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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03 17:58 (일)
길지 않은 잠이었으나 환자에게는 보약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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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잠이었으나 환자에게는 보약과도 같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9.0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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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휴의는 다시 잠들었다. 길지 않은 잠이지만 환자에게는 더 없는 보약이었다. 잠은 어떤 약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수술환자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휴의는 알고 있었다. 잠을 자야 한다는 것, 잠을 자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고 운 좋게도 영혼이 혼란할 때 잠이 들었다. 그가 모든 것을 잊고 잠이 들었을 때 병원의 주인인 말수가 소리를 내며 자신이 오고 있음을 알렸다. 병원의 식구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런 태도로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말수가 병원 문을 휙 열었다. 주말의 병원은 어느 가정집처럼 조용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호기로운 행동이었다. 조용함은 곧 시끄러움으로 변했다. 말수는 거칠게 없었고 당당했다. 자기 집에 들어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마는 그는 일부러 그렇게 했다. 사나운 짐승처럼 영역표시를 확실히 한 것이다. 여순은 저녁만 먹고 온다는 그가 늦게 올 것으로 짐작했다. 술도 거나하게 걸치고 휘청거리며 들어와서는 환자 걱정을 잔뜩 늘어놓을 것이다. 둘은 맞고 하나는 틀렸다. 그는 결코 늦지 않았다. 10시 전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녁만 먹고 오지는 않았다. 술이 들어갔다. 기분을 내기에 딱 좋은 양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혀가 꼬부라졌다. 환자를 살피기는 글렀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 그나마 일찍 들어온 것이 어디인가. 안 돌아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수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타의보다 자의가 더 강해야 한다. 말수는 술을 먹으면서도 의사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여순은 수술실을 들락거리면서 눈은 언제나 출입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오는지 아니면 형사가 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들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은 맞아 떨어졌다. 형사는 얼신 거리지 않았고 무장 경관도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휴의는 이것으로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것일까. 완전히 혐의를 벗고 조선깡패로 사건이 마무리됐을까. 단순 절도 사건임. 무언가 행패 부릴 것이 있는지 두리번 거리다 경찰을 만났고 그들의 주특기대로 무작정 튀다 총을 맞았다. 상황은 이렇게 처리됐을까. 아니면 부러 허점을 보여 기회를 엿보기 위한 일제의 술책일까. 용의자가 안심하고 있을 때 덮치자, 덫을 놓고 때를 기다리자, 이건가. 여순은 나름대로 탐정이 되어 여기저기를 집고 저울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은 말수가 포목점집 사장을 만나 실수는 하지 않았을까 염려한 대목이다. 과거의 말수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해도 설마 그것까지 털어 놓을까 싶었다.  그러나 말수는 여순의 예상 밖에서 놀았다. 말수의 한계였다. 이것 보시오. 형님. 우리 병원에 환자가 있단 말이요. 환자. 병원에 환자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환자가 그냥 환자가 아니오. 그러면 가짜 환자라고 왔소. 아프지 않은데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는, 보험을 많이 들어 논 모양이구려. 내 말 좀 잘 들어요. 말수가 단숨에 잔을 비우고 입맛을 다시더니 한 잔 주쇼 형님, 하고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뜸을 그렇게 들이시나 의사선생. 그러다 솥의 밥이 다 타겠어요. 맨 정신으로 말하지 못할 무슨 곡절이 있는거요.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환자가 보통 환자가 아니거든. 거물이라도 왔소. 모택동에 쫓긴 장개석이 부상당한채 실려왔오. 그보다 더 귀가 번쩍 띄일 인물이오. 바로 조선독립군 총대장 휴의라는 말이오. 그 자가 지금 총상을 입고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그게 정말이오. 조선인 중에 몸값이 높다는 바로 그 휴의 말이오. 그렇소. 형님. 영사관에는 알렸어요. 윤사장이 눈에 빛을 내며 물었다. 현상금이 장난이 아닌데. 돈은 벌 때 벌어야지요. 동생, 안 그렇소. 윤사장의 작은 눈이 번개치듯이 번쩍 빛이 났다. 서두를 것 없어요. 지금은 도망가라고 해도 못해요. 움쩍달싹 못하니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요. 그렇게 상태가 심해요. 말도 못해요. 다리에 총상이고 얼굴에 두 발 맞았어요. 도합 세발이라. 그럼 죽은 거나 다름없네요. 그렇소. 그런 환자를 상대로 돈벌이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아요. 죽은 자를 놓고 돈벌이를 한다는 것이. 말수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듣고보니 그렇긴 하겠네요. 더구나 조선 동포이고. 그래서 앞으로 어쩌려고요. 조금 기다려 야지요. 혹시 형님이 신고하지는 않겠지요. 오늘따라 말수는 윤사장 대신 형님이라는 호칭을 자구 쓰고 있다.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일까. 내가, 이 윤사자이. 윤사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노파심에서 한 말이에요. 그러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말수가 딴전을 피우며 물었다. 동생, 나를 그렇게 못 믿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해서요. 내가 아니고 다른 누가 먼저 신고하면 내 처지가 어찌 되겠어요. 자기편이라고 여겼던 내가 배신했다고 치를 떨 것이고 이는 일본왕의 훈장이나 나카무라 대장의 편의 요구도 없던 것이 될 것 아니오. 그야 그렇지요. 중대한 사안이니. 신고하더라도 동생이 해야지요. 그걸 아는 내가 동생 몰래 먼저 경찰서로 달려가지는 않을 거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단단히 붙들어 매고. 주인이 넥타이 끈을 잡아당기면서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술이나 마십니다. 영 오늘은 기분이 그래요. 독립군 총대장이 일제의 총을 맞고 쓰러지다니. 이게 원. 포목점 집 사장이 위로인지 걱정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게요. 수술하느라 신경 썼더니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많이 충혈됐네요. 의사 선생도 다른 사람 건강도 그렇지만 자기 건강좀 챙기세요. 그러게요. 이런 눈으론 응급환자가 와도 안 되겠어요. 술을 과하게 드지시 마세요. 걱정해 주니 고맙네요. 안 그래도 안 사람에게는 저녁만 먹고 온다고 했어요. 허허. 말수가 혀를 차면서 어디 그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인가요. 그렇지요. 그런 약속은 어겼다고 해도 비난거리가 못 되요. 건배. 둘은 잔을 들어 올렸다. 불과 한시간 전에 말수와 마주 앉은 사내 사이에서 오간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여보, 그곳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 크 윽. 그걸 자랑이라고 해요. 신신당부 했더니만. 그 새를 못 참고. 낭패라는 듯이 여순이 씩씩 거렸다. 그럼 우리는. 빨리 대책을 세워야지요. 말수는 대답하지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건지 듣지 못해 그런 건지 알수 없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말수가 또 흥얼 거렸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아요. 빨리. 영사관에 전화를 돌리던지. 정말 그것이 원하는 바는 아니겠지. 답답해요. 이제 환자는 체포되는 건가요.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짜증이 몰려온 여순이 버럭 화를 냈다.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서는 어떻게. 사내가 그깟 약속하나 지키지 못했다 이거지. 그러니 난 사내가 아니란 말씀. 말수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 시비를 걸고 넘어지기로 작정했나. 여보, 여순을 울고 싶었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말수는 여순의 그런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다. 대꾸 없이 같은 구절을 한 번 더 부르더니 갑자기 조용히 말했다. 발음을 정확히 하려고 애썼으나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크윽,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그런 애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상하이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에 만족한다고. 알았어. 알았냐고. 나 그 사람 믿어, 윤사장을 믿는다고. 크억 크럭. 당신, 정말로 말한 건 아니죠. 말했다니까.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걱정 마. 바로 신고하지는 못 할거야. 그리고 신고는 하더라도 내가 하기로 했어. 