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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올라탄 점례는 순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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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올라탄 점례는 순간 눈을 감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7.1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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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차에 올라탄 순간 점례는 눈을 감았다. 마치 사전에 약속한 것처럼. 그것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잡념과 망상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보이는 모든 것이 꼴 보기 싫었다. 이렇게 마음이 요동칠 수 있을까. 조국에 왔다는 기쁨은 어느새 사라졌다. 검은 트럭의 행렬은 그에게 자신의 장례행렬을 보는 것 처럼 처절했다. 여기오면 살 줄 알았는데 그 반대로구나. 철저히 죽은 목숨이 나다. 점례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없는 목숨이다. 이미 죽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아니라 환형이다. 그림자이며 유령이다. 유령이 지금 마차에 올랐다. 배회하는 유령이 바로 나다. 이곳은 위험해. 아주 위험해. 안전한 곳이 아냐. 너른 품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야. 식민지 조국이 그럴 형편이 어디 있겠어. 각자 도생이지. 흰옷 입은 사람을 보고 쾌재를 불렀었는데. 살았다고 속으로 외쳤는데. 다 거짓이었다. 답답해. 다 벗어 던지고 싶어. 이건 내나라가 아냐. 이국만리 타향보다 더 낯설고 어설퍼. 남의 나라에 온 거야. 그러나 점례는 감은 눈을 뜨고 싶었다. 바깥 풍경을 보고 싶었다. 어스름이 지는 경성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아야 한다.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그 반대의 마음이 충돌했다. 

눈을  떠야해. 언제까지 감고 있을래. 견딜 수 없어. 검은 장막을 벗어야지. 보고 싶은 게 왜 없겠어. 사방천지 다 호기심뿐인걸. 그러지 않겠다고 내두른 혀가 잘못이지. 경성의 모습을 보고 싶어. 떠날 올 때도 보지 못했잖아.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거야. 오늘 아니고 내일도 볼 수 있지만 지금 당장 보고 말거야. 그 전에 본 기억이 없으므로 지금보는 경성의 모습은 점례에게 모두 처음이었다. 그 전의 것과 비교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처음으로 몸 속에 각인하려는 행위였다. 그러니 감은 눈은 곧 뜨게 마련이다. 과연 그런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 인생도 이처럼 맞아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경성역 말고 경성시내를 보는 거야. 지금부터. 시내 구경은 만주의 번잡한 곳을 거니는 것처럼 신나는 일일거야. 마차가 출발했으니 남대문이 보일 거야. 남대분을 보지 않고 경성을 봤다고 할 수 없어. 점례는 감은 눈에 힘을 줄수록 반대로 떠야 한다는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보이는 모든 것을 사진을 찍듯이 뇌에 저장해야 한다. 정으로 찍어 바위에 새겨넣어야 한다.그래야 한다. 이곳이 지금부터 내가 생존할 터전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점례는 넘쳐나는 호기심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번쩍 떴다. 보따리를 안은 소녀들은 벌써 안중에 없다. 군인들처럼 나란히 줄선 여자들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마차안에서 점례는 그런 여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도 점례는 가슴에 보따리 같은 걸 안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입은 옷은 세련됐다. 얼마나 기고만장한 일인가. 구두는 서양미녀들 처럼 가죽으로 만든 것을 신고 있다. 난 아냐. 난 그때의 점례가 아니라고.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경성역과 연결된 끈은 느슨하다 못해 아예 끊어졌다. 점례는 그런 마음으로 힘껏 눈을 떴다. 마치 세상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점례는 뜰 수 있을 정도로 눈을 크개 뜨고는 달리는 마차에서 몸을 돌려 뒤돌아 보았다. 경성역이 눈에 잡혔다. 생각은 멀리 달렸으나 마차는 아직 경성역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불과 10여분의 시간이 지났고 300미터 정도도 이동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짧은 시간과 거리 사이에서 점례의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빠르게 움직였고 마침내 결단했던 것이다. 안 보이는 군. 그새 트럭은 사라졌어. 여자들도 보이지 않아. 트럭이 없어도 광장은 여전히 분주해. 마차가 밀리는 군. 퇴근 시간에 맞물렸어. 이곳만 빠져 나가면 될거야. 전차가 오고 있어. 땅이 울려. 경적음이 들리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류장으로 몰려들었다. 마차는 그들을 피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만주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어서 점례는 이곳이 조선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맞다고, 조선이 틀림없다고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점례는 그 생각을 더 오래 했을 것이다.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들과 검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한군데 섞여 있었다. 그들은 체면을 차리면 차를 타지 못한다고 여겼는지 차례를 기다리는 대신 문 쪽을 향해 개미 떼처럼 뭉쳐 있었다. 질서가 없어. 트럭처럼 트럭을 기다리는 여자들처럼 나래비서지 않고 바글거려. 누가 먼저 온 거지. 나중에 온 사람이 먼저 탈수도 있겠네. 정리해 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달라. 저들은. 줄 서 있는 군인들과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란히 있던 여자들과는 다른 풍경에 점례는 질서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강제된 질서든 아니든 그래야만 정리라는 것이 될 것 같았다. 저래서 야 원. 점례는 혀를 찼다. 그 사이 마차는 조금씩 움직여 그들 가까이에 다가갔다. 기차가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타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타기 위해 앞다투고 있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힘센 사람이 이기겠지. 갓이 비뚤어지고 옷고름이 틀어지는 것도 모르고 악다구니 쓰고 있어. 바쁘겠지. 어디든 정해진 곳으로 가야 하니까. 점례는 경성은 바쁘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여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시간에 쫓겼다.

