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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바람 결에 평소와는 다른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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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결에 평소와는 다른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9.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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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본국은 거쳐가는 곳이었다. 잠깐 부모님을 뵙고 삼 사일 여행을 한 후 바로 파리로 출국하려던 것이 유마와 점례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을 출발할 때 이미 출국 날짜까지 정했다. 그런데 막상 도쿄에 도착하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보았던 평온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승전의 기대 같은 기분은 이미 저버린지 오래였다. 분위기는 어수선 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도둑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경기는 침체였고 상인들은 팔 물건이 없어 애를 태웠다. 서민들은 한 끼 밥걱정에 내몰렸다. 무엇보다 떠도는 공기였다. 음침했고 역겨웠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어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형장의 사형수처럼 핏기가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도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래 이랬었나. 유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벌써 일주일째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유마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각총리 대신의 집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유마는 아무래도 아버지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점례가 따라오려 하자 그는 말렸다. 당신은 어머니와 함께 있어. 여행하느라 지쳤으니 좀 쉬기도 할겸. 그래도 당신 혼자 보내는 건 영 마음에 걸려요. 내가 어린애인줄 알아. 그리고 여기는 내 영역이야. 조선이 아닌 도쿄라고. 유마의 급한 모습을 오랫만에 본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서두르고 있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잖아요. 일단 소재 파악부터 하고 가는 건 어때요. 그러면 늦어. 내가 짐작가는 곳이 있거든. 미리 연락하면 피할지도 몰라. 우연인척 만나는 것도 부자간의 정을 더 뜨겁게 할지도 모르고.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거야.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았어요. 하루 이틀 더 걸릴지도 모르죠. 파리로 가기전에 꼭 뵈야지. 내 안부 잊지 말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시죠. 몸 잘 챙기고요. 하루 한 차례 전화 기억하고요. 알았어. 유마가 나가고 배웅하는 점례가 돌아섰을 때 어머니가 침울한 표정으로 점례를 보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무슨 일이야 있겠니. 그러게요. 어머님. 조금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아니다. 잘못은 유마가 하고 사과는 네가 하는 거냐. 심심하면 이거나 해라. 유마가 나간 후 점례는 어머니가 건넨 자수를 떴다. 학 두마리가 나는 평화로운 그림이었다. 네, 솜씨가 좋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유마 어머니가 칭찬했다. 별거 아닙니다. 변변한 선물도 준비못했는데 부모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부지런히 하면 될 듯도 싶어요. 아니 내일 저녁 쯤이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점례가 점잖은 일본말로 말했다. 넌 일본말도 잘하는 구나. 프랑스어도 한다고. 조금요. 대화할 정도에요. 똑똑하구나. 그래 요즘 조선의 분위기는 어떻노. 평온하다고 할까요. 전쟁 분위기는 아니에요. 이곳 도쿄보다 조용하고 모든 게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유마가 했던 비슷한 말을 점례는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잠깐의 소란은 어느 도시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일상이 다시 오래 지속됐다. 그것이 조선을 떠나올 때 점례가 느꼈던 분위기였다. 거기 일본사람들도 그렇고. 네, 다들 잘 지내요. 삼촌 화랑도 잘 되고 있고요. 요즘 삼촌은 그림 모으기, 불상 수집하기, 고서화 사들이는데 정신이 없어요. 그렇구나, 얹그제 삼촌이 보낸 조선 석탑이 저기 정원에 있다. 멋지더구나. 아침 저녁 보고 있으면 참 고요한 느낌이 들어. 그리고 불상도 있고. 넌 신앙이 있니. 예, 그저. 점롁 머뭇거리자 불교를 믿어 보렴. 안 믿는 것보다는 낫다. 네, 어머님. 그리고, 점례는 잠깐 뜸을 들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사람, 조선사람 구분이 별로 없어요. 모두 함께 평화를 추구해요. 내선일체인걸요. 그렇구나. 그렇게 화합이 잘돼고 있다는 말이지. 네, 어머님. 함께 어울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일등국민 이등국민이 어디있겠어. 반도인이니 조센징이니 하는 말을 쓰는 사람이 나쁘지. 그말을 하고 어머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점례는 다시 자수에 눈길을 주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점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문이 잠기면서 텅빈 집안에 적막감이 돌았다. 손을 놓고 그녀는 거실을 둘러 보다 방안으로 스며드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탑이었다. 그녀는 바늘을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저거 였구나.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점례는 탑을 올려다 보았다. 정교하게 제작된 화강함의 10층 석탑이 그런 점례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군. 저기 불상이 있네. 저렇게 큰 불상은 처음봐. 석탑과 잘 어울려. 점례는 불상 앞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어릴적 했던 나무아미타불을 조용히 불렀다. 부모님, 잘 계시지요. 점례는 걱정 말아요. 불상과 석탑 사이로 거대한 정원석이 아무런 모양도 없이 서 있었다. 자연석 그대로 서 있는 돌은 사람 크기만 했는데 그런대로 정원과 잘 어울렸다. 그는 그 돌에 등을 기대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빠르고 길고 낮게 나는 소음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소리를 키우더니 모든 소리를 집어 삼켰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밖은 사람들의 대피 소리로 어수선했다. 우리도 피해야 하나. 그러나 점례는 방안에 있는 어머니가 나오지 않자 그대로 기댄 등을 떼지 않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누가 저런 맑은 하늘을 보고 있을까. 나 말고 누가 저 푸른 하늘을 보고 있을까. 사이렌 소리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하는 훈련의 일종인지 정말 공습을 받았는지 알 수 없어 점례는 조금 초조했다. 