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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이럴수록 정신을 차리자고 그는 자신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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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록 정신을 차리자고 그는 자신을 다독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9.0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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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완용은 자신의 부대가 보잘것 없는 부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명품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하품이 되고 말았다. 급조된 순사들은 싸우러 가겠다는 의지보다는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런 자들은 혼란한 틈을 노려 이탈할 가능성이 매우높았다. 병사에 필요한 것은 돌격할 용기인데 그들은 탈출할 기회만 노리고 있을 게 뻔했다. 이참에 지휘관의 뒤통수에 총을 갈기려고 작정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완용은 뒤숭숭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자신만큼은 누구보다도 사기가 높았다. 정보에 능한 그는 일제가 곧 패망할지도 모른다는 다급함에 시달렸다. 조선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사태만 지켜 보는 것은 애국자가 할 짓이 못됐다. 그는 오기가 발동했고 직접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살펴 보고 싶었다. 마침 휴의 부대가 조중 국경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도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어떤 식으로든 조선땅에서 일본을 지탱하고 싶었다. 정 안되면 두 손을 들고서라도 막아서야 한다. 일제가 무너지는 그런 억울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지탱해야 할 자들이 마땅히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자신도 포함돼 있었다. 나만 쏙빼놓고 다른 사람만 잔뜩 집어넣지 않았다. 완용은 그런면에서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부대 구성도 조선인 위주로 짜고 중간 지휘자 가운데 조선인을 일부러 끼워 넣기도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기도 했다. 우리 조선인끼리 잘해보자 응. 그게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성공하면, 우리가 멋지게 독립군을 물리치면 한 자리씩 나눠주겠다고 동지적 약속을 수시로 해댔다. 이것은 일제의 방침과도 맞아 떨어졌다. 조선인 문제는 너희 조선인끼리 알아서 해결해라. 조선독립군은 조선인이 처리하라는 것. 필요하면 내선일체였다가 아니면 이이제이 전법을 들고 나오는 것이 일제였고 완용은 그런 논리를 반박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응당 그러해야 했다. 얌전히 있지 않고 왜 조센징이 나대는가. 이때 완용은 자신이 조센징이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더 강하게 싸워야 했다. 조센징이 이런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일제에게 내보이고 싶었다. 봐라, 조센징이 조센징을 조센징했다. 자, 너희들 공을 세워라. 그러면 특진에 특진을 시켜주마. 여기서 잘 싸우면 순사부장까지 달게 해줄게. 파격적인 제안을완용은 마구 쏟아냈다. 이 계급장 보이지. 완용은 미리 준비한 수 십개의 순사부장 마크를 운집한 부하들 앞에서 흔들었다. 이 가운데 이 완장을 찰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가. 박수소리와 함성소리, 그리고 덴노 반자이를 삼세창 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사기는 이런 식으로 올려야지. 여기 돈을 보아라. 그는 부하를 시켜 돈 배낭을 흔들었다. 그리고 단상 위에서 알래로 뿌렸다. 지폐 덩어리가 바람을 타고 모래알 사이로 파고드는 물처럼 병사들 사이 사이로 날아갔다. 이런 자루가 한 트럭이다. 저기 트럭이 보이지. 저 트럭안에 가득 쌓여 있다. 이기면 다 나눠주마. 한 자루도 내가 착복하지 않고 다 너희들에게 주마. 다시 덴노 반자이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자, 바로 전투가 벌어지면 총알받이로 써먹을 수 있겠어. 그런에 휴의는 왜 안 내려와. 이 놈은 또 어디로 샜지. 완용은 투덜 거렸다. 안 되지. 지금 오면 안 되지. 진지도 구축이 안 됐어. 일주일 후에 와라. 그건 나와 약속할 수 있지. 죽마을 죽마고우로 그 정도는 해 주겠지. 완용은 미친놈처럼 마구 지껄였다. 충성은 말로만 안돼. 정신무장은 조센징에겐 안 통해. 일차전이 중요해. 막고 치는 거지. 그러면 여세를 몰자. 상하이까지 바로 진격해 임정 수뇌부를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버리는 거지. 그래서 독립이 얼마나 허황되고 무모한지 상하이 임정 수뇌부가 알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흰 옷 입은 그쪽의 무지렁이들에게는 이렇게 전파해야지. 만백성 조선민들아, 너희들은 애초 무능한 백성들이다. 게으르고 거짓말 잘하고 뭉치지 못하는 미개한 백성이 어찌 대일본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느냐.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이번 전투에서 확실히 알려주마. 

우리 조선인은 독립을 원하지 않아요. 세계만방은 이것을 알아야 하지요. 조선백성 스스로 일제 신민이 되려고 하는데 누가 이 대세를 막으리요. 일본 제국주의 우산아래 있는 조선이 독립된 조선보다 좋다는 것이 인민의 뜻 아닌가요. 이걸 나 한테 왜 묻니. 잘 알면서.  완용은 이런 커다란 야망외에도 개인적으로 해결할 일이 있었다. 바로 휴의와의 대결이었다. 그자와는 결코 지고 싶지 않았다. 원수의 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싹터왔다. 일은 자신이 더 열심히 하는데 공은 그에게 돌아가는 꼴의 연속이었던 악몽은 깨끗이 지워야 한다. 점례도 그렇고 여순도 나를 떠나 휴의에게 마음을 주었을 때 완용은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점례는 그렇다고 쳐도 나와 약혼까지 거론됐던 여순마저 마음은 휴의에게 가 있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 완용은 미칠것 같은 분노에 화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그러지 않고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늘 이런 마음을 품었으나 이번 출병이 있자 되레 그때 일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 되레 잘됐다는 판단이 섰다. 오늘을 위해 뒤로 미룬 것은 천운이다. 깨끗하게 처리하마. 아주 흔적도 없이.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고문실에서 취조당하는 그가 아니고 취조하는 내가 아니다. 그도 준비했고 나도 준비했고 싸움터는 동등하다. 휴의, 네가 좋아하는 평등한 상태에서 붙어보자. 공평한 거 맞지. 지고 나서 애초 기울어진 운동장 어쩌고 저쩌고 하는 변명은 설마 하지 않겠지. 난 이 싸움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완용은  일부러 자신을 그쪽으로 계속해서 몰고 갔다. 두만강은 피로 물들 것이다. 우리도 당하는 자가 나오겠지만 당하는 자 없이 어찌 승리할 수 있겠는가. 어차리 개돼지와 같은 목숨 아닌가. 가짜 계급장과 가짜 돈에 눈이 뒤집히는 자들 아닌가. 그런 머저리가 무더기로 죽은 들 벌레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무지렁이는 자신들의 죽음의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 죽으면서도 대한독립만세나 조국해방보다는 천황만세를 외칠 것이다. 그래 그 순간 너는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너희들은 죽고 나서도 몰라. 그러니 내가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없지. 자 무기를 점검하자. 월등한 무기. 너희들이 이걸 가지고 있어. 이런 기관총, 이런 박격포, 이런 장갑차. 부러해라. 실컷. 그러면 너희는 게임도 하기 전에 지는 거다. 고목처럼 힘없이 쓰러지는 휴의를 보고 싶다. 왜소한 녀석.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그러나 네 운명은 여기까지다. 휴의, 너는 알겠지. 전투는 사기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무기가 있고 후퇴할 공간이 있다. 아무리 적들이 게릴라 전에 능하다고 해도 우리의 신무기를 따라 갈 수는 없다. 일단 매복하고 기다릴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하자. 총구만 내놓고 기다리자. 오는 적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휴의는 체포해도 좋고 사살해도 상관없다. 굳이 사로잡아 왜 그랬어. 이런 무모한 짓을. 지금이라도 무릎꿇고 빌어라. 사지는 사라져도 목숨은 살려주마. 이 따위의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다. 그냥 꼴이 보기 싫다. 꼴갑떠는 자의 면상을 보는 것이 뭐가 대수냐. 그래도 사로 잡으면. 그자의 비굴한 모습을 본다면. 아냐 휴의는 절대 내 앞에서 굽히지 않아. 그게 나를 미치게 하거든. 그냥 꽉 죽어 버려라. 시체만 확인하면 된다. 숨을 멈추고 온갖 모욕을 저질러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통나무가 된 몸통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최후의 승자는 네가 아닌 나라는 것을 입증하면 좋을 것이다. 사진으로 남겨도 된다. 기념사진 하나 찍어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지. 점례나 여순을 만나면 이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고 들이밀어 보자.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의 사진. 점례야, 이 자의 얼굴을 알아 보겠느냐. 여순아, 네가 그리던 휴의라는 놈인데 사실 확인을 부탁한다. 캬. 좋다. 좋아 죽겠어. 그녀들의 놀라는 표정을 보면서 안됐다고 같이 위로해 준다면 우애는 그런대로 쌓일 것이다. 그러나 완용의  이런 희망사항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체하는 사이 약산의 부대는 벌써 압록강을 넘어섰다. 신의주에 막 도착해 병력을 점검하던 완용은 수백 명의 독립군이 함경도 경찰서를 접수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었다.