기차가 떠나고 마차가 속도를 냈다. 커다란 기와지붕을 인 남대문 사이로 짐 마차가 들어가고 있었다. 점례는 그 모든 광경에 반응했다. 한 번 보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는 듯이 눈에 힘을 주어 가슴에 담았다. 그래, 이게 조선의 모습이야. 언제나 바쁘고 언제나 소란스럽지. 활기넘친다는 표현이 어울려. 기왕이면 혼란보다는 활력이라고 쓰자. 그런데 저것들의 이름은 무엇이지. 성벽을 타고 산으로 오르고 있어. 짐마차꾼인가. 등짐을 지고 지게를 지고. 아이들은 높은데 있네. 남대문으로 들어가는 녀석들도 있고. 여긴 사람들이 더 많아. 복잡하군. 어디로 가는 걸까. 이리로 오는 사람과 저리로 가는 사람. 이유없이 움직이고 있지는 않을 거야. 각자 사연이 있겠지. 그런 사연을 듣고 싶네. 시간이 있다면 마차에서 내려 물어보고 싶어. 어디로 가고 있어요. 어디갔다 오는 길인가요. 점례는 한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맞아. 시장통이야. 그래서 사람이 돗대기시장 처럼 북적이네. 시장이라면 어떤 시장이지. 천웅의 오일장처럼 이름이 있을 터이고 여기는 더구나 경성이니 그 이름 또한 크고 멋지겠지. 경성시장인가. 에라 모르겠다. 아닌 남대문과 붙어 있으니 남대문 시장.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나중에 차차 알겠지. 한 번 구경할 기회도 생길거야. 

점례는 눈에 보이는 것의 이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세련된 그녀가 촌사람처럼 마구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마부도 그녀가 지체높은 집안의 규슈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여자 혼자 탔어도 함부로 대할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말고삐 잡은 손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행여 잘못 몰아 삸은 물론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었다. 점례는 용기를 냈다. 여기 좀 막히네요. 아씨, 저녁 이 시간 남대문은 복새통이랍니다. 언제나 그렇지요. 매일이 전쟁터에요. 남대문을 빠져나가도 마찬가지고요. 덕수궁 앞이나 종로통도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고요. 점례는 마부가 뱉는 말에서 남대문과 덕수궁의 이름을 외웠다. 저게 남대문이고 덕수궁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거기를 지나면 종로통 인가보지. 그래 말로만 듣던 종로통이 어떤지 보자. 점례는 지레짐작하면서 그래도 서두르세요, 삵은 넉넉히. 서운하지 않게 드릴게요. 마부는 안색이 밝아졌다. 비록 등을 지고 있어 손님을 볼 수 없었지만 눈을 마주친다면 고개라고 깊이 숙이고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넉넉하게, 서운치 않게. 아싸. 달리자. 마부는 잡은 고삐를 당기더니 인파와 다른 마차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 나갔다.

한 번 눈을 뜬 이후로 점례는 눈을 가지 않았다. 지나가는 모습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 보았다. 앞으로 늘 볼 풍경이지만 지금 이 풍경 만큼 기억될 풍경은 없을 것이다. 경성부청은 아직 멀었나요? 다 왔습니다. 저기 보이네요. 마부가 뒤를 보며 말했다. 서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점례는 알은 체를 하면서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마부를 상대했다. 눈뜨고 코베이는 곳이 경성이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 점례는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그 말을 되새겼다. 마부는 세련된 젊은 여성이 말을 받아주자 신이 났는지 경성부민관 앞이 오늘은 좀 한산하네요. 우편국 건물 주변도 그렇고요. 마부는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는 건물을 차례로 말했다. 점례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거든. 계속 말해 주세요. 심심해서요. 특히 건물이 지날 때 마다 들을 수 있도록 크게요. 도착할 때 까지, 계속 그렇게 말해 주세요. 내가 깜박 졸수도 있어요. 자고 싶지 않거든요.

