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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여기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말수는 지하에서 두 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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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말수는 지하에서 두 손을 모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7.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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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주소는 거짓이었다. 도쿄에 그런 주소 명은 없었다. 엉터리였다. 고바야시는 속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종로서의 고바야시를 급하게 찾았다. 총독부 고바야시와 종로서 고바야시는 동명이인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종로서 고바야시, 총독 고바야시로 둘을 구분했다. 그 무렵 완용은 순사부장에서 경부까지 승진한 가운데 서장까지 노리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차기 서장으로 낙점해 놓고 기회만 보고 있었다. 조센징으로는 최초로 경성 최고 노른자위인 종로서장이 되는 것을 놓고 이견은 없었다. 그만큼 완용의 수완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총독 고바야시의 전화를 받은 종로 고바야시는 상대가 보이지 않음에도 차렷자세로 경청했다. 다 가짜다.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놈을 체포해라. 분명 상하이 임정에서 보낸 독립군 끄나풀이 틀림없다. 하이, 하이, 완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고바야시를 사칭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양 몸둘 바를 모르면서 반드시 체포해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다짐했다. 너, 똑바로 해라. 하이. 이 놈 잡으면 바로 서장 달아줄게. 종로서장 말이야. 고바야시가 대놓고 흥정했다. 계급으로 치면 엇비슷한 동급인데 총독 관저에서 근무한다고 총독 고바야시가 완용을 대놓고 하대했다. 조센징이라는이유도 작용했다. 조선인은 이류 국민이었다. 그러나 완용은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기분 나쁜 것은 잠시고 서장은 영원한 것이다. 완용은 그러리라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휴의 이놈. 내 너를 잡아 찢어 주마. 갈기 갈기. 그가 닭웃음같은 소리를 내며 정말 그러기라도 하듯이 책상위의 빈 종이를 가로로 길게 쭉 찢었다. 반드시 그래야지. 내 앞길을 막는 놈은 누구라고 가차없어. 

그래, 이 필체를 이용하자. 생각났어. 그런쪽으로 내 머리는 비상해. 네 놈을 놓친 것은 한 번으로 족해. 평양역에서 넌 나를 봤을 거야. 그리고 비웃었겠지. 그게 얼마나 오래가나 보자. 분풀이를 제대로 하자. 먹을 갈자. 마침 한지도 있으니 무엇을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벼루에 물을 조금 붓고 먹을 집어 들고는 원을 그리면서 완용이 먹을 갈기 시작했다. 흐릿한 물색깔이 점차 검어졌다. 먹이라니. 그는 제법 붓글씨를 썼다. 이래뵈도 그는 서예에 조예가 조금 있었다. 어려서 잠깐 배운 것이 도움이 됐다. 그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붓을 들때 드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가끔 이렇게 먹을 갈았다. 그는 더 배우기 위해 경주 최부자집을 찾았다. 선생님의 글씨가 좋아 배우러 왔다며 서너달을 찾아 다녔다. 그러는 그를 최부자 댁은 떼내지 못했다. 완용은 배우는 학생답게 늘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악명높은 일제 순사를 이 순간만큼은 완용도 내려놓았다. 예의바르게 행동했으며 정말로 붓글씨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로 최부자의 글씨체를 완벽하게 모방하는데 성공했다. 최부자를 찾아간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붓을 잡고 상체를 숙였다. 붓글씨를 쓰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팔자에 있는 것인가. 완용은 자문하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정성, 정성. 정성을 다하자. 한글자 한글자 써나갈 때 그는 발이 저렸으나 다 쓰기 전까지는 자세를 바꾸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마지막 글자를 끝냈다. 발이 저려 쥐가 나는 정도였으나 그는 텅 빈 한지에 빼곡히 드러난 글자를 보고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참아내길 잘 했어. 그까짓 쥐 쯤이야. 심하다고 해도 발이 끊어지기야 하겠어. 그는 자신이 쓴 글씨를 보고 정말로 제대로 썼다고 감탄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휴의를 못잡으면 그 년이라도 잡자. 그 년 말이야. 밀양 사는 놈의 여자 말이야. 여성 독립군 행세를 한다고. 그래 그년도 휴의처럼 갈가리 아주 갈가리 찢어줘야지.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쓴 서체에 만족하면서 끝까지 죽 읽어 내려갔다.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서 필자가 간추린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네가 상하이에서 고생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 군자금을 보내려고 하는데 밀정이 하도 많아 내가 직접 글을 썼다. 이 글을 가지고 오는 자와 함께 동행해라. 모일 모시에 종각에서 만나기 직전에 중국인을 먼저 보내라. 오분 후 중국인이 떠나고 네가 혼자 있어라. 그러면 오 분후에 접선자가 나타난다. 우리 사랑채 이서방 알지? 그 사람이 전달해 줄 것이다. 너는 수령 즉시 네 임무대로 활동하고 이서방과 즉시 헤어져라. 부디 몸 건강히 잘 있어라. 1944.5월 경주에서. 

완용은 만주에서 마적질을 하다 도망쳐온 중국인을 수소문했다. 너 요즘도 그 짓이냐. 손 끊었어요. 형님. 내가 네 형님이냐. 네 형님. 알았어. 알았으니 너 이것을 가지고 상하이로 바로 떠나라. 거기서 박씨 성을 가진 여성 독립군과 접촉해서 이 글을 보여줘라. 자기 아버지 글씨체를 보면 너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혹 그 여자 옆에 젊은 사람이 따라붙는다면 공손하게 대하라. 그자가 함께 조선땅에 들어온다면 더 없는 환영이다. 그자는 그여자의남편이다. 아주 골칫거리야. 그런 걸 제게 맡기지 그랬어요. 네게. 나도 못하는 것을. 네 형님. 됐다 됐고. 네 임무를 수행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일부 해주마. 순사가 하고 싶으면 순사를 주고 헌병에 가고 싶으면 군인 계급장을 달아주마. 이도 저도 싫으면 원하는 돈을 줄 테니 마적질을 하든 아편을  빨든 상관하지 않겠다. 이마에 십자로 찢어진 흉터를 가진 마적은 완용이 써준 붓글씨를 소중히 싸서 바로 상하이로 떠났다. 일이 잘 풀리면 두 연놈을 다 잡아들일 수 있다. 여자와 사는 남자는 일제가 노리는 거물 가운데 최고위 거물이었다. 의열단인가 뭔가를 조직해 무장투쟁을 하는데 임정의 선생보다 더 과격해 일제는 그에게 가장 높은 현상금을 걸었다. 그 놈은 대체 겁을 어디다 숨겨 논 거야. 경찰서는 물론 총독부에도 수류탄을 던졌어. 일본 황궁에도 던진다지. 가상하지만 거기까지다. 두 번의 수류탄 공격 이후에는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없어. 

