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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남자는 그 분 오시면 잘 치료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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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그 분 오시면 잘 치료해 달라고 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0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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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상하이에 정착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순과 말수는 전쟁이 일본과 미국만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끼어들고 러시아가 호시탐탐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조선과 중국은 전쟁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정작 피 흘리는 것은 조선백성이었고 중국인들이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흰 옷 입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때 말수는 가슴이 조금 아팠고 여순은 조금 더 아팠다. 전쟁은 끊어지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어느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기울고 미국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여전히 일본이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재패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상하이는 또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국공내전이었다. 이건 뭐지. 남의 나라에 짓밟히면서도 힘을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또 자기들 끼리 싸우고 있었다. 대륙은 넓었다. 그 큰 땅을 서로 땅을 차지 하기 싸우자 피비린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하이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독립군의 실체였다. 듣도 보도 못한 조선 독립군의 이야기가 상하이 어디서나 배회하고 있었다. 음식점에서도 술집에서도 환자들의 입에서도 그들을 찾아온 보호자들도 독립군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윤봉길이라는 청년이 상하이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고위관리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힌 일이 수 년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엄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 소식을 접하고는 말수나 여순은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는지 의심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있어 부인할 근거가 없었다. 감히 조선인이 일본인을 상대로 폭탄을 던졌다니. 그리고 거기 모인 일제의 두목들을 격파했다는 사실에 이들 부부는 각자 나름의 혼란한 상황과 마주했다. 독립군은 혼자 싸우지 않았다. 그들 뒤에서 지원하는 임시정부가 있었다. 그러나 임정 역시 국공내전처럼 사분오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임정의 주도권을 위해 각 정당들이 싸우고 있었고 그 싸움은 중국내 세력다툼 만큼이나 더 치열해 지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전쟁 사이에 숱한 각개전투가 이곳 상하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여순보다는 말수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전쟁의 광기에서 피할 곳은 없었다. 어디서나 전쟁이 벌어졌다. 말수는 가슴이 뜨겁게 달아 오르다가도 금방 식었다. 난 전쟁과 상관없어. 내 일이 아냐. 난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의사야. 내 조국도 조선이 아냐. 난 독립군들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안해. 여순은 남편이 그런 일에 마음을 쓸까 노심초사했다. 어떻게 일궈낸 병원인데. 하지만 말수는 틈틈히 고뇌하는 인간처럼 열강과 그들 틈에서 생존하기 위한 조선인들의 분투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 저었다. 아직은 자신의 철학이 정립되지 않았고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배운 적도 철학적 이해를 구하는 과정도 없었다. 그러기 전에 세상을 먼저 알았고 죽음을 보았다. 그것이 말수의 한계였다. 의학지식은 이제 어느 정도 선에 올랐으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알아가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세태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여순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 그것은 꼭 필요했다. 병원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미래를 보장해 주는 그런 평화의 시기가 아니었다. 전쟁과 전쟁의 양상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당장의 위협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먼 미래의 일은 아니었다. 

조선인이면서 일본인이고 중국인이면서 이방인인 그는 조선도 아닌 상하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선 독립전쟁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가 상상할 수 있었던 범위에서 벗어난 일이었고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대체 누가 어떤 정신으로 감히 일제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지 그런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빼앗긴 나라밖에서 나라 조직과 같은 임시 조직을 만들어 놓고 수상이니 내각수반이니 하는 이름을 들으니 말수는 가슴 저 아래쪽에서 뭉클 거리는 무엇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국에서 느끼는 조선에 대한 막연한 감정이었다. 일본에 대한 혐오감과 애정의 양가 감정 사이에서 이제는 일제의 편으로 기울었던 마음이 다시 기울고 있다. 조선과 일본은 하나가 아닐수 있다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독립운동은 길가다 뒤에서 던진 돌을 맞고 쓰러지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진료 틈틈이 혹은 신문이나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어쩌다 나오는 중국내 주도권 다툼이나 러시아의 개입과 유럽 열강이 노리는 영토야욕, 그 와중에 독립군과 연관된 내용이 나오면 귀를 세우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봤다.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도 그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시점이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그렇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환자 하나가 왔는데 첫 눈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뿔테 안경을 썼는데 정수리에 솟은 두각이 도드라졌다. 수행원인 듯 한 한 명과 보호자 행세를 하는 다른 한 명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보통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여러 날 배가 아프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왔다고 했다. 먼저 여순이 진찰을 했고 말수가 들어왔다. 둘은 맹장을 의심했다.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맹장 수술 정도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고 말수는 환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위험하지도 않고요. 위험하지 않다는 말에 환자가 반응했다. 의사의 자신있는 말에 안심했는지 약간의 미소를 띄고는 수행원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는 듯이 눈길을 주었다. 말 대신 눈짓으로 의견을 교환한 그들은 수술은 오늘 당장은 아니라면서 복통을 완화할 약의 처방을 원했다. 급성이 아닌 만성으로 보입이다. 급하지 않다면 조금 늦추도 큰 문제는 없을 듯 보이네요. 그래도 하지 않으면 두고 두고 속을 썪이고 나중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의사는 환자에게 이렇게 알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환약과 진통제를 처방했다. 그들은 중국말을 썼으나 슬쩍 조선말을 썼는데 마침 그 말을 말수가 알아들었다. 그래 내 짐작도 그랬어.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야. 그들은 처방을 받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들이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가고 나서 말수는 여순에게 환자가 중국사람이 아닌 조선 사람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순도 토박이 중국인 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능숙한 중국어를 사용했지만 어딘지 조선인 같은 인상을 풍기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중국식 복장을 하고 서양식 언행을 보였으나 조선인의 핏줄이 흐른다는데는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직업이 궁금했다. 조선인이 상하이에 와서 하는 일은 하찮은 것이 거의 전부였다. 남의 하인이거나 기껏해야 장사치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범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풍모와 태도는 무슨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어울렸지 청소나 심부름을 하는 것과는 달랐다. 말수는 혹시 그들이 조선 독립군을 지원하는 배후조직은 아닌지 상상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당의 소속이거나 아니면 임정의 중요인물 인지도 몰랐다. 커튼을 열고 말수는 환자 일행이 골목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데 환자와 동행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같이 왔던 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환자 혼자서 걸어가는 뒷모습만이 보였다. 말수는 호기심이 동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동선을 따라갔다. 어느 순간 부터 병원에 함께 왔던 수행원 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뒤따르는 모습이 포착됐다. 한 명은 우측에서 다른 한 명의 좌측에서 10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환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구부러진 골목길로 사라졌다. 환자는 분명히 다시 올 것이다. 그 때는 수술을 결정할 것이고 당장 해 줄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어렵지 않은 요구이고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응급환자 여러 명이 닥친 상황이라면 밀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치울 수 있어. 맹장정도는 껌이지. 말수는 환자가 왔다가 떠난 것은 병원 상황을 보고 또 자신을 염탐하기 위해서 였다고 판단했다. 환자가 빠르면 오늘 오후에 올 수 있고 늦어도 삼일을 넘기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예감이라는 것이 때로는 맞아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예감이 아닌 의사가 환자와의 관계를 염두에 것이기에 일반적인 것보다는 확률이 높았다. 최대 삼일을 잡은 것은 약을 그만큼만 처방했기 때문이다.