그래서 상금을 그 사람이 아닌 내가 타거든. 그걸 말이라고 해요. 크억 취한다. 어 술 냄새. 독하네요. 냄새에 취하겠어요. 미안. 형님은 좀 단순하거든. 당신도 그래요, 하려다 여순은 꾹 참았다. 내가 이렇게 말했어, 여보 잘들어 이 대목이 중요해 크억. 총알 세 발을 맞았다. 하나는 다리에 두 발은 머리에. 오늘 밤 죽을지도 모른다. 죽을 확률이 팔할이 넘는다. 이렇게 말했거든. 영리한 사장이 그 말을 이해 못하겠어. 그러니 적어도 오늘 밤에는 신고하지는 못할거야. 같은 조선사람끼리 더구나 독립군 총대장이 그런 상태인데 영사관에 연락하겠어. 당신 같으면. 말수가 칭찬을 바라는 듯이 그러겠느냐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라면서 중얼 걸렸다.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나, 잘했지. 적어도 반 나절은 번거야. 그 전에 당신이 알아서 빼돌리던지 말던지 하아. 머리가 아파. 속이 울렁 거리고 나 정말 취했나 봐. 당신 취한 게 분명해요. 정말. 어 취한다. 말수가 병원 대기실의 의자에 엎어졌다. 여순은 그런 말수를 그대로 남겨두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여순이 나오자 말수는 자지 않고 있다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취한 사람 같지 않은 태도였다. 자고 있어요. 그냥 내버려 둬야 맞지요. 그래. 환자에게 더 이상 약물 주사는 위험 천만행 행동. 지금은 쇼크가 제일 위험 하거든. 전선에서 내가 아주 많이 봤어. 당신도 알 거야. 총상 환자는 출혈 아니면 쇼크야. 아프다고 마구 주사를 찌르니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는 거지. 잠시 깬 적은 없었고. 헛소리했는데 그걸 깼다고 할 수 있나요. 글쎄, 내가 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중간이라고 봐야지. 참, 내. 어이가 없군요. 어서 자요. 자고 일어나서 한 번 봐줘요. 환자를 살려야지요. 다른 환자도 아니고. 오케이. 알아 모시겠다고. 방으로 안 가요. 그럴 힘이 없어. 여기 야전침대에서 자야 쉽게 일어나지. 난 일어나기 위해서 자는 거야. 취기 때문이 아니고. 적어도 내 환자는 내가 책임져. 죽이지는 않을 테니 당신 좀 자. 박군은. 말수는 더이상 취한 사람이 아니었다. 박군까지 챙기고 있다. 연기를 한 건가. 여순은 잠깐 그 생각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곧 올 거예요. 아, 저기 오네요. 말소리와 동시에 박선생이 들어왔다. 말수가 일어나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곧 쓰러졌다. 선생님이 술 좀 드셨어요. 별 거 아니니 걱정말아요. 박선생이 서너 시간 좀 봐줘요. 나는 잠을 좀 자고 나올게요. 사모님, 그렇게 하세요. 피곤해 보여요. 잠시 쉬지도 못하셨잖아요. 그렇게 보이지요. 박선생이 보기에도. 박군이 안쓰럽다는 듯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좀 수고해 주세요. 알았습니다, 사모님.

그래야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모습 좋아요. 말수가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우린 한 식구야. 별것이 있나. 밥 같이 먹고 병원에서 같이 밥 벌어 먹으니 한 식구지. 원장님도 좀 쉬세요. 박선생. 네. 고비야, 지금이. 오늘 밤 넘기면 환자는 괜찮아 질거요. 하지만 발작이 오면 위험하니 그때는 날 지체 없이 부르고. 난 여기서 자고 있을 테니. 박군이 대답대신 말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럴 때 말수는 영락없는 의사였다.  그 전에 말이야. 크 취한다. 날 깨우기 전에 할 일이 있어. 심장 마사지. 바로 그거야. 심장을 살려야 해. 뇌로 가는 혈액양이 적으면 사달이 나. 저산소증 특히 조심하고.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누군가요. 조선깡패 라면서요. 어, 그래. 맞어 맞어. 말수는 그 와중에도 겨우 깡패 하나 살리려고 야근까지 서야 하는지 의심하는 박선생에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했다. 혹시 이 분이 독립운동하는. 혹 사모님이 무슨 소리 했었냐. 아니요. 직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깡패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깡패라면 이렇게 버틸 수 없어요.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정말 강해서요.깡패도 나름이지. 나중에 깨어나면어떤 종류의 깡패인지 한 번 물어 보자고. 박선생은 더 대꾸할 수 없었다. 말수가 등을 돌리고 곧 코를 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병실에 들어선 박선생은 비밀을 캐내려는 수사관처럼 환자를 이리저리 뚫어져라 살폈다. 부은 얼굴 사이로 뭔가 단서가 있는지 주사바늘이 꽂힌 손목 부근을 보기도 하고 총상으로 엉망이 된 왼족 종아리 부분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상태로 환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투사인지 깡패인지 분간하기를 중지하고 의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환자의 맥박과 호흡을 살폈다. 특별한 이상징후는 없었다. 간혹 헛소리가 나왔으나 그것은 그런 환자들이 겪는 일종의 잠꼬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환자 옆의 간이 의자에 몸을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 무사히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 예감해 보았다. 그러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며칠 살펴봐야 할 것이다. 박군은 휴의를 남겨두고 수술실을 나왔다. 다른 입원 환자들을 잠깐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삼십 분쯤 후 수술실로 돌아온 박군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말수가 삐딱한 자세로 환자의 심장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선생님, 발작이 일어났나요. 말수가 힐끗 뒤돌아 보았다. 흰자위가 가득한 눈에 이상한 살기가 느껴졌다. 박군은 주춤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너, 환자 지키라고 했지. 어딜 간 거야. 이새끼. 쌍욕이 뛰어나왔다. 그것은 천둥에 벼락을 동반한 호통이었다. 다른 환자 회진 돌았습니다.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박선생이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 어서 와. 바꾸자. 아니. 됐다. 한고비 넘겼다. 난 자야겠다. 말수가 비틀거리면서 수술실을 나와 다시 자기 쇼파로 갔다. 기분이 언짢아진 박선생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화를 삭였다. 말수가 아닌 자신이 문제였다. 다른 입원 환자 가운데 중환자는 없었다. 굳이 회진을 돌지 않아도 됐다. 그냥 수술실이 싫어 밖으로 나온 사이 일이 터진 것이다. 조금은 사모님이 올라간 이층이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의사질을 할 수 있을까. 박군은 회의감을 느꼈다. 술이 떡이 된 사람보다 내가 못하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환자를 살렸을까. 자다가 일어나니 우연히 발작이 일어났고 그래서. 아니다. 그건 우연이 아냐. 말수는 알고 있었다. 분명히 환자가 일으킬 발작과 발작에 대처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잠을 쫓았을 것이다. 머릿속은 발작에 대비한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환자 잘 지키라고. 발작 위험이 커. 그는 등을 돌리기 전에 내게 그렇게 강조해서 한 번 더 말했었다. 그런데 난 햇병아리 주제에 고참 의사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었다. 박군은 안정된 호흡을 하는 완자 옆에서 날이 샐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화장실도 안 갈 테니 마음놓고 주무셔. 박선생은 환자에게 말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희미한 수술등을 벗삼아 책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오늘 밤은 글렀다. 책이나 읽자. 이런 환자는 뇌로 가는 혈액량이 감소하거든. 그게 심장이상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저산소증이 오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망위험이 높아. 다행히 살아도 식물인간. 박군은 배운 의학지식을 점검했다. 아니 말수의 말을 복기했다. 더구나 책의 아무데나 펼친 곳이 쇼크에 관한 장이었다. 그래, 이 환자는 쇼크만 벗어나면 돼. 쇼크. 정신을 차리자고  거듭 주문을 넣었으나 청춘의 몸은 새벽녘에 그만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박군은 의자에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말수는 의자에서 떨어져 아예 거실 바닥을 안방 삼아 자고 있었다. 여순은 조용히 수술방 문을 열었다. 어떤 의식을 치를 때처럼 손잡이를 잡은 손이 경건해지도록. 작은 조명 사이로 먼저 보인 것은 환자 휴의가 아니었다. 의자에 기댄 박군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후에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시선 대신 나머지 감각은 따로 움직였다. 직감적으로 여순은 휴의가 고비를 벗어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단정했다. 고른 호흡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곤히 자는 아이처럼 휴의는 덮은 시트를 가볍게 밀어 올렸다가 내렸다를 반복했다. 여순은 안심했는지 이번에는 돌아서서 편한 자세로 자도록 박군의 머리를 옆으로 가볍게 밀었다. 박군이 기척을 느끼고 살짝 눈을 떴다. 잠이 다 깬 상황은 아니다. 다시 눈을 감았으나 이내 그러다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크게 눈을 떴다. 여순이 자기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다. 벌떡 일어난 그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조심해요. 환자와 부딪히면 위험해요. 여순이 다급하게 말하면서 박군의 팔을 잡았다. 침착해 태도였다. 박군은 얼떨결에 죄송합니다, 사모님, 하고 말했다. 그는 미안했다. 짧은 시간 벌써 두 번의 실수를 한 셈이다.