아 예. 아씨 이제 마차가 종로통으로 접어듭니다. 생각보다 수술 빠지네요. 오늘은 운이 좋아요. 아씨를 태워서 그런가 봅니다. 막히지 않네요. 점례는 웃었다. 마부가 들리지 않도록 한껏 입을 옆으로 벌리고 미소를 지었다. 죽이 잘 맞아. 종각 건물은 언제봐도 기품이 있어요. 점례는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멋진 한옥식 건물을 지나쳤다. 저기 매달린 종이 보신각 종이렸다. 종소리가 아름답지요. 그래요, 한 번 들어본 사람은 그 소리를 평생 잊지못하지요. 마부가 거들었다. 생각보다 날은 쉽게 저물지 않았다. 아직 거리는 사물의 식별을 뚜렷이 할 만큼 밝았고 어둡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와이엠씨에이 건물입니다. 요새 저기서 시국선언이다 뭐다 해서 시끄러워요. 보이죠. 일본 경찰들이 늘 순찰을 돌아요. 잡혀가면서도 조선사람들은 독립을 외쳐요. 참 끈질기지요. 독립이라. 그런 게 있었나. 점례는 그 말에 몸을 움찔했다. 독립이라니. 만주에서 헤어진 그 조선청년이 떠올랐다. 그가 준 주소가 있지. 그래 쪽지는 버렸지만 머릿속에는 주소가 있어. 그도 여기 와이엠씨에이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연설을 할까. 점례는 자신이 청중속에서 그가 열렬하게 연설하는 모양을 지켜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화신백화점이라는 말은 점례의 생각을 거기서 딱 멈추게 했다. 화신백화점은 문을 닫지 않았다. 닫다니. 지금이 피크라는 듯이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또 일부는 그 문으로 나왔다. 부지런한 사람들. 살 것이 그리 많은가. 돈은 다 어디서 나고. 저 젊은 신사를 무엇을 샀을가. 한 손에는 쇼핑가방을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멋들어진 모자를 비딱하게 쓰고. 조선에 신흥부자들이 많다지요. 말도 마세요. 일본에 붙어 살면서 신식집을 지어 파는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어요. 벼락부자들이 저렇게 늘 백화점을 들락날락 하고 있었요. 저기 보이죠. 저게 다 신식 부자들이 지은 집이에요. 초가 산간 사이로 멋진 왜식 이층집을 마부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군요. 조선이 문물을 받아 들이고 있네요. 마무가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삐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못들었는지 들었어도 대꾸할 말이 달리 없어서 인지 마부는 잠시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입을 닫았다. 그러나 모처럼 만난 숙녀분에게 최선을 다해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종로 3가쪽에는 여자들이 많이 나와 서 있었다. 마부는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점례는 느낌이 싸했으나 그녀들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삼일문 보이죠. 저기서 독립운동을 외쳤어요. 점례가 독립이라는 말에 다시 귀를 세우고 마부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남대문처럼 기와집이 멋들어지게 서 있었다. 그 뒤로 탑이 높게 서 있었는데 보기에 좋았다. 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요. 나도 그때 저 자리에 있었다니까요. 젊은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곧 나라가 해방될 줄 알았어요. 이렇게 오래 갈지 누가 알았겠어요. 벌써 20년도 더 지난 옛날이 됐어요. 지금은 시들하지요. 되겠어? 그게. 이렇게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정말  그런 분위기인가요. 아씨, 그럼요. 누가 나서겠어요. 나섰다가는 삼대가 망하는데. 힘센 쪽에 붙어야 한다는 걸 다들 말해안해도 알지요. 그건 사람의 본능이에요. 각자 살길을 찾아 헤매는 거고요. 안 그래요, 아씨. 그렇게 물어주니 고맙군. 틀린 말 하나 없네. 나 먼저 살고 볼 일이지. 누구 좋으라고 독립이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점례는 또 두갈래의 정신이 서로 싸우는 것을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정답이 없는 것이다. 그럼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경성에는 발자취도 없겠네요. 왠걸요. 그래도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어요. 간혹 전단지를 뿌리져요.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고요. 소문이 안 나서 그렇지 실제로는 더 많이 있을 겁니다.  무모한 사람들이지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하다니. 마부가 혀를 찼다. 자신은 이미 그런 경지를 넘어 섰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했던 것이다. 그럴 정신 있으면 다른 일이나 하지. 떠드는 것이 자신의 주특기이고 그것을 살리고 있으니 마부는 신바람이 났다. 그럴 때마다 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고 있다는 표식은 아니었다. 알아 들었다는 말이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고 있고. 널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먹고 살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점례는 자동인형 처럼 다시 머리를 까딱 까딱 했다. 그런 모습을 마부는 볼 수 없었다. 만약 드랬더라면 그는 더 많은 말들은 퍼부었을 것이다. 마부를 뒤를 볼 수 없어.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을 거야. 그렇다면 말로 해야지. 마부가 심심할 거야. 그래서 점례는 아, 그렇군요. 최근에는 어떤 일이 있었어요. 내가 좀 지방을 다녀오느라 경성 소식을 잘 모르거든요. 그러면 총독부 포탄 투척도. 아예 얼마간 세상일을 놓고 있었어요. 한 달전에 총독부에 폭찬이 터진 걸 알고 있지요. 점례는 그 기침을 했다. 안 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었다. 기침의 효과가 나왔다. 마부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떠벌였다. 다행히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어요. 다행이라고요? 그렇지요. 안 그랬더라면 큰 난리가 났을 거예요.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모두 잡아들였을 떼니까요. 괜히 우리 같이 엄한 사람만 끌려 들어간다니까요. 그래서 난 운동이다 뭐다 하는 테러리스트에게 신물이 나요. 나에게 그들을 비난하는 말을 하는 마부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더는 피해를 보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럴만도 하겠어요. 점례는 화답하면서 마부의 의욕을 북돋았다. 

마차는 계속 달렸다. 마차가 달릴수록 장면도 바뀌었고 장면이 바뀌면서 생각하는 것도 바뀌었다. 이 풍경 기억해야지. 처음보는 것은 늘 신비로워. 잊지 말아야지. 점례는 열심히 외웠다. 남대문, 덕수궁, 부민관, 경성부청, 종각, 와이엠씨에이, 삼일문 순서대로 머릿속에 채웠다. 그리고 이름과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연결시켰다. 틀린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마차는 행인을 피해 잠깐 서기도 했으나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달렸다. 해가 지려고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양식 건물과 한옥과 초가 등이 섞여 있는 풍경을 점례는 보고 또 보았다. 길게 일렬로 늘어선 전신주와 전선들이 얽기 설기 섞여 있는 모습에서 점례는 경성이 생각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고 느꼈다. 사람도 많아.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이렇게 볼 거리가 많으니. 지나는 풍경도 만주 시내와 견줘도 뒤지지 않아. 놀라워. 이 장면 쉽게 지워지지 않을 거야. 

