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힘겹게 그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바로 열리지 않고 바르르 떨리기를 몇 번 반복한 끝에 나온 말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어. 휴의는그 광경을 암탉이 알을 낳은 장면은 훔쳐 보는 것처럼 지켜봤다. 일주일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던 그가 말을 한 것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것이 어떤 것인지 휴의는 알지 못했으나 청년의 마음이 바뀌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나에 대한 배려 때문인가. 지레 짐작하지 않는 휴의였지만 이 순간 만큼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배려를 받을 만큼 노력을 했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앞에서 어렵게 입을 연 조선청년이라면 그런 감정을 느낄 만도 했다. 내가 손수 했다. 피를 닦아주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찢어진 곳을 꿰맸다. 그리고 붕대도 정성스럽다면 그렇다고 할 만큼 세심하게 감아주었다. 병주고 약줬다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런 마음이 먹혀 들었던 것일까. 휴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알이 덤불 더미로 막 떨어질때처럼 감격하면서 지켜봤다.
나는 조선사람이오. 조선 사람. 그는 나도 안다. 굳이 아는 사실을 어렵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 그게 어때서? 조선사람이 뭐 벼슬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휴의는 심통이 났다. 첫말 치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본사람은 다 날강도라도 된다는 말이냐. 이런 억하심정도 있었다. 그러나 휴의는 그와 대항해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의도적으로 도전하려는 마음을 접었다. 나도 그렇소. 나도 당신과 같은 조선사람이오. 내 나이 젊소.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 아닌가. 두 말을 합쳐 보면 나이 젊은 조선 사람일 것이다. 실마리 치고는 고약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휴의는 그 말을 경청하면서 나도 그렇소하고 청년의 말에 동의했다. 그것은 너와 내가 비슷하다는 동류의식을 심어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날 따라 하는 것이오? 놀리기로 작정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오. 아니오. 놀리려는 의도가 없었소. 그랬다면 내가 한가한 것이오. 보다시피 난 내 직책에 맞는 일을 하기에도 바쁜 몸이니 그런 말은 내게 한가하게 들립니다. 그리고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지 않소? 당신과 같은 조선사람인 것과 나이 젊은 것은 당신이나 나나 인정하는 바 아니오? 휴의가 점잖게 나왔다. 어느 순간 그의 본성이 살아나서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럴 때 휴의는 자신의 본모습과 내면이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축축한 공간이 말라 오는 느낌이었다. 장마로 질척한 방안에 장작불이 타들어 가면서 습기가 가셔지기 시작했다. 좀 덥지만 견딜만 하다. 습한 것보다는 낫다. 간단한 몇 마디 말로 둘은 대화의 물꼬를 터나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말이 통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둘은 동시에 느꼈다. 조선청년은 따라하는 말이 자기를 무안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휴의는 청년이 입을 열자 심문자의 위치가 아니라 비슷한 나이 또래가 겪는 고민 거리를 서로 상담하는 자리로 간주했다. 자신의 시련을 견뎌온 세월이 입을 열 때마다 드러났다. 나의 시련도 너 못지 않아. 휴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비교해 보면 누구의 시련이 이 순간 더 큰지는 재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휴의는 답답한지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손에 잡히는 담배를 의식했다. 그래, 이거지. 그는 손에 잡히는 것을 꺼내 하나를 입에 불고 성냥을 그었다. 화약냄새가 훅하고 피비린내처럼 전해졌다. 그는 그것을 입에 물고 깊고 길게 한 모금 빨아 들였다. 그러느라고 볼은 홀쭉해졌고 내 뱉을 때는 올챙이 배모양으로 불룩해졌다. 말없이 휴의가 손으로 잡은 담배를 그의 입에 갖다 댔다. 피시오. 휴의가 경계했다. 걱정 말아요. 대마초는 아니니. 피울만 합디다. 그러나 휴의는 입에 문 그것을 손으로 가져가는데 불편을 겪었다. 비록 수갑이 제거된 상태였으나 오랫동안 묶여 있어 제 역할을 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눈치채고 휴의가 빨아 들이기 쉽게 담배를 입의 가장자리로 옮겼다. 어렵게 말했던 것처럼 어렵게 연기를 빨아 들이면서 휴의가 치켜 뜨듯이 하는 눈초리로 휴의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는데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한 번 보기나 하자는 표정이었다. 눈길을 피하지 않고 휴의가 마주 대했다.
연기를 뿜어낸 청년이 다시 말을 하려고 하자 휴의가 다가가 입에 문 담배를 다시 자시 손으로 옮겨 와서는 자기가 빨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 차례 군요. 굳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아니었다. 순서로 보면 돌려피는 담배는 서로 한 모금 씩 하기 때문이다. 피식 웃는 듯한 표정이 얼핏 청년의 얼굴에 보였다. 그는 유언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집중했다. 마치 숨이 넘어 가는 사람이 둘러 앉은 자식들에게 하는 말처럼 놓쳐서는 안될 말 같아 휴의는 경청했다. 질무보다는 그가 말 할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입을 닫았다가 열었다가를 반복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데는 인내심이 필요했으나 어차피 휴의는 달리 할 일도 없었고 오늘 저녁은 이 사람과 함께 대화하고 싶은 욕구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조급할 이유는 없었다. 모레면 토벌대장이 온다. 그가 오면 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지 모른다. 그가 오기전에 자신이 신병을 처리하고 싶었다. 풀어주든지 아니면 가두든지 그도 아니면 처형이라는 극형을 내리든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로 휴의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곳은 독립운동 하기에 최적지요. 여기서 나는 내 안에 가득찬 독립의 의지를 느끼고 있소. 선혈들의 기운이 내게로 오는데 그것을 거부할 힘이 나에게는 없는 것이오. 몸속의 기운이 펄펄 끓어 오른단 말이오, 당신은 그것을 못느끼오. 다만 내가 아쉬워 하는 것은 잡혀서 그 일을 더 는 할 수 없다는 것이오. 나도 알고 있었소. 그는 휴의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눈치였다. 처음 본 순간 당신은 시장통의 상인들을 뜯어 먹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소. 청년이 다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의자 옆으로 뻗어 내린 휴의의 손을 보았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휴의는 그에게 담배를 물리고 이번에는 담배 위치를 조정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다 당신 것이니 알아서 피시오. 말을 할 정도면 담배 정도면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가능하겠지요? 내 말이 맞지요? 휴의가 귀찮은 듯이 말했다. 나도 도움을 더 받을 생각이 없어요. 청년은 그 말을 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렇게 긴 말을 해도 이상이 없는 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듯이 그는 입술에 침을 묻혔다. 마른 침이 꿀꺽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괜찮겠다 싶었던지 더 많은 말들을 했다.
그러나 중간 중간 끊겼다. 말을 고르는 것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휴의는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으나 답답해서 참을 수 없을 때는 그냥 넘어가기보다는 질문을 하는 것으로 청년의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다. 청년의 말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라 잃은 백성이 해야 할 일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이오. 당연한 것에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요. 이는 망국인의 당연한 권리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일본을 강제로 빼았았다고 칩시다. 일본 국민이 가많 있을까요. 그들 역시 자기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을 거요. 그러니 조선사람이 하는 것도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거요. 그것이 죽음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적어도 나에게는. 당신에게는 이해가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이해가 갑니다. 당신은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입니다. 독립도 좋지만 우선 살고 나서야 독립 아니겠소? 하고 묻고 싶은 거지요. 기개를 펴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 앞서 먹고 살아야 한다고요.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는 먹지 않고도 싸웁니다. 싸운다는 것을 날강도 일본에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야 자신들의 잘못을 압니다. 가만히 있으면 몰라요. 그래서 내가 나선 것이요. 알겠어요. 모르겠는데요. 휴의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난처럼 들릴 수 있어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원통한 것이오. 이 대목에서 조선청년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자기 생명이 소중한 것을 지금 처음 느끼기라로 하듯이. 그래서 분하다는 것이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잡혀서 죽게 됐으니 오죽 분하고 원통하겠어요. 내 심정은 지금 내 심정은 한 마디로 복장이 터져 스스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다행이라고요. 그렇소. 분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요. 그러면 날 죽이지 않을 생각인가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소. 그가 그 말을 하면서 손을 급하게 털었다. 꽁초된 담배불이 살을 타고 있는 듯했다. 이리 주시오. 한대 더 드릴까요. 아니 됐어요. 굶었다 피니 머리가 핑 돌아요. 그렇지 않아도 제정신이 아닌데 니코틴 때문에 어질거립니다. 알았소. 필요하면 말하시오. 그러면 주겠소. 휴의는 앞 호주머니가 불룩한 곳을 손으로 툭 치면서 말했다.
누구나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요. 나는 독립을 당신은 독립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소. 나는 내 신념에 따라 하는데 당신은 당신 신념에 따라 하는 일이오? 조선 청년이 휴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신념 말이오? 휴의는 약간 당황했다. 내 신념이라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고 완용과의 경쟁심이고 진급하는 것이고 나를 알아주는 토벌대장을 위해 독립군 때려 잡는데 나서는 것인데 그것이 신념이라면 신념이겠지. 내 신념까지 말해야 하오. 내가 당신 신념을 들었다고 내 신념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휴의는 약한 곳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를 구서으로 몰면 이롭지 않을텐데. 대답 대신 휴의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난 얼마전에 죽었다 살았소. 그래서 운이 좋아 오래 살줄 알았는데 당신네 졸개에게 당했어요. 어디서 잡혔어요. 누구한테. 잡힌 것이 아니오. 잡히기 전에 어떤 조선 여자가 나를 구해 주었소. 만주행 열차에 올랐을 때 왜경이 나를 지목하고 체포하려고 기차에 올랐지요. 난 빠져 나갈 수가 없었어요. 죽기전에 왜놈하나 처지하고 죽으려고 권총에 있는 총알 수를 셌지요. 네 명은 죽이겠군. 나머지 한 발을 나를 위해 남겨 놓자. 이렇게 절망에 빠졌을 때 난 조선 여자를 보았다. 손에 책을 쥐고 있었는데 보는 순간 내 목숨을 살려줄 은인으로 여겼어요. 휴의가 귀를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흥미로운 대목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어서 말해 보시오. 난 다짜고짜 그녀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소. 난 쫓기는 조선청년인데 날 동행한 오빠라고 보증을 서달라고 말이오. 그녀가 어떻게 나왔겠소? 그걸 묻는 거요. 당신을 살려준 은인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나왔겠지요. 맞아요. 그녀는 나를 오빠로 지목했어요.
휴의가 시계를 보았다. 정오가 오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구료. 나는 여명이 밝으면 당신 신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하오. 당신이 살아 나갔으면 좋겠소. 인간적으로. 그러나 당신이 잡혀서 내가 풀어준 것이 들통나면 내 인생은 당신 인생보다 더 비침해질 것이오. 내가 당신 때문에 그래도 되겠소? 이렇게 말하는 휴의의 표정은 평화롭고 억양은 부드러웠다. 마치 선생이 아끼는 제자에게 대화술을 가르키는 모양새였다. 청년은 즉각 아니라고 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오. 서로 가는 길이 달라 이렇게 운명이 달라졌으니 이것은 어쩌면 신의 뜻인지도 모를 일이오. 다만 아까 내가 질문했던 신념에 대해 답변해 주시오. 나의 신념을 말했으니 당신의 신념이 궁금하오. 까짓껏 말해 보지요. 숨기고 싶은 이야기까지 한 마당에 내가 말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게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알았으니 당신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은 당연하니까.
나는 잘 살고 싶소. 잘 먹고 잘 살고 조선 사람들도 그랬으면 싶어서 이 일에 뛰어든 것이오. 잘 사는 일본밑에 있으면 조선도 잘 살게 되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도 독립보다는 내 밑에서 토벌대 활동을 하는 게 어떻겠소? 내가 토벌대장에게 추천하겠소. 당신의 인격을 고려해 졸병은 아니오. 그렇다고 내 위도 아니고.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과분한 직책일 거요. 전향을 하라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 같은 신념은 바뀔 수 있어요. 사람의 본성은 편한 것을 따라가게 돼 있어요. 먹고 싶은 것 없소. 사고 싶은 것은. 휴의가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내 보였다. 이거 독일산이오. 토벌대장이 나에게 준 선물이오. 한 번 보시겠오. 시간은 물론 날짜도 정확한 게 신기랄 따름이오. 이런 것 하나 차고 있어야 청년의 기개가 서지요. 한 번 차 보겠오. 농담이오. 그러나 한 번 시계를 차보면 차보기 전과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느낄 것이오. 물 좀 주겠소. 휴의가 일어섰다. 오래 앉아서 인지 어깨가 뻐근해 그는 일어서면서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물렀다. 그가 병 두개를 가져왔다. 물과 술이오. 원하는 것을 드시오. 먹여주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새 손이 좀 풀렸어요. 내 손으로 선택할 수 있겠소. 난 이거요. 그가 술병을 잡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나도 주시오. 휴의가 술병을 받아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병 주둥이 상태로 벌컥하고 한 모금 마혔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소. 왜놈 밑에서는 아니오. 왜놈밑에 있으면 제 동족을 필시 핍박하게 되 있소.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듯이 조선청년이 말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하는 일이 왜놈 밑에서 조선 독립군을 잡는 일이니. 그것이 내가 싫어하는 이유요. 왜놈과 손을 잡으면 반드시 조선사람을 잡게 되 있어요. 그들이 원하니까요. 결국은. 됐어요. 휴의가 말을 가로 막았다. 대화가 시작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괴로운 가요. 그러면 머리를 쥐어 뜯지만 말고 내편으로 넘어 오시오. 일본놈 따라 다녀 봤자 가슴만 아플 것이요. 청년의 가슴이 아프면 노년에는 어쩌겠어요. 조선말을 쓰고 조선글을 쓰는 우리는 조선사람이지 결코 본토인이 될 수 없어요. 그만. 입 닥치시오. 나도 처음에는 당신처럼 일본에 부역하는 편한 삶을 원했소. 그러나 어느 날 양심이 불현듯 찾아옵디다. 그것이 왜 찾아 왔는지 참. 나 잘 살자고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갑자기 개안이라도 한 듯이 어느 날 나는 독립군을 찾아 이곳 만주까지 오게 된 것이오. 그리고 내 임무를 성실해 완수했소. 평양의 후원자를 만나 독립자금을 확보해 무사히 상하이에 계신 선생님께 전달하는데 성공했소.
그게 내 첫임무였고 첫 임무를 수행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홀로 중국집에 갔던 것이오. 짜장면을 먹으면서 내 수고로움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위로를 받고 싶었지요. 이런 감상이 혁명의 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길로 가는 내 발길을 막을 수 없었소.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 집 짜장면 맛은 당신도 잘 알 것이오. 부드러운 면발과 간장 소스를 먹을때 나는 내 임무가 하나 성공하면 나에게 주는 칭찬의 표시로 짜장면 한 그릇을 먹겠다고 다짐했소. 그렇게 잘 먹고 있는데 당신 부대원들이 쳐 들어왔고 나는 다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잡혀 왔소. 내가 억울한 것을 말해 줄까요? 먹은 짜장면이 다 소화도 되기 전에 고문으로 토해져 나올 때 였소. 정말 아까웠고. 할 수만 있다면 토해나온, 삭기전의 면발을 다시 먹고 싶었단 말이오. 짜장면 먹을 날은 앞으로 많을 것이오. 아니오. 중국집 주인장을 작살낸 것도 당신들 아닌가요? 그곳 주인장은 엉망이 된 얼굴로 자기 집 앞에 버려진 뒤로 어디로 떠난지 모르게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소. 짜장면 집은 거기 말고도 쎄고 쌨소. 그 사람 만큼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은 없었소. 죽기 전에 그 사람이 만든 짜장면 한 그릇 더 먹고 죽었으면. 그럴 기회는 틀림없이 올 것이오. 휴의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
내가 또 한가지 재미난 일을 해줄까요? 어디 한 번 들어 봅시다. 내가 만주에서 특명을 받고 평양으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탔다는 말은 했지요. 그런데 기차가 출발을 하지 않지 뭡니까. 뭔가 잘못됐다 싶어서 하차 하려고 하는데 일제 경찰이 양쪽 문으로 밀고 들어 오지 뭡니까. 거기까지는 했어요. 들어 보시오. 보충할 게 있으니. 죽었다 복창하고 있었지요. 중요한 임무인데 출발도 못하고 죽게 생겼으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있겠어요? 그래서요. 우리가 잡은 것은 기차안이 아니라 중국집 아니었소? 맞아요. 나는 거기서 정말 운 좋게도 체포를 면했어요. 말했어요. 조선여자가 등장했지요. 형사들은 모든 사람의 신분증과 소지품을 일일히 다 검사했어요. 물론 나도 가짜 여행 허가증이 있었소. 그러나 가방안에는 그것 말고도 다른 것이 있었지요. 권총 이었소? 맞아요. 권총. 어디 버릴 순간도 버릴데도 없이 꼼짝 없이 당하게 되는 순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조선 여자에게 구원을 요청했소. 조선 여자라고요? 아까 나왔던 그 조선여자와 동일인이지요. 그래요. 우리 또래 였을 거요. 침착했으며...얼굴도 예뻣소. 그 여자는 나를 구해줬어요. 일본 대장의 허가증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휴의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본 대장의 허가증을 갖고 있는 조선여자라. 일본 대장이라면. 아, 당신 상관이겠네요. 유마 호사카라고 만주군 총사령관. 휴의는 입맛을 다셨다. 달리 어떻게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소. 대일본제국의 대장 허가증이 여기 있다. 얼마나 당차던지 거기 있던 형사가 바짝 기가 죽었다오. 그 표정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기세좋게 달려들었다가 낭패를 당한 꼴이라니. 그러나 그 자도 호락호락 하지 않았소. 당장은. 그러자 여자가 일어났소. 그리고는. 그리고는. 그 자의 따귀를 보기 좋게 올려 붙였소. 불룩한 배를 앞으로 내밀면서 너희 대장의 아기가 자라고 있다고 했소. 얼굴을 맞아 아픈 곳을 다스리기 위해 손을 댔던 그 자는 그 손을 들어 경례를 올려 붙였소. 나를 검문하기는 커녕 손이 발이 될 때까지 싹싹 빌었소. 당신도 봤으면 좋았을 것이오. 헌병들은 나에게도 경례를 했어요. 왜경에 조선 독립군이 경례를 받았지 뭡니까. 그러더니 올린 손을 내리고는 앞으로 여행의 안전을 보장하는 자기들의 허가증을 나에게 내밀었소.거 참 다행이군요. 그런데 조선여자와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기차는 그날 출발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래서 손님들은 모두 하차했지요. 그녀는 갈 곳이 없었소. 그래서 내가 안가로 신세를 갚을 겸 해서 모시고 가서 하룻밤을 재워 드렸던 것이지요.
당당하던 그녀는 거기서 말을 뚝 끊었고 나도 그녀가 말하지 않는 한 묻지 않았소. 생각 같아서는 일본대장의 여자이니 잡아서 선생님께 데리고 갈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를 구해준 생명의 여자에게 차마 그런 짓은 할 수 없었소. 그렇게 했다면 그것이 인간 아닌가요? 적이라도 대우를 해줘야 하지요. 잘했어요.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오. 그렇지요? 칭찬을 받으려는 듯 조선청년의 얼굴이 잠깐 붉게 빛났다. 그래, 여자의 진짜 신원은 뭐랍디까? 모르겠어요. 그림을 그린다고 했어요. 경성에 가서 크게 화상을 한다는 일본 삼촌을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일본 삼촌이라. 이게 도통 뭐가 뭔지. 이름은 알고 있소. 헤어질 때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아요. 악수를 하면서 나는 그녀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소? 그러기 전에 내 이름을 말했지요. 000 휴의는 그 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000입니다. 라고 말하니 그녀도 마지 못해 아니 아직 통성명도 안한 사이인가요 웃으면서 말했어요. 휴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점례에요.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요. 지점례. 휴의는 죽마을 점례가 그 점례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묻지 않았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살아 있다니. 그것도 내 상관인 일본 대장의 아내로. 경성으로 가고 있다고. 휴의는 몸이 뜨겁게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서양옷을 입었어요. 겉보이기에는 평범한 여자였소.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몸매가 눈에 어른 거려요. 머리가 궁금하지요. 길렀을까요. 아니면 단발로 잘랐을까요. 휴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 자가 수작을 마무리 할때까지 기다리자. 길렀어요. 긴 머리를 요즘 유행하는 노랑 스카프를 이용해 뒤로 묶었지요. 그런 갸려닌 여자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형사들은 정말로 내 몸에 손을 대기는 커녕 가방을 뒤지지 못하고 하차했던 거지요. 그녀가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지 않던가요? 왜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내가 묻지 않은 것처럼 내 신분에 대해 끝내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다만 위험한 일을 한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요. 왜경을 피해 다니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신세를 갚을 요량으로 혹은 다음에 혹시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나는 경성에 간다고 하니 혹시 어려움이 있을 경우 이 곳에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아는 형님의 주소를 주었소. 아니 일본대장의 여자에게 주소를 주면 당신도 위험해 질 수 있잖소? 그래도 여자에 대한 고마움은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소. 그리고. 조선여자가 조선사람을 위험에 빠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한 핏줄을 갖고 태어난 한 핏줄이니까요.