방금 전에 발작이 있었어요. 제 잘못 입니다. 발작은 박선생과 상관 없어요. 그 때 자리를 비웠어요. 원장님이 살렸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또 졸고 있었으니. 이러고도 의사 자격이 있을까요.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환자가 안정됐으니 박선생이 졸았던 거지 그러지 않았으면. 여순은 박군을 변호했다. 내가 있으니 박선생은 좀 쉬고 오세요. 제가 더 있겠어요. 아주 잠이 싹 달아났거든요. 여순은 더 말려도 소용 없을 것 같아 알아서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고 환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여기저기 만져보면서 몸에서 나오는 열을 바로 확인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니 참았다기보다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마며 손까지 부어올라 휴의의 얼굴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한 짐승 하나가 사람처럼 누워 있을 뿐이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부기는 더 심해져 얼굴 전체가 벌에 쏘인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적어도 일주일은 필요하다. 부기가 가라앉고 상처가 아물어야 사람 꼴이 될 것이다. 계단을 내려올 때만 해도 상태가 심해졌을까 하는 걱정으로 떨렸던 여순은 몸은 이제 차분해졌다. 이런 환자는 처음이지요. 네, 사모님. 이러고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의 생명은 질겨요. 특히 어떤 사람은 더 질기지요. 깡패나 건달 같지 않아요. 어떤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박선생도 그렇게 생각해요. 형사도 오고 무장경찰까지 동원한 걸 보면 요주의 인물처럼 보여요. 그렇게만 알고 있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여순은 휴의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박군까지 정체를 안다면 휴의의 신상은 더는 비밀이 아닐 것이다. 둘은 수술방에 나란히 앉았다. 박군은 조선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환자 열심히 보는 것도 독립운동이지요. 조선 사람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하는 것도 운동의 하나라고 봐요. 물론 소극적이지만. 그러면서 박군이 휴의쪽을 바라봤다. 마치 저사람은 적극적이고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그래요, 전 소심한 편이거든요. 부모님은 일찍 서울을 떠나 용정으로 왔어요. 난리 통에 상하이로 와서 겨우 정착했어요. 그러다 전쟁이 터지고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어요. 집안이 하도 어수선해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어요. 핑계지만요. 이해해요. 이 사람이 좀 특출날 뿐이지요. 여순은 이 사람이란 말을 하고 나서 그 표현이 적절한 지 한 번 곱씹었다. 이 사람이라. 그래 이 사람이지, 이제는. 그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말수가 물을 찾는지 아니면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순이 먼저 일어나서 나가보려는 박군을 잡아 앉혔다. 내가 나가 볼게요. 그리고는 만류할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여순은 깜짝 놀랐다. 말수는 가운을 입고 단정한 차림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세수를 했는지 젖은 머리를 빗으로 가볍게 빗고 있었다.

여보, 일어났어요. 어, 그래. 보시다시피. 당신은 잠 좀 자지. 방금 내려왔어요. 박군 좀 쉬게 하려고요. 말수는 거울 속에서 웃어 보이면서 나 어때. 하고 물었다. 이 정도면 아직 괜찮은 거지.  뭐가요. 내 젊음 말이야. 박군 보단 못하지만 이 정도면 아직은 쓸만할 거야. 별 말을 다 하네요. 당연히 그보다야 낫지 못하지요. 뭐시라. 알았어. 알았다고. 말수가 삐졌다는 듯이 거울 속에서 인상을 썼다. 나보다 박군이군. 나보다 휴의더니. 난 언제나 뒷전이야. 여보, 당신보다 뒤에 있는 사람은 있어도 앞에 있는 사람은 없어요. 박군이 수술실에서 나왔다. 여순은 아차 싶었다. 둘이 말하는 것을 들었나 보다. 사적인 이야기도 있었나. 들었으면 낭패인 그런 말이.  오해하려고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말수든 박선생이든. 박선생 고생했어. 말수가 보지도 않고 기척이 들리는 쪽에 대고 말했다. 그새 기침하셨어요. 좀 쉬라니까. 아무리 젊어도 잠없이는 일을 못해. 잠이 보약이거든. 그게 내 철학이고. 박군이 머뭇거렸다. 그래요. 가서 쉬고 오후에 나와요. 여순이 말했다. 괜찮아, 요즘 애들은. 삼 일 새도 끄덕 없어. 나와는 다르다니까. 난 하루만 못 자도 비실대는데. 말수가 좀 전과는 다른 말을 했다.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크게 말했다. 박선생, 괜찮지요. 그럼요. 아니야, 아냐. 어서 가서 쉬어요. 그래야 우리도 좀 마음이 편해. 말수가 재촉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고요. 이젠 농담 안할게. 자네 한테 미안해. 밤새 고생했는데. 부부끼리 편히 모닝 커피 한잔 하게 자리좀 비켜 줘요. 박군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자 말수가 쐐기를 박았다. 같이 한 잔 하고 갈래요. 여순이 미안한 듯 잡았다. 전 됐습니다. 빈 속에 먹으면 울렁 거리거든요. 박군이 마지못해 나갔다. 그러는 뒷모습에 미안한 감정이 가득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6섯 시가 다 되어 가네요. 쇼크가 왔다면서요. 박군이 그러던가. 원장님이 환자를 살렸다고 하데요. 그러면서 수술실을 비운 자신을 한참 자책하길래 위로 좀 해 줬어요. 혼날 때는 혼나야 해. 사람 목숨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여순이 일어섰다. 커피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요. 10분 후에 올라오세요. 아냐, 여기로 가져와. 환자가 깰거야. 귀신같이 밤낮을 알거든. 잠을 잤으니 환자는 일어나서 아침을 우리처럼 맞을 거야. 그때가 중요해. 깼을 때 환자는 의식이 돌아오거든.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기억을 살리려고 무진 애를 쓸 때 또 한 번 위험이 찾아와. 여순이 존경스런 눈으로 말수를 바라봤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당신 대단해요. 됐고. 칭찬은 당신이 아닌 환자에게서 들어야 하거든. 이만하면 환자들이 믿을만 하지. 의사가 깔끔해야 신뢰가 가. 그가 다시 빗질을 시작했다. 난 당신이 실력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겨우 외모에 대한 평가였나. 그런 거면 진작에 오케이 했지요. 여순이 돌아서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당신은 상하이 최고 의사에요. 최고 모던 보이고요. 나이스 가이가 우리 남편이라고요. 콧노래를 하면서 여순이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 근육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노래는 언제 또 배웠담. 말수가 혀를 짰다. 내가 부르면 늘 따라한다니까.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여순이 따라 불렀다. 가락은 청승맞았으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말수가 간 후 포목점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신고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혼자 끙끙 앓았다. 사실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말수가 왜 자신을 찾아와서 굳이 그 사실을 알렸는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직접 신고를 하면 될 것을. 왜 나한테 와서 말했지. 날 시험하는 건가. 그가 나 몰래 영사관 형사를 만나고 다니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사를 믿지 못하는 마음에 윤사장은 누구와 상의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이것은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 들었고 언제 알렸느냐는 시점이 매우 중요했다. 왜 빨리 신고 안했어. 뭐라고 답하지. 글쎄요, 그건 안 통한다. 말수가 신고할까봐서요. 그것도 약하다. 그러면 지금 신고해야 하나. 이거참, 대략 난감하군. 그리고 나도 문제야. 똑부러지게 그건 의사 선생이 신고 하시오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니면 내게 맡겨요, 하지도 못했다. 누굴 원망하냐. 이건 내 문제가. 다른 누구에게 물어볼 사안이 아냐. 그건 그렇고 의사의 꿍꿍이가 궁금해. 지금 말수는 순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 상황이다. 