그래도 하늘을 보고 있는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그런 자세가 편했고 등에 닿는 돌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거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사이렌의 혼잡한 소음에 실려 나직하게 들렸다. 점례가 고개를 들고 그쪽을 보지 않았다면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문은 조심스럽게 열리고 닫혔으나 그곳에서 나온 사람의 목소리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가자. 지하로 가야해. 어머니는 큰 소리로 점례를 불렀고 점례가 다가가자 손을 잡고 껌껌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 순간 사이렌 소리가 멈췄다. 혼란 속의 정막이 다시 찾아왔다. 폭발음 같은 굉음도 들리지 않았다. 정원의 참새 몇 마리가 재잘거리면서 날았다 앉았다는 반복했다. 내가 서둘렀나 보다. 그래 정원에서 뭘 보고 있었니. 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탑과 불상 그리고 저기 저 돌에 기대서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요새 하늘이 파랗지. 눈이 부실만큼. 그래요. 전 감수성이 풍부한 애구나. 그러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예술가는 그래야 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어야지. 어머니는 조각을 하셨다면서요. 대학 때 조금했다. 지금은 게을러 서 못해. 정원 어딘가에 있을 거다. 내가 만든 게 어디 있더라. 저쪽으로 가보자. 어머니가 점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니 네가 마치 내 딸 같구나. 딸처럼 여기세요. 어머님. 그래 줄수 있겠니. 그럼요. 전 유마를 평생 은인으로 모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난 어머니의 딸이나 마찬가지고요. 며느리라고 부르고 싶구나. 며르니. 점례는 그 말을 입속으로 되내었다. 그런 말 마세요. 어머니. 유마에게는 큰 그릇에 어울리는 그런 여자가 필요해요. 전 그 사람에 비해 너무 초라해 어울리지 않아요. 네가 어때서 그러니. 난 너보다 더 좋은 여자를 도쿄는 물론 조선에서도 찾기 어렵겠다 싶다. 어 저기 있구나. 저게 내가 만든 조각이야. 네 눈에는 초라해 보이지. 어디요. 이걸 어머님이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래, 정으로 하나 하나 쪼아서 만들었지. 정성이 느껴져요. 도자기를 빚는 모습이지요. 네가 그걸 어찌 아니. 조선 옛 그림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물레를 돌리고 있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너는 칭찬도 잘 하는구나. 정말 그래요. 제 진심인 걸요. 안다. 그걸 의심해서가 아니라 이걸 만들 때 조금 운 기억이 있다. 너 심수관이라는 말을 들어 봤니. 아니요. 이름으로 보니 조선사람인가요. 그렇단다. 그 사람이, 오래 전에 일본으로 끌려왔다. 유마의 선조를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기 이 집에서 아니 이 자리에서 그를 보살폈지. 그 사람입장에서야 잡힌 몰모 였지만 유마 조상은 그렇게 생각하질 않았지. 일본에는 그 당시 도자기 구울 기술이 없었거든. 그 사람이 도자기를 기술을 전파한거야. 고마운 사람이야. 그 이야기를 유마 아버지에게 입이 닳도록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렇게 고마운 사람에게 당신은 뭘 해주었어요. 어. 그러더니 한동안 나를바라보더라. 당신이 해줘. 늦었지만. 그 사람이 조각을 하나 만들어. 이러질 않겠니. 그래서 일년 열두달을 걸려 완성한 거란다. 정말 크기가 어마어마 하네요. 진짜 사람 크기에요. 유마 아버지는 완성된 조각품을 밤 낮으로 보면서 손으로 만지고 저기 이렇게 빛나는 곳 있지.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해진 거란다. 유마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거지. 이런 이야기를 유마도 알고 있나요. 언젠가 한 번 한 적이 있단다. 그런데 그 말 할 때는 유마가 아직 어린 아이여서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지 못할 때였지. 이제 성인이 됐으니 그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해주지 못하면 들은 얘기를 네가 해주겠니. 그러겠어요. 어머님. 그런데 어머님. 조각 기술을 저에게 좀 가르켜 줄 수 있나요. 조각이라. 네가 조각까지. 그럴 수 있지. 화가와 조각가는 같이 갈 수 있으니. 그렇다면. 어디 한 번 해보자. 타고난 솜씨가 있는지. 알다시피 예술가는 노력만으로는 안돼. 유전자를 물려 받아야 하거든. 그걸 믿지. 네 조금은 요. 그림을 그려봐서 알거야. 점례는 날 때 부터 그게 있었으니.

지하실로 내려간 어머니가 정과 끌 망치 등 돌조각에 필요한 연장 몇 가지를 가져왔다. 어디 보자. 어디다 한 번 해보면 좋을까. 아까 봤는데. 자연석, 그 어떤 인공도 없는 조선석탑고 불상 사이에 있는 돌 비석 같은 것은 어때요. 거기는 나도 여러번 생각해 봤는데 무얼 할 지 고민이라 그대로 뒀거든. 그래 거기라면 무언가를 하기는 좋아. 뭐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저야. 말해봐 있으면 내가 거기에 약간 본을 떠 줄게. 나머지는 점례가 완성화면 되겠네. 이런 건 안 되겠지요. 점례가 지갑을 꺼내려다 말고 도로 집어 넣으며 말했다. 그게 뭔데. 나좀 보면 안 되겠니. 소녀때 찍은 사진이에요. 제가 미술 공부 하러 떠날 때 시골 읍내서 찍은 건데. 십 년 전 사진이라서. 많이 바랬다고. 어디보자. 우리 점례 소녀적 모습이라. 촌년이라고 놀리시면 안 되요. 그러마. 점례는 어렵게 빛 바랜 사진을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정말로 촌스러운 처녀 하나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한 두 눈을 넓은 이마가 받쳐 주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조금 웃을 걸 그랬나. 네 모습을 조각하고 싶다고. 그런 건 아니고요. 이게 조선소녀들 모습이거든요. 다들 이런 모습이거든요. 단발 머리에 핀으로 한쪽 머리를 고정하고 두려운 시선으로 사진기를 보는 게 거의 동일해요. 상의는 흰 광목에 아래는 검정치마. 흰옷 입은 조선 처녀가 참으로 단정하구나. 나도 조각을 하면 로댕처럼 얼굴을 가리고 생각에 빠져 있기보다는 정면을 보면서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울고 있는 듯한 그런 걸 하고 싶었거든. 설마 이 사진찍고 운 것은 아니지. 찍을 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겁을 먹었을 뿐이고, 그리고 두려웠어요. 그게 지금의. 지금도 그렇느냐. 예, 조금 그런 마음이 들어요. 사진을 보니 그 때 그 감정이 바로 이 감정이다 싶어요. 그렇다면 당장시작하자. 마음은 곧 예술로 표출 되거든. 어머니가 정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쪼기 시작했다. 망치 소리. 그 때 다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황급하게 지하실로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작게 시작하다 절정에 이르면 다시 작아졌다 다시 커졌다를 반복했다. 음악적 리듬을 타는 것이 마치 곡에 맞춰 노래를 불러도 좋다는 신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상황이었다. 멀리서 폭음음이 메아리처럼 울렸고 정원밖에는 집에서 나온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까처럼 뚝 멈췄다.소나기가 내리다 빛이 들면서 쨍하고 밝은 날 처럼 사이렌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익숙해 져야 해. 지진처럼 말이야. 망치를 든 어머니의 눈에 안도감이 돌았다. 한동안 조용해 질 것 같지 않니. 그랬으면 좋겠어요. 점례의 바람대로 그 뒤로 정말로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반복되는 소리에 감을 잡고 하는 행동이었다. 혹시 모르니. 폭발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아까 내가 내려간 지하실 있지. 