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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들은 언제나 천장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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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들은 언제나 천장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3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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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절이라. 절이라면. 휴의는 아차하고 머리를 쳤다. 거기겠지. 거기. 소년 병사. 스님, 큰 스님 또 한번 자비를 베푸시는 군요. 같은 자비를 놓고 총독이 말하는 자비와 스님의 자비는 왜 다른가요. 죄송해요. 일을 저지를 게요. 이일도 자비라고 용서해주세요. 휴의는 확신했다.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라는 것을. 이건 텐진의 일본 영사관 폭발이나 종로경찰서 습격과는 다른 것이다. 절이다. 절. 휴의는 고개를 숙였다. 미리 사죄를 올렸다. 그 무렵 상하이는 훈련교관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면 한 달내로 독립군의 조선 출병도 가능해 진다. 교관이 생긴 것, 훈련병을 지휘할 사령관 선임이 끝났을 때 선생은 무언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결정적 한 방을 먹일 기회를 잡은 것이다.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폭약을 장치하는 사단급 독립군이 탄생한다. 그러기 위해 선생은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다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주도하는 각 당의 대표를 병원에 보냈다. 수술을 핑계로 뒤로 미뤘던 말수도 더는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그가 치료하면서 보여준 묵직한 태도에서 그런 감을 잡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냈고 다시 보냈고 또 보냈다. 한 번의 거절과 두 번의 생각해 보겠다는 말에도 선생은 그가 왜 중요한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말수라면 발사가 안되는 권총을 재조작해 빠른 시간내에 조준할 수 있는 능숙한 총기 기술자 양성의 적임자였다. 총보다 더 위험한 물건인 수류탄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다이너마이트는 교관이 없다면 쓸모없는 짐짝에 불과했다. 그것도 위험천만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생이 사령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말수는 그 기다림에 보답했다. 세번째는 선생의 비서가 직접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울다시피 하면서 절박한 조선의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데 지금이 독립의 최적기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결기가 있었다. 선생님, 치료도 시기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놓치면 살사람도 죽겠지요. 지금 조선은 수술할 시기입니다. 메스를 드세요.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수술해 주세요. 그러면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이 가능합니다. 무려 34년만에요. 말수는 울컥했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니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여순과 상의할 시간도 없이 말수는 덜컥 그러마 하고 약속해 버렸다. 여순은 말수의 말을 듣고 당신이 결정한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당신 편이라고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이로써 휴의의 빈자리는 말수가 채웠다. 휴의가 상하이를 떠나기 전에 은밀하게 교육했던 요원은 훈련 중에 불발탄으로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참관하던 다른 요원까지 부상을 입게 되자 광복군사령부는 맥이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말수는 가뭄의 단비였다. 끊어진 맥을 잇고 다시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절대 영양소였다. 그 중에서 다이너마이트 전문가는 절망에 빠진 임정의 구원자였다. 다이너마이트의 파괴력은 이미 한 차례 실전에서 입증했다. 현장에서 그것은 더 위력을 발휘했다. 휴의가 그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았던가. 총이나 수류탄과는 비교 대상이 될 없을 정도의 강력한 파괴력. 말수는 그것을 전장이 아닌 태평양의 어느 광산에서 오래전에 실감했다. 거기에 시한폭탄의 기술이 더해졌다. 미리 정해 놓고 원하는 시간에 폭발하도록 한 시한폭탄. 그것은 단순한 권총의 분해와 결합 같은 실력으로는 안 됐다. 그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기술과 담력을 필요로 했다. 위력이 큰 만큼 위험 부담도 배가됐다.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은 이런 때  필요하다. 이는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에게도 엄청한 충격을 가져온 다이너마이트 파괴력에 아군은 자신감이 차고 넘쳤고 적은 두려움에 떨었다. 아군의 사기는 속된 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적들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포 때문에 일제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으나 속으로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평소와는 달리 몸을 떨었다. 특히 고관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천장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조선 총독은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악몽 때문에 제대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낮에는 천장이 없는 곳으로 피신했으며 밤에는 벽돌 더미를 받쳐줄 식탁 아래에 침구를 깔았다. 쪽잠의 악몽속에서도 총독은 이것은 미신이 아니다, 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믿어도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섣부른 판단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총독은 살기위해 그렇게 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죽음과 맞딱뜨리는 생활을 하면서 조선총독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총독연임에 대한 미련도 사라져 가고 있다. 조선은 더이상 총독이 꿈꾸는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아침 조회를 하면서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그 아래 깔려 죽는 자신의 처참한 신세를 눈 앞에 떠올려야 했다. 더 두려운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리 저리 옮겨 다녔다. 말이 회의 장소변경이었지 실상은 도망이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총독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장소는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으나 시간은 그러지 못해 총독은 조선인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펼쳤다. 무지렁이 존재로 알고 밟고 비틀던 습관이 하룻만에 피해야 하는 버러지 같은 존재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면서 총독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같은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 똥은 밟으면 발목이 날아가는 끔찍한 고통을 안겨줬다. 그래서 실상은 더럽기보다는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바퀴벌레를 밟아 죽이기 전에 느끼는 순간의 공포는 상당한 것이었다. 상대에게 던질줄 만  알았던 공포가 자신들에게도 닥쳐오자 총독은 비로소 공포가 갖는 위력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공포구나 하는 두려움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흰옷 입은 무리 가운데 누구의 품속에 폭탄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어 총독은 자신을 환영하는 인파마저 되레 피해 가려고 했다. 