창당을 한다고 하고 임정에 들어간다고 하고 훈련 교관으로 참여하고 어떤 때는 일본으로 간다고 하는 등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독립파처럼 보였다가 친일파로 돌아서고. 더 의문인 것은 이런 사실을 일본 영사관이 알고도 방치하고 있는 거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데는 소질이 있는 윤사장도 도무지 말수의 정체에 대해서는 요령부득이었다. 방안을 빙빙돌던 포목점 사장은 맞다, 그가 밀정이다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가 첩자다. 밀정은 밀정을 알아보는 법이다. 나를 떠 보려고. 그래서 신고가 안 들어가면 나를 처치하려고. 들어가면 지체한 시간을 따질 거고. 그렇다고 해도. 영사관은 그럼 말수의 책임은 묻지 않나. 제일 먼저 안 자가 제일 책임이 무겁지 않나. 더구나 형사도 다녀 갔는데 모른다고 했잖아. 뭐가 뭔지. 에라 모르겠다. 윤사장은 남은 술을 한 잔 더 먹었다. 술김에 무엇을 결정해 보고 싶었다. 그런다고 해답이 나올리 없다.  진퇴양난이군. 하. 윤사장은 일부러 누구 들으라는 듯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차피 환자는 죽거나 식물인간이다. 병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깨어나려면 적어도 이 삼일은 걸린다고 했다. 일단 범인은 잡힌상태다. 그자가 무슨 꾀를 낸다고 해도 체포할 시간이 있다. 어쩐다. 이를. 도망갈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신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 영사관도 좋아는 하겠지만. 다 아는 사실을 가지고 와서 호들갑 떤다고 지청구나 얻어 먹지 않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다. 이건 포상금은 문제가 아니다. 돈이라면 자신도 부족함이 없다. 말수도 마찬가지다. 독립자금 지원을 요청하면 소액이라도 거절한 적이 없다. 병원에 환자는 많다. 보조 의사도 하나둘 정도면 잘 돌아가는 것은 분명하다. 돈도 아니라면. 윤사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며 어젯밤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그는 상하이 거리로 나섰다. 영사관으로 바로 들어갈까, 아니면 아는 형사를 불러낼까 망설이다가 병원부터 들러보자고 마음먹었다. 방향을 바꾼 그는 부부병원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에서 꽃도 하나 샀다. 병문안을 하면서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조선독립군 총대장 아닌가. 같은 조선사람으로 쾌유를 빌어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꽃다발을 든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말수가 휴의를 조선깡패로 둔갑시킨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시각 약산도 모처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임정의 안가는 아니었다. 거기서 두세 블록 떨어진 프랑스 조계의 어느 이층집이었다. 여기도 안심할 수 없으나 다른 곳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그는 거기서 임정 사무원을 만나 휴의 구출작전에 대한 상의를 했다. 선생님은 오늘 새벽에 긴급히 모처로 이동했어요. 그 자리에 몽양 선생도 같이 했고요. 그래, 선생께선 뭐라고 하시든가요. 아마 몽양과 상의한 결과겠지만. 휴의 장군을 광복군 훈련장으로 이동시키기로 했어요. 사실은 그 말을 전하려고 만나자고 했던 거고요. 훈련장이라면. 여기서 대략 10킬로 정도 떨어진 산속 인데요. 환자를 치료할 만한 공간이 있다고 했어요. 아마 완치 후까지 생각해 둔 것 같아요. 부상 환자를 그곳까지 이동하려면 환자가 위험해 지지 않을까요. 그러니 의사가 중요해요. 미리 약품을 챙겨야 하고 응급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이 동행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나요. 부부의사를. 말수라고 통영사람인데. 통영이라. 내가 밀양이니 동향사람이네. 독립자금도 대고 임정에도 최근 들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 확실히 우리편이다라고 믿을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휴장군을 맡긴단 말이오. 더구나 독립군 훈련장이라면 적에게 노출된 거 아니오. 큰 일 이군요. 이미 의사는 알고 있어요. 그곳 훈련 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누가요. 말수 병원장요. 허, 이게 어떻게 돌아가나. 못 믿을 사람에게 독립군을 훈련 시키다니요. 그분이 다이너마이트를 능숙하게 다뤄요. 아마 미군 CIC 요원보다 더 뛰어날 걸요. 실전 경험이 어마어마하다고 해요. 약산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믿지 못한다는 거요. 사실 병원 설립에 일본 돈이 들어갔어요. 돈뿐만 아니라 각종 귀찮은 서류까지 다 일본 영사관이 도와줬고요. 이런 친일파가 따로 없군. 일본 대장 나카무라 아시지요. 부상으로 다 죽은 것을 말수 병원장이 지극 정성으로 살려냈어요. 영사관이 그 점을 높이 산 것 같아요. 일왕이 훈장까지 내렸고요. 그럼 뭐지요. 의사의 정체는. 우리도 잘 몰라요. 하지만 부탁하면 들어 줄거에요. 안들어 주면. 그땐 다른 수를 써야지요. 거부할 경우 영사관에 휴의의 존재를 알린다고 봐야지요. 거부 즉시 환자를 빼돌려야 합니다.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 사무원이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치료 의사는. 제가 조금,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조선에 있을 때 병원에서 일했거든요. 의사가 시키면 환자를 꿰매기도 했어요. 급할 때는 주사도 놓고 뼈도 맞추고 이것저것 실전 경험이 조금 있어요. 그러니까 제의를 해서 받으면 훈련장으로 이동시키고 거부하면 이곳으로 데려오라는 말이지요. 이곳은 안전한 거요. 알 수 없지만 일단 형사들은 파악하지 못한 걸로 보여요. 약산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10시가 넘어가네요. 병원은 지금쯤 복잡할 거예요. 일반 환자들이 몰리는 시간이거든요. 일본 영사관도 형사를 파견했을 테고요. 나를 알아보겠어요. 만일 그들이 있다면. 아마 낯선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뒤쫓을 공산이 커요. 그러니 꼬부랑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임정 사무원은 말과 동시에 일어나서 서랍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변장 도구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변장이라면 이골이 난 약산이었지만 그것을 보니 갑자기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보다는 차라리 포인트를 주는 것이 낫겠어요. 얼굴의 특정 부분을 감추거나 더해 인상을 바꾸는 것이 몸을 전부 꾸미는 것보다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변장에 도통한 도망자에게는 도망자만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꼬부랑 할아버지는 너무 흔한 수법이다. 더구나 일제는 병원을 집중 감시하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되레 젊은이보다 더 눈에 띄기 쉽다. 그래서 검문 대상에 오른다. 가발이 벗겨지고 수염이 뜯겨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펴지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다. 약산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다른 생각 하나가 더해졌다. 그가 손에 가발을 들고 임정 사무원을 쳐다봤다. 그러나 입까지 온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사무원이 말했다. 병원에 가는 것은 제가 합니다. 선생님은 뒤로 빠지세요. 그것은 제게 필요한 것이니까요. 선생님을 불에 뛰어들어가게 할 수는 없어요. 뒤로 빠지라는 말에 약산은 기분이 상했다. 그는 물러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무원이 말 실수를 한 것이다. 약산은 그러나 초심자와 싸우기 싫어서 그만 두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고용할 인부는 있나요. 믿을 만한 사람으로. 대신 이렇게 걱정했다. 네,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의열단장님. 선생님은 방금 전에 약산은 이 일에서 벗어야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그는 빠지라는 말이 상대의 기분을 얺찮게 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는 조금 순화된 용어를 썼다. 그만큼 그는 말하나에도 조심을 기울이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선생이 직접 보냈겠지. 약산은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지요. 내가 빠지면.  휴장군은 다른 요원이 맡기로 했어요. 급히 선생님을 이리로 모신곳은 그곳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선생님 계신 곳을 알고 아침에 급습했어요.