거기로 달려가. 긴장이 덜 풀린 점례에게 어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크게 하면서 거긴 피신처야 피신처,하고 말했다. 거기라면 어떤 방공호보다 안심할 수 있어. 식량도 있고 촛불도 있고. 한 달 정도 안 나와도 돼. 거기서 유마를 기다려. 어머니도 같이 가셔야죠. 나는 지하가 싫어.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답답한 지하실로 도피하고 싶지 않다. 자, 이리와 봐. 망치는 이렇게 잡고. 정은. 잘 때려야. 헛손질하면 손가락에서 피가 난다. 조심하면서 힘의 강약을 주고. 한 번 해봐. 그렇지. 점례는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안다고 유마가 그러더니 거짓말이 아니네. 됐어. 그림을 그릴 때 삽화를 그리지. 머릿속의 것을 구상하면서. 조각도 마찬가지야. 윤곽을 어슬프게 그려. 구도는 말 안해도 알지. 이 돌의 크기와 소녀의 얼굴이 딱 어울리게. 일단 백묵있지. 그림은 네가 그려봐. 점례는 백묵을 들고 우뚝한 자연석 앞에 섰다. 눈 높이에 잘 맞았다. 그래서 사다리나 의자가 필요없이 바로 선 채로 선을 그어 나갔다. 역시 파리 유학생 다운 솜씨네. 지켜보던 어머니가 감탄을 했다. 대단해. 얼굴을 마져 해봐. 사진처럼 슬픈 눈으로. 이마에 땀이 흘렀다. 긴장하지 마. 내가 심사위원은 아냐. 파리 전람회 출품하는 것도 아니니 편하게, 편하게. 어머니가 옆에서 주문을 넣었다. 어디보자.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좋아, 좋아, 더 손 볼 것 없네. 이리와 봐. 여기 맷돌이, 저기 돌과 같아. 단단한 화강석이거든. 눈을 파봐. 코를 세워봐. 눈동자를 새겨. 연습이다. 연습을 해야 하거든. 제가 윤곽을 할 테니 어머니가 얼굴을. 전 얼굴을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럴테지. 망치를 잡은지 한 시간도 안 됐으니. 돌조각은 그림과는 또다른 재미를 주었다. 전혀 다른 분야야. 이걸 동시에 할 수 있다니 천재는 따로 있는 거지. 회화도 되고 조각도 되고 그런 사람이 어디있어. 점례는 어머니가 잠시 방에 들어간 사이 그런 생각을 했다. 재미 있는 건 사실이야. 어 팔이 아프네. 망치의 세기, 방향. 돌에 생명을 넣는다. 점례가 고개를 들었다. 부처님의 인자의 모습이 점례와 마주쳤다. 웃고 있어요. 점례는 힘든데. 부처님은 말없이 한 번 더 웃어 주었다. 석공은 어떤 심정으로 부처님을 만들었을까. 나는 어떤 심정으로 소녀상을 조각하고 있지. 그것도 내 모습을. 

유마는 그날 저녁에도 연락이 없었다. 어머니와 점례는 하녀가 차려준 밥상을 물렸다. 점롁사 뜨개를 잡았다. 유마는 아마 내일도 들어오기 어렵겠다. 연락을 받으셨어요. 아니, 전화는 올거다. 그런데. 점례가 조각을 완성할 때까지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도쿄가 그렇게 큰 가요. 여기도 도쿄 시내니 유마가 간 곳이 그렇게 멀다고는 할 수 없어. 아마 충격을 받았을 거야. 여리지만 유마는 독한데가 있거든. 너도 잘 알거야. 그가 상처를 심하게 입지 않았으면 해. 어머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표정이 네 어릴적 소녀 사진 속처럼 두려움에 가득차 있지. 눈을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하고. 아니,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유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요. 그러지 않아야지. 아마도 지금쯤 아버지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육사 동기들을 만나 무언가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무슨 결정을 내린다고요. 어머니. 유마는 저와 삼 일 후 쯤에는 파리로 떠나리고 약속했어요. 조선을 떠나올 때 그랬거든요. 그 약속은. 아니다. 어머니 무언가 일이 터진다는 게 어떤 건가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정말 예사롭지 않아. 도쿄 시내가 불바다가 됐어. 미군 폭격기가 와서 치고 갔거든.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아까 사이렌은 아마도 두 번째 공습일거야. 너도 소리를 들었지. 이건 태평양전쟁을 이기느냐 지느냐와는 전혀 달라. 본토가 공격 받고 무너지면 일본이 항복하는 거지. 그럼 조선처럼 일본이 미국 식민지가 될까봐 걱정이다. 유마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있어. 파리로 유학을 갈지 일본에 남아서 어떤 것을 꾸밀지. 그럴리가요,어머니. 이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유마는 전쟁과는 손을 확실히 끊었어요. 아니다. 그건 조선에 있을 때의 일이고. 거기서 여기로 오지 말고 다른 길로 파리로 갔다면 좋았을 것이다. 일본에 와서 아버지를 만나고 군부의 인사들과 접촉하고 육사 동기를 만나고 있다면 그건 없던 일이 된다. 어머니. 점례는 절망적이었다. 파리를 갈 수 없다면. 너라도 가는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다. 네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유마의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 전 혼자는 가지 않겠어요. 유마 없는 파리행은 저에겐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그건 고집부릴 일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다. 생명이라고요. 그래, 우리 가족의 생명. 그리고 점례 너까지. 그러니 넌 내가 파리행을 알아 보는 즉시 여기 떠나야 해. 어머니, 조각은 어쩌고요. 조각. 그렇지. 네가 못하면 나머지는 내가 완성하마. 나중에 여기 와서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 보렴. 어머니. 점례가 유마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내 어머니의 손이다. 나를 낳은 내 어머니의 손도 이렇게 작고 연약했다. 가더라도 늦었으면 좋겠어요. 유마가 올 때까지요. 유마가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온 다면. 온다면. 그건 이리 끝난 것을 의미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지. 어머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렸어. 거기서 중국을 거치거나 홍콩을 통해 파리로 갔어야 했는데.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 두렵다기보다는 점례는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하나의 선택이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천황을 만나고 있을까. 일찍 자고 싶다. 너도 자거라. 뜨개는 그만두고. 점례는 일어섰다. 하녀가 내 침구를 깔아 놨을 거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네 하고 싶은 걸 해. 조각이라고 왜 말씀 안하세요. 그래 너 하고 싶은 조각을 해. 시끄럽다고 화낼 사람 없으니 마음껏 망치질을 하렴. 그 말을 하고 나서 어머니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워. 마음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어. 대체 무슨일이지. 하루 아침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나. 파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유마는. 마무리 글을 써야 한다고 서둘렀던 사람인데. 구상까지 다 끝났다고. 원고지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유마가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떠났을 때 대본영 소속 육군장성과 해군장성등 군부 인사들은 한자리에 모여 잇따른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서로는 머리가 지끈거려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종잡을 수 없는 상대를 비웃었다. 그런 썩어 빠진 정신으로 전쟁을 하니 지는 거 아니오. 누가 할 소리를.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나 알고 하는 소리요. 