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포대기 상자를 들고 윤사장 부부는 문을 닫고 나갔다
상태바
포대기 상자를 들고 윤사장 부부는 문을 닫고 나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11 09: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6.

윤사장은 한 바탕 웃고 노래부르고 떠들더니 여순이 준 포대기 상자를 들고 그렇게 사라졌다. 그들이 병원문을 닫고 나서야 말수는 무엇에 홀린 듯한 멍한 기분이었다. 귀신에 왔다 간 기분이 이럴까. 진료를 핑계로 와서는 노래를 부르고 환자를 염탐하고 사라졌다. 그는 밀정인가. 말수는 그에게서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너무 쉽고 너무 거칠고 너무 빠르게 모든 것이 분명해 지고 있었다. 배가 저렇게 나올 정도면 얼마만큼의 내적 갈등이 있었을까. 그를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돼. 누구라도 그렇지만. 신뢰와는 거리가 먼 그냥 그런 사람. 유쾌한 사람. 그러나 조심해야 할 사람. 기분을 내는 스타일이었고 분위기를 올릴 때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누가 제지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아쉬움을 드러내면서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도 알았디. 그 아내는 그런 남편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와 아주 친밀하기는 어려웠다 아주 모른 척 하기도 어려웠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보였다. 그와는 진지한 설명이 필요한 대화나 어떤 주제에 대한 토론 상대는 아니었다. 기분에 따라 같이 어울릴수 있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말하면 그러냐고 대답하고 안 물어도 될 시시한 질문만 하면 됐다. 말수는 그렇게 윤사장을 정의했고 여순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심각하게 다룰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금방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11월이었다. 날은 갑자기 추워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을 날씨였는데 저녁 무렵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다음날 첫 눈이왔다. 상하이서 처음으로 맞는 겨울이 시작됐다. 여순은 습관처럼 이층 자신의 방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래를 보는 것을 여순은 좋아했다. 아무런 감정없이 아래를 보는 것은 그녀에게 일종의 달콤한 휴식같은 거였다. 그녀는 또 습관적으로 창문을 열었다. 열린 틈으로 겨울바람이 횡하니 들어왔다. 이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여순은 놀랐다는 듯이 문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는 문을 다시 닫아야 하는지 아니면 스웨터의 단추를 잠가야 하는지 조금 망설였다. 망설이는 그 상태로 또 시간이 지나갔다. 거리를 다니는 서너 명이 내는 소리가 들였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사람 소리는 분명했다. 그녀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사이이고 어떤 이유때문에 어디로 함께 가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들에게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지금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의 늪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환자가 없는 틈이면 여순은 늘 이런 마음으로 일상을 채워나갔다. 책을 보다 잠시 다른 길로 가는 경우는 대개 이런 세상에 속해 있었다. 악기 연습하다 손톱을 고를 때도 이런 쪽을 벗어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를 때는 달랐다. 그때는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와 감정에 주목했다. 그러면 좋은 기운이 몰려 왔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충전의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그런 것이 좋았다.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당장의 고통이 없을 때 도드라졌다. 편안한 마음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하지 않아도 찾아왔다. 요 상태가 그녀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더 바라지 않았다. 급상승하는 기분을 원하지 않았고 설사 그것이 온다고 해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여순의 장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전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상하이에 와서 더욱 굳어졌다. 심각한 환자이거나 별 것 아닌 환자를 대할때도 표정은 늘 비슷했다. 의사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환자에게 안정을 취하라고 한들 그것이 제대로 전해질리가 없다. 의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애초부터 그런 성격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감정을 유지하는 평상심 그 자체가 여순에게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아래층의 말수는 또 어떨까. 그는 병원이 안정되고 수입이 늘자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남들처럼 고심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조선으로 가야 할 지 아니면 이곳에서 말뚝을 박아야 할 지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겼다. 여순의 것이 뜬구름 잡는 것이라면 말수의 것은 손에 잡힐 듯한 조금 더 구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손에 잡고 싶지 않았다. 다급하지 않고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될 것라는 막연한 낙관이 그를 떠나지 않고 있었고 지금이 나쁘지 않았다. 이것은 여순이 갖는 지금 이 상태가 좋아, 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말수가 이런 것은 여순에 대한 믿음과 신뢰였다. 종종 여순은 자신보다도 뛰어났다. 영어도 그렇고 의학서적을 읽어 내는데도 그렇고 악기 다루는 솜씨도 그랬다.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환자들에게 위안을 주었으며 결코 과잉진료로 돈벌이에 나서지 않았다. 꼭 필요한 진료와 치료만 했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의 돈을 갈취하려는 의도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병이 없는대도 있는 것처럼 속이지도 않았고 수술이 어렵다고 티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성숙했고 인생을 앞서 나갔다.  여순이 행복할 때 말수는 웃었다. 자신의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한 때는 너무 환자에게 기우는 것이 못마땅할 때도 있었다. 여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돼. 알아 듣겠지. 말로 설명하고 적어주고 또 설명하면 됐지. 우리가 집까지 따라가서 간호할 순 없잖아. 딱해 보여서요. 보호자도 없는 것 같고. 그래도 우리 책임은 거기까진 아냐.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해 해야 한다고. 알아 들었어요. 그런데도 자꾸 마음이. 약해지지마. 어제 환자만 해도 그래. 이미 죽어서 왔잖아.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고. 하나님이라도 못 살려. 마치 자신 책임인 것 마냥 마음쓰지마. 당신이 죽인 게 아냐. 우린 최선을 다했어. 대충하고 넘어가지 않았다는 걸 내가 알잖아. 알았어요. 여보. 말수는 여순의 건강이 걱정됐다. 그러나 여순은 여순대로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가 의사책임인지 아닌지를 옷감처럼 재단할 수는 없다. 우린 양심대로 하고 있는 거야. 이윤을 붙이면서 고리이자를 받는 것도 아니고. 병원 초창기 때 말수가 때로 화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인술이 아니라고 여겼다. 제대로 인술을 펴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들어오는 돈을 막고 있으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말수는 속을 끓였다. 좀 더 야무지게 일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을 불평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되레 그것이 야무진 것이라고 여기게 됐고 천성이 그런 여순을 좋게 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답답해서 한 마디했으나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더 받을 수 있는데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때 그녀는 야무지지 않다는 생각을 말수는 바꿨다. 여순이 옳아. 야무진 것은 서민 등골을 빼는 거지. 여순이 물러터지다니 말도 안돼. 그녀는 강해. 내가 앞으로만 가려고 할 때 막는 것도 그녀지. 고삐를 잡고 뒤로 당겨. 여기까지 온 것도 다 여순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지.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적당히 박차를 가해도 되는 데. 말수는 이해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가다가 자빠졌을 것이다. 여지 없이. 그러니 말수가 보기에 여순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여순의 천성을 따라야해. 말수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결정을 하는 자신이 대견스러워 스스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큰 틀에서 보면 이렇게 둘은 사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말수는 여순보다 정치에 조금 기울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그 자신의 운명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늘 새로운 환자를 맞는 것 만큼이나 신기했던 것이다. 열세인 공산당과 우월한 국민당이 손을 잡으면 될 일을 그들은 잡았다, 놓았다하면서 서로 견재했고 싸웠다. 이민족과의 전쟁보다 때로는 더 격렬하게 내전을 벌였다. 공동의 적인 일본군 앞에서도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상황을 말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조선말의 조정 회의에 단 한 번만이라도 참석했더라면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말수는 아직은 순진한 때를 벗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정치가 무엇인지 정권을 잡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공산당이 힘이 약하다고. 지금 당장은 그럴지 모르지만 전세는 역전될 수 있다는 것까지 말수는 내다보지 못했다. 다만 공동의 적을 위해 합치지 못하고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것은 독립군 내부 사정을 들여다 보고 났을 때 확연히 드러났다. 임정의 상황을 알았을 때도 그랬다. 국공내전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씁쓸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마치 한 몸 처럼 움직였다. 만주를 먹고 더 큰 세계를 집어 삼키는 힘은 그런데서 왔다. 더구나 일본은 얼마나 끈질긴다. 끈질긴 자를 제압하는 것은 힘센 자를 때려 눕히는 것보다 어렵다. 말수는 이런 정세판단을 하면서 일본의 운이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일본은 중국 전체를 노리고 있었다. 아직 전부 다 삼키지는 못했어도 야금야금 전진해서 한 뼘씩 늘리는 그들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괴뢰국을 만주에 세우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이 뚫리면 러시아도 위험하다. 여기까지 말수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조선독립군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연 진격하는 일본군이나 방어하는 중국군만큼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까. 실체는 있기는 할까. 아직 활약상은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때를 보기 위함인가. 포목점 윤사장이 말한 임시정부는 제대로 자기 일을 하고 있을까. 자기들끼리 싸우다 낮밤을 지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선독립군을 지휘하고 지령을 내리는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후 조종자의 지위가 흔들리면 그 아래는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한 발 안으로 들어가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호기심이 일었다. 앞으로 배를 내밀고 다니는 남자라면 나보다는 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는 독립군과 연계돼 있을 것이고 그 연계선을 따라가면 마침내 최종 종착지는 아니더라도 중간 기착지 정도는 알아 낼 수 있다. 마침내 도착역에 서면 말수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더 뚜렷하게 다가올 것이 두려웠으나 피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면서 한 번 넘겨짚어볼까. 신뢰할 수 없는 존재지만 그래도 그 새 새로운 소식이 있을지 모른다. 이번에는 좀 더 은밀하고 조용하게 전해줬으면 싶다. 새 것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 사방팔방 떠들고 다닐 내용이 아니잖는가. 쉽게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 점을 넌지시 알려줘야 겠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면 그 이유를 알아야겠고. 아쉬워. 그 남자는 비록 나와 둘이 있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도대체가 조심성이 없어. 날 믿을 근거가 없는데 처음부터 자신이 독립자금을 대는 것을 자랑하다니.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해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는 것이다. 나 말고 다른 조선인을 만났어도 그렇게 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윤사장을 믿지 못하는 근거였다. 만약 그 조선인이. 일제의 밀정이거나 고정간첩이라면 독립군에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타격이 된다. 그런 위험을 알지 못할 위인은 아닌데. 그렇다면 그 자신이 일제가 고용한 간첩인가. 일제의 끄나풀. 그렇다면 나는. 역으로 그를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이용해서 어쩌려고. 얻은 정보를 임정에 보고하겠다고. 그런 끈도 없잖아. 참 윤사장은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야. 날 언제 봤다고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쉽게 입을 열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에 이르면 말수는 모골이 송연했다. 아지트를 발각당한 독립군은 그 자리에서 죽거나 체포되거나 어쨌든 인생의 종착점을 맞게 되는 것 아닌가. 윤 사장은 좀더 세밀했어야했다. 나와 입장을 바꾼다면 나는 결코 그런 식으로 내가 독립군을 지원하는 임정과 끈이 있다는 둥의 자기 과시성 발언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마누라만 해도 그렇다. 그런 말을 하면 푼수가 아닌 이상 제지해야 마땅하다. 아이 여럿을 낳고보니 판단력이 흐려졌어도 아내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순이라면 분명히 옆구리 살을 아프게 꼬집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집에 오는 내내, 집에 와서도 허물을 지적하고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집요하게 물어 뜯을 것이다. 그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약속해. 그것으로도 부족해요. 그럼. 손을 걸어요. 알았어. 지장을 찍으라면 찍을 게. 이 정도 선까지는 와야 한다. 그래야 조심하지. 윤사장에 불만이 있자 그가 가지고 있는 부른 배도 불만이었다. 그것은 쉽게 눈에 보이는 외모였다. 다들 마른 체형인데 그만이 앞으로 배를 내밀고 걷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시국에 배부른 자는 분명 문제가 있는 자이다. 그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 분명하다. 일제가 심어 놓은 밀정이 아니라면 독립군 운운하는 조선인을 왜경들이 가만 둘리 없다. 언젠가 그는 쫒길 것이고 그럴 때 부를 배를 원망할 것이다. 그 때는 늦었다. 달리기가 느린 그는 곳 잡히고 얻어 터지고 심하면 총에 맞에 죽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윤사장에게 해줘야 할 지 말아야 할지 말수는 고민했다. 