그 정도였다. 그러니 일제에게는 그만큼 눈에 가시거리가 없었고 독립군에게는 사기를 높여주는 단비와 같은 존재가 이들 부부였다. 특히 여성 독립군은 그 가치가 현저히 높았다. 부녀자를 상대로 군사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아녀자라서 검문검색을 피하는데도 용이했고 일본 영사관의 정보를 빼내는데 여러번 성공했다. 더구나 군자금의 상당 부분이 이 여성의 부모에게서 나왔으니 완용의 분노는 알만하다. 이번에는 놓쳤으나 반드시 조만간 다시 경성에 들어온다. 어딘가 쥐새끼처럼 숨어서 나올까 말까 기회를 보겠지. 나오든 안 나오든 고양이 발톱으로 잡아주마. 그건 그렇고. 보따리를 받았으나 보따리 안에 든 물건이 돈이 아니라 헌 옷가지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하하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안절부절못할 때 이 편지는 바로 너를 낚아채는 좋은 미끼가 될 것이다. 나에게로 직접 오면 좋고. 그게 싫으면 네 남편과 손잡고 오던지. 아니면 지난 번처럼 휴의와 동행하거나. 난 말이야. 이 여자야, 한 번 속지 두 번은 속지 않는다. 완용은 벌써 잡아 들인 듯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한편 마적 중국인은 중국국민당 소속으로 위장해 어렵지 않게 임정과 접촉했고 상하이의 한 다방에서 여성 독립군을 만났다. 그는 말 대신 편지를 보여줬고 틀림없는 아버지 글자체를 확인했다. 글자체뿐만 아니라 내용도 아버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그런 내용이었기에 여성 독립군은 다시 조선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서방이라니. 이서방이 동행한다고 했으니 틀림없어. 가야지, 지체 말고 가야지. 임무 완수에 실패한 책임감 때문에 괴로웠던 그녀는 이번에는 단신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임정의 뜻이기도 했다. 신분이 노출된 휴의는 배제됐다. 아니 휴의는 가짜 보따리 사건 이후 경성에 남아 있었다. 그 무렵 여성 독립군 남편은 임정과 끈이 닿지 않았다. 그는 어디선가 게릴라 전술을 익히고 있을 것이다. 여성 독립군 조차 남편의 위치를 파악하기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경성에서 휴의와 접선했을때 혹시 내가 잘못되면 이 편지를 남편에게 전해 주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마적은 편지를 전하면서 남편과 함께 가면 좋지 않겠느냐고 남편은 어디 있느냐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지나가는 말로 물었으나 여성 독립군의 남편은 부재중이라는 말을 하면서 혼자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중국인 마적은 어쩔 수 없었다. 더 물었다가는 편지의 진위마저 의심을 살 만했기 때문에 거기서 물러났다. 경성한 도착한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휴의를 만나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휴의는 이것은. 유언장 입니다. 아니, 왜요. 왜요는 불필요한 반문이었다. 왜요는 왜놈 이부자리고요. 여성 독립군이 농담을 했다. 웃지 않고 휴의가 담담하게 그 말을 들었다. 듣고 나서 휴의는 당신은 하늘이 돕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상하이에서 뵈야지요. 부군도 보고 싶어요. 그 날 말도 없이 헤어진 걸 사과도 하고 동지애를 한 번 더 느껴야지요. 그런 기회가 오면 좋겠어요. 제가 김치전을 해드릴게요. 두 분이서 막걸리 한 잔 나누시지요. 접선은. 이번에는 저 혼자 합니다. 염려 마세요. 그런 눈으로 보면 제가 마음이 약해지거든요. 알았어요. 그럼 여기서 헤어질까요. 그러시지요. 참, 인상동에는 자주 갑니까. 휴의는 뜨끔했다. 손발 다 끊었습니다. 잘했다고 아니면 왜 그랬느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남녀 간의 사랑에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다만 그것 때문에 일이 헝크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휴의와 헤어진 여성독립군은 연막작전을 쓰지 않았다. 그것이 빠른 길이었고 확실한 길이었다. 지난 번 처럼 이리저리 돌면 되레 순찰 형사의 눈에 띌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바로 만남의 장소로 이동했다. 종각에는 오가는 인파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믿을 만한 사람과 동행하지 않았으나 마음은 편했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종각의 한옥식 건물 주변에서 약간 서성였다. 손목을 보면서 약속한 사람처럼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서방은 어릴 적부터 봐 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알 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보였다. 하인 복장을 하고 등을 보이고 있는데 구부정한 것이 얼핏 보니 이 서방인가 싶었다. 그녀는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서방. 저쪽에서 발을 멈췄다가 다시 이쪽으로 서너 걸음 왔다.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이서방이 아니었다. 이서방은 급체로 앓아 누워 있고 자신이 대신 왔다면서 허리에 멘 복대를 끌러 여성에게 전달했다. 들어보니 묵직했다. 상당한 금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준비해온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는요. 잘 있어요. 그는 여성 독립군의 눈을 피하면서 서툴게 말했다. 안부를 전해 주시오. 저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요. 네, 아씨. 그는 기어 가는 말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급하게 헤어졌다. 여성 독립군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바로 경성역으로 가는 마차를 잡았다. 그러나 그녀가 마차에 오르기도 전에 고바야시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종로서 고바야시였다. 아뿔싸. 들켰다. 이를 어째. 도망치나. 여러 생각이 여성독립군을 어지럽혔다. 지금까지 행적을 지켜보던 고바야시가 그녀 말고 다른 용의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불러 세웠다. 아가씨, 물건을 떨어트렸어요. 이것이 아가씨 것이 맞지요. 그는 손에 양산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 앞으로 갔다. 네 것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여성 독립군 주위로 서 너 명의 사복 형사가 다가왔다. 일이 글렀다. 한 곳에 2,3 시간 머물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대비했는데. 이서방 대신 그가 왔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실수야. 통한의 실수.

종로서 완용의 소리가 들린다.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 네, 이년 너를 잡지 못해 안달한 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그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 그러나 우리 대일본 제국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아. 그래서 너를 체포해 종로서로 데려간다. 묵비권 같은 건 없다. 대신 면회는 시켜주마. 휴의가 온다면. 그러니 얌전히 있어라. 발광하지 말고. 여성 독립군은 절망했다. 완용의 뒤로 서너 명의 사복 경찰이 서너 걸음 조여왔다. 피할 수 없다. 그물에 든 고기. 짧은 순간 그녀는 결정해야 했다. 끌려가는 것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장할 뿐이었다. 비참한 죽음을 택하느니 여기서 결판내야 한다. 고문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남편은 늘 말했다. 잡히면 죽어야 해. 나도 마찬가지고. 일제는 고문을 하고 고문을 해서 알아내면 반드시 죽여. 살 길이 없어. 그러니 우리 둘은 언제나 작별을 생각해야 해. 남편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렇게 해 어서. 손에 수갑이 채워지면 죽을 수도 없어.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다는 거 알지. 망설이지 마. 우물쭈물하다가는 그렇게 되고 마는 거야. 여성독립군은 결단을 내렸다. 손에 든 가방을 다가오는 완용에게 냅다 던졌다. 완용은 얼굴에 그것을 맞고 잠시 틈을 보였다. 그 사이에 여성 독립군은 가슴속에서 권총을 꺼내 완용을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 완용은 피했으나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여성독립군은 순간 번개처럼 반대쪽으로 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완용의 부하들과 독립군과의 거리는 십 여 미터로 벌어졌다. 여성 독립군은 그 순간 남아 있는 권총 총알의 갯수를 생각했다. 그녀는 연달아 세 발을 더 발사했다. 두 발이 다가오는 형사의 가슴에 명중했다. 이제 남은 발이 몇 발인지 그녀는 셀 수가 없었다. 그녀는 권총을 상대가 아닌 자신의 머리를 겨냥했다. 전신주의 까마귀가 하늘을 날았다. 지나던 행인들이 몸을 숨기면서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손틀 틈이 없었다. 휴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마세요. 내가 도와 줄게요. 지난번에는 당신인 날 도왔어요. 이번에는 내가 할게요. 휴의는 가방에서 총신이 짧은 기관총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겨눈 자들을 향해 난사했다. 쓰러져서 겨우 몸을 추스리던 완용은 갑자기 등장한 기관총에 당황했다. 어디로 조준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사이 휴의는 여성독립군쪽으로 급하게 다가갔다. 

이쯤해서 성당의 지하실에 있는 말수와 여순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지하실은 어디나 어둡다. 성당의 지하도 마찬가지다. 그곳에 촛불 하나가 꺼질락 말락 불빛을 밝히고 있다. 산소가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일층으로 가는 계단을 열수는 없다. 누군가 들이닥치면 꼼짝없이 죽는다. 최대한 여기서 버티자. 그러기로 말수와 여순은 작정을 했다.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립시다.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게 언제일까요. 내 짐작으로는 아마도 곧. 곧. 일주일. 그 정도보다는 길거요. 아무리 길어도 한달은 아니겠죠. 그랬으면 좋겠어요. 가미카제가 연달아 군함으로 돌진했어요. 그건 뭐겠어요. 밀리고 있다는 증거지요. 미군의 해군력이 일본을 파괴하고 있어요. 사이판은 미군손에 들어갈거요. 이제는 제법 전황을 읽네. 비꼬지 말아요. 그런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필리핀도 넘어갔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참읍시다. 여순은 그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순은 말수의 말에 위안을 받았다. 무슨 말이든 믿음이 갔다. 어둠이 한 몫했다. 대낮처럼 밝았다면 혼란이 왔을지 모른다. 이제 끝났다. 당분간 죽음의 공포는 없다. 부서진 성당에 포격을 가할 만큼 미군이든 일본군이든 포탄이 흔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여기는 안전지대다. 불쾌한 기분이 숨통을 조여왔던 공포가 점차 사라졌다. 환희.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던 죽음이 멀리 떨어져 나갔다. 우린 다시 산거야. 우리 떠어지지 맙시다. 그래요. 혼자 있을 때는 늘 죽음어른 거려요. 그런데 같이 있으면 살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니 그래야 겠지요. 안도감. 편안함. 끝없는 휴식.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계속 잘 수 있다. 자고 깨고 또 잤다. 여기저기 긁히고 생채기난 상처에 딱지가 지기 시작했다. 붕대를 푼 여순은 특히 팔뚝부근이 가려웠다. 긁으면 안돼. 알고 있어요. 항생제로 거의 바닥이야. 덧나면 어려워. 나도 안다고요. 그러나 긁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손이 딱지 쪽으로 갔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에 여순이 신경이 곤두섰다. 팔뚝에서 시작한 가려움은 어깨를 타고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다리를 긁다가 긁은 손으로 다른 손을 긁었는데 아무리 긁어도 좀처럼 시원해 지지 않았다. 그러면 묶어 놓을거야. 박박 긁는 소리를 듣고 말수가 짜증섞인 소리로 한마디 했다. 열손가락이 모자라겠어. 그래요. 제가 한 번 더 긁으면 스스로 묶어야겠어요. 