완용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생각할 겨늘도 없이 일개 중대를 급히 함경도 쪽으로 뺐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또다른 중대를 평양 이북으로 급파했다. 양동작전으로 고사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약산은 그런 일제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그들이 평양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먼저 그곳을 돌파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의 속도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부사령관에게 작전 지휘를 맡기고 날랜 병사 8명을 데리고 철도회사를 급습했다.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마무리 짓는 행동이었다. 덕기만을 상대하자. 지금 이 순간 완용은 뒷전이다. 덕기 이놈,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완용의 부대가 방향을 틀었다고. 넌 다음 순이다. 너도 기다려라. 약산은 일번으로 덕기를 이번으로 완용으로 순번을 정해 놓고 빠르게 움직였다. 평일이고 이 시간이라면 덕기는 회사에 있을 것이다. 약산의 계획은 맞아떨어졌다. 형식적인 병력을 배치했던 철도회사는 심장부가 쉽게 약산의 손에 떨어졌다. 약산을 포함한 8명의 특공대는 움직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쏘았다. 그리고 이층으로 내달렸다. 사무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총소리를 듣고 일부는 피했고 다른 일부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약산은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충분한 시간이었다면 일일히 대조했겠지만 촌각을 다투는 작전이다보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왜놈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적과 매한가지였으므로 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민간인이 희생될지 모른다는 양심의 가책을 이런 식으로 피한 약산의 부대는 내려오는 3명을 조준 사격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이층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책상 아래로 숨는 사람 가운데 유독 침착한 제복의 사나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일어나기 위해 몸을 세우면서 서랍을 열었다. 그 모습이 약산의 눈에 띄었다. 바로 사격을 가했다. 팔뚝에 총을 맞은 그는 맞지 않은 다른 손으로 피를 막다가 손을 때고는 다시 책상 서랍으로 뗀 손을 들이밀었다. 약산은 번개처럼 달려나가 발로 책상을 세게 찼다. 그러자 그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것은 그자만이 아니었다. 책상위에 있던 명패가 바닥에 굴러떨어져 약산의 발밑까지 왔다. 발로 차서 확인해 보니 덕기의 창씨 개명한 이름이었다. 노구치 부르메. 네가 날 불렀어. 그는 발로 피를 흘리는 노구치의 팔을 밟고는 덕기 이놈. 반역자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그리고 총구를 머리에 겨누었다. 내 이름은 노구치 부르메요. 덕기는 아니오. 덕기가 아니라고. 조센징 이름은 벌써 버렸다고요. 아씨, 팔 아파요. 피나는 거 안 보여요. 어서 바를 치워요. 그 더러운 발. 그래 치워주마. 이 발보다도 더 더러운 놈아. 약산을 밟은 발로 그대로 덕기의 면상을 밟았다. 아이고 나 죽네, 덕기 죽네. 그래 바른 말 했다. 이제 급하니 덕기라는 이름이 나오는구나. 덕기는 죽었다며. 맞아 넌 이제 죽었어. 사색이 된 덕기가 선생님 하고 다치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약산의 바지를 잡으려고 했다. 더럽다 이놈. 이 바지는 네 놈의 더러운 손으로 만질 옷이 아니다. 선생님, 한 번만 살려주시오. 돈을 드리리다. 산더미처럼 많은 돈을 드릴테니. 어서 날 붕대로 감아서 병원으로 데려가 주시오. 싫다면. 그렇게 해주시오. 싫다 이 놈아. 난 시간이 바쁘다. 다만 네가 죽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민족을 배신한 친일분자, 독립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탕 탕 탕.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즉시 퇴각 명령을 내렸다. 밀폐된 공간에 오래 머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임무완료. 튀자. 

순식간에 마당에 나온 그들은 사이렌을 울리면 달려오는 트럭을 일단 잡기 위해 벽에 몸을 숨겼다. 언제 사격을 가해야 할지 약산은 가늠했다. 트럭위에 있을 때 아니면 내릴 때, 내려서 흩러지려고 뭉쳐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해 보다 내리고 나면 다 잡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그는 트럭이 속도를 늦추며 철도회사 입구에서 차를 대려는 순간 집중사격을 했다. 내리려고 엉거주춤하던 차에 받은 기습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운전수를 비롯해 옆자리에 타고 있는 일제 장교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트럭위에 있는 병사들 역시 애초 자신들이 목적했던 땅에 발을 디디려던 계획을 급히 수정했다. 차를 돌려라. 그러나 운전수는 이미 비명횡사한 상태였고 차는 벽에 부딪쳐 찌그러져 있었다. 확인사살하라. 약산이 눈짓하자 날렌 병사 3명이 차에 접근해 모두 처치했다. 가자. 약산은 빠르게 후퇴를 지시했다. 그리고 미리봐둔 언덕을 타고 넘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뒤를 보니 적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었다. 철도회사 앞마당에는 제복입은 경찰과 군인들이 뒤엉켜서 뒤집어져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검은 트럭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옆으로 똑같은 모양새의 트럭 세대가 멈췄고 이어 타고 있던 군인들이 뛰어내렸다. 트럭에서 뛰어내리면서 넘어지는 자들을 보면서 약산은 그 순간에도 훈련받지 못한 신입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풋내기야. 그러나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정면대결을 펼치면 이쪽의 피해도 예상해야 한다. 약산은 적들과 싸우기 보다는 남하를 결정했다. 완용 부대가 생각보다 빨리 현장에 도착했고 숫자가 생각 이상이었다. 약산은 함성을 지르며 마구 헛방을 쏘는 그들을 따돌리고 앞서 간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만나기로 한 장소를 향해 급하게 몸을 날렸다. 뒤늦게 도착한 완용은 철도회사에서 벌어진 비극의 현장을 보고는 망연자실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눈에 띄는 명찰이 있었다. 어라, 덕기 형님이네. 내 본보기 였는데. 얼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어도 명찰로 이름을 남겼어. 잘가시오. 내 롤 모델이어. 완용은 그 와중에도 덕기의 명복을 비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현지 경찰은 어쩔 줄 몰라 사냥개에 쫓기는 멧돼지처럼 허둥대기만 할 뿐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몰라 씩씩 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적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도 적들의 위치도 알지 못했을뿐더러 그들이 독립군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기습 후 도주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당황한 왜경은 완용의 눈치만 살폈다. 이런 과감한 자가 약산 말고 누가 있을까.휴의는 아직 도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약산이 분명해. 그 극력 무장투쟁주의자. 총은 총으로 망한다. 내놈을 이 총으로. 완용은 화가 난 나머지 대열이라고 할 수 도 없이 너부러져 있는 휘하 부하들을 향해 공중에 권총 한발을 발사했다. 그러고들 있을래. 이 머저리들. 시체들을 치울까요. 그중 용기 있는자가 나서서 물었다. 죽은 놈들은 놔둬. 우리가 한가하게 장의사 노릇이나 할 때가 아니다. 그리고 너. 하이. 지금 우리가 뭘 해야 하지. 그걸 우리같은 졸개들이. 완용 서장님이 지시를 내려야죠. 알았다. 이 머저리야. 그는 권총의 아랫부분으로 가볍게 머리를 친 후 자, 정렬하자. 모여라 모여. 하고 부하들을 일렬로 세웠다. 한발 늦은 것에 땅을 치고 후회해야 소용없다. 방심하면 저런 꼴 당한다. 부지런한 부하 가운데 하나가 덕기의 시체를 끌고와 마당가에 거적을 덮어 씌워 놓은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꼴 안당하려면 용감해야 한다. 나는 더 큰 적을 상대해야 한다. 여기 있는 병력들은 추격하는 대신 두만강쪽으로 다시 이동한다. 완용은 휴의만 아니라면 약산과 대결하고 싶었다. 죽더라도 거물과 싸우다 죽으면 이름이라도 남지 않겠는가. 애송이 손에 죽고 싶지 않아. 나같은 유명인사는 죽어도 장군의 손에 죽어야 해. 완용은 이렇게 중얼 거리면서 트럭에 올라탔다. 가자. 머뭇거리는 용감한 자에게는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추격을 하거나 체포하는 것은 우리 부대가 할 일이 아니라 이곳 함경도 헌병사령부나 지역 경찰의 몫이다.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다. 아직 상부의 명령도 나오지 않았는데 너무 일찍 여기를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용감한 일본 경찰이 완용에게 따졌으나 완용은 원래 자신의 목표를 바꿀 의지가 없었다. 명령을 받기전에 완용은 서둘렀다. 명령이 와도 그러려고 했는데 아직 상부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귀찮은 사후처리를 남겨두고 운전수를 재촉했다. 빨리 가라. 차가 출발하자 완용은 덕술이의 최후가 끔찍했다는 것을 상기했다. 얼굴이 없어. 덕기가 경성에 왔을 때 고문 기술을 인수 받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현란한 손놀림이 벌써 그립다. 장례는 잘 치러 주겠지. 이분은 우리 황국의 안전과 승리를 위해 몸 바치셨다. 그 공로가 참으로 크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달리 장례를 제대로 치르고 신문에 날 수 있도록 부고를 돌리겠지. 완용은 자신이 숭배했던 덕기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 고개를 숙이고 생전에 한 그의 공을 기리고 극락왕새을 빌어주고 싶었다.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길이 고르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 자식아 운전 똑바로 해. 완용이 소리 질렀다. 내 미래인가. 얼굴없는 죽음이. 완용은 덕술의 시체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당한 것에 분노를 느꼈다. 드르륵 드르륵, 이 가는 소리를 완용은 자신의 귀로 들었다. 더 악랄해야 한다. 선처는 없다. 반드시 독립군을 때려 잡아 자신의 동료에 대한 복수를 하자. 다시 차가 덜컹 거렸다. 이 놈이 시위하나. 완용은 그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골똘한 생각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안 좋은 사례야. 대일본 제국의 유명한 경찰이 백주 대낮에 적에게 사살된 되다니. 이는 우리 황국의 수치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모욕이 될 터이다. 우리에게 감히 대들다니. 대드는 자들의 말로를 보여줘야 해.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수백 배 수천 배로 보복해야 옳다. 알겠나. 알겠느냐고. 완용이 분에 못이겨 군홧발로 차 바닥을 거칠게 내리 찍었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고 소리내면서 그러모은 침을 탁하고 뱉었다. 