설마 나를 살려준 의인이 나를 함정에 빠트리겠소? 그런 식으로 독립운동을 한단 말이오? 정말 순진하군요. 휴의는 이 청년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적인 건 알겠는데 그것이 있으면 독립이 재미 있는 일이 되겠지만 어림없어. 더 배워야 해. 인정사정 없어야 하는 것은 저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저런 인정을 베풀다니. 휴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것이 분하단 말입니다. 내가 일본놈한테 잡혀서 고문을 받거나 죽는다면 덜 억울하겠소. 그런데 말입니다. 같은 말을 하는 조선사람에 이렇게 당하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청년이 눈을 감았다. 죽은 사람처럼 고요했다. 이제는 자신이 말할 차례라는 것을 알고 휴의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이 일을 아시오? 청년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모르지요. 안다면 찬성했을까요. 청년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반대할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와는 다른 대답을 했다. 그야 모르지요.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나요? 모르지요. 안다면 찬성할까요? 그야 모르지요. 처음 처럼 따라하는 말이 되었군요. 조선 청년이 빚을 갚았다는 투로 말했다. 휴의는 씁쓸했다. 이건 심문이 아니야. 이럴 즈음 조선 청년은 좀 더 과감해졌다. 자신이 포로의 신분이라는 것도 잊고 감히, 함부로 라고 할 만한 말들을 했다. 민족을 배산하는 자의 말로는 비참할 것이오.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가. 졸지에 민족 배신자가 된 휴의는 얼떨떨했다. 매질을 해야 하나. 아니면 한 방에 끝내야 하나. 그러나 휴의는 이미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구타보다는 대화가 더 필요했다. 그래 지금은 일제가 점령하고 있어 조선백성들이 힘들다고 합시다. 그럼 조선왕일때는 편안했소? 수탈당하지 않고 제 몫을 백성들이 다 챙겼냔 말이오.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끌려가지 않았고요? 억울한 일 때문에 복장이 터져서 죽는 사람이 조선 팔도에 없었단 말이오? 내친 김에 휴의는 말을 더 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래 당신은 독립을 하기 전에 조선민이라는 것에 만족을 하고 있었소? 그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휴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힘들었어. 지주에게 수탈 당했어. 지금의 난 행복한데 그 때의 난 험란했어.
만족 이라고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어요. 절대로. 조선 왕은 백성보다는 자기들 편만 아꼈소. 그래서 난 백성으로 만족하지 못했소. 다만 나라를 뺏기고 나니 그 전에는 지금보다 조금은 행복했다는 것은 말하고 싶소. 조금 가지고 되겠소. 조금 때문에 목숨을 바치다니. 휴의가 혀를 찼다. 더구나 행복이라니. 나는 늘 불행했소? 열심히 일해도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었소. 집은 대대로 가난했고 나 역시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소. 그러다 기회를 잡았군요?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요? 일제가 있으니 독립군도 있는 것 아니요? 내가 기회를 잡았듯이 당신도 잡은 것 아니요. 좋소, 다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만 더 묻겠소. 내선일체인데 왜 일본놈은 높고 조선인은 낮은데 있어야 하오. 일본인이 지나가면 조선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표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어요? 휴의는 자신이 떠나올 때 순사가 완용을 데리고 죽마을에 온 것을 상기했다. 이번에는 휴의가 잠시 머뭇거렸다. 차차 좋아지지 않겠소. 그리고 나서 뜬금없이 고향에 대한 이야가 나왔다. 대화가 샛길로 빠진 것이다. 휴의는 충남 보령이라고 했고 조선 청년은 홍성이라고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우린 동향이네요.
둘은 그 말을 동시에 했다. 동향. 그런 것이지요. 나라가 같고 사는 곳이 같으니 이렇게 서로 웃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느낌 일본인은 알지 못하지요. 죽었다 깨나도. 그래요. 좋은 세상이 오면 광천에서 그래, 광천이 홍성과 보령의 중간이니 광천 배다리에서 만나 새우젓에 막걸리 한 잔 합시다. 일이 이렇게 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청년이나 휴의는 서로에게 남아 있는 꺼림칙한 기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할 일이 있었다. 휴의는 이제 마무리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를 그가 맺었으나 일은 내가 끝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풀어주면 어떻게 할 것이오? 풀어준다고요? 놀랍군요. 동향에 대한 예의 인가요? 아니면 조선여자 이야기에 감명 받았나요? 이제 질문할 시간도 답변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묻는 말에 대답하시오. 그 길로 다시 독립군에 들어가야지요. 다음에 잡히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텐데도요. 그것이 운명이라는 따라야지요. 어쩌구니 없군요. 독립된 나라에서 무엇 하고 싶은가요? 수상이오, 장관이오, 아니면 군인이나 경찰이오. 군인이나 경찰은 독립이 없어도 가능하오. 나를 모면 모르겠소. 우리 토벌대장도 조선인이오. 서천 사람이지요. 그래요? 부대장까지 함께 모여 향우회 한 번 합시다.
나는 내 힘을 믿어요. 내 몸의 빛으로 조선을 밝히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오. 손대지 못한 인생이 아깝지 않소. 남은 인생은 길어요. 아주 길다고요. 당신 정도의 신념이라면 앞으로 손댈 인생은 찬란할 것이오. 다가올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느냐 마느냐는 나의 자유요. 알았소. 알았다고요. 다만... 나에게 잘 해 준 것에 대해 고맙소. 나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당신 자유요. 풀어주든 죽이든. 이 말은 조선청년이 휴의가 들을 수 있도록 밖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하면 사족처럼 불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말로 그는 치료해 주고 상처를 꿰매 주어서... 다시 한 번 고맙소. 이렇게 감사의 말로 마무리 지었다. 이것으로 조선청년과 휴의와의 대화는 끝났다. 휴의의 결정만 남았다. 그를 풀어줄 것인지 더 잡아 둘 것인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더 인생의 풋내기 인것은 분명했다. 아직 익지도 않은 인생을 여기서 끝맺기는 너무 억울해 보였다. 내가 그 처지라면 어떨까. 정말로 분해서 잠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없는 그만의 철학이 있다. 어디서 누군한테 무엇을 배웠기에 그는 고문자 앞에서 이토록 자기 주장을 당당히 할 수 있는가. 휴의는 자신이 그와 같은 처지였다면 과연 그런 말을 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중국집 주인장과 이 조선청년은 어찌 이리도 다른단 말인가. 아무말이나 하면서 심지어 없는 거짓말까지 지어내고 처자식까지 팔아 먹으면서까지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자와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조선독립군의 길을 가겠다는 이 청년은 도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가. 휴의는 음식을 주라고 불침번에게 지시하려다 말고 그 자신이 직접 음식을 주고 밖으로 나왔다. 드시오. 김이 모락모락 날 때. 휴의는 어두운 계단을 벗어났다. 마치 감옥에서 풀려나온 사람처럼 홀가분 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뻐근한 목이 좀 개운해졌다. 하늘의 별은 스러지고 있었다. 새벽이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죽이면 평생 후회할 거야. 나이도 같고 동향까지 같으니 죽이기는 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숱한 죽음은 이 순간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신창이 주인장에 대한 안타까운 애초에 없었다. 다른 죽음과 달리 이번 죽음은 다르다. 틀림없이 후회로 괴로울 거야. 그래 후회. 휴의는 후회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일본인에게 잡혀 죽으면 덜 억울하겠다는 말이 자꾸 귀에 거슬렸다. 조선인이 왜 조선인을 죽이느냐고 할 때는 울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가 갖고 있는 신념이 옳은가.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고 청년은 조선을 택했다. 나라를 앞세웠다. 천웅역의 교장은 황국신민인 자의 의무를 이야기 했다. 황군을 위해 죽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총을 잡지 않고 뒤로 빠지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조국? 내 조국은 조선이 아니고 일본인가? 아무렴 어때. 휴의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살려줄까. 그래서 그 뒤를 염탐해 독립군 대장을 잡아들일까. 미끼로 삼을까. 조선여자의 행적을 쫒아 경성으로 들어갈까. 그러면 뭐가 더 큰 것이 나오지 않을까. 그냥 놓아줄까.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작은 물고기처럼 그냥 물속으로 풀어줄까. 그러면 조선청년도 신바람을 울리면서 바다 깊숙히 재빨리 사라지겠지. 세상밖으로 나가 이번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겠지. 설마 나를 비웃지는 않을테지. 몰라,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지. 왜 이 자 앞에서 내가 이런 고심을 해야 하지. 휴의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청년은 이미 신분이 노출됐고 잡혀간 이후 그와 독립군간의 모든 접선은 차단됐다는 사실이다. 놓아준다고 한들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당장에 없을 것이다.
마음이 흔들렸다. 새벽의 선선한 바람이 분것도 휴의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다. 이 정도의 바람은 참 좋아. 피부가 고맙다고 인사하네. 고향 죽마을에도 이맘때쯤 그 바람이 불었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휴의는 바닥의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희미한 전등불이 깜박였다.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다. 선택의 낮은 낮은 포목으로 적군처럼 은밀히 다가오고 있다. 조선청년과의 대화는 유익했어. 그런 자를 만나다니. 의심보다는 신뢰감이 싹튼 거야. 헛된 시간이 아니었지. 토벌대장은 곧 온다. 발걸음이 들린다. 빠르게 다가온다.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내 마음도 덩달아 급해지네. 그가 돌아오면 깨끗한 자리에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해야지. 그런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손으로. 휴의는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방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토벌대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닦고 쓸고 문질렀다. 그러다가 조금 열려 있는 서랍에 눈길을 돌렸다. 칠칠맞게. 대장 답지 않게 열어 놓았네. 그는 닫았다가 궁금해서 다시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다른 것은 없고 작은 봉투 하나가 있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열고 내용을 확인했다. 몹시 떨려왔다. 대장이 뭐하니 너 거기서? 하고 호통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독립군 타격 일지. 봐서는 안될 것 같기도하고 봐도 별 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한 번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어 휴의는 그것을 읽었다. 일지는 한달 일과를 시간순서대로 나열한 다음 마지막에 총평하는 것으로 끝났다. 중요한 것만 다뤄 내용이 짧았기 때문에 서너 달 치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서 휴의는 떨리는 손을 감추지 위해 호주머니에 넣고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닦다 만 걸레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아무데나 버렸다. 거추장 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누가 보고 있는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는지 두리번 거렸다. 그는 숙소를 나와 태연히 연병장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흥분을 가라 앉히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 벚꽃이 의자 위에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다. 그는 고민했다. 자신이 단독으로 돌진했다 놓친 사건에 대한 평이 마음에 걸렸다. 토벌대장은 조선인들의 무모함과 전략없음을 휴의탓으로 돌리면서 조센징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조직으로 침투하지 않고 단독으로 실행해 실패한 것은 성공해서 열매를 혼자 독차지 하려는 조센징의 나쁜 습관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번 일부 작전 성공이라고 보고서에 올렸다는 말은 거짖이었다. 말로는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달리 쓴 것이다. 자신을 믿는다고 하더니 철저히 그 반대로 적었다. 일주일 뒤에 적은 보고서는 자신의 직속 부하는 아직 애송이인데 열의만 있을 뿐 지략이 떨어져 고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자들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경계 인물로 휴의를 지목했다. 소대장이란 자가 마음이 여리다. 마음이 여린 자는 반드시 배신한다. 요주의 인물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이 것으로 독립군 토벌의 먹잇감으로 그들에게 넘길 조센징을 물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믿음을 주기 위해 토벌대 요원 중 한 명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 휴의는 자신이 독립군에 잡혀 고문 당하는 상상으로 머리가 갑자기 어지러웠다. 나를 팔아 넘길 속셈이었구나. 역공작의 대상이 나라니. 죽자 살자 일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이런 대접이었구나. 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어쩔 것인가. 휴의는 고향의 부모를 생각했다. 득의만만할 때는 떠오르지 않던 모습이 궁지에 몰리자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어떤 굴욕에도 참고 견뎠으나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자 휴의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했다. 코풀고 난 휴지조작이 나란 말이지. 도대체 토벌대장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나를 버렸어. 난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는데. 날 믿어준 것은 다 거짓이었다고. 그렇게 해서 편하게 뒤통수를 친 거지. 난 빠지지 않았어. 그가 쳐논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고. 휴의는 배신에 몸부림쳤다. 이럴 수 있을까. 꼬박 3년을 그를 위해 싸웠어. 그것에 나에 대한 배려인가. 싫다 싫어. 인간이 싫어. 그런데 한 사람 점례만은 예외였다. 그는 싫은 사람이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를 떠올렸고 그게 점례였다. 점례는 어디있을까, 문득 그는 점례를 보고 나서 죽어도 죽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고 자신과 미래를 언약했던 점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차에서 조선청년을 구해주었던 그 조선여자라면 나의 이런 고민을 풀어 줄 것이다. 점례, 휴의는 점례를 나직이 불렀다. 그녀는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았어. 잘못된 길로 빠져 들지도 않았고. 휴의는 심란했다. 그는 의자에 누었다. 누우니 보이지 않았던 하늘이 보였다. 새벽별이 쓰러지고 있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여기인가. 휴의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조선청년의 그 부모한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
나에게 더 할말은 없었을까. 남은 말을 내가 가로막지는 않았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나올 때 나는 그와 우정어린 작별을 했다고 생각해. 그 순간 만큼은. 나는 새로운 숙제를 안고 있어. 푸른 빛.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고 나는 이제 문제를 풀어야 해. 늦기 전에. 휴의는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는 것이 생각을 마무리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별 대신 숲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외로움이 몰려왔다. 탈출을 꿈꾸는가. 나는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가. 조선 청년은 내 가슴에 총을 쏘았다. 난 뻥 뚫렸고 방황하고 있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커져간다. 내가 가졌던 신념은 무너졌다. 내가 충성했던 그는 나를 배신했다. 무력으로 통치하다 안 되니 좋은 말로 다스리려는 일제와 같은 교묘한 술책이다. 나는 일회용이다.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이고 이제 쓰임새를 다했다. 토벌대장에 존경은 경멸로 바뀌었다. 덩달아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잠시 다른 길로 갔어도 본래 제자리를 찾는다. 그렇다면 나의 외도는 이것으로 끝인가. 점례는 왜 불량선인을 도왔을까. 그 청년은 또 잡혀왔다. 운이 나쁜 사람이다. 두번씩이나. 그러고도 살려고 작정할 수 있나. 그는 나에게 털어 놓았다. 나를 믿는다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나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그에게 전했다. 이젠 내가 처량하다. 날 동정해 줄 사람은 토벌대장이 아닌 조선청년 천봉원이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 무서워 벌벌 떨었던 자들과는 달랐다. 내 눈을 감히 똑바로 보지 못했어. 그런데 그는 정감어린 눈으로 나를 봤어. 그 눈은 점차 바뀌었지. 너를 동정해. 나와 함께 가자. 여기를 떠나자.
내 가슴속에 남아 있는 인간적인 면을 본 것일까. 거침없이 말했어. 그게 사는 길이라고. 남자로 사는 길을 함께 가자고. 그러면 나에게 뭔가 유익하고 좋은 일이 찾아온다고. 그만 하시오. 난 그럴 마음이 없소. 다만 내 부하가 당신에게 모질게 대한 것을 사과하오. 당신은 죄가 없는데 그냥 잡혀왔으니까. 답은 정해졌소. 죄없는 당신은 풀려날 것이오. 날이 밝기 전에. 휴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명료한 것.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상태의 머리로 휴의는 뚜벅뚜벅 연병장을 걸어서 지하로 향하는 계간앞에 섰다. 그와 나는 이제 처지가 바뀌었어. 토벌대장은 부대 밖 50킬로 미터에 있어. 여기로 달려오고 있네. 오다가 아침을 먹는다고 치자. 그러면 길게 잡아도 세 시간 안에는 온다. 그가 탄 검은 짚차가 속도를 내고 있다. 그와 함께 도망치자. 이곳을 벗어나자. 그는 나를 위해 변호할 것이다. 그것이 싫으면 신분세탁을 하면 된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다. 어디든 살 곳이야 없겠는가. 아예 만주나 상하이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도 있다.
거기 가서 평생 농사나 지으면 살까. 어기가든 목숨은 부지하겠지. 살고 나서 나중을 도모하자는 생각에 휴의의 마음은 바빠졌다. 심장이 가빠졌다. 상기된 그가 다시 청년 앞에 섰다. 그동안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휴의가 나타나자 다짜고짜 손을 잡았다. 나와 같이 떠납시다. 도망치자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그 말을 듣자 휴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난 아직 토벌대 소대장이야. 토벌대 군인에게 잡힌 독립군 주제에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소설속 이야기라고 독자들은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러니 아무리 짜맞추려고 해도 정도가 지나쳤다고 따지지 말자. 사람일이란 정말 모르는 거다. 조선 청년이 휴의의 마음을 알아챘다고 해도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청년의 어이 없음을 꾸짖어서는 안 된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하면서 혀를 찰 일도 아니다. 일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나기 마련이다. 휴의는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어떤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한 발 무러나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의 깊은 곳에서 어떤 순결한 마음이 손을 내밀었다. 독립운동은 순결한 것이오. 어찌 알았을까.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은 이렇게 진행됐다. 조선청년이 말했다. 함께 합시다. 그사 손을 내밀었다. 휴의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보아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휴의가 반응을 보였다. 도망가면 숨어 살 곳은 있나요? 다음에는 잡히지 않을 만큼 허술하지 않을 자신은? 휴의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시 마시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안전한 곳에 머물 곳을 청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자신이 덥석 휴의의 손을 잡았다. 동지,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동지요. 휴동지. 잡은 손이 뜨거웠다는 것을 굳이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잡은 손을 한 번 더 잡고는 흔들면서 나와 같이 손잡읍시다하고 말했다. 이미 잡았지 않소. 그렇군요. 휴동지, 천동지. 그들이 서로 마주보고 동지를 불렀다. 동지, 한 번 폼나는 인생을 살아봅시다. 한 번 사는 인생 일본놈 밑씻개 역할 말고 조선놈 기살리는 일을 해봅시다. 지금부터 그리 합시다. 까짓것 죽기 밖에 더 하겠어. 않그렇소 동지. 그렇소 동지. 휴의는 그 말을 하고 빠르게 다음 작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동의를 구하려는 태도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포함됐다. 내가 방금 생각한 것인데 여기 조선인 출신 일본군이 나 말고도 7명이 더 있다. 그중 세 명은 내 말이라면 똥으로 된장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다. 그들과 함께 나가면 어떠냐. 휴의가 반말로 물었다. 지금 당장은 아냐. 나중에 접선해서 빼오는 것은 몰라도. 조선 청년이 단호히 반대의사를 보였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동선이 노출되고 그러면 오늘의 도원결의는 그야말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우리 둘이면 충분해. 오늘은. 그러면 한 명만. 휴의는 그 말은 동의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내가 신임하는 한 명은 데리고 간다. 실탄 창고에서 무기와 권총 기관단총, 수류탄을 닥치는대로 챙기자. 그래. 부하는 어디 있나. 무기를 챙기고 대기하고 있을 거다. 나가자. 좋다. 휴의는 아침 점호를 시작하기 전에 막사밖으로 빠져 나왔다.