긁는 걸 포기하지 참을 수 없어 여순은 꿈틀거렸다. 몸을 비비 꼬았다. 세상에나, 이처럼 가려울 수 있을까. 가려움증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아예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에게 속한 것은 모두 가려웠다. 얼굴만 빼고는 정말 신기하게도 몸의 모든 곳이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징조가 아니었다. 살았다는 삶의 기운이 보내는 신호였다. 그래서 여순은 말수몰래 소리나기 않게 조심해서 긁었다. 손에 피가 묻어나서 비릿한 냄새를 났다. 그러나 총상이나 파편의 부상과 같은 그런 죽음의 냄새는 아니었다. 여순은 손톱밑에 깔린 피의 냄새에서 삶의 충동을 느꼈다. 살자구요. 긁는 것도 다 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알아 보실게요. 이런 식으로 말수가 용기를 보탰다. 가려운 것 말고는 다 좋았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사그러들었다. 다 때가 있어. 가려울 때가 있고 긁을 때가 있고. 이제 기력이 나.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이 기분 뭐라고 표현할까. 나도 달리고 싶어. 비가 오면 좋겠어. 빗속을 달리는 거야. 달리기에 내기가 빠지면 섭섭하지. 업어주기. 싫어. 그럼. 노래 불러주기. 나쁠 것 없지. 대신 신청곡이야. 오케이. 이런 식의 대화. 그 와중에도 말수는 여순의 기력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의 신경은 온통 여순이 기력을 찾는데 소진했다. 어린애처럼 달래고 얼렀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여긴 안전해. 가려움도 일종의 심리적인 거야. 무언가에 쫓기면 그럴수 있거든. 의학서적에 나온 내용인가요. 그런 내용은 읽어 보지 못했어. 하지만 임상에서 알거든. 내가 논문을 쓰면 박사학위는 그냥 나올게 된다니까. 다친 병사들이 긁잖아. 왼쪽 다리가 없는 환자가 그쪽이 가렵다고 자꾸 손을 가져가서 긁어대. 뭐겠어. 마음을 잘 다스려. 그래야해. 가려우면 맘껏 긁어. 피가 나면 좀 나을 거야. 더 세게 긁어도 좋아. 덫나면 어때. 살아 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해주니 좋았다. 그는 거친 말수에서 다정한 말수가 되었다. 변신한 성공한 그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그 말을 여순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피가 나니 좀 나은 듯 했다. 피묻은 손을 여순은 코 끝으로 가져갔다. 냄새를 맡기보다는 이번에는 코가 가려웠기 때문이다. 코를 긁다가 여순은 이러다가 얼굴까지 긁게 생겼다면서 긁는 것을 포기했다. 얼굴은 그럴 수 없다. 상처가 나면 곰보처럼 얽을 것이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어. 

여순이 큰 용기를 내 긁는 것을 체념하자 말수가 바스락 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찾던 것을 찾았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여순은 어둠속에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상상했다. 잠시후 차가운 것이, 차가우면서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병의 주둥이였다. 달짝 지근한 냄새가 올라왔다. 피비린내와는 사뭇 달랐다. 부패로 썩어 가는 것이 아닌 막 피어나기 위한 봄의 새싹 같은 것이 코를 간질였다. 보리새싹인가. 갑자기 여순은 봄보리 새싹을 가지고 놀던 때를 기억해 냈다. 그래, 그것은 가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간질이는 거고 그 다음에는 웃음이 터졌어. 여순이 병의 주동이에 입을 대고 벌렸다. 말수가 제대로 된 것으냐고 물었고 여순은 주둥이를 입에 댄채 음음 거렸다. 그 바람에 포도주 한모금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말수가 병의 뒷부분을 잡아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더 많은 양의 포도주가 여순의 입을 타고 목젓을 타고 위장을 타고 종아리를 타고 발바닥에 닿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광야에 쓰러진 선지자의 입에 들어간 바로 그 생명수였다.

꿀꺽 꿀꺽소리가 났다. 제소리에 놀란 여순은 이제 제대로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말수는 한 모금 더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여순의 목을 받쳐 들었다. 급하게 말고 편하게 먹어. 먹다 체하면 약도 없다. 말수는 이런 농담을 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양이 목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순간은 짤라였으나 길고 긴 폭포수가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아늑하고 느렸다. 여순은 이제 자신이 병을 잡아 들었다. 뺏듯이 그렇게 한 것은 남은 것을 한꺼번에 마저 먹기 위해서였다. 말수는 말리지 않았다. 자신도 깨어나서 한 일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말수도 정신을 차렸다. 여순도 그런 과정을 밟고 있었다. 가려움은 잊었다. 사라진 것인지 어디 숨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포도주의 달콤함 만이 여순을 지배했다. 목을 타고 내려간 물줄기는 갈라진 논을 금세 흠뻑 적셨다. 말랐던 모들이 그 순간 푸른 잎을 달고 위로 곤추섰다.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그 과정은 빨랐다. 그와 동시에 여순이 등뼈를 세웠다. 모든 것은 명확해졌다. 이곳은 포격으로 무너진 성당의 지하실이었구나. 삼 일은 지났을 거야. 잘도 자더군. 다른 누구도 아닌 말수의 목소리였다. 어쩜 그렇게 자니. 어떤 때는 죽은 줄 알고 코에 손을 댄 적이 있어. 숨결이 느껴지면서 안도를 거듭했지. 난 네가 깨어날 때까지 깨우지 않기로 했어. 그래야 푹 잘 수 있거든. 나 잘했지. 말수가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의 목소리로 말했다. 

지하실은 완벽한 피신처였다. 건물은 부서져 폐허가 됐다. 그곳을 빠져 나가려던 시체는 계단에서, 창가에서 그대로 거꾸러져 있었다. 부패한 시신의 흔적이 간혹 갈라진 틈으로 들어왔으나 촛농이 그것을 해결했다. 초가 타는 냄새는 좋았다. 시체 썩는 냄새를 말끔히 지우고도 남았다. 초는 많아. 성당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신부님이 우릴 위해 미리 준비해뒀나. 이것봐. 안 보여. 맞아 보이지 않지. 당신이 자는 동안 내가 지하실의 물건들을 다 알아봤어. 서너 박스도 넘어. 이 초를 다 태우려면 일 년도 더 걸릴거야. 안심이네요. 생각해봐. 가정을 해보자고. 촛불이 없는 깜깜한 지하실. 거기에 사람이 썩어가는 냄새까지. 총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슴을 관통당해 죽을거야. 죽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너를 볼 수 없고. 나도 당신을 볼 수 없고. 흐릿한 형상도 구분 못하면 무슨 재미로 살아. 그래도 산다고 쳐. 냄새는 어쩔건데. 촛농이 아니라면 우리는 냄새 때문에 죽을 거야. 안 그래.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우린 자다가 죽었을 거야. 여순이 응수했다. 포도주는. 어 이것도 산더미 처럼 쌓여 있어. 그런데 어떤 게 좋은 건지 알 수 가 없어. 상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좋은 게 걸렸으면 하지. 어때. 아까 먹은 건. 좋았어요. 술맛은 모르지만 꿀맛은 알거든요. 식량은. 그게 걱정이야. 감자와 통조림, 말린 고기를 찾았는데 양이 적어. 그거라면 괜찮아요. 제가 식성이 없는 것 아시지요. 말린 고기 하나로 하루를 버틸 수 있어요. 몸매 관리도 되고요. 난 마른 건 싫어. 전 살찐 여자가 싫어요. 허허. 그래, 웃자고. 