그러나 그 침은 창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일부가 자신의 얼굴로 떨어졌다. 제 얼굴에 침 뱉었네. 그 와중에도 완용은 농담을 떠올리면서 손을 침을 닦았다. 그리고 그 손을 얼굴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구치가 심해. 치과에 가봐야 하는데. 이가 아파. 이가 아프다고. 완용은 침 묻은 그 손으로 입을 가로 막았다. 그런다고 치통이 사라질리 없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어 아프군. 그렇다고 내가 아프다고 사상이 의심되는 자, 독립군에 협력하는 자를 내버려 둘 수 없지. 즉결처분이지. 이젠 시간이 없어. 어떤 심문이나 재판 절차도 필요없다. 완용은 트럭에서 내리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부하들에게 이렇게 지시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어쩡쩡하게 그러 표정 짓지 말고. 알았어, 알아 들었느냐고. 완용은 쉬지 않고 말하고 대답했다. 여러번 들었어요. 이제 귀에 박혔으니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리보다는 어떤 실질적인 대책을 말씀해 주세요. 용감한 자가 말했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실망하는 눈빛이 보이지 않고 감격해 하는 모습을 봐야 할텐데. 어떤 말로 일장 연설을 하지. 가면서 생각하자. 개돼지들은 쉽게 들뜨지. 사람 취급해 주면기어 오르고. 싹 밟아 주는 그런 연설 없을까. 밟히면서도 아니라는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연설. 안 되면 총칼로 위협하지. 대충 말은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고. 완용은 생각나는대로 제멋대로 자동차 바퀴처럼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저녁 무렵 애초 정한 두만강 일원에 도착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휴의 부대가 남하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완용은 두패로 나눠 밀정을 두만강 이북 중국 땅에 보냈다. 그들이 와서 보고를 하기 전에는 이 자리를 사수할 계획이었다. 완용은 그들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남은 시간에 사방에 매복 진지를 구축했다. 남하하는 적들에게는 이곳이 바로 무덤이 될 수 있도록 빈틈없는 작업을 독려했다. 시작부터 그들은 열성이었다. 제복을 입고 지날때 느꼈던 그런 감정으로 참호를 팠다. 개돼지 였을 때 제복을 보고 가졌던 두려움은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느꼈던 두려운 시선을 타인의 눈을 통해서 들여다 보게 됐다. 그러니 삽질에 어찌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도 순사가 됐다. 개돼지에서 사람이 됐다. 일은 고되고 명령은 엄했으나 삼시세끼 밥이 나왔다. 이런 것이 전투라면 진작에 황군이 될 것을. 늦게 나마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부랑아들은 삼시세끼 꼬박꼬박 밥이 나오자 순사 복장이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자신이 생겼다. 이들이 앞장서 일한 덕분에  참호 작업은 완료됐다. 그러나 기다리던 전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대기 시간은 길어졌다. 밀정은 일주일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하들은 늘어졌고 심지어 근무시간에도 보초를 서지 않고 잠을 잤다. 군기가 빠지기 시작하자 완용은 발작했고 발작의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부하들을 걷어 찼으며 군기가 바짝 든 부하들에게까지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순사인 것을 뻐기고 자랑스러워하던 부하들의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도주할 길을 알아보느라 겉으로는 일부러 맞아 주는 척 했다. 그리고 야밤을 틈타 실제로 도망쳤다. 국경의 강을 넘는 자들도 있었고 자기 고향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줄행랑을 놓기도 했다. 신념이라는 것은 이처럼 쉽게 허물어 졌다. 개돼지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군. 본보기로 몇 놈을 처형해야겠어. 완용은 그 날 저녁 심복조를 대동하고 탈출하려던 자들은 하나씩 잡아들였다. 날이 새고 나서 연병장에 묶인 탈주병들은 족히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 놈들을 보아라. 대동아전쟁에 나선 자들이 탈영을 하다 잡혔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이들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 여론을 묻겠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군기를 위해 처형하자만 그렇게 할 것이다. 병사들의 의견은 어떤가. 이렇게 물은 것은 완용이 사전에 짜놓은 계략이었다. 말솜씨가 제법 있는 부하들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서 주동자를 제외한 선량한 부하들을 석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면 누가 주동자인가. 불안한 눈길들이 오고갔다. 그들 사이를 걷던 완용의 심복들은 이 자인가, 아니면 이 자가 선동했나. 하면서 주변을 돌았다. 그리고는 닥치는대로 주동자를 골라냈다. 주동자는 모두 3명이었다. 그들이 완용 앞에 끌려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운명을 예견했다. 목놓아 울었다. 엄마를 외쳐다. 고향이름을 댔다. 소인배들은 달라. 위기에 처하니 이성을 잃었어. 그들은 뒤로 끌려갔다. 얼굴을 가리로 세워둔 나무에 묶였다. 그리고 수 백발의 총성이 울렸다. 아직 전투를 해보지 않은 완용의 부하들은 산 사람을 향해 일제히 사격했다. 그 날 이후 탈영자는 나오지 않았다. 조선백성들이 왜 무지렁이인지 알겠지. 낙 같은면 그 날 저녁 도망쳤을거야. 그때가 제일 허술하거든. 부랑아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나름대로의 생존 원칙은 허망하기 그지 없었다. 

팔일 째 되는 날 강을 넘었던 첩자들이 돌아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휴의의 부대 출전이 임박했으며 그것은 오늘 밤 당장이거나 내일 새벽에 강행한다고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첩자가 가져온 내용 중에 완용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휴의에 대한 신상이었다. 휴의가 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병원에서 탈출했다는 내용이었다. 총알 세발 가운데 두 발이 얼굴쪽이고 한 발은 종아리였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총알 세 발을 맞고도 몸을 추스러 조선 진공 작전을 펼치다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조센징 놈이야. 완용은 혀를 찼다. 휴의를 치료한 병원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부부병원이라고 했다. 완용은  부부병원과 여순을 연결시켰다. 상하이에서 독립자금을 대는 부부병원의 실체는 조선에서도 은밀히 알려져 있었다. 내왕하는 첩자 가운데 일부가 포목점 집 사장을 알고 있었고 그를 통해 병원장이 통영 출신의 말수이며 부인은 보령에서 출세한 여순라는 것이었다. 보령에서 출세했다고. 그 말을 듣고 완용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곳에서 출세한 인물은 자신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됐다. 더구나 그 사람은 나와 한때 약혼을 논했던 여자였다. 분명 그 여자는 경성역에서 일본으로 보내졌다. 그곳 군수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일을 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험한 일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야 맞다. 지금쯤 살아 있다는 것도 기적인데 의사가 돼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직접 눈으로 보고 만나서 자신을 배신한 여순이 그 여순인지  알고 싶었다. 배신자가 맞다면 휴의가 어떤 루트로 조중국경을 넘고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곧 임박했다고 해도 내가 갔다 오는 동안은 아닐거야. 직접 보고 들어야지. 이렇게 마음을 정했어도 혹시 자신이 떠나고 나서 휴의 부대가 기습을 하거나 방어선을 뚫고 평양쪽으로 진군하는 사태가 오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내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 하지만 어디 전선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기만 한가.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최악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일주일 째 그들은 오고 있지 않다. 독립군이라는 작자들도 별수 없을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훈련은 물론 군자금조차 충분치 않은데 사단 병력이 한꺼번에 도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보급품은 어쩔건데. 하루 세끼 식사는. 여기에 생각에 미치자 중국 국민당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다해도 거의 불가능한 작전 같았다. 더구나 국민당은 패망 직전이어서 과거에 비해 힘이 많이 달렸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형편 없는 전투력을 가졌을지 모른다. 약산이 비록 함경도를 돌파했다고는 하나 아직 그 아래쪽이 공격받았다는 보고는 없다. 아마 산속에 숨어 있거나 뿔뿔이 흩어져 게릴라 전에 들어갔을 수 있다. 그럼 그렇지.독립군이라는 것들이 별수 있겠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약산이 그럴진대 휴의는 그 보다 못할 것이다. 무기도 그렇고 배후 지원군도 없다면 내려오는 즉시 전멸 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완용은 본국이나 총독부에 보고하지 않고 자신의 직계 부하에게 작전권을 주고 자신은 한 명의 부관만 대동한 채 상하이로 떠났다. 오늘 밤 견디고 날이 새보면 알겠지. 첩자의 보고가 정확한지. 그러나 밤이 새고 날이 밝고 그 다음날이 와도 독립군 부대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늘어지는군. 스스로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 완용은 이런 결단이 과연 옳은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기에는 늦었고 무엇보다 아무 정보도 없이 돌아갈수는 없었다. 여순을 만나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여순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했다. 그런데 여순이 자신보다는 휴의에게 더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배신자 년. 완용은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배신자 년을 외치고는 침을 허공에 뱉었다. 침의 분말이 먼저처럼 뿌옇게 떠돌다 사라졌다. 일본 보내줬더니 이 무슨 모욕인가. 이렇게 외쳤으나 실은 배신은 완용이 한 것이다. 여순이 일본에 가서 어떤 일을 할 지 완용은 미리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완용은 여순을 점례와 함께 일본에 팔아넘긴 것이다. 말이 학교 보내주고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했지만 대개 경성역에 내린 여자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종착지에 다다르는지 완용은 훤히 알고 있었다.