잡혀온 조선 청년은 죄가 없어 무죄방면 한다는 내용은 미리 고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하들이 설령 지하에 들어와서 청년의 부재를 확인한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사안이었다. 휴의는 용의주도 했다. 오늘은 쉬어라. 시내에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날 당직자들에게 휴의는 용돈을 나눠주었다. 니들이 무슨 죄가 있니. 내일 토벌대장이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든 당직들은 시달림이 있을 터이니 오늘은 자유 시간을 주는 아량을 보였다. 일본군 초급장교가 부하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배신의 칼을 맞은 토벌대장의 화풀이 대상은 나 하나로 족해. 그러니 너희들은 용의자 선상에서 비켜 있어라. 의심을 미리 피하기 위한 방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날이 밝아왔다. 해는 떠올랐다. 불침번은 들어갔고 후임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밝은 빛 속에서 그림자 셋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의 달과 별은 벌써 스러졌고 태양은 마침 나뭇가지에 걸렸다. 제지하는 사람도 뒤따라 오는 사람도 없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이제는 안심해도 되는 지점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먼저 멈춘 것은 조선청년이었다. 그는 가뿐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머뭇거렸다고 그것을 쉬어가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은 휴의였다. 벗어났어. 우린 일단 살았어. 그래요. 살았어, 살았다고.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았다. 나머지 한명을 동시에 보고 휴의가 부하의 손을 잡아 이끌어 세사람이 다시 손을 잡았다. 저쪽으로 더 갑시다. 숨 좀 고릅시다. 그럴 시간은 충분이 있어.알았어, 어련 하시겠어. 재촉하는 휴의에게 조선청년이 이렇게 받았다. 그래서 애초 정했던 장소는 변경됐다. 조선 청년은 괜찮다고 했으나 휴의는 못 미더웠다. 그가 알려준 주소는 휴의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이었다. 추격부대가 일 순위로 습격할 장소였다. 청년의 아지트는 일본군에게 노출됐다. 거기까지. 조선청년의 관동군의 활동범위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거기까지 마수를 뻗쳤다니. 그러고도 우리가 견재한 것은 천운인가. 조선청년이 입맛을 다셨다. 가야할 길이 많아. 그래도 가야해.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조선청년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휴의는 찔리는 마음을 달래려는 듯이 손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그러나 아직 그가 조선청년을 끝까지 따라간다는 어떤 믿음은 없었다. 일단은 더 벗어 납시다. 일본순 손아귀를 벗어났어도 언제든 잡힐 수 있으니. 휴의가 재촉했다. 조선청년은 그를 이해했다. 보호막을 벗어났을 때는 누구나 그런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그도 이제 나처럼 허허벌판에 서 있는 거야. 내 책임인가. 나에게 그런 책임이 있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져야지. 그러나 휴의의 생각은 달랐다.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갑시다. 그래서 세사람은 휴의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임시 거처로 정했던 애초의 장소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허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휴의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날이 새자 관동군은 휴의가 다른 부하 한명과 탈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무기고에서 권총 세자루와 총신이 짧은 기관총 하나가 사라진 것을 알고는 급히 추격대를 꾸렸다. 그러기 전에 그들은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 묶여 있던 조선 청년이 사라진 것도 알았다. 손에 차고 있던 수갑은 축축한 바닥에 그대로 던져져 있었다. 개새끼들. 이래서 조센징은 믿을 수 없어. 추격대의 지휘자는 욕설과 함께 부하들을 독려했다. 보이는 즉시 쏴라. 아작을 내버려. 그러나 그럴 상대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알을 굴려도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첫번째 안가 습격에서 실패한 관동군은 부대에 막 도착한 토벌대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 했다. 처음에 토벌대장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그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썅놈의 새끼 하고 부관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내뱉았다. 조선식의 욕설에 옆에 있던 일본군이 이맛살을 찌뿌리면서 뭐라고 혼잣말로 지껄였다. 그것이 토벌대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빠가야로 새끼야. 네가 내가 조센징이라고 깔보는 거냐. 그는 즉시 세웠던 정강이를 뒤로 빼고는 냅다 질렀다. 가슴께를 맞은 일본군 부하는 뒤로 몇걸음 물러나가가 균형을 잃고 자빠졌다. 손끝으로 선글라스를 만지던 그 손으로 토벌대장은 허리춤의 권총을 뽑았다. 항명하는 거야. 이 쪽바리 새끼야. 그가 권총의 노리쇠를 한 번 잡아 당겼다 놓자 총알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각하, 참으십시오. 휴의를 잡는 게 급합니다. 못이기는 척 토벌대장은 뽑았던 권총의 자물쇠를 잠그고는 다시 권총집에 총을 집어 넣었다.
그 시각 셋은 달기기 시작했다. 마라톤의 주자와 그를 돕는 자들처럼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달려 나갔다. 휴의는 자신을 뒤따라 오는 조선 청년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나를 따라오는군. 그래 이 지역은 내 관할이야. 넓기도 하지. 도대체 만주 관동군의 범위는 어디까지야. 달려 갈수록 청년의 근거지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휴의도 이곳을 안다. 늘 다녔던 길이다. 익숙한 길이 지금은 낯설었다. 마치 처음와보는 곳처럼 누군가의 에스코트가 필요했다. 마라톤 주자 앞을 달리는 오토바이가 안내를 한다면 편할 것이다. 휴의는 쫓기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나는 쫓는 자가 아니라 쫒기는 자야. 추격자에서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거지. 전락이라고. 그런 말 마. 오히려 위로 올라간 거지. 내 정신은 그런쪽으로 움직이고 있어. 비록 등 뒤가 따끔거렸고 그 순간 총알이 가슴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만 기분이 들더라도 말이야. 이제야 안심이야. 그러나 좀 더 뛰자. 뛰기 시작하니 기분이 좋아. 애초에 그럴 걸. 지하실에서 습관에도 맞지 않는 호통이나 치고. 휴의야, 너 잘한거야. 결정을 잘 했다고. 나에게 박수를 치자. 날 위로하고 칭찬하는 박수. 아싸, 삼삼칠 박수다. 휴의는 달리면서 실제로 두 손을 앞으로 뻗고 박자를 맞췄다. 기분이 더 좋아졌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 시간이 이곳을 달리고 있지. 이유는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나는 달리고 있고 기분은 계속 상승하고 있어. 이 기분 더 이어자가. 그러려면 북쪽으로 더 달아나야지. 쉬는 것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조선청년도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속도가 붙었다. 조선청년은 페이스를 잘 유지했다. 등뒤로 총알 대신 그의 격한 숨소리가 들린다. 달리기는 나를 못당할 거야. 저 호흡은 얼마 못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려주지. 달릴 때는 어떻게 숨 쉬어야 하는지를.
더 세게, 더 빨리. 아까보다 더 빨리 움직이자 부하 하나가 뒤에 처졌다. 멀리서 사냥개 짖는 소리를 휴의는 들었다. 조선청년은 조만간 총소리가 따라 올 것을 알았다. 누가 일선에 서고 있는지 휴의는 그 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삿포로가 고향이라고 했지. 무식한 놈. 시체나 닦을 놈이 이곳에 와서 한 자리 차지하고 세상 무서운 모르고 날뛰고 있어. 생긴 것은 꼭 무당 개구리 같은 놈이. 휴의는 그 자의 무자비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쌍욕을 뱉는 표정을 떠올리자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 녀석을 휴의는 평소에도 못마땅했다. 왜,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있잖은가. 바로 그 녀석이다. 웃으며 다가와서 더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놈이 왜 군대에서 얼쩡거리지. 그러니까 군대밖에 더 있겠어. 휴의는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면서 그 자를 혐오했다. 나 없으니 그자가 이제는 토벌대장의 사랑을 받겠군. 너도 나처럼 소모품이다 임마. 정신 차려, 늦기전에. 그나저나 올 때면 빨리 와라. 다가오면 죽여버려야지, 휴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네 놈을 그렇게 할 거야. 조선인 토벌대라니. 뭐 할 일이 없어 조선인이 조선인을 죽여. 이젠 너희들 차례야. 공평하게 대해주마. 조선 독립군의 매운 맛을 보여주지. 첫 전과는 야마모또 바로 네 녀석이 될 것이다. 휴의는 득의만만했다. 그에게 더 이상 독립군 토벌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옷을 벗고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때는 누구나 이런 커다란 작심을 하게 된다.
조선청년과 휴의와 그의 부하가 만주벌판을 달리고 있을 때 토벌대장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따지기 위해 혼자 골머리를 앓았다. 배신이라니. 날 배신했어. 이건 충격이야. 그런데 한편으론 잘됐어. 내가 없는 사이에 그렇게 됐잖아. 내 책임은 없다는 말이지. 마지막까지 고맙게도 나를 대우해 줬어. 조센징은 의리가 있잖아. 토벌대장은 조선인에 대해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생각을 바꾸어 갔다. 그게 편했고 그래야 마음이 안정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놈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했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를 배신하게 만들었을까. 휴의의 탈출을 철저하게 자신과의 관계에서 해석한 토벌대장은 그가 그동안 겪은 심정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그럴 시도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나와 그의 관계 둘의 문제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거기서 더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더 분노했다. 가려면 혼자서 가지. 체포된 독립군 끄나풀과 함께 도주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지. 보고서는 또 어떻게 작성하고. 보고서에 생각이 미치자 글을 쓰는데 재주가 없었던 그는 발로 책상을 걷어찼다. 그러자 한쪽 귀뚱이에 있는 혈서로 맹세한다는 명패가 땅에 떨어졌다. 에잇, 이 자식. 이건 뭐,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다. 일본 제일의 군대 관동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만주국을 세운 우리가 아니냐. 본국의 명령도 육군에도 항명하면서 나라까지 세운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었다.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나를 배신해. 동족의 등에 칼을 꽂아. 은혜를 원수로 갚아. 토벌대장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뱉어내면서 화를 삭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갈가리 조각나는 심장의 고통은 더 커져만 갔다. 일본인 앞에서 당당하게 토벌대의 전과를 올렸던 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 육사 출신 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심지를 더욱 세게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여기서 더 허물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매듭 지어야지. 사령부가 알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었던 토벌대장은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 휴의 일당의 뒤를 쫒았다. 수색견을 앞세우고 민가를 급습했다. 사전에 알아둔 청년의 아지트는 두세 겹으로 막고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방에는 이불 가지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청년의 살림은 단출했다. 언제든 두고 떠나도 상관없을 만하게 쓸만한 물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가져갈 것이 없는 홀가분한 방이었다. 추격의 단초를 찾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휴의의 판단은 옳았던 것이다. 조선청년 말대로 거기에 은신해 있었더라면 지금쯤 산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목으로 손을 가져간 휴의는 아직도 그것이 몸에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한 번 더 만져 보았다. 살았어. 순간의 판단이 이렇게 중요한 거야. 그나 저나 그자의 면상이 보고 싶군. 토벌대장 말이야.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이제 대장이라는 호칭 없이 불러도 되겠지. 날 세뇌했어. 세상 물정 모르는 나를 노예로 만들었던 거지. 언젠가 복수할게. 나중에 보자는 놈 무섭지 않다고 하지만 간혹 무서운 놈도 있거든. 그게 나거든. 휴의는 이렇게 이죽이면서 추격대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상상했다.
추격대는 마을 외곽에 진을 치고 있는 경찰과 무전으로 연락하면서 휴의 일당을 구석으로 몰았다. 생각보다 적은 가까이에 있었다. 쉴 때가 아니다. 그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대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우회를 해 적지 않은 거리를 돌아 왔으나 정오 무렵 휴의의 뒷 그림자를 밟는데 성공했다. 목표물을 발견한 적은 총을 쏘았다. 조준하고 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탄알은 휴의와 조선청년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셋은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맞대응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어디로 내빼야 안전할 지 계산해 보고 있었다. 계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달이 났다. 휴의의 부하 하나가 심장을 관통당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부상 정도를 살피려던 조선 청년은 다리에 총알을 맞았다. 그가 맞은 곳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또 다른 총알이 기댄 나무옆에 박혔다. 다행히 다리에 맞은 총알은 바짓단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는 있었지만 나무에 긁힌 정도여서 달리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휴의와 조선 청년은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때에 따라서는 권총을 쏘며 도주로를 확보했다. 그리고는 간신히 언덕 뒤로 숨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조금 전에 넘었던 언덕 앞으로 총알이 박히는 소리가 퍽퍽하고 들렸다. 그것은 날카롭기보다는 둔중했고 제대로 맞으면 죽겠다 싶었다. 조선청년은 이생은 여기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예감했다. 눈을 감자 손에 든 새가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는가. 가뿐 숨을 몰아쉬며 그는 가슴속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휴의가 그러는 동작을 쳐다봤다. 겨우 스쳐지나간 거야. 걱정마. 피도 나오다 그쳤어. 왜, 죽는 줄 알았어. 청년은 수첩을 옆에 놓고 옷을 걷어 종아리를 살폈다. 정말이지 슬쩍 비켜 지나갔다. 총을 맞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넘어져서 돌에 스친 상처 같았다. 자랑스런 훈장이군. 이건 일본군 총알 아니라 넘어져서 다친거다. 그럴리가. 이렇게 길게 훓고 지나갔어. 휴의는 대꾸하지 않고 옆의 소나무 가지 껍질을 벗겨 상처를 싸맸다.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 이런 거군. 농담할 시간 없다. 그들이 언덕을 넘어 오고 있을 거야. 그러기 전에 어서 저 산 너머로 도망치자. 그런데 수첩은? 아무것도. 그러지 말고 말해봐. 어, 그냥. 말해보래두. 내 이름자 정도. 이미 알고 있잖아. 그럼 고향 주소?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 죽을 때가 되니 그냥 꺼내 본 거야. 사진이 있구나. 여친? 휴의가 웃었다. 거기에는 정말 그가 말한 여자 사진이 있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보려고 했구나. 나중에 한 번 보여줘. 그럴 날이 온다면.
자, 농담이 끝났으면 떠나자고. 흔적을 남기지 말고. 수첩 잘 챙겼지. 아직은 수첩을 꺼낼 때가 아냐. 유언장을 쓰려고 했지. 그러지마.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염려돼. 자, 가자. 그들은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다. 산은 능선으로 이어졌고 그들은 한동안 그 길을 따라 달렸다. 풍경이 그지 없었다. 겹겹이 쌓이 능선의 줄기가 마치 빨래줄 처럼 직선으로 뻗어 있기도 했고 논두렁 처럼 구불거리기도 했다. 발이 힘이 붙었다. 이래도 되는 거야. 도망자 신세에 이런 경치를 봐도 되는 거냐고. 안 될 것 없지. 그리고 말은 바로해야지. 우린 도망자가 아냐. 해방자야. 해방을 위해 달려 나가는 거야. 누구도 이런 우리의 자유를 막을 수 없어. 치고 나가면서 조선청년이 말했고 휴의는 뒷 발이 닿을 정도로 바짝 따르면서 해방, 그래 해방이야 하고 크게 외쳤다. 해방이다, 대한독립 만세다. 크게 더 크게 불러. 자유의 노래를. 추격대 왔다면 그들은 노랫소리 때문에 위치가 발각됐을 것이다. 그러나 추격대는 더 쫓아 오지 않았다.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개들도 짖기를 멈추었다.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둘은 그 속도를 유지했다. 몇 개의 산을 넘었다. 달리기라면 해볼 만하다. 더구나 산은 익숙했다. 고향의 산과 이곳의 오르막 산이 다르지 않았다. 조선청년과 휴의는 마치 달리기 시합에 나선 경주선수처럼 지치지 않고 산을 넘었다. 시골 출신이라 이런 혜택을 다 보네. 그러게 말이야. 달리자고. 난 한 번 발동이 붙으면 누가 잡지 않으면 계속 나가. 나도 그런데. 그렇다면 계속 달리자. 둘은 정말로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달리기에 쉬는 것은 없어. 달릴 뿐이지. 이런 기분 처음이지. 하루를 살아도 이게 삶이지. 안 그래. 백년을 살아도 이런 기분 없으면 그게 산 건가. 달리자, 달리고 또 달리자. 산을 넘고 들을 넘고 개울을 건넜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곳이었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왜 따라오지 않지. 왜 갑자기 추격을 멈추었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궁금한 것은 많았으나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려고 해도 그것을 해결해 줄 단서는 없었다.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었지만 모든 것이 해결 된 것처럼 그런 기분이 두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그래서 그들은 궁금증을 아예 털어 버렸다. 추격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족히 두 시간은 달렸을 것이다. 광천의 오서산을 달렸다. 주렴산을 넘었다. 이 산들은 내가 뛰어놀던 그런 산이야. 그러니 훤하게 알지. 저 능선을 넘으면 바로 정상으로 이어져. 그곳에는 족히 수백명이 모일 만한 평평한 장소가 있지. 거기서 만세를 불렀다는 거 아냐. 삼일 운동 당시 산으로 올라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니 내가 달리는 이 길은 해방의 길이야. 자유의 길이지. 그너니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다리자, 달려 나가자꾸나. 그런데 말이야. 참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어. 그 산으로 순사들이 잡으려고 올라온 거야. 헉헉 대며 올라 올 때 그들은 반대편으로 내려갔어. 이런 일들이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거야. 이제 말이돼. 그래서 걱정이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냥 마음을 달래려고 했나봐. 조급만 마음을 누르려고. 이 산은 그 산과는 달라. 이 능성은 길어. 가을이면 장관이지. 갈개다 무려 십 킬로 미터도 길게 늘어서 있어. 난 기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꼭대기만 보고 올라갔지. 왜 아나오지. 다리가 아플 즈음 바람에 스러지는 갈대를 본 거지. 기가 막힌 풍경이었어.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 거야. 갈대 옆에 능금이 터지고 있었지. 그것을 깨트려 먹을 때는 세상이 부럽지 않았어. 정상이 안 나와도 상관 없었지. 그까짓 것 꼭대기 안 봐도 돼. 그런 마음이었어. 그렇게 가다보니 나오더군. 아래는 새우젖 배들이 빼곡이 들어찼고. 아, 배가 고팠다. 괜히 오서산에 올랐어. 다리가 아픈 것보다 배가 고프고 물이 막혔다.
다행히 멀리서 시내가 나타났다. 저기라면 숨어들기에 좋은 장소군. 조선 청년이 말했다. 혹시 어딘지 아나. 당연히 모르지. 휴의의 물음에 조선청년이 답했다. 제법 도시다워. 도시에서는 도시인 답게 행동하자. 도망자처럼 초조해 하지 말고. 둘은 멈추고 급하게 챙겨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가 길어. 내가 손질해 줄까. 뭐가 있어. 이발기계 같은 거. 이거 있잖아. 휴의가 대검을 꺼냈다. 넌 머리를 좀 잘라해. 독립운동 한다면서 꼴이 말이 아니다. 휴의가 대검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잘랐다. 거울 같은 건 없으니 잘 했으니 못했느니 따지지 마라. 나도 해줘. 휴의가 칼을 내밀었다. 난 경험이 없어. 누구는 있나. 뭐든 처음하는 것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 그러니 기대해 볼게. 조선청년의 휴의의 머리를 깎는 대신 구렛나루를 면두했다. 깎을 것이 없는데 깍아 달라는 심보는 뭐야. 난 밑지는 장사는 하기 싫어. 둘은 그런 차림으로 읍내로 들어갔다. 추격대가 온다고 해도 두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변장에 성공한 때문인지 둘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여유가 생기자 거의 하루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달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 곳에서나 들어가 눕고 싶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격려하면서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면서 두 눈을 억지로 떴다. 이렇게 해봐. 눈 꺼풀을 들고 침을 발라. 그러면 졸음이 좀 가시거든. 난 그 정도는 아냐. 잠을 못잔 건 나 아니야. 취조 받느라고 날 샌 건 나야. 내가 졌다. 가자. 우선 요기부터 하고. 몇 군데 주막이 보였고 휴의가 손가락으로 그 중 깔끔한 곳을 가리키자 거기로 찾아들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라기보다는 우선 속을 든든히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젊은이 두 사람이 대낮에 술집으로 들이 닥치면. 수상하다. 두 사람은 배고픈 것보다 의심을 사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만두에 뻬갈을 한 잔식 했다. 허겁지겁 먹지마. 그렇게 배가 고팠어. 넌. 먹자. 먹고 나서야 독립이든 투쟁이든 하지. 아무렴. 둘은 죽이 착착 맞았다. 어느 정도 배가 찼다. 독립군 토벌대는 자금이 달리는 독립군이 허름한 곳에서 주로 묵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싸구려 여인숙이 주로 검문 대상에 들지. 그러니 오늘 밤은 푹신한데 자자. 그럴까. 둘은 그 와중에도 도망자의 본능을 발휘했다. 술 한 잔씩 했으니 이제 자러가야지. 그러기 전에 추격대는 왜 눈 앞에서 멈췄을까. 아는 게 있어. 없어. 조선 청년의 물음에 휴의는 짧게 말했다. 나도 몰라. 왜 그랬는지. 나중에 토벌대장을 만나면 물어 보지 뭐. 만나면. 어떻게 만날 건데. 내가 잡히던지 잡던지. 둘 중 하나가 되겠지. 전자였으면 좋겠어. 그런 날이 올까. 모르지. 세상일을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날이 오면 꼭 이유를 알려줘. 약속. 그래 약속하자.