위험한 자를 발견하면 검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서 그자가 자기의 관할 구역을 벗어나기를 기다리는 겁쟁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이 오면 그 지역 책임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만 보아도 일제는 조선땅에서 전염병처럼 번지는 공포에 질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자들은 실제로 질린 증상을 느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그런 자들 가운데는 몽둥이를 휘둘렀던 경찰이나 헌병대사령부 요원도 있었다. 하루는 헌병대사령부 대장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오한에 전신을 떨며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면회온 완용이 그런 헌병대장을 보고는 이 자는 다이너마이트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 내렸다. 자신도 그런 경험에 빠진 적이 있었다. 똑같은 증상이야. 이 자는 나보다 더 심해. 나보고 조센징이라고. 대장 주제에 폭탄을 무서워 하는 하급 왜놈 같은니라고. 에, 더러운 쪽바리 놈. 완용은 비굴하게 아첨하던 얼굴을 확 바꾸고 욕설을 퍼부었다. 병실을 나온 직후였다. 한 동안 공포에서 허우적 거리던 일제는 꾀 하나를 발견해 냈다. 공포를 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익숙한 공포를 다시 시작했다. 공포몰이를 통해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문은 날로 심해졌고 남녀노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일제가 갖는 공포는 줄어들지 않고 되레 강해졌다. 완용은 증세가 재발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온몸에 종양처럼 돋아나는 공포를 잊기 위해 길가는 사람 아무나 잡아들여 불에 달궈진 인두를 들이댔다. 체한 것 같이 급할 때는 길가 아궁이의 장작불을 집어 들고 휘둘렀다. 조선천지는 공포가 지배했고 그 공포의 강도는 하늘을 덮을 지경이었다. 극단의 끝에는 또 다른 극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며 자구책 마련에 들어갔다.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서기 위해 흑색공포단에 참여했다. 흑색공포단은 이름만으로도 겁나 무서운 존재였다. 겸손했고 순박했던 흰옷입은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더는 공포에 질리지 않기 위해 그들 역시 스스로 공포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제가 공포로 나오면 우리는 더 큰 공포로 맞선다는 전략이었다. 공포와 더 큰 공포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반도의 바람과 하늘은 온통 공포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일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흰 옷입은 사람들의 이같은 도전에 또다른 공포를 조장했다. 이른바 대공포였다. 공포 가운데 가장 무서운 대공포가 시작됐다. 군인들의 시가행진은 정해진 시간이 없었고 착검한 총검은 붉은 피가 마를 새가 없었다. 그들은 규모가 큰 독립군이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그들과 사전에 교감하려는 자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닥치는 대로 착검 돌격을 하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짓 소문을 진실로 믿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식의 공포정치는 역효과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거짓이 진실로 되어 가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 일제를 공포에 떨게했다.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되레 공포를 받는 꼴이 된 것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자 일제는 화를 냈으나 그 화는 다시 자신들에게로 돌아왔다. 상하이에서 독립군이 오면 왜놈 너희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그러니 우리도 안에서 웅끄리고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화답하자. 흰옷 입은 사람들이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뭉치고 있었다. 탄압의 원인이 모래알을 진흙더미로 만든 것이다. 있지도 않은 불순불자를 잡겠다고 다수의 불순분자가 암약하고 있다고 퍼트린 것이 안좋은 결과로 나타나자 그들은 대공포를 중단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됐다. 만주의 조선독립군이 무장이 완료되는데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거쳐 조선 반도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입수됐기 때문이다. 거짓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제 일제는 흰옷 입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군복입은 조선독립군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과 무장 군인과 싸워야 하는 것은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일제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학살을 멈추고 광복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준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정한 일차 저지선은 내륙이 아닌 강이어서 싸움은 강물처럼 만만하게 흘러갈 수 없었다. 도강 직전에 섬멸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정하긴 했으나 적들을 섬멸하기 전에 자신들이 섬멸될 지 모른다는 위기에 봉착했다. 일제에게는 병력이 필요했다. 늘 부족한 것이 병력이었으나 최근들어 그것은 더욱 부족했고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친일 경찰을 대거 발족하기로 마음 먹었다. 경찰의 추천만 있으면 고문이나 살인에 흥미를 느끼는 자들은 일제 경찰이 됐고 간소화한 절차에 따라 쉽게 총을 지급 받았다. 일제의 이런 대책은 규모를 늘린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필시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일제 경찰이 되고 나니 경찰의 위신은 가라앉았다. 선민의식도 사라져 갔다. 마구 잡이로 경찰을 뽑은 결과였다. 그 가운데는 일제에 목숨을 잃은 항일 가족의 일부도 포함이 됐는데 이들은 자연스럽게 일제의 개가 아닌 사냥개가 되어 주인을 무는 적이됐다. 

내부총질이 시작될 씨앗을 심은 것은 일제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바쁠수록 돌다리도 두들기면서 건너라는 조선식 속담을 무시한 결과였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일제는 경찰 완장을 남발했다. 규모의 경찰이 그만큼 절박했고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작은 것을 잃더라고 큰 것을 얻는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총대는 종로서가 맸다. 총대장은 서장인 완용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김씨나 이씨가 일제 경찰이 되는 것에 불만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역시 이대로 가다가는 경찰이 흰옷 입은 사람들에게 다 죽게 생겼다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에게는 한 달 내에 3천 명의 경찰조직을 새로 만들라는 특명이 떨어졌고 이렇게 급조된 경찰을 이끌고 바로 압록강 대비를 위해 전선에 가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거기서 그들은 남하하는 조선독립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총알받이는 니들 조선인이 하라는 일제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싸울 때 일제는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씁쓸하기만 했다. 완용에게 맡긴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면 일제의 생존은 물론 조선의 독립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뚫리면 조선으로 들어오는 독립군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총독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려오면서 토착 독립군과 합세할 것이 분명했다. 임진난때부터 있었던 의병들의 후손들은 동학난에도 죽지않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립군의 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결국 일제는 조선땅에서 쫒겨 나야 할 판이다. 준비된 독립군 2개 사단은 곧장 3개 사단으로 세를 불리고 곧 군단 규모가 될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독립군이 평양과 개성을 거쳐 경성에 오면 일제는 도주 밖에 다른 살 궁리는 없다. 완용은 일제가 그런 말로 자신을 압박 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자신이 밀리고 밀려 경성까지 방어선을 후퇴한 처지를 상상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때로는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완용은 꿈에서도 그것을 받아 들일수 없었다.