만나기로 마음을 먹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나온, 배를 집어 넎어야 산다는 아이디어는 이래서 나왔다. 적당한 때에 써먹으면, 농담처럼 이야기 하면 그가 웃을지 아니면 정색을 하고 그러지요, 뭐. 의사선생의 충고를 들어서 나쁠 게 없어요. 하면서 킬낄 웃어댈 지 모른다. 그것으로 긴장은 풀리고 어느 새 그동안 적조했어요. 자주 만납시다. 이러면서 전에 만났던 것처럼 친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래, 이번 주말에 그쪽으로 한 번 가보자. 다른 볼 일 때문에 들른 것처럼 해서 만나면 그도 무슨 볼일이 있어 일부러 찾아왔나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있다. 말수는 그런 생각을 하자 목요일 밤이 길게 느껴졌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에 횡 하니 병원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길은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했으나 일부 녹은 곳은 시커멓게 지저분한 자국을 남기도 있었다. 말수는 여순이 열린 창문을 닫지 않은 것어럼 열린 병원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일층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층 창문의 틈으로 들어오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병원 전체가 금세 기온이 뚝 떨어졌다. 여순은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다시 창가로 갔다. 창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 밖을 한 번 더 내려다봤는데 그 때 말수가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구부정한 어깨로 고개를 약간 숙인 뒷모습이 틀림없는 말수였다. 저이가 어디로 가지. 아직 문닫을 시간은 아닌데. 여순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병원 문간에서 말수를 불렀다. 여보, 어디가요. 말수는 두 세 걸음 더 걷다가 다시 자신을 불러대는 목소리를 그 제서야 제대로 들었다는 듯이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알았다는 뜻이었고 바로 병원에 들어갈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손짓을 했다. 여순은 그런 말수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병원 안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서 있는것이 되레 덜 추위를 느꼈다.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자 여순은 자신도 몇 걸음 더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직 밟지 않은 눈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죽마을에서 곧잘 하던 버릇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이 오면 여순은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자신의 짚신 자국을 여기저기 남기면서 좋아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찍을 새로운 눈도 잘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여순은 행여 넘어질까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뗐다. 중요한 서류에 인감 도장을 찍을 때처럼 마음을 졸였는데 그것은 새 고무신을 신었을 때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끌여오기 바로 전해 인가. 그녀는 고무신을 선물받았다. 너도 이제 처녀가 됐으니 고무신 하나는 있어야지. 엄마가 자신의 살보다 더 뽀얀 고무신을 내밀었다. 뜻하지 않은 고무신을 받은 여순은 고맙기보다 이 비싼 것 때문에 우리 집 살림이 어려워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품에 안았을 때는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녀는 아무때나 그것을 신지 않았다. 평소에는 짚신을 신다가 정말로 특이한 날에는 찬장에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 신었던 것이다. 흰 고무신. 그녀는 눈자국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고무신 자국과는 달리 구두 밑창에는 일자로 길게 여러개의 줄이 박혀 있지 않았다. 밋밋했으나 뚜렷한 선이 깊게 박혔다. 고무신에는 세로로 물결치는 그런 모양이 없었다. 그래서 발자국이 온전하게 나왔다. 발자국을 보고 내 발이 이렇게 생겼구나 알았던 것이다. 그래 이것이 내 발이지. 못생겼나. 잘 생겼지. 나처럼 발을 잣대로 재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까. 여순은 웃었다. 나중에 멋진 구두가 있어도 구두를 신고는 눈길을 걷지 말아야지. 그녀는 그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구두를 신었고 신은 구두 발자국은 고무신과는 달랐다. 그때 뭘 그렇게 봐, 넋을 놓고. 그 사이 말수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벌써 왔어요. 어디 간거예요. 여순이 대답대신 말수를 채근했다. 먼저 말하면 말하지. 그냥 눈 위에 찍은 발자국을 보는 것 뿐이죠. 나도 그냥 조금 걸었을 뿐이야. 그냥. 말수가 여순의 말을 따라했다. 여순이 일어서자 말수가 어깨를 조금 감싸 안으면서 병원쪽으로 몸을 밀었다. 이번 일요일에 포목점 집을 가볼까 해. 같이 갈까요. 아니. 그냥 나 혼자. 다른 볼 일도 있고 해서 그냥 들러볼까 해. 지난번에 치료비도 넉넉히 주고 갔고 옷감도 가져왔으니 만두라도 사서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인사성을 밝아요. 포대기를 만들어 줬다고 사람을 시켜서 천을 가져왔으니. 하여튼 알고 지내서 나쁠 건 없잖아. 누가 뭐래요. 난 그럼 집에서 좀 쉴게요. 당신 올 때까지 그 노래 연습을 하면서. 그 노래.  맞아요. 독립군간가 하는 그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말이에요. 그렇지. 아직 익힐 시간이 부족했지. 말수는 얼버무렸다. 노래 이야기로 계속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병원 문을 닫기전 여순은 멀리서 얼음 지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었다. 그래, 추수를 끝낸 논은 얼어붙었어. 아이들이 뭘 할 수 있겠어. 썰매라도 타야지. 비쭉이 솟아 나온 볏단을 피해 아이들은 저마다 신나가 달려 나갔고 여순은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말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 마디했다. 둘은 웃었다. 여기 애들도 통영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아이들은 다 그런 것이다. 세상도 다 그런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것이 그렇지 별 수 있나. 말수도 그 시절로 잠시 들어갔다. 그러나 이내 돌아왔다. 일요일이 왔다. 말수는 약속한 대로 늦은 아침을 먹고 윤사장을 만나러 떠났다. 말수는 아무 생각없이 가다가 지난 번 처음 가던 길과는 다른 길로 접어 든 것은 아닌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새로운 길처럼 느껴졌다. 이 길이 맞나. 다른 길이 었나. 그러다가 얼어 붙은 논 때문에 지형을 착각한 것을 느끼고는 그 길이 이 길인 것을 알았다. 익숙한 길을 갈 때 겪는 안도감이 따스한 햇볕처럼 몰려왔다. 가면서도 말수는 굳이 그 남자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않아도 되고 만난다고 해도 오늘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말수는 어쨌든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여행객의 들뜬 기분은 아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온 것도 아니었고 먼 길을 떠나는 방랑자의 신세도 아니었다. 안면은 있으나 내왕은 거의 없는 먼 친척의 조문길 같은 것이었다. 그런 불행한 일이 있었느냐고 놀라면서 알지 못했다고 후일에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할 경우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둘러대도 문제가 없는 그런 사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몸을 돌려 여순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왔던 길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잘못을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인촌을 향해 계속 걸었다. 걸을 때 말수는 무슨 알지 못하는 힘에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힘이 됐든 말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발을 부지런히 옮겼다. 논이 끝나는 지점에 집들이 시작됐고 집 사이를 10분 이상 걸어가면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시장이 나타났다. 포목점 집은 그 시장의 가운데쯤에 있었다. 이쯤인가, 말수는 어림짐작으로 작은 간판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들어오는 골목길을 잘못 잡았는지 말수는 처음과는 다른 방향에서 집주인 아낙이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멀리서 보니 작은 여인이었으나 가까이 다가 갈수록 몸집이 제법 있어 다부져 보이기까지 했다. 파리채 대신 그녀는 털이개 비슷한 것으로 진열된 포목들의 먼지를 털어냈다. 아직 그녀는 말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손에 든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입구에서 사 온 만두와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싶어 배 한 봉지를 샀다. 든 손이 제법 묵직했다. 걷기에는 조금 먼 거리여서 손을 여러차례 바꾸면서 온 기억이 났다. 그는 자신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상대가 눈치챌 수 있도록 몸을 크게 흔들면서 목소리를 제법 높였다. 자신을 부르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 부르는 소리에 포목점 집 여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머니 하고 두번째 불렀을 때는 그가 십여 걸음 더 앞으로 와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부르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호기심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인물이었기에 그녀는 누군가 하는 심정으로 눈을 마주쳤으나 상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흰옷 대신 검정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옷으로 말수를 기억할 수 없었다. 말수는 두 어 걸음 더 다가갔다. 부인이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오자 아이고 의사 선생님 하면서 손이라도 덥석 잡을 듯이 부인이 다가왔다. 그러면서 얼굴이 순간 붉어졌는데 손을 잡으려는 내심을 들켰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로 그를 안내하지 않았다. 안에 일본 순사들이 있고 남편이 접대하고 있다고 했다. 말수가 순사라는 말에 놀라자 일상적으로 한 달에 한 두번 들르기 때문에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라고 했다. 선물을 받아든 그녀는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뭐지. 순사라니. 하지만 말수의 심장은 요동치지 않았다. 대신 진열된 포목들을 무심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정말 팔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장을 오가는 행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래도록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말수는 자신이 온 것을 순사들이 알면 좋을 것이 없다는 본능에 몸을 숨기려고 했다. 아니면 그냥 가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주인 아내가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가 의사 선생이 왔다고 순사들도 알 수 있게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대로 있었다. 사라지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순사의 존재를 알고 도망치는 자는 범죄자일 가능성이 있다. 말수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녀는 얼마 후 나오더니 선생님은 저쪽으로 가서 잠깐 순사들이 돌아가면 오라고 했다. 그 말은 말수의 존재를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간다고 할까. 일이 바빠서 그냥 이것만 전해주려고 했다면서 가도 될 것이다. 그러나 왠일인지 말수는 그런 결심을 미루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마운듯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가리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가면서 그는 물건이 필요해 시장에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가게 모서리를 돌았다.  쪽문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춰섰다. 말수는 조금 초조했다. 날을 잘못 잡았다고 궁시렁거리면서 그는 지금이라고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누가 등 뒤에서 가볍게 손을 뻗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배불뚝이 주인이었다. 왜 들어오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이었다. 순사들은 갔어요. 의사 선생이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나는 순사들과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는 편이라고 남자는 조곤 조곤 말했다. 부인이 했던 말과 같았다. 왜 전에는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일본 영사관 직원을 만나고 있다고 숨긴 이유는 뭘까. 남편과 아내의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왠지 수상했다. 말수는 자신이 온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에 마치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수는 순사를 피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 같아 순간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저쪽에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잠깐 들른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제 사장님 얼굴을 뵙으니 가봐야 겠어요. 아니요. 이러면 내내 서운하지요. 아무리 바빠도 차 한잔 하시고 가세요. 배불뚝이가 막무가내로 손을 잡고 끌었다. 끄는 손 힘이 제법 셌다. 뒤로 버틴다고 해도 끌려가지 않을 수 없어 말수는 제 발로 걷는 다는 듯이 앞으로 나갔다. 보시다시피 문이 두 개인데 순사들은 대개 이쪽으로 들어와 이쪽으로 나가요. 자신들이 오고 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기 때문이지요.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선생님도 앞으로 들를 일이 있으면 이 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문은 잠겨 있으나 손을 뻗으면 밖에서 열릴 수 있도록 된 임시 잠금장치를 여는 법도 알려 주었다. 말수는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다짐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정반대 행동을 했다. 