여순도 창밖을 보았다. 환자 일행은 사라져 보이지 않고 다만 오가는 행인들이 분주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지나가고 나면 한동안 거리는 텅 비었다. 집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자신처럼 지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3층 창가에 비스듬히 비쳐드는 병원 간판이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여순은 사람의 처지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환자가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언제나 창가에서 밖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누군가에게는 아니지만 나에겐 좋은 세상이다. 자신에게 이처럼 더 좋은 세상이 더 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종착역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여순도 말수처럼 어떤 예감을 느꼈다. 도착할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조선땅은 아니다. 그녀는 조선이 떠오르면 의식적으로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었다. 조선은 곧 보령의 죽마을이었고 그곳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가 있었고 일가붙이가 있고 마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기도 했겠지만 일부는 살아 있을 것이고 자신을 알아 볼 것이다. 의사 선생님을 그들은 우러러볼 것이고 어련한 신랑과 함께 온 여순을 존경하면서도 시기할 터인데 그런 모든 것이 귀찮았다. 아니 죽기보다도 싫었다. 죽어서도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마음은 더 확고했다. 밤 길이라면 엄마는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포기했다. 혈연이든 아니든 이승의 끈은 죽마을을 떠나올때 끊어졌던 것이다.

그것을 다시 잇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삶에서 여유의 시간이 왔을 때 여순은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지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다. 앞으로 흘러가는 운명은 거기에 맡기면 된다. 그것 역시 궁금했으나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처음 끌려올 때보다 더 나쁜 경우는 지상천지에 없을 것이라는확신이다. 그녀가 겪었던 최악의 순간들은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해도 다시 복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가 더 소중하다. 만족하고 즐기고 열심히 살고 그러다 보면 한 세상 살아질 것이다. 그래,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낭만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마침 저쪽에서 큰 걸음으로 나갔던 말수가 걸어오고 있었다. 틈만 나는 그는 밖으로 나갔다. 병원의 답답함을 견디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나가면 알코올 솜냄새에서 해방이 되기 때문이다. 바람을 맞고 세상의 공기를 마시면 그는 일을 힘을 얻는다. 태생적으로 그래야 하는 사람이다. 창밖을 보는 가 싶었는데 어느 새 등을 보이고 병원앞을 나간다. 일과 중에는 부르면 들릴 정도의 짧은 거리를 왕래하지만 병원이 문을 닫는 휴일이나 늦은 밤에는 제법 멀리 나갔다 오기도 했다. 

멀리간다고 했지만 병원 인근의 조계지를 돌아 다니고 그곳에 있는 한인촌을 다니는 정도였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산책하고 지리를 익히고 세파의 공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는 점심 식사 후 급하게 나갔다 한 바퀴 휘 둘러보고 오는 있는 중이다.  보아하니 이제 의사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그런 모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지. 상스러운 모양새는 사라졌어. 앞모습이든 뒤든 옆이든 자세가 나와. 천한 일을 하던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 변신에 성공한 그가 나를 살렸어. 난 그가 없었다면 흔적없이 사라졌겠지. 나의 오늘은 말수의 것. 여기까지 오게 한 말수는 여순의 신이었고 부모였으며 지아비였다. 그가 걷는 모습을 보면서 여순은 든든했다. 이제는 다정한 남편인 그는 사람은 변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뒤집어 준 인간이었다.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뢰를 준 인물이었다. 여순은 그를 위해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밖에서 눈을 떼고 부엌으로 가 저녁에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다가 그가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삶기로 했다. 갯가에서 살았으나 해물보다는 육식을 말수는 좋아했다. 당신 성이 육씨인 것이 육식을 좋아해서 인가봐요. 여순은 돼지기름으로 번질거리는 말수의 입가를 손으로 훔치면서 이런 농담을 했다. 점심은 수육을 먹었어요. 어떻게 알았어. 입술에 기름기가 가득해요. 

그러게, 난 뱃놈일 할 때도 물고기보다 돼지가 더 좋았어. 해물은 흔했고 고기는 귀했기 때문인지도 몰라. 성씨하고는 아무 관련 없다고. 육씨라고 육식을 좋아하면 전씨인 전여순은 전을 좋아하나. 하하하. 여보 그건 농담아니거든요. 말수가 웃었다. 웃음을 귓전으로 흘려듣고 여순은 동파육을 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서둘렀다. 간장에 졸이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층계를 내려가는 말수의 등뒤로 여순이 말했다. 여보, 저녁에 동파육 어때요. 여느 때 같으면 좋지 하고 머리 뒤로 엄지 손가락을 세웠을 말수가 뒤돌아 보면서 조금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녁 약속 있는데. 막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잊었네. 여순이 물끄러미 그런 남편을 쳐다 보았다. 한인촌에서 포목 장사를 하는 윤씨라고 있는데 그 사람이 지난 번 치료 잘 받았다고 저녁이나 하자고 하데.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그러마 했지. 미안해, 여보. 아니, 뭐 미안할 것 까지야. 여순이 가볍게 받아 넘겼다. 그렇지만 실망하는 기색이다. 동파육은 내일 먹으면 어때. 마침 토요일 이잖아. 다음 날 저녁은 병원도 쉬니 우리 간만에 고량주 한 잔 할까. 여순이 반색했다. 그래요, 여보. 내일 한 잔 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동파육 만들게. 소동파도 울고 가는. 솜씨 한 번 기대하지. 금요일 오후는 한산했다. 환자 몇 명이 오전에 왔다 갔고 발이 부러진 노동자가 항생제를 받아간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둘은 이처럼 한가한 이야기를 했다. 누구 말마따라 우리들의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집에 말이야. 애들이 서 너명 있는데 한결 같이 잘 났어. 다 열 살 미만인데 말도 제법 하고 달리기도 하고 귀여워 죽겠어. 당신도 한 번 같이 가보자고. 말수가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은지 계단을 올라오면서 말했다. 웃는 낯이 보기에 좋았다. 그가 웃는 것은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수가 웃을 때는 제법 잘 생긴 얼굴이었다. 커다란 광대뼈는 입술이 좌우로 벌어지면서 평평해지고 눈꼬리 역시 좌우로 잘게 찢어지는 것이 배우를 해도 좋을 상 같았다. 비록 빌런역이겠지만.

고기 재우는 것이 미뤄지자 여순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린 사람 답게 심심해 졌다. 쌓여 있는 의학 서적을 보거나 영어 공부도 오늘은 영 내키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도 조계지를 구경하고 싶었다. 간혹 차를 타고 지나가기도 하고 찬거리를 구하러 나간 적은 있었지만 걸어서 20분 거리인 한인촌 구경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순은 저녁 약속에 자신도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말수는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혼자간다고 했는데,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이 한 말을 바꾸고는 같이 가도 상관 없다고 허락했다. 거울 앞에서 단장을 하던 여순은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고. 당신도 알잖아, 환자로 만나서 조선 말 알아 듣는 사람끼리 갖는 뭐, 타국에서 만나는 민족적 마음이라고나 할까. 나와 윤씨 사이는 딱 거기까지야. 그러니 우연히 만나서 같이 왔다고 하면 뭐 그런데로 어색하지는 앟을거야. 그 사람 부인은 어때요. 여순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사람에 대해 물었다. 인상이 괜찮아 보여. 홍성 출신인데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 홍성이라면 우리 옆 동네요. 여순이 목소리를 높였다. 보령하고 가까운가. 그래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은 아니지만 통영보다는 열배는 가깝지요. 여순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래 고향얘기 해도 되겠군. 그 말을 남기고 말수는 이층 병원으로 내려갔다. 그가 올라올 때와는 다른 소리가 났다. 여순은 조금 전에는 고향을 의식적으로 무시했으나 어느 순간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애써 참았다.