여관 주인의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선 휴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취기와 풀린 긴장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다. 조선청년은 그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군화를 벗기고 웃옷의 단추를 풀어주었다. 그가 편하게 잠을 자고 있다. 호흡이 고르다. 그래, 준수하군. 이런 용모로 토벌대는 어울리지 않아. 잘했어. 무엇을 하든 잘될 거야. 난 그걸 믿어. 내 믿음은 간혹 배신하지 않을 때가 있어. 이 믿음도 그랬으면 좋겠어. 잘 가시오. 난 떠납니다. 인연이 있으면 만나겠지요. 당신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요. 무책임하다고 욕하지도 말고요. 그건 내 특기니까요. 우리 둘은 나이도 같고 고향도 엇비슷하니 살아 있다면 만나겠지요. 만날 때는 웃으며 만납시다. 난 당신에게 빚을 졌소. 그러니 갚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오. 조선 청년은 그냥 갈까 하다가 이런 식의 편지를 머릿맡에 놓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까지다. 그와 나는 헤어져야 한다. 체질이 나는 누구와 같이 다닐 수 없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이며 앞으로도 혼자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휴의 주머니에 넣고는 눈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동지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어. 헤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런 감정도 있어. 그렇지만 같이 있으면 위험해. 내가 떠난 걸 그도 이해할 거야. 이곳 만주라면 자신의 영토잖아. 조선청년의 생명의 은인을 남겨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휴의는 밤새 끙끙거렸다. 저도 모르게 내지르는 소리였다. 어떤 때는 목이 막혔고 어떤 때는 시원하게 뚫겨 고함을 질렀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잔혹한 독립군 토벌대였다. 여기는 지하실이다. 어두워, 전 보다 더 그래. 바닥은 여전히 젖어 있고. 의자와 책상하나. 단촐하군. 이게 조신식 스타일은 아닌데. 그나저나 저 놈은 인상이 왜 저래. 구겨진 인상을 내가 펴주지. 팔이 부러졌다고.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부러진 팔은 비틀어라. 이런 속담도 있잖아. 휴의는 그런 말을 지껄이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악, 그래 악을 써라 악을. 얼굴 좀 보자. 깨졌군. 이러면 아프다는 걸 모르고 그랬을까. 내가 해결해 주지. 그는 상처난 얼굴에 소금을 뿌렸다. 이런 아까운 소금을 흘렸어. 바닥을 소금을 집어 이번에는 뿌리지 않고 상처를 벌리고 소중한 것을 넣기라고 하듯이 정성스럽게 벌리고는 거기에 넣었다. 녹으려면 시간이 걸리니. 좋아 주전자 가져와. 대령했습니다. 그는 주전자의 물을 소금을 뿌린 상처에 역시 조심스럽게, 흐럴내리지 않고 그 자리에 고일 수 있도록 부었다.
잘했어. 역시 난 이런 일에 소질이 있나봐. 뭘봐, 이 놈아. 노려보면 어쩔 건데. 깔아, 싫아고. 그럼 내가 해주지. 이번에는 손가락이다. 휴의는 두 눈을 파내려는 듯 손가락으로 위협했다. 왜 이리 떨어. 춥다고. 알았어. 추울때는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어. 가져와. 부하가 벌겋게 달군 인두를 가져왔다. 지져주마. 한결 나아 질거야. 그리고는 귀에 달군 인두를 들이댔다. 비명. 울부짓는 짐승의 소리. 휴의는 잠결에도 인상을 썼다. 이 정도도 못참아. 그러고도 네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이 조센징 놈아. 뜨거운 불벼락을 받아라. 휴의는 고함을 질렀고 실제로 모닥불을 들고 머리위에서 쏟았다. 재와 불씨와 타나남은 숯이 한꺼번에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참아야지. 독립군이라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 안 그래. 너도 그건 인정하지. 다른 건 몰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공포. 눈앞에 벌겋게 달군 인두가 두눈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라, 내가 아니야. 저 놈이라고. 이거 왜이래.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로 온다. 돌려야 한다. 그래야 눈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고개는 꼼짝하지 않는다. 인두. 인두가 내게로 온다. 살에 대지도 않았는데 살이 타는 냄새가 먼저 온다. 시각에 앞서 후각이 반응한다. 눈을 감자. 눈은 아니다. 다른 몰라도 눈만은 안 돼. 내 말에 신이 응답했을까. 다행이 눈을 피한다. 눈 아래 뛰어나온 광대뼈다.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익은 냄새가 난다. 먹고 싶다. 고기가 먹고 싶어. 묶인 독립군이 헛소리를 한다. 아니다, 그건 내 목소리다. 그래 고기좀 줄까. 주세요. 고기가 먹고 싶어요. 이 놈, 왜 놈의 앞장이 날강도 일본을 위해 민족을 팔아. 아니오, 난 아니오. 민족을 판 것은 내가 아니라 높으신 고관 대작들이오. 흥, 네 놈도 한패잖아. 왜놈 밑씻개를 하고도 살겠다고. 어쩔 수 없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살기 위해서 친일을 했다? 그걸로 용서가 될까. 너희놈들의 특기인 매타작 한 번 해보자. 엉덩이 까고 엎드려.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목소리는 밖으로 빠져 나오지 않았다. 말 못하는 이 심정, 누가 아리요. 몸부림. 간헐적 발작. 거꾸로다. 고문자는 나다. 나라고. 다시 발버둥. 그것이 효험을 봤다. 이번에는 휴의가 대검을 꺼내들고 불에 익은 얼굴을 도려낼 기세다. 칼이 다가온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윈 칼이 코를 겨냥하고 다가온다. 설마 코를 자를까. 제발 내 코를 자르지마. 내 코란 말이야. 그 말이 듣기 싫은지 휴의는 별안간 문을 열고 사라진다. 더러운 조센징 놈. 그가 문들 닫으며 소리친다.
장면은 바뀌었다. 휴의가 계단을 내려온다. 손은 코를 막고 있다. 냄새, 이 놈 쌌군. 이번에는 백발의 노인이다. 그는 다짜고짜 발로 걷어 찼다. 더뤄워. 벽에 똥칠을 했어. 손에 묻은 저 노란색은 그걸 증명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지. 여기 증거가 있다.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지. 휴의가 노인을 노려봤다. 맞지? 손으로 노란 것을 찍어 얼굴 앞으로 들이민다. 냄새 나지. 익수간 냄새.네 똥이다. 이번에는 다문 입술 근처로 가져간다.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알지. 난 그러지 안다 이 돼먹지 못한 쪽팔이야. 하하하, 아직 기가 살아 있어. 나보고 쪽바리라고. 틀렸어. 난 쪽바리 아냐 조센징이라고. 그런다고 봐줄 줄 알아. 같은 조센징이니 살살해 달라고. 노노 노노. 휴의가 고개를 심하게 젖는다. 신성한 장소에 똥까지 싸질러 놓고. 그러고도 살아서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노인은 차라리 조직을 불라고 하면 그것이 더 참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질한테 걸려 들다니.
내 독립운동 33년 만에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구질구질한 놈. 똥을 가지고 장난을 쳐. 삼대가 빌어 먹을 놈. 날 치워라. 걸지걱 거리니 마음이 편치 않잖아. 이 놈이 나에게 대든다. 감히 토벌대장의 직속 부하이며 토벌대 일진의 소대장에게 대든다. 나를 우습게 본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노인이구나. 무식한 노인에게는 말이 필요 없다. 알려줘도 모르는데. 그래서 배워야 해. 남 주기보다는 이런 때 써먹기 위해서라도. 그래도 유식한 척 해볼까. 우리 토벌대 장교는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다. 미련한 독립군과는 다르다. 비록 지하 감옥이지만. 네가 죽는 이유를 알려주지. 벽에 똥칠을 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과는 상관없다. 대검을 목에 들이대기 위해 한 발 다가선다. 각진 행동이다. 오른 다리와 왼 다리가 직각으로 꺽였다. 적어도 군인은 이래야 한다. 오랫만에 해보는 제식인데 전혀 새롭지가 않아. 몸에 뱄다는 거지. 적을 처형할 때는 이런 자세로. 막 베려는 순간 휴의는 어느 순간 노인과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일그러진 얼굴로 휴의는 불렀다. 휴의야, 내다 아부지다. 아부지. 아부지가 여기 어쩐 일이요. 휴의는 자신이 한 행동을 감추기 위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런다고 모를 줄 아느냐 이놈, 휴의야.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그러나고 네가 너를 낳은 건 아니다. 그럼 왜 낳으셨어요? 아버지가 순간 당황한다. 그건 나도 모르지. 어찌 하다보니. 말끝을 흐리지 마세요. 아버지. 저도 다 알아요. 알 만한 나이가 됐다고요. 그러니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쳐도 휴의야, 휴의야. 이름만 부르지 말고 여기온 이유를 대세요. 아버지. 전 시간이 없어요. 이 자를 베야 하거든요. 베려거든 나를 베라. 아버지의 목이 휴의의 손을 내리 눌렀다. 아버지 힘은 여전 하세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 힘을 쓸 때가 아닙니다. 그 힘을. 그 때 휴의는 눈을 번쩍 떴다. 이건 뭐지? 여기 어디? 나는 누구? 휴의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일어나기 보다는 그는 누운 상태로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렇게 빛바랜 낡은 종이가 더덕 더덕 붙어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휴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일어나 앉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그렇게 더 있었다. 악몽이었다. 젖었어. 흠뻑 젖었오. 쥐어 짜면 물이 흘러 내릴 정도야. 그런데 몸은 개운하네. 그런 꿈을 꾸고도 몸이 살아 있어. 휴의는 그것을 느끼기 위해 다리도 주물러 보고 팔도 만져 보았다. 제살이었다. 다만 다리는 뻐근했다. 어제 그토록 달렸으니 근육에 무리가 좀 온 모양이다. 그것 말고는 정말 제대로 잘 잔 것처럼 가뿐했다. 도주 뒤에 하룻밤 묵은 곳에서 그는 젊은 청년과 노인을 고문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독립군 토벌대였다. 이젠, 아니지. 난 어제 해방을 맞았어. 자유의 몸이 됐다고. 뭘 할 거냐고? 그러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없는데. 난 조선청년만 따라왔어. 그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가 하는 말도 그럴싸했고. 그런데 어디 있는 거지. 날 이리로 데려와 놓고 어디로 센 거야. 휴의는 그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배신감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오늘 날이 새면 그와 헤어질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 조금 이른 이별일 뿐이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간 것은 서운해. 뭐 단서가 될만한 것은 없나. 휴의는 몸은 그대로 둔채 머리만 돌렸다. 작은 책상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얼른 그것을 손을 뻗쳐 잡았다. 바로 읽어 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쪽지를 잡고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모든 것은 분명해졌다.
휴 동지, 건투를 비오. 살아 있다면 어디서든 만나겠지요. 해방된 조선땅 광천에서 새우젓에 막걸리 한 잔 약속은 어기지 마시오. 조철봉. 미스터 천. 휴의는 청년이 써논 메모를 보았다. 그래, 그래. 나도 같이 있는 게 부담이 됐어. 만나겠지. 미스터 천. 너의 건투를 빈다. 그러나 이것은 휴의가 써놓은 뒷장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모든 것은 분명해 졌으나 휴의는 쪽지의 뒤를 돌려 맨 처음을 볼 수 있었다. 비슷한 내용이었다. 만날 사람은 만나겠지. 아니 만난다고 해도 어제의 우리 만남은 괜찮았어. 정말 다행이야. 그를 만난 건. 사태를 완전히 파악한 그는 서둘렀다. 아직 군인정신이 남아 있었다. 대책을 강구하자. 하룻동안의 복기는 십분이면 충분했다. 이곳은. 생각났다. 여관집이다. 허술해. 이불 좀 빨지. 나중에는 내가 라고 빨아서 깨끗한 곳에서 자자. 오늘 보다는 나아야지. 안 그래. 그래서 위험에 빠진다고. 감수해야지. 감당하려고 그런 곳 찾은 거 아냐. 그런데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인지 알겠는데 여기는 어디냐고. 아직 만주인가. 국경을 넘었나. 설마. 빠르게 달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국경을 넘었을까. 비행기도 아닌데.
만주 어디이고 토벌대의 수중이고 나는 안전을 확보하지 못했고. 관동군이 여전히 있고. 그래도 사람사는 곳이야.
주저 하지 않고 휴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 참을 걸어서 어느 주막에서 밥을 먹었다. 돈을 계산하려고 하는데 청년의 메모가 다시 손에 잡혔다. 다 읽은 줄 알았는데 반대쪽에도 글씨가 있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리고 뭐 부탁이라고. 날 구해준 조선 여자점례의 주소가 있네. 경성에 가면 그녀를 찾아서 뭐 네 안부를 전해 달라고. 잊어. 여자 한테 빠지면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알면서 왜 이래. 선수 끼리. 그나저나 점례. 참 운명도 얒궂어. 이 넓은 만주땅에서 점례라니. 한강에서 바늘을 찾았어. 주소가 있어야지. 그걸 잊으면 어떻하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처럼 어렵겠지만 그림공부하는 여자가 많지 않으니 운 좋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종로에서 화실을 운영하는 삼촌이 도움을 준다고 했다. 인사동이라던가. 휴의는 더 글자가 있는지 앞뒤로 살피고 뒤집어도 보았으나 어디에도 더 읽을 거리는 없었다.
이쯤해서 여순과 말수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그쪽도 이쪽 만큼이나 할 이야기가 밀려있다. 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일본 군함이 은밀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밤이었다. 이곳 태평양의 비는 한 번 오기 시작하면 몇 날이고 무섭게 내렸다. 갑판 위에서는 그 비의 위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바람에 섞여 이리저리 날리면 깊은 산의 폭포수 아래에 있는 느낌이었다. 옷은 폭포가 타고 내려오는 돌기둥이다. 뚝뚝 끊어지지 않고 줄줄 흐른다. 비가 오면 심란하다. 좋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다. 겨우 몸 하나만 피한 말수는 갑판아래서 갑판 위의 상황을 짐작했다. 병사들의 일부는 이 비를 고스란히 맞을 것이다. 보초병들은 자기 임무를 다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있다. 흐트러질 때면, 비를 피해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면 언제나 조국 일본을 외쳤다. 그것도 안 되면 기미가요를 힘차게 불러 제켰다. 그러면 조금은 나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시간이지 밤새 혹은 낮동안 내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생쥐꼴의 그들은 지쳐갔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은 끝이 없었다. 부지런히 대포를 닦고 총기를 소지하고 탄약을 안전한 곳에 이동시키는 일이 남아 있었다. 비가 와도 어둠속에서도 할 일은 떠나지 않았다. 손을 뻗을 힘이 없어도 병사들은 그 일을 해냈다. 사용한 포는 잘 닦지 않으면 되레 자신들을 향한 흉기가 될 수 있다. 날아가기는 커녕 오발 사고의 위험도 있었다. 표적에 도달하기도 전에 추락하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그런 것을 병사들은 말이 아닌 실제로 경험해 보고 알았다. 그러니 그들의 임무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포 사격이 끝나면 청소 또 청소였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일은 산업현장에서보다 전투 현장에서 더 필요한 용어였다. 밤을 새고 낮이 왔어도 다하지 못한 일 때문에 병사들은 누울 수 없었다. 눈을 감은 채로 포를 닦았다. 커다란 구멍에 기름칠을 한 꼬챙이를 집어 넣고 뺐다를 반복했다. 잠은 쏟아지고 악천후는 지속되고 이래저래 죽을 맛이다. 그래도 견뎌내야 하는 것이 갑판위 병사들의 신세였다.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저승사자가 네 머리위에 있다. 그 손가락 못 치워. 내 머리에 있던 것이 내 목뒤에 올라탔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위를 더듬없다. 목을 돌려 그것을 떨쳐 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쯤되면 제정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실제로 그러다가 죽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라 자빠지는 일은 여기서는 흔해. 그러니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지마. 말수는 그들의 신세가 자신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으로만 본다면 되레 나쁘다. 난 이렇게 비를 피하고 있는데. 저 기분 알만해. 홀로 걷던 밤의 산길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산짐승을 만나도 이 정도는 아냐. 군복 때이겠지. 저 너덜거리는 누런 옷을 벗겨봐. 어디서 버티는 힘이 나오겠어. 참, 탈출한다고 좋아했는데 뭐 이런 상황이 있지. 이건 정말 지옥이 따로 없어. 이럴 때는 살아서 나간다, 뭐 이런 정신 승리로 버티는 거지. 그런 기운이 없다면 벌써 사그라 졌을 거야. 그나저나 함장은 어디 있는 거야. 몰라서 하는 말은 아냐. 함장실에 있겠지. 내 말은 거기서 뭐하냐는 거지. 병사들이 이러고 있을 때 무언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명령이 필요해. 말수가 한가하게 이런 넋두리를 할 때 함장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었다.
무작정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 미군의 공습은 무섭지만 그래도 이건 아냐. 나가서 싸워야지. 이러고 있으면 적도 어렵지만 우리도 어려워. 적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누가 유리하겠어. 우린 해군력이 바닥났어. 육군의 지원은 없거나 더뎌. 그렇다면 나라도 나서야지. 멋지게 격파해서 분위기를 살리는 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한 방에 전세 역전. 구회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에서 멋진 만루홈론을 치는 거야. 내가 해야지 누구하겠어. 이 어려운 것을. 함장은 일부러 얼굴을 이그러뜨렸다. 마주 선 적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내가 힘이 있으니 넌 죽었어 하고 기선 제압을 하려는 듯이 더욱 더 세게 반쪽이 되도록 얼굴을 짓이겼다. 내가 결단을 내린 거야. 공격 앞으로. 숨어서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죽는 건 매 한가지야. 답은 나와 있잖아. 누구나 아는 그것. 기왕 죽을 거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거지. 본국에서는 승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 입만 살아서 떠드는 정치인들. 그 놈들을 이 곳으로 데려와 하루만이라도 구경을 시켜 주고 싶어. 승전보를 가져와. 그게 어디 쉽니? 그렇지만 난 해낼 거야. 너희들 좋으라고 하는 것 아냐.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지. 아니 지키는 것이 아니라 더 차지 하기 위해서지. 우린 넓혀야 해. 섬나라 쪽바리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내륙 깊숙이 들어가야지. 그는 주변에 있는 일본 군함과 연결을 시도하라고 명령했다.