그는 점점 주인 남자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굳이 묻지 않았다. 말이 많은 남자는 말수가 궁금해하고 싶은 것을 먼저 말할 것이고 말수는 그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차대신 술상이 차려졌다. 안주인은 뚝딱 하는 솜씨가 있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날씨며 첫눈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을 내왔다. 말수를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순사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차림새는 누가 먹다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갈했다. 안사람의 솜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니라고 말수가 사양하기도 전에 잔에 술이 채워졌다. 도수가 높은 중국술이었다. 어지간히 이력이 나고 있을 때여도 확 끼쳐오는 술의 향내에 말수는 고개를 돌렸다가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낮술인데요. 술은 낮술이지요. 지난번 처럼요. 지난 번에도 그랬던가요. 허허. 자 듭시다. 한 두 잔 먹는다고 뭐 어떻게 되겠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배불뚝이 말에 말수는 잔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잔이 채워지고 비워졌다. 그래봐야 말수는 겨우 3잔째 였고 남자는 그 배를 먹었다. 말수가 잔을 따르기도 전에 자신이 따라 먹은 결과였다. 이 술은 50도가 넘어요. 알고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안에서 불이 나고 있어요. 헉헉. 말수가 혀를 내미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요. 좋은 술은 다 도수가 높지요. 다른 건 아껴도 저는 술을 아까지 않아요. 싸구려 술로 취하고 싶지 않거든요. 주인 남자가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어도 말수는 그런가요, 하면서 싱겁게 받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벌써 목울대 얼얼해 지고 내장이 불어 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과일을 들고 들어온 여자를 위해 말수는 이게 무슨 나물인가요. 하고 물었다. 말린 고사리와 고구마 줄기라는 답이 나왔다. 여기 와서 처음 먹어보네요. 말수는 상 위의 젓가락을 집었다. 잘말린 나물을 적당하게 삶아서 들기름을 살짝 친 것이 여간 감칠맛이 나지 않았다. 대단해요, 아주머니 솜씨는 한 번 맛보면 평생 기억에 남을 거요. 말수의 칭찬에 여자는 아니라고 손사레를 쳤으나 그 말이 싫지 않았는지 있다가 가실 때 조금 싸드리겠다고 말했다.