거울 속의 여순은 아주 젊었고 예뻣다. 이제 이십대 중반을 갓 넘겼으니 그럴만도 했다. 십대에 와서 그 나이가 됐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쩜 그 집 아이들이 잘 났구나. 어떻게 생겼을까. 말수의 어릴 적 개구장이 모습. 그런 상상을 그녀는 거울 앞에서 했다. 남편이 아이를 원하는 구나. 자신과 나이차가 있으니 아이 생각이 자신보다 더 클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 여순은 단 한 번도, 맹세컨데 단 일초도 자신의 아이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잘 났다는 말에 여순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임신할 수 있을까. 두 번의 낙태 경험 이후 임신의 기미는 없었다. 피임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의문은 합리적이었다. 석녀가 된 것일까. 여순은 또 다른 공포를 느꼈다. 정말로 말수가 아이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다면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그의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갑자기 여순은 엄마가 된 자신과 영원히 출산할 수 없는 자신을 비교해 봤다. 생각은 후자에 머물렀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미 죽은 환자를 데려와 막무가내로 치료해 달라고 외치는 망자의 부인처럼 막막함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울컥 하는 느낌이 아랫쪽에서 올라왔다. 이러다 토하는 것은 아닐까. 신물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두운 그때의 시절이 가슴을 조여왔다. 숨쉬기가 여간 불편했다. 여순은 심호흡을 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살고 나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벽이 앞에 버티고 섰다. 그녀는 눈을 감은 그 상태로 걸음을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이쯤이다 싶은 장소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정확히 그곳은 아니었다. 피아노는 몇 발치 더 앞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은 그녀는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건반 위에 올린 손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따라가는 입을 좇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든지 배우는데 여순은 빨랐고 능숙했다. 한 달 남 짓 배웠을 뿐인데 악보를 보고 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다. 피아노 선생은 우리 의사 선생은 음악을 했어도 성공했을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순은 그 말을 떠올리면서 약간 웃음기 있는 얼굴로 곡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너는 무엇을 찿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목소리는 낮고 처량했으나 눈물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이 노래는 혼자 있을 때만 불렀다. 며칠 전 말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시험해 보자고 피아노 앞으로 여순을 끌었다. 그 때 여순은 이 노래를 불렀다. 오 분이나 되는 긴 노래를 다 듣고 나서 말수는 박수를 쳤다. 그러나 슬픈 노래이니 앙콜은 다른 노래라면서 눈을 꿈벅였었다. 그 이후로는 말수든 누구든 완벽히 혼자가 아니면 부르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혹시 말수가 듣고 있지는 않나 해서. 

맞아. 말수 말이. 이 노래는 슬퍼, 지독히도. 슬픈 노래. 그렇다, 이 노래는 슬프다. 여순은 윤심덕을 알았다. 틈만 나면 신문을 읽고 책을 펼친 결과였다. 노래 취임 후 바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죽은 어린 여성 윤심덕을 여순은 잊지 못했다. 이런 음색으로 이런 노래를 부르는 저 여자의 무엇이 삶 대신 죽음을 불러 왔을까, 그녀의 넋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것은 이렇게 피아노 앞에서 그녀의 음색을 흉내내면서 부르는 노래였다. 슬프지만 부르고 나면 왠지 힘이 나는 그런 역설적인 가락에 여순은 저도 모르게 흥얼 거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말수는 그런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순히 슬픈 노래로 단정지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수 앞에서는 그 노래를 연주하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노래가 그치고 반주가 이어질 때 여순은 순간 등 뒤에 어떤 차가운 기운을 느껴 몸을 돌렸다. 인기척은 없었다. 일어서서 계단 쪽을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말수였을까. 내 노래 소리에 끌려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왔을까. 말수는 들었을까. 여순은 그런 마음을 가졌으나 이내 그만두고는 다시 건반 앞에 앉았다. 그 노래를 가급적 부르지 말자. 부르고 나면 자신도 거기에 사로 잡혀 있기에. 힘이 나기도 하지만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슬픈데 몸은 한결 가라앉았다. 차분해지고 무언가에 쫓겨 급히 서둘러 하기보다는 한 발 뒤로 미뤄놓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지금도 그랬다. 그녀는 내친 김에 노래 한 곡을 더 연주하기로 했다. 이난영이었다. 여순은 상하이에 도착하고 나서야 목포의 눈물을 처음 들었다. 가수는 기교가 뛰어났다. 목소리도 청아했다. 타고난 노래꾼이었다. 일본어로 부르면 크게 성공하겠다. 여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건반을 두드리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가사는 사의 찬미처럼 서러움을 몰고 왔다가 진정제처럼 마음을 가라앉혔다. 노래를 연속 두 곡 부르고 나자 여순은 다시 마음을 추스렸다. 가슴을 죄던 답답함은 사라지고 다시 여유가 찾아오자 그녀는 부드러운 목조 계단의 감촉을 느끼며 아래로 내려갔다. 말수는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여순처럼 익히고 배우는데 열중했다. 여보 무슨 소식 있어요. 늘 그렇지. 싸우고 다투고 죽고 하는 전쟁 이야기가 많아. 미국은 어때요. 기세가 올랐어. 도쿄 공습도 성공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이긴 모양이야. 도쿄 공습은 훨씬 전 일이잖아요. 그렇지만 그것이 효과가 컸던 모양이야. 우리 일본이 밀리나요. 우리라고. 그래 우리가 밀려. 신문에도 그렇게 났어요. 아니, 그 반대야. 하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돼. 느낌이나 어감이나 문장에서 그런 게 느껴져. 그렇다면 우린 어쩌지요. 뭘 어째, 하던 일 하면 되지. 그래요, 그렇군요. 그런데 여보, 나 기타도 배우고 싶어요. 기타, 웬 기타. 그냥요, 피아노를 치니 기타가 눈에 들어와요. 당신도 같이 배워요. 피아노 선생이 싼 기타가 있대요. 거저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마음이 있으면 말하래요. 공짜로 가르쳐 준다고요. 기타를 배우면 미국 노래 불러 줄게요. 요즘 일본인들 사이에서 인기래요. 말수는 뒷머리를 긁었다. 기타 살 돈이야 물론 있다. 간혹 외상도 있지만 병원 치료비는 현금이 대세였다. 월세를 내고도 돈은 조금씩 모였다. 환자는 늘고 있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왜, 싫은가요. 여순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바라면서 말수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당신이 원하면 그렇게 해요. 여순은 말수의 품에 기댔다. 넓고 따뜻했다. 여순은 고마웠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없었으면 난 벌써 죽은 몸이예요. 원, 당신도. 뜬금 없기는. 나도 당신 없었으면 죽은 몸이야. 그러나 당신은 내게 빚진 게 없어. 우린 행복한 거죠. 그래 위 아 해피야. 앞으로도 그럴 거죠. 물론 그렇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이 말수가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 다음 달이 크리스마스잖아. 선물로 사줄게. 좋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이 기타를 치면 멋질거야. 기타치는 조선의 여자 의사라. 말수의 입이 벌어졌다. 그럼 당신은 나에게 뭘 해 줄거야. 뭘 바래요. 아무것도. 말해봐요. 그러지 말고. 당신이면 충분해.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어서요. 우리 아이 하나 키울까. 여순은 말수의 품을 빠져나왔다. 올 것이 오고 말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훅하고 밀려왔다.