어렵게 무전이 연결됐다. 함장은 자신의 결단을 알렸으니 너희들도 편대를 이뤄 나를 따르라고 . 이것이 명령의 전부였다. 나를 따르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그래, 조선 수군 최고의 장군 이순신. 그 자가 말했어. 12척으로 삼백척을 물리쳤지. 아, 참고로 말하는데 이순신은 쪽바리가 아니고 조센징이야. 그 자가 이겼지. 난 그자를 뛰어 넘고 싶어. 세 척의 군함으로 미군 태평양 함대를 박살내고 싶어. 그러면 내 이름이 오래 따라 다니겠지. 좋았어. 나머지 두 척은 따로 놀지 않고 나를 따라 합동작전을 펼쳐라. 우린 지금 막 만을 빠져 나가고 있다. 속력을 올릴 수 없을 만큼 전속력이다. 갑판 아래서 말수는 움직이는 함정의 속도를 느꼈다. 굉음이 울렸다. 엔진 출력은 최대한 높아졌다. 이러다 터지는 것 아냐. 곧 그럴지도 몰라. 폭탄을 맞기도 전에 터져 버린 다면 볼 만 하겠지. 그나 저나 이젠 피할 곳도 없어. 맞으면 그대로 맞아야지. 갑판의 구멍이 하나 더 난다면 이 배는 침몰 할 거야. 함장은 알고 있겠지. 그러기 전에 공격 하는 거야. 적을 따돌리는구나. 적의 배후에서 조준하고 있겠지. 함포 사수의 움직임이 빨라졌어. 부사수는 어디갔지. 포를 옆에 가지런히 쌓아 놓고 있군. 급하게 쓰겠다는 거지. 좋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아냐. 컨트롤 할 수 없으니 즐기자. 잘못되도 할 수 없다.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말수는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을 자책했다. 어디든 가겠지. 침몰하기 전까지는. 필리핀이 아니라도 좋아. 원래 왔던 곳으로 가도 괜찮고, 애초 계획이 틀어져도 죽는 것 보다야 나아. 어떻게 해야 하나. 빙글빙글 도네. 생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여순은 어디 있지. 아직 여순은 그것까지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여순은 어디든 상륙하기만을 바랐다. 직감적으로 그녀도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본능은 말수나 여순이 비슷했다. 그렇지, 그 때 말수가 무릎을 쳤다. 정마로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사이판이라고 중얼거렸다. 이 배는 사이판으로 가고 있다. 사이판이다.
한 번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그 생각은 좀처럼 말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말하든 사이판은 그 시야와 말들 사이에서 끼여서 말수를 따라다녔다. 이건 걱정할 만한 소식이 아냐. 거기라도 상관없어. 떠나올 때 지휘관은 말했지. 사이판의 전투가 매우 중요해. 별로 말이 없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때는 믿어야 한다. 얼마나 그 말이 하고 싶었을까. 다른 말은 이 순간 아무 의미가 없다. 전쟁 얘기는 잘 꺼내지 않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사이판이었다. 거기 미군이 있어. 그 놈들은 질기거든. 젖소처럼 양놈들은 살이 질겨요. 비행장이 완공됐어. 본국의 본토도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다고 하더군. 당신 어떻게 생각해. 상관은 말수가 군함에 오르 전에 했던 말을 생각했다. 까득한 옛일이야.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안나. 겨울 보름 밖에 안됐는데 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아. 그곳 일은 까마득히 잊었어. 말 안해도 독자들은 알 것이다. 몇 번의 함상 전투와 도주와 공격. 일련의 사건은 말수의 과거를 잊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환자를 치료했던 일이 있었던가 싶었다. 내가 막장에서 탄을 캤어. 그건 더 오랜 일이야. 조선인들이 폭동 비슷한 걸 일으켰고. 그건 더 오래전 일로 가물가물해. 그런 것이다. 이쪽의 일이 험란하면 그 전의 일들은 금세 잊히기 마련이다. 미군은 거기에 배수진을 쳤고 우리는 어떻게든 뚫어야 하는 입장이지. 말수는 그가 언제 전황을 익혔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말씀 처음 들어요. 나도 엊그제 들었어. 넌 모르겠지만 함장이 잠깐 상륙했었어. 그가 말하더군. 미국은 사활을 걸었다. 우리는 죽기 살기로 싸운다. 싸이판의 푸른 바다는 피바다가 된다. 그 때 들었던 거야. 내가 어찌 알겠어.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애초 필리핀은 없었다. 그런데 굳이 필리핀 행이라고 말한 이유는. 알 것 없다. 말수는 필리핀은 잊고 사이판만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급한 건 우리잖아. 더구나 미군은 공중에 강해. 치고 빠지는 작전. 아, 우리 일본은 어떻게 되는 거야. 말수는 한숨을 쉬었다. 놀러 가는 건 아니지만 너무 하는 군. 약품을 실어 오라고 하더니 아예 사지로 몰았어. 상관이 자신이 가지 않고 말수를 내 보낸 것은 이때문일까. 말수는 자신의 입으로 말수를 되내면서 그렇다면 여순은하고 의문부호를 달았다. 그야 뭐 끼워 넣었겠지. 그것도 생각말자. 일단 계획은 어긋났어. 그렇다면. 대책이 없는 거지 뭐. 플랜 비는 애초에 없었잖아. 묘책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갈량이라고 해도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이판이라고요. 거기는 얼마는 커요. 옆에서 여순이 물었다. 필리핀 만한가요. 말수가 웃었다.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순진한 아이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을때 받게 되는 그런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비하면 손바닥 정도. 그러면 우리가 숨을 곳은요. 아무리 작아도 우리 몸 숨길 곳은 얼마든지 있어. 작다고 통영의 무인도처럼 혹은 보령섬의 무인도 같은 줄 아니. 비행기가 뜨고 질 정도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럼 뭐가 걱정이에요. 순진한 여순이 다시 물었다. 필리핀이든 사이판이든 우리가 숨어서 살아나기만 하면 되잖아요. 맞는 말이다. 틀린 말 하나도 없다. 그러고 보니 괜한 걱정을 했다. 섬의 크기 때문에 도주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걱정했던 말수는 머쓱했다. 언제나 여순은 자신을 앞질러갔다. 걱정하기 전에 여순에게 물어봐야지. 괜한 걱정을 했어. 걱정은 상륙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미리 결정한다 해도 무엇이 도움이 될 지 알 수 없는데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나 같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말수는 멋적었다. 그러나 다행이다. 자신의 그런 표정을 들키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했으니. 그런 좋은 기분으로 말수는 선잠이 들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언뜻 언뜻 조는 일이 발생했고 지금 그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런데 금방 깨고 말았다. 깼다고 할 수도 없다. 잠이 들기도 전이었으니. 엄청한 굉음이다. 크다. 아주 커. 우리가 당한 건가. 순간적으로 말수는 몸을 웅크렸다. 의식에 따른 행동이라기보다는 본능이었다. 운동장 보다 큰 군함이 흔들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머리위 선반에서 무엇이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면 이런 기분일까. 간토 대지진의 위력이 이 정도일까. 그 때 조선인들 많이 죽었어. 우물에 독을 탔다면서 닥치는 대로 죽였다니. 서투른 일본말을하면 죄다 죽창으로 죽였어. 에잇, 그게 지금 떠오를 생각이야. 말수는 자신의 머리를 한대 쥐어 박았다. 아까보다는 작지만 다시 커다란 소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말수는 군함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직감했다. 광산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막장이 무너지는 공포와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사이판에 상륙하기도 전에 군함이 침몰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오뉴월에 감기걸린 것처럼 말수는 자신의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미군의 공중 폭격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군함은 이 자리가 무덤이 된다. 자, 우리는 뭐하지. 어서 반격해야지. 그 순간 보복 공격이 시작됐는지 이쪽에서 쏘는 포가 둔중하게 갑판을 흔들었다. 그 다음은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 부상병들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지르는 소리는 연속된 폭발음에 묻혀 버렸다.
말수는 여순을 흔들었다. 정신이 반쯤 나가 어리벙벙한 여순이 반응했다. 나가자. 부상병들이 우릴 찾는다. 여순은 군말없이 일어섰다. 부상병이 찾는다는 말은 그에게 지상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도 말수나 여순에게 갑판으로 나가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서 그렇게 했다. 과연 갑판 위는 피투성이 천지였다. 그들을 치료하는 말수나 여순도 그들처럼 똑같이 피를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부상병의 숫자는 셀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나머지는 용감하게 앞으로 돌진했다. 돌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착검을 하고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괴성을 지르고 총검을 휘둘렀다. 여기서 그런 방법은 안 통해. 여긴 군함이야. 막막대해고. 총검술은 상륙한 다음에 써 먹어야지. 말수는 정신을 차렸다. 시야가 아득하다. 핏물이 눈에 들어갔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쓰리다. 닦을 수가 없다.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손으로 만질 수 없다. 어쩌지. 상처가 안 보여. 내가 할게요. 말수의 말은 호들갑이 아니었다.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에 찬 버클을 푸는 순간 피가 온천수처럼 품어져 나왔다. 말수는 그 피를 얼굴로 받았다. 눈이 아파. 고통을 참기 위해 찌거러진 얼굴이 볼 만했다. 그렇게 아파요. 어디, 어디 봄 봐요. 자 가만 감만히. 이 환자는 내가 볼게요. 눈을 씻어야 해. 잠시만요. 이 환자는 죽었어요. 수통의 물을 사용해요. 말수는 순순히 따랐다. 자, 여기. 말수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포로와 같은 신세였다. 여순이 명령권자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명령을 할 수 있다. 여순은 말수의 눈을 뜨게 하고 수통의 물을 쏟았다. 제가 도와줄게요. 가만. 물을 아껴야 해요. 손을 모아요. 자, 그렇지. 잘 했어요. 눈을 몇 번 씻고 나자 앞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할 수 있어. 괜찮겠어요. 참을만 해. 탱큐. 말수가 엄지 손가락을 세웠다.
그나저나 우리쪽은 왜 이리 늦어. 공격도 방어도 한박자씩 부족해. 다들 어디 간거야. 병사가 부족해. 빈 포신에 포탄을 채우는 것도 어려워. 내가 할까. 당신은 환자를 봐야지요. 전투하러 여기 온 거 아니잖아요. 다급하면 해야지. 아직은 아닙니다. 여기 이 환자. 여순이 고개를 돌리고 그렁 거리는 병사쪽을 바라봤다. 아냐, 이 환자도 죽었어. 여순은 인정했다. 아직 숨이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몇 분 후 아니 몇 초 후에 죽을 목숨이다. 아직 살아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급한 불은 일단 껐지. 그렇다면. 내가 한 번 해보지 뭐. 말수가 대포 쪽으로 다가갔다. 대포 인가. 아니 이건 기관총이군. 이거 말고. 큰 걸 해 보자고. 많이 봤어. 실전은 처음이지만 난 눈썰미가 있거든. 병사들이 이렇게 했지. 그는 눈으로 본대로 포신에 포탄을 채웠다. 발사는. 나도 몰라. 사거리는 그것도 몰라. 어울리는 것을 해야지요. 여순이 그 와중에도 핀잔을 주었다. 이리로 와요. 좀 쉬어요. 이것도 명령인가. 말수는 헛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왔다. 내가 할 일은 아냐. 그건 연습이 필요해. 그 때 병사 하나가 소리치면서 막 말수가 앉은 쪽으로 달려왔다. 달려오면서 그는 죽은 자를 밟았기 때문에 시체위에 넘어졌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병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그는 달려 온게 아니라 짝다리로 힘겹게 옮기다가 넘어질 무렵 엉겁결에 두 다리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한쪽 다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시체 위에 나동그라졌다. 말을 하지. 환자가 더 있는 줄 몰랐어요. 나도 지금 알았어요. 깨어나 보니 다리가 이렇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바지 아래서 너덜 거리는 다리를 보여주었다. 피가 나왔다. 방금 전까지 핏기가 있던 얼굴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백짓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곧 죽을 거야. 피가 너무 많이 나와. 쇼크야 쇼크. 어쩌죠. 차라리 아까 포탄이 떨어질 때 죽었으면 다행이었을 거야. 비명. 나를 치료해줘. 여순이 급하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여순의 얼굴로 피가 튀었다. 그녀 역시 말수가 했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다행히 눈으로 피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일단 피하자. 우리가 할 일은 없어. 그 말을 병사가 들었나 보다. 나를 포기하지 마세요. 전 이래봬도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이번에도 그럴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붕대를 감아 주세요. 그러나 병사는 붕대를 다음에 올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지탱하던 부상당하지 않은 나머지 발쪽으로 쓰러졌다. 감아 주세요겠지. 그래 그 말이 유언이 됐어. 세상에서 이런 유언도 다 있네. 붕대를 감아 주세요.
여순은 말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신의 등뒤에서 들려오는 그 말을 들으면서 여순은 정말로 그 유언을 확인했다. 병사는 그 즉시 숨을 거뒀다. 아래로 내려가서 상황을 보자. 말수가 여순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요. 등을 돌린 여순이 우리 빠르게 가요. 그러면서 여순이 몇 걸음 달렸다. 말수가 뒤따랐다. 빠르군. 정말 빨라. 말수는 여순의 달리기 솜씨를 칭찬했다. 이 와중에도 할 것은 해야지. 나 보다 빠르네. 백미터 내기 시합을 해볼까. 줄이 그어진 트랙위가 아니라면 사양할래요. 이런 때 꼭 뽐을 잡아야 겠어. 그리고 주심이 없으면 안 해요. 억지 쓸지 모르잖아요. 나를 뭘로 보고. 그냥 본대로 보는 거예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다른 말이고요. 어련하겠어요. 내가 졌어. 말수가 말했다. 그러나 여순이 아무리 빨라도 포탄보다 빠를 수는 없다. 미처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가려던 곳에 정확히 무언가 떨어졌고 연기가 났고 불이 이글이글 타올랐고 지옥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반대로. 반대로. 다급하게 말수의 외침 소리를 들었고 여순은 그 말을 따랐다. 이럴 때는 말수가 명령권자였다.
어이쿠. 말수가 시체를 밟고 넘어졌다. 아까 다리에 부상을 당해 쓰러졌던 병사쪽으로 말수가 넘어졌다. 이것은 말수 잘못이 아니다. 죽은 자의 잘못도 아니다. 거기를 통과해야 하고 마침 길목에 시체가 누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랴. 머리위에서 번쩍하고 번개의 형상이 그려졌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정말로 떨어지는군. 하늘을 올려다 보자. 비가 올까. 비는 아니오고 쇠뭉치가 떨어지고 있다. 빠르군. 낙하산보다 열배는 빨라. 그렇지만 눈에 보여. 이쪽인가. 아니 방향을 틀었어. 대각선으로 떨어져. 그렇지, 난 운이 좋아. 바다에 풍덩하고 빠지네. 살았어. 살았다고. 물보라. 그렇지, 예상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신이 난 사람처럼 말수는 기뻣다. 아니 그런 척 했다. 피범벅의 얼굴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표정이나 막지었다. 웃기도 했고 울기도 했고 어쩡쩡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여순은 알았다. 그가 일부러 미친짓을 하는 거라고. 저러니 미치지 않는 거지. 나도 그럴까. 이럴 때는 따라하는 것이 상책이다. 여순도 웃었고 울었고 눈을 감았고 눈을 치떴다. 눈보라가 날려. 바람찬 흥남부두에. 아냐. 그 노래는 지금보다 훨씬 뒤에 나왔어. 그러니 이렇게 내가 부르면 내가 선구자야. 다 우스운 짓이야. 그걸 부정안해. 사람이 하는 짓이 그렇지 뭐. 웃기는 일 이 최고지 뭐. 어라, 어 또 터지네. 이번에는 배의 옆구리야. 다행히 빗맞았어. 페인트 칠은 벗겨졌을거야. 그 정도야 뭐.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들어. 사람을 죽이려고 날아오면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봐. 너무나 당당하잖아. 사람목숨이 파리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보나봐. 뼈를 부러트리고 살을 파고는 드는 일이 예삿일이냐고.
악마. 적들은 악마였다. 쓰러진 일본군은 그에 맞서는 천사였다. 흘리는 피와 고통에 울부짓은 괴성은 그것을 증명했다. 천사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 신은 있는가. 천사가 고통을 받으면 구해러 와야 마땅하다. 바쁜가 보지. 한가할 때 오겠지. 허튼 농담 마세요. 여순이 말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봐, 보라고. 그쳤어. 그쳤다고. 하늘이 반응한 거야. 호들갑 떨지 말고요. 아니라고. 보라고 봐. 말수는 제 말을 믿지 않는 여순이 야속했다. 모든 공격은 일시에 멈췄다. 그러기도 쉽지 않는데 정말로 그랬다. 공격자는 또 야만인이 아닌가. 작은 온정은 남아 있나. 부상병을 치료할 시간을 주다니. 맞서 싸우는 것은 잠시 멈추자. 처절한 보복도 잠시 스톱. 말수는 다시 달려 나갔고 여순은 뒤를 따랐다.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같은 일을 하면 질릴 수 있다. 그러나 말수와 여순은 그러지 않았다. 생명을 놓고 질리다니. 그럴 수 없었다. 흰 옷 입은 그들이 천사였다. 한바탕 소란은 끝났어. 이제 수습하는 일만 남았다. 비열한 놈들, 이런 방법으로 공격하다니. 말수는 얼굴에 피를 또 맞으면서 성을 냈다. 그러기 위해 입이 약간 벌어졌는데 피는 그 틈을 타고 다시 말수를 공격했다. 씁쓸했다. 피맛은 더 보고 싶지 않아. 입을 닫으세요. 여순이 꾸중했다. 대충 갑판위가 정리됐을 때 말수는 여순은 죽은 사람이 됐다. 잠시 그 자리에 쓰러져 눈을 붙였다.
함장은 자신의 군함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아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무모하게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반격할 기운이 다했다. 군함은 다시 만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출격했던 전투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무자비한 적이다. 온정이 있다고 띄워졌더니 이번에는 꽁무니에도 함포 사격을 가했다. 군함의 모든 사람이 당할 판이었다. 어떤 병사는 허공으로 붕 떴다가 몸통과 팔 다리가 따로 따로 떨어졌다.그 모습을 보고도 다들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이제부터는 누가 누구를 도울 형편이 못됐다. 상처를 싸맬 붕대도 떨어졌다. 진통제나 항생제를 담아두는 약통은 텅 비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포탄의 파편은 멈추지 않았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말수는 몸이 말을 듣지 않자 화를 내는 대신 여순에게 소리쳤다. 여순아 엎드려. 그래야 산다. 그가 본 것은 아까 보았던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폭탄이었다. 여순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암전이다. 모든 것이 멈췄다. 시간도 멈췄다. 그러나 군함은 가던 속도를 유지했다. 대단한 군함이다. 함장은 그 순간에도 전방 주시를 놓치지 않았다. 앞을 봐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그의 소신이었다. 마지막 힘이라는 게 있거든. 죽기 전의 사람도 그렇잖아. 군함도 마찬가지야. 마지막 힘을 쥐어짜다. 그런 결과로 군함은 힘겹게 적의 레이더를 따돌렸다. 공중 공격도 함포 사격도 받지 않을 것이다. 함장은 안도했다. 침몰 하지 않았다. 함장의 명예은 유지됐다. 하지만 패배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마저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 군함은 건졌으니 내일을 도모하자.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자신을 호위하던 나머지 두 척의 함정은 서서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함장은 작은 레이더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함정의 물보라가 사라졌다. 냉정한 함장은 승전보 대신 패배의 아픔을 본토에 타전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영락없는 늙은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마지막 말에는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입술을 악물었기 때문이다.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피는 흔한 것이어서 함장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참담하군. 내 해전사에서 치욕이야. 그 목소리는 태평양 전쟁 전체의 패전을 의미하는 전주곡처럼 음울했다.