사랑했던 여자를 팔아넘긴 완용은 어떤때는 그것이 더러운 결정이었다고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여전히 결혼하지 않고 홀로 인 것은 여순에 대한 기다림 혹은 잘못에 대한 반성의 의미라고 그는 스스로 용서를 빌었던 적도 있었다. 에먼 점례만 그렇게 됐어. 그래서 경성에서 보고 놀랐던 거야. 귀신이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거든. 나도 이런 사람이야. 난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지 않는 덕기같은 자들과는 달라. 죽으면 썪어 문들어지는 그런 돼지 같은 놈과는 다르다고. 나에겐 순정이 있다고. 자신에게 이런 감정선이 흐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은 하필 이런 때 나타나서 완용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죽기전에는 만나겠네. 참 운명은 묘한 거야. 상하이에서 여순을 만나다니.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되면 그는 냉철해질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남의 여자이고 애까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린 시절 풋사랑의 기억은 잊어버리자. 그리고 자신이 했던 그녀 부모에게 혹은 점례 일가에게 했던 행동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우정을 저버린 자라는 손가락질만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장 괴로워할 것은 자신에게 있는 그런 놀라울 만큼 여린 감정이었다. 잔혹한 고문형사에게도 이런 때가 간혹 찾아오는 것이다. 전과 다른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 자의 최후를 이야기 한다. 지금 완용이 꼭 그런 상태다. 휴의를 고문할 때 그가 보였던 슬픈 눈빛은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렇게 모질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 좋았으나 그 눈빛을 보고 완용은 고문질을 다른 경찰에 맡겼던 것이다. 그의 등뒤에 너는 내 친구 아니었니. 하는 그럴듯한 환청이 요즘들어 간혹 들리는 것도 문제였다. 친구니 동무니 하는 말들은 낭만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땅을 치고 후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난일은 지난일이고 아직 마지막 결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길을 갔고 나는 나의 길을 갔을 뿐이다. 하지만 점례와 여순의 건은 잘 될 수도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니고 공장에 취업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한 번 떠난 후 오 년이 넘도록 고향에 어떤 소식도 전해주지 못했다. 완용은 그녀들이 어디서 살 든 그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애써 무시했다. 그 무렵 휴의가 자신의 소개로 들어간 군대를 이탈했고 반역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를 체포했다. 완용의 생각은 자꾸 이런 식의 과거로 달리고 있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 아닌 것이 되고 있다. 자꾸 옛날일이 생각나. 다 그놈 때문이야. 휴의 그 자만 아니라면. 내 영혼이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일단 여순을 만나보자. 상하이서 만나는 여순이라. 그쪽에서는 무슨 일이 기다리지. 일본 영사관이 잡을지도 몰라. 완용 서장, 여기 남아서 저희 일좀 도와주시오. 말씀은 감사하나 아니될 입니다. 두만강 접경 지역 병사들은 어쩌고요. 저만 기다리고 있는데요. 염려 마시오. 그쪽일은 그 쪽이 알아서 할 것이오. 이런 제의를 받는다면. 고민이 필요하다. 조선은 이제 지긋지긋해. 더러운 잠자리도 이골이 나고. 쫓고 도망가고 그런 일 말고 연필이나 굴리면서 잔머리좀 굴려볼까. 휴의가 도강하기전에 체포작전을 펴고 있어요. 도와주시오. 그런 제의라면 거절 할 수 없다. 나 만큼 휴의에 대한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곳 형사들은 조선말이 서투르다. 그래서 다 잡은 고기를 놓친적이 있다고 들었다. 나라면. 그래 할 수 있어. 일본 형사보다 나은 점은 이거야. 그 놈들은 조선말을 못하거든. 이럴 때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잇점이다. 조센징이 때로는 좋은 점이 있어. 그래서 일부러 용의자를 취조할 때는 조선어를 자랑삼아 떠들었고 불콰한 눈으로 쳐다보는 자가 있으면 바로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그러면 그들은 완용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완용은 같은 조선인인 휴의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잡고 싶었다. 여러차례 밝힌 대목이다. 굳이 강조하는 것은 상하이 같은 하늘 아래 둘이 동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수는 같은 영역에서 살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사라지거나 싸움에서 져야 한다. 완용은 지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놈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내가 했어. 자랑하고 싶었다. 너는 반드시 내가 잡는다. 완용은 기회있을 때마다 이런 다짐으로 휴의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이런 쪽으로 생각이 모아지자 완용은 조금은 편한 마음이 됐다. 그리고 여순에 대한 미안함도 사라졌다. 과정이야 어쨌든 여순은 지금 상하이 의사가 아닌가. 나 아니면 여순이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는가. 나 아니면 어떻게 점례가 내무대신의 아들과 같이 있을 수 있느냐. 독립군 대장으로 일제의 요주의 인물인 휴의는 또 어떤가. 그 자 역시 내가 없었으면 여전히 죽마을에서 땅이나 파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그들은 모두 나에게 빚을 졌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들 때문에 내가 힘들어졌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들은 나를 원수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은인으로 생각해야 마땅하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일단 일본 영사관부터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일본 영사관은 완용의 방문을 환영했다. 완용이 어쩌면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독립군을 일망타진할 수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본 영사관은 곤궁에 처한 상태였다. 과연 완용은 상하이에서 휴의를 체포하고 독립군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까. 뽑아도 뽑아도 나오는 잡초처럼 독립군을 과연 없앨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감이 일본 영사관을 사로 잡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않은 완용의 방문은 일본 영사에게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을 불어 일으켰다. 희망이 의심스러워져 갈 무렵 나타난 완용의 방문은 다시 갓의 끈을 조이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독립군 토벌대장이 왔으니 뭔가 색다른 계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영사관은 그를 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완용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고 영사관은 이쯤해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종로서장은 두만강에 방어선을 치고 대기하겠다는 것이 작전의 전부란 말이요. 영사관 형사 야마모또 하야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을 다 들어 보시오. 지금 상황이 말로만 되는 줄 아시오. 조선내에서도 여기저기 준동 세력이 활개 치고 있고. 그건 당신 책임아니오. 어디 그게 한 사람의 문제 입니까. 조선 팔도가 들썩이는데 종로서장 한 명이 하는 일은 한계가 있어요. 에이. 하야시가 노골적으로 성을 내면서 성냥불을 그었다. 나도 하나 주시오. 그거 아니오. 그거 라니. 대마초 아닙니다. 그거 하려고 상하이에 온 겁니까. 그러지 마시고 내 말 들어 보시오. 무턱대고 화를 낼 일이 아니오. 독립군 상하이 사단 병력이 출동 대기 중에 있다는 것은 하야시 선생이 더 잘 알고 있지요. 일부는 벌써 압록강을 넘었고 사상자 다수가 발생했어요. 더구나 고문 기술자 덕기가 사망했어요. 알고 있소. 고문 기술자라는 말에 하야시가 다시 인상을 썼다. 꼭 그런 표현을 써야겠소. 유능한 일본 형사라는 점잖은 말도 있는데. 그건 그렇고. 그와 관련된 소식은 일본 영사관도 벌써 파악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영사관도 빠른 보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런 판국에 완용 서장이 와서는 아이디어를 내기보다는 방어만 치중하겠다고 하니 내가 그런 것 아니오. 그러면서 하야시가 서랍을 열고 종이에 싼 궐련을 권했다. 냄새가 좋아요. 이거 한 대 말고 기분 좀 푸시오. 고맙소. 하야시가 그렇게 나오자 완용도 누그러졌다. 그래서 둘은 정세를 놓고 이런 저런 분석을 했다. 둘이 공통점으로 꼽은 것은 압록강을 넘은 약산의 세력과 두만강 쪽을 염두에 두고 있는 휴의 세력이 펴양쯤에서 합쳐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경우였다. 이때는 민심은 크게 요동칠 것이오. 일망타진은 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세력을 우리도 감당하기 어렵단 말입니다. 내 말은. 완용은 하야시의 표정을 살폈다. 작은 눈이 뱀처럼 미동도 없이 고정된채 다시 완용은 노려봤다.