다들 조용히 하시오. 이 자리는 책임을 전가하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사태를 뒤집어야지요. 그들은 안간힘을 썼다. 오랜 군생활과 자신의 직책을 생각해서인지 신중하려고 정신을 집중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고 결론을 냅시다. 어떻게 해서든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요. 이거야 원 참. 도쿄가 공습을 받다니. 사망자 수를 나열하는 것이 무슨 의미요. 이러다 우리까지 죽을 판국인데. 내무대신이 듣고만 있다가는 터지는 울화통을 견딜 수 없어 끼어들었다. 내가 옷을 벗을 다고는 하나 나도 장군까지 지낸 예비역이오. 현역들이 이리 갈팡질팡해서야 쓰겠어요. 그러니 정치인들이 결정을 내려줘야 지요. 전투는 우리가 하지만 전쟁은 당신들이 아니오. 당신들이라고. 이 사람이. 내무대신이 육군대장을 노려봤다. 그러지 맙시다. 우리끼리 싸우다니 말이 될 말이오. 해군대장이 중재에 나섰다. 미군과 일단 협상합시다. 시간을 벌어야지요. 황실은 어떤 입장인가요. 내 그말을 하려고 했소. 천황폐하 께서는. 나더러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신들 정치인들이 군인들과 잘 타협해서 사태를 마무리 지으시오. 결국 공은 우리가 받았어요. 어떤 결정을 하든 천황 폐하께서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어요. 어떤 결정이라니. 거기에 항복도 포함된 겁니다. 공군 대장이 말했다. 허허 이 사람이. 항복이라니. 누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합니까. 그러면. 지금 세시간째 회의 중입니다. 결론을 내야지요. 머리만 쥐어짜는 시늉을 한다고 공습을 피할 수 있습니까.허허 말 조심 하시오. 조심하니 이 정도요. 이것 참. 내무 대신이 혀를 찼다. 나에게 맡기시오. 해군 대장이 나섰다. 작전권을 다 주시오. 내가 할 소리요. 육군 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될 말이오. 전쟁은 해군이나 육군 위주로만 할 수 없어요. 공군이 없으면 제공권은 어찌됩니까. 그래서 도쿄 하늘이 뚫렸나요. 이거 한 번 해보자는 겁니다. 내무대시니 책상을 발로 걷어차면서 일어났다. 에잇, 난 다시 황제폐하께 가보겠소. 그동안에 결론을 내리시오. 내무대신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아니 화를 낼 것을 우린데. 저 사람이 왜 저래. 이거 참 미치고 환장하겠군. 

이런 모습 어디서 많이 봐 오지 않았던가. 이것은 패전하는 군대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이기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던 것이 지고 있으면 싸우게 마련이다. 이길 때는 이유가 비슷비슷하고 질 때는 각자 이유가 다르 거든.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요. 지금 그런 것을 논할 만큼 한가한 게 아니오. 지금은 종전선언을 하느냐 아니면 결전을 이어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군부 주도권을 놓고 다툴 시간이 없어요. 여기는 노획물을 처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해군대장이 노골적으로 힘겨루기 싸움을 끝내자면서 화를 버럭냈다. 끝내더라고 대표가 있어야 할 것 아니오. 육군대장이 맡겠소. 태평양전쟁의 패전은 바다의 패배요. 뭐시라고. 이거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군. 나이 많다고 우격다짐으로 밀고 가기요. 해군참모총장은 속으로 부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대놓고 삿대질을 했다. 에잇. 총이나 쏴볼까 보다. 정말로 그는 총을 쏘기 위해 혁대에 매달린 권총을 꺼내 들었다. 갈기고 싶어요. 이거 왜이래. 참으시오. 엣잇. 그는 총의 뒷부분으로 식탁을 세게 내리졌다. 생각같아서는 누구라도 반대하면 바로 처형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덴노만 아니라면 이 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왜 육군출신이 해군을 옹호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디서 뇌물을 처 먹었나.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해군대장은 모자를 매만졌다. 오늘따라 모자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무거워. 좋소. 그러면 싸울 함대는 있소. 없소. 함대야 다시 만들면 되는 것이고. 뚝딱하면 나오는 그런 함대가 있어요. 하하하. 육군 대장이 비웃었다. 해군대장은 반박하지 않았다. 우리 전열을 정비하고 기습합시다. 미국쯤이야 이런 마음으로 한 번 붙어 봅시다. 그러나 그 자신도 그것이 메아리 없이 허공을 맴돈다는 것을 알았다. 억지를 위한 억지였다. 그래야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내무 대신이 다시 쇼와 덴노를 뵈러간다고 했으니 돌아올 때 까지 각자 더 고민해 봅시다. 우리의 생각을 달라고 왔는데 이렇게 싸우고만 있으니 어떤 보고를 올렸을지 궁금해 지네요. 뻔 한 것 아니겠어요. 군부를 믿지 마세요. 자기들 끼리 공을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저울을 재고 있다니 까요. 이러다가는 폐하의 안위도 위태롭습니다. 그렇게 급합니까. 오늘 당장 미군이 도쿄에 진군한답디까. 아니면 핵무기라도 쏜다고 협박했나요. 사정을 알면 속시원해 대답하세요. 내각총리대신은 전선에서 괴멸적 참패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고 있었으나 그 말만큼은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덴노가 지금 나를 보고 있다. 내 입만 보고 있어. 패전했습니다. 항복합시다. 이 말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내무대신을 마른침을 삼켰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 최후통첩이 받았어요. 이십사시간내에 답장을 줘야 합니다. 주지 않으면. 도쿄는 불바다가 되겠지요. 물론 가정이지만요. 수 분내에 수 십만이 죽겠지요. 핵공격도. 이것도 물론 가정이고요. 건물은 폭삭 가라 앉고 사방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피고.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가정이라고 했으나 내무대신은 정말로 자기 머리위에서 핵폭판의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군홧발을 딱딱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찍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대후에는 군대서 하던 버릇을 지우기 위해 제일먼저 했던 것이 군화발 부딪치는 것을 멈추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오래 습관이 지금 감히 덴노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무슨 황공한 일인가. 나도 떨고 있어. 이런 때 유마가 있으면 좋을텐데. 그 놈 얼굴이 보고 싶군. 여자 같은 놈. 그러나 이런 때는 남자로 돌아오지. 예술을 발로 짓밟고 아버지에게 달려오겠지. 조선 여자는. 그래 조선 여자도 그렇게 할 거야. 누구 피를 받았는데. 우린 대대로 이어온 사무라이 전통이 있어. 여차하면 베고 마는 그런 강한 정신이 있다고. 무얼 그리 혼자 생각하시오. 데노가 기침을 하면서 내무대신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시겠지만 소장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어요. 결사항전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이 천만명을 가미카제 특공대로 쓰면 미국을 잿더미로 만든다고, 기세가 대단해요. 1억 인구로 밀자는 말까지 나옵니다. 찌라시가 도쿄 시내에 뿌려졌어요. 우리 7천만, 조선과 대만 합쳐 3천만이 힘을 모으면 된다 뭐 이런 내용으로. 어젯밤에 자신들이 모시던 사단장을 처형까지 했어요. 젊은 장교들은 점점 더 과격하게 나올겁니다. 가담하지 않는 자에 대한 본보기로 그랬군요. 이를 어쩐다. 그들이 여기로 쳐들어 올지도 모르겠군요. 뭐시라고요. 사단장을 처형한 젊은 장교들이 황궁까지 들어온다고요. 