함장이 그러고 있을 때 다행히 말수와 여순은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운이 좋았다. 연속으로 그러기는 어려운데 이번에도 두 사람은 살아났다. 정신을 먼저 차린 말수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낮은 포복으로 기면서 살 수 있는 부상병이 있는지 확인했다. 기어 간것은 자신의 안전보다는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잠깐 기절한 병사도 있을 것이고 가벼운 부상으로 제때 처지가 이뤄지면 살 수 있는 병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 병사를 찾아야지.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거야. 그러지 못해서 못하면 그건 하늘의 뜻이고. 하늘의 뜻이라고. 어느 새 자신의 곁에 붙어 있는 여순을 의식하면서 말수가 말했다. 그래요. 모든 건 하늘의 뜻이죠. 우리가 군함에 탄 것도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그리고. 그리고 상륙하는 것도. 맞아요. 이제는 그 어디든 상관 없어요. 필리핀이든 사이판이든 이름 모를 섬이든. 이제는 바다를 벗어나기만 하면 돼요. 안 그래요. 그렇지. 말수의 대답은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이었다. 그도 군함 생활이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내려야 해. 상륙하지 않으면 다 죽을 거야. 식량 때문이 아니라 미쳐서 그렇게 될 거야. 최후의 일일은 누구일까. 함장. 그런 소리 말아요. 아직은. 우린 살아있고 여전히 손을 놀리고 있어요. 난 내가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될까봐 그것이 제일 두려워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되면 우리도 죽은 목숨인 거지. 겁 주지 말고요. 죽음이 다가오기 까지는 입에 담지 말아요. 알았어. 나도 아직은 죽기보다는 살고 싶은 마음이 많으니까. 함장실에 가볼까. 저 환자는 살수 있어. 눈빛이 생생해. 그냥 죽게 내버려 두기는 아까워.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는 의약품이 있을거야. 마취제나 항생제가 필요하다고 말해볼까. 여기 있소. 오기를 기다렸는데 왜 이리 늦었소. 이렇게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알아. 우리에겐 수술용칼과 붕대밖에 없어. 이걸로는 아무것도 못해. 약이 있어야 해.
말수는 말대신 함장실을 찾았다. 여순도 따랐다. 함장실 문 앞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모습을 서로 봤다. 피투성이. 군복은 붉은 색이었다. 얼굴고 손도 드러난 곳은 모두 피범벅이었다. 환자가 따로 없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부관이 그 말을 하면서 두 사람을 봤고 그 즉시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 오시오. 두 사람이 다 들어갈 거요. 부관은 이렇게 물으며 뒤에 있는 여순을 보고 너는 여기 있는 것이 나을 거야라는 눈짓을 주었다. 그 때 함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함장실에 피 냄새를 묻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밖에서 할 이야기를 하자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다. 소란이 있어 무언가 확인하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넓은 곳으로 나오려고 했고 그래서 나왔던 것이다. 말수는 함자을 보자 마자 의약품이 바닥 났어요. 살릴 수 있는 환자가 갑판위에서 죽어가요. 말수는 자신이 그런 보고를 하는 것이 미안하고 안 됐다는 것을 알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 함장은 별 미친 놈 다 보겠다는 듯이 흰자 가득한 눈을 위로 치켜 떴으나 이내 그들이 의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본능적으로 그런 것은 다 떨어졌어요, 처음 부터 많이 챙겨 오지 그랬어요. 목소리가 매우 차분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것에서 나오는 부드럽고 낮은 소리였다. 말수는 물론 여순도 미안했다. 패배의 순간에 몰린 함자에게 할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 순간을 피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꿔 약이 없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입니다. 나도 싸울 수 있게 총을 주세요. 뜻밖의 말이었다. 여순은 당황했다. 가만히 있기도 뭐했다. 그래서 저도 싸우고 싶어요. 하고 말수를 거들었다.
함장은 그 말을 들었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총 총 하고 두 번에 걸쳐 총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가카부타 말을 하는 대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군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과연 평생을 군복을 입고 싸운 사람 답게 회복력도 빨랐다. 의사양반, 그가 말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뻗었다. 말수도 엉겁결에 따라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최후의 일인이라도 미국놈과 싸워야지. 그래, 갑판위는 엉망이지요. 정리해야지요. 함장은 상관의 눈으로 말수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리고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갑판을 청소해. 명령은 얼음장 처럼 차가웠다. 누구라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는 바로 눈길을 돌려 말수를 향했다. 그래 당신같은 의사가 진짜 애국자야. 얼음장은 이내 따뜻한 커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저렇수 있지. 이 모든 것을 말수의 옆에서 지켜본 여순이 생각했다. 냉탕과 온탕이군. 표정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함장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쿄에서 콧노래나 부르면서 간호사 꽁무니나 쫒는 놈들이 무슨 의사겠어. 당신은 애국자야. 않그렇소 의사선생. 애국자라는 말에 말수는 목이 매었다. 진짜로 자신은 죽을 때까지 일본을 위해 싸우는 군인같았다. 거기 여자 의사선생도. 온통 피투성이군. 이리 와요. 여순이 다가섰다. 그가 손을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어허, 손도 온통 피야. 닦을 물이 없나. 이리 오시오. 아니. 거긴 좁으니. 그 말을 하면서 함장은 이 냄새를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부관. 하이. 갑판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부관에게 함장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바케쓰 있지. 그 안에 큰 거. 거기에 깨끗한 물을 받아와. 하이. 어서. 함장이 말했다. 의사선생은 총대신 칼이 필요해요. 병사들을 치료해야지요. 아직 선생이 총을 들어야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오. 보트를 주겠으니 내일 새벽 사이판에 상륙해요. 미리 보급부대에게 알려 놓겠어요. 보급부대와 접선한 다음 부상병 치료용으로 의약품과 그밖의 필요한 것을 챙겨서 돌아오시오. 함장은 순간적으로 이런 명령을 내렸다. 전혀 준비하지 않은 즉흥적인 것이었다. 말수를 믿었다기보다는 헌신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 이런 꾀를 냈던 것이다. 말수는 사이판이라는 말을 듣고 순간 귀를 의심했으나 짐작했던 대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트로 하선 하라니. 이것은 기회인가, 아닌가. 여순에게 물어야 하는데 지금 그럴수는 없다. 어떻하나. 이것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여순도 마찬가지다. 그러함에도 여순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건 기회에요. 우린 상륙합니다. 그것만 바랐던 것 아닌가요.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알았다고 답했다. 그러기 위해 군함에 올랐으니 당연한 대답이었다. 내일 아침, 아니 그 보다 더 일찍일지도 몰라요. 접선이 되는대로 선생은 우리측 특수공작원과 함께 내리시오.
말수는 여순은 어쩌고요? 하는 말이 목에 걸렸으나 순간 동작으로 멈추는데 성공했다. 여순은 어떻게 되지. 함께 내리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나 혼자는 어렵다. 여순의 지혜가 필요하다. 아니 여순도 살아야 한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말수는 머리를 굴렸다. 잔머리는 이런 때 필요하다. 어떻게 굴리지. 마구 굴려야지. 굴릴 수 있는 최대치로. 말수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실제로 마구 머리를 쥐어 짜냈다. 그 와중에 생각해 낸 것이 의약품에 관해서는 자신보다 여순이 잘 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의약품이란 뻔한 것이었다. 식욕억제제나 비만약을 처방할리는 없다. 그것을 말수가 모를리도 없었고 그런 핑계로 여순을 내리게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쉽게 풀렸다. 부관이 그때 바케쓰에 정말로 가득 물을 떠 가지고 나왔다. 손을 닦으시오. 생각같아서는 함장 자신이 씻겨 주고 싶었다. 그러나 부관이 보고 있고 말수가 옆에 있으니 그렇게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여순이 팔을 걷어 붙이고 손과 팔뚝을 닦았다. 바케스에 핏물이 짙어질수록 여순의 손과 팔은 하얗게 빛났다. 함장의 눈과 부관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런데 하얀 팔뚝에 다시 붉은 색이 돌았다. 팔과 다리에 파편을 맞은 여순도 처치가 필요한 상태였다. 여의사 선생도 부상당했소? 함장이 놀라는 눈치였다. 아이, 이 상처는. 그래 의사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태인가. 함장은 누가 들으라는 소리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하는 소리를 냈다. 그에 맞춰 뭐, 심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항생제가 없어요. 여순은 말수와 함장이 다 끝낸 애기를 알지 못해 이렇게 말했다. 부상병도 중요하지만 의사선생의 건강이 우선이오. 저런 상태로 방치하면 여선생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울 거요. 한시가 급하니 여의사 선생도 여기 말수 의사와 함께 하선 하지오. 의약품을 구하는 대로 환자 대신 당신에게 처치해야 합니다. 병사도 중요하지만 선생 목숨이 더 중요해요. 말수 선생이 하선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못 돌아온다는 가정은 하지 맙시다. 함장이 파이프에 불을 불을 붙였다. 후아고 연기를 내뿜으며 함장은 같이 하선 하시오, 하선해서 의사 선생이 먼저 치료하도록 하시오. 의사가 건강해야 부상병을 잘 돌보지.
말수는 여순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오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그런 것이다. 행운은 이렇게 느닷없이 온다. 예고 없이 오는 것이다. 불행과는 달라. 그것은 미리 알려주지. 계속해서 행운이 따라온다고. 여순은 하선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함장이 이렇게 덧붙이는 말을 듣지 못했다. 오로지 말수만이 함장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섬에 내리면 즉시 치료를 하고 의약품이 확보되는 대로 군함으로 복귀하시오. 당신들을 기다리는 우리 병사들을 생각해서 말이오. 두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습니다. 물 먹을 시간도 아껴서 돌아오겠습니다. 함장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뒤로 돌아서서 갇는 말수의 표정을 정면에서 보면 이렇다. 입에 옆으로 벌어져다. 크게 벌어져서 하관이 늘어났다. 심하게 하는 표현을 빌리면 입이 귀에 걸렸다. 여순의 걷는 모습은 가뿐했다. 천리행군의 막 첫 발을 뗀 것처럼 어서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욕구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같이 동행하게 됐다는 것에 더 큰 만족감을 보였다.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직 관심은 하선을 도와준 특수부대원들을 어떻게 따돌릴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어쨌든 말수와 여순은 이번에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행동하게 됐다. 알고 있어요. 앞에서 설명했잖아요. 독자들의 꾸지람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사족을 덧붙이는 것은 이런 결정이 이들 운명은 물론 이 이야기가 끝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어둠을 틈타 보트는 해안선에 상륙했다. 예를 갖춰 마중 나오는 인사는 없었다. 안내를 맡은 하사관 두 명은 그들을 안전막사까지 안내하는데 성공했다.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해안선에서 이곳까지 오는 중에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에는 아군도 있었지만 적군도 있었다. 그들은 섬을 지키고 섬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피를 흘렸다. 이곳 섬도 안전하지 않았다. 위험하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포소리와 총소리가 되레 갑판위보다 더 사나웠다. 그래도 말수는 기회를 엿봤다. 그러는 말수를 여순은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무언의 대화가 하선한 이후 두사람을 계속 따라다녔다. 말수는 누군가에게 의약품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특수부대원들은 말수를 인계하고 해안선에 숨어 대기하고 있겠다면서 두 사람과 헤어졌다. 도착한 직후 막사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막사 벽에 총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깨졌다. 그것을 신호로 그곳 상관이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잠시 주춤하던 병사들은 한 사람이 유리창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것을 신호로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서너 명의 병사들은 총을 마구 갈겨 댔다. 엎드려서 말수가 그 모습을 보았다. 총알이 아까워. 저러면 안 되는데. 겁이 나겠지. 살려고 저러는 거야. 하지만 조준해야지. 적을 보고 쏴야지. 명령은 철두철미하게 시행됐으니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순식간에 막사안은 텅비었다. 지휘관이 마지막으로 나간 후 막사안은 고요했다. 소란과 고요는 말 그대로 한끗 차이였다. 모두 밖으로 뛰쳐 나가자 말수도 그들을 따라 가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그만큼 분위기는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가는 형국이었다. 엉겁결에 둘 만이 남게된 상황에서 말수도 그렇고 여순도 그렇고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명령이 없다면 정말 앙꼬 없는 진빵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누가 명령을 내려 줬으면 싶었다. 거기, 십자가 완장찬 의사들. 너희들 뭐하고 있어. 빨리 안나가. 안 가면 죽는다. 등 뒤에 권총을 들이대고 이런 명령이라고 있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떤 명령이든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났어도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수는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눈에 익숙한 의약품 상자가 보였다. 뚜껑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급하게 대충 모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말수는 그것을 되는대로 배낭에 쑤셔 넣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시간 조차 없을 만큼 긴박하게 쓸어 담았다. 순간적으로 말수는 이것은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한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서둘러야 한다. 여기 남아 있는 것은 자살행위다. 말수는 안을 둘러 보았다. 맨 마지막에 급하게 나간 상관이 남기고 간 것으로 보이는 권총 한자루가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말수는 권총을 챙기고는 여순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일단 올라가자. 산으로 가서 숨을 만한 곳이 있는지 살피자. 적당히 몸을 감출 굴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상황이 파악되면 그 때 행동하자. 도착한 곳이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말수는 결과에 만족하면서 여순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병사들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산으로 향하는 언덕을 향해 냅다 달렸다. 그런 힘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은 어느 새 산의 중턱까지 와 있었다. 대단해. 당신은. 서로는 서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치켜세웠다.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좋았다.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끝없이 펼쳐졌다. 세상 평화스러운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눈을 돌려 자신들이 왔던 시내 쪽을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연기가 피어 오르고 부서진 잔해에서는 불길이 솟는 곳도 있었다. 그런 곳은 하얀 연기가 아닌 검은 연지가 주변을 뒤덮었다. 숨을 돌렸지. 그래, 가픈 숨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일단 위험 지역을 빠져 나왔어. 하지만 이곳도 안심하긴 일러. 특히 위로 더 가면 위험해. 고지를 뺏기 위한 전투가 벌어질지 몰라. 안전한 곳.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라. 다만 입구가 작고 안으로 갈수록 넓은 굴을 발견하면 생존 확률은 높아지겠지. 그런 곳을 찾아보자. 찾는다고 있으면 좋겠어. 해봐야지.이런 섬들은 굴이 있기 마련이거든. 내가 통영 뱃놈이거든. 섬을 이잡듯이 뒤지면서 놀았어. 나 만이 아는 굴을 여러개 발견했지. 입구는 겨우 한사람 들어갈 정도인 굴의 안은 넓었어. 여기도 그런 분위기가 풍겨. 한동안 그런 곳에서 지내면서 대책을 세워보자. 우선 이리와. 급하게 오느라고 왔지만 수통에 물도 있고 전투 식량도 있고. 의약품도 챙겼어. 대단해. 여순이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일단 그래. 여기가 좋다. 말수는 여순의 팔을 살폈다. 다행히 덧나지는 않았다. 그는 소독약을 발랐다. 다행히 항생제도 있고. 이걸 먹어. 아니 잠깐만. 빗속에 먹으면 뒤집어 질거야. 전투 식량을 조금 먹고 나서. 여순은 그런 말수가 듬직했다.
물새는 군함을 빠져 나오길 잘했지. 설마 그곳을 그리워 하는 건 아니고. 아래를 보면서 넋을 놓고 있는 여순에게 말수가 말을 붙여왔다.아무렴요. 자유가 있잖아요. 난 이런 걸 원했어. 내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 그게 없으면 어디 인간인가요? 나한테 묻는 거지? 그럼 당신 말고 여기 누가 있나요? 여순을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척 했다. 그건 나도 비슷해. 하지만 난 통제에도 잘 따라. 그래서 군인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 그러나 나 역시 체질은 자유인이야. 저기 봐. 멀기 보이는 곳에 우릴 태우고 온 군함이 보여. 설마. 우리 군함아냐. 우릴 기다릴까. 그러겠지. 군함의 전체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우리가 타고 온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어. 저기로 다고 싶은 거야.
노. 여순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다만 함장에겐 미안해. 약속은 약속이잖아. 돌아오기로 해 놓고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으니. 살아야지. 우리도 살아야해. 애초 군함에 탄 건 우리 의지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어. 군함 자체가 목적도 아니었고. 미안해 할 것 없어. 함장은 함장의 일을 했고 우린 우리의 일을 하는 거야. 우린 군인도 의사도 아닌 그냥 조선인일 뿐이야. 전쟁통에 이리저리 파도처럼 휩쓰려온 가련한 흰옷 입은 사람들이지. 그래도 우린 운이 좋아. 이곳까지 와서 여행자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어. 밖으로 나갔던 막사의 군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모르지. 아마 매복한 미군들에게 전멸 당했을 거야. 우릴 데리고 온 특수부대 요원들고 그랬을 거고. 돌아갈 수 없다는 핑계거리를 만드는 건 아냐. 미련을 떨치려고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막사의 지휘관이었다면 무작정 뛰쳐 나가라고는 하지 안았을 거야. 적은 우리를 보고 우리는 적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모한 작전이었어. 현장 지휘관이 이래서 중요한 거야. 하지만 그런 무모한 지휘관 덕분에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전쟁은 아이러니 투성이지. 당신같은 유능한 장교 아래였다면 우린 지금쯤 군함에 오르고 있을지 몰라요. 끔찍하군.
어렵게 얻은 건 쉽게 내줄수야 없지요. 우린 살았고 자유를 얻었어. 아직 단정할 순 없어요. 무슨 소리. 죽기전까진 산 목숨이야. 이건 진리야. 지금 우리는 갇혀 있지 않아. 이것도 진리지. 당신 참 대단해요. 어디서 그런 이론을 배운거죠. 이거 쑥쓰럽구만, 당신에게 칭찬을 다 듣다니. 책을 읽었지. 간혹 틈이 나면 난 읽었어. 당신도 늘 읽으면서 새삼스럽기는. 상사가 고맙지. 그는 끊임없이 가르치려고 했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었던 거지. 덕분에 난 배웠고. 어떤 책을 읽을지 물으면 의학서적 대신 전쟁과 평화나 죄와 벌 같은 책을 던져줬어. 내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지만 재미있기는 의학서적보다는 소설책이지. 난 세익스피어를 읽을 때 소름이 돋았어요. 정확이 이해 못하는 부분은 여러번 읽었고 지금도 그러는 곳이 있지만 대개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피로가 몰려와 곧 죽을 것 같아도 그런 멋진 장면에 이르면 고개를 들고 허공을 응시했어요. 주인공의 생과사가 이토록 드라마틱할 수 있을까요. 너무 감상에 빠지지 마. 우선 찾아보자. 그래요. 안전지대를 확보하면 그때 밤새 얘기해요. 우리. 여순의 머릿속은 데스 데모나가 떠나지 않았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녀는 말수의 꽁무리를 따라가면서도 이런 생각의 끈을 놓치 않았다.
그러나 말수는 다른 생각으로 복잡했다. 침착하자. 나라도 그래야지. 생존 본능을 최대한 살리자. 몸의 모든 감각을 깨우자. 머리 쓰는 일은 여순에게 맡기고 난 동굴을 찾아야해. 동굴. 통영 동굴 같은 곳이 분명 있을 거야. 빙 돌기만 하는 거예요. 더는 안 올라 갈 거야. 위쪽은 어는 쪽이든 군인들이 있을 거야. 그들은 올라오는 사람들은 일단 적으로 보고 쏠거야. 암구호를 댈 수 가 없잖아. 여기서 멈추자. 말수가 말한 곳은 절벽의 끝부분이었다. 더는 갈 수 가 없어서 멈춘 것이지 숨을 곳을 찾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순이 앞을 보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보지마. 아래를 보면 위험해. 그러는 당신도 조심해요. 자 이 근방에 있다면 금상첨화인데. 숨을 만한 장소야. 이런 곳이라면 함포 사격만 없다면 살 수 있어. 적이든 아군이든 여기까지 올 수 없거든. 자 보자. 살펴보자. 거기 가만히 있어. 나무 잡고. 돌풍이 불지도 몰라. 말수는 머리에 손을 대고 그럴만한 곳으로 짐작되는 곳을 눈으로 점찍었다. 저기 소나무 아래가 의심스러워. 급하게 가지가 아래로 껶였어. 그건 공간이 있기 때문이야. 뿌리박을 땅이 없으니 가지를 저렇게 내린 거지. 가보고 올게. 여기 가만히 있어. 괜찮겠어요. 말수가 눈을 찡긋했다. 조심해요. 이건 새로운 일이야. 아니 통영에서 해본 일이지. 무얼 찾는 건 익숙해. 절벽과 바다. 통영과 사이판이라고 다를 게 있겠어. 자 보자. 맞았어. 여기 틈이 있어. 들어갈수만 있다면 성공이다. 침착, 침착하자. 그는 몸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하고는 안으로 들이 밀었다. 처음이 어렵지 몸이 안으로 반쯤 들어가자 짚은 벽에 힘을 주었다. 안으로 쑥 들어갔다. 거기서 말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이 들어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밝았다. 거긴 밝았고 여긴 어둡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 수 있다. 여기라면 두 사람이 살기에 넉넉한 공간이다. 여순이 걱정하겠지. 그래도 좀 더 살피고 나가자. 위험한 것은 없는지. 뱀이나 뭐 곤충 같은 것들. 보자 보자. 햇불을 만들 걸 그랬어. 만들면 되지. 시간이 걸려. 여순이 걱정할 거야. 그 사이 여순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일단 나가자. 그리고 여순을 여기로 데려온 다음. 그래 순서대로 하자. 순서대로.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올 때 보니 자신이 들어간 곳은 절벽의 외벽처럼 각이 져 있었다. 내가 무슨 산양이야. 이런 곳을 타고 다니게. 그러면서 살려면 산양아니라 독수리도 되어 날아가야지. 그런 의욕을 가졌다. 말수가 절벽을 벗어났다. 그리고 왔던 곳을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흔적을 따라갔다. 여순이 앞에 있다. 여기에요.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어떻게 그래요. 말은 그래도 당신이 걱정되서 조용히 따라왔어요. 말수는 울컥했다. 찾은 거예요. 그래. 일단은 마음에 들지 몰라. 내가 마련한 거처가. 무슨 신혼집 장만한 신랑처럼 말하는 군요. 신랑? 하하하. 그래 난 신랑이야. 오늘 밤 신방을 차리는 것 어때. 신방. 그러면 반지는. 다른 건 몰라도 반지는 있어야지. 말수는 손을 펴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투박한 손. 이 손가락에 들어갈 반지가 있을까. 반지 말고 다른 것은. 아냐. 신랑에게 반지는 필수품이야. 필수품.