아기요. 우리 아기요. 여순이 되물었다. 그래, 우리 아기. 우리가 평생 병원을 할 수 없잖아. 애들한테 물려주고 늙으면 우리끼리 놀자. 응. 나쁠 게 없지요. 그런데. 그런데 뭐.  말수가 미소를 지으며 여순의 어깨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아임 굿 데디. 말수가 영어를 쓰면서 히죽거렸다. 그는 영어 회화에 열중이었다. 어려운 독해는 곧잘 해도 회화가 약했다. 여순이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요. 난 좋은 엄마가 될 거에요. 그렇게 해요. 말수는 여순을 들어 올리고 빙빙 돌았다. 그의 입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그 노래, 싫다고 했잖아요. 여순이 팔에서 풀려나 놀라는 듯이 물었다. 뭐, 노래일 뿐이잖아. 그리고 맞잖아. 내 가는 길 어디인지 나도 그것이 궁금해. 말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여순도 웃었으나 말수의 마음과는 같지 않았다.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말수의 흥얼거림은 이어졌다. 아, 그만 해요. 당신이 부르면 더 슬퍼져. 내가 부를 때와는 느낌이 완전 달라. 안 부른다더니, 부르지 말라더니 왠 일이래. 그러게, 나도 몰라. 그냥 절로 나오네. 노래라는 것은 그런가봐. 부르면 좋잖아. 말수가 능청을 부렸다.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럼 다른 노래해요. 우리 올라가요. 여순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접었던 덮개를 열면서 여순은 벌써 칠 곡을 예정해 놓았다. 건반 위의 손은 정확한 음계를 치기 위해 자리를 잡았고 고개는 저도 모르게 앞뒤로 흔들렸다. 실력은 아마추어지만 누가보면 프로급 자세였다. 여순은 뭐든 시작하면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자세부터 시작해 정확한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인지 말수가 보기에도 피아니스트 같은 풍모가 풍겼다. 당신 멋져. 이제 알았어요. 순간 순간 감탄하고 있어. 여순이 못들은 척 고개를 숙였다.

말수가 가볍게 여순의 어깨를 잡았다. 여순은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추스렸다. 길게 한 숨을 내쉰 다음 대회에 나온 학생처럼 조금 떨리는 손으로 가볍게 건반을 눌러 나갔다. 말수가 자세히 보기 위해, 볼 줄은 모르지만 악보에 눈을 고정한 채 여순이 들려주는 노래가 어떤 것인지 맞추기 위해 음을 따라가고 있다는 듯이 몸을 흔들었다. 그렇군,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말수가 미리 예측한 것이 맞아 떨어진 것에 대해 만족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오오,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박자도 맞지 않았다. 그런 말수를 위해 여순은 그가 따라 올 수 있도록 속도를 늦추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는 제법 박자가 맞았다. 여순도 참지 못하고 입을 중얼거렸다. 이난영은 참 난 인물이야, 조선 최고의 가수라니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해냈다는 듯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수가 말했다. 특히 사공의 뱃노래로 시작하는 부분이 좋아. 내가 뱃놈 출신이잖아. 뱃놈은 사공이나 뱃사공이나 그런 말이 나오면 가슴이 뛰거든. 노젓는 출신이니 어련하겠어요. 당신이 젓는 배를 타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여순이 맞장구쳤다. 둘은 좋았다. 좋으면 나빠질 것을 염려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었다. 그들보다 더 나쁜 경험을 한 사람이 조선 천지에 있을까. 아무리 나빠도 그 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서 여순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말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행복만이 자리 잡았다. 빨리 보고 싶어요. 포목점 한다는 주인 마누라 말이예요. 저 보다는 나이가 많겠죠. 서로 말이 통했으면 좋겠어요. 언니 하면서 지내면 오죽 좋아요. 당신은 동생하고요. 그럼 그렇고 말고. 이역만리에 형이라고 부를 사람이 있다니 참 꿈같군. 당신도 분명 좋아할 거야. 아이들을 보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나니까. 말수가 다시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이때 여순은 처음들었을 때와는 다른 마음이었다. 아이를 못 낳으면 어떤가. 남편도 이해하겠지. 양자를 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디가서 바람을 피고 와서 데려온 아이도 괜찮을까. 여순은 심지어 그런 심정이었다. 갑자기 자기 삶에 아이가 끼어들었다. 그게 가능한가. 여순은 잠시 환영에 사로잡혔다. 하루 종일 등에 매달려 있는 아이의 무게를 생각했다. 꼬물 거리는 아이가 그 작은 손으로 어깨를 잡고 일어서려고 한다. 그리고 포대기를 감은 발을 차고는 쉬하고 소리친다. 나중에는 울고 불고 난리다. 이 모든 것을 여순은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지웠다. 아이도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안정된 삶이라면 아이 하나 키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들의 어려운 과거를 잊게 하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신분의 위험도 감출 수 있고 어디를 가든 떳떳하게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다. 때가 되면 죽마을에 갈 수도 있겠다. 여순은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졌다. 절대 살아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아이와 함께라면 그런 다짐 정도는 쉽게 뒤집을 수 있다. 여순은 아이를 품안에 안고 있는 것처럼 어르는 시늉을 했다. 점심 무렵 기침을 하는 환자가 찾아왔다. 진료 중에도 심하게 기침을 했다. 아마도 폐결핵이 많이 진행된 듯 했다. 입가에 피가 묻어나기도 했다. 여순은 쓰고 있던 마스크 끈을 조였다. 이런 환자는 대책이 없다. 약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치료 효과가 신통치 않았다. 여순은 그 환자의 생명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요양을 잘 하면 치료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환자에게 이런 위안의 말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여순은 알 수 없었다. 그 환자는 이미 자신도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돌아가는 축 처진 환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여순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할 걸 그랬나. 준비라도 할 수 있도록. 대책없이 맞는 죽음보다 낫겠지. 다음에 보호자에게는 알려야겠어. 여순은 환자를 기억하면서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낮인데도 조금 어두웠다. 오늘은 하루를 일찍 마감 하려나. 자신처럼. 그녀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느리게 걸었다. 플라타너스가 잎을 떨구고 가지를 일부 드러냈다. 앞선 나무에서는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총소사를 피하지 못한 전투기처럼 낙엽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다가 바닥에 가라앉았다. 가을바람은 가지를 계속 흔들었다. 떨어지는 낙엽이 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죽어야 내년을 또 기약할 수 있으니 나무는 사람과는 달랐다. 사람이 나무라면 가을에는 죽습니다. 쉽게 이 말을 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봄에는 다시 살아나니 걱정하지 마세요. 환자는 죽는다는 말에 사색이 됐다가 살아난다는 말에 활기를 찾겠지. 사람이 나무라면. 여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르른 하늘에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플라타너스의 둥근 열매 사이로 흰 구름과 노을이 섞인채로 하늘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 곧 눈이 내려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상해서 처음 맞는 겨울은 어떤지 여순은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이 들었다. 눈이 온다는 것, 하얀 눈을 본다는 것에 마음이 들떴고 얼마나 추울지 난방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아무렴 시골 죽마을 보다 춥기야 하겠는가. 대신 많이 왔으면 좋겠다. 통행이 불편해 환자가 적어도 좋다. 하얀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다면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수 있어. 비록 같이 놀아줄 친구는 없지만 말수에게 부탁하면 들어줄 것이다. 그녀는 눈 덮인 들판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표식을 남기며 걷는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간 길을 누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나의 길은 나만의 것이기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도 어제 처럼 별 일 없이 하루가 끝나가고 있어. 내일은 또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여순은  잠깐 둘러볼 요량으로 걸었는데 제법 많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아쉽지만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너무 늦지 않기 위해서는 되돌아가야 한다.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잘 보이지 않았던 조계지의 건물들이 노을을 받아 잠깐씩 빛이 났고 그것들이 시선을 끌었다. 특히 유리건물은 빛을 반사하면서 먼지쌓인 시간을 알려주었다. 