감사한 일이군요. 그는 그런 일은 흔한 경험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그러면 이것은. 심심하실까 봐 보여 드린 겁니다. 제가 한 번 써 볼게요. 고칠 점을 말해주세요. 사무원이 머리에 가발을 둘러썼다. 선생님은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챙기세요. 약산은 조금 허탈했다. 이것은 임정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생각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휴 장군은 제가 모셔옵니다. 다른 요원이 바로 선생이었군요. 그래요. 조금의 의학지식이 이런 때 요긴하게 쓰입니다. 이동 중에 혹시 모를 위험이 있으면 긴급조치를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무래도 저 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 박선생이 동참하기로 했어요. 박군도. 네, 우리측 요원입니다. 약산은 선생의 찌밀함에 다시 한번 존경을 표했다. 어떤 행동이 성공하려면 저런 머리가 있어야 한다. 아침에 병원장과 통화를 했는데 환자는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태라고 하네요. 그 말은 지금은 움직일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작전을 펴야합니다. 더 지체할 수 없어요. 적들이 언제 휴 장군의 신원을 파악할지 모르고. 또, 비밀은 오래 간직할 수 없어요. 약산은 그 말에 동의했다. 출동이 취소되자 약산은 긴장이 풀렸는지 변장 도구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자신이 챙길 것이 없을까 두리번 거렸으나 딱히 그럴만한 것은 없었다. 잘못 소지하고 있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신분만 위험해 질 뿐이다. 그는 작전에 대한 문의는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거기 병원장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희도 잘 파악이 되지 않아요. 다만 침착한 분인것만은 틀림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뵌적이 있습니까. 요원이 놀라서 약산을 바라봤다. 어제 들렀어요. 상태를 확인하려고요. 환자는 보지 못했지만 부인과 잠깐 애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다행히 준비한 소고기를 전달할 수 있어서 마음이 조금 편하기는 해요. 그럼 병원장도 봤겠네요. 인사는 했지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어요. 인상이 남자 인사 입디다. 그러게요. 그 분은 산전수전 다 겪었어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선생님도 그 분이 치료한 경험이 있고요. 그렇군요. 그런데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원. 지금은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포목점 윤 사장 같은 이는 특히 조심하고요. 그 분은. 아 말수 병원장이 자주 접촉하는 분인데. 밀정 역할을 해요. 이쪽 조쪽 오가면서 정보를 주고 받는데. 문제는 우리 임정도 그가 밀저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본도 안다는 사실이에요. 서로 이용해 먹는 거지요. 자, 어서 가세요. 약산이 눈치를 살피는 요원을 내보냈다. 여기서 오는 휴장군을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약산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요원이 나가고 난 후 휴장군이 도착하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리 점검하고 챙겼다.

그 시각 포목 점 사장은 병원에 도착했다.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았으나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현관 앞에서 자신을 한 번 점검했다. 나름대로 괜찮았다. 말수와 마주 앉은 그는 궁금해하는 그를 위해 영사관이나 다른 루트로 비밀이 새나가지 않은 사실을 말했다. 알리지 않고 바로 여기로 오는 길입니다. 상태는 어떤가요. 알고 싶어 답답하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더 나빠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변하니 지금 이 말은 십 분후에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하, 밤새 좀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혼자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서요. 동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채근하는 투로 그가 말했다. 말수가 차트에서 고개를 들고 포목점 사장을 쳐다봤다. 신고 여부를 묻는 것이라서 언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우리만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혹 일제가 먼저 눈치를 채면 난 끝장이오. 의사 선생은 이런저런 끈이 있으니 어떻게 변명하고 버텨나가겠지만 나는 걸리면 어려워요. 죽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둘 중의 하나에요. 윤사장이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니 신고해야겠어요. 그것은 형님이 판단할 문제고요. 저는 환자 치료에만 전념하고 있어요. 내가 어제 다 말해버린 것은 그동안 진 신세를 갚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나 역시도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몰라 상의할 겸 말해 버린거구요. 그렇다면 이 길로 바로 영사관으로 가야지요. 포목점 사장이 일어섰다. 이렇게 빨리요. 환자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조사라는 조사는 다 했는데 조선깡패로 결론이 난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장은 일어서던 그 자세로 엉거주춤멈춰섰다. 마음을 바꿔야 할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조선깡패라고요. 어제는 휴 장군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동생. 제가 술취해서 실수한 모양입니다. 그 말을 했다면 술김에 나온 말로 생각하세요. 형사가 아침에 사진을 가지고 와서 얼굴도 대조하고 지문도 떴어요.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어요. 그들의 기대와는 빗나간 것이지요. 지명수배자 하고는 전혀 다른 인물로 나왔으니 당황했겠지요. 그럼,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포목점 사장이 반문했다. 그러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말수를 대했다. 하지만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말수는 진지했다. 이 얼굴로 말하는 자신이 진실이 아니라고 어찌 의심할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친일하지 않는다면 굳이 알릴 필요가 없고요. 설사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우리도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지요. 형사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알았느냐고 하면 그들도 할 말이 없겠지요. 그럼 환자가 조선깡패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윤사장이 정색을 하고 달려들었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의 실체를 누가 알겠어요. 신분증도 없고 지문도 없고 사진은 영 다른 사람인데요. 윤사장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수가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눈치를 보였으나 사장은 조금 더 있었다. 무언가 미지근한 것을 떨쳐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럽시다. 난 가게로 가야겠어요.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들어가세요. 형님. 말수는 등 뒤에 대고 이렇게 가볍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 역시 찜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포목점 사장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늘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식은 죽 먹기로 뒤집는 사람이 윤사장이었다. 그런 경험을 알고 있던 터라 꺼림직했다. 무언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도 말수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사장이 자신에게 당장 큰 해가 미칠 것도 아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말수는 그가 아는 것을 일제 형사들도 다 아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환자에만 집중하자.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것이 말수의 심산이었다. 수술비를 받지 못할 형편이지만 나중에 임정이 정산해 줄 것이다. 아니면 지금처럼 무상으로 치료해도 상관없다. 양심이 더 큰 위로를 받는데 그까짓 치료비 정도야. 말수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이 조선 사람인 것에 민족애를 느꼈다. 사장이 나가고 임정 사무원이 순차적으로 도착했다. 물론 환자로 왔다. 이 모든 장면은 도쿄여관에서 감지됐다. 여관 삼층에는 성능 좋은 망원경이 설치돼 있었고 들고 나는 사람들은 모두 관찰 대상이 됐다. 어떤 차림의 누가 언제 들어가서 언제 나오는지 기록됐다. 일제는 환자에 대한 신원 판단을 보류했다. 조선깡패로 결정 내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것이다. 그럴만도 했다. 일주일 정도만 지켜보면 수배자인지 아닌지 결론이 날 것이다. 얼굴의 붓기가 내리면. 이것이 형사들이 기다리는 유일한 이유였다. 임정 요원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날 감시하고 있어. 언제 체포될 지 몰라. 그러기 전에 이걸 써야지. 젊은 요원은 품 속의 작은 쇠붙이를 의식했다. 선생이 준 것이다. 처음에는 달라고 해도 거절했다. 이걸 가지고 다니다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해. 아직 죽기에는 젊은 나이야. 그러나 요원은 막무가내로 맞섰다. 선생님, 이재명 열사를 생각한다면. 그만. 선생이 말을 막았다. 이재명 열사. 이완용을 죽이겠다고 나에게 권총을 받아갔다. 난 거절 했어. 겨우 23살 청년인데. 죽기에는 너물 이른 나이야. 제 손으로 매국노를 처단하겠습니다. 활개치고 다니는 꼴을 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어찌나 강하게 나오던지. 그래서 직접 내 손으로 권총을 주었어. 그리고 회수했어. 그는 포기 하지 않았지. 명동성당에 미사를 보고 나오는 그를 찔렀어. 등과 허리와 옆구리를. 군밤 깎는 그 칼로. 죽은 줄 알았지. 그래서 도망칠 생각도 않고 옆에 있는 일본 순사에게 담배를 청했어. 날 잡아 가시오. 그 때 총을 뺐지만 않았어도. 역적 놈을 처단했을텐데. 선생님. 알았다. 잘 써야 한다. 품안의 권총은 이런 사연을 갖고 있었다. 요원은 차디찬 쇠붙이의 감촉을 느끼면 바로 작전을 시작했다. 그 시각 도쿄여관에는 진짜 조선 깡패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소란을 피웠다. 위안부들은 소리 질렀고 삼층의 일제 형사들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망원경의 시야에서 병원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천으로 뒤를 덮은 트럭 한 대가 병원 앞에 도착했다. 상황이 정리돼쓸 때는 겨우 삼십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도쿄여관도 사건이 수습됐는지 조용해졌다. 형사들은 다시 삼층 창가로 다가갔다. 망원경을 들고 다시 병원쪽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포목점 사장이 집으로 가려다 방향을 바꿔 영사관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알려야 한다. 병원장도 믿을 수 없다. 지금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찾아오는 형사들의 눈초리도 예전같지 않다. 자신에 대한 신뢰을 의심하고 있다. 이번에 그런 의심을 바꿔야 한다. 포목점 장사를 계속하고 그들의 우산 아래에 있기 위해서는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직접 가자. 전화로 연락을 하는 것보다 실상을 내 목소리로 바로 알리자. 비록 환자는 보지 못했으나 아침 회진을 돈 병원장의 말도 들었으니 정보 가치는 있을 것이다.