적들은 혹은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는 더는 성당을 폭격하지 않았다. 시체위에 포탄을 쏟아 부을 이유가 양쪽에게 없었다. 공격지점에서 성당은 지워졌다. 너무 비참해서 인지 군인들도 그곳을 외면했다. 그래야 된다고 믿었다. 도로가를 따라 양쪽으로 행군하던 군인들은 기습공격을 받아도 그곳으로 피신하려고 하지 않았다. 성당 주변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엎드리면 바로 앞에 눈을 뜬 시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눈이 없는 시체는 백골이 된 상태였다. 아직 살점이 붙은 곳에는 개들이 달라붙었다. 저런 곳으로 피신하느니 차라리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적에게 달려가는 것이 나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역겨웠다. 그래서 적이든 아군이든 성당 주변을 차지하고도 그 쪽으로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심지어 오줌도 싸지 않았다. 총격이 와도 그쪽으로는 엎드리지 않았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포기할 만큼 성당 주변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버려진 곳에서 생명이 꿈틀거렸다. 그곳 지하에는 바깥에서 산소가 들락거렸다. 비록 말수가 막아놨지만 일 층으로 오르는 통로 사이로 작은 틈이 생겼고 바람은 그곳을 통해 지하로 내려왔다. 말수는 본능적으로 계단을 찾았고 그곳에 쌓인 잔해들을 치우고 안전 통로도 확보했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공기 통로만 남겨둔채 다시 매웠다. 이제 성당의 지하는 그들의 안식처가 됐다. 다른 사람에게는 지옥인 곳이 두 사람에게는 천국이었던 셈이다. 어, 참 이건 내가 말 한했지. 뭐요. 목욕할 수 있는 목욕탕이 있다는 뭐 그런 거요. 아니면 지하 어딘가에 온천수가 솟아난다는 뭐 그런 거요. 틀렸어. 하지만 온천 만큼이나 빅소식이 있어. 바로 전투식량. 피. 난 먹는 거에는 관심이 없어요. 생존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다행이야. 나의 식탐을 닮지 않아서. 

누구도 살지 못하는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멀쩡했다. 다 죽었는데 살았다는 안도감이 두려움을 저 멀리 밀어냈다. 말수는 이 곳에서라면 일년도 너끈히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섣부른 행동을 자제했다. 밖으로 나가 동굴에 숨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벗어나면 죽고 가만히 있으면 산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여길 떠나면 죽어, 죽은 목숨이라고. 말수는 포도주로 속에서 불이 나고 있는 여순을 다독였다. 정신이 들자마자 술에 취한 꼴을 어찌 설명할까. 물 좀 줘. 말수는 움직이지 않고 손만 뻗어 그것을 대령했다. 어둠 속에서도 물과 술과 음식이 어디 있는지 말수는 한 번도 실수 하지 않았다. 자기 주변에 그것을 배치해 놓고 수시로 손을 뻗었다. 물은 포도주와 달랐다. 그것은 아래로 내려갈 때 편안했다. 깡통 따는 소리가 들렸다. 한 입만 먹어. 한꺼번에 배부르면 죽거든. 한동안 잊었던 죽는다는 말에 여순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래 죽음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순은 알았기에 죽음의 소리는 그녀에게 살아야 겠다는 강한 용기를 주었다. 여기서 한 발작도 안 나가. 등 떠밀어도 그럴거야.  여순이 말했다.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절대로. 말수가 받았다. 그런데 물은. 묻지마. 먹어도 안 죽는 거야. 입맛이 썼다. 물이라고 생각했을때는 몰랐는데 먹고나니 이상한 냄새가 올라왔다. 여순은 묻지 않았다. 그게 뭐냐고. 대신 그녀는 생각했다. 난파선의 선원이 자신의 소변을 먹으면서 한 달 이상을 살았다. 물 대신 소변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바닷물을 먹으면 죽는다. 언젠가 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잘 먹었어. 생각하기 나름이지. 해골물을 먹고 아침에 토하지는 않을 거야. 난 벌써 도가 텄거든. 

여기서 꼼짝 말자는 두 사람의 생각에 다른 이견이 없었다. 전쟁은 오래지 않아 끝난다. 말수는 직감으로 그걸 알았다. 끝날 수 밖에 없다. 오래 끌었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끝나면 그 때 나가자. 오케이. 여순이 대꾸했다. 그러고 나서 여순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말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내 과거를 말해줄까. 네 과거말고 내 과거. 과거. 과거라니. 여순은 가만히 있었다. 내가 어떤 놈이었는지 알고 싶지. 그렇지. 말수는 여순에게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통영 뱃놈의 생활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뱃놈 생활이 뻔하지 뭐. 그게 그거 아냐. 이번에는 달라. 처음 듣는 소릴 거야. 그렇다고 놀라지는 마. 그냥, 네게 고백하고 싶어. 고해성사라고나 할까. 지금 말하지 않으면 평생 못할 수도 있을까봐 걱정이 되거든. 무슨 거창한 이야기라도 숨은 거야. 이렇게 뜸을 들여. 그냥 해. 기력을 찾은 여순도 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 말을 해야 겠다고 결심한지 모르겠어.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걸까. 왠지 그래야할 느낌이야. 고향이라면 난 지긋지긋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어. 모르겠어.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하지만 난 해야 돼. 통영 뱃놈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여순은 또 그 소리라면 이젠 질색이야. 하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또 그 소리라고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매번 다른 이야기로 그녀를 자극했다. 말수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 줄때 처럼 편했다. 그가 들려주는 뱃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 마치 천국의 세상이, 하늘이 아닌 바다에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늘 노래부터 먼저 불렀다. 그 노래 소리는 구성졌다. 그럴 수 밖에. 먼저 간 넋들을 위로하는 노래니. 뱃사람들만이 아는 노래. 그들은 먼저 갔어. 위로의 노래를 불러 주는 자에게 남은 삶까지 살게 해달라는. 용왕님께 비는 대목에 이르면 말수는 어깨를 들썩였다. 노래는 갸날프고 힘이 셌다. 그때는 신성한 그 무엇이 말수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는 진지했고 담담했으며 의욕이 넘쳐 흘렀다. 노래가 끝나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통영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상당의 사제를 찾아 고해성사를 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다. 교황청의 교황보다도 이름을 날렸다.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십자가가 보이는 언덕에서부터 무릎을 꿇었다. 막 스물살을 먹었다. 우스웠다. 그의 입에서 하느님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한 번 부르기 시작하자 그 하나님을 여러 번 불러제꼈다. 마치 뱃노래 부르듯이. 그는 거듭되는 하나님의 외침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자신의 치부를 들추어 냈다. 그러나 하나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이것이 하느님 덕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수가 하도 하나님을 외치자 처음 들어보는 무시무시한 고해성사의 공포에서도 사제는 모두 용서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 했다. 하나님과 용서. 누가 더 이 말을 많이 하느냐 경주하는 것처럼 좁은 고해성사실은 단 두 마디말만이 번갈아 터져나왔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살인자의 고백치고는 너무나 거침이 없었다. 이렇게 쉽게 말이 나와도 되는 걸까. 사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고해가 끝나면 바로 순사를 찾아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얼마전에 지서에서 들이닥쳐 이상한 사람을 보면 신고해 달라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신부님, 성당이 살인자의 피난처가 돼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바로 신고하세요. 말은 부탁이었으나 협박이었다. 뒤탈은 책임 못집니다. 신고하지 않아 생긴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인자를 만났으니 사제의 번민은 살인고백을 하는 청년보다 더 복잡하고 심란했다. 말수는 말을 이었다. 한 번은 과실치사였다. 통영에서 배를 탈 때부터 파도가 심했다. 급히 회항할때 항구를 바로 앞에 두고 배가 침몰 위기에 몰렸다. 선장은 사색이 됐고 선원들은 공포에 질렸다. 배는 제어 할 수 없었다. 돛은 부서졌고 옆구리에서 물이 들이찼다. 배는 곧 침몰한다. 이곳은 물살이 세고 수심이 깊다. 선원들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 바다에서 빠져서 살아온 사람은 없다는 것도. 죽음의 순간 앞에서 선원들은 이성을 잃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평소 불만이 많았던 선장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어했다. 기왕이렇게 된 거 복수라도 하자는 심산이었다. 가만히 나둬도 죽을 목숨이지만 그동안 사무친 원한을 그런식으로 풀고 싶어했다. 말수라고 다를리 없었다. 종보다도 더 심한 학대를 당하고도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의 분노가 더 심했다.

그러나 그는 그물을 자르던 예리한 낫으로 선장의 뒤를 치려던 선원을 밀쳤다. 그런 식으로 사적 보복을 하기 전에 우선 배를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쩌면 살릴지도 몰라. 우리 모두 무사히 집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말수는 버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런 때는 선장이 있어야 했다. 그라면 가라 앉는 배를 구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사탕을 본 울던 아이처럼 바람이 뚝 그치는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살인은 아직 일렀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배가 뒤집어 지기 직전에도 기회는 있다. 말수는 그런 판단을 했고 그 순간이 오면 자신이 먼저 낫을 들리라고 다짐했다. 배는 더 심하게 요동쳤다. 선장도 배를 포기했다. 기적은 오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이루어 질 수 없다. 구멍뚫린 하늘은 양동이로 들이 붓듯이 비가 쏟아냈고 파도는 더 거셌으며 그로 인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마을의 불빛마저 사라져버렸다. 멀찍이서 손을 까부는 것이 엄마의 손인지 낫을 든 자신의 손인지 말수는 알지 못했다. 말수는 눈을 비볐다. 빗물이 자꾸 눈 앞을 가렸다. 그래서 낫을 든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연신 빗물을 닦아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죽더라도 죽여야 한다.