뭘 그렇게 중얼 거려요. 나도 압시다 좀. 여순이 종알 거리는 소리에 참지 못하고 한 마디했다. 어, 내가 그랬나. 알고 싶은 거지. 아직은 아냐. 아니니 알려고 하들 말드라고. 내 참, 여순이 혀를 내밀었다. 일단 올라가서 상황 파악을 하자. 말수가 손을 내밀었다. 여순이 따라 하려고 하자 갑자기 괴성이 울렸다. 엎드려. 말수가 여순의 손을 잡고 엎드렸다. 순식간이었다. 산중턱에 포탄이 떨어졌다. 말수가 고개를 옆으로 하고 조금 들어올렸다.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엄청나군. 우리 진지가 파괴됐을 지도 몰라. 말수가 먼지를 털며 일어나 앉았다. 화약냄새가 났다. 우리 진지라니요. 응. 발견했거든 내가. 당신이 아니면 이 곳에서 누가 그러겠어요. 그런데 거기가 부서졌다고요. 느낌이 그래. 방향도 그렇고. 그런데 왜 한 발로 끝났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 바닥이 났나. 더 쏠 것이 없이 마지막 포를 당긴 걸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보자고요. 그 소리를 신호가 말수가 앞서 걸었다. 굴이 있던가요. 찾았어. 틀림없이 은신처가 될 거야. 다시 폭판이 떨어지면 어떻하고요. 아닐 거야. 확신이 섰다면 한 발로 끝나는 경우는 없어. 대개 서너발을 쏘지. 그리고 탄착점이다 싶으면 집중포화하는 거고. 한 발로 끝난 건 아마 병사의 실수일 거야. 그도 아니면 철수하는 적들이 그냥 헛방을 질렀던지.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아래로 내려가는 군요. 아냐. 돌아가는 거야. 높은 곳이 아니라 다행이야. 여기서 높은 곳은 위험 지역이지. 일단 여기서 멈추자. 다리가 쥐날 정도야. 더 가자고 해도 나 도못가겠어요.. 여순이 그 말과 동시에 푹썩 주저 앉았다. 덥다. 이렇게 더울수가. 바람 한점 없다. 이렇게 고요할 수가. 폭풍전야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 계절의 특징이다. 땀. 가만히 있어. 나무가 살랑거린다. 바람이 지나가고 있어. 가만히 있으면 괜찮을 거야. 좀 먹자. 물도 마시고. 물은 아껴야죠. 그럴 필요 없을 거 같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조금 축축한 느낌이 있었거든. 그건 천장에서 물이 새거나 바닥에 고여 있다는 증거야. 우리 둘이 먹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시원하게 한 번 꿀꺽 하고 넘길게요. 여순이 정마로 그런 소리가 나도록 물을 먹었다. 그리고는 수통을 건네 주었다. 가볍다. 바닥에 겨우 있을 정도로 가볍게 찰랑인다. 다 마셔요. 아냐. 나는 혀만 적시면 돼. 그래도 갈증이 가셔. 통영 뱃놈이 괜히 뱃놈이겠어. 한 달 보름간 표류하고도 살아 남았어. 그 때 물 한금이 나니라 손가락에 찍어서 물을 마셨어. 그리고 벼터냈지. 오줌도 먹고. 오줌이라는 말에 여순이 인사을 찌푸렸으나 그런 상황에서 오줌을 먹는 건 양반적인 행동이었다. 가셨어. 아 시원하다. 여순은 말수도 나처럼 벌컥 소리가 나게 먹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아니겠어. 그러나 그는 나를 위해 남겨 놓고 있다. 누군가의 배려를 받고 있다는 것, 여순은 또 뭉클했다.
좀 낫지. 내가 뭐라고 했어. 가만히 있으면 견딜만 하다고 했지. 총 맞기도 전에 죽겠다는 생각이 가시네요. 그래서 군대에서 십분 간 휴식이 있는 거야. 맞는 말인가요. 믿거나 말거나. 말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당신은 든든해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거든. 든든한 남자가 있다면 바로 나라고. 그러나 실제도 그럴까. 여자 앞에서 쫄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걸 따지지 말자. 그러면 어떻고 안 그러면 어떤가. 평가해 줄 사람이 없는데. 말수가 주춤 거렸다. 그 새를 못참고 다시 이동하려고 한다. 가만히 있어봐요. 무슨 소리가 들려요. 말수가 무슨 소리라는 말에 긴장했다. 몸을 낮추고 그는 권총을 잡았다. 그런 거 아니 거든요. 들어봐요. 새소리였다. 새가 지져귀고 있어. 이곳에도 새들이 있구나. 어이가 없어 여순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곳에도가 아니라 이곳은 새들의 천국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식량걱정도 없겠다. 새알을 먹자. 때에 따라선 그 어미도 먹고. 어미라는 말에 여순이 또 인상을 썼다. 그런 표현 대신 다른 말 있잖아요. 그냥 새를 잡아 먹자고 하면 되지 어미를 먹자니요. 알았어. 내 딴엔 문학적 표현을 한 거지. 그것도 이해 못하느냐는 듯이 말수가 이번에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런 인상은 아주 가벼운 것이었고 이마에 작은 주름 하나 남가기 않아 여순도 그가 인상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무슨 새일까. 그거 이름도 알아야 해. 아이고야. 알면 좋지요. 알바스트로. 말수는 생각나는데로 말했다. 그건 아니고요. 그럼 그냥 참새. 그것도 아니고요. 기왕이면 꾀꼬리 어때요. 아무렴. 저기 꾀꼬리가 울고 있어요. 정말 꾀꼬리군. 노란색이지 아마 몸통은. 말수가 아는 체를 했다. 난 노란게 좋아요. 보기만 해도 그런 색은 포근해요. 자 일어나요. 여순이 먼저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수가 앞장섰다.
말수는 금새 꾀꼬리를 잊었다. 그러나 여순은 여전히 노란색 꾀꼬리가 나무위에 앉아 먹이를 가지러 간 수컷을 기다리며 부르는 암컷을 생각했다. 가보자. 제대로 가고 있지. 말수는 여순의 손을 끌었다. 좁은 길에 손을 잡고 걷는 것이 불편했다. 여순이 슬그머니 손을 뺐다. 잘 됐다. 이게 편하군. 말수는 자신이 손을 놓으면 여순이 기분 나빠할까 봐 불편해도 잡았으나 놓으니 좋았다. 말 안해도 여순은 잘해. 잘 한다고. 또 폭탄이 터졌다. 이번에는 머리위로 날아갔다. 거기가 탄착점이지. 산의 정상 말이야. 내가 잘 한 거야. 말수는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그런 마음으로 가자. 지금 우린 축제의 장으로 가는 거야. 불꽃 축제가 한창인 곳으로.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어쩜 그게 가능해요. 불안하지 않아요. 얼굴이 정말 즐기는 표정 같아요. 그럼 어쩌겠어. 울기라도 할까. 사내 답지 못하게. 그냥 순간을 즐기자고. 때가 되면 알아서 운명의 신이 우리를 이끌겠지. 정말 당신은 못말려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신기하다는 말이지. 나도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내가 신기해.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이렇게 이동하는 수밖에. 그러는 사이 문 앞에 왔고. 열려라 참깨. 한 번 외쳐볼까. 조용히 해요. 그러나 들키기라도 하면 무슨 사단이 나요. 날이 흐려져.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어둡고 바람이 불고 곧 소나기가 쏟아질 거야. 이제는 기상예보관이 됐군요. 도대체 모르는 것이 뭐죠.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알아. 뱃일이 그러고보니 이런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습한 기운이 몰려와. 피부가 알아채는 거지. 이는 틀림없는 비구름이야. 봐, 쏟아지려나 봐. 아니 쏟아지고 있어. 이리로. 이리로 와. 내가 들어가면 내가 하는 그대로 따라 들어아야 해. 왼발 부터 집어 넣어. 그리고 오른손으로 여기를 잡아야해. 그래야 수월해. 잡은 손은 내가 안에서 몸을 잡을 때까지 절대 놓으면 안돼. 아래는. 말안해도 알지. 말수가 날렵하게 각을 세우고 몇번 시도하더니 안으로 사라졌다. 여순은 그가 보이지 않자 불안했다. 빗물이 떨어진다. 후두둑. 어깨를 갈긴다. 이건 빗방울이 아니다. 때리는 느낌이다. 좋아, 못할 것 없지. 왼발을 이렇게 하고. 그렇지, 여기를 잡으라고. 잡히네. 안에서 말수가 말했다. 잡은 놓지마.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빗물에 순간 몸이 휘청했다. 하마터면 손을 놓칠뻔 했다. 팔뚝이 당겨왔다. 붕대를 감은 손이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녀도 말수처럼 비비적 거렸다. 안에서 말수가 배쪽의 옷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됐어.오른 손을 놓고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집어 넣어. 오케이. 됐어.
안도의 환호성을 지르자. 야호. 기왕이면 대한독립만세. 무슨 소리야. 애국자 납셨네. 사이판까지 독립운동가의 손이 뻗쳤어. 그만 그만. 일단 어둠에 익숙해 봐. 그렇지. 발에 걸리는 게 있지. 나무 가지야. 그걸로 횃불을 만들어 안을 살필 거야. 일단은 우리 축배를. 들자 이 말을 하려고 했지요. 우린 찰떡궁합이야. 이렇게 척척 맞아 떨어지다니. 밖으니 안이나 어둡기만 마찬가지네. 아까는 여기서 밖은 환하게 보였는데. 무섭게 비바람이 불겠지. 얼마나 다행인가. 가만 빛이다. 여순이 소리쳤다. 저건 뭘까요. 아, 조명탄이야. 낮보다 밝게 비추지. 불이 있는 동안 적을 파악하고 공격하는 거야. 왠지 불길해요. 그게 우리 앞에서 터지니. 우리가 표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어. 그런다고 나갈 거야. 노 노 노. 이런 행복 포기할 수 없어요. 절대로. 우린 굿이나 보는 거지. 불꽃놀이 구경이 별 거 있어. 야광탄의 긴 꼬리는 생명선이다. 우리를 살리는 명줄이야. 정말 길고 가늘게 떨어지네요. 그럼 우리고 길고 가늘게 오래 오래 삽시다. 그렇게 생각하자 여순의 마음은 다시 잔잔한 수평선과 같아졌다. 모닥불 피워 놓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합시다. 말수가 흥얼 거렸다. 나뭇가지를 모으고. 그렇지. 닥치는 대로 모으자. 구덩이 조금 파고. 다행히 야전삽이 허리춤에 달려 있네. 원하는 것은 모두 있어. 그는 쓱쓱 삽질을 했다. 돌부리에 걸려 불꽃이 튀었다. 흙보다는 돌이 많아. 안 되겠어. 땅을 파는 건 포기. 대신 돌을 쌓자. 그는 야전삽의 뒷 부분을 이용해 돌을 들어 올렸다. 시간이 걸렸다. 여순은 말수가 하는 꼴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자 고개를 돌려 굴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로 살짝 해가 비쳤다. 그새 그친거야. 참 지조도 없네. 시작했으면 한 시간은 가야지. 저기 봐요. 해가 떴어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까는 비가 온다면서요. 그랬지. 지금은 그쳤잖아. 잘도 둘러 대시는 군요. 비가 그치면 뭐겠어. 해 아니면 구름이지. 자 들어와. 그렇지 빛이 들어 오는군. 비치라 하시니 비치는 구나. 뭐 하느님이 이라도 된 기분이네. 내가 주님의 아들인 것 당신도 알지.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럭 저럭 돌 아궁이가 마련됐고 나뭇가지가 쌓이고 불이 붙었다. 생각보다 안은 그렇게 깊지 않았다. 몇 미처 들어가자 벽이 막혔다. 그러나 두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는 좁지 않았다. 봐, 누울수도 있어. 다리를 쭉 펴도 돼. 말수가 드러누워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길게 뻗었다. 당신도 누워봐. 그럴 기분 아니거든요. 그러지 말고 이리와 봐요. 여순은 마치 못해 누웠다. 괜찮아요. 내가 이렇게 팔로 벼개를 만들었어. 새우처럼 몸을 바짝 구부리고 여순이 말수 옆에 누웠다. 이렇게 한 숨 자자. 피곤이 몰려왔다. 자려는 생각을 하자 정말로 눈이 무섭게 감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두 사람은 깊은 잠에 빠졌다.
먼저 눈을 뜬 것은 여순이었다. 그녀는 푹잤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정도로 개운한 몸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흐릿한 불빛이 머릿맡에서 꿈틀거렸다. 다행이 모닥불은 꺼지지 않았다. 숯덩이가 된 나무에서 불이 반짝 거릴 때는 밖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 였다. 그러면 주변이 좀 더 밝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동굴안을 다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여순은 눈동자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무엇이 있느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말수는 옆에 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나. 그럴 즈음 자신의 발밑에서 움직이는 것이 포착됐다.
그녀는 지체없이 그것이 곤총이거나 벌레라는 것을 알았다. 시골에 살면서 간혹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 이건 벌레야.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옷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발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힘껏 휘둘렀다. 떨어져 나갔는지 계속 붙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여순은 그러는 동작을 몇 차례 더 시도했다. 그럴 때 마다 여순은 이빨이 바드득 거렸다. 얼마나 떨었는지 저도 모르게 나는 소리였다. 여전히 싫어.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다리쪽을 눈여겨 봤고 아니 그쪽의 이상한 느낌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녀석은 떨어져 나갔는지 타고 오르는 기분은 얿었다. 일어난 여순은 손을 바닥을 더듬어 나뭇가지 같은 것을 모닥불에 조심스럽게 던져 넣었다. 손으로 자를 수 있는 것은 여러 토막을 냈다. 작은 불이 타오르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여순은 바닥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게 몇 번을 시도한 끝에 모닥불은 제 역할을 했다. 동굴 안쪽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왜 그 소리를 이제야 들었지. 그러자 갑자기 목이 타왔다.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녀는 수통을 집어 들고 다른 손으로는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들고 그곳으로 가서 몇 방울 담으려고 시도했다. 수통의 구멍은 좁았고 물은 직선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무언가 부딫쳐 사방으로 뛰기도 했다. 이건 어려워. 그녀는 손끝으로 바위에 묻은 물기를 찍어서 먹었다. 어림 없었다. 입을 대고 운 좋게 한 방울 들어올 때도 있었지만 얼굴에 맞거나 다른 몸의 다른 곳으로 떨어졌다.
나가고 싶다. 들어온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으나 여순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넓은 곳에 있고 싶어. 숨이 막혀. 다시 말수 옆으로 온 여순은 이만하면 말수도 어지간히 잤다고 여기고 그를 흔들어 깨우기 보다는 그가 스스로 일어 날 수 있도록 모박불을 더 지폈다. 몸에서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말수도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별 일 없지. 말수의 첫마디였다. 벌레가 있어요. 섬에 벌레는 친구야. 설마 지네에 물린 건 아니지. 쥐가 다녀갔다거나. 그렇지는 않은데 벌레가 무지 많아요. 나가야 겠어요. 그 말에 말수가 창문을 열듯이 손을 뻗어 여순의 어깨를 잡았다. 이곳은 안전해. 내가 보장해. 좀 더 있어보자. 당신도 그러기로 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요. 답답해요. 벌레 때문만은 아니에요. 여기 있으면 내가 죽겠구나 이런 마음이 생겨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산 목숨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문쪽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날이 밝아오고 있다. 얼마를 잔 거야. 하루 아니면 이틀. 모르겠어요. 푹 잔 건 틀림없어요. 그러니 이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요. 빛은 더 넓은 지역으로 들어왔다. 침투하는 적처럼 슬그머니 들어와 언제 이렇게 안이 밝아졌지? 하고 놀라는 정도였다. 물을 일단 모으자. 내가 들고 있을게. 수통의 입을 물방에 대면 흘릴일이 없어. 목마름 때문에 여순이 서두르고 있다고 판단한 말수는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한 삼십분 정도 고생한 끝에 말수는 수통을 들고 여순에게 내밀었다. 제법 묵직한 것이 절반 정도는 찬 듯 싶었다. 먼저 마세요. 여순이 그것을 다시 말수에게 주었다. 고집 부리지 마. 레이디 퍼스트도 몰라. 여순은 다시 수통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한 모금 깊게 마시자 숨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막혔던 혈관이 머리로 타고 오른다. 다시 심장을 거쳐 발끝으로 간다. 피가 돌아. 내 몸에 피가 돌고 있어. 고아뭐요. 말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 자신도 머리로 막 피를 공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해는 정면으로 떠올라서 동굴안 전체를 파악 할 수 있게 됐다.
어디보자. 말수가 막대기를 들었다. 벌레란 놈이 있으면 이것으로 죽이자. 그는 눈에 찾는 것이 보이지 않자 막대기를 이용해 돌을 들추고 드러난 땅을 찔러 보았다. 없어. 이 놈은 빛만 보면 도망치거든. 자 우리 아침 식사를 할까. 말수를 배낭을 뒤졌다. 전투 식량이다. 물을 부어야 해. 뜨거운 물이 없잖아요. 왜 없겠어. 여기 바납도 있고. 여기에 이걸 붓고 물을 조금 넣자. 말수가 수통을 흔들었으나 거기에는 출렁 거림이 없었다. 다시 갔다 올게. 그동안 상을 차려. 상을 차리라고. 그래 상차림을 하자. 무엇이 있을까. 여순은 말수가 좀전에 했던 것처럼 배낭에 손을 넣고 손으로 꺼낼 만한 것이 있는지 뒤적였다. 그러나 뭐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에 딱 걸리는 차가운 느낌의 쇠뭉치가 만져졌다. 권총이구나. 이걸 내가 만졌었지. 탈출하려고 할 때 말수가 쏴보라가 권하기 까지 했어. 이 느낌은 뭐지. 나쁘지 않아. 그녀는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문쪽으로 다가앉았다. 자세히 좀 보자. 이렇게 생긴거야. 여순이 권총에 호기심을 보이고 있을 때 말수가 상차리지 않고 뭐해 한마디 했다. 총 구경 하고 있어요. 조심해. 약실에 한 발이 있을 지 몰라. 방아쇠는 내버려 둬. 총소리가 나면 곡소리로 바뀔지 몰라.