저런 건물들을 지은 유럽 사람들과 유럽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건물의 꼭대기에는 빅벤 모양을 본뜬 시계가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높이 걸려 있었다. 저 건물은 필시 영국사람이 영국을 심어 놓기 위해 지은 것이 분명했다. 또 다른 건물은 커다란 기둥이 우람한 건물을 받치고 있었다. 저게 이오니아식인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고딕 아니면 르네상스식. 그녀는 온갖 건축 기법을 생각나는 데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녀는 유럽에 가고 싶었다. 저 건물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면 지을 수 없을 것이다. 확실치도 않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층수를 세면서 프랑스 건물이라고 단정한 빛나는 대리석으로 둘러쌓인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럽이라면 어느 나라든 여기보다는 더 좋을 것이다. 거기서라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종일 걸어 다녀도 하나도 없다. 자신을 감출 수 있을 때 여순은 마음이 편했다. 지금 여순이 마음이 편한 것은 여기서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는 일본인 천지가 아닌가. 피아노 음계처럼 위 아래로 박자를 맞추며 걸어가는 군인들도 많다. 누군가 등 뒤에서 여순아, 너 여순 맞지. 남양군도 하면서 덥석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온몸에 식은땀이 싸하고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그것은 심장을 관통하고 두개골을 뚫고 지나갔다. 잠깐 현기증을 느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상하이에서도 그녀는 이처럼 가끔씩 불안했다. 그것은 말수가 아이 이야기를 꺼낸 후에 더 심해졌다. 처음에는 안정되고 좋을 줄 알았던 아이는 그녀를 힘들게 했고 짜증을 불러오게 만들었다. 중국은 조선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아이는 나를 힘들게 할 거야. 그래, 맞아. 내 아이도 아니고. 내가 잘 키울 자신도 없어. 그러니 그 이야기를 뒤로 미뤄두자. 여순은 억지로 마음을 그렇게 정했다. 난 여전히 조선족이야. 미국이나 유럽, 일본 열강에 먹힌 중국에 속한 조선족.  