말수는 좋지요, 좋지요 하고 연신 말했다. 다음에는 꼭 사모님과 같이 오세요. 혼자 다니면 보기에 좋지 않아요. 그러지요. 오늘은 일이 있어요. 다음엔 꼭 같이 오겠어요. 그러기 전에 우리 집에도 한 번 방문해 주시지요. 윤 사장 아내가 반색했다.초대해 주시는 건가요. 물론 입니다. 언제든 오가다 들르세요. 말수가 많아지자 갑자기 말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는 기껏 나물 하나에 저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하는 심정으로 또다시 잔을 들었다. 아내와는 신이 나서 얘기하면서 나하고는 시끈둥 하다니 원. 그런 마음이었다. 여자가 나가고 나서  둘은 작은 사기 그릇을 들어 서로 부딪혔다. 남자는 말수가 과음을 하지 않지만 술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술은 조금 고급이예요. 입에 짝 달라붙는 것이 조선 밀주 못지 않을 거요. 하고 잡은 술병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말수의 잔에 다시 따랐다. 술 냄새가 또다시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다. 어지간 술은 처음 마개를 딸 때는 냄새를 풍기지만 열어 놓고 먹을 때는 증발해 버리기 일쑤인데 이 술은 달랐다. 정말 좋은 술이군요. 냄새로 말수는 도수가 어느 정도이고 이 술은 괜찮은지 판단했다. 좋은 향내가 풍겨왔고 실제로도 입에 아니 목구멍은 물론 식도에까지 착 달라 붙었다. 이 술이라면 서너 잔은 더 먹어야지 말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고 아직 남자는 말하지 않고 있다. 남자는 술을 따르고 나서 중국 사람들이 술은 잘 만든다고 말수가 듣고 싶은 말과는 달리 가벼운 말만 지껄였다. 말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조금전에 오버 한 것이 미안해서인지 이번에는 점잖을 떨었다. 나올 때가 됐는데. 속에 든 말을 하고 싶어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고 있지. 말수는 곧 그의 입이 벌어지면서 감추어둔 말들이 다 토해져 나오기를 기다렸다.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술이 두 어잔 더 들어가자 남자는 문 쪽을 한 번 힐끗 보고 나서는 순사들이 들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저자들의 첩보 활동은 집요해요. 한 번 안면을 트면 그것으로 계속 찾아옵니다. 무슨 끈 같은 것으로 엮어서 놔두지를 않아요. 아마도 그들은 나를 조선독립군을 잡는데 이용하려고 하나 봐요. 말수는 뜨끔했다. 말수는 입가를 다시며 아저씨도 독립운동을 하죠. 하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돌려 묻다가는 괜한 시간 낭비만 할 것 같았다. 말수는 조금 전에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곧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요. 큰일 날 소리를. 의사 선생. 나는 그들과는 일면식도 없어요. 그는 크게 손사레를 쳤다. 그러나 곧 그 말을 수정하면서 사실은 두 어번 독립군의 하부조직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아주 말단이라서 이야기 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순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순간 여간 귀찮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알아도 모른다고 한다고 했다. 남자는 빠르게 술을 마셨다. 술기운인지 아니면 그것을 핑계삼아 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순사들하고 친하다는 말을 했다. 이것도 장사라고 장사를 하려면 순사들 뒷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없으면 제대로 돈벌이가 안 된다고 푸념했다. 겨우 벌어도 다 뺏긴단 말이오. 알아 들겠어요. 남자가 부르르 몸을 떨자 배가 출렁였다. 말수는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병원은 그런 것 없지요. 핑 뜯는 것 말이오. 형사 나부랭이나 일본 깡패 들이 드나들거나 하는 거 말이요. 금시 초문 입니다. 그랬다면 벌써 찾아와서 상의 들였겠지요. 하, 포목점이라니. 윤사장이 입가를 다셨다. 그런데 말이요. 의사선생. 내가 그 독립군 하부 조직에게 돈을 준 것이 있어요. 하도 조선독립군이 돈이 없어 굶는다는 말을 듣고 안 됐다 싶어 아내 몰래 좀 집어 줬어요. 그런데 그 녀석이 심심찮게 찾아왔요. 제 딴에는 나를 숨은 애국자라고 보고 물주로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나이도 어리고 하는 짓도 나쁘지 않고 해서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오면 있는 것 조금씩 주어 보냅니다. 엊그제도 그 애가 다녀갔어요.