그래서 애초 3천명 규모의 신입 경찰 모집을 그 세 배가 넘는 1만 명으로 하겠다고 총독부에 보고했다. 식탁 아래에서 꼼지락 거리던 총독은 그것은 조선 사정에 밝은 조선사람인 종로서장이 판단할 문제라고 전권을 일임했다. 완용을 잘라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던 총독은 이제 완용의 어깨에 기대는 신세로 전락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릴세. 완용 서장은 애국자야. 대일본 제국을 위해 오늘도 힘써 주시오. 그리고는 금일봉을 하사했다. 그 안에는 현금 대신 당신은 애국자요. 라는 간단 명료한 글귀만이 있었다. 더러운 왜놈 새끼. 노랑이 짓도 유분수지. 총독이라는 자가 겨우 글자 하나로 입을 싹 씻네. 완용은 총독부를 나오면서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계단에 침을 탁하고 뱉었다. 그러나 광화문을 나서면서부터 완용은 다시 일제의 충성스런 개로 돌아갔다. 총독의 이런 하달과 칭찬을 받은 완용은 걸어가다 걸리는 자들에게 즉석에서 경찰 완장을 채워주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떤 날은 종삼에서 지서까지 걸어가는 동안 300명의 신규 경찰을 채용해 하루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날건달들도 있었다. 지게로 짐을 나르는 뼈만 남은 노인도 완장을 찼다. 완장을 오른쪽 팔뚝에 건 날건달은 주먹대신 총에 검을 꽂았고 지게꾼은 발길로 세워둔 작대기를 걷어찼다. 그날 완용은 피곤했다. 경찰력이 늘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이래도 좋은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몸도 그렇지만 정신이 녹초가 됐다. 이런 자들에게 총을 주고 돌격 앞으로를 명령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총구를 전방이 아닌 후방으로 돌린다면. 완용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흰 옷입은 자들이 아무렇게나 쏜 총에 자신이 맞아 죽는 꿈을 꾸었다. 악몽도 이런 더러운 악몽은 처음이다. 일어나 앉은 완용은 더럽다, 더러워를 연신 입에 달았다. 혼란은 완장을 찬 진짜 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완장을 내려다 보던 신임 경찰은 제복으로 갈아입고 남은 흰 옷이 상자에 쌓여 각자 자기집으로 배달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긴가민가 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대충 총 쏘기 훈련을 마친 완용의 대규모 경찰병력이 기차를 타고 조중 국경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삼일만에 훈련병 기간을 끝내고 기간병이 된 초짜 순사들은 손에 잡은 총을 놓치도 못하고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그 시각 말수는 사령관의 역할을 잘 해냈다. 시켜주지 않았으면 서운할 뻔 했다. 그만큼 완벽했다. 더구나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어서 신바람이 나기까지 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연설하는 솜씨도 점점 늘어났다. 훈련 삼일 째 되는 날은 자기 말에 취해 연설 중에 다음 말을 까먹고 이 정도면 정말 탁월한 연설이라고 자찬하기도 했다. 이러다가 내가 정말 정치인이 되는 거 아냐. 이 정도 연설이면 선생을 능가하겠어. 새로운 일이 말수의 몸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는 달군 몸이 식지 않도록 훈련을 하기 전에 반드시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연설 솜씨도 발휘할 겸 미숙한 그들의 전투력을 고취시키자는 애국적 발상에서였다. 마치 상대가 그것을 요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술술 질문하고 술술 답변하는 솜씨는 듣는 이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었다. 마치 교회의 목사가 십일조를 끌어모으기 위해 하듯이 신념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군들, 우리가 총을 드는 이유는 무엇이요. 조선 독립을 위함이요, 평화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았으니 우리가 되찾기 위해 먼 이국땅에 모인 것이지요. 여기 모인 제군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 하고 모두 애국자 입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이런 때 써야 한다. 연병장 한쪽에서 바람이 불어 모래가 훈련병들 얼굴을 덮쳐도 누구하나 그것을 치우려는 손동작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감동에 보답하는 훈련병들이 취하는 예의였다. 잠시 말을 멈춘 말수는 단상에서 아래를 훑어보았다. 제대로된 부동자세가 제법 멋들어졌다. 그는 한 번 병사들을 둘러 본 후 이야기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평화를 위해서 때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써야 합니다. 그 폭력은 부당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죠. 압박받는 민족이 몸에 묶인 사슬을 풀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요. 독립은 피를 먹고 자랍니다. 꽃밭에 뿌린 씨처럼 저절로 크지 않아요. 무력투쟁 없는 독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난 30년 넘도록 우리는 뼈저리게 느꼈지요. 독립을 하고 가장 빨리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투쟁적인 그 방법뿐입니다. 여러분은 그러기 위해 전선의 맨 앞에 섰어요. 말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말수는 개의치 않았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대견했고 자신에게 이런 솜씨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말수는 연설을 할수록 자신의 연설에 스스로 도취됐다. 그래서 어떤 날은 실습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설에 할애하기도 했다. 자기 말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훈련이 끝난 후에도 그는 아까 했던 연설을 복기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애초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이런 교육 방식은 더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상적으로 무르익은 독립군은 훈련에 더 열성이었고 습득 성과가 빨랐다. 정예요원들이라는 자부심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말수는 늘 여러분은 정예요원이라는 말로 그들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일주일 만에 일차 교육을 무사히 마치자 말수는 자신이 위대했으나 위대한 그 공을 훈련병들에게 돌렸다. 여러분들은 선택받은 요원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겨우 일주일 폭파 교육으로 여러분 같은 실력을 갖출 수 없습니다. 도열한 병사들은 한 껏 고무됐다. 이 자리에서 나는 감히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일계급 특진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물론 권한은 임정의 국무회의를 거쳐야 하지만 내가 강하게 요구할 겁니다. 자랑스런 여러분이 특진을 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말수는 앞으로 일주일만 더 교육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전수해 줄 수 있고 어떤 건물이든 어떤 다리든 폭파 할 수준의 전문가가 될 것을 확신했다. 이제 독립군은 적을 보면 달아나기 보다는 조준해서 사격할 정도가 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그들 가운데 서너 명을 뽑아 교관으로 임명하는 작업을 서두르기 위해 준비했다. 자신은 뒤로 빠지고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수는 일차 교육이 끝나고 이 차 교육을 전후하면서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빠르게 30명의 조선독립군 폭파전문가가 교육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여보, 일은 잘 되가요. 