선장을 살린 것은 그가 살아야 할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할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말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부터 살고보자. 내가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손에 있는 낫을 누군가가 빼앗았다. 낫을 빼앗긴 말수는 선장을 향해 달려드는 선원을 밀쳤고 그 바람에 바닥에 쓰러진 달려들던 그는 죽어야 할 대상이 선장에서 자신으로 바뀌었음을 눈치챌 무렵 저승길로 떠났다. 한 손에 쥔 낫을 겨누면서 다가오던 선원은 말수가 밀치던 그 순간 더 큰 파도가 치는 바람에 뒤로 나가떨어졌고 하필 뒷머리가 어망의 뾰족한 곳에 박혀버렸던 것이다. 그가 지르는 비명과 눈을 뚫고 나온 쇠붙이에 붙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나가는 것을 말수는 빗물 사이로 설핏 보았다. 선장은 자신을 구한 것이 말수인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왔던 자가 말수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살려 주세요. 저는 선장대신 선원을 죽였어요. 용서를 구하는 말수의 목소리는 떨렸다. 신부님은 용서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다 용서하십니다. 살인자도 용서합니다. 그보다 심한 죄를 지은 자도 용서하시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안심하세요. 형제여.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니 살인자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세요. 이제부터 당신은 살인자가 아닙니다. 말수는 사제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살인자가 아니라면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그것은 성당과 성당에 속한 사제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었다. 잠시 한 숨을 내순 말수는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살인에 대해 말을 할 때 신부는 그가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였는지 요지만 말해주기를 바랐다.첫 번째 살인에 관한 사설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신부는 이번에도 그런 길이로 한다면 피곤한 몸이 견디기 어려울 것으로 짐작했다. 그래서 두번째 살이요? 하고 놀란 표정을 짓고는 바로 빨리 끝냅시다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살인고백이 말처럼 쉬울 수는 없다. 신부야 귀찮은 일일지 모르지만 말수에게 그것은 일생의 모험이다. 누구 앞에 결코 꺼낸 적이 없다. 나의 살인에 대한 두번째 추억을 말하는 것은 첫번째보다 더 괴롭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성당을 찾은 것이다. 괴로움을 무릎쓰고 어렵게 온 것인데 신부는 그것을 받을 준비가 덜 됐다. 아니면 첫번째 살인고백의 충격을 받았거나. 거기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했나. 빨리 끝냅시다라는 말로 봐서는 그런 걱정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귀찮은 일로 볼 수 있었다. 말수는 신부의 기분을 들어줄 만큼 마음이 평화롭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리는 일도 벅찼다. 그러면서도 가능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하고 싶어 머리를 썼다. 아무리 신부라고 해도 그도 인간인 이상 허점이 있을 수 있다. 말수가 뜸을 들이며 시간을 지체하자 커튼 너머의 신부가 헛기침을 해댔다. 말수는 시간을 끌 수 없어 시작했다. 이 고백이 적어도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보장해 줄 것이다. 법으로 하지 못하는 일은신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잘 나가던 말수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신부님, 오늘은 더는 못하겠어요. 신부는 자신의 말을 곧 후회했다. 너무 재촉했나. 여기서 멈추면 죽도 밥도 아니다. 어떤 살인인지 궁금했던 신부는 말수를 다독였다. 심호흡 한번 하세요. 형제님. 그런 일은 누구나 바로 말하기 어려워요. 시작했다고 해도 멈추기 일쑤지요. 그러니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요. 재촉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느긋하게 하라고. 말수는 신부의 말이 다른 것을 알았으나 그걸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신부가 수그리고 나오자 말수는 덜컥 수락할 뻔 했다. 이렇게 마음이 여린 말수가 살인이라니. 그래서요. 아 그래서 내가 그만. 말수는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이어가려다 얼른 주워담았다. 늦었어요. 경성에 가야 하거든요. 전주에서 경성이 얼마나 먼지 신부님도 아시지요. 진동성당 주임신부는 경성이라는 말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했다. 여기서 자고 내일 일찍 출발하시지요. 형제님. 이렇게 말 할 수는 없었다. 살인자와 그것도 두번째 살인에 대해 말하려는 형제님을 재울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신부님.재워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저쪽 경기전 잔디밭에서 자면 됩니다. 이런 까다로운 자는 처음인걸. 어쩌다 이런 게 내게 걸렸지. 신부는 불만이었으나 살인고백의 고해성사는 처음인지라 더 받고 싶었다. 더구나 나는 고해성사 받는 걸 좋아해. 은밀한 비밀을 알고 나면 힘이 솟거든. 발설하고 싶어 미칠지경이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고 그럴 수 없을 때는 내일이 아닌 것처럼 하면서 말해 버리지 뭐. 더구나 이같은 뜨내기가 다시 성당에 올리도 없고. 정기적으로 오는 신도들이라면 신중해야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사자는 알거든. 이제 식상하다 싶었는데 잘 온 거야. 신도들 비밀은 다 알고 있어. 두 어차례씩 고해성사를 시켰거든. 고해성사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형제 자매여. 고해를 통해 거듭납시다. 하나님 곁으로 다가갑시다. 신부는 신도를 만나면 늘 이런식으로 어둡고 침침한 커튼 안으로 신도들을 불러들였다. 신도들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신도의 일가 친척들까지 끌어모았다. 그런 소문을 경성으로 가던 말수가 머물던 전주에서 듣게 된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내 안의 허물을 벗어버리자. 그래야 새롭게 살 수 있어. 신부라면 믿을 수 있겠지. 이렇게 해서 첫번째 살인고백이 진행된 것이다. 두번째는 길어요. 밤은 깊어가는데 신부님 괜찮겠어요. 말수가 못이기는 척 이야기 했다. 이 녀석 말솜씨도 제법이야. 졸리긴 하지만 들어야겠어. 오늘 놓치면 영영 후회할 거야. 잠이야 내일 자면 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오늘 못잔것 보충하지 뭐. 그래서 신부는 형제여, 너의 고통을 털어 놓으세요.하고 말했고 말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는지 죽다 살아난 선장이 혼심을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는지 배는 침몰하지 않고 묻에 닿았다. 선원들이 정신없이 배에서 내리고 나서야 배는 제 스스로 부서졌다. 그제서야 말수는 자신이 선장을 죽일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구사일생으로 배에서 살아난 말수는 그 이후로 더는 배를 탈 수가 없었다. 선장은 무슨 용쓰는 재주가 있는지 금새 새로운 배를 장만했고 말수에게 다시 자기 배로 올 것을 요구했으나 말수는 거절했다. 살아 남았던 나머지 선원들은 선장이 불러주자 다시 배에 올랐다. 죽은 자만 불쌍했다. 말수는 미안했다. 그를 죽여서 선장을 살린 것에 대한 자책이 심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유지 행세를 하는 선장은 감히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말수에게 분풀이를 했다. 이래도 내 놈이 내 말을 거역해, 하는 심사였다. 앙심을 품은 선장은 말수네가 하던 소작을 억지로 빼았았다. 소작이 없다면 말수네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을 판이다. 이판사판 심정으로 쫓기다시피 전주의 먼 친구집으로 야밤 도주한 말수는 그러기 전날 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정도로 풀 베던 낫을 여러 번 갈았다.