점례는 이것들을 스케치해보고 싶었다. 치맛자락 위에 있던 손을 들어 점례는 그리는 시늉을 해봤다. 남이 볼까봐 이런 모습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으나 달리는 마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가 보고 알아 볼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손놀림을 더 빨리 했다. 사각의 도화지 위에 눈으로 구도를 잡았고 건물을 배치했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머리에 넣었고 넣은 것을 복기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위아래로 오라갔던 손이 내러오고 잠시 멈추고 다시 옆으로 손이 움직인다. 연필 잡은 손을 부지런히 놀린 탓에 스케치는 거의 완성됐다. 아, 당장 그리고 싶어. 할 수 만 있다면 여기서 내려 화폭을 꺼내 쓱쓱 그리고 싶었다. 물감. 물감을 칠해야지. 마른 다음 덧칠하고. 한 번 더 마른 다음 그 위에 그래 노란 물감을 칠하자. 그러면 근사할 거야. 제법 좋은 작품이 나올 거야. 완성된 그림의 제목은. 진부해. 경성의 1940년대 풍경이라니. 그래도 그것만큼 어울리는 제목도 없을듯 싶었다. 경성역에도 갈까. 당연히 가겠지만 점례는 갈까하는 물음표를 던져 보았다. 당연히 아주 지당하게도 가고 또 가겠지. 거기 그림은. 트럭과 여자들. 점례는 또다시 아 하는 작은 감탄사를 날렸다. 다 좋다가도 경성역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렸다. 벼랑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처럼. 하지만 난 그릴 거야. 지금 경성의 풍경을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가 그려봐야지. 그것도 여러 장 그리자. 수도 없이 그리자. 그래서 유마 호사카를 만나면 보여줘야지. 자 어때요. 내가 그린 경성의 풍경이.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난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때 나 많이 늘었지요. 전시회 할만 한가요. 충분하다고요. 객관적으로 말해요. 자기편이라고 감싸고 돌지 말고요. 아니야. 정말이야. 이름을 가리고 해도 난 언제나 이 그림들을 최고로 꼽을 거야. 고마워요. 점례의 눈이 뜨거워졌다. 유마, 나의 유마. 그는 언제나 내편이었다. 앞으로도 내 편일 것이고.

점례는 그림으로 생각이 옮겨가자 자신감이 올랐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거지. 조선화단이 어떻게 평가할까. 아직 일러. 난 그런 수준은 아니야. 몰라. 거기까지 올라 왔는지. 유마는 충분하다고 했다. 삼촌에게 몇 개 그려서 보여줘. 표정이 달라질 거야. 유마는 단언했다. 당신은 크게 될 사람이냐. 난 사람을 알아 보거든. 천재는 아니지만 누가 천재인지는 알아. 당신은 그림 천재야. 그래. 그 말이 지금 떠올라. 내가 천재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소학교에서 상을 탔으니까. 천재 기질은 그게 전부야. 자 허튼수작 그만 부리고 구체적으로 들어가자.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림이 아니라고 했어. 마음에 점 찍은 것을 보이는 것이 집어 넣어야 진짜 그림이 된다고. 그림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나. 그러나 그 말은 진짜같아. 똑같이 그리면 그게 사진이지 그림이야. 누구나 그림은 그릴 수 있어. 그런 그림과 다른 그림을 그려야 화가지. 색다른 것. 나만의 화풍. 진정한 가치. 이런 말들이 점례의 머리속을 전차길처럼 어지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독특한 그 무엇. 창조. 영원. 미술사. 이런 것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언젠가 유마는 내게 서양미술사를 브리핑했어. 그런 것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던 나는 놀랐어. 그러면서 넌 거기에 기록될 거야. 난 사람을 볼 줄 알거든. 난 널 못따라가. 그게 재능이야. 유마는 이렇게 점례의 솜씨를 높게 보았다. 그리고는 엄지 손가락을 세웠다. 저 손짓의 의미는 최고라는 뜻이겠지. 신호를 나에게 보낸 것은 그러니 열심히 하라는 격려야. 그는 내가 그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많이 알아. 어떤 때는 나보다 더 나를 더 잘 이해한다니까. 남의 것에 자신의 것을 끼워넣어. 그게 창조야. 모방에서 창조는 한 끗 차이. 알지? 그래도 그리면 모방, 거기에 점을 찍으면 창조. 

그 말을 떠올리고 점례는 머리에 찍힌 것과 찍히지 않은 것을 함께 구상했다. 그 원칙이 지금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모방과 창조. 인사동 골목길로 접어들 무렵 점례는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 번 빠지자 자꾸 그 단어들만이 떠올랐다. 마차가 멈칫 했다. 앞에서 다른 마차가 달려왔다. 속도를 줄인 마차가 아슬아슬하게 비켜났다. 저런. 하마터면 부딛칠뻔 했어. 마부가 짜증을 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상대쪽의 잘못을 나무랐다. 그래, 우체국.  빨간 우체통을 스쳐 지나가면서 점례는 유마에게 쓸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편지를 써야지. 경성의 모습을 이렇고 마부와 나눈 이야기는 저렇고 총독부 폭탄은. 어 그게 일부러 넣을 필요가 있을까. 우리끼리 이야기만 하자. 편지의 여백에는 삽화를 그려야지. 어떤 것을. 조선이니 조선을 상징하는 남대문, 아니면 파고다 공원. 거의 다 왔겠군. 곱게 접어서 보낼 거야. 종이 편지처럼 날려 보낼까. 나비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 유마의 손에 닿는 모습은. 그릴 게 너무 많아. 차근차근, 순서대로. 점례는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그리고는 멀지 않았지요. 하고 물었고 마부가 거진 다 왔습니다 아씨하고 공손하게 말했다. 독립이니 뭐니 하면서 열을 올리던 태도는 수그러들고 금세 그는 마부의 본래 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쓰면 대로 붙이자. 경성우체국까지는 걸어서 가자. 돌아보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목적지에 저기 인가요? 지레 짐작으로 점례는 이렇게 물었고 마부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경성우체국까지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요. 마차나 전차를 타지 않고요. 날이 좋은 요즘은 걷고 싶다고 점례는 덧붙였다.한 사십 분 정도 걸릴걸요. 물론 마차를 타면 지금처럼 십오분 정도면 가고요. 이번의 대답은 작고 차분했다. 마부에게는 힘이 되는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그 정도 거리라면 어느 때고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익히고 길을 외우는 데는 걷는 것이 최고다. 그녀는 하룻동안 보았던 만주 시내를 기억했다. 그때 조금 걸었었지. 그런데 그 때 걸어서 보고 배운 거리를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마차만 탔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삼촌 화실에서 나와 여기까지 걸어온다. 그렇지. 마차가 저기서 우회전을 했어. 나는 반대쪽으로 가는 저기서 좌회전을 하면 되겠군. 걸으면서 볼 것이다. 느낌도 오겠지. 조선의 땅과 하늘과 가옥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걸어갈 거야. 계속 걷다 보면 조선이 흰옷 입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런 느낌을 그리는 거지. 그림은 느낌이야. 점례는 머리를 딱 치고 싶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단어가 딱 어울렸다. 유마가 말한 모방과 창조에 자신의 것을 곁들인 느낌. 오케이. 나에게 그림은 이런 것이야. 이것은 삶에 그리고 그림에 대해 억척스러움을 놓치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생의 활력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손에 꼭 쥔 편지를 보낸다. 심장이 뛴다. 그녀는 유마가 그립다. 그가 편지를 보고 기뻐해 주면 좋을 것이다. 당연히 좋아하겠지. 그가 나에게 한 것은 나를 사랑해 준 것 그 이상이다. 목을 빼고 기다릴 거야. 그러니 도착하는 즉시 보내야지. 그가 보여. 내 편지를 받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내 편지를 읽기 위해 잠시 피 묻은 손을 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래 웃고 있어.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봐. 그래, 그림이 우선이야. 내가 이렇게 잘 그리고 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지요. 보세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요. 