그래서요. 나까지 처단하겠다고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폐하. 감히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허허. 난 젊은 장교들을 화나게 한 일이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걸 보증합니다. 쇼와 덴노의 얼굴이 이그러졌다고 조금 펴졌다. 그러나 입에  무언가를 넣은 것처럼 우물거리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무고한 시민은 살려야지요. 얼마가 죽어도 상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역시 민간인다운 발상입니다. 내부 대신은 군복을 언제 벗었어요. 한 십년 됩니다. 그럼 민간인 다됐네. 아닙니다. 옷만 갈아입으면 전사가 됩니다. 제가 군복을 다시 입을까요. 됐어요. 됐고. 전시에 민간인 걱정이라. 덴노가 다시 말을 다 끝내지 않고 우물 거렸다. 내무대신은 못들은 척 무시했다. 종전을 한다면. 천황이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대신 우리는 첫번째로 천황제를 지길 겁니다. 그런다음 군부의 기득권을 확실히 챙기고요. 그런 다음에는. 글쎄요. 세번째 부터는. 아직 생각을 덜 했습니다. 천황제만 지켜진다면. 쇼와 덴노가 내무대신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무대신은 천황제보다는 군부 기득권만 지켜진다면 하는 말대신 천황을 끌어들였다. 이 둘을 위해 지금 당장 손을 들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아니고요. 우리가 손들 시기로는 일러요. 그렇지요. 준비를 하고 그래야지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연승과 태평양 전쟁의 초반 기세를 생각하면 하늘이 뒤집어 질 일이지요. 그래도 종전이나 항복을 생각해야 합니다. 항복이라. 하게 되면 해야지요. 나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신사 참배나 하고 옵시다. 머리도 식히고. 결단이 필요할 때는 바른 정신이 필요하지요. 정원을 좀 걸읍시다. 시간을 이런 식으로 끌수도 있구나. 내무대신은 순간 덴노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다고 전세가 역전되나. 더 험한 꼴만 당할 수도 있어. 덴노의 위치가 위협받고 군부도 안전하기 못해. 내각총리대신은 일어서려는 쇼와의 팔을 잡았다. 제가 안내 하지요. 이러지 마시오. 난 아직 젊다오. 그러나 내무대신은 그냥 하는 소리로 알아듣고 억지로 팔짱을 꼈다. 팔이 가늘군. 이 가늘팔에 대일본제국의 명운이 달려 있어. 어깨는 또 왜리 가벼워. 번쩍 들어 오리면 역기처럼 올라가겠어. 그때 유마는 아버지의 면담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비서실은 내무대신의 아들이 온 것을 아지 보고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째 유마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벽에 걸린 역대 덴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잘 그렸군. 점례도 초상화를 그f려보면 어떻까. 저 정도는 하겠지. 지금 정원에서 두분이서 말씀 중이십니다. 전갈을 했으니 기다려보시지요. 비서가 전하고 나서 돌아갔다. 유마는 별 동요없이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찾아보라는 말인지 곧 돌아오니 그대로 앉아서 기다리라는 뜻인지 알지 못했다. 당황한 비서를 불러세워 물어보기도 귀찮아진 유마는 덴노의 초상화를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사주경계를 하듯이 다시 보았다. 운명이라는 늘 이런 거야. 저 사람들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구나. 천황의 대기실에서 유마는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것이 어떤 행위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습관의 힘에 이끌려 입에 문 불을 붙였다. 길고 긴 호흡. 그리도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의 왜 천황의 비서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을까. 아버님이 여기 계신가요. 네, 지금 폐하와 환담중이십니다. 이 짧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간 후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하나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방금전에 자신이 이곳에 도착했다는 착각이 들정도로 유마는 가는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앞에서 선 어떤 존재를 알아 차렸을 때는 손에는 빈꽁초만이 들려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길 왔으냐. 첫마디는 무뚝뚝했다. 아버지. 내가 묻지 않느냐. 네가 여기에 왠일이냐고. 두번째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걱정돼서 왔습니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난 네가 조선에서 파리로 가기를 바랐다. 너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이렇게 왔구나. 보니 좋다. 저도 그래요 아버지. 지금이라도 파리로 돌아가라. 그 조선여자도 같이 왔느냐. 지금 어머니와 집에 있어요. 왜 집에는 돌아오지 않는 거에요. 그럴 시간이 없다. 천황 폐하를 지금 막 만나고 나왔다. 아까 폭팔음이 들리던데 도쿄도 공습을 받고 있나요. 유마야, 넌 군복을 벗었다. 예비역이라는 말이다. 전쟁은 군인이 하는 것이고 정치인이 한다. 우리 집에서 전쟁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 파리고 가라. 조선여자와 함께.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그 명령 말고 다른 명령은 다 들을 준비가 돼 있어요. 이제 저도 군인입니다. 그러지 마라 애야. 지금 군인은 넘쳐난다. 전선에서는 부족하다고 난리지만 여기는 별 단 군인들이 사방에 있다. 네가 군복을 입는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애비에게 맡기고 빨리 파리로 가라. 못 떠날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버지, 저는 이 순간부터 예술가도 아니고 글쟁이도 아니고 조선여자의 동지도 아닙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아들 천황의 신민일 뿐입니다. 허튼 소리 마라. 그 말 할려거든 당장 내 앞에서 꺼져. 어서 집으로 가라. 짐챙겨서 떠나.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그 땐. 부자간의 정을 끊겠다. 네 어미도 데려가라. 혼자라면 내가 여기서 더 정치를 잘 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가 일어났다. 유마는 아버지가 가는 발걸음 수를 하나 둘 세었다. 18발자국 까지는 셀 수 있었으나 그 다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간 후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주어 들었다. 언제 부터 이것이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흘리고 가셨나. 대일본 제국 승리 눈앞. 패망이 눈 앞이라는 말이겠지. 여론이 양분돼 있다고. 포츠담 선언을 받자는 쪽과 끝까지 싸우자는 쪽이 대립. 소장파 장교들은 구데타를 일으켰구나. 심각하군. 조선독립군은 두만강에서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네. 상세한 건 없어. 조선에서 조차 이 지경이군. 이거 큰일 났군. 그런데로 이긴다고. 그 옆의 육군대장 얼굴은 왜 이래. 군인의 얼굴이 아니라 패장의 모습이다. 사기로 먹고 사는 군인이 핏기가 하나도 없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려운 것은 나름대로 짐작했지만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다. 유마야, 짐꾸려서 빨리 떠나라. 신문의 글자는 더이상 유마에게 들어오지 않고 다만 아버지의 말만이 귓가에서 쟁쟁쟁하고 울렸다. 