화약 냄새를 옷에 묻히고 온 말수에게 여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맡던 익숙한 그 냄새. 그 냄새야. 내가 그걸 어찌 잊겠어. 순간 여순의 얼구리 이그러졌다. 그러나 곧바로 환하게 펴면서 웃는 낯을 했다. 안 될 일이 없지. 내가 누구요. 통영사람 말수 아니요. 뭐든 잘 해 낼 줄 알았어요. 그러나 자만은 금물이요. 알아 모시지요. 그런데 내 연설 솜씨를 한 번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군요. 여기서 해보시지요. 그럴 순 없지. 조선독립군 총대장이 인파도 없는 곳에서 공갈포만 쏠 수는 없어요. 듣지 않아도 알아요. 당신은 탁월한 대중연설가로 손색없어요. 젊은이들의 피를 끊게 하지요. 그래서 말인데 여보. 내가 이번 기회에 한국조선독립당 당수로 나서면. 당신 생각은 어때. 임정의 선생도 싫지 않은 내색을 보였소. 내가 당수가 되면 임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 거지. 정치 역시 독주는 독재로 흐르기 마련이오. 양당 정치가 민주 정치의 핵심이지. 그래 양당 정치. 꼭 정치를 해야겠어요. 또 그 소리. 이미 정리된 것 아니었나. 나는 늘 새로운 것을 꿈꾸고 있어요. 그것이 없으면 나는 생기를 잃어. 당신도 알잖아. 병원일이 일년차를 넘어가자 내가 술을 먹기 시작했잖아. 약도 좀 하고. 아편에도 손 댔지요. 어허, 흠. 알고 있네 당신. 그런 매너리즘에 다시 빠지는 것을 바라는 건 설마 아니지.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새 길을 내는 거고. 총 사령관 직책은 어쩌고요. 나보고 전쟁에 참여하라고. 내 임무는 훈련 사령관으로 끝났어. 30명 교관 중에 하나를 선정할 거야. 벌써 임정의 선생에게 말했어. 내 임무는 끝났다고. 난 일주일 후면 병원으로 돌아간다고.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고 고맙다고 손을 잡았어. 여보, 내 얼굴 좀 봐, 내가 살아 있잖아. 탄력을 받고 있어. 교육은 다음 주면 끝나. 그러면 나는 또. 방황한다고 협박하려고요. 맹세코 당신 영혼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 게. 당신에게 내가 그런 저열한 수단을 쓰다니. 들어봐, 당수가 되면 임정 당연직 부주석 자리도 안게 돼. 나에겐 꿈이 있어. 조선독립은 현실이고. 이곳 임정이 그대로 해방된 조선의 정부 조직으로 승계되면. 내 위치를 생각해 봤어. 미국이나 소련이 방해할지도 모르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나는 통역이 필요 없잖아. 당신이 할 일도 많을 거야. 부부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합심하자고. 당신의 최종 목적지가 궁금하네요. 난 목적 같은 건 없어. 과정에 참여하다보면 자연히 그곳에 도달하게 되는 거지. 뱃일도 탄광 일도 의사 일도 교관도 다 그런 식으로 시작했고 매듭된 거지. 당의 가입도 임정 참여도 마음으로 원해서 그런 게 아냐. 일상이 그렇게 그쪽으로 나를 끌고 간 거야. 어디로 내가 가는지는 내가 결정하지만 나도 때로는 나를 모를 때가 있어. 계획이 언제 수정될지도 모르고. 그래요. 하루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다 보면 보이겠지요. 나는 당신의 그 열정을 높이 사요. 때로는 두렵지만 그것이 당신의 본 모습이고요. 당신이 그러니 난 차분해 지고 싶어요. 노래 한 곡 듣고 싶지요. 부르겠다고 하는 것보다 더 설레는군. 군가는 기대하지 마세요. 난 그런 저돌적이고 직접적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에게는 낭만이 있어야 하고요. 당신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어요. 바로 작은 것에서 느끼는 행복이고요. 이것만큼은 지고 싶지 않네요. 낭만이 없는 삶을 살아요, 우리. 마음대로. 여순이 기타를 잡지 않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오래라서 잘 될지 모르겠어요. 실수를 알아채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세요. 사의 찬미였다. 어, 이거 너무 슬프잖아. 아직 우린 창창해. 노래가 좋고 가수의 목소리가 사뭇 애간장을 녹여도 우린 살아야 해. 노래를 따라 바다에 빠질 수는 없어. 일절이 끝나고 나서 말수는 신청곡이라며 목포의 눈물을 요구했다. 요즘 자주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질리지 않아요.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 여순이 악보를 찾기 위해 일어섰다. 악보 없어도 대충은 되지만 완벽하게 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내가 한 번 불러 볼게. 말수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병원장님 하는 사환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찾는다는 전갈이었는데 말수의 눈은 벽에 가 있는 시간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저녁 10시가 넘어있었다. 이 시간에 나를 찾는다고. 아저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사환애는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는 포목점 집 사장이었다. 조금 안심이 된 여순이 그래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여보, 가져갈 거에요. 여순이 서랍을 가르켰다. 권총이 들어있는 상자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야, 불한당을 만날 이유가 없어. 저것을 쓸 정도면 일제 끄나풀 정도는 돼야지. 그쪽에서 먼저 소동을 벌이지 않으면 내가 나설 일이 없을 거요. 의심받을 일이 없으니 걱정 마요. 여보, 그런 소리 말아요. 걱정말래도.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해. 여순은 서랍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수는 대충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포목점 집 주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 옆으로 두 명의 사내가 따라붙었다. 어둠 속에서 여순은 말수가 양쪽에 팔을 낀 째 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여순은 처음에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으나 곧 안심이 됐다. 낯선 사람이 연행해 가는 것을 보고도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윤사장이 얼핏 내보였던 낯빛 때문이었다. 보라는 듯이 병원쪽을 향해 하얀 이빨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반드시 나쁜 전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순은 남편을 믿었다. 교관 훈련을 문제 삼아도 말수는 그들이 믿을 만한 말을 둘러댈 것이다. 자신 앞에서 예행연습까지 했고. 훈련요. 그건 일본 영사관에 사전 연락된 내용이에요. 몰랐어요. 그 병사들은 조선독립군이 아니라 조선파견 일본군입니다. 일제가 그 말을 믿을까요. 내가 당했거든. 미군이 이렇게 날 속였어. 훈련이 끝나자 미군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으로 간다고 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 줄 알아. 속았다는 것 뿐이었어. 이렇게도 속을 수 있구나. 걱정마. 여순은 긴가민가 했으나 말수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일은 여순이 모르는 군대일 아닌가. 그렇다면 일제도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하고 안심했다. 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믿을 수 없지. 차 안에서 말수는 그러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떤 말을 둘러대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양옆에 있는 사람들의 실체를 바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별거 아냐. 동생. 이분들이 일부러 오라고 하기 뭐해서 모셔가는 거니까. 나도 같이가니까 걱정할 건 없고. 언젠가 한 번 봤을지도 몰라. 우리 집에서 같이 반주 한 적이 있거든. 기억이 날지 모르지만.