전쟁 이까짓 것 잊자. 난 이것과 상관없어. 유마가 소리친다. 난 갈거야. 점례가 있는 조선으로. 그가 군복을 벗는다. 긴 장화도 벗어 던진다. 권총을 찬 혁대도 같은 식으로. 그는 전쟁과 어울리지 않아. 잘 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내몰린 거야. 나오겠지. 현명한 사람이니. 그가 편지 쥔 손을 놓지 않고 감상에 젖지 위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젖힌 고개로 파란 하늘을 본다. 그 순간 총알이. 아, 총알이 그를. 편지는 나폴레옹의 네잎 클로버가 되지 못했다. 되레 그 반대다. 점례야, 내가 죽는다. 원통하다. 아냐, 그럴리 없어. 점례가 세게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라고. 내가 헛것을 본 거야. 마차가 멈췄다. 점례는 뛰는 심장을 가만히 두었다. 알아서 멈추겠지. 그는 어쩌자고 험한 모습을 내게 보여줬지. 아직도 생생해. 그럼 그렇지. 총알을 용케도 피했어. 그리고 다시 편지를 보더니 넌 소질이 있어.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뜨게질이든 그림이든 음식이든. 넌 그 중에서 그림에 특히 뛰어나. 유마, 오 나의 유마. 

그는 나에게 하나를 가르키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라고 너는 그림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될 거라는 말은 격려의 말이나 칭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평가라고 그러니 자신감 있게 치고 나가라고 했다. 그는 점례의 그림을 놓고 한 번도 비난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보라고 코치는 했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비웃지 않았다. 틀렸어. 아니라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따뜻한 미소. 그 보다 더 다정한 마음. 유마가 지금 내곁에 있다면. 점례는 유마의 손을 잡고 싶었다.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여자처럼 가늘고 긴 손. 어쩌면 당신은 손이 나보다 더 예뻐요. 그 손을 총을 잡다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안 어울려. 억지로 하는 거야. 제대로 되겠어. 나도 곧 뒤따라 갈게. 웃음, 몸 그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세상의 어딘가에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자체가 그녀가 지금 살아 있는 존재 이유였다.

자신을 돌봐줬고 구해줬고 살려서 조선 땅에 보내줬다. 생명의 은인. 그는 잘 있겠지. 점례가 떠나 온 후 일주일 후에 유마는 태평양의 어느 섬으로 자진해서 떠났다. 그곳은 이전의 곳보다 위험하다고 했다. 그는 왜 위험을 자초했지. 군함을 탄다고 했다. 그는 답답한 육지생활보다는 넓은 바다를 누비는 군함이 좋다고 했다. 그래, 그의 가슴에는 악마보다는 낭만이 있어. 그래서 바다로 갔을 거야.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할 거야. 육지든 바다든 체질이 아니거든. 안전한 후방이 전방보다 잘 어울려. 그런 선택을 왜 했느냐고. 빠져 나오기 위해서지. 그의 깊은 고뇌는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거야. 점례는 다 알지는 못했지만 이런식으로 그를 이해했다. 그가 먼저 편지를 나에게 보내야해. 그가 간 새로운 전선의 주소는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답장을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주소가 찍힌 편지를 삼촌의 화실로 보내야 해. 그렇지. 일주일이라면 일주일 정도만 더 기다리면 받을 수 있을거야. 아무리 바빠도 그는 나에게 편지부터 쓰겠다고 했지.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에서 그가 입에 담배를 물고 편지를 쓰는 모습을 상상하자 점례는 웃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전하하는 방법도 있겠지. 총독이 전해줄까. 아니면 경성우체국장이 급보를 가지로 화실로 달려올까. 