군인이 항복한다고. 우리가 질 수 있다니. 날선 일본도가 유마의 혈관을 타고 사방을 휘젓고 있다. 내 몸엔 사무라이 피가 흘러. 아버지도 그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피를 물려 받았어. 이제 네 차례라고 말하는 군. 군복으로 갈아입자. 있을까. 조선에 있나. 아냐, 여행 가방에 있을 거야. 제대할 때 가져온 군복을 난 늘 챙겼어. 파리에서도. 봤어. 틀림없이 점례가 곱게 접어 가방에 넣는 것을. 집에 가야겠군. 아버지는 군부가 모여있는 곳으로 갔겠지. 그곳에서 항복도장에 서명하라고 군인들을 달랠까. 결사항전을 외치는 장군은 있을까. 그 자리에서 할복하면서 덴노를 위해 마지막 까지 충성을 다하자고 전의를 불태우면 최후를 맡는 사령관은 나올까. 여기 분석 기사가 있군. 상자를 쳐 놓은 걸 보니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이런 해석은 또 뭐야. 조선독립군의 대규모 남하를 막기 위해 태평양 전선의 중요부대가 후방으로 차출됐다고. 그것도 이개 사단이나. 그래서 그쪽 방어선이 뚫렸다고. 휴의하나 잡지 못한 내 책임이 크군. 난 그자를 여러 차례 잡을 기회가 있었어. 점례도 알고 있었고. 그런데로 난 그러지 않았어. 점례의 첫 사랑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없었지. 그녀의 삶을 내가 아는데 어찌 그러겠어. 내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이라면 모를까. 내 책임야, 아냐 점례의 책임이야. 그녀는 왜 휴의의 존재를 속 시원히 까발기지 않았을까. 그가 있는 곳을 아니 체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지난번 덕영산장 폭발도 그 자의 소행이었어. 대신들,문인들,관료들 다수가 사망했지. 그때라도 체포했어야 하는데. 난 점례를 너무 의식했고 점례는 그런 나를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무시했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야. 조선총독은 뭐하고 있지. 술집에서 기생을 끼고 뒹굴고 있을까. 헌병대사령관은. 그리고 완용이라는 조센징은 큰 소리만 치고는 매번 허탕을 쳤어. 난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서지 않고 비겁하게 뒤로 숨었지. 예술이라는 이름아래 난 여자처럼 행동했어. 소극적을 넘어서 직무를 유기한 거야. 이제서야 나로 돌아왔어. 나는 육군대장 출신 아버지의 아들이야. 나 역시 아버지 모교인 육사를 나왔고 아버지처럼 별을 달았어. 그런 내가 어리석었어. 조선여자 하나 때문에 눈이 먼거지. 아니 점례를 탓할 필요는 없어. 점례는 점례고 나는 나니까. 그런가. 아니야. 나와 평생을 약속한 동지야. 내 아내로 호적을 올리지 않았으나 나와 한 몸이고 우리 가족이야.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고 점례. 난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가족을 생각할 때 언제나 점례를 포함했어. 언제인지는 모르지. 아마도 전선의 숙소에서 함께 생활할 때 부터 었을 거야. 그로부터 수 년을 흘렀고 내 마음은 변치 않았어. 더 견고해졌지. 다만 전쟁의 양상이 나를 바꾼거야. 난 예술을 잠시 유보하고 전쟁에 뛰어 들겠어. 조선 독립군은 너무 무시한 내 실책이었어. 조선 총독을 너무 믿었고 헌병사령관 아니 완용에게 기댄거지. 그가 해낼 줄 알았는데. 휴의를 여러 차례 놓치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어. 점례는 그 자를 체호하거나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고. 점례의 책임이라면 그걸 거야. 아니야, 그걸 내가 알고 있었는데도 눈을 감았으니 그녀 책임도 아냐. 안일한 거야. 누굴 탓하겠어. 이 시국에. 남탓 하기에 앞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지. 유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기 위해 닥치는대로 걷어차고 싶었다. 무엇이든 앞에 나타나면 일본도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싶었다. 숨어 있는 분노의 질주 본능이 살아나고 있었다. 소인배처럼 펑펑 목놓아 울어 버리고 싶었다. 공간이, 그걸 허락하지 않은 것이 원통할 뿐이었다. 혼자만의 방이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꺼이 꺼이 실컷 울고 나서 차라리 죽어 버릴까. 일본 육사에서 배웠던 악과 깡은 어디로 갔지. 그리고 초기 전선 투입 당시 보였던 살의는. 칼집에서 칼을 꺼내야 한다. 그림이다 글이다 뭐다 하면서 자신의 군인 정신이 흐리멍덩해진 것을 깨부수자. 그래, 다 그것 때문이야. 내가 했어야 하는데. 내가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대본영 육군 대장은 됐을거야.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난 죄인이야. 국가의 대역죄인. 유마는 분노하다 울다 가슴을 치다 자기 뺨을 번갈아 사정없이 치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직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의 주범은 점례다. 아니 우리 가족이다. 가족 때문에 나는 올가미에 걸렸다. 그걸 자르려면. 그녀가 휴의를 감췄다. 그 자는 탈출해서는 상하이 독립군 사단을 몰고 두만강을 넘었다. 완용의 부대는 박살났다. 그를 막기 위해 우리의 귀중한 군대가 전방이 아닌 후방으로 빠졌다. 내가 반드시 휴의란 놈을 처단하겠다. 난 다시 조선으로 간다. 그러기 전에 점례는. 점례는. 우리 가족은. 이렇게도 될 수 있는가. 이렇게도 되는 것이 사람인가. 내가 미친거야. 그러지 않고는 그런 생각은 못해. 지금이 사무라이 시대로 아니고. 아냐, 유마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그러진 모든 것이 자신때문인듯 자책했다. 자고 일어나니 백발노인이 됐어. 난 지팡이를 짚는 노인이 아냐. 세상이 어떻게, 내 삶이 어떻게, 파리가 어떻게 하루 아니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건 변했다. 뒤집어진 눈으로 유마는 집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구상했던 글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부모님도 점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 것은 패전 앞에서 힘을 잃었다. 아주 하찮은 일이 돼버렸다.