그 말을 하면서 사내는 말수의 얼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귓속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문제가 될 것처럼 조심하는 눈치였다. 이런 건 아내한테도 하지 않을 말입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몰라요. 자, 술이나 마십시다. 그는 이 지경이 된 상황을 아주 나쁘게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말수는 그런 감을 잡았다. 의사 선생, 선생은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많이 배우신 분이니 우리 같은 무지렁이에 비해 뭔가 깊은 생각이 있을 것 아니오. 독립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말수는 생각했다. 가상했다. 험한 일을 하면서 아내 몰래 그런 일을 하다니. 말좀 해보세요. 글쎄, 아는 게 있어야지요. 배운 사람이라고 다 독립하는 건 아니잖아요. 배운 사람이 나라 팔아먹고 일제 압잡이 노릇 하는 건 사장님이 더 잘 아실테고. 그러고 보니 선생은 그쪽편은 아닌가 봅니다. 이쪽 저쪽 편이 어디있어요.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아시다시피 그냥 환자 치료하는 의사 입니다. 의사는 사람 아닌가요. 조센징의 피가 흐르지 않아요. 이거 막 나가네. 그런 부담스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그러나 말수는 나오려는 말을 집어 삼켰다. 많이 배우면 다 독립운동 하나. 되레 그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입도 무겁지 않고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은 위험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독립군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것 처럼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돈을 줬다고 실토하고 일본 순사들과도 친분을 자랑하고 있다.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쪽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말수는 참았다. 그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약간은 다른 말로 분위기를 바꿨다. 

독립군가는 누구한테 배운거요. 말수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군가도 배우나요. 그렇지요. 배우지요. 내가 신흥군사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말했지요. 알고 있어요. 그 때 이런 저런 군가를 수도 없이 불렀어요. 대놓고 부르기도 했고 몰래 부르기도 했어요. 그런데 유독 그 노래가 군복을 벗고 있는 지금도 입에 붙어서 떠나지 않아요. 곡이야 그렇다고 쳐도 가사가 참 그래요.이 술처럼요. 아주 입에 착 다라 붙는다니까요. 말수가 사내의 배쪽으로 눈길을 다시 돌렸다. 숨 쉴 때마다 배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아내가 곡 연습을 하는데 그 노래도 이젠 곧잘 쳐요. 어저께는 나보고 가사를 외웠느냐고 묻기까지 했지요. 말수는 아내를 끌어들였다. 사모님이 음악에 소질이 있어요.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그 무슨 노래지요. 아, 그래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부를 때면 고향으로 막 달려가고 싶더라니까요. 홍성말이지요. 홍성은 아내고요. 저는 서천입니다. 다리 하나만 넘으면 군산이지요. 배 타고 군산을 간혹 나갔어요. 거기 가야 은행도 있고 즐길 거리가 있지요. 남자는 조선에 있을 때 군산에 자주 들렀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말수는 자리가 길어지자 일어나야 겠다고 자리를 털었다. 다음에 들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시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오늘 못 듣는다고 해서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다. 의사 선생은 꼭 기분이 좋으려고 하면 자리를 파한다면서도 남자는 말수를 잡지 않았다. 내일 수술이 있지요. 그가 먼저 말을 했다. 월요일 이잖아요. 넘어져 손을 다친 환자가 있어요. 놔두면 곪아서 어려워질 수 있거든요. 금요일에 상처를 소독했으니 내일 일찍 꼭 봐야 할 환자지요. 말수가 일어섰다. 