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소속 요원들이셔. 앞자리에 앉은 윤사장이 뒷자석의 가운데에 앉은 말수를 보면서 말했다. 말수도 대충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상하이에는 도처에 일제 안가가 있어 그들은 무전을 하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는 바로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중요한 내용 같으면 따로 심문을 할 테지만 그들은 말수와 포목점 집 주인을 따로 분리하지 않았다. 요즘 조선 독립군쪽과 접촉하고 있나요. 엽차를 앞으로 내밀면서 일본 요원이 말했다. 알고 있는 대로요.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그쪽에서 연락이 오면 만나는 정도고요. 오늘도 잠깐 만났어요. 말수는 부인하지 않았다. 뒤를 미행해 다 알고 있는 자들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쪽 정보를 얻는 차원이지요. 알려야 할 내용이 있다면 미리 형님에게 다 보고하고 있어요. 포목점 집 주인이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눴어요. 임정 요원이라고 하는데 누군지는 모르겠고요. 독립군 훈련에 대한 요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마지 못해 몇 번 참여 했고요. 그 사실은 영사관도 아실텐데. 고위급에만 전달됐나. 말수는 자신을 심문하는 자들이 그렇게 직책이 높지 않다는 것을 일부러 심어 주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오. 우리도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병원 일이 워낙 바빠 훈련에 참석해도 한 시간 정도 있다 바로 병원으로 오고 있지요. 빠지는 날이 참여한 날보다 훨씬 많아요. 나에겐 병원이 중요하지요. 그러고 보니 얼굴색이 안 좋아요. 검진은 받아 보셨나요. 간이 무척 상한 것 같군요. 쉽게 피곤하지요. 밤에 잠들기 어렵고. 요원이 당황했다. 그러면서 혹시 나쁜 병인가요. 하고 옆에 있는 요원을 보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간경화가 심해지면 간암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거고요. 흑색으로 변한 요원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정확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일단은 좀 쉬는 제 좋아요. 이제 위치는 역전됐다. 문제는 옆자리의 다른 요원이었다. 그가 질문을 이어받았다. 훈련병들이 조선독립군이 아니고 우리 일본군이라고요. 물론 입니다. 아시다시피 군대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조직 아닙니다. 하급병에게 누가 명령하나요. 상급병이지요. 그 상급 교관 30명이 모두 일본계 입니다. 그들이 가자, 너희들은 이제부터 황군이다, 하면 황군이 되는 겁니다. 요원이 말수의 눈을 의심 가득찬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번에는 포목점 집 주인이 거들고 나왔다. 내가 황포군관학교 출신 아니오. 그때 난 장개석 군대로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행군 중에 갑자기 중대장이 방향을 바꾸지 뭡니까. 우린 모택동 장군을 모시러 간다 이러지 않습니까. 그 말 한마디로 우린 졸지에 국민당에서 당이 바뀐 것이지요. 그넌 보고는 없었는데. 요원은 여전히 말수를 의심했다. 말수는 늘 품고 다니던 일본 영사가 직접 전달해준 덴노의 훈장을 슬쩍 꺼내 보였다. 나는 언제나 일본의 신민임을 잊지 않고 있어요. 그 훈련 교관은 위장 전술일뿐이오. 영사님도 사전에 알고 있어요. 그래요. 요원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 김에 영사님 면담을 좀 신청해 주세요. 인사나 드렸으면 해서요. 윤사장이 말했다. 그럽시다. 영사님 뵌지도 한 달이 넘었네요. 아, 영사님은 지금 주무십니다. 차 나 한 잔 하시지요. 머쓱해진 요원이 다시 말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저녁에 차라. 나쁠 거 없지요. 그나저나 진짜 절 데려온 이유가 궁금해요. 뭐, 그게 전부에요. 윗선이 잘 못 짚었나 봅니다. 윗선이라면. 제 직속상관인데. 아 그분요. 이번에도 포목점 집 사장이 끼어들었다. 의사 선생이 도주할 이유도 없고. 아무나 받을 수 없는 덴노 훈장까지 있으시고. 또 여기 윤사장님이 신원을 보증 하시니.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선생이 우리 일본의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말수는 두말하면 잔소리요 하고 대꾸하려다 상대의 다음 말이 궁금해 기다렸다. 나올 답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병원 개업에 우리가 협조한 일을 언급하고 나카무라 대장을 언급할 것이다. 우리가. 아 병원 개업에 도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잡았습니다. 어느 정도라니요. 상하이에서 제일 유명하지요. 윤사장이 말했다. 아랑곳 없이 영사관 요원은 우리가, 그때 제가 병원 허가증이며 선생 부부 의사 자격증을 책임졌지요. 요원이 자신의 역할을 강조했다. 잊지 않을게요. 황국신민의 정신을 한시도 놓은 적이 없어요. 그리고, 말수는 간경화가 의심되는 요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무때나 오세요. 제가 없으면 아내가 봐줄 겁니다. 제가 미리 얘기해 놓지요. 아, 참 병원비 걱정은 마세요. 말수는 요원을 따라 일어섰다. 괜한 빌미를 주지 마세요. 지금 시국이 어수선한 것 선생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자칫 잘못될 수 있단 말이오. 요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쪽이 아니라 당신은 우리편이 확실해요. 요원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임정사무실 아지트는 우리도 짐작하고 있어요. 급습하면 달아나고 급습하면 달아나고 그런 적이 서너 번 있어요. 그래서 상하이 전체를 포위하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작정이오. 임정의 우두머리를 체포하면 조선 독립운동도 힘을 잃을 거요. 선생은 처신을 잘해야 합니다. 특히 이런 때는 더 그렇지요.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새 소식은 아는 데로 우리 포목점 사장님에게 전달해주시오. 영사관 요원이 이제 가도 좋다는 듯이 부하를 불러 모셔다드리라고 말했다. 부하가 들어오기도 전에 포목점 집 사장이 입을 놀렸다. 전쟁이 곧 끝난다는데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요. 글쎄요. 우리가 이기기는 이기는데 쉽지가 않아요. 양키들이 워낙 드세게 나오고 로스케까지 설치고 있으니 조금 정체된 상황이긴 하나 곧 마무리될 겁니다. 영사관 관계자는 그 말을 하면서 자신도 신뢰할 수 없다는 듯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의사 선생, 일본에 갈 생각은 없어요. 이곳보다는 도쿄에서 개원하는 것이 돈벌이에 더 좋지 않아요. 전쟁 걱정도 없고. 그러고 싶은데 기회가 없어요. 단골 환자도 늘어가고 있고 왠지 오래 있을수록 정이 들어 그것이 걱정입니다. 선생, 선생이 일 좀 해줘야겠어요. 그가 바짝 다가오면서 한 마디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포목점 집 주인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인 양 목소리의 톤을 낮췄다. 이번에는 선생이 임정과 접촉하세요. 그들이 와서 만나기 전에 만남을 먼저 요청하세요. 그런데 그들이 어디에 있고 누구와 연락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문제네요. 언제나 만나자는 쪽은 그 쪽이었으니까요. 걱정할 것 없어요. 여기 형님과 같이 가면 됩니다. 만나기 직전에 형님은 빠지고요. 따라가서 약속을 잡으세요. 선생을 그쪽에서 믿는 눈치이니 만나자고 하면 거부하지는 않을 거요. 피라미라도 좋으니 잡아야겠어요.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요. 족치면 임정 수뇌들의 아지트를 찾겠지요. 영사관 직원은 그 말을 하면서 말수의 손을 꼭 잡았다. 이미 들어와 있던 부하는 대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알고는 문간에서 조심스럽게 서 있었다. 어, 왔니. 애가 왔으면 왔다고 기척을 해야지. 중요한 이야기인데. 너 혹시 들은 건 아니지. 예,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이 자식이 시치미는. 알았다. 물은 내가 잘못이지. 저녁도 늦고 했으니 두 분을 집으로 모셔다드려라.