환자는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그가 독립군 대장 휴의라면 살아도 이제 독립운동을 할 수 없다. 조선깡패라고. 아니야. 내게 도는 감은 병원장이 오늘 아침에 한 말보다는 술먹고 했던 어제 저녁의 말이 더 신뢰가 가. 그런 생각이 들자 영사관에 밀고를 한다고 해도 크게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 이렇게 위로한 사장은 영사관 문을 열었다. 말수는 떠나는 사장의 뒷모습에서 그가 신고할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 즉시 영사관에 전화를 넣었다. 사장의 발걸음보다 한발 앞선 것이다. 아무래도 조선깡패인지 수배자인 독립군 장군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환자는 아직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 이런 정도만 보고했다. 전화를 받은 영사관은 여관 삼층에서 망을 보고 있던 형사에게 병원 침투를 지시했다. 무장 경관도 데려가라. 여차 하면 사살해도 좋다. 전화를 걸고 채 삼십 분도 안돼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환자가 휴의라고요. 고맙소. 의사선생. 우리편인 줄 진작에 알아봤소. 야마모또 하야시는 병원 문 앞에서 이런 말을 연습하듯이 중얼거리면서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움직였다. 병원장은 자기 방에서 묶여 있었다. 여순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그자들이 들이닥쳤어요. 그자들이라니요. 조선 깡패거나, 독립군 끄나풀이겠지요. 손목이 저려요. 어서 이거나 풀어요. 인상착의는요. 확실치는 않아요. 그 자들은 권총으로 위협하고는 환자를 빼돌린 거지요. 전광석화처럼 빨랐어요. 압박에서 풀려난 말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순은 이제 살았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팔을 흔들었다. 총을 쏘았어요. 병원 천장에도 대고.조사하면 총알 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야마모또가 그 말을 듣고 사방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주어 들었다. 이거 군요. 탄피가 여기에 떨어져 있네요. 45구경 리볼버. 에잇 빠가야로. 하야시가 분에 못이겨 소리를 질렀다. 이게 어쩐 일이요. 환자가 깨어나지도 못했다면서요. 그래요. 아마 이송과정에서 죽을지도 몰라요. 내가 그랬어요. 옮기면 죽는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어요. 몇 명이 왔나요. 정확한 인원은 모르겠으나 내가 본 것은 모두 세 명이었어요. 형사는 혀를 찼다. 화난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어쨌든 고맙소. 그런데 의사 선생은 그자가 휴장군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휴장군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확률로 따지면 90 프로 이상이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지요. 헛소리를 하더군요. 종종 그런 환자들은 그렇게 합니다. 왜 형사님이 무슨 일이 있는지 잘 관찰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수시로 수술방을 들락거렸는데 마침 내가 들어갔을 때 환자가 고함 비슷하게 지껄이더군요. 정리하면 이래요. 나는 실패했다. 조선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내 죽음은 그러나 헛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원통한 것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왕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마땅히 내가 죽을 자리는 이곳이 아닌데. 어쩌고 하더니 금세 조용해졌어요. 갑자기 잠잠해 집디다. 그래서 아, 이자는 조선깡패가 아니라 독립군 휴장군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체 없이 영사관에 전화했던 거고요. 그게 바로. 말수가 시계를 보았다. 삽 십 분, 아니 정확히 삼 십 삼분전이네요.

아 참, 그리고 그 자들이 인질로 사람을 잡아갔어요. 말수는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이 말했다. 인질이라니. 또 뭐가 있어요. 형사님도 아시겠지만 박선생이라고 여기 우리 의사요. 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약품까지 싹 쓸어 갔어요. 큰 자루에 담아서는 어깨에 매고 달아났지요. 환자가 어떻게 달아난단 말이요. 환자를 침대째 몰았고요. 마치 가벼운 구루마처럼. 밖에는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지 기계가 내는 엔진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형사는 병원 관계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환자가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갔는지 물었다. 종합해 보니 병상에 있던 환자는 트럭 뒤 칸에 침대와 함께 실렸고 박선생이 함께 올라탔다. 그리고 덮개를 닫은 다음 프랑스 조계지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형사가 밖으로 나갔다. 트럭을 확인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말수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부러지지는 않았다. 여순도 말수처럼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넋이 나간 하야시를 보면서 두 사람은 눈을 맞추면서 잘됐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픈 손목만 만지작 거렸다. 하야시가 떠난 시각 영사관에 막 도착한 포목점 사장은 큰 정보나 가져온 것처럼 직원에게 거드름을 피웠다. 영사님을 뵈러왔으니. 급한 거요. 빨리 안내하시오. 그러나 직원의 반응은 별로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모르시오. 저기 시장통에서 가장 큰 포목점을 운영하는.직원은 대답 대신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공을 기대했던 그는 그러기는 커녕 영사관에서 바로 체포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거 왜이러서이요. 몰라서 그래. 이 놈 조센징 백정놈. 아니 백정이라니. 난 포목점 사장 윤가요. 조용히 해, 이놈. 영사관 형사의 주먹이 얼굴을 때렸다. 아프다고, 말로 하지 왜 때려. 윤사장이 대들었으나 날아온 것은 또다른 주먹이었다. 윤사장은 억울했다. 그러나 그 억울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취조 과정에서 안 사실이지만 말수가 전화로 자신보다 먼저 휴의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이 배신자 새끼. 사장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아들까지 줬는데.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말수가 밀정인가. 그가 알렸다고 해도 그를 탓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로 알려야 할지 말아야할지 논의하지 않았던가. 알려도, 알리지 않았어도 말수의 잘못은 없다. 서로 알아서 한 사항이니. 뒤늦게 사태를 이해한 윤 사장은 자신의 실수도 말수의 잘못도 아닌 영사관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았다. 오후 늦게 말수가 면회를 왔다. 마주 앉은 사장은 왼손으로 얼굴의 한쪽을 가리고 있었다.

왜, 그러시오. 맞기라도 했어요. 말수가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럴 리가요. 일제는 나를 신뢰하고 있어요. 이 상처는 잠깐 발을 헛디뎌서 생긴 것이오. 넘어졌어요. 계단에다 얼굴을 박았어요. 영사관이 병원으로 모셔가겠다는 것을 한사코 내가 거부했어요. 그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렸다.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딱히 고문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웠고 그 말대로 넘어진 상처 때문인지도 몰랐다. 말수는 그가 말할 수 있도록 가만히 있었다. 한 사나흘 지나면 나을 정도네요. 심하지 않아요, 하고 위로했다. 사장은 한 달이 걸리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이런 것은 상처도 아니라고 했다. 나야 뭐, 사령관에 비하면. 그가 머뭇거렸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휴장군은 어디로 도망쳤어요. 도망쳤다는 말이 말수의 귀에 와서 총알처럼 박혔다. 일부러 그런 표현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단어 선택에 좀 더 신중했으면 싶었다. 에이 장사꾼들은 할 수 없어. 시장에서 쓰는 말밖에 모른다니까. 말수는 언찮았다. 그야 나도 모르지요. 나도 당했다니까요. 뚱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요. 포목점 사장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상처 때문에 더 작아진 눈이 뱀눈처럼 날카로웠다. 혀만 내밀면 영락없는 뱀의 형상이었다. 권총 위협을 당했어요. 곧 아시겠지만 그자들이 나와 아내를 묶었다고요. 그랬군요. 그 자들이라면. 독립군인지 조선깡패인지 아직도 실체를 알 수 없어요. 다만 독립군 쪽으로 형사들은 판단하는 듯 합니다. 그럴께 일사분란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깡패들은 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어떻게요. 좀 더 자세히 말을. 그건 풀려나면 곧 말씀 드리고요. 말수는 대답대신 이번에는 자신이 질문할 차례라고 여겼다.그나저나 형님은 어쩐 일이요.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이오. 영사관에서 석방절차를 밟고 있으니 곧 나갈 거요. 그것은 걱정하지 말고요. 그런데 휴 장군이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나요. 세 명이 왔다면서요. 좀 천천히 물어 보세요. 숨 넘어 가겠어요. 그야, 알 수 없지요. 도망치는 사람이 나 어디로 도망친다고 미리 말하고 그러진 않잖아요. 납치 과정에서 힌트를 얻을 만한 정보도 없고요. 알 수 없는 질문만 하시네요.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나에게 정보를 줄 정도면 굳이 묶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몇 명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일일히 세 본 다고 해도 그럴텐데 자기 방에서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무슨 경황이 있겠는가. 다행입니다. 영사관이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석방 절차를 밟고 있다니. 영사관에 간다고 가서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아차 싶었어요. 사모님이 급히 와서는 알아 보라고 부탁해서 이렇게 다급하게 왔지요.