유마는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차를 탔나. 걸어서 왔나. 어쨌든 집에 왔다. 그는 현관을 두리번 거렸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일본도. 아버지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될 때 덴노가 하사한 장검이었다. 수 백년 전의 전통 그대로 만든 진짜 일본칼이었다. 에도 막부 시대의 장인의 손에 탄생한 이 검. 그래 이거야. 사무라이. 사무라이. 사무라이. 거푸 세번을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나서 유마는 한 번 더 나는 사무라이다, 하고 소리쳤다. 내 몸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사무라이 피가 흐르고 있어.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도도히 흘러왔다. 그것이 어느 순간 막혔는데 이제 다시 흐르고 있다. 그동안 조선 귀신이 나를 홀렸다.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은 것은 다행이다. 내가 누군인지 이제 분명해 졌다. 나는 유마 호사카. 대일본 제국의 육군성 장군이며 일급 작전통이었다. 부상때문에 전역했다. 핑계지만 그랬다. 그래서 일까. 나는 한동안 내 몸에 흐르는 피를 잊었다. 다시 나로 왔다. 여전히 쓸만한 몸이다. 어깨 좀 다쳤다고 정신마저 상한 것은 아니다. 나간 정신은 곧 돌아왔다. 전쟁은 나에게서 떠났다고 했는데. 아니다. 나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내조국 일본은 대동아전쟁의 승자라고 했는데. 아니다. 아냐. 모든 게 틀렸다. 무조건 항복이라고.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유마는 입이 막혔다. 말이 되느냐고. 전쟁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천황도 아버지도 대본영의 육해군 장군도, 병사도 아니다. 내가 점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파리를 멀리했더라면. 조선에서 휴의를 처단했다면.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나는 그 당시, 나는 내가 아니었다. 유마가 아닌 허깨비였다고.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천황의 자식이 아니었다. 대일본 제국의 빛나는 장군이 아니라 거친 손으로 제법대로 깎은 나무 인형이었다. 나무로 사람 형상을 본뜬 인형, 그것도 아주 작은 꼭두각시 인형. 부끄러움으로 유마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렇다고 지금 유행처럼 번지는 할복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럴 마음은 단 일도 없다. 그럴 시간, 노력 있으면 양키를 하나라도 쳐야 한다. 나무도 아닌 석고로 만든 내 몸. 망치로 내려쳐 산산이 부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자. 항복은 아니다. 종전이다. 그리고 종전에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아버님이 옳았다. 천황제 존속, 군부 기득권 그대로. 그리고 전쟁 전 식민지 유지, 조선땅은 우리것이다, 영원히. 전쟁 범죄자 처벌과 재판은 우리 손으로 하고 무장해제는 치안유지를 위해 최소한으로 한다. 그래 이런 조건이라면 해 볼만해. 그리고 시간을 벌자. 다시 준비해 싸우는 거다. 몇 년이 걸려도 좋다. 겉으로 웃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 멋지게 복수하자.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 아닌가. 이깟 부상이 대수라고. 유마는 상처입은 어깨를 툭쳤다. 아문지 오래됐지만 아팠다. 아얏,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생각보다 어깨는 정상이 아니었다. 부러진 어깨뼈를 이은 뼈가 다시 부러졌는지 통증은 사이렌처럼 셌다가 약했다를 한동안 반복했다. 아프다. 부상은 부상이다. 앞으론 때리지 말자. 내가 어리석었어. 어깨야 미안.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어깨대신 이번에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래 한가지는 정리됐어. 문제가 여럿일 때는 이렇게 가지를 쳐야해. 쳐내다 보면 몸통만 남게 되겠지.

다음은. 그래 다음은 점례. 점례는. 내 가족 점례는. 나를 예술가로 만든 여자. 그녀의 그림 솜씨.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인류 최고의 화가 가운데 하나야. 우리의 보물. 아, 어쩌지. 그는 잠시 사무라이를 떠나 나중에 자란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몸으로 잠깐 돌아왔다. 파리, 지금 파리에 있다면. 술과 담배. 멋진 건물과 음식. 글쟁이들의 끊없는 허세. 그립다. 어쩌지 다 팽개치고 애초 계획대로 파리로 뜰까. 가 버릴까. 안 보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토록 혐오한 전쟁아니던가. 내 손으로 더는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했어. 그럴까. 유마는 순간 흔들렸다. 바람에 나무 끼는 마른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래, 조국이 무슨 대수냐. 점례의 손을 잡고 당장 떠나자. 그러면 전쟁의 그림자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죄책감도 모두 사라진다. 아니다. 내 조국은 갈가리 찢기고 있는데 나는 조선 여자 점례와 장난을 하고 있어. 그리고 그것을 소설이랍시고 끄적였지. 사랑놀이. 그래 남들은 죽으라 싸울 때 나는 여자와 놀고 있었어.유마는 또 무너져 내렸다. 무엇이 올은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는 한 점 먼지가 됐다. 창가에 비치는 무수한 먼지 알갱이가 되어 방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목적지도 없는 먼지 신세가 바로 자신이었다. 여보. 점례가 다가와 앉았다. 손에는 뜨다 만 자수가 들려 있었다. 정원에 낙 볼까요. 어머니가 본을 뜬 소녀상이 있어요. 내가 얼굴을 만들거에요. 한 번 봐주세요. 당신의 눈으로 봐야 제대로 보여요. 당신은 척보면 알잖아요. 고칠 곳을, 더할 곳을 지적해 줘요. 여보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눈이 눈이. 점례는 유마의 눈길을 피했다. 살기가 터져 나왔다. 전선에서도 보지 못한 눈이었다. 그러지 말아요. 무슨일이죠. 다 말해요. 내가 있잖아요. 언제나 난 당신 편이에요.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난 따라갑니다. 아시겠어요. 당신의 동지 점례란 말입니다. 유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답도 없었다. 다 싫었다. 그는 꺼낸 장검의 날을 닦았다. 날이 선 검의 날은 금방이라도 살점 깊숙이 박혀 들듯이 푸르게 빛났다. 나 사캐 한 잔 만 갖다줘. 아니 병째 가져와. 오랫만에 당신과 한 잔 하지. 점례는 말없이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비웃음인지 가련함인지 모를 이상한 기운이 퍼졌다. 날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눈에서 이상한 빛을 보았다. 저런 눈, 그래 저 눈을 나는 언젠가. 봤던가. 부하를 즉결 때문했을 때. 화약 냄새를 풍기며 군복을 벗을때 였나. 이거 만져봐. 뜨겁지. 방금 전에 쐈어. 내가 쏴서 부하를 죽였어. 만져봐. 싫어요. 만져 보래두. 점례는 유마가 내미는 권총의 총신을 잡았다. 어때 뜨껍지. 거리로 총알이 나갔고 한 생명이 바로 끊어졌어. 내가 해치웠어. 유마는 지금 그 눈을 하고 있다. 왜지. 왜 단 한 번 밖에 보여주지 않았던 그 눈빛이 지금 내게로 오지. 날 살려준 내 생명의 은인. 그가 이런 눈으로 나를 본다. 소름이 돋았다. 