의사 선생, 오늘도 즐거웠어요. 술맛이 좋은데요. 이 술 다음에도 같이 먹읍시다. 그러지요. 말수는 다시 아이들이 썰매를 타던 논 앞을 지나갔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올 때 보았던 많은 아이들은 사라지고 서너 명 만이 남아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로 갔나. 말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병원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여순이 마중나오듯이 병원 밖에 나와 있었다. 조선사람을 만나 편안했나요. 이 말은 여순이 한 말이 아니라 말수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아니다, 라고 답을 못하겠다. 비록 신뢰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순 거짓말쟁이도 아니다. 그와 있어서 편한 시간이었다. 말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입가에는 나물 냄새가 배어 있고 고향 하늘이 어른거렸다. 나물 하나에 말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술기운이 몸을 따뜻하게 데워 말수의 마음은 가벼웠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여. 저도 모르게 입가에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내가 오고 있다고 동네방네 다 떠들고 있어. 말수의 인기척이.  말수의 움직임. 그는 언제나 나 온다 하고 온다. 그런 그가 좋다. 내 인생의 동반자이며 주인공. 내 삶의 전부인 그를 맞으러 여순은 그를 마주 보고 걸었다. 서 너 걸음 앞에 그가 있다.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말수의 표정을 살폈다. 많이 드셨어요. 아니, 적당히. 말수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그는 좀처럼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여순을 닮아 가고 있다. 부부는 서로 살다보면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내일 수술 있잖아. 그렇군요. 당신은 정말 철저해요. 칭찬이지. 당신의 칭찬은 나를 춤추게 해. 그럼요. 든든해요. 어떤 경우도 안심이 돼요. 걸어오는데 춥진 않았나요. 응, 논이 다 얼었어. 아이들이 썰매를 타더군. 우리도 갈까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는 거 어때요. 나쁠 거 없지. 그래 주인장은 뭐래요. 별거 없어.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치고 건질 말이 없잖아. 그래도 궁금한 건 있잖아요. 숙제를 풀었나요.

여순은 말수가 인사차 간다고 했으나 뭔가 알고자 하는 것이 있어 갔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 게 있었나. 밀린 숙제 같은 거. 말수는 조금 얼버무렸다. 거기까지 여순에게 말해야 하는지 말수는 일단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몰라도 되는 것을 알게 돼서 나중에 곤욕을 치르지 않을지 걱정이 됐다. 그러나 오늘일 정도는 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 사람 발 참 넓어. 일본 순사도 알고 독립하는 사람들과도 끈을 대고 있더군. 그럼 어느 쪽이예요. 아니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거 같아요. 아직은 몰라. 살기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깊은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그건 그렇고 이거 먹어봐. 말수가 손에 든 종이를 건넸다.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종이에 싼 사발의 감촉이 좋았다. 나물이네요, 냄새가 올라와요. 아직 식지 않았어요. 그래, 식기 전에 어서 맛 좀 봐요. 말수가 재촉했다. 그 집 안식구 손이 야무져. 나물 반찬을 안주로 먹었더니 기분이 좋아. 말수는 그 말을 하면서 고사리며 호박고지며 고구마 줄기를 먹고 있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고향이 그립지요. 선 채로 한 잎 입에 넣고 여순이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봄이 오면 산과 들로 나가 산나물 좀 뜯으러 가요. 우리도 나물밥 해 먹죠. 여순이 신이 난 듯 말했다. 그래, 들기름은 필수야. 서너 숟가락 듬뿍 넣고. 어떻게 알았어요. 들기름. 그 집 아주머니가 말해줬어. 이제 내가 없어도 되겠어요. 여순이 새초롬 해졌다. 말수는 여순의 손을 잡았다. 둘은 웃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대화가 좋았다. 여순은 나물을 한 번 더 입에 넣었고 말수는 지켜봤다. 그러다가 여순이 지나가는 투로 한 마디 했다. 조선에서 큰 사변이 난 거 알고 있어요. 그런 말 하지 않던가요. 무슨 말. 여순이 말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까 급하게 왔어요. 그것 참, 일요일에는 우리도 쉬어야지. 응급환자인데 어떻게 거절해요. 문을 닫았으면 모를까.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데 오늘 병원안하니 돌아가세요, 할 수 없었어요. 환자는 손가락을 베었어요. 간단한 거라 불평하지 않고 치료해 줬지요. 그런데 그 환자가 지금 조계지에 전체에 조선에 일어난 소문이 퍼지고 있대요. 조선독립군이 총독부를 공격했다고 하네요. 총독은 목숨을 건졌으나 직원 여러 명이 죽었고 부대 근무를 하던 일본군들이 다수 사망했다고 해요. 신문에는. 아직요. 사실이라면 곧 나오겠지요. 이곳에도 한바탕 회오리 바람이 불 것 같아요. 그러니 당분간 그 집에 가지 말아요. 그 사람도 만나지 말고요.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니까요.