어쨌든 고맙소. 나가면 내 술 한 잔 사리다.  그건 그렇고 오해라는 건 어떤 건가요. 짐작하겠지만 아마도 휴장군 도피에 내가 관여했다는 의심을 산 모양입니다. 환자의 정체를 알고서도 미리 보고 하지 않은 책임을 물은 것이지요. 저는 끝내 불지 않았어요. 그것이 괘심죄가 된 것이고. 아마도 나를 의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게 있어요. 형사가 병원을 급습하고 환자가 탈출한 시간이 거의 비슷한 게 우연의 일치 치고는 기묘해요. 아마 누군가 환자를 빼돌린 즉시 환자의 정체를 영사관에 보고한 게 아닐까요. 내막을 아는 자가 자기만 빠져 나가려고 시나리오를 짠 거라면. 사장의 눈빛이 아까 보다 더 빛났다.  그 사람 정체는 나와 사장님 밖에 더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 그렇지. 박선생도 있어요. 그렇다면 박선생이. 말수가 윤사장이 자신을 의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이렇게 떠넘겼다. 그럴 수 있겠군요. 그 젊은이가 밀정이라면. 사장은 자신이 제발로 영사관에 신고하러 갔다가 체포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신은 빠지고 다른 제 3자를 엮어 보려고 부던히도 노력하고 있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방어권을 윤사장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런 계책이 영사관에 먹혀든 것일까. 그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납치 사건을 알고 있었다. 사장님은 짐작이나 했어요. 박선생이 밀정이라는 것을.  하고 물으려다가 말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어떤 느낌을 받았다. 단정적으로 범인으로 몰아가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다른 소리를 했다. 지금도 뭐가 뭔지 얼떨떨해요. 참, 나도 직업이 의사라고 묶여 있는 와중에도 환자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신변의 위협보다 환자를 먼저 걱정하다니. 어쨌거나 휴의든 조선깡패든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요. 병원 치료를 해도 살지 말지 알 수 없는데 그 몸으로 탈출하다니. 말수가 혀를 찼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저렇게 끌고 갔으니 사후관리가 되겠어요. 말수가 동의를 구하면서 이렇게 반문했다. 윤사장은 이번에도 대답대신 질문을 택했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의사 선생, 내게는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말수가 약간 긴장했다. 내가 말 못할 질문이 나올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라도. 하지만 나온 말은 조금 어쩌구니 없었다. 윤사장은 바람을 잡으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우리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요. 선생과 나 사이 말이오. 그러니 한 가지만 더 물어 봅시다. 어떻게 묶인 줄을 풀었어요. 말수는 어이가 없었다. 사건 자체를 사장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체포가 가져온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형사가 풀어줬지요.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포목점 사장은 아, 그랬었지 하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으나 전적으로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누가 묶었지요. 그야 그 자들이지요. 허허, 참. 말수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윤사장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스스로 묶은 것은 아닐까. 푼 것은 형사들이지만 묶는 것은 누구라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찾아낼 방법은 없다. 그걸 추궁할 수 없어 윤사장은 가슴이 꽉 막혀왔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 혹시 사장님이 절 의심하는 건 아니지요. 쐐기를 박듯이 말수가 윤사장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런 일은 내 생전에 없을거요. 앞으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리다. 윤사장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알 만 한 사람이 없을까요. 아니라도 하더니 같은 질문이다. 이것은 형사들이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 질리게 만드는 군. 오전에 다녀간 형사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더구나 면회객에게 이렇게 큰 소리로 물을 수 있는 것도 이상했다. 대개는 조용조용 이야기 하는 것이 상식에 맞다. 그런데 사장은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떠든다. 일부러 누가 들으라는 듯이. 말수는 발을 들어 가볍게 아래를 몇 번 툭툭 쳤다. 빈공간에서 울림이 들렸다.

나무판자 아래서 누가 귀를 대면 두 사람의 대화는 어렵지 않게 정리가 된다. 이 자가 나를 이용해서 무슨 비밀을 캐내려 하는구나, 말수는 직감했다. 그런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 말수는 그것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윤사장이 몸을 앞으로 구부리면서 나에게는 무엇이든 말해도 좋다는 듯이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더 할 말 없어요. 사모님 충격이 크시겠어요. 말수가 싫은 내색으로 그만 면회를 끝내려고 하자 윤사장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아내까지 끌어 들이나. 그렇겠지요. 이런 일은 처음 당했으니까요. 그 놈들은 정말 무지막지하군요. 여선생에게 까지 못씁짓을 하다니. 그리고 또. 윤사장이 말하려고 하자 참지못하고 말수가 말을 끊었다. 이제 가봐야 해요. 그나 저나 몸 조릴 잘 하고요. 말수가 더 듣지 않겠다는 의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해서 면회를 끝내겠다는 통보였다. 어, 잠깐만. 만약 그자가 숨을 곳이 있다면 어디라고 생각해요. 지난번에 우리가 갔던 임정의 안가는 아니겠지요. 말수는 동의했다. 그곳은 이미 일제가 파악하고 있는 장소인데 거기를 선택할 리는 없다고 말했다. 아마 그곳도 검색 대상에는 올라 지금쯤 형사들이 다녀갔을 겁니다. 그렇지요. 다른 곳은. 글쎄요. 제가 어디 그쪽과 끈이 깊나요. 사장님이 더 잘 아실텐데요. 말수는 형님대신 사장님 호칭을 쓰면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안심하시오. 동생. 내가 동생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했소. 내 선에서 마무리 짓기 위함이지요. 굳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함께 물속에 빠질 이유가 없지요. 나 한 사람의 희생으로 충분해요.마치 잘못이 있는데 자신 때문에 말수가 잡혀들어 가지 않은 것처럼 사장이 뜬금없이 자화자찬에 빠졌다. 말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보다는 그의 처지가 딱해 선 자세로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 언제쯤 나올까요. 오늘 안으로는 되겠지요. 걱정하는 투로 물으면서 어디 구명 요청을 할 데가 있나요. 있으면 자신이 나서겠다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어, 벌써 석방 명령서가 왔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윤사장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예상대로였다. 영사관은 실무진의 착각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서 포목점 사장을 그 자리에서 석방했다. 둘은 나란히 영사관을 빠져나왔다.

