고도 하고 종전이라고도 했다. 천황제가 유지됐고 군부의 책임은 면책됐다. 전범에 대한 재판은 흐지부지됐고 일본 정국은 빠르게 안정됐다. 아버지의 소식을 뒤늦게 들었을 때 유마는 자신은 이제 우주에 홀로 남겨진 먼지 조각임을 의식했다. 나는 먼지야, 창가에 비치는 무수한 먼지 조각. 조선은 독립됐다. 그러나 일본처럼 안정 대신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좌우 대립이 심각해 남북은 삼팔선을 놓고 이미 내전 상태에 돌입한 것처럼 서로를 적대시했다. 남쪽만의 정부가 세워졌고 미군은 그런 정부를 막후에서 움직였다. 유마는 기지개를 켰다. 거의 다 끝났다. 그러나 아직 마무리가 덜됐다. 그러나 기지개를 켜고 난 후에는 더 쓰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여기서 끝내도 될 것같다. 그래서 종 치자, 하고는 그대로 마침표를 찍었다. 창밖에는 다시 온 여름의 태양이 안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훅하고 뜨거운 열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는 여름꽃이 태양보다 더 불게 물들고 있었다. 점례가 가꾸었지. 심어 놓고 보지도 못하는구나. 그는 펜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감상에 빠져서는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렸다. 숙달된 배우처럼 그는 쉽게 눈물을 흘렸고 한 번 흘린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원고를 마무리했다. 출판사로 가는 길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그러나 그는 삼년 만에 탈고한 기분 탓인지 홀가분했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되레 시원했다. 그는 원고 겉면에 쓰인 '나와 점례 마사코' 라는 제목이 마음이 들어 마음이 들떴다. 편집자가 무어라고 해도 이것만은 절대 바꾸지 말아야지. 내용도 그렇지만 제목은 절대 타협할 수 없어. 무엇보다 조선식 이름인 점례를 넣고 그 뒤에 창씨개명한 마사코를 넣은 것은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잘 한 결정이었다. 저녁에는 이곳 파리 문인들과 맥주를 마시자. 점례 친구 여순이 온다고 했다. 여순은 일행의 주치의 자격으로 비행기를 탔다. 일행은 신생 한국의 보사부장관 말수다. 파리 주재 일본 영사관이 그들을 맞으면 겪에 어울리겠지만 그들은 사전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아, 휴의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도 한국 정부의 국무위원이 됐다니. 그럴만도 해. 그만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온 자도 드무니. 국방부장관은 그에게 딱 어울린다. 여기서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휴의는 두만강 전선에 있지 않았다. 임정의 특명으로 그는 그곳으로 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는 일본으로 잠입했다. 천황을 제거해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비상한 작전이었다. 천황의 일정을 살피면서 디데이를 정하던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덴노의 떨리는 음성을 듣고 그는 왜 하필 지금이냐고 울분을 터트렸다. 한달 만 더 늦게 터졌어도, 한 달 만 더 늦게 원자탄이 터졌어도 하고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그는 바로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에 내무대신이 부하 한명과 함께 술집에서 자결에 앞서 이승의 마지막 술잔을 들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아 다행이군. 그는 품에 있는 권총을 점검한 후 내부대신 앞에 섰다. 그리고 눈치빠른 부하가 괴한의 침입을 알고 덤벼들려 할 때 방아쇠를 당겼다. 부하는 술상에 엎어졌다. 내무대신은 자신도 부하를 그렇게 한 무기를 꺼내기 위해 손을 가슴팍 쪽으로 가져가려다 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옆에 있는 장검을 움켜 잡았다. 휴의는 그의 손을 발로 밟았다. 그리고 조선독립군 총사령관의 이름으로 침략자를 처단한다는 짤막한 말을 남겼다. 내무대신은 그 와중에도 밟힌 손을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휴의의 발은 억셌고 연기가 나는 총구가 그 연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또다른 연기를 내뿜었다. 난 임정의 심부름꾼이다. 네가 덴노의 심부름꾼이었듯이 나도 그냥 심부름꾼에 불과해. 너는 너의 책무를 다했고 나도 나의 책무를 다했다. 총소리가 두 번 연이어 들렸어도 치안을 책임진 경찰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발만 늦었어도.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쉰 휴의는 옷깃을 세우고 그들이 먹다 남긴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이건 내부대신의 명복을 비는 음복이다.