내 말은, 완용은 뜸을 들였다. 머리를 치자는 것이오. 뱀의 다리를 밟은들 무슨 소용 있느냐고요. 자신의 머리를 치면서 완용이 말했다. 그는 다른 표현을 쓰려다 하야시의 눈이 뱀눈을 닮았다는 즉흥적인 생각 때문에 뱀 대가리를 으깨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뱀 대가리라. 하야시가 뱀눈을 번득이면서 자신의 머리가 공격 받기라도 하는듯이 손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거기가 아니고. 그 대가리는 잘 알다시피 임정의 수뇌부요, 나아가서는 도강한 약산이며 곧 도강을 획책하는 휴의 일당입니다. 조선 총독부가 수심에 잠겨서야 되겠습니까. 일단 함경도 쪽은 더이상 후퇴는 없는 모양입니다. 일본 경찰이 잘 방어하고 있어요. 내가 후속 조치는 해 놓고 왔던 덕분입니다. 하야시가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조사도 끝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조선 형사가 그의 눈에 가시처럼 박혔다. 병력 일부를 급히 그쪽으로 빼낸 것은 신의 한 수였소.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덕기라는 유명한 고문 형사를 잃은 것은 손실이지만 일단 평양은 잘 버티고 있어요. 하야시는 입맛을 다셨다. 고문 형사라는 말을 계속 쓰는 군. 제 놈도 그 짓이 전공이면서. 그리고 버틴다고. 이거 어디서 써먹는 수작이야. 하야시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그러나 꾹 참았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정보를 얻고 작전을 짜는 것이 중요했다. 더구나 이 자가 상하이 사정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은근히 떠 보았다. 휴의라는 자가 동향이라면서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물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내가 만약 하야시 선생이 알고 있는 내용을 질문이라고 한다면 기분이 상하겠지요. 완용은 고삐를 잡았다는 듯이 놓지 않고 말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때가 아니오. 난처한 표정으로 하야시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한때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런 말 꺼내는 것조차 수치로 여기고 있어요. 잡았던 자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돼요. 탈출할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기회가 올 때 싹을 잘랐어야지요.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 되요. 조센징은 그게 문제요. 하야시가 훈계했다. 이번에는 완용이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때 같이 도망친 조선청년이라는 자가 약산이라고요. 완용은 그냥 넘어갔다. 휴의와 조선청년이 같이 도망친 것은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만 두었다. 수십개 이름 중 하나를 쓰면서 압록강을 넘었다고요. 그리고 제국주의의  위대한 형사 덕기를 죽이고요. 하야시가 화난 얼굴로 덕기의 죽음이 마치 완용의 책임이라는 듯이 몰아부쳤다. 마음이 약해서야 원, 조센징. 하야시는 기어이 조센징이란 말을 했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했으나 그것은 완용을 배려한다기보다는 그냥 자신이 일부러 작게 낸 말일 뿐이었다. 그때 죽였어야지. 잡았을 때 해결 했어야지. 하야시는 휴의의 탈출 책임을 자꾸 상기 시켰다. 아니 그게 어디 내 책임이라는 말이요. 따지듯이 완용이 대들었다. 자, 지난 일은 그만둡시다. 앞으로가 중요하니. 그나저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지 왜 여기 온거요. 전통으로 하던지 아니면 급전을 치면 될 것을. 처음의 환대와는 달리 하야시가 건방을 떨었다. 완용은 그것이 같잖았으나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하야시는 그가 온 사이 휴의가 두만강을 돌파하면 어쩔 거냐, 대책은 있느냐고 따지는 듯 했다. 완용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휴의가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고 그 병원에서 탈출한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투로 받았다. 하야시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사정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있었다.

밀정이 없다면 어떻게 심각한 부상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상하이 영사관은 도대체 무엇을 했지요. 이번에는 공격의 순서가 바뀌었다. 양사관이라고 했지만 자신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이 자식이, 감히. 하야시가 큰기침을 했다. 따지러 온 거요. 감히 영사관을 무시하는 거요. 그렇게 잘 났으면 왜 그 모양 그 꼴이요. 종로서가 폭탄을 맞지 않나. 시가전에서 휴의를 놓치질 않나. 에이. 그만 그맙합시다. 지금 그걸 따질 계재가 아니요. 자신의 치부는 감추고 싶지요. 그게 아니고요. 내 말은 왜 감시를 게을리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요. 하야시는 조센징이라는 말이 입 끝에 왔으나 종로서장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 가래침을 탁하고 뱉었다. 완용은 침뱉기라면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는 듯이 그도 탁하고 하야시보다 더 멀리 침을 뱉어냈다. 이거 이런 식이면곤란해요. 내가 말할까요. 내 상관인 것처럼 행동하니 말 하지요. 뭘 모르시나 본데. 병원장 말에 따르면 아마 말수라고 하지요. 병원장은 총상 세 발이면 오늘 밤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탈출은 불가능하고요. 그날 바로 놈들의 습격이 있었어요. 병원장과 부부를 묶어 놓고 트럭을 이용해 침대채 통채로 들고 달아났어요. 의사까지 권총으로 협박하고. 하야시는 이런 상태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 했어야 했는지 해답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생각은 안했어요. 침입자들과 병원장 부부가 내통했다는. 무슨 소리요. 내통했다면 묶어 놓고 위협했겠소. 그 말을 하고는 하야시는 아차 싶었는지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나 머리를 굴려 바로 반격에 나섰다. 내통했다고 손 치더라도 환자가 죽는 내통이 성공한 내통은 아니지 않소. 얼굴은 퉁퉁 부어 마치 익사한 시체와 같았고 종아리 관통상으로 칭칭 동여맨 다리는 내 허리통 보다 컸단 말이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시체가 탈출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그런 자가 탈출한 것이 사실입니다. 시체가 탈출했다고요. 살아서 한 달도 못돼 회복하고는 병력을 이끌고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단 말이오. 완용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완용에게 있다는 듯이 말하는 하야시가 아니꼬왔다. 휴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 자는 불사조 같은 자요. 나에게 체포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승부를 걸려고 여기에 온 것이고요. 나도 시간이 없어요. 병원으로 나를 좀 아내 하시오. 완용이 하야시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병원은, 왜. 어디 아파요. 별 할 일 없는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하야시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병원장 부부를 만나려고요. 아참, 그들은 조센징이지요. 아닌 내국인가. 하야시가 조센징에 힘을 주면서도 미심쩍은 듯이 완용을 쳐다봤다. 너도 조센징이야 하는 눈빛을 담아. 내선일체라면서 그런 말을 쓰면 안 됩니다. 더구나 병원장 부부는 영사관에 협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나카무라 대장을 살렸고요. 그 공로로 덴노의 훈장까지 받았어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동족이고 동향이라고 편들기요. 의심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요. 내통 가능성이 있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휴의가 어디에 있고 언제 출동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하야시는 완용이 소문대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갑시다. 가서 나도 묻고 싶은 것을 묻고. 차 안에서 둘은 영사관의 싸늘한 분위기 대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가 그래야 이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하야시는 이 기회에 병원장과 더 친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도쿄로 병원을 이전한다는 소식도 있었고 이전에는 영사관이 협조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미래를 생각하면 병원장 부부와 인간적으로 친해져서 나쁠 것이 없었다. 유능한 의사를 아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은퇴해서도 일자리 정도는 하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서 일하며 괘찮을 거야. 이 참에 나도 의사나 해볼까. 