걱정어린 시선으로 여순이 말수를 응시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남자도 알았을 텐데. 설마 그랬을 리라고. 말수는 믿을 수 없었다. 세계 재패를 눈앞에 둔 일본을 상대로 조선독립군이 식민지 조선의 상징인 총독관저를 공격했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이라니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그들은 너무 강하기에 공격대상으로 삼았다면 무모한 작전이다. 그런데. 여순의 말은 구체성이 있었다. 단순히 공격했다더라가 아니라 공격했는데 총독은 죽지 않았으나 그 부하들 여럿이 죽었고 호위하던 황군들도 그랬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정황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말수는 조금 긴장했다. 조선에서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었지만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여러 명이 죽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천황 다음가는 대단한 위세를 부리는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 관저까지 들어갔고 관저 직원들을 죽였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말수는 놀라움을 진정시키면서 조금 전 만났던 포목점 집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가 모를리 없다. 그런데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몰랐을까. 알았는데도 알리지 않았을까. 나를 속이나.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속여서 무슨 이득이 있나. 알 필요가 없으니 알리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도 정말 몰랐을까. 말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들어가기 전에 일본 순사가 그 집에서 나왔거든. 그 사실을 그 집 안주인과 남편도 숨기지 않더라고. 여순이 나물을 입에 둔 채 잠시 씹기를 멈추었다. 그냥 염탐차 들렀다고 하는데 그것 이상인가 봐. 말수가 작정하고 말했다. 그 남자, 두 얼굴의 사나이가 틀림없어요. 조심해야 해요. 가지도 말고 오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분간은요. 나물맛이 쓰네요. 우리 들어 갑시다. 길에서 이러는 것도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니. 말수가 병원문을 열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갈 때 느꼈던 싸늘함 대신 온기가 돌았다. 집이 좋군. 그래서 앉아요. 맞아 무언가 이상했거든. 말수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도 걸어오면서 죽 그 생각을 했어. 지금 내리는 소나기는 무조건 피해야지. 어떤 직감 같은 것이 와. 여순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여보, 말해줘서 고마워요. 부부는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요. 아무래도 우리가 윤사장인가 뭔가하고 단단히 엮인 기분이 들어요. 그러면서 여순은 자신에게 온 이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일시에 깨지는 일이 이 일로 인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편 점례의 파리행 유학은 보류됐다. 일단 좌절됐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언제일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점례와 유마는 쌓아 놓은 짐꾸러미를 무심히 쳐다 보면서 저것을 정리하면서 생겨났던 흥분된 감정이 사라지고 없음을 느꼈다. 다시 기분을 살릴 수 있을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저것을 들고 기차를 탈 수 있을까. 비행기는. 점례는 그런 심정으로 유마의 얼굴을 살폈다. 그도 나와 같은 기분일까. 아니면 더 심할지, 되레 잘됐다는 심사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점례는 자신을 위로받고 싶었던 일정이 갑자기 바뀌자 당황했다. 어떻게 감을 잡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자기의 의견을 먼저 낼 수는 없었다. 참의원은 이미 결정을 내렸고 내린 결정을 통보했다. 유마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유학금지를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큰 사건 앞에서는 누구라도 반항하기 어렵다. 단순한 변심이 아닌 것이기에 유마는 뭐라도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할지 몰라 막막한 심정이었다. 그도 점례처럼 낯선 곳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숱한 사람을 죽였고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에 대한 참회라기보다는 그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기 마련이고 기억에서 사라진다. 총독관저가 아수랑이 된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유마는 억울했다. 허물을 벗고 새로운 피부로 태어나기로 작정했는데. 지금까지의 유마는 없고 새로운 유마만 있을 뿐인데. 이게 무슨 꼴이람. 총독 관저 습격은 일회성이고 해프닝이야. 더는 전투가 없고 잔당들은 도피했어. 경계를 강화하면 없는 일이 되는데. 아버지가 너무 앞서 나간 거야. 내가 파리 유학을 가지 못한다고 해서 조선의 평화가 오나. 독립군이 괴멸되느냐고. 어이 없어. 그러나 유마는 속으로 화를 낼 지언정 밝으로 표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화가로 성장하지 못하면 점례의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는데. 전쟁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고 나는 전쟁에서 영원한 이방이데.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술이다. 예술 밖에 없다고. 유마는 술을 진창 먹고 팍 쓰러지고 싶었다. 이런 경우가 있다니.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이야. 그러나 내일은 그것이 찾아 올지 몰라. 그러니 너무 낙담하지 말자. 유마는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다. 

유마는 자신보다도 점례가 더 걱정이었다. 점례의 실망을 어떻게 설명하지. 나의 것은 그렇다고 쳐도 그녀의 것은 어떻게 막아내지. 그러나 참의원은 아들은 곰곰히 생각했다. 이것은 아버지가 과한 것이 아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그것은 아버지와 더 크게 연결됐지만 나와도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일단 아버지 결정을 따르고 점례는 조용히 따로 설명해주자. 못 알아들을 여자는 아니니 나를. 아버지를 이해할 거야. 그나저나 평온한 조선이 왜 이 지경이 됐지. 조선총독부 습격이라니. 이건 내 신상하고도 연관돼 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참의원은 유마에게 조선은 위험한 곳이니 파리 유학 대신 일본으로 가자고 말했다. 조선은 위험한 곳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파리도 위험할 지 몰라. 제나라가 제일 좋지. 이 한마디 뿐이었지만 그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 마를 할 때 참의원의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유마는 지금까지 숱한 정치적 부침을 겪은 부친에게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총독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일그러지고 깨지고 쪼그라든 얼굴의 주름에서 유마는 그 말에 어떤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고 직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을 때 유마는 망설였다. 자신도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파리 유학을 안가고 일본으로 간다고 해서 안전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안전이 걱정이라면 조선을 당장 떠나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나의 앞길에 아버지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주 어린 아이 취급해. 별까지 달고 전역한 육군대장에게 아버지는. 난 아버지밑에서는 언제나 간난 아기나 다름없어.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려면 일본이 아닌 파리로 가야해. 

일본에서 미술공부는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유행을 타는 파리를 가지 않고는 더 나은 화가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유마의 내면에는 그럴 힘이 없었다. 엄청난 사고 앞에 아버지는 하루가 지났어도 얼이 빠진 것처럼 망연자실했다. 자신이 총독관저에서 조선 독립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비상구 속에서 총독과 둘이 호흡을 맞대고 죽음의 심장 소리를 나눠 들을 때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누구 심장이 더 크고 빠르게 뛰는지 서로는 알고 있었으나 발설하지 않았다. 상대를 창피주는 것이 자신의 창피를 드러내는 꼴이었기 때문에 둘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그 일은 암묵적으로 함구하기로 했다.

참의원은 서둘렀다. 굳이 살벌한 조선 땅에 한시라도 머물 이유가 없었다. 조선 일은 조선총독부에서 해결할 일이지 참의원인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일본에서 활동해야 한다. 그것이 맞다. 그런데 이번 귀국길에는 아들과 아들이 신뢰하는 조선 여자 점례를 함께 데려가야 한다. 아버지는 같이 가자고 한 이후로 그것에 관해 두 번 다시 말이 없었다. 아들이 강하게 반발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 일본보다 파리다 더 안전해요.더구나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해요. 글도 쓰고 싶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아버지. 그러나 유마는 그러지 못하고 아버지 의견에 따랐다. 살면서 그럴 기회가 있으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점례는 유마의 눈치를 봈다. 언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야 좋을지 가늠하고 있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유마가 하자는 대로 할 것이며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무슨말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녀도 이런 위험한 조선을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충무로나 명동, 수표교 인근을 떠돌고 싶지 않았다. 그래봤자 우물안 개구리일 뿐이다. 이제 조선미술에서 그녀를 따른 자는 없었다. 모두가 점례의 그림을 최고로 쳤으며 신사임당이나 단원이나 혜원 같은 이도 점례에 미치지 못한다고 성급하게 말하는 화상들도 생겨났다. 한마디로 점례는 전무후무한 조선 최고의 화가라라는 것. 유마는 그런 점례의 실력이 아까웠다. 한시라도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보다도 점례가 불쌍했다.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해줘야 하는 것을 하지 못했을 때 미안한 감정이 복받쳤다.