완용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그는 조중 접경에서 조선 독립군과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임정과 미군의 손이 맞지 않아 독립군의 출동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완용은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부사령관에서 작전권을 넘기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초대 내무부장관이 됐다. 그만한 능력과 치안을 담당할 인물은 아무리 수소문해도 없었기 때문이다. 친일 경찰인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통치자는 능력 우선으로 사람을 뽑았다고 말했다. 점례를 제외한 죽마을 세 명의 친구는 독립된 나라에서 초대 국무위원으로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만찬은 화기애애했다. 모두가 유마의 출판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후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라고 미리부터 축하했다. 파리 문단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나와 점례 마사코'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벌어진 조선 독립운동을 일본인의 눈으로 그린 작품은 유일무이했다. 여순은 점례를 추억했다. 말수는 상하이 일제 영사관이 철수하면서 밀정으로 지목해 처형한 포목점 집 윤사장을 넋을 위로했다. 완용은 이제는 다 잊자며, 그때는 너라도 나였다면 어쩔수 없었을 것이라며 여순의 손을 잡았다. 그 옆에 있던 말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완용의 죄를 용서했다. 휴의는 어디갔어. 완용의 튀어나온 눈이 주변을 서성인다. 그래. 휴의는. 그는 모른다. 다른 국무위원들과 함께 있는지 아니면 다른 개인 일정을 소화하는지 유마가 초대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포도주를 마시면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러나 휴의는 그러지 못했다. 다 용서해도 자신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때를 덜 벗었어.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아. 휴의는 여전히 독립군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가 굳이 사람을 쓰면서 까지 초대 국무위원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지위를 이용해 하지 못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덴노를 처단하지 못한 것을 여전히 한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처참한 점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 유마는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다 용서해도 살인죄만큼은 달게 받아야 한다. 그보다도 완용. 이 놈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치안을 담당하면서 정국을 안정시키는 공로가 크다고. 그래 네 공로가 크다. 현재의 공로가 크다고 지난 날의 죄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네가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네 안위를 위한 것이지 조선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같은 말을 했지. 조선인을 우해 봉사한다고. 해방이 되니 또 조선인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다 잊어도 네 악행만큼은 그럴 수 없어. 휴의는 여러차례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진 프랑스 문물을 시찰하는 국무위원 팀에 완용이 낀 것을 보고 잘됐다 싶었다. 국방장관의 자격으로 내무장관과 함께 비행기에 오를때만 해도 완용은 휴의를 경계했다. 그러나 파리 공항에 내렸을 때 완용은 휴의가 어릿적 죽마을 휴의의 심성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밀었다. 어이, 동창생. 그가 손을 까불며 앞서가던 휴의를 불러 세웠다. 그가 손을 내밀었고 휴의가 잡았다. 우린 동창생이야. 완용이 어깨동무를 했다. 휴의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 네 놈의 그 손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유마의 출판 기념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뒷풀이를 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휴의는 완용이 한 잔 더 하자는 제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파리 외곽에서 한 잔 어떠니. 술 맛이 좋은 주점을 내가 알고 있거든. 언제 그런 것 까지 준비했어. 넌 언제나 철저해. 완용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차는 삼 십 분 정도를 달렸다. 한 적한 농촌 마을에 두 사람은 내렸고 곧 작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휴의는 어떤 농부와 말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한 잔 씩 하고 나서 농부가 준비한 마차를 타고 농부의 집으로 향했다. 거기에 백년 묵은 포도주가 있어. 농부는 마차에서 내렸다. 비릿한 냄새가 실려왔다. 닭똥 냄새라는 것을 완용은 알았으나 찡그리지 않았다. 좋은 날에 좋은 술을 먹고 동창생과 회포를 푸는데 닭똥 냄새 정도야. 완용이 조금 비틀 거렸다. 휴의는 그런 완용의 팔짱을 꼈다. 닭들이 훼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닭농장인가. 완용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휴의도 혀 꼬부라진 소리로 받았다. 그도 많이 취해 있었다. 내가 주는 잔을 완용이 덥석 받아 마셨듯이 그가 주는 잔을 마다 하지 않았다. 둘은 잔을 동신에 비웠고 채웠다. 그리고 서로는 용서는 말했다. 이제 그만. 다 그러기로 했잖아. 우리 미래를 위해 이야기 하자. 그게 좋아. 과거를 자꾸 말해서 무엇할래.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나 저나 점례를 한 번 찾아 봐야지. 그러자. 좋은 날에 여순과 함께 일본 여행 한 번 떠나자. 완용의 눈이 풀어졌다. 휴의의 눈도 풀어졌다. 그러나 휴의는 마지막 실만큼은 단단히 쥐고 있었다. 완용이 벽에 기댄 등을 스스로 풀었다. 그 옆으로 휴의도 고꾸라졌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방안을 둘러 보니 완용이 보이지 않았다. 휴의는 밖으로 나왔다. 희뿌여 안개를 뚫고 여명이 비추자 안 보이던 것이 드러났는데 눈앞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 인상적이었다. 닭사료를 주기 위한 거대한 분쇄기였다. 휴의는 거기에 눈을 고정했고 거기에 완용의 눈길이 머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야, 우린 같은 곳을 보고 있구나. 그래. 나도 저걸 보고 있어. 잘 봐둬. 잘 봐두라니. 저건 기억할 것이 못돼. 완용은 지껄였다. 과음을 했어도 정말 좋은 술이었는지 숙취보다는 나른한 피곤함이 몰려 들었다. 해가 떠오른다. 날이 더 밝기 전에 휴의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품속의 작은 칼을 꺼냈다. 그리고그것을 완용의 가슴에 꽃아 넣었다. 넌 너의 일을 했고 난 나의 일을 한 거야. 그러니 원망하지마. 닭들이 푸드덕 거렸다. 어떤 놈들은 한 시간 전부터 울어대던 기상송을 연달아 불러 제켰다. 농장주가 깨어나기 전에 휴의는 완용을 분쇄기에 넣었다. 기계는 자동으로 돌아갔다. 그는 손을 털고 돌아가는 기계음 소리를 들으며 농장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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