이 큰 나라가 어찌 저 멀리 바다 건너온 이방인에게 나라를 빼앗겼는가. 난징조약이며 개항이며 치외법권 같은 말들이 여순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순의 발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어쩌면 지금쯤 환자가 응급환자가 병원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리석은 생각을 떨치기 위해 여순은 다른 사람이 보아도 서두른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숨을 가다듬으며 병원 앞에선 그녀는 응급환자가 없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약속한 환자가 오지 않아서 남는 시간이 생긴 거처럼 조금 여유가 있었다. 여순은 현관 아래서 병원의 간판을 한 번 보고 현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수는 차려입은 복장을 벗지 않은 채 차트를 보면서 일과를 정리하고 있었다. 벌써. 같이 나가자고 했으나 그는 내일 환자들이 많아 미리 준비해야 한다면서 혼자 나가는 그녀에게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닌 시간이 꽤 됐네. 저도 올라가서 준비하고 내려 올게요. 여순이 산책한 시간은 40분 정도였다. 오고 가는데 그 정도 시간뿐이었는데 여순은 오늘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유럽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가던 걸음을 되돌려 사 먹고 싶은 마음처럼 유럽은 그날 이휴 여순의 마음 한구석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보고 느낀 것이 많은 오후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저녁 준비를 순조롭게 진행됐다. 미리 준비해둔 고기를 꺼내 끊이기만 하면 됐다. 간장냄새와 고기냄새가 곧 거실을 가득채웠다. 말수는 포도주를 준비했다. 식탁은 풍성했다. 어때요. 내 음식 솜씨. 기다려 봐. 아직 먹지도 않았어. 재촉하는 여순에게 말수가 핀잔을 던지며 크게 썰어 놓은 수육을 집어들었다. 잘 썰었어. 가지런하게 정리한 것도 보기 좋고. 이 정도라면 공자 선생도 입맛이 당기겠는걸. 동파육에 공부가주가 어울리겠어. 포도주를 옆에 놓고 말수는 일어섰다. 먹다 말고 또 어디가요. 어, 이 음식에는 공자 술이 어울려. 내가 하나 사다 놓은 게 있어. 말수는 작은 도자기 그릇에 담겨 있는 술을 땄다. 포도주를 기대했으나 여순은 그가 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다. 어떤 술이든 한 두 잔 즐기면 되는 것이지 종류를 따지는 말수를 여순은 이해하지 못했다. 술 맛은 좋았고 둘은 환하게 웃었다. 여보, 우리끼리 즐깁시다. 애가 없으면 어때. 말수가 흥겹게 말했다.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여순은 그런 말수가 밉지 않았다. 그도 자신처럼 처음에는 애가 부러웠으나 남의 애를 키우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순처럼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가 좋아. 말수는 거푸 잔을 비웠다. 도수 높은 술은 말수의 몸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여보, 낼 수술 약속 있지 않았지요. 자고 일어나면 거뜬해. 당신도 한 잔 더 해야지. 아뇨. 난 벌써 세 잔 째요. 얼굴이 화끈거려요. 그러고 보니 당신 얼굴이 해님처럼 타오르고 있어. 말수가 자신의 표현이 마음에 드는지 어때. 햇님 같은 당신 얼굴. 하고 물었다. 당신은 별처럼 빛나고 있어요. 역쉬, 울 마누라. 둘은 상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쇼파에 기댔다. 잠이 스스로 오는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로 두 사람은 빠져 들었다. 윤씨와의 약속은 늦춰졌다. 전화로 다급한 소리를 말수는 들었다. 일이 좀, 있어요. 의사 선생. 그래서 부득이 하게 약속을 좀. 알았어요. 일 먼저 처리하세요. 저야 뭐. 미안해요. 의사선생. 내일 만납시다. 곱절로 값으리라. 뭘요. 그럼 내릴 뵐게요. 되레 잘됐어. 포목점 윤씨와 만났더라면 오늘같은 기분을 낼 수 없잖아. 건배. 짠. 두 사람은 다시 잔을 부딪쳤다. 다음 날도 두 사람의 기분은 어제 저녁과 같았다. 논밭 사이로 가로 질러 가는 길은 마치 소풍을 가는 것 처럼 신이 났다. 길이 끊어져 한동안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누런 황포강을 따라가다 익어가는 벼를 보를 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이곳이 조선땅인지 중국땅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금쯤 고향 죽마을에도 황금 물결이 일겠구나, 여순은 감회가 새로웠다. 말수도 그 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둘은 그런 강물과 그 같은 들판을 바라볼 뿐 상념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대신 부부는 손을 잡았다. 부부가 손을 잡고 하는 드문 외출이었다. 이제 논길을 벗어나 도로로 접어들었다. 서양식 집들이 웅장하게 다가왔다.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여순이 본 그런 건물들이었다. 힘이 나고 있는지, 익숙해서 인지 여순은 눈에 보이는 작은 것 하나에도 관심을 보였다. 얼굴은 환한 표정을 내내 유지했고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잡초를 보는 눈은 애정이 흠뻑 묻어났다. 말수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저도 기분이 좋은지 영글대로 영근 길가의 강아지풀 하나를 꺾어서는 여순을 간지럽혔다. 여순이 그런 말수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고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겉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상태로 둘은 손을 잡고 큰 길을 돌고 돌아 일본인 마을을 지났다. 한인촌이 보였다. 일본인 촌에 비해 규모도 작고 초라했다. 몇 십 가구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모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듯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포목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가게 앞에 내놓은 물건을 보고 여순은 목적지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말수가 손가락 질을 하면서 저 집이오 하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여순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화답했다. 포목점 집 주인은 비대했다. 바짝 마른 사람 천지인 세상에서 뚱뚱한 몸은 곧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는 인기척에 배를 앞으로 내밀고 문을 열었다. 한 손에는 파리채를 들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날고 있는 파리가 앉으면 그때 내리치려는 준비동작을 하면서 누구왔어요 하고 물었다. 익숙한 조선말이었다. 윤사장님 안녕하세요. 말수가 말했다. 고개를 든 그가 의사 선생님 오셨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손에 잡은 파리채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가게는 제법 컸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 여자가 반갑게 맞았다. 바깥양반에 비교해 보면 체구가 작아서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일 다 의문 투성이지만 남녀 관계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거구의 남자와 아주 연약한 여자의 조합이라니. 여자는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똑바로 뜨고 여순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례합니다. 저이가 같이 가자고 해서요. 여순이 머뭇거리자 여자는 잘왔다면서 손을 잡았다. 그녀도 조선여자였다. 몸은 작았으나 눈이 똘망똘망한 아이처럼 생기가 돌았다. 집안 살림을 똑부러지게 하겠구나 싶었다. 그녀는 잘 웃었다. 손임을 대하는 가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타고는 성품인 듯 했다. 웃을 때는 천박하기보다는 보통 여자 이상의 어떤 품격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여순은 단박에 자신이 그 여자와 어느 정도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면서 지나갔다. 인사해야지. 애들아. 그 중 한 애를 보고 주인 여자가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까불렀다.

다섯 살쯤 되보이는 사내아이가 대답대신 고개만 조금 끄덕이더니 더 놀겠다며 손님은 안중에 없는 듯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조심해라, 넘어지면 다친다. 조금만 놀고와. 아주 조금이다. 누나 잘 따라다녀.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미안한듯이 여순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들이 씩씩해 보여요. 아주 말썽 꾸러기입니다. 저 애가 맏인가요? 아유, 아니에요. 여자가 크게 손사레를 쳤다. 위로 연연생 누나 둘이 있어요. 외동 아들이 철이 없어요. 그 아래 여동생을 돌 볼 생각이 없어요. 그럴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다른 집 애는 제 나이에 동생을 업기도 해요. 하하하. 여순은 웃었다. 여순은 말수에게서 이 집 애들이 서 넛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계산해 보니 다섯이나 됐다. 외동아들이면 버릇이 없는데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철이 들면 다를 것이다. 아이들은 다 그래요.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주인여자와 여순이 이런 말을 주고 받을 때 말수는 윤사장과 술잔을 마주 하고 앉았다. 가볍게 한잔 하자는 것이 두 어 순배 돌았다. 점심부터 낮술이다. 병원 쉬는 날이니 괜찮지요. 윤사장이 건배를 하면서 눈을 말수 가까이 가져갔다. 네 조금 편하긴 한데. 낮술 먹다 취하면 부모도 몰라 본다는데. 말끝을 흐리자 윤사장은 괜찮아요. 부모님은. 조선에 계신가요. 아니면. 말수는 머뭇 거렸다. 호구 조사가 시작되나. 그보다는 돌아 가셨어요 하고 말했다. 언젠가는 할 말이면 지금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가을 볕이 따뜻하니 술이 술술 넘어갑니다. 의사 선생, 지난번 잘 치료해 줘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사장님이 관리를 잘 하셨어요. 그런데 선생은 조선인 맞지요. 일본인 같지 않아서요. 조선말을 아무리 잘해도 토박이 아니면 조금 표가 나거든요. 다 알아요. 조선 사람은 이국땅에서는 얼핏 봐도 알아요. 그래요. 말수는 허허 웃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억지 웃음을 웃고 있는 말수는 조선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일본인을 고집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태어나기는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른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이라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일본과는 연관이 없은 토종 조선인이라고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하하 아무렇게나 생각하세요. 이국땅에서 국적이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말수가 능청을 떨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말수는 지금도 그 때의 심리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냥 조선인이라고 해도 되는데. 뭔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윤사장은 그런 대답이 나는 조선인이오 하는 대답으로 알아들었다. 일본인이라면 그런식으로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난 일본인이오 하고 말했겠지. 눈치가 빠른 윤사장은 조선인치고는 제법 자기 앞가림을 하는군, 그러니 의사가 됐지. 속으로 이렇게 재단했다. 그리고는 자기 집이어서 주인행세를 해야 한다는 듯이 말을 쉬지 않고 했다. 상대가 편안하게 나오자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아시겠지만. 그가 이 말을 하고는 방안을 두리번 거렸다. 상대와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만큼 독립운동은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여기 조선인들은 독립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여요. 아무래도 왜놈들이 점령한 조선 땅에서 보다는 수월하지요. 뜻있는 지사들은 죄다 여기로 모여들고 있어요. 그러니 상하이가 운동의 중심이고요. 간혹 만주나 충칭 등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하지만 다시 여기로 모여요. 그만큼 익숙한 곳이기도 하고요. 말수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들킬만큼은 아니었다. 이렇게 나오면 관심있는 자와 그 반대인 자를 구분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떠보기 위해서 윤사장은 이 정도 선에서 일단 멈췄다. 말수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좀더 대화가 필요했다. 말수의 입장에서는, 거의 초면이라고 해도 될 만한 사람에게 조금 앞서나가는 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를 믿고 있나.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가. 가슴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지 못하고 떠벌이는 스타일.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위험한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다. 입이 가벼운 남자인가. 왜 몸과 입은 반대라고 하잖아. 뚱뚱한 사람이 입이 무거울 것 같은데 가볍다는. 말수가 잠시 뜸을 들이자 윤사장을 다시 말을 이었다. 말이 끊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처럼 보였다. 요즘들어서는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어요. 잘 하면 되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된다는 쪽이 우세하거든요. 조선 독립 운동이 그렇게 활발한 가요. 간혹 그런 신문 기사는 봤지만 직접 듣기는 처음이라서 놀랍기만 합니다. 의사선생도 곧 그걸 느낄 거요. 순사들이 여기서도 조선땅 만큼은 아니지만 눈에 불을 켜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선생도 조심하시오. 말수는 내가 거기에 연관되어 있지 않은데 조심할 게 뭐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면서도 뜨끔했다. 