그는 전쟁에는 이제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장군으로 전선에서 숱한 전투를 치렀지만 이제 제대 군인인 그는 심지어 일본의 승패에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자리를 온전히 그림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림에 미친사람 처럼 보였다. 가진 자의 여유는 이런 것이다. 아버지는 길 떠날 준비를 마쳤다. 채비라야 꾸러미 몇개를 시중이 알아서 챙기는 것이니 그는 지팡이 하나만 들면 되는 것이어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삼촌은 성급히 떠나는 형님에게 아끼는 조선백자와 고려청자를 선물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그림은 다음 배편에 보내기로 했다. 참의원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는 동생의 거듭된 찬사에도 시끈둥한 표정이었다. 이 와중에 조센징이 만든 항아리 따위가 뭐 대수냐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값이 나간다고 하니 부하들에게 깨지는 것이니 소중히 다루라는 말은 몇 차례했다. 아버지가 앞장섰다. 유마는 그런 아버지의 등에 대고 나는 아버지 같은 유능한 정치인도 아니고 애국자도 아니며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 글을 쓰려는 자라고 떠벌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기회다 싶었는지 이번에는 점례가 나섰다. 가만히 있으면 유마가 아버지와 충돌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좋지 않다. 점례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에 가고 싶어요. 당신의 고향 땅에 발을 디디고 당신의 어릴 적 체취를 맡게 허락해 주세요. 여행은 그림을 풍부하게 해요. 알잖아요. 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기왕 가는 것 아버지 마음 편하게 해드리면 어때요. 

점례는 화난 유마를 달랬다. 점례가 그렇게 나오자 유마는 순간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아버지 명령도 따르고 점례의 기분까지 생각하니 유마는 당장 일본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가서 어머니를 뵙고 한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 시간을 두고 설득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을 해주는 점례가 고마웠다. 큰 그림을 그리는 점례에게 유마는 또한번 그녀 내면의 승리에 박수를 보냈다. 나보다도 그릇이 커. 그녀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일본행 내내 끌려가는 소처럼 무표정했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여행자 기분이거든. 길게 잡아 한 달 정도 늦게 출발한다고 해서 제 그림이 어디 가겠어요. 되레 좋은 기회이고 경험이 될 거예요. 점례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못내 아쉬워 하는 유마에게 이런 식으로 쐐기를 박았다. 부산에서 일본은 가까운 거리였다. 이른 새벽 출발한 점례는 해가 떨어지기전 무사히 일본 땅에 도착했다. 배와 바다를 보면서 점례는 멀미를 생각했다. 기차역에서 그리고 트럭에 내려서 했던 지독했던 그 멀미를. 그리고 자기 또래 소녀의 죽음. 그런 것은 만주에서의 고통에 비하면 약과였으나 배에 오르자 자신의 막사생활보다는 그것이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애써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으나 이제는 가는 목적지가 확실하다. 꿈에 그리던 일본으로 가는 거야. 내가 일본에 간 것은 이제 거짓말이 아냐. 사실이라고. 난 말할 거야. 일본에 가서 돈도 벌고 기술도 벌고 좋은 것도 많이 먹었어요. 현해탄을 뒤로 두고 점례는 육지에 발을 내딛었다. 기분이 묘했으나 나쁜지 않았다.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한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푹신한 잠자리는 좋은 꿈을 가져온다. 점례는 유마의 손을 꼭 잡았다. 

일본은 조선과 엇비슷했다. 공기도 산천도 냄새도 조선 것과 다를바 없었다. 옷차림새와 음식과 걷는 거리와 집들은 생소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이 달라야 얼마나 다르겠는가하는 심사로 점례는 그런 것들을 무심히 혹은 그저 그런 눈으로 훓어 보았다. 동경이 아니고 파리였다면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거리며 건물이며 음식이며 사람이며 모든 것이 조선과는 다른 것이니. 책에서 본 마네나 모네, 고흐, 피카소 같은 인물은 확실히 조선사람과는 달랐고 일본사람과도 틀렸다. 그는 파리행이 잠시 유예된 것일 뿐 사라진 것을 아닌 것에 안도했다. 그녀는 유마 어머니에게 깍듯했다. 유마는 그런 점례가 또 고마웠다. 잘한다니까. 말해 주지 않아도 척척 해내고 있어. 엄마의 웃음은 그녀가 마음에 든다는 뜻이야. 아버지는 도착한 그 시각 짐도 풀지 않고 바로 황궁으로 달려갔어. 아니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없이 그냥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어딘론가 사라졌어. 아버지 일은 아버지 일이야. 자,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날 식사를 마친 유마는 점례를 데리고 자기가 다녔던 대학도 가보고 호수도 산책하고 해변가를 거닐기도 했다. 좋아요, 이런 곳일 거라고 짐작했어요. 당신이 태어난 곳은 우리 죽마을과 조금 비슷해요. 건물이 높고 사람이 많고 차가 다니는 것만 빼고는요. 잘 봐. 당신도 이곳을 다녔거나 다니게 될 거야. 내가요. 그래 대학물을 먹어야지. 꼭 그래야 한다면 그럴게요. 어제와는 달리 한껏 기분이 고조된 점례가 말했다. 그런가. 나중에 기회 되면 나도 당신의 고향에 가보고 싶군. 아니요, 안 될 말이에요. 거긴 너무 멀어요. 기차도 없고 찻길도 없어요. 역에서 내려 걸어 걸어 하루 종일을 더 가야 하니 아예 꿈도 꾸지 마세요.

점례의 단호함에 그럴 것까지야 있나, 유마는 생각했으나 그 말은 거기서 그만두었다. 당장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는 심정이었다. 점례는 다시 유마의 손을 잡았다. 뱃전에서 잡았던 손처럼 여전히 따뜻했고 듬직했다. 유마는 아버지에게 공을 들이려고 했다. 조선에서 못다한 효도를 일본에서 하고 싶었다. 불현듯이 그런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너희 아버지가 지금 정신이 나가 있다, 아예 혼이 쏙 빠졌다니까. 네가 아버지를 좀 위로해 줘야겠다.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어도 유마는 그럴 생각이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로 엄마와 통화는 하는 모양이었다. 유마를 바꿔달라고 했으나 그때는 유마는 대학교정에서 점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유마는 전화가 왔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잠깐 그 생각을 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단호한 아버지. 아버지는 천상 군인이며 단호한 정치인. 나는 아냐. 아버지는 아버지의 길이 있고 난 내 길이 있어. 아버지는 나가신 후 삼일 째 되는 돌아왔다. 얼굴은 상기됐고 몸은 그보다 더 성급했다. 일본 정치 일정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왕족과 접촉하는가 하면 의회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에는 군부 인사와 술자리를 가졌다. 자신의 육사 후배들이지만 공식석상에서 참의원은 그들에게 깎듯한 예의를 차렸다. 싸움에 나서자는 자들이 전쟁에서는 갑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