말수와 포목점 집 주인은 동시에 문쪽으로 향했다. 말수는 영사관 요원과 헤어지면서 도쿄에 적당한 개원 장소가 있으면 알려달라면서 그곳을 나왔다. 말수는 그 말을 하고 깜짝 놀랐다. 진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정이 드는 곳이 아니라 질렸다. 말은 정이 들었다고 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도쿄로 가고 싶다. 이 문제는 여순하고 바로 상의해야지. 그는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장소를 요원과 함께 차를 타고 다니다 넓은 길로 나왔다. 일행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구석에 대기하고 또다른 차가 보였다. 대충은 알겠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 그런 장소에서 말수는 차를 갈아탔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그다지 좋은 결과도 아니어서 말수는 덤덤한 기분을 유지한 채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조금 망설였다. 일제의 끄나풀 제의를 공식적으로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포목점 집에서 술을 먹을 때는 윤사장이 그저 술김에 하는 이야기였으나 이제는 정식 안가에서 영사관 요원에게 받은 제의이니만큼 이전의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스파이 노릇을 하라니. 나보고 일제 간첩이 되라고. 그것도 임정 수뇌 박멸 작전에 나서라고. 군사 훈련은 어찌하고. 독립군 이 개 사단 폭파 교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훈련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발각되면 정보를 얻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둘러대고 그들도 결국 황국신민의 병사가 될 것인데 무슨 문제냐고 따지면 된다. 조선으로 급파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독립군이나 일제의 병사나 어느쪽이든 갈 수 있는 상태였다. 점령지에서 훈련받는 병사는 점령지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조선 침투를 명받고 있지만 어느 순간 일본 군복을 입고 태평양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다. 휴의의 동료가 미군 특수 부대원이 된 것처럼. 미군 특수 부대로 차출된 독립군 일개 사단 병력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말수는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쪽도 저쪽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만큼 신변은 되레 안전했다. 자정이 조금 넘어 말수는 집에 도착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차가 집앞에 멈춰섰다. 포목점 집 주인이 내렸다. 두 명의 신사는 양쪽 문을 통해 동시에 내렸다. 가운데에 앉았던 말수는 맨 나중에 몸을 드러냈다. 갈 때와 비슷한 모습이어서 시간만 돌려 놓으면 가는지 오는지 모를 정도였다. 말수는 뭐라고 몇 마디 했다. 아마도 들어가서 차 한잔 하고 가라는 시늉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손사래를 크게 치면서 사냥했다. 손을 내민 그들과 차례로 악수하고는 말수는 잘가라는 식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같이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여순은 창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수가 계단을 타고 올라는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찍 왔네요. 혹 오늘 못 오실 줄 알았어요.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흡족한 듯 말수의 목소리에 힘이 붙었다. 우리끼리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저들을 잡았는데 그냥 가네. 물론 형식적이었지만. 정말로 들어오면 어쩔뻔 했어요. 그래서 조금 걱정했어. 다행이지 뭐. 우리끼리 합시다. 이 밤중에요. 술은 원래 밤에 먹어야 제맛이지. 윤사장을 잡지 않은 건 내일 수술 때문이야. 그리고 당신을 잡은 건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거고. 그래요. 대신 그 약속 지키기요. 여순이 공자가 즐겨 먹었다는 공부가주를 들고 왔다. 도수가 높은 술이야. 어쩜 그렇게 나하고 기분이 똑같을까. 나도 포도주보다는 이런 술을 원했는데. 술잔을 들고 있는 말수의 얼굴이 옆으로 넓게 퍼져 네모꼴이 되었다. 그래 누가 어디로 데려가 무얼 묻던가요. 누가. 어디로. 무얼. 말수가 손가락을 꼽으려 한꺼번에 세가지 질문이라. 난감하니 순서대로 말할게. 일본 영사관 직원이 영사관 안가로 독립운동과 훈련에 대해서 묻더군. 이걸로 충분하지. 짜잔. 말수가 잔을 들이밀며 잔이 아닌 입으로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생각보다 점잖았어.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야 그렇지. 난 그들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런데 거짓말을 해봐. 신뢰가 깨지지. 그래서 사실대로 다 말한거야. 훈련 교관으로 참여하고 임정에 독립자금을 조금 대고 그쪽 요원들과 접촉하고, 다 불었지. 자칫하면 이대로 황천길로 갈 수도 있잖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내 목숨을 지킬까 그것만 생각했어. 그렇다고 무턱대고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애걸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나오면 더 일찍 죽는 거지. 그 와중에도 쓰느라고 머릿속은 이렇게 복잡했어. 말수가 제 머리를 툭툭쳤다. 그럴수록 정신을 차려야지요. 그렇게 했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살게만 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요량으로 대답했다면 지금 나는 여기 없어. 목숨이 끊어지는 일만 아니라면 원하는 어떤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자세는 일치감치 버렸어. 그랬더니 홀가분 하더군. 그 자들도 더 캐물을 수 없었지. 그런데 말이야. 윤사장은 도무지 믿기 어려워. 일제도 그런 생각을 가졌을 거야. 그러니 나를 직접 불러 심문했지. 뭔가 실체를 알아보려고 했으나 윤사장은 교묘히 빠져 나갔어. 내 말에 찬동을 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니 고맙더라고. 그러면서 여기서는 진실 말고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판단했던 거고 그게 맞아 떨어진 거야. 점잖게 대하던가요. 물론이지. 써먹을 데가 있는데 함부로 나올 이유가 없지. 더구나 내가 연기를 잘했어. 자연스럽게, 정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연기를 한 거야. 만족한 듯이 말수가 입을 벌렸다. 그런데서는 무언가 꼬투리를 남기기 마련이잖아. 긴장되고 흥분되서 앞에 물잔이 있는지도 모르고. 차를 다 먹었더니 앞에 있던 요원이 그러더군. 이곳 차가 일류에요. 한 잔 더 드시지요. 이러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독만 들어 있지 않다면, 하고. 그자가 웃더군. 의사선생은 유머 감각도 좋아. 포목점 집 주인도 덩달아 한 잔 더 먹었지. 윤사장에게는 질문을 하지 않던가요. 아마 함께 오면서 서로 말을 맞춘 모양이야.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자고. 나를 시험해 보자고. 그런데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지. 내가 다 말해 버렸으니까. 막판에 상관인 자가 말하더군. 악수를 청하면서 일본 첩자가 되라고. 첩자라고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협조해 달라는 말의 다른 말이 첩자 아닌가. 첩자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임정 요원들의 아지트를 알면 바로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 하더라고. 그게 첩자 질이지 다른 게 뭐 있어.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독립군이 길목을 막고 있다는 거야. 형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옆에서 내가 난처해 질경우에 대비해서 바람잡이를 잘해줬어. 눈치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이니. 덕을 봤군요. 그도 내가 아직은 일제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본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그 형님은. 언제 태도가 돌변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렇게 따지듯이 묻지마. 요원들보다 더 강압적으로 나오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가벼운 면박을 주면서 말수가 말을 이었다. 알면 알려준다고 했지. 그때는 임정 요원은 물론 선생의 위치까지 알면 다 불겠다는 심정이었어, 실제로. 잘했어요. 짜잔. 이번에는 여순이 잔을 내밀었다.