일본 순사들이 나, 조선 독립하는 사람이오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을 모조리 잡아 들이고 있어요. 문제는 그런 사람은 적고 아무리 눈씻고 봐도 이마에 그런 글자가 없는 사람인데 실제로는 하는 사람을 찾는 일이지요. 일본 영사관에는 영사 업무 보다는 독립운가를 잡는 형사들이 어물장의 꼴뚜기처럼 득시글 해요. 귀찮아 죽겠어요. 나도 대상에 들었다니까요. 내참, 운동의 운자도 모르는 사람을 의심하다니. 포목점 하는 무지렁이가 독립이 뭔지 알기나 하겠어요. 의사선생처럼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말수는 윤사장이 자신을 끌고 들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자신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오면 그것을 기회로 더 파고 들어가고 싶다는 의중을 그는 느꼈다. 형사들 눈이 아주 시뻘게요. 대낮에 낮술하는 저처럼요. 그가 자신은 술을 먹으면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면서 지금 제 얼굴이 붉은 꽃이 폈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대화 중간중간에 자주 샛길로 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들은 움직이는 사람을 가만 두지 않아요. 그러니 선생은 환자 돌보는데 신경쓰고 그런 일에는 멀찍이서 보는 것이 좋아요. 괜히 분위기에 휩쓸리면 병원이고 뭐고 금새 산산조각이 날 테니까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말수가 거들었다. 사장은 남의 말 하듯이 하는 말수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말수는 마지 못해 태어나기만 통영이고 서너 살 때 일본에서 공부하고 경성에서 병원을 차린 것 정도만 이야기 했다. 거봐요, 내 말이 맞지. 왜놈이 아니고 조선 사람이군요.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의미였다. 말수는 멋쩍은 듯 하면서 내민 손을 잡았다. 몸집 처럼 손이 두툼했다. 어제 먹었던 동파육처럼 비계가 많이 붙어 있었다. 이제는 말수가 물을 차례였다. 그가 다른 말로 말수를 곤란한 처지로 몰기전에 빠르게 말했다. 사모님은 고향이 홍성이라면서요. 아, 내가 지난번에 얘기 했었지요. 윤사장이 자신의 기억력을 자랑하면서 알은체를 했다. 아니요. 보령이라고 제가 얘기했어요. 말수는 정정했다. 맞아요. 내 마누라가 홍성이지. 그가 머리를 긁었다. 숱이 적은 머리에 손가락이 지나가자 붉은 빛이 더욱 뚜렷해졌다. 말수는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면 윤사장님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겠어요. 남자가 머리에서 손을 떼내려다가 다시 긁적였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파리채를 들더니 탁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몸은 쪘으나 순간 놀림은 빨랐다. 내리치는 동작이 비호같았다. 저녁 바람에 인근 생선가게서 나오는 비린내를 맡고 포목점까지 온 파리 한 마리가 그 순간 사라졌다.

그가 파리채에 붙어있는 죽은 파리를 털어내기 위해 파리채를 직각으로 세우고 잡을 때처럼 탁하고 내리졌다. 죽은 파리가 방구석 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동작이 빠르군요. 이래뵈도 내가 무관학교 출신이오. 신흥. 몸이 이래뵈도. 그가 걸죽한 목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껄껄 웃었다. 말수가 희미한 미소로 받았다. 그쪽 사람들은. 아, 내가 정신머리가.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아느냐고 물었지요. 어쩌다 만나기는 해요. 자주는 아니지만. 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의 엄지와 검지를 말아 원을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 말했다. 의사 선생도 아시다시피 그거 하려면 이게 좀 들어요. 세상이 돈 없이 하는 일이 없어요. 그가 연달아 말하고는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대준다는 말인가. 그렇지요. 아무래도 꼭 필요한 것이지요.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요새는 일본 영사관을 손을 내밀어요. 돈 냄새는 어디서나 나는 모양입니다. 그가 코를 벌름거렸다. 말수의 몸에서 나는 돈 냄새를 맡는 흉내를 냈다. 말수가 수그린 몸을 바로 세우면서 남자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알게 모르게 나가요. 마누라가 알면 경을 치겠지요. 하지만 사내가 모든 일을 아녀자와 상의할 수는 없잖아요. 의사선생 안 그렇소. 선생도 사모님 모르게 하는 일이 있을테니 내 말 이해할 겁니다. 어라, 이 자가 나까지 공범으로 몰고가네. 말수는 기분이 나빴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돈을 좀 내요. 말수의 의문은 풀렸다. 그곳 사람이 우연을 가장해 아는 체를 하거나 아니면 제가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요. 말수는 윤사장이 그런 일에 돈을 대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직접 운동은 못해도 돈은 대고 있으니 나는 애국자다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하고 돈을 대는 사람은 돈을 대고. 애국하는 방법은 각자마다 다르지요. 그 때 아까 나갔던 아이가 엄마를 큰 소리로 부르며 넘어 질듯이 들어왔다. 녀석, 아주 말을 안들어서 골치 아파요. 공부 대신 노는데 정신이 팔렸으니. 애들 다 그렇지요. 공부는 커서 해도 늦지 않아요. 말수는 아빠보다는 아이 편에 서서 못마땅한 눈을 여전히 뜨고 있는 주인 남자에게 말했다.