완용은 하야시와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일단 말수에게 집중하자. 여순이 알거나 내가 먼저 아는 체해도 상관 없지만 일단 여순은 뒷전이다. 수년 만에 만나는 일정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여순이 어떤 내력으로 의사가 됐는지 나는 모르지만 여순 자신은 잘 알 것이다. 좋든 싫든 지금의 여순은 나와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녀를 이용해 먹는 거지. 이득을 취하면 나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 그녀가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치자. 그게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걸 하야시가 알면. 그래서. 일단 내 목적은 여순을 보는 것이 아니다. 과거 한때를 추억하거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휴의를 잡는 것에 집중하자. 어떻게 말수를 꼬드길까. 그가 밀정이라면 시간이 촉박하다. 차라리 여순에게 기대볼까. 감정에 호소하면 어떨까. 옛정을 생각하라면서. 아니 될 말이다. 그녀는 나보다는 휴의 편이 틀림없다. 내가 휴의를 체포하는데 여순이 협조할 리 만무하다. 일단 들이밀고 보자. 그러다 보면 무슨 수가 나오겠지. 나오지 않더라도 생전에 여순을 보고 말수라는 자도 본다면 내 인생도 훨씬 더 풍부해질 거야. 인생이 풍부해진다는 생각은 완용을 잠시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완용은 갑자기 일제 고등계 형사의 신분을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악마라고 할지라도 일 년에 한 십 분쯤은 천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면 자신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누가 데려다 줬으면 하고 바랐다. 쥐도 새도 모르게 베이징 같은 큰 도시에 숨어들거나 아니면 연해주나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곳에서 살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조선 바닥에서 남의 뒤나 캐고 고문질 하는 것도 이제 이력이 날 만하지도 않던가.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상상일뿐 실현 가능성은 제로라는 것을 완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헛웃음을 크게 지었다. 여순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성숙했고 아름답고 지적이었으며 왕비와 같은 품위가 있었다. 품위있는 단어를 구사하면서 작은 몸짓을 보일 때면 마치 격 높은 귀부인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여순이 원래 저랬었나. 직위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의사라고 하니 사람이 정말로 달리 보였다. 자신의 처지를 완용은 바꿔 놓고 보았다. 여순의 남편으로 총이나 칼 대신 흰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로 말이다. 그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곧 자신의 직성과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국가를 위한 일을 하고 저 자는 겨우 아픈 사람의 투정이나 들어주고 있다. 제 돈벌이를 위해. 격이 다른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저런 일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거야. 여순도 마찬가지고. 여순이 나를 택했으면 애국이 뭔지 충성이 뭔지를 알고는 벅차오르는 기분을 알텐데. 겨우 한다는 것이 흰 옷 입고 종이나 뒤적이는 여자가 그런 큰 것을 알겠어. 기껏해야 피나 닦고 살을 꿰매는 일만 할 걸.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오. 하야시가 말대신 뜸이 길어지자 완용을 재촉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고요. 아니오.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소. 그것은 좋은 거시오. 병원이 멀리 있다 봅니다. 아니요. 다 왔어요. 저기 도쿄여관 보이지요. 저기를 끼고 돌면 바로 십자가를 단 병원 간판이 보일거요. 다 왔네요. 들어 갑시다. 하야시가 성큼성큼 걸었다. 마치 제집 인 것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완용은 간판을 보았다. 부부병원. 얼씨구나. 여순이 읫라. 이거 원. 그는 그 순간 하야시가 보이지 않자 급하게 뒤를 따랐다. 하야시의 목소리가 드렸다. 병원자은 어디 계시나요. 마침 차트를 옆에 끼고 있는 여순이 복도를 거닐다가 하야시와 마주쳤다. 아, 형사님. 병원장님은 잠깐 출타 중이세요. 오전에 잠깐 볼일이 있다고 나가셨어요. 오후에 들어오는데. 전하실 말씀이라도.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글쎄요. 영사관에 간다고 했나. 아니면 외과의사 오찬 모임에 갔는지. 윤사장님을 만날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그때 말수가 그녀 곁에 섰다. 모자를 벗고 공손히 인사했다. 나 경서의 종로서장 완용입니다. 처음에 여순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 완요이라고요. 죽마을 그 완용. 여순이 짧은 비명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 정말요. 정말이네요. 오빠가 서장이 됐다는 말은 들었어요. 성공했네요. 성공은 여순 의사님이 아니시오. 나는 좀 빠질까요. 그럴 필요없어요. 완용보다 여순이 먼저 잡았다. 잠깐만요. 저기서. 여순이 손가락으로 간이 의자를 가리켰다. 좀 기다리세요. 기다리고 있는 환자 한 명을 보고 나올게요. 여순이 급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완용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때요. 죽마을 고향 친구를 보니. 감회가 새로운 가요. 뭐 그렇지요. 어릴 적 친구니 아니 그렇다고 할 수 없고. 또 내가 온 목적을 생각하면 좀 그렇기도 하고요. 아, 나는 좀 가봐야 겠어요. 영사님이 기다리실텐데. 따로 보고 드릴 것도 있고 해서. 오후에는 영사관에 있을 거요. 필요하면 연락하시오. 하야시는 완용과 눈인사를 하고는 병원 밖으로 나갔다. 완용은 그의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은 여순이 들어간 방에 고정돼 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병원 관계자 인듯 한 사람이 와서는 들어 오시라고 여순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완용이 여순과 마주 앉았다. 어디 아프신가요. 아니요, 난 이렇게 멀쩡해요. 이거 어색하군. 반발하고 싶은데. 환자도 있고 의사 선생 체면을 생각해 서로 존대합시다. 첫 질문 치고는 좀 고약해. 하지만 내 방에 온 환자에게 나는 늘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지요. 그렇다면 나도 내 일을 시작해야지. 휴의는 어디로 빼돌렸어요. 다 알고 왔으니 서로 불쾌하지 않았으면 해요. 다 알고 왔다면서 왜 내게 그걸 물어요. 완용이 여순아 그러지 마. 우리 잘 해 보자. 신문도 안 보셨어요. 독립군으로 지금 두만강에 집결하고 있다던데요. 오늘 아침에 났나. 이거 보세요. 여순이 질료실 책상 위에 있는 신문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완용은 신문을 잡았으나 볼 생각이 없었다. 이거 십년 만에 만나서 이런 대화를 하다니. 미안하오. 완용이 점잖게 나왔다. 여순은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자의 악행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고 괜히 어물쩍 하게 대했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무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여순은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은 너 같은 작자가 드나들 곳이 아니라고 쏘아 주고 싶었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기세등등하게 앉아서는 여전히 가해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집어 던지고 싶은 놈이야. 여순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점잖게 물었다. 상하이 영사관으로 발령 받았나요. 그건 아니고. 남편분이 어디로 출타하셨나. 이제 곧 오실때가 됐어요. 그렇군. 한 번 만나 보고 싶군. 결혼식에도 못오고 했으니 인사라도 해야지. 저 능글 맞은 놈. 난 네 실체를 알아. 여기서 죽여 버리고 싶어. 날 그곳으로 보낸 놈이 너지. 그러나 난 말하지 않을 거야. 숨길 거야. 그래 일본에서는 어떤 일을 했어요. 덕분에 군납 업체에서 일하다가 운이 좋게도 도쿄대에 입학했어요. 의과대학에서 내과를 전공했네요. 그렇군. 우리 죽마을에서 성공했어. 여순아 축하한다. 완용이 손을 내밀었다. 나를 축하한다고. 네 놈이 나한테 종로서장인 것을 축하받고 싶겠지. 저기 환자가 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여순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더러운 놈. 네 놈이 내 앞에서 출세를 자랑하고 의젓하게 폼 잡고 있지만 이제는 당할 내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완용이 여순에게 살갑게 대하려고 억지 웃음을 짓고 말을 부드럽게 했다. 여순아, 이렇게 만나다니. 마치 헤어진 옛애인처럼 부르는 군. 더러운 그 혓바닥을 뽑아 주고 싶어.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진찰좀 해드릴까요. 아니, 아니 됐어요. 난 병원이라면 질색이야.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자식아. 피곤하시요. 마침 빈 병실이 있으니 좀 쉬시지요. 남편 올 때까지만이라도. 그래 네 놈이 누우면 영양제라고 독극물을 찔러주마. 찢어 죽여도 속 시원치 않을 놈. 그래 휴의는 만나 봤어요. 이자는 반말을 하다 존대마를 하다 아주 제멋대로야. 원래 그런 놈이라는 걸 알지만 구역질이 나. 환자가 밀리네요. 여순이 간호사를 불렀다. 잠깐만 아까 그 자리에서 좀 기다려 주세요. 괜찮으시면 빈 병실에 누워 계시고요. 아니면 차 한잔 하고 가세요. 이거 완전히 나를 잡상인 취급하는구먼. 알았어요. 그러리다. 완용이 신문을 들고 진료실을 나가면서 경성에도 병원이 많다고 많아 하면서 중얼거렸다. 

여순은 생각했다. 원수가 제발로 찾아왔다. 복수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래 죽여 버리자. 주사 한 방으로 끝내자. 말수가 오기 전에. 아냐 그건 아냐. 그래도 남편의 말을 들어보고. 그건 안 되지. 그러라고 허락할리 없어. 자칫 조사를 받게 될지도 몰라. 쇼크라고 둘러대면 되지만. 그래 일단 환자를 보고 난 후 생각하자. 그런데 저렇게 나오니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것도 아니고. 실제로 모를 수도 있고. 이를 어쩐다. 종로서장 자존심이 있지. 진료실에서 나가라고. 그래 나왔다. 그런데 여기 대기실이라. 피의자가 이런 기분인가. 복도에서 기다리는 오랏줄에 묶인 불량선인들의 마음. 죄 지은 게 없는데 내가 괜히 죄인 처럼 오그라들어. 나쁜년. 혼사까지 오간 옛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덥석 안기지는 못할망정 나가있으라고. 완용은 아무렇게나 신문을 펴 보았다. 휴의 사건이 나왔다는 말도 잊고 그냥 무심한 듯 펴 본 장에서 휴의 이야기가 있었다. 여순이 말했었지. 이제 생각났는데 놀라기는 뭘 놀라. 이 놈이 나보다 난 놈이네. 난 신문에 기사 한 줄 나기 어려운데 이 놈이 버젓이 사진까지 박혀 있어. 아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전선을 알리면 누가 이득이야. 휴의놈인가 아니면 나인가. 두만강에 갔다고. 아니 간다고. 아니 언제 가는데. 기사로는 정확한 것이 없었다. 완용도 이미 소문으로 들었던 것이다. 이거 기자질 참으로 쉽구먼. 난 형사질만 쉬운 줄 알았더니, 기자질이 더 쉬워. 명함 하나 파고 이 참에 매일신보 기자나 해볼까. 이런 식의 기사라면 누워서도 쓰겠어. 태평양 전선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상하이 조선 독립군이 두만강 도강을 시도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독립군을 이끄는 무리는 휴의라는 자로 이 자는 오래전에 지명 수배된 거물 독립군 대장으로 이번에 사단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참 쉬워. 글 쓰는 것이. 나라면 어떻게 쓸까. 이건 어때. 조센징 독종 휴의 수배자가 강도짓을 벌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장소는 조중 접경지역인 두만강 일원으로 그를 따르는 도적떼의 규모가 군대로 치면 수 천명에 해당하는 사단급이라고 한다. 뭐가 나. 내가 쓴 글이 훨씬 더 눈에 들어오지. 애잇 내가 신문사를 하나 차려볼까. 기자놈들 교육을 좀 혹독하게 시켜야지. 이게 일기야 기사야. 도적 수괴를 처단하기 위해 경성에서 급파된 종로서장 완용은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척살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한편 도적놈 수괴 휴의와 대적할 종로서장은 지략이 뛰어나고 물러나지 않는 용맹함으로 조선에서 최고 셀럽으로 인기를 끄는 이 시대 최고의 형사로 추앙받고 있다. 흠흠. 누구 것이 낫나고. 어라, 저기 오는 저 놈이 말수라는 병원장인가. 일단 허우대는 멀쩡하고. 낮술을 했나. 얼굴이 뻘겋게 달아 올랐어. 거침없는 것이 틀림없어. 완용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기요, 혹시 말수 병원장 아니신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이거 반갑소. 이렇게 만나다니. 나 종로서장 완용이오. 완용이라고요. 아내분께서 말씀하셔서 알 거라고 하던데요. 말수는 생각하는 척 뒷머리를 긁었으나 종로서장이라는 말을 할 때 이미 완용임을 직감했다. 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사람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경성에서 좀 먼 거리이긴 합니다만. 못 올 곳은 아니잖소. 통영에서도 왔는데. 여순이 어디까지 애기했지. 고향 애기 하다 말했지. 기억나네. 그러게요. 여순 사모님은 잠깐 인사했어요. 진료가 바빠 인사만 하고 여기 이렇게 대기하고 보시다시피. 완용이 점잖을 떨며 여기 이 자리 하면서 이 자리가 자기가 앉기에는 턱 없이 모자라다는 인상을 썼다. 이거 고향에서 오신 귀한 손님인데. 대접이 이래서야. 말수는 로비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말하려는 직원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들 바쁜지 보이질 않자 그럼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옷을 좀 입고. 여기 앉아 계세요. 그럴게요. 다시 여기에 앉아서 기다릴게요. 완용이 허탈한 표정으로 간이 의자에 다시 앉았다. 이거 너무 하는 군요. 수금하러 온 건달도 이런 대접은 안 바다요. 병원에 자리 부탁하러 온 것도 아닌에. 말수는 그러 푸념을 뒷머리로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 질러갔다.