낫보다 숫돌이 더 반질거릴 정도가 돼서야 말수는 엄지의 안쪽으로 갈린 낫의 상태를 확인했다. 벼린 날이 제대로 서 있었다. 피부를 찌르는 감각이 예민했다. 그때만 해도 말수는 선장을 정말로 죽여야 할 지 망설였다. 죽인다고 생각했다고 다 행동에 옮기면 세상에 남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다만 아직 받지 못한 선원 품값을 받으려고 했다. 선선히 돈을 주면 그대로 갈거야. 그대로 가겠다는 말과 함께 떠오른 생각은 그렇지 않다면 이 낫으로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말수의 눈이 번쩍 하고 번개처럼 빛난 것은 이 낫으로 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였다. 여러 달 밀린 품삵도 주고 소작도 전처럼 하게 해줘유. 이렇게 점잖게 말수가 나왔을 때 선장은 그 말을 따랐어야 했다. 나는 이곳을 떠나요. 이제 나를 볼 일은 없을 게구먼요. 그러니 목숨을 걸고 뱃삵을 주고 우리 늙은 부모 목숨값으로 소작일을 계속허게 해주시우. 그러면 고히 가겠시우. 미리 여러번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되풀이 한 말수는 새벽녘, 선장이 자고 있는 집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낫을 목에 들이댔다. 옆에서 자고 있던 부인이 깨서는 사태를 확인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얼마나 공포가 심했던지 말조차 하지 못하고 전신 마비 환자처럼 무의식적으로 몸만 꿈틀댔다. 부인을 봐서도 차마 낫질을 할 수 없었다. 말수는 망설였다. 그러나 선장은 목숨을 재촉했다. 밀린 삵이 내게 있다고. 네 놈이 나한테 줄게 있겠지. 그리고 뭐, 소작농을 하겠다고. 네 아비는 게을러 터졌다. 다른 사람 주면 곱절은 수확인 나온다. 내가 넉같은 바보냐 이 놈아. 태어나서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는 그는 되레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말수를 겁박했다. 내가 이놈이 굶어 죽게 생긴 걸 살려죽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꼴이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선장이 되레 큰 소리를 질렀다. 

참을성 있는 말수는 그 말에도 겨누고 있던 낫을 바로 선장의 목 쪽으로 찔러 넣지 않았다.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은 말수의 그런 침착함 때문이 아니었다. 선장 부인이 그때 말을 했던 것이다. 어서 저놈을 죽여요. 낫을 뺏어 저 놈을 쳐 죽이라고요. 저 쌍놈을요. 말수는 어이가 없어 부인을 쳐다봤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부인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쌍놈이 에게 대든다. 어서 죽여요. 여보. 말수는 지체하지 않았다. 무식쟁이가 기역자 낫을 휘둘렀다. 그게 두 번째 살인이오. 설마 세번째는 아니겠지요. 헉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신부가 물었다. 두번째는 이미 들었으니 세번째가 있다면 어서 들려 다라는 성화였다. 말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흑, 말수는 흐느꼈다. 검은 장막뒤의 신부는 거의 까무라칠뻔 했다. 낫이 선장의 목을 벴던 그 낫이 자신의 목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목을 부여잡고 이런 식의 고해성사는 처음이라 식은땀을 흘렸다. 이 자를 바로 신고해야 할 지 신부를 머리를 굴렸다. 자꾸 굴리고 있을 때 말수는 소리 없이 성당을 떠나고 있었다. 넔을 잃은 신부가 너무 조용해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커튼 사이의 쪽문을 밀었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순이 말수의 어깨를 잡았다. 신부처럼 떨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인 말수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여순은 그 등을 쓰다듬었다. 

사람을 둘씩이나 죽인 말수의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정처 없이 여기 저기를 떠돌던 다음 날 그는 조선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일본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전갈이 성당 근처의 시장통에서 떠돌았다. 말수는 익숙한 배에 몸을 실었다. 기억나요. 갑판에서 시끄럽게 굴었죠. 하지만 그런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 네, 사람을 죽이는 그런 사람요. 신부님이 다 용서했다. 그래 난 죄가 없어. 살인을 했으나 살인하지 않은 사람 처럼 깨끗하다고. 그래요. 선원도, 선장도 선장부인도 용서했을까요. 그것까지는 몰라. 죽은 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좀 무서워요. 어둠 속에서 여순이 말했다. 왜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해요. 그렇잖아도 가슴 떨리는데. 지금이 그때야. 이런 때 해야 쉽게 말문이 뜨여. 이런 이야기를 이런 곳 말고 대명천지 어디에서 할까. 하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하네. 신부님은 용서한 것 맞나요. 진짜로 용서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라고 신부가 있잖아. 그렇군요. 아, 정말 성당은 꼭 필요해요. 당신도 용서해 주고 우리 목숨도 살려주고. 하지만 말수는 전주에서 했던 고해성사보다 이곳 성당 지하실에서 여순에게 하는 고백이마음이 더 편했다. 신부는 말로는 용서한다고 했으나 그러지 않은 것 같았어. 다음날 눈 뜨고 나면 바로 지서로 달려 갔을 거야.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랬을 거 같아. 그랬더라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도 너에게 고백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고백했으니까 됐어요. 어떤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두 번이나 그렇게 했어요. 난 더 신뢰가 가요.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데. 됐어. 위로는 받고 싶지 않아. 이곳에서 난 평화를 느껴. 

말하지 않고 여전히 가슴에 묻어둔 다른 살인이 있는지 여순은 묻지 않았다. 나름대로 추측해 보면 말수의 살인은 더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그녀도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권총. 그리고 막장의 생활. 작은 소란. 왠지 하나 쯤은 더 있을 것 같았다. 이유없는 살인이 아닌 정당한 것, 그것이 그의 영혼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충분히 그는 벌을 받았다. 이 처절한 생존 고통을 보라. 그리고 그가 살려낸 숱한 부상병들. 더 듣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말수가 말하고 싶어야 한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털어 놓을 때 다 털어 놓아야 후회가 없다. 십자가가 용서못할 일이라면 내가 용서해 주면된다. 그래서 더 할 말은 없어요. 하고 싶은 말 다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요. 이런 식으로 여순은 돌려 말했다. 말수는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 직접 묻지. 다른 살인은 없냐고. 겨우 세명 밖에 안 죽였냐고. 세 번째 살인에 대해 말해 주세요 라고. 그럴려고 했어요. 당신이 끝내 입을 다물면.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마저 해보세요. 이 암흑의 지하실은 그러기에 적당한 장소 아닌가요. 이 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 여순은 그가 자신의 말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래서 아차 싶기도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그냥 조용히 있었다. 말수도 침묵했다. 여순은 아무 말이나 듣고 싶어서 그랬어요. 하고 말수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 표현이 말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뭐. 동굴에서 마을쪽을 정탐하러 나 혼자 내려 갔었잖아. 거기서 일곤군을 만났어. 패잔병이었나봐. 그가 일본군인지 미군인지 나는 알지 못했지. 먼저 본 쪽이 총을 쏘더군. 조준 시력이 형편 없었어. 빗나간 거지. 나는 바위 뒤에 숨었고 그는 장전을 하더니 내가 어디 숨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어. 내 존재가 발각된 이상 나는 응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된 거야. 총소리 들었어요. 혼자 동굴에 있을 때 단편적으로 울렸던 짧은 총성. 오늘은 그만하자. 지쳤어. 뭐 자랑이라고 자꾸 할 필요는 없어요. 우린 언젠가는 다 죽게 되 있으니까. 오늘이 그 날인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다 잊어요. 다 용서할게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난 벌써 그걸 다 잊었어요. 내가 고해성사 받는 신부라면 좋겠지요. 듣고 나서 용서하고 바로 잊어 버리는. 그는 왜 서투른 발사를 했을까. 난 그곳을 지나가게 돼 있었어. 기다렸다가 해도 됐는데. 대신 당신이 목숨을 건졌잖아요. 당신이 살아서 나도 살고 있고. 그 병사는 알고 있었을 거에요. 자신은 혼자이지만 당신은 둘이라고. 허허. 말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헉헉 하는 작은 신음 소리로 바뀌었다. 무쇠같은 인간이 울고 있다. 여순은 그를 감싸앉았다. 전쟁통이잖아요. 이런 곳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요. 해치워햐 할 대상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해치워지잖아요. 사는 길을 택했는지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건 비난할 수 없어요.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그런데 말이야. 총을 맞고 나서 그 병사는 날렵하게 달렸거든. 그러기 전에 했어야 하는데. 그런 날엽함도 가슴을 관통당한 그를 살릴 수 없었어. 곧 쓰러지면서 숨을 거우었거든. 차라리 그때 내가 죽었더라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이 순간은 내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용서했어요. 오빤느 이제 자유의 몸. 하나님이 용서했으니 누구도 벌할 수 없어요. 신이 용서했는데 인간이 뭐라고 시비를 걸겠어여. 여순은 이렇게 말하면서 어둠속에서 말수의 얼굴을 만졌다. 손에서 촉촉한 느낌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수는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그들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수가 담배 연기를 품어 내듯이 휴우 하고 한숨 소리를 길게 냈다. 이번에는 여순 차례였다. 말수는 말하지 않았고 다른 누구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내 차례라는 것을 여순을 알았다. 살인의 고백은 이어졌다. 여순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숨을 잠시 멈추었다. 사실은 생각의 정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 있었다. 떠올리는 순간 가스실에 들어간 것처럼 숨이 턱 하고 막혔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짐작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수는 서두르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것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그녀는 오죽할까. 차라리 말하지 말라고 할까. 잘 생각해. 말하지 않아도 돼. 들을 준비가 안됐다기 보다는 여순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억지로 꺼내지 마. 할 만 하면 해. 그리고 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기. 이겨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대 그 때 해도 돼. 말수는 자신이 한 것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순에게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곳 성당의 지하실만 아니었어도 말수는 끝내 살인의 기억을 비밀로 무덤까지 가지고 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말하고 나자 속이 시원했다. 오래 묵은 체증이 쑥 하고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죽기전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한 것은 그의 영혼에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말수는 말은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음에도 여순도 자신처럼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다. 말수는 기다렸다. 드디어 여순이 입을 열었다. 짐작한 대로 였다. 막사에서 였어요. 그날은 다른 날도 그랬지만 유독 피곤했어요. 죽을 만큼요. 군인들은 그런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지요. 하나님도 남자이니 그 상황을 이해할 거예요. 듣는 대상은 말수가 아닌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여순은 마치 바로 눈앞에 신이 있는 것처럼 그가 잘 들을 수 있을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발음도 또렷했다. 발표장에서 하는 대표처럼 그녀는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서 말했다. 들리지요. 내 목소리가 너무 작은가요. 아냐. 충분해. 신이 아닌 말수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죽기로 작정한 것이지요. 살 수 없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억울했어요.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서 이렇게 시달리다 죽는 것이. 그러기 전에 그놈을 죽이고 싶었어요. 내가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놈이 아닌 완용이었을 겁니다. 완용은 없고 그 놈만 있으니 어쩌게써요. 난 지난 번에 왔던 그 놈을 기억해요. 이마에 상처가 났고 가슴팍에 뱀문신을 한 상등병이었는데 일은 뒤로 미루고 쌍욕을 하고 꼬집고 팼어요.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면 그것이 그를 더 흥분시켰는지 더 심하게 학대했어요. 여순이 숨이 멎는지 컥 하는 소리를 냈다. 나도 그랬어. 울컥 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 여순도 지금 그런 상태야.  그 날도 그자가 왔어요. 아무 감정없이 그냥 하려는 일이나 마치고 나가기를 바랐지요. 그랬으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런 기대는 허사로 끝났어요. 그는 목숨을 재촉했어요. 난 참을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라도 막을 수 없었을 거에요. 이날은 그가 난생 처음들어 보는 욕을 했어요. 무슨 일이지. 생각할 겨늘도 없이 팔뚝을 비틀어 꼬집는데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고요. 그러고도 그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네가 죽기로 작정했구나. 그 말이 자꾸 입안에서 맴돌았어요.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포기하려는 마음을 되돌리기에 충분했어요. 그래서 정말로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자가 일을 끝내고 잠시 골아떨어졌을 때 바늘로 두 눈을 찔렀어요. 알잖아요. 자수를 뜨던 그 바늘로 두 눈을 차례로 찔렀는데 그자는 만족감에서 오는 깊은 잠에 빠져서 자신이 보는 눈을 찔린 줄도 알지 못하고 골던 코를 더 세게 골았어요. 