나머지 애들은 어디 갔어요. 어디겠어요. 놀러 갔겠지요. 논밭을 쏘다니면서 미꾸라지를 잡던지. 사장이 못마땅하게 받았다. 효성이 지극하네요. 부모님 몸보신 해드리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요즘 미꾸라지는 가을볕을 받아 살이 통통하게 쪘을 겁니다. 말수가 아이들 역성을 들면서 자신이 봐도 비유가 앞서 나간다고 생각했던지 아이들이 다그렇지요 뭐. 그런데 부모를 닮아 잘 생겼어요 하고 주인 남자를 쳐다봤다. 아이고 의사 선생, 그런 말 마시오. 나만 닮거나 지 엄마만 닮았어도 좋을 텐데. 어디서 저런 애가 났는지 원, 하면서 칭찬이 싫지 않다는 듯이 얼굴이 옆으로 넓게 퍼졌다. 저 애는 커서 영화배우 시킬 겁니다. 서양애들처럼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 하잖아요. 이 사람도 팔불출이군. 자식자랑하는 사람이라니. 그러나 말수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그러게요. 시원시원하네요. 커서 인물이 되겠어요. 의사선생이 사사람 하나는 잘 보고 있네요. 다른 사람앞에서 자식 자랑하는데 이렇게 잘 받아주다니. 난 못난 아빠가 아냐.  윤사장은 자식 생각에 내심 흡족했다. 말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를 좋게 보았다. 나쁘게 볼 이유가 없었다. 그 정도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지. 자, 여기 까지 왔으니 대충 감을 잡았어. 이 집 주인은 보시다시피 외모는 비대하고 말은 쉽게하고 감추지 않고 자신을 다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푼수끼가 있으나 순진하기 까지. 말수는 환자를 대할 때의 긴장감을 놓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따라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마셨다.

의사 선생, 다음에는 우리 다른 사람도 함께 마십시다. 조선사람끼리 어울립시다. 그러지요. 참 마음이 편합니다. 말수는 대답했다. 만나는 사람이 다른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입이 근질거리는지 포목점 주인이 먼저 말했다. 속에 든 것을 뱉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독립운동을 하는지 아니면 심부름을 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쪽과 관계된 사람인데 간혹 물건을 사러 우리 가게에 와요. 고향도 광천이라고 해서 다른 조선인에 비해 정이 조금 더 가기는 해요. 아, 맞아요. 홍성과 광천이 가깝게 있지요. 아내가 늘 말했거든요. 어쨌든 그 사람은 늘 물건값을 후하게 쳐주는 편이에요. 같이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한다면서요. 말수는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잠시 말이 끝기자 윤사장은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말수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내가 거기 출신이라는 말을 했던가요. 거기라면. 신흥무관학교. 했어요. 들어는 봤나요. 의사 선생. 말씀 하시니 들은 것도 같네요. 서간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꿈의 집합소지요. 이상룡 선생이라고. 신민회 출신들의 독립 열망은 정말 엄청나요. 우연히 알고 나서 덥석 들어갔어요. 그런데 포목점을 하고 있다니. 군인의 길이 아니고 장사꾼이 된 것을 두고 윤사장은 멋적게 웃었다. 한마디로 인재양성소를 나온 셈이군요. 알고 있었소. 내가 그곳 출신이라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외면 못해요.

남자가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너무 가까이 했다고 느꼈는지 조금 뒤로 물러나면서 옆에 두었던 파리채를 다시 들었다. 그곳 출신이면 출세길도. 그런 말을 하다가 말수는 아차 싶어 그만 두었다. 그럴려고 들어간 것은 아니고요. 왜 포목점 사장은 출세하고 거리가 먼가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전공과 다른 사업을 하고 있으니 어떤 연유인지 궁금해서요.  말수가 또 말을 머뭇거렸다. 돈이 제법 돼요. 그리고 무엇보다 장사는 편해요. 관리가 되거나 군인질은 전쟁 통에는 골치 아프거든요. 돈 벌어서 경성으로 돌아가야지요. 돈 벌어서 어서 한가한 남자가 되어야지요. 돈 벌어서. 독립자금도 뭉텅뭉텅 내고 싶어요. 내가 못하니 대신 해주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라도 고마움을 표해야지요. 남자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게재가 아니라는 듯이 한 삼 년은 더 고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자는 자꾸 술을 권했으나 말수는 더 먹으면 집에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초면에 너무 늦었어요. 말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조선사람 끼리의 인사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크리스마스 전에 한 번 더 보시지요. 참 멀찍이도 약속을 잡네요. 그러지 말고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만납시다.  따라 일어나면서 주인 남자가 말수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방 구석으로 가볍게 밀면서 말수의 귀 가까이 대고 비밀 말을 하듯이 물었다. 지난번에 그러니까 한 삼사일 전에 복통 때문에 어떤 남자가 병원에 들르지 않았어요. 말수는 생각을 더듬듯이 잠깐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그래요, 남자 둘인가 하고 왔는데 내가 보기에 맹장염 같은데 수술은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다음 주 월요일쯤 방문할 거 같아요. 약을 삼일 치만 줬거든요. 아, 그 분 잘 치료해 주세요. 아마도 큰 일 하시는 분 같아요. 저도 직접 만나서 얘기 하지는 못했지만 말은 많이 들었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그 분이 틀림 없을 것예요. 예,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러나 요즘은 환절기라서 환자가 늘었어요. 잘 살펴보지 않으면 금방 왔던 환자 얼굴도 잊어요. 말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순도 따라 나왔다. 안주인은 말수가 적은지 말수를 보고는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을 하고는 눈길을 돌렸다. 다음에 또 오세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여순에게도 오늘 와줘서 고맙다고 했으나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렇게 다를까. 부부라고 볼 수 있을까. 몸집도 성격도 다른 부부를 생각하면서 말수는 아까 왔던 논길로 접어 들었다. 여기서 병원까지 거리는 멀지 않아도 방심하지 않았다. 자칫 빠질 수도 있어 조심하면서 걸었다. 낮술의 취기가 올라왔다. 말수는 낮술이라는 것은 정말로 제 부모도 몰라 볼 정도라고 하더니 정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몰려오는 취기 때문에 아찔 했다. 알코올의 급습이군. 뭐라고요. 여순이 다시 말해 달라는 듯이 물었으나 말수는 자신이 그 말을 한지도 잊고 있었다. 그러나 말수는 올 때 보다도 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마지막 잔을 먹지 말 걸 그랬나. 나에겐 마지막 잔의 징크스가 있어. 딱 마지막 잔이라고 하고 더는 먹지 않으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권하는 사장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 것을 말수는 후회했다. 의사 선생은 좋겠어요. 나는 그러질 못하거든요. 멈출 때 멈추어야 하는데 꼭 더 먹어서 혼이 나거든요. 참 대단하십니다. 포목점 사장은 그렇게 말했으나 지금 말수의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어, 이거 감당하기 어려운 칭찬인데요. 말수가 너털웃음을 짓자 남자도 같이 따라 웃었다. 잘 가시오 의사 선생, 어 제수씨도 잘 가시오. 다음에 올 때는 뭐 과일 같은 거 사 오지 마시고 그냥 빈 손으로 오세요. 맛있는 거는 여기 다 있으니까. 남자는 여순에게도 너스레를 떨었다. 말수는 좀 전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복기했다. 내가 실수는 없었나. 내 기분은 그 남자를 만나서 기분이 좋은가. 자신의 감정을 살피면서 여순을 보았을 때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보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주인 여자가 포목 몇 점을 끊어 줬는지도 모른다. 그 분, 오시면 치료 잘 해 주세요.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대신 그 분 오시면 치료 잘 해주라는 남자의 부탁 말이 귀에 어른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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