우리 낮술이나 한 잔 삽니다. 그럴 정신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은. 술에 시간이 어디 있나요. 병원에 박군이 일을 잘 한다면서요. 우리 동생은 인복도 많으십니다. 이 난리통에 그런 성심한 젊은 의사를 얻었으니. 그나저나 지금은 낮이 아닌 거 아시죠. 아, 그렇네요. 낮에 잡혀 와서 여전히 낮인줄 알고 있었다니까요.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낮술 대신 밤술 어때요. 그러나 말수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한사코 잡는 윤사장을 따돌렸다. 형수님이 기다리십니다. 아이들도요. 어서 가세요. 술이야 언제든지 먹을 수 있으니. 말수는 그 말을 하고 사거리에서 그럼 이만. 하고는 자기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잘 가시오. 동생. 몸 조심 잘하고. 말수는 등뒤로 들려오는 말에 돌아보는 대신 손을 들어 올려 화답했다. 한편 약산은 작은 메모 하나를 남겨두고 임정의 안가를 떴다. 휴의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자신이 남아 있는다고 해도 할 일이 없었다. 되레 짐만 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휴의가 자기 잘못을 말하는 것을 자기 귀로 직접 듣어야 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만나서 동지 하면서 손을 잡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마음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내 아내에 대한 그의 미안함, 거기에 그 자신이 입은 총상.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동정하겠는가. 더구나 작전이 변경됐으니 다른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핑계를 대기도 좋았다. 그는 무선전신기, 암호책자, 이념 서적 등에 묻은 자신의 지문을 지우고는 방을 나섰다. 경험이 있는 임정 요원과 의사 박군이 휴의의 치료를 감당할 것이다. 임무에서 배제돼 갑자기 허탈해진 그는 방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모처로 이동해 죽산과 접선해야 한다. 그 장소는 여러차례 지나쳤으므로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넉넉했다. 그러나 그는 달리 갈 곳도 없어 미리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메모. 작은 메모 하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담은 글을 휴의가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가지런히 접어서 올려 놓았다. 내 아내 차정에 대한 미안함은 그대의 것이 아니오. 그러니 이 순간 부로 그러지 않기를 바라오. 나도 잊었소. 휴 동지 앞에는 오로지 무장투쟁에 의한 국권회복만이 있을 뿐이오. 우리의 원수 강도인 일본과의 전투를 단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되오.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전까지 우리는 늘 부끄럽고 슬프고 언제나 비참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부디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천하기 바라오. 동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죽거든 밀양 표충사에 들러 아내와 함께 제 한 번 올려 주시오. 건투를 비오. 그는 날짜와 자신의 이름과 날짜를 적으려다 그만 두었다. 방안을 한 번 둘러본 약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가 약간 차가웠다. 그의 짙은 삼각형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람 때문이 아니라 큰 눈에 들어간 티끌 때문이었다. 약산은 눈꺼풀을 껌벅거렸다. 눈물이 찔금 나왔다. 티끌을 제거하기 위해 두 손으로 눈썹을 문지르면서 그는 올라간 손으로 머리도 매만졌다. 죽산을 만나는데 깔끔하게 보여야지. 그런 생각으로 그는 어느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밖과는 달리 포근했다. 바람은 멈췄고 온기가 감돌았다. 죽산이 먼저와 있었다. 이거 기다리게 했습니다. 아니오, 아직도 약속 시간이 한 참 남았는 걸요. 빨리 온다고 했는데 이렇게 됐어요. 괜찮되도요. 그래 휴장군은 어떤가요. 보지 못했어요. 그래요. 죽산 옆에 있던 한 청년이 놀라면서 물었다. 아, 소개하지요. 이분은 장이라고. 서로 인사하시지요. 반갑습니다. 약산과 장이라는 젊은이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장발장이라고 합니다. 하하. 전 약산 입닏. 장발장이라는 말에 약산이 크게 웃었다. 장발장은 대단한 분이오. 대장을 했어요. 추위에 배고픔을 견디고 수백킬로를 걸어 임정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태극기를 보고 감격해 눈무를 한 바가지나 쏟았어요. 눈물이 많은 장발장이군요. 그게 제 약점입니다. 사나이 눈물은 그런 때 울어야지요. 잡비 등불에 사나이 눈물이라는 시도 썼어요. 아 그건, 익환의 도움을 받았어요. 전적으로 제 건 아니고요. 초안을 보더니 이리 저리 수정해 주더군요. 그래서 발표 당시에는 공동 저작으로 이름을 올렸어요. 그 친구는 문학에 조예가 아주 깊어요. 그런 친구가 있다니 부럽네요. 저도 기회되면 소개한 번 시켜 주시지요. 물론 입니다. 저는 이범석 장군 휘하의 제 2지대에 배속됐습니다. 좀 설명을 하자면. 죽산이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미국 0SS 출신입니다. 폭파에 능하고요. 이번에 수송기를 타고 조선의 후방을 칠 계획을 갖고 있어요. 임정 선생의 측근으로 영민한 친구이니 둘이 잘 어울릴 겁니다. 저 친구는 소개할 필요가 없지요. 장발장을 보면서 죽산이 말했다. 많이 들었습니다.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이거 쑥스럽구먼. 약산이 머리를 만졌다. 자 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휴 장군은 다행히 목숨은 건지 모양입니다. 현재 모처로 이동중인데 일제가 비상을 걸고 난리입니다. 오전에 난 사이렌 소리는 아마도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럴 겁니다. 금붕어 형상의 잘 생긴 눈이 가볍게 떨렸다. 목숨을 건진 것을 일제가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군요. 정말 그렇네요. 그보다 더한 빵빠레는 없어요. 잘 됐어요. 장군이 빨리 회복돼야 장발장의 후방 침공과 약산의 전방 작전이 차질이 없을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조선의용대도 한 몫해야지요. 그래요. 우리가 힘을 합칩시다. 사분오열이 왠 말입니까? 임정과는 잘 얘기가 되고 있나요. 그럼요. 그러니 휴장관 탈출 책임을 저에게 맡겼지요. 선생님과도 화해했고요. 화해고 말고가 어디 있나요. 원래 우리는 같은 생각이었어요. 임정폐지를 제가 주장했다는 말은 사실과 달라요. 소문이 그렇게 난 것은 제가 좀 성격이 급한 것이 문제지요. 약산이 웃었다. 죽산도 따라 웃으면서 그래도 약산의 주장은 많이 공감가는 부분이 있어요. 더구나 연안파와 결별까지 한 것은 잘 한 일이지요. 임정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의견에는 동조합니다. 장발장이 거들었다. 그런데 조선혁명당은 어쩌고요. 당분간은 같이 가야지요. 약산은 두루뭉술하게 이 부분은 넘겼다. 아직 확정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가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수십 개의 정당이나 분파는 세력의 약화만 가져 옵니다. 민족 유일당이 필요해요. 그래서 저도 박헌영 쪽과는 결별했어요. 너무 급진적으로 나가면 탈 나지요. 죽산이 기침을 했다. 겨우 손으로 입을 막을 정도로 느닷없이 나오는 기침이었다. 그래, 죽산 선생님은 건강은 어떠세요. 나야, 뭐 늘 이 지경이지요. 추운 모스크바행이 독감으로 이어졌나봐요. 결핵만 아니면 다행이지요. 모초록 몸 건강하셔야지요. 이제 그 곳에 갈 일을 없을 겁니다. 선생이 연안파와 결별했듯이 나도 공산당과는 선을 끊을 작정입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을 집어 들었다. 잘린 손가락이 안타까웠다. 약산은 자신도 감옥 경험이 있어 감옥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독립운동하다 수감생활을 한 사람끼리 모이면 상대가 나보다 더 심하게 당한 꼴을 보면 가슴이 미어져 온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지 이제 두 어달 되어 갑니다. 몸이 조금 회복되고 있어요.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나저나 약산선생도 조심하세요. 조선독립에 있어 선생만큼 치열한 사람도 없으니 후배들에게 귀감을 오래도록 주기 위해서도 건강해야지요. 허허, 선생님에 비하면 저는 새 발의 피입니다. 그리고 여기 장발장처럼 미군 교육도 받지 못했고요. 선생님처럼 교양있고 굽힘없는 뚝심이 부럽습니다. 그런 선생에게 무정부주의자니 교활한 공산주의자니 임정 선생에게 사사건건 대드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다니 그게 왠말 입니까. 다 제 불찰입니다. 그나저나 지금 전쟁은 어디로 흘러갑니다. 일제의 패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서양 신문을 보면 그런 분위기도 감지되고요. 하지만 언론은 자기 나라 유리한 쪽으로 보도만 하니 알수가 있나요. 일제의 기세는 어쨌든 예전만 못한 것이 확실하군요. 이럴수록 몸조심해야지요. 예비검속이다 뭐다 해서 지금 대대적인 독립운동가 체포에 나서고 있어요. 여기도 위험합니다. 살아서 광복된 조선에서 함께 만납시다. 무슨 작별 인사 같아 슬퍼집니다. 그래요. 이렇게 선생님을 직접 뵙고 좋은 말씀 들었으니 안심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우리는 합쳐야 해요. 이것은 조선독립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셋은 손을 잡고 놀이를 하는 것처럼 마구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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