점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두세 점의 삽화와 그 위에 칠할 물감의 색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덧칠에 덧칠을 하면 둔중한 느낌이 들거야. 그런 느낌이 오래가지. 난 가벼운건 싫어. 뭐든 오래 남을 수 있는 게 좋아.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거칠지만 세심한 거. 그런 게 있다면 난 그런 걸 그릴 거야. 다 왔군. 감이 와. 인사동이야. 조선의 인사동. 내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어. 이곳은 안심이야. 어디지. 그래, 내일 준비를 하자. 점례가 속으로이런 생각을 할 때 심심한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금 보기 좋을 겁니다. 주변에 사쿠라를 많이 심었거든요. 한 일주일 정도면 만개해요. 연중 행사이니 한 번 꼭 들러 보세요. 장관이 따로 없어요. 마부는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왜, 아니겠어요? 커다란 회색 건물을 지나칠때 왜 말씀이 없지 생각했어요. 제가 깜박했어요. 저도 가끔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가 있거든요. 마부는 이렇게 말하면서 말머리를 세우기 위해 오른손에 잡은 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어두워져 있었으나 저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마차를 돌리면서도 마부는 입을 닫지 않았다. 저쪽 위로는 될 수 있으면 가지 마세요. 아가씨.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놈들이 잡아챌지 몰라요. 요즘은 아무나 잡아들여요. 제 눈에 의심스럽다 싶으면 마구 끌고 가요. 왜놈들의 행패가 여만저만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가씨는 애국을 부르짖다가 끌려가서 몸을 망치지 말아요. 그는 떠나가면서 흰옷 입은 사람들 중에 일본 앞잡이가 많으니 조심하라면서 마차의 고삐를 흔들었다. 곧 출발할 떼니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그 소리에 점례가 멈칫했다. 그러다가 자신은 잘못을 저질러 쫓기고 있는 몸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순간 일었다. 일주일 후면 창경원 벚꽃이 볼 만할 겁니다. 동물들도 많고요. 종로서 대신 차라리 거길 가세요. 글쎄 꽃이 지기전에 그곳에 갈 시간이 있을까요. 꽃구경이라면 나쁠 게 없지만. 점례는 시간이 되면 그렇게 할게요. 가야할 곳에 창경원을 꼽아 놓고 점례는 순간 고향의 완용이 일본 순사인 것을 기억해 내고는 혹시 가지말라는 종로서에 그가 근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마부에게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은 손님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 넉넉하게 요금을 지불했다. 손에 들린 돈을 보면서 마부는 채찍은 놓지 않은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수고의 대가치고는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마부가 떠나자 점례는 배가 고팠다. 가마솥을 밖에 걸고 해장국을 끓이는 주점에서 배부터 채워야 한다. 냄새가 구수하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은 바로 눈앞에 있는 화랑을 찾아 들었다. 유마 삼촌을 먼저 만나야 한다. 어두워서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해야 일의 순서가 맞다. 마부가 일러준 곳이다. 주소가 정확히 만는지는 모르지만 경성에서 제일 큰 화랑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마부는 까막눈이었다. 그래서 조선제일 화랑의 간판을 볼 수 없었다. 화랑 간판은 점례의 눈에 쉽게 띄었고 점례가 들어간 화랑 옆에도 화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림 간판이 보였다.

점례는 열려 있는 문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그리고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누가 찾아왔으니 안에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두리번 거리지 않았다. 손에는 보따리 대신 예쁜 핸드백을 들었다. 세련된 옷차림에 세련된 말투였다.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침착한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했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자세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례는 한 번 더 주인장을 불렀다. 그러면서 눈은 조용히 좌우를 살폈다. 출입문의 정면으로 보이는 벽의 빈 공간에는 몇 점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 위에는 일장기가 눈에 띄었다. 그 아래 바닥에는 서 너개의 그림이 포개져 세워져 있었는데 대부분 서양 유화였다. 한눈에 보아도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팔기 위한 완성품이었다. 표구된 것도 있고 아직 그러기를 기다리는 작품도 있었다. 조선에서 그림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점례는 한 발 더 들어설까, 아니면 돌아서 나갈까 망설였다. 나가서 간판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안에서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례는 유마 삼촌의 가계를 찾는다는 미리 준비한 말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그래도 되는지 순간 어색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눈짓으로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점례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어 여기가 유마 삼촌의 화랑이 맞느냐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힐끗 보더니 안색을 바꾸고 표정을 부드럽게 지었다. 유마 삼촌을 찾는다고요. 유마가 내 조카요. 그럼 당신은 점례 마사코. 내가 그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제대로 찾아왔으니 이제 용건을 말하라는 듯이 그는 점례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면서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점례는 어렵지 않게 삼촌을 찾은 것이 반가워 웃음 지으며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맞아요. 제가 점례 마사코에요. 전선의 유마가 보내서 왔어요. 늦은 시간 실례가 될 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서 점례는 바로 앞에 있는 남자와 눈을 맞췄다. 삼촌이라고 해서 머리가 조금 벗겨진 중년을 넘긴 초로의 사내로 생각했으나 4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젊은 남자였다. 체구는 작았으나 자기 관리를 하는지 약하지 않고 단단해 보였다. 점례의 눈을 보면서 그는 유마가 말한 그 여자가 이 여자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했다. 그는 한 번 더 눈여겨보았으나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는 않았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와 서양식 옷을 입은 점례를 보고 사내는 점례가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태도였다. 유마가 가까이에 두고 있을 만한 기품이 있는 조선 여자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위에는 흰옷 아래는 검정 치마의 한복 차림이 아닌 양식 옷을 입을 세련된 조선 여자를 삼촌은 반갑게 맞았다. 잘왔어요. 여행중에 피곤하지는 않았어요. 아, 그것보다 내 화랑이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이래뵈도 조선최고의 화랑이지요. 그 말을 하면서 조금 자랑스럽다는 듯 화랑 주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대일본조선일등화랑이라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조선일등 화랑인줄 알았는데 앞에 대일본이 붙어 있었다. 마음에 들다 마다요. 저도 나중에 이런 화랑 있으면 좋겠어요. 삼촌이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유마에게 부탁하면 어렵지 않을거요. 아니, 그보다도 내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은 점례 아가씨가 이 화랑의 주인이 셈이지요. 그가 이번에는 미소대신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주인이라고. 그런 말을 이리 쉽게 할 수 있나. 그러나 점례는 의문 대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연 조선에서 최고가는 화랑이라고 화답했다. 그 때 배에서 꼬드륵 소리가 났다. 점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검정 구두를 내려다봤다. 저녁은. 갑시다. 그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점례에게 물었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쾌할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안을 향해 소리쳤다. 