그럭 저럭 밥같은 것을 먹었다. 그리고 두사람은 다시 잠을 잤다. 여순이 눈을 떴을 때는 벌레같은 것은 없었다. 이 놈은 밤에만 나타날 거야. 그래 난 더 문쪽으로 가야지. 어떻게 알았는지 여순이 발을 바깥쪽으로 뻗자 말수가 한 마디 했다. 조심해, 그러다 낭떨어지와 손잡을 지 몰라. 더 자지요. 아니, 벌써 깼어. 이번엔 내가 먼저 일어났지. 잘도 자더군. 잠은 내가 잘 자요. 그거 복받은 거야. 나도 그래. 파도가 배를 뒤집어도 그 안에서 잔다니까. 잠 안자고 이틀 고기와 싸우다 보면 그물을 잡고 잠을 잘 때도 있었어. 그러니 이곳은 오성급 호텔이지 뭐. 생각하면 그래요. 마음먹기 달린 거지요.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말수가 여순이 있는 문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들어 이쪽은 생명선 이쪽은 재물선 어쩌고 저쩌고 했다. 손금 볼 줄 알아요. 내가 못하는 게 뭐가 있어. 그럼 어디 내 손금도 봐주세요. 여순이 말수의 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른 건 말고 생명선만 봐줘요. 늘 그게 궁금했거든요. 자, 어디보자. 쭉 뻗었네. 다른 선은 다 무시해도 되겠어. 이런 손금은 처음봐. 다른 사람 손금도 봤나요. 많이요. 아니. 당신이 두번째야. 어이가 없었다. 여순은 크게 웃었다. 뭐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니지만 한 번 웃기 시작하자 멈추기 어려웠다. 겨우 진정하자 말수가 말했다. 그렇게 우스워. 내 손금 평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예요. 오래 살았을 때 내가 이같은 웃음을 얼마나 더 웃을까 그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도록 더 세게 더 오래 참았던 거고요. 한 번 이라고요. 여순이 엄지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정말 대단해. 고랑이 깊어. 거센 물이 오랫동안 흘러간 흔적처럼 아주 깊어. 나 죽으면 기도해줘. 못잖는 소리는. 어디 이리줘봐요. 내가 봐줄게. 여순이 말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억세다. 거칠고 투박하다. 이 느낌 뭐지. 그래. 두꺼비야 두꺼비. 밭에 있는 두꺼비를 만진 적이 있어. 등이 우툴두툴한 것이 그러지 않아도 그 느낌 알겠지만 여순은 용기를 내 만졌었다. 그래 두꺼비 손이야. 두꺼비 손 남자는 얼굴도 보지 않고 시집간다고 했는데. 이 남자. 정말 그럴까. 본다는 손금은 안 보고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비맞은 중놈 처럼. 욕하지 말아요. 우리는 귀한 사람들이니까. 알아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난 천하게 자랐어. 뱃놈 치고 천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있어요. 중놈 말고 비맞은 스님처럼. 안 어울려. 비맞은 다음에는 스님이 아닌 중놈이 딱이야. 그만. 손금을 보니 당신도 길겠어요.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지요. 도랑이 깊다고. 아니 그 전에요. 뭐지. 생각났어요. 쭉 뻗었다. 당신 생명선도 그래요. 재물이나 명예나 이런 것 다 덮을 정도로 쭉 뻗었어요. 그럼 우리 백년해로 하는 건가. 그런 거야. 여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리고 풋하고 웃었다.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사랑의 고백은 더떤 상황이든 효험을 발휘한다.
그나저나 군함은 아직도 우릴 기다릴까요. 순진하군. 여긴 전쟁터라고. 우일 데려다 줄 두 명의 특공대원이 어찌됐을지 궁금해요. 나도 그래. 그들은 무슨죄야. 우린 여기 있는데 안전한 곳에서 밖을 보면서 사랑 노래 부르는데. 말수가 딴전을 피웠다. 걱정하는 사람 같지 않아요. 살아서 귀환하기를 바라지만 당신도 봤잖아. 빗발치는 총탄 세례 앞에서 돌격 앞으로. 이게 말이 되냐고. 아무리 말이 안 되는게 전쟁터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지휘관 자격이 없어. 문 앞에서 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있는데 거기로 내몰다니. 글쎄, 한 번 볼까. 말수가 두 손으로 벽을 집고 바다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라졌네. 안 보여. 그 군함인지는 모르지만 있었는데. 철수했나봐.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럼 우린 전쟁 미아가 된 거네요. 이제 우리 걱정이나 합시다.
난 내려가고 싶어요.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니. 아니요. 여기는 위험해요. 어제 이쪽에 포찬 한 발이 떨어졌잖아요. 당신은 오발이라고 했지만 이 근처에 아마 상당수 병력이 있을 거예요. 그 병력은 방어병력이기도 하고 공격병력 이기도 해요. 그러니 우리는 하산하는 게 어때요. 이곳에 들이닥치면 적이든 아군이든 우린 독안에 든 쥐 신세라고요. 내려가면 어디로? 막사 옆에 성당이 있었지요. 그 성당은 반쯤 무너져 내렸어요. 파괴 됐다는 말이지요. 부서진 건물에 다시 포사격을 할 군대는 없어요. 대개 성당에는 지하가 있어요. 거기에는 포도주도 있고요. 식량도 넉넉할 겁니다. 그래서. 이 안전한 곳을 두고 떠나자고. 말수가 즉각 반대했다. 거긴 총알이 날아다녀. 봤잖아. 이젠 끝났어요. 이곳으로 총알이 이동했다고요. 말수는 정신이 헷갈렸다.
여순의 진심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오지 않는 안전을 위해 미리 이동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으로 보였다. 이제 겨우 원기를 찾았어. 하지만 더 쉬어야 해. 쉴 시간은 많이 있어요. 우리 앞에는 수많은 시간이 있고요. 도통 무슨 말인지. 지금이 적기에요. 해가 중천에 있고 더위는 절정이고 병사들은 어딘가 숨어서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우리처럼 쉬면서 정비할 시간을 갖을지도 모르고요. 참, 어이없어. 여순, 정말로 이게 최선이오. 그러나 말수는 여순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성당 지하에 있다는 포도주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은 이미 그렇게 결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럽시다 하고 선뜻 동의하지 못한 것은 이번 판단이 자칫 지금까지 살아온 생명의 끝장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다 못한 이야기. 우리 백년해로 합시다. 그 말을 매듭지어야 한다. 그러고 싶었는데. 아, 그렇지 성당이라면 십자가도 있겠고 잘하면 신부도 숨어 있을지 몰라. 주례를 서 달라고 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좋소, 여순 동지. 우리 그렇게 합시다. 말수가 말했다. 왔던 길로 내려갑시다. 그 길 그대로 그러면 적어도 지뢰는 피하는 거니까. 말수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순은 이 사람이 긴장하고 있구나 판단했다.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해도 새로운 일 앞에서 인간은 늘 이런 식이다. 좋아, 수통에 물을 채우고. 한 시간 후에 떠납시다. 잔불도 정리할겸. 여순은 흔쾌히 동의했다.
여순은 약통을 꺼내 들었다. 소총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는 어깨에 걸친 약주머니를 열었다. 상처를 소독해야 한다. 덫나면 낭패다. 이제는 내 생명을 살여야지. 물 다 받았어요. 조금만 더. 나 좀 봐요. 여순은 붕대를 살짝 열었다. 죽은 피 냄새가 코 끝을 자극했다. 내 냄새도 다른 사람의 냄새와 다를 게 없구나. 여순은 누군가의 삶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현장을 떠올렸다. 섬의 병상에서, 군함의 갑판에서 이승의 끈을 연장하려고 애썼지. 말수가 다가왔다. 수통을 내밀었다. 달았다. 산삼 썩은 물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도 그걸 생각하면서 먹었어요. 여기 좀 소독 좀 해줘요. 어디 보자. 냄새가 나지요. 상처가 심하지는 않은데 큰 일 날뻔 했어요. 칼 좀 줘요. 좀 긁어 내야겠어. 여순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수의 손끝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그가 지금 어떤 처치를 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아프다. 참자. 이 정도가 상처도 아픈데 무릎뼈가 나간 병사는 얼마나 아팠을까. 윽, 소독약을 붓는군. 여보 조심해요. 한 방울도 아까워요. 대답없는 말수. 붕대. 여기 있군. 함장에게 감사 기도 해야겠어. 우리가 하선 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지금쯤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몰라. 성당에 도착하면 진짜 쉬자. 지하실에서 쥐죽은 듯이 있자고. 죽은 쥐 본 적 있지. 죽은 쥐는 움직이지 않아. 꼼짝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거지. 우리도 그렇게 있자. 그래야 상처도 아물고. 그러기 전에 포도주를 찾는 건 어때요. 살아 있을 때 건배해야지요. 오케이. 그건 내게 맡겨. 자신있다는 말이군요. 내 코가 보통 코가 아냐. 특히 알코올 냄새는 기가막히게 찾아내지. 다 됐어.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내가 당신을 치료한 건 처음이지. 그러게요. 조선 최고의 외과 의사가 했으니 믿어도 되죠. 암. 암. 내려 갑시다. 말수가 앞장서라고 여순에게 말했다. 아니, 아니. 그 말을 하고 바로 수정했다. 내가 먼저 나갈게. 손과 발의 움직임을 잘 살펴서 그대로 따라해. 아냐, 그러지 마. 내가 내려가서 상황을 보고 올게. 그런 다음 움직여도 늦지 않아. 떨어지기 싫어요. 금방이야. 올 때 보니 바위가 하나 있었지. 큰 바위에 올라가서 보면 우리가 탈출한 막사와 부서진 성당이 보일 거야. 거기 주변이 어떤지 살펴볼게.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면 하루 이틀 여기서 더 묵자고. 여순은 말수의 말이 맞다고 여겼다. 그래서 조심해서 같다고 오라고 말했다. 여보, 이거. 나가려는 말수는 잡고 여순이 권총을 건네 주었다. 먼저 쏘지는 마세요. 알았어. 총소리가 나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말수의 모습이 사라지자 여순은 이것으로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다른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잊고는 편하게 드러 누웠다. 혼자네. 얼마만의 혼자야. 정말 혼자야. 아무도 없어. 단단히도 묶었군. 여순은 팔목의 붕대를 만졌다. 그가 잘해낼 거야. 내 생각도 괜찮고. 여긴 싫어. 벌레 때문만은 아냐. 왜 그런지 살기가 느껴져. 나를 밀어내는 기운이 있거든. 음산하기도 하고. 그것은 여순이 말이 맞았다. 잘 살펴보았다면 보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몇 명의 즉결 심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절벽아래로 던져졌다. 원혼이 떠돌고 있어. 유령이 다가와. 그러지 마. 아직은 너희들 친구될 마음이 없거든. 여순은 손을 휘저었다. 그나저나 군인들은 죽을 때 왜 엄마를 외칠까. 아빠를 부르며 죽는 군인을 본 적이 없어. 나도 그럴까. 말수는.
그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난 여기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떠날거야. 내 결심은 되돌릴 수 없어. 여기 가만히 있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귀신에 씌어 죽을 수는 없다는 말이야. 아직은 할 일이 있어요. 그러니 귀신 여러분, 아무리 원통해도 상대가 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해 둡시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 노는 것도 재미있네. 누가 들으면 제대로 미친년이라고 손가락질 하겠지. 그래 해보라고. 누가 겁을 낸데. 난 할일이 있거든요.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여순은 알지 못했다. 막연히 무엇을 한다는 것만 알았다. 찾게 되겠지. 내 일을. 우선은 전쟁터를 벗어나는 일이고.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어. 전쟁만 없다면. 그곳이 천국인 거야. 다들 바라는 천국. 천국으로 갔을까. 앳된 얼굴의 그 군인들 말이야. 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네. 이마의 피는 말랐고 그래서 어른이라고 총을 잡았는데 세살 아이처럼 엄마만 찾고 있어. 그래도 소용없어. 네 엄마는 여기 없단다. 애야 알겠니. 조용하네. 그리워. 총알이 날으는 소리. 그것들도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지. 잠시 멈춘 걸 보면.
자 그렇다면 우리가 움직일 차례야. 낮의 열기가 뜨거워 지는군. 심하다 심해. 이 더위에 피서는 고사하고 전쟁이라니. 상처가 아물겠어. 금방 썩을 거야. 그런 걸 군인들은 알까. 자신의 살이 금방 상해버린 생선처럼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을. 어 냄새. 냄새를 생각하자 여순은 자신의 팔목을 내려다 보았다. 이건 약과야. 이건 냄새도 아니지. 그러니까 갑판위의 그 병사. 내장이 쏟아져 나와 자신의 창자를 잡고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몸에 있던 것인 줄 알았을 때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난 그 표정보다 냄새가 더 싫었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야. 표정이야 외면하면 되지만 냄새는 안돼. 그 때 하필 포격이 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엎드렸어. 그런데 막 내장을 잡고 있던 그 병사가 죽은 거야. 엎드린 등에 무언가가 얹혀졌어. 무게감이 있더군. 난 그게 무언지 알았어. 치워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는 거야. 정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던 거지. 나도 죽었어. 그때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어떤게 삶이고 어떤 게 죽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이었지.
내가 어떻게 그걸 판정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병사는 나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봤어. 그렇게 보지 마. 난 사망판정을 내리는 의사가 아냐. 치료하러 온 거야. 장례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더더욱 아니고. 아니라고. 그런데 그 표정. 겁이 나더라도 난 아냐.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난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다 알아.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거지. 그런데 말이 안 나오지. 알았어. 알았어. 내가 대신 불러 줄게. 엄마, 엄마, 됐지. 군인은 정말로 죽었다. 그 말을 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여순은 자신이 군인에게 좋은 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난 너에게 모질게 하지 않았어. 넌 내 친구이며 오빠이고 동생? 그래. 그렇구나. 동생도 될 나이야. 짧은 생을 끝냈어. 아프고 고통스럽게 마지막을 장식했어. 네 책임이 아냐. 그러니 속상해 하지마. 넌 갔어도 목소리는 남았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울컥 거렸지. 그렁 그렁 겨우 숨을 쉬었는데 그 소리를 난 들었어. 고개를 돌렸을때 귀는 더 네가 가까이 갔었지. 다 들었어. 네가 마지막에 낸 소리를.
그만 그만 해야겠어. 그래서 혼자 있으면 안 된다니까. 그나 저나 말수는 정탐을 무사히 끝내고 오고 있는 거지. 그래 저기 열린 틈으로 그의 그림자가 보여. 그러나 그것은 말수의 것이 아니었다. 해가 기울면서 나뭇가지가 사람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여전히 사방은 고요하다. 총소리가 멈추니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성당의 종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저 종소리를. 여순은 기억해 내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어디서 들었던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마음의 안식만 얻으면 됐다. 종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눈에 십자가가 어른 거린다. 사람 사는 세상은 세상 어디서고 같은 소리로 성당은 종은 울렸다. 말수가 돌아왔다.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할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말수는 모험을 걸어보자고 했다. 거긴 조용해. 끝난 건지 끝나다 만 건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조용해. 어느 쪽으로 보여요. 끝난 것 같아. 상황은 정리됐고 적도 아군도 떠났어. 남은 건물은 모두 부서졌어. 내려가자. 그럼 종소리는 뭐지. 누가 쳤지. 가짜 소리다. 속은 거야. 자신의 귀를 아래로 잡아 당기면서 여순은 귀가 나를 속였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부서진 성당에는 거짓말 처럼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신자가 있는가. 아니 산자가 있단 말인가.
여순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 옆에 말수가 벽에 바짝 붙어서 안쪽을 쳐다봤다. 뭐가 보이나요. 놀랍게도 거기에는 원주민 서너명과 노인 두 셋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깊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멘을 외치고 있었다. 신부님도 보였다. 무엇을 주제로 신부님이 설교할지 궁금했다. 일단 들어가 보자. 뭐 좀 먹을 게 있는지 살피는 것 잊지 말고. 둘은 조용히 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밖이 다 보였다. 깨진 창문과 부서진 잔해들은 성당 바닦에 그대로 뒹굴고 있었다. 다행히 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여순은 탁자 사이에 가지런히 놓인 성경책에 손을 얹었다. 옆에 있는 작은 묵주는 다른 손으로 잡고 가만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신부님 말씀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형식적인 설교였을까. 눈을 들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군함의 갑판처럼 구멍은 포탄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마른 잉크 처럼 엉겨붙은 핏자국. 설교를 듣다 당했구나. 전쟁은 예외없어. 성당이든 아이든.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렇겠지. 사랑할 거야. 그러니 이젠 전쟁을 끝내 주세요. 여순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야 내가 집으로 가지. 아니 집엔 안 갈 거야. 그 순간에도 여순은 집을 거절했다. 아멘 하는 소리를 끝으로 설교는 끝났다. 신부는 기침을 했다. 그것도 심하게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무리를 했어. 사람은 그러는 게 아닌데.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하는데. 신부는 그걸 잊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 저 눈빛을 보면 알지. 무슨 말이었을까. 속에 있던 하고 싶었던 말은. 입을 막았던 손을 떼자 순간 핏자국이 보였다. 결핵인가. 결핵약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네. 신부는 아파. 그걸 본인도 알고 있어. 그래서 할 말이 많은 거야.
많이 아픈 그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서 있을 날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도 마지막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을 거다. 신도에게 하는 설교가 아닌 자신에게 들려줄 그 무엇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어디서 왔을까. 노랑머리 선교사는. 이국 땅에서 이교도를 전도하기 위해 왔다가 전쟁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오늘의 이 자리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그는 습관처럼 하느님 아버지, 아멘을 끝으로 예배를 마쳤다. 원주민과 노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곳이 있는가.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그들의 거처가 있는지 궁금했다. 아직 파괴 되는 않은 성당 뒤편에는 부서지고 깨진 집 사이로 온전한 곳이 있을까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머물 곳으로 갔다. 여순은 그들이 나갈 때 뒤로 돌아 그들을 배웅했다. 잘 가시오. 하나님의 형제들. 마치 시체가 움직이듯이 그들은 느릿느릿 움직였다. 걸어가는 시체가 따로 없었다. 이젠 이곳도 안전한 곳이 아니오. 성당은 무너졌고 신부는 죽음의 문턱에 있어요. 그러니 여기에 내일부터는 나오지 마세요. 여순은 자신이 주임 신부인 것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론가 가던 그들은 누군가가 매설한 지뢰를 밟고 그 자리에서생을 마감했다. 이제 성당의 남은 신도는 여순과 말수가 유일했다. 신부가 내일도 살아있다면 말이다.
신부가 여순과 말수가 부서진 문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나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던 것이다. 신부는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도들이 앉는 의자를 지팡이 삼으면서 아무 곳이나 펼쳐 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순앞으로 왔다. 기적의 순간이 사이판에서 이뤄지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려주셨으니 앞으로도 쭉 살려 주세요. 우스운 기도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이것 말고는 없었다. 그 순간 여순은 자신의 어깨에 무언가가 닿은 감촉을 느꼈다. 덥고 습한 기운이 온 몸에 있는데 그것을 한 순간 무너뜨리는 차가움에 여순은 섬특했다.입고 있는 군복으로 보아 신부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는 차분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취하는 행동다웠다. 가진 게 많아야 불안한 법이야. 내가 떨고 있다면 그 이유겠지. 난 많이 가졌어. 남편이라고 불러도 좋을 남자가 옆에 있고 아직은 청춘이야. 여순은 붕대 감은 손이 저려오자 탁자위에 오른손을 올려 놓았다. 다치셨군요. 지하에 먹을 것이 있어요. 포도주도 있어요. 이제 그것은 내것이 아닙니다. 난 곧 죽을 목숨이니 그곳에 가서 목숨을 부지하세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러려고 왔어요, 여순은 그 말을 차마 신부에게 하지 못했다. 내가 죽거든 어떻게 해달라는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신부는 어깨에 올린 손을 거둬 들이는 것도 벅찬 듯 싶었다. 나가고 싶으세요. 말수가 말했다. 그기로는 그의 팔을 잡고 한 발 두 발 부서진 문틈쪽으로 향했다. 마치 식을 올리고 퇴장하는 다정한 모녀의 모습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여순은 생각했다. 그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여순은 다시 성경에 눈을 박았다. 어떤 글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신을 찾는 것은 야비한 짓이고 이기적이라고 판단했다. 적들도 성경책을 펼칠거야. 그들도 우리처럼 같은 기도를 하겠지. 적들은 쓸어 주세요. 빗자루로 먼지