당신, 그러다 취해. 내일 환자는 어떻게 보려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 겨우 세 잔인데요. 도수를 생각해야지. 40도가 넘어. 그래서 그만하려고요. 당신도 멈추세요. 그럴 생각이야. 평생 먹을 술을 아껴서 먹어야지. 사람에겐 총량이 있어. 평생 사랑할 총량, 평생 먹을 술의 총량 그리고. 그리고 뭐요. 생각나면 알려줄게. 술의 총량은 이미 넘어 선 것 알고 있지요. 무슨 소리, 아직 삼십 프로도 안썼는 걸. 말수가 아까운 듯이 병 마개를 닫았다. 허둥대지 않은 건 내 체질인가 봐.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거든. 표정도 그렇고. 잘못한 사람들은 왜 비굴해지잖아. 난 평소와 같았어. 거짓말 같은 건 꿈도 꾸지말라고 위협하던 눈초리는 금새 수그러들었지. 사실대로 말하니 그들이 준비했던 다음 작전은 쓸모가 없어졌거든. 묻기도 전에 나는 독립군 훈련 등에 대해 속사포처럼 쏘아댔지. 결정적인 건 훈련 시켜서 독립군이 아닌 일본군으로 써먹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준 거야. 여순이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껌벅였다. 그 전에 미군이 독립군 일개 사단을 태평양 전선으로 빼돌린 사례도 제시했어. 그들도 놀라더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내 마음속은 언제나 덴노에게 가 있다고. 그러자 옆에 섰던 자가 목소리에 위엄을 깔고는 벌떡 일어서면서 손을 들고는 덴노 반자이 하지 않겠어. 거기 있던 서너 명이 모두 덴노 반자이 삼창을 했지. 분위기가 어떻겠어. 상상이 안가네요. 훈련 제대로 시키시오, 의사선생 이러지 않겠어. 그게 가능해요. 당신은 정신교육도 한다면서요. 그건 순간순간 바뀔 수 있어.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거든. 직속 상관이 어느 순간 일제로 바뀌고 군복을 바꿔 입으면 어떻게 되겠어. 바로 황군이 되는 거야. 하지만 마음이 아파요.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조금 걸려. 하지만 살아야지 어쩌겠어. 살고 나서야 독립도 있고 애국도 있는 거지. 그건 나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의심 많은 그들이 쉽게 동조한 게 의심이 가요. 그들이 의심하면 나도 의심하면서 지켜보는 수밖에. 아마도 그들은 나를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으로 생각하나 봐. 일본으로 가기 전에 나카무라 대장이 내 신변에 대해 이렇게 말했거든. 여기 의사 선생은 우리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어떤 불편도 없도록 편의를 봐주세요, 하고 부탁했거든. 그것을 영사관도 알고 있고 일경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믿지. 지금은 그런 시대에요. 믿음이 불신이 되고 불신이 믿음이 되는 세상, 모든 게 뒤죽박죽이지요. 그래 당신은 그 회색의 모습을 언제나 유지해야 되요. 색깔을 드러내는 순간 위험해져요. 걱정 붙들어 매라고. 때에 따라 일제가 되기도 하고 독립파가 되기도 하고 검은색이든 붉은색이든 회색이든 난, 살기만 하면 어느 쪽도 아냐. 그게 내 신조고 그 신조를 바꿀 생각은 없어. 지금까지는. 앞으로도 그래야 해요. 여순이 말뚝을 박듯이 말했다. 어쨌든 말이야, 내가 백번 생각해도 연기는 내가 잘해. 다들 내 말은 믿거든. 얼굴에 진실이라고 써있나 봐. 사람에게는 육감이라는 게 있는데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신뢰했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아니라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가짐이 그들의 눈에 보이나 봐. 심지어는 존경의 눈초리까지 보냈다니까. 우리 점 집이나 열까요. 아니면 배우나 돼볼까요. 점쟁이는 좀 그래. 배우가 좋겠어. 평화가 오면 경성방송국에 오디션을 함께 보러 가지요. 당신도. 나라고 못 할 이유가 있나요. 부부의사에 부부 배우라. 그것만으로도 호기심이 일겠는걸. 둘은 일어났다. 말수가 손을 잡았다. 자기 전에 우리 춤이나 한번 춥시다. 생환 기념으로. 소화도 시킬 겸. 지금이 몇 신데요. 주책맞기는. 당신 그거 알아. 상하이 대세계에서 당신은 빛났어. 그 어떤 여성도, 서양 최고의 미인도 당신의 미모와 춤을 따라가지 못했지. 말수가 여순을 안고 빙빙 돌았다. 음악도 없이요. 그렇지. 내 정신머리라고는. 여순이 레코드에 손을 대려 하자 내가 할게, 하면서 말수가 바늘을 들어 판에 올려놓았다. 황성옛터 좀 한번 가 봐야겠어. 이렇게 질리도록 듣고도 가보지 않으면 노래에 대한 예의가 아냐. 그보다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요. 글쎄, 경주에 있나. 아니면 부여나 공주겠지. 개성이나 평양일지도. 내 참.

둘은 돌았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말수는 여순을 안고 침대로 돌진했다. 삼십 분 쯤 후 코를 고는 말수를 남겨두고 여순은 거실로 나왔다. 흐릿한 가로등 불이 거실로 스며들었다. 술기운 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낮에 죽어라 일해도 숙면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잠 못 이뤄 두렵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긴 잠을 못 자서 그렇지 한두 시간의 쪽잠은 언제나 가능했다. 꼬박 날 밤을 세워도 진료 시간 틈틈이 눈을 붙일 여유는 있었다. 그래서 인지 여순은 말똥말똥한 눈을 억지로 감지 않았다. 낮과 밤을 조절하는 것을 포기했다. 여순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으면서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자려고 기력을 소진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새벽 2시 30분이다. 정말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죽마을의 그 시절과 지금의 고요함은 닮았다.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어디 숨을 곳이 없는지 틈을 보다가 들입다 닥쳤다. 그것마저도 죽마을과 진배없었다. 바람은 먼 조선 땅이나 이곳 상하이나 숨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랬다가 기회가 오면 달려들었다. 그래, 뭐, 감춰둔 물건이 있다면 모를까 닥쳐온다고 해서 두려워할 게 뭐람. 혹 일제가 찾아내서 꼬투리 잡을 만한 물건 같은 건 없겠지. 조금 전의 일에 여순은 생각이 그 쪽에 몰려 있었다. 말수가 놓치고 있는 지점을 찾아 자신이 메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전장에서 이리저리 붙다가는 사달이 날 수 있다. 그것이 되레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말수는 말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는 문제였다. 서류나 무슨 이상한 것은 없나. 쌓아 논 것은 환자 차트였고 잡지나 신문은 누구나 소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순은 기지개를 켰다. 권총이 생각났다. 길거리에서 주웠다고 할 수 있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간혹 분실된 총기류를 회수한다는 공고를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총알 한두 개 정도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신변 보장을 위해 훈련 교관이 챙겨 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폭약이 문제였다. 