형사님이 알고 있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형사님이라니. 동네 오빠인데 이거 섭섭하오. 오빠라고 부르기가 민망하면 오라버니 어떻소. 완용이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차 한잔을 앞에 놓고 기분이 좋아진 완용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자기라는 듯이 부하듯이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형사님도 괜찮고요. 일이 잘 풀리면 간혹 이렇게 만납시다. 여기도 좋고 경성도 좋고, 그도 싫으며 도쿄에서 만나도 괜찮을 겁니다. 완용이 앞서 나갔다. 이 자가 허풍을 떠러대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상대해 주지만 꼴값을 떠는 군. 하긴 생긴 걸 보면 꼴값을 할 상은 아니지. 말수는 불쾌했으나 참았다. 오라버니라고. 이 놈이 날 가지고 노네. 그냥 형사님이라고 불러요. 나고 그게 편하지요. 그렇지요. 의사 선생님. 완용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가. 말수가 그 시선을 따라갔다. 눈꼬리가 위로 크게 찢어져 올라가고 잇몸이 크게 돌출된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원숭이 주둥이처럼 보였다. 사람인 내가 참아야지. 저런 짐승과 다툴지 말자. 말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리 와이프 한테 선생님 이야기는 간혹 들었습니다. 이웃 동네에 살면서 오빠, 동생하는 처지 였다고요. 그래요,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으시네. 내가 오빠요. 두 살 위지요. 하하하. 형사님 덕분에 일본 취직에 성공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만나면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생각했어요. 마침 잘 됐네요. 점심 식사나 하지지요. 아니 됐어요. 하야시가 이리로 모시러 온다고 했어요. 영사님과 선약이 있어 죄송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여순은 불편한 자리에 가지 않는 것이 다해이라고 여겼으나 겉으로는 미안한 척 했다. 공장에 취직하고 돈을 벌어서 공부하고 의사가 됐어요. 그 얘기는 아까 여순 동생을 통해 들었어요. 참 대단해요. 죽마을 있을 때도 보통내기가 아니었어요. 이 자식봐라. 아주 나를 가지고 노네. 동생이라니.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그런 걸 알았다니 나 한테 단단히 한 턱 쏘아야 겠습니다. 완용이 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나중에 받아 먹기로 하고요. 혹시 휴의 동향은 알고 있는지요. 그가 여순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말수에게 했다. 출정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도는데 정확한 일정은 나왔나요. 신문에 난 것 말고요. 말수가 어이 없다는 듯이 완용을 보면서 그것은 조선 제일의 형사님이 더 잘 아실테지요. 우리같이 병원에 갇혀 사는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요. 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묻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탈출했고요. 알고 있는대로 입니다. 신문에도 크게 났어요. 탈출에 혹 의사선생이 도움을 주지 않았나요. 완용이 노골적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여순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우리 사모님은 휴의에게 마음이 있었으니까. 조심하세요. 난 당신에게 잡힌 피의자가 아니니까. 여순이 쏘아 붙였다. 말을 가려 합시다. 말수가 금방 한대라고 칠 듯이 험악하게 나왔다. 아, 참으시오. 완용이 머쓱한 듯이 권총집에 손을 갖다 댔다. 그는 자신이 불리하거나 난처하면 항상 하는 손짓대로 이번에도 습관처럼 그렇게 한 것이다. 조선사람끼리 이거 왜 이러십니까. 타국에서는 범죄자도 애국자가 되는 판인데 낯선 이국에서 동지애는 없고 죄인 취급하다니요. 말수가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여순 동생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나는 내 직무에 충실할 뿐이요. 대일본 제국이 독립운동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아파야 쓰겠어요. 일본 영사관에 파견 나온 야마모또 하야시 형사가 다 조사하고 끝낸 일입니다. 끝난 일을 가지고 상하이까지 와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말수는 짓이라는 말을 쓸까 말까 고심하다 그냥 뱉어버렸다. 짓이라. 그래 내가 할 짓이 없어 여기까지 왔어요. 병력은 부하에게 맡기고. 내가 지금 두만강 언저리에서 전투를 하게 생겼단 말입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전투요. 그런 애국적 행동을 미워하는게 아니 잖아요. 고생하시는 걸 알지만 핀트가 잘 못 맞았어요. 용의자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아야지요. 환자도 있는데 행패로 보여요. 그리고 더 알고 싶으시면 영장을 갖고 와서 다 뒤지시든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말수가 막 나갔다. 이거 이쯤되면. 그러지 맙시다. 우리끼리. 그래 우리끼리 왜 시비를 걸고 그래요. 그렇잖아도 요새 여러모로 신경쓸 일이 많은데. 독립군 훈련 시키느라 그간 고생이 많았어요. 넘겨 짚지 마세요. 영사관에 사전 보고하고 한 일입니다. 하야시를 만난다고 하니 영사님 면전에서 한 번 물어 보시지요. 사실인지 아닌지 내 말의 진위가 금방 드러날 테니까요. 완용이 시계를 보았다. 병원에 온지 한 시간이 넘었다. 차가 식었군요. 미안하지만 한 잔 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입에 착 달라 붙는 것이 이 맛을 잊지 못하겠어요. 역시 여순 동생은 못하는 것이 없다니까. 여순이 찻잔을 들고 일어서자 완용이 여순을 보면서 한 마디 했다.

여순이 사라지자 완용이 눈에 핏대를 세우면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우리 남자 끼리 말인데요. 완용이 잠깐 말을 멈추고 다시 말수 곁으로  더 바짝 다가앉으면서 말했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자세였다. 말수는 별 시답잖은 녀석이지만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자기도 조금 앞으로 의자를 당겼다. 알려 주시오. 휴의를 잡으면 그 공을 전부 의사 선생에게 돌리겠소. 지금 압록강이 뚫리고 독립군 일부가 함경도에 상륙했소. 내선일체 한 몸도 부족한데 조선인 마저 이러면 우리가 본국에 무슨 낯으로 뵈겠소. 의사 선생, 휴의를 체포하면 독립군은 그대로 와해됩니다. 독립을 하는 단체가 여기 상하이만 해도 수십 개가 넘고 참여자도 사단 병력입니다. 사람 하나 없앤다고 독립운동 자체가 사라지지 않아요. 더구나 본국은 태평양 전쟁의 큰 그림을 봐야지 지엽적인 하찮은 것에 너무 힘을 쏟는 것 아니오. 말수가 나름대로 처방을 내리고 방향이 틀렸다고 완용에게 훈수를 두었다.