점례는 한 손에 술병을 다른 손에 잔 두잔을 들고 검을 닦는 유마를 쳐다봤다. 그는 열중이다. 쓸데가 있을까. 왜 저리 열심이지. 점례는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잔에 술을 부었다. 당신도 한 잔 하시구료. 유마가 존칭을 썼다. 그리고 단숨에 비운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부어 가득 채웠다. 점례의 잔에도 자신의 잔처럼 그렇게 했다. 전 이렇게 많이. 천천히 마셔요. 유마가 두 번째 잔을 비웠다. 점례는 일어섰다. 앉아요. 유마가 점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안주 가져올게요. 점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혈기왕성한 육군 장교와 소초에서 만났던 그 날 그 태도였다. 낯설고 두려웠다. 빨리 파리로 가고 싶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그녀는 과일 접시를 놓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점례는 뜨다 만 바늘을 잡았다. 그러나 잘 될리 없었다. 아차 싶었는데 손을 찔렸다. 손가락에서 피어 배어났다. 핏방울, 아주 작은 것은 흰 천에서 점하나를 찍었다. 이리와. 내가 빨아줄게. 언젠가 당신이 내 손가락의 피를 빨아 준 적이 있지. 그 고마움, 이제야 값는군. 이리와. 왜 그래. 내가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워요. 당신은 언제나 유마에요. 그런 눈으로 본다고 당신이 유마가 아닌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자요, 내 피를 먹어요. 점례는 유마 앞에서 손가락을 내밀었다. 유마가 빨았다. 신세를 갚는군. 이런 식으로. 당신이 내게 신세진 것 없어요. 유마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저렇게 빨리. 급하게 먹다가는 일이 터진다. 술을 잘 하지 않던 그가 술을 이렇게 먹고 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다, 끝났다. 그녀는 체념했고 되는대로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고 막사에서처럼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다. 묶을 끈을 찾았던 그 시절의 막장 같은 생활로 점례는 다시 돌아왔다. 참 인생 바뀌는 것 한순간이구나. 유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러나 유마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사무라이의 피는 끓고 있는데, 검은 찌를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주인은 아직 말 고삐를 잡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가족의 목을 쳤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전진하겠다는 뜻이다. 그게 사무라이 정신 아닌가.하하하. 무엇이 우스워요. 아니야. 내가 우스운가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다 나 때문이야. 하하하. 어머니는. 안에 계세요. 우리 어머니 보고 싶구나. 아버지만 빼고 우리 가족이 다 모였네. 당신 취했군요. 정원에 가요. 바람을 쐬요. 그래. 그것도 좋지. 무얼 만들었다고. 당신이 이제 조각까지 하는구료. 어머니 한테 몇 시간 배운게 고작인 걸요. 갑시다. 어디 어디. 저건가. 유마가 비틀거렸다. 내 제대로 봤어요. 난 또 고칠게 하나 없는 이 불상인줄 알았지. 삼촌이 보낸 거 맞지. 네,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참 우리 어머니도. 어머니, 어머니. 이리 나와봐요. 유마가 정원으로 난 창문을 거칠게 흔들었다. 안 나오면 쳐들어갑니다.어머니, 이리 나와 봐요. 주무시나 봐요. 아까 조각하면서 힘들어 하셨거든요. 그래도 아들이 찾는데 나와 봐야지. 이 아들도 힘들다고. 제국의 용사들이여 돌진하라. 유마가 군가를 부르면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모셔올게요. 아냐 당신은 마저 조각하고 있어. 눈 코 입이 뚜렷하지 않아. 표정이 없단 말이야. 어머니, 유마가 안방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어머니는 미동도 없다. 어머니 일어나세요. 아들이 왔는데 자고만 있어요. 너냐, 네가 왔구나. 조선 아가씨가 참하더구나. 조선이라는 말에 유마의 얼굴이 순간 강하게 일그러졌다. 조선 아가씨라고요. 그래, 정말 예쁘기하고 마음이 곱더구나. 조각을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좀 알려줬어. 너도 알잖니. 엄마가 조각가인걸. 그걸 왜 모르겠어요. 어머니 아들인데요. 밥은 먹었니. 어딜 갔다 온 거냐. 밥은 먹고 다니니 염려 마세요. 어머니, 제가 파리에 가지 않아요. 군복을 다시 입을 겁니다. 다시 전쟁에 나간다고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장수가 하는 거 어머니도 알고 계시지요. 어머니. 그래 안다. 조선 아가씨는 그러지 말아라. 놓아줘. 가족이 아니지 않잖니. 어머니 결혼을 안했어도 조선 아가씨, 아니 점례는 벌서부터 우리 가족이었어요. 가족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와 단 둘 만 남겨 놓고 제가 나가겠어요. 그래도 그건 아니다. 조선으로 돌려 보내. 아니면 파리로 보내거라.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해요. 점례는 정을 들었다. 얼굴을 어쩐다. 난 무표정했지만 소녀상을 웃는 모습으로 할까. 점례는 정한 위치를 향해 정을 대고 망치를 내리쳤다. 처음에는 작게 나중에는 제법 깊게 박기 위해 손에 힘을 줬다. 안에서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정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점례는 무슨 소리지 궁금했으나 다시 정을 들고 망치로 내리쳤다. 어떤 표정일지 나도 궁금해. 빨리 완성하고 싶네. 하루만 시간이 더 있으면. 그때 점례는 등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점례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하던 조각을 계속했다. 무슨 냄새지. 익숙한데 잘 기억이 안나네. 무슨 냄새지. 점례는 망치를 멈추고 코를 두어번 짧게 들이마셨다. 그렇군. 피 냄새야. 피, 사람 피 냄새. 익숙해 냄새, 좀 편안해 지는군. 눈이 그려지고 있어. 어쩐지 조금은 슬퍼지네. 입술은. 편하게 웃고 있으면 좋으련만 앙다물고 있어. 역시 조각은 내 전문 분야가 아냐. 이런 때 어머니가 나와 도우 주면 좋을텐데. 부처님 처럼 저렇게 웃는 모습을 바랬는데. 그런데.  호흡이 느껴져. 유마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어. 뒤돌아 보지 않아도 돼.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공기중에 실려 오는 그의 냄새. 그걸 모를까봐. 그런데 지금은 다르네. 다정하고 언제나 호응해 주던 그런 냄새가 아냐. 짐승의 냄새, 거부할 수 없어, 하필 바람은 내곁으로 달려오고. 유마 당신인가요. 그렇죠. 이거, 잘 안돼요. 미안하지만 어머니 좀 불러 줄 수 있나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겠어요. 그런 호의쯤은 나에게 보여줄 수 있겠죠. 점례가 다시 정을 들었다. 눈에 대고 있다. 망치가 내려간다. 유마가 한 걸음 다가선다. 언제 머리를 잘랐지. 점례가 단발머리 였나. 하얀 목이 드러났어. 저런 목은 처음 보는데. 길고 가늘고 하얀 목이 날 기다리고 있어. 그래 저기라면. 아프지 않을 거야. 그럼, 내가 누군데. 검도 대회 우승 경험도 있다고. 오늘 하루는 참으로 기네. 왜 이리도 시간이 안 가자. 정말 긴 하루야. 길다고 정말 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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