나나미, 저녁 먹고 올게. 그 소리를 듣고 안에서 작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요. 뭐라고요. 저녁 먹고 온다고. 그러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어 그럼 됐어. 우리 나가서 먹읍시다. 시장기는 참으면 안되요. 사정을 이해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못했어요. 먹고 오려다 삼촌을 먼저 뵙는 것이 도리라고 여겨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아, 그런 말 마시오. 유마가 보낸 사람은 유마와 마찬가지요. 나는 조카를 형님 만큼이나 사랑해요. 그 말은 진심인 것처럼 점례의 귀에 들어왔다. 배가 푹 꺼졌네요. 하하하. 그가 점례의 아래쪽을 보면서 호탕한 웃음을 이어갔다. 삼촌은 어서 나가자며 점례를 등 떠밀었다. 당신도 빨리 나와. 됐어요. 난 여기서 먹을게요. 이렇게 빨리 올 줄 알았다면 미리 준비를 했을 텐데, 지난 번 편지에서 유마가 도착 날짜를 말하지 않았어요. 이런 중요한 것은 미리 말했어야지. 만주 사정이 워낙 좋지 않거든요. 하루 연착하기도 했어요. 점례는 유마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벌써 두둔하는 거 보니 두 사람이 예삿 사이가 아닌 모양이야. 삼촌의 농담에 점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대화로 어색함이 조금 사라졌다. 거침없이 말하는 것이 유마와는 달랐다. 생각한 것을 말하는 유마와 달리 삼촌은 말하고 나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점례 마사코. 어서 갑시다. 안사람은 원래 늦어요. 우리가 가면 알아서 찾아오니 먼저 갑시다. 창씨개명한 이름에 삼촌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점례 마사코를 부르며 앞장섰다. 유마는 조선에 가면 일본식 이름을 쓰는 것이 좋다며 점례 이름 뒤에 마사코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어줬다. 삼촌은 애국심이 강해. 그래서 점례보다는 마사코라는 이름을 자주 부를 거야. 유마는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했다. 새삼 그가 고마웠다. 점례는 앞서가는 삼촌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 만요. 아직 뒤따라오는 숙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렸다 같이 가죠. 그럴거면 애초에 같이 나왔지. 삼촌은 괜찮다며 알아서 오든지 아니면 혼자 먹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점례는 또 그것이 불안했다. 숙모와 같이 있으면 이런 저런 피해가야 할 상황이 오면 모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맞대면 하고 같이 먹다니. 영 어색했다. 그러나 삼촌은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 따라가 보지 뭐. 배가 고파. 길을 따라 나란히 가면서 삼촌은 아내가 몸이 아프다고 했다. 움직이기 싫어나는 이유라고도 했다.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고. 화실에서도 아내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으니 그 점은 알아서 처신하라고도 했다. 아마,지금쯤 일어나 앉았을 거야. 성질 급한 사람은 기다리다 죽어. 그래서 밥도 내가 알아서 먹어. 원래 늦기도 했지만 몸 아픈 것을 핑계로 아예 늦기로 작정한 것 같아. 

참 말도 많은 양반이야. 거침없이 말해. 그런 것이 되레 점례를 편안하게 했다. 숨기고 감춘다면 부담스러운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 드러내 놓고 있다. 점례가 삼촌이 어떤 인물인지 속단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어떤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았다. 몇 마디로 말로 그 사람을 다 알 수 는 없다. 그러니 다 안다고 나 대지말자. 이제 막 난 경성에 온 거야. 마차에 내릴 때만 해도 조금 떨었어. 그런데 지금은.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느긋하잖아. 조금하자. 점례야, 이건 첫 대면이야. 이 사람에게 잘 보여야지.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알게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내 고생할 거야. 점례는 그 말을 곱씹었다. 쉽게 대답하지 말자. 말을 골라서 하자. 조신하게 행동하자. 물어 보는 것이 있다면 즉답을 피하자. 일단 유마가 알려준 말을 상기하자. 그는 삼촌이 물으면 피할 수 없이 꼭 대답해야 할 답변을 미리 뽑아 놓고는 점례에게 이렇게 대답하라고 정해 주었다. 그래,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그게 나를 위한 길이야. 유마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어. 내가 경성에서 뭘 알겠어. 풋내기지. 삼촌은 베테랑이야.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경성에 왔어. 그리고 제일 큰 화랑을 내고 돈을 쓸어 모은 다고 했어. 그런 사람과 내가 어찌 비교되겠어. 일단 실력으로 보여주는 것은 둘째치고. 여순이 다짐을 할수록 긴장감이 높아졌다. 이러지 말자. 이건 아냐. 내가 오버하고 있어. 너무 그러지 말자. 어깨가 아파. 목이 뻣뻣해. 되레 이상한 여자로 보일지 몰라. 평상시대로. 그렇지. 