말수는 다이너마이트에 애착이 있었다. 언제부터 끌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병원 개업 전에도 무슨 돈 보따리처럼 다이너마이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의 존재를 그는 항상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 좀 치워요. 제발. 잘못되면 우리 목숨은 물론 병원마저 날아가잖아요. 그렇게 쉽게 터지지 않아. 위험한 물건이지만 간수만 잘하면 시루떡처럼 안전하다고. 시루떡요. 난 이걸 보면 늘 그게 생각나. 엄마가 만들어 주었어. 설마 나를 못믿는 건 아니지. 조선독립군 폭파 교관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말수가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쓸모가 없잖아요. 우리가 쓸 것도 아니고요. 차라리 임정에 넘겨 버리던지 훈련장으로 가져가요. 그럴 수 없어. 그건 내 목숨과 같은 거야. 그게있고 없고에 따라 내 마음이 달라져. 내가 언제나 마음이 놓이는 것은 바로 그 자루 속에 있는 물건 때문이지. 모르겠어요. 무서운 것이 왜 안심을 가져오는지. 정, 그렇다면 눈에 안 띄는 깊은 곳에 숨겨 두세요. 며칠 전에 집 마당을 깊이 파고 거기에 묻었어. 당신 나갔다 온다고 한 날 말이야. 정말이죠.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진실로 말하는 거야. 여순은 그런 대화를 상기하고는 곧 다른 생각으로 옮겨갔다. 일본에서 개업이 어떠냐고 영사관 직원이 말했다고 했지.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그러지 못하라는 법도 없잖아. 여기는 불안해. 전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일본이라면 좋아. 패전한다고 해도 본토에서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야. 거기에는 나카무라 대장의 든든한 백도 있고. 여기보다 환자도 많을 거고. 조선인도 많고. 여순은 갑자기 일본에 가고 싶었다. 거기라면 말수의 들뜬 마음을 잠재울 수 있다. 무슨 당을 창당하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그리고 한밤중에 일본 영사관 요원이 집 앞에 차를 댔다.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가. 납치되는 줄 알았다. 남편 없는 세상을 여순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됐다고는 하지만 일제는 임정 무력화에 나서고 있는데 독립군 훈련 교관이라니. 그 군대가 독립군이 아니고 황군으로 쓰인다고 둘러댔다고. 참, 어이없다. 너희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쳐야 한다고 외치고 나서 침이 마르기도 전에 그 병력을 황군으로 뺀다고. 여순은 말수가 하는 일이 벼랑 끝에서 뛰어 내릴까 말까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위험한 놀이로 보였다. 감옥소 담장위를 걷고 있다. 헛디디면 끝이다. 옛날의 본성은 눌러야 한다. 스멀스멀 연기처럼 올라오는 그것을 찍어 눌러야 한다. 지상에 올라와 사방으로 퍼지면 잡을 수 없다. 지금이 적당한 순간이다. 바람 부는 대로 쓸려가게 내맡겨 둘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기 어렵다. 언제 화를 참지 못해 들이댈지 모른다. 군자다운 행동과는 거리가 있다. 내가 훼방을 놓는다면 그가 버티고 서 있을 힘이 있을까. 여보, 그건 아니라고요. 여순이 목이 메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어쩌자고 이리저리 붙어 다니나요. 이쪽도 저쪽도 적당한 거리를 둘 수는 없나요. 하루는 독립운동에 불타오르다가 다음날에는 황군의 역할을 강조하면 당신은. 내가 회색 인간이기를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적당한 사이를 두라는 의미였어요. 선을 넘지 말라고요. 이러다 우린 다 죽어요. 당신도 나도 아들도. 난 그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나를 알잖아요. 나의 과거, 나의 전부를. 전선에서 막사에서 갑판에서 성당의 무너진 잔해 속에서 당신은 나에게 신이었어요. 불사신인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고요. 여보. 하지만 당신의 지금 행동은 위험해요. 앞마당에 묻었다는 다이너마이트보다 더 크고 더 거칠고 황량해요. 여순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깊숙이 마신 담배 연기를 토해내는 기분이었다. 일제는 기울고 있다. 언제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 그래, 일본이야. 여순은 머릿속이 온통 일본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하이는 이제 지겹다. 정을 줬지만 더 정이 들수는 없다. 미군의 공격으로 조계지가 폭파될 때 여순은 직감했다. 서양사람이라고 전쟁은 봐주지 않았다. 무사히 상하이를 떠날 수 있을까. 기회가 오고 있다. 마음이 어찌나 흔들리는지 여순은 걷잡을 수 없었다. 거기가면 점례를 만날지도 몰라. 내무대신의 아들과 같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카무라 백은 백도 아냐. 점례를 만나고 싶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하고 묻고 싶다. 그림을 그린다고. 놀랍다 애. 니가 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너는. 너는 어떻고. 여순이 의사라니. 정작 놀라운 건 너야 너.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애는 있니. 난 양자를 들였어. 그 다음 말은 묻지 않겠다. 점례가 말하지 않는다면. 어디 있었느냐고 눈으로라도 묻지 않겠다. 경성역에서 헤어지고 나서 어디로 갔느냐고. 가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어떻게 화가가 됐고 어떻게 내무대신의 아들 유마 호사카를 만났느냐고, 묻지 않겠다.

점례도 나에게 다른 것은 다 물어도 그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성에서 헤어지고 넌 어디서 무얼 했니. 휴의는 잘 있는지. 완용은 여전히 사냥개 노릇에 충실하고. 남자 둘은 빼놓자. 우리만의 이야기를 하자. 나도 그림에 좀 관심이 있는데. 이 참에 점례 사인이 들어간 그림 한 점 얻어 볼까. 아니 사야지. 어떻게 그린 그림인데. 아니야, 점례는 그냥 줄거야. 돈을 내면 화 내겠지. 알았어. 알았다고. 내 방에 걸어 놓으면 좋겠다. 병원 복도에도 전시해 놓고. 나는 무엇을 주지. 글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래 아프면 공짜라고 하자. 내 건강은 못지켜도 네 건강은 내가 챙겨 줄 수 있다고. 기타도 쳐주지. 피아노를 치면서 황성옛터를 불러줄거야. 앙코르 하면 목포의 눈물이고. 그리고 울고 싶으면 울고, 실컷 울고 나서 종일 웃자. 생각이 이런 쪽으로 흐르자 여순은 코를 골며 자는 말수를 깨우고 싶었다. 여보, 우리 일본가요. 거기서 개업해요. 영사관 직원이 추천해 준다면서요. 친절한 제안을 거절할 필요가 없어요. 도쿄로 가요. 거기서 근사한 병원을 열어요. 여보, 눈 떠봐요. 여순은 정말 흔들어 깨워 이런 말을 하려는 듯이 안방 문을 열었다. 그곳은 어두웠다. 커튼까지 내려진 방은 도무지 빛이라고는 없었다. 여순은 다시 문을 닫았다. 들떠서 꿍꿍거렸던 발자국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들었다. 그래 이렇게라도 생각이 정리됐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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