나는 용기를 내서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두 번씩 더 찔러넣었어요. 그러고 나자 피곤함은 사라졌고 살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지요. 해 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당하지만 하지 않고 복수 할 수 있다는 마음에 난 살기로 작정했어요. 그러나 힘이 솟더군요. 그래서 한 번 더 찌르려다 그 자가 일어나는 시늉을 했으므로 그만 두었어요. 허겁지겁 나 갈때 상등병은 눈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자꾸 손으로 양쪽 눈을 비볐어요. 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할거야. 내가 확신한 것은 그가 문을 닫고 나가면서 내 눈이 이상해 하고 말했을 때였어요. 이상하겠지. 그러고도 이상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냐. 나는 호통을 쳤지요. 하지만 궁금했어요. 그 자가 다음에도 내 앞에 나타나서 같은 짓을 하는지 두고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날 이후로 그 자는 두 번 다시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짐작했던 대로 그자는 앞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총질을 했어요. 전투가 한창 진행중인데 갑자기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마침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거지요. 그 상태에서 돌격 명령을 받았으니 마구 쏠 수 밖에요. 그러다가 넘어졌어요. 받쳐 주는 사람이 없어 넘어지면서 상등병은 코를 땅에 박았어요. 아팠겠지요. 코피도 낫을 거고요.  그가 일어났을 때는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했어요. 다른 병사들은 같은 방향으로 다 달려 나가는데 이리저리 마구 달리던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마구잡이로 총질을 했어요. 그는 일단 총질부터 시작하자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자신이 쏘는 곳이 적군의 방향이 아닌 아군의 등뒤인 것도 몰랐던 거지요. 그 바람에 용감하고 유능한 오장이 죽었죠.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난 막 입대한 졸병이 총알이 떨어져 잠시 주춤거리는 상등병의 뒤로 몰래 다가가 대검을 꺼내 들었죠.

그건 살인이 아냐.  말을 마친 여순이 다시 컥 하고 숨이 멎는 시늉을 하자 말수가 대들듯이 말했다. 그게 어떻게 살인이냐고. 넌 살인자가 아냐. 말수는 여순이 안타까웠다.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듣는 소리였다. 험한 경험이 수두룩 할 거라고는 예상했으나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때 받는 충격을 말수는 고스란히 받았다. 그래서 그게 살인이야. 넌 그저 정당방위를 한 거야. 알아. 이건 하나님은 커녕 신부에게 고백할 건덕지도 못돼. 그러니 용서고 자시고 없고. 넌 깨끗해. 하느님이 용서하실까요? 아니래도. 이건 하나님까지 가지고 갈 문제가 아냐. 내 선에서 끝낼게. 그럼 그럼, 넌 무죄야. 어떤 판사도 이것을 죄로 묻지는 못할 거라고. 눈 멀어서 똥 오줌 못가리다가 스스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그런 건 잘한 거야. 용서를 비는 게 아니라 칭찬의 박수를 받아야지. 말수는 정말로 박수를 쳤다. 세상에는 죽어도 싼 인간들이 부지기수로 많아. 넌 그 중 하나가 사라지는데 일조했을 뿐이야. 상을 받아야지 벌을  내릴 게 아니거든. 어둠속에서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았다. 여순은 복받쳐 오르는 듯 손을 빼내려고 했다. 여순을 다독이기 위해 말수는 자신의 죄를 부풀렸다. 자신의 살인은 진짜 살인이고 너의 그것은 나의 것에 비해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정당방위. 정당방위라고. 촛불이 흐려지고 있었다. 거의 다 탄 촛불을 갈아야 한다. 촛불을 아낄 필요는 없다. 성당은 족히 일년을 켜도 남을 초를 장만해 두고 있었다.

하나 더 켜지 뭐. 말수가 초를 세워 새로운 초에 불을 붙였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다. 밝았다고 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여순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자는 사람처럼 아무 움직임없이 가만히 있었다. 산소가 부족할 거야. 두 개를 켰으니. 머리가 아프지. 산소 부족 때문이야. 하나는 끄고 일단 내가 어떻게 해 볼게. 여기 가만히 있어. 말수는 산소 핑계를 대고 일층으로 나가 벽돌 몇개를 들어내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들어오자 신선한 공기가 따라왔다. 여순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말수는 깨우지 않았다.자는 여순을 보자 그도 자고 싶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말수는 참으려다 참지 못하고 앉은 자리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여순 옆에 잠들었다. 그러나 얼마후 깨고 말았다. 깊은 잠을 자고 시원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상황은 아니었다. 깨서는 안 될 시간이었다. 뭔 일이래. 말수는 눈을 뜨고 주변이 익숙해 지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잤나. 계속 자야 하는데. 몸이 찌푸둥해. 그런 생각으로 말수는 다시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뜨고 말았다. 이번에는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벌떡일어나기 까지 했다. 몸 주변을 무언가가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었다. 말수는 촉각을 곤두세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다가 왼 팔목 언저리에서 강한 통증을 느꼈다. 그가 급하게 팔을 휘둘렀다. 붙었던 것이 떨어져 나가면서 저쪽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찍, 쥐였다. 그전에도 간혹 나타났으나 오늘처럼 공격적으로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잠은 다 잤다 싶었다. 촛불을 들어 팔뚝을 보았다. 이빨 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피가 나오다 멈춰 있었다. 하나의 붉은 점이 작은 꽃 처럼 피어났다. 촛불이자 그것은 검은 점으로 바뀌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여순을 살폈다. 무언가 후다닥 달아나는 기세가 느껴졌다. 불빛에 위기를 느낀 쥐들이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들만의 살기 위한 전략이었다. 산 것은 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수는 앉은 상태에서 뒷걸음질 치면서 신부님이 설교 때 손을 받치는 탁자 쪽으로 움직였다. 그것을 옆으로 뉘어 그 속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러면 여순은. 일단 나부터 시작해 보자. 괜찮다 싶으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자. 좋은 생각이다. 아무리 쥐라고 해도 성경책이 놓여 있는 탁자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수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가 들어가서 조금 있자 나무 벽을 박박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두 마리가 아닌 듯싶었다. 그들 중 용기 있는 놈이 발톱을 세워 먹잇감이 들어있는 상자 안으로 들어왔다. 나머지들도 따라서 행동했다.