싸울 대상을 독립군이 아닌 서양 연합군에게 돌리는 것이 현명하지요. 그런 것으로 논쟁할 시간이 없어요. 삼 년 전이라면 모를까요. 독립군이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울에서도 잇따라 도발이 일어나고 마산이나 대구에서도 들고 일어났어요. 목포는 진압하는데 열흘 이상 걸렸고 도망자들을 아직 다 체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태평양 전쟁은 커녕 조선에서도 쫒겨나게 생겼단 말이오.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말수가 진지하게 나왔다. 이제 말귀가 조금 통하네요. 종로서장인 내가 그래서 여기 상하이 까지 온 거 아닙니까. 애국 합시다. 이런 판국에 휴의 부대가 평양이나 경성에 도착해 시가전이 벌어지면 사태가 어찌 되겠소. 걷잡을 수 없게 되겠지요. 분노한 흰옷 입은 사람들이 경찰서나 관공서는 물론 일본인이나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들을 찔러 죽이겠지요. 그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듯이 말하네요. 그것을 경계하자는 말입니다. 우리 손잡아 합니다. 완용이 손을 내밀었다. 어떨결에 손을 잡은 말수는 이 자의 손이 퍽이나 차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작고 연약했다. 남자의 손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이런 손으로 고문하고 지지고 살을 찢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꼭 여자손처럼 작고 가늘어. 이 손으로 그래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다고. 손쉽게 부러뜨릴 것 같은 갸냘픈 손가락으로 눈을 찌른단 말이지. 종잇장처럼 가볍게 손을 놓으면서 말수는 나야 당연히 대일본제국을 위해 협력하지요. 그나저나 포목점집 사장은 만나보셨어요. 그 분이라면 정보가 워낙 많아서요. 나한테없는 것을 그 분은 가지고 있어요. 당장 도움을 주고 받을 사람은 나보다는 포목점 집 사장이 더 적합하지요. 말수는 자신은 빠지고 그 분을 만나라고 공을 넘겼다.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어 많은 시간을 쓸 수가 없었다는 핑계는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환자 대기줄이 생겼고 완용이 앉았던 자리를 네 명이서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저기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엄살이 아닌 걸 형사님도 아시지요. 완용은 말수라는 자가 일부러 형사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여겼다. 때에 따라서 서장님이라고 했다가 형사님으로 불렀고 조선에서 온 귀한 손님이라고 했다. 난 이런 놈들이 싫어. 머리를 아주 빠르게 굴려서 내가 따라가기가 힘들어. 여순 동생도 힘겹겠어요. 아, 참 아이들은 있나요. 네. 말수는 가볍게 대답했다. 완용은 아들인지 딸인지 묻지 않았다. 아들 놈 하나 있어요. 자식농사 잘 지시오. 병원 걱정을 안해도 되겠네요. 난 순사질 물려질 아들놈 하나 없으니. 완용이 일어섰다. 아 참, 점례 소식은 들었어요. 여순동생. 여순을 보며 말수가 깎듯한 존대말을 쓰면서 물었다. 남편 앞에서 말을 함부하지 않겠다느 조심성이 드러났다. 미술 잡지에서 봤는데 지금 일본에 있다고 하대요. 그렇군요. 우리 셋이서 같이, 아니 넷이서 같이 만나면 좋겠지만. 말수는 여순 동생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으나 그냥 참고 넘어갔다. 그럼 이만. 완용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체포해서 경찰서로 끌고 가지 않는 한 더 나올 것은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춧가를 마구 퍼붓고 싶었다. 그러면 다 불텐데. 저 년 저 여우같은 년도 같이 매달아 줘야지. 잘 가시오. 조선으로 가기 전에 식사한번 하시지요. 여순이 말했다. 진담이지요. 난 한 번 들은 말은 기억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럼 이만. 완용이 떠났다. 개자식. 말수가 소리쳤고 여순이 조용히해요, 그러다 듣겠어요. 정말 들었는지 완용은 가다 뒤돌아 서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저 놈, 어디서 개폼을 잡아. 말수가 손을 흔들며 입으로는 이렇게 욕을 했다. 
 

 

완용은 포목점 사장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었으나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가 확보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 자는 밀정에 이중 첩자이면서 능구렁이라서 한 두 시간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파학하기 어려웠다. 말수나 여순과는 또다른 난관이 기다릴 것이고 그런 것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예정된 영사관 면담을 위해 완용은 따라온 부하 하나를 데리고 마차를 불렀다. 그가 마차를 잡기 위해 서성대는 동안 돌아간다던 하야시가 여보시오 완용 서장님 하고 반가운 듯이 불렀다. 가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가 다가오면서 뭐 좀 얻어냈어요, 하고 물었다. 우리 조선사람은 입이 무거운 편이지요. 그렇게 쉽게 입을 열면 조선사람이 아니지요. 그건 또 무슨 말이요. 소득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이 하야시가 얻지 못한 정보를 다른 사람이 얻을 수야 없지요. 하야시가 말꼬리를 높였다. 결론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내가 뭐라고 했소. 의사 부부는 용의점이 없다고. 우리 영사관이 조사한 것이 틀림없어요. 하야시가 빈손이라고 말하는 완용을 타박했다. 그러나 말수를 만난 것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순을 본 것이고 여순을 통해 점례가 일본에 있다는 것과 그가 곧 파리로 떠난 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것은 말수의 입에서 나왔다. 휴의는 예전의 얼굴이 아니요. 부모님도 못알아 볼 것이오. 그러니 얼굴로 휴의를 체포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시오. 지무는 있잖소.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오. 하야시가 떴으나 사라져서 신분확인이 안 됐어요. 저런. 아주 가짜 인간으로 살겠다고 작정을 했군. 그러면 어떻게 안 단 말이오. 그걸 낸들 어찌알겠소. 본인의 입으로 내가 휴의료 하지 않는 이상 알 재간이 없지요. 다른 방법이 있으면 형사님이 한 번 알아 보시지요. 하야시 상. 영사님과 약속은 몇시지요. 시간을 따로 정한 것 아니요. 대개는 그곳에 있으니 가서 면담 신청해야지요. 그나저나 가서 무슨 말을 하려고요. 할 말이야 왜 없겠어요. 말하다 보면 새로운 지략이 나올지도 모르지요. 바쁘신 분이니 눈치껏 인사하고 나오시오. 하야시가 주의를 주었다. 그 정도 감은 나에게도 있소. 그 말을 하면서 완용은 상하이에서 볼 일은 거의 다 본 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내일 부대로 복귀해 휴의와 맞붙을 준비를 해야지. 그나저나 여순이 고년이 매우 쌀쌀맞게 대하는 걸. 이래도 되는 거야. 제 년이 의사면 의사지 완용을 무시하는 듯하는 태도는 또 뭐냔 말이야.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위세를 가진 내가 체면이 말이 아냐. 서방앞에서 유세를 떨다니. 이게 무슨 망신인가. 상하이가 아니고 조선땅이라면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어도 시원찮은 판국이다. 완용은 여순에 생각이 미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네 년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다. 작전이 끝나면 작살을 내주마. 내가 고맙지 않은 모양이지. 공장에 가서 돈 벌고 그 돈으로 의사가 됐고 지금 잘살고 있다면 제일 먼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야지. 나쁜 년. 고작 한다는 것이 어디 아픈가요. 아프면 내가 치료해 줄게요. 공짜로. 이게 무슨 개수작질인가. 그리고 점례년도 그렇다. 내가 종로서장이라는 것을 알면 먼저 알은체를 하고 달려와야지. 날 보고도 모른체 해. 이 년들이 서로 짜고 작당질을 하고 있어. 에잇, 다 싹 잡아들여야지. 여차하면 처치하고. 이것들이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 놀아. 좋아 한 번 본때를 보여주마. 완용은 언제나 여순과 점례를 한 묶음으로 놓았다. 물론 거기에 휴의도 끼어들었다. 자신만 거기에서 빠졌다. 어릴 때도 그렇더니 이것들이 커서도 유치한 짓거리를 해. 난 홀로 떨어져 나왔어. 너희들이 삼총사 놀이는 할 때 나는 뭐냐고. 이거 씁쓸하군. 우정은 어디가고 원한만 남았나. 가슴 깊은 곳에 분노가 솟아나고 있어. 완용은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분노를 바라봤고 그것은 상대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나를 밀어내는 원인을 찾기 보다는 상대를 무작정 미워하기만 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는 관대했고 그들에게 가혹했다. 그런 마음이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 주지 못해. 배신자들. 조선에 있을 때 왜 나를 찾지 않았지. 점례야, 못 본척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이다. 내부대신의 아들 빽으로 나를 좀 더 밀어줄 수 있잖아. 헌병대장을 시키든지. 하다 못해 그림 한 점이라도 줘야지. 미술대전에 특선을 하고 돈을 무더기로 벌어서는 뭐 어쩌자는 거야. 괜히 뒤만 쫓았어. 여순에게 한 것처럼 내가 완용 오빠다 하고 인사동 갤러리에서 짠하고 나타날 걸. 폭파범 잡는다고 허둥대기만 했지, 내가 얻은 게 뭐냐고. 비록 내가 술수를 썼다고는 하지만 결과가 좋잖아. 그도 뻔하지. 공장 같다가 돈을 벌었고 우연히 내무대신의 아들을 만나 교류하다 같이 살고 유학을 가고 파리에서 화가로 인정받고. 난 뭐야, 죽쒀서 개줬나. 다들 나는 제쳐놓고 놈팽이 하나씩 차고서 나를 무시해. 이 종로서장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완용은 울분을 삭이기 어려웠다. 영사는 그날 영사관에 없었다. 완용은 두만강 부대가 급하다면서 영사 면담을 작전이 끝난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갑시다. 난 바로 두만강으로. 그럼 나는 다시 병원으로. 완용과 하야시는 각자의 길로 가기 위해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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