밥집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자주 가는 식당인지 삼촌이 들어설 때 주모는 환하게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주종이 확실히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음식점 여자는 고개를 깊이 숙였고 유마는 알았어, 그 정도면 됐어 하는 폼이 두 사람의 관계가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무렴, 일본인이고 인사동에서 잘 나가는 화상인데. 함부로 대할 이유가 없지. 삼촌은 주모가 안내하는 것도 아랑곳 없이 자신이 앉고 싶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묻지도 않고 국밥 둘을 주몬했다. 주모, 여기 둘 가져와. 푸짐하게. 꼭 그 말을 해야 할까. 푸짐하게. 알아서 해 왔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음식점에 가면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단골이라는 핑계로. 그냥 주문하고 그것이 좀 뭐하면 대화하는 상대에게 눈길을 돌리면 될 것이다. 과연 주모는 푸짐하게 내왔다. 조센징들은 국밥을. 아니 한토인들은 국밥을 좋아하지. 안그래요? 삼촌이 조센징이라고 말했다가 얼른 거둬들이고는 점례의 눈치를 살폈다. 점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못들은 척 하다가 안 그래요가 질문인 것을 알고는 그래요하고 답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은 맛있었다. 그러나 배고픈 티를 내지 않았다. 한 그릇 뚝딱 하고 비우고 싶었지만 조금 남겼다. 그것이 예의라서가 아니라 밥을 먹는 모습을 관찰당하고 있다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더 먹지 그래. 시장했지. 더 시킬까. 아니 됐어요. 정말 잘 먹었습니다. 점례는 입을 닦았다. 삼촌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질문을 해. 보지 말고. 점례는 삼촌이 질문을 하는 것이 덜 부담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삼촌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점례는 머뭇거렸다. 알아서 해주면 좋으련만. 유마는 삼촌이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했지만 당장 그 말을 꺼내기가 어색했다. 어서 말을 해. 그래야 내가 가부를 결정하지. 점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가 어떤 제의를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이 맞다. 눈치를 챈 삼촌이 입을 열었다. 삼촌은 이 층에 방이 세 개나 있으니 당분간 거기에 머물라고 했다. 유마한테 들었어. 경성에는 일가붙이가 없다고. 고향은 보령이라 멀리 떨어져 있고. 네, 맞아요. 유마가 편지에 미리 말해 둔 모양이다. 삼촌은 거기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편이 있으라고 했다.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는 이라는 단서를 붙이지도 않았다. 고향에도 한 번 다녀오고. 삼촌은 그것이 점례를 위하는 말이라도 판단한 듯 싶었다. 

고향이라니. 점례는 죽마을에 갈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도 뵙고 휴의나 완용이나 여순의 안부도 확인하고 싶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떠나 올 때도 유마가 올 동안은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점례는 다짐했고 유마도 그것이 좋다고 동의했다. 실제로 만나 본 삼촌은 그런 결심에 힘을 주었다.  뭐, 나쁠 것 없어. 이 정도면 같이 지낼 수 있다고 판단이 들었다. 유마가 말했다. 절대 부담주지 말고 혼자 그림 것을 도와주는 것 외에는 일체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는 말을 삼촌은 점례에게 전했다. 유마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점례 마사코를 내버려 두라고. 돈을 대주고 거처를 제공하되 일체 간섭하지 말라고. 나를 뭘로 보고. 삼촌이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은 이래뵈도 누구를 터치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아내만 해도 내버려두고 있지 않느냐고 점례에게 물었다. 내 성격이 원래 그래. 난 누구를 묶어 두는 타입이 아냐. 그가 뭔가 먼저 손을 내밀기 전에는 내가 뻗지 않아. 그러니 점례 마사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모르거든. 나중에 유마에게 말해 나를 곤경에 빠트리지 말고. 점례가 그러겠다고 말했다. 삼촌이 껄걸 웃었다. 그래 그림을 잘 그린다고. 조선에서 그림을 잘 그리면 최고야. 더 바랄 게 뭐 있어. 조선 사람 중에 유명한 화가들이 즐비해. 내가 날 잡아서 그런 그림들을 보여줄게. 정선이나 윤복이 알지. 홍도도 그렇고. 점례는 들어 본 이름이라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그림을 본 적은 없다. 두서 그림은 내가 가지고 있어. 자화상을 보면 놀라 자빠질 거야. 고흐 알지. 서양사람은 명함도 못 내밀어. 그를 뛰어 넘어야지. 도쿄에서도 잠깐 그림 공부를 했다며. 점레는 고개를 들었다. 도쿄. 난 도쿄에 가본 적이 없어. 더구나 그림이라니. 아차, 유마가 말했지. 도쿄에서 잠깐 그림을 그렸다고 해. 오래 있지는 못하고 두 어달 잠깐 어떤 사람의 권유로 배웠는데 아직 멀었다고. 그러면 삼촌은 더 묻지 않을 거야. 왜, 삼촌은 그림을 그릴 줄 모르거든. 대신 볼 줄은 알아. 보는 사람을 늘 곁에 두고 있어. 그러니 물으면 거기 까지만 대답해. 혹시 더 물으면 별 것 아닙니다. 저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런 식으로 넘어가. 점례느 유마의 말을 상기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거기서 공부했다면 조선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을 거야. 더구나 여류 화가라. 삼촌이 군침을 흘렸다. 제법 큰 돈이 될 거야. 스토리도 좋아. 도쿄에서 공부했다. 만주에서도 있었다. 귀국해서 조선제일화랑에서 배웠다. 이 정도면. 삼촌은 머리를 굴렸다. 점례가 삼촌을 파악하는 동안 삼촌도 점례를 연구했다. 아직 이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런 식으로 혹은 저런 식으로 재단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했다. 

아쉬운 것은 점례다. 일단 삼촌 곁에 있으면서 저 만의 화풍을 익혀야 한다. 조선의 생활도 그렇고. 죽마을과 이곳 경성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배울 것이 많아. 일단은 숙이고 들어가면서 어떤 경우에도 내 신분을 들키지 않아야 해.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점례는 또 불안했다. 이런 때 유마가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삼촌이 다 알려줄 거야. 그림도 인생도. 그는 이런식으로 삼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돈이라면. 그거는 걱정하지 마. 내가 미리 지불했어. 점례는 놀랐다. 지불하다니 미리. 어,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필요한 건 마음대로 쓰면 돼. 특히 물감 아끼지 마. 종이도 마찬가지. 그림에 관한 거라면 최고로 선택해. 약속해. 믿을 수 없다. 그렇게 까지 고급일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의구심을 보내자 유마가 손가락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알았어요. 처음이니 지켜보자. 그 말이 사실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고. 오바 했다면 내 그림을 팔면 된다. 화방생활을 도와도 된다. 화실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 물감값이야 못 벌겠어. 나도 체면이 있지. 공짜로 다 할 수는 없어. 돈 걱정은 정말로 진짜로 절대 하지마. 그것은 진심이었다. 유마의 진심을 지금와서 안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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