이것들을 떨쳐 낼 수 없다고 판단한 말수는 곧장 일어나 거친 몸짓으로 탁자를 밟아 버렸다. 판자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여순이 깨어나면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그는 다시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너 마리의 쥐들이 그녀 주변에서 서성였고 어떤 놈은 옷 근처까지 들어가 제집인들 꿈틀거렸다. 그런데도 여순은 깨어나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말수는 그녀 주변에 붙은 쥐들을 쫓고 어떤 놈은 꼬리를 잡아 멀리 내동댕이쳤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게 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쫒을 방도는 없었다. 화가났다. 말수는 내동댕이친 쥐가 어딘가 세게 부딛치는 소리를 듣고도 화를 풀지 못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판자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분노에 눈이 돌아간 말수는 자칫하면 휘두른 판자로 여순의 머리를 내리칠 뻔도 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쥐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앉은 무릎 위로 다시 달려들었다. 시체를 만지는 것보다 더 소름이 돋았다. 튀어나온 내장을 집어넣으면서 괜찮다고, 살 수 있다고 외칠 때보다도 더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부서진 벽돌이 생각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벽돌로 작은 집을 만들자.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벽돌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지하에서 일 층으로 분주히 오르락거리면서 잠든 여순의 한쪽에 벽돌을 세우기 시작했다.

천장은 부서진 나무판자를 활용하면 한동안은 쥐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삼 일째 되던 날 말수는 비몽사몽에 있는 여순과 관속의 무덤 같은 벽돌 속에 갇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어렵게 마친 직후 이곳도 더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쥐들과 살면서 며칠 더 숨 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구한 자신들의 운명이 너무 가혹했다. 총 맞아 죽으나 무모하게 버티다 쥐에 뜯겨 죽거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 나가자. 나가 보자꾸나. 밖으로 나가보자 꾸나. 그는 이런 다짐을 하면서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그러는 시간은 좋았다. 그것은 긍정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이곳과 천국 같은 밖의 세상이 대비됐다. 운 좋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지 않은가. 배를 타고 태평양에 왔고 광산에 들어갔고 의사가 됐고 여순과 탈출했고 그 모든 것이 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마다 타고난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더 살아갈 운이 있다면, 여순도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서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그는 한 번 더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있기 때문에 더는 다른 방도가 없기도 했으니 시험결과는 순전히 운에 달려있었다. 그는 상하이로 가고 싶었다. 거기에는 조국을 떠나 건너온 많은 이들이 함께 사는 조선족 마을이 있다. 흰옷입은 그들의 오두막 집에서 이른 아침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상상했다. 잠시 좋았던 통영의 집처럼.

어쩌면 전쟁이 끝났을 수도 있어. 그러면 그곳에 가지 않고 여기서 살수도 있어. 일단 나가보자. 생각이야 했다가 지울수도 있으니 일단 생각한 것을 눈으로 보자. 상하이. 그곳 좋지. 그러나 그는 곧 그들과는 섞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여기가 좋아. 아니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 말수는 또 생각을 봐꿨다. 조선말 일본말 거기다 전선에서 배운 영어까지 말수에게는 언어라는 큰 무기가 있었다. 그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 밖에서도 여전히 의사이고 싶었다. 다른 어떤 외과의보다도 수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수술뿐 아니라 양약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훤했다. 여순도 마찬가지다. 부부의사로 상하이에서 활동하면 많은 돈도 벌 수 있다. 돈보다도 신분이 확실히 보장된다. 이런 꿈으로 그는 몸이 달아올랐다. 한 번 그런 생각을 하자 말수는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여순이 깨려는지 몸을 뒤척이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악몽은 아닐 것이다. 저 정도 반응은 그저 깨도 좋다는 신호에 불과했다. 말수는 지체없이 여순을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얼떨떨해요. 느닷없는 말이었으나 여순은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당신이 좋다면 그렇게 해요, 하고 말해버렸다. 그런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려고요. 하고 묻지 않았다. 물으나 마나 한 소리다. 가게 되는 것을 가정해서 한 말이니. 내가 자는 사이 그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그리고 이건 뭐지. 벽 같은 것이 있고. 처음과는 달라. 응 지하실에 집을 지었어. 그가 말했다. 나를 위해 집을 지었다고. 그녀는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무작정 따르기로 했다. 따르지 않은면 어쩌겠는가. 같이 있어보니 떨어져 있을 때보다 좋았다. 겨우 몇 시간 이었지만 동에서 헤어져 있을 때 여순은 말수가 없는 삶의 절망적인 두려움을 맛봤다. 두 번 다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길게 생각할 것 없어. 당신만 좋으면 당장 그렇게 해. 상해 든 어디든 가자고. 여순이 했던 말을 또 했다. 그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거기는 쥐에 물리지 않겠지요. 알고 있었어. 어떻게 참았어. 그냥요. 쥐라고 생각하지 않고 토끼라고 여겼어요. 귀가 큰 귀여운 토끼. 그러니 검은 것이 다가와서 찍찍 거려도 견딜만 했어요. 물어 뜯을 때만 빼고요. 그런 방법이 있었어. 나도 그 방법을 써봐야 겠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순이 농담조로 말했다. 당장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당장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지하실에 올 때는 전쟁이 완전히 끝날때까지 있자고 했으나 열흘인가 아니 그 정도는 더 됐지. 보름 이다. 한달도 못채우고 나가려고 한다. 그를 말릴 수 없다. 나가서 상황을 본다고 하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하고 말할 준비가 돼 있다. 말수가 일어섰다. 정말 나가게요. 그러라고 했잖아. 바로 들어와요. 적들이든 아군이든 쏘려고 준비하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알았어. 몸을 반쯤만 내밀고 일단 창밖만 확인할게. 말수가 나갔다. 그래 어디든 가는 거야. 어디든. 그 순간 여순은 어디든에서 한 곳은 절대 갈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바로 고향 죽마을이다. 거긴 갈 수 없어. 죽어도 안 갈거야. 부모님 죄송해요. 죽은 자식으로 쳐 주세요. 벌써 고향을 잊었어요. 그리움도 사라졌어요. 그건 다른 것으로 대체했어요. 슬픔과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때 다 잊은 거에요. 알아 들었지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여순은 작별인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말수가 옆에 없으니 다른 생각이 드네. 고향이라니 이 꼴로. 그나저나 말수는 무사할까. 포격은 멈췄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그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중인지 전쟁이 끝났는지. 끝났다면 승자가 일본인지 미국인지도. 

자, 난 합류할 준비를 하자. 그렇지 옷을 털고. 아니 털지 말고. 이젠 쥐를 쫒자. 너하고 친구할 생각 없거든. 여순은 말수가 그랬던 것처럼 천장에서 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면 손으로 나무판자를 툭하고 쳐냈다. 말수가 돌아왔다. 이상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 감을 잡기 힘들어. 공기에는 폭약 냄새가 아직 있어. 끝났다면 바로 조금 전이고 끝나지 않았다면 방금 전에 공방이 벌어진 거야. 여순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소식 가져오지 못해 미안해. 그게 당신이 미안해할 일이야. 그나저나 난 결심했어. 내가 정한 날에 떠나기로. 그 날이 언제 인데요. 나도 몰라. 일단 기도부터 합시다. 말수가 벽돌로 십자가를 만들어 놓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가 엄청나게 큰 그리자를 보면서 여순은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렇게 큰 남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저런대. 그러지 말자. 저 남자의 진정성을 믿자. 그래서 여순은 남자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똑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십자가가 폼이 나요. 그렇지. 난 잘 만들거든. 나중에 나무로 하나 깎아줘요. 대나무. 말수가 물었다. 대나무 십자가도 있던 가요. 아무렴 어때. 무슨 나무로 만들든 의미만 있으면 되지. 알아 모실게요. 우리의 탈출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간혹 나타날 장애물은 앞길이 창창한 여순을 봐서라도 치워달라고 그러면 상해에 가서도 잊지 않고 기도드리겠다고 거듭 맹세했다. 알았죠. 하나님. 난 당신을 믿어요. 나를 믿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러니 알았죠. 우리를 살려 주시오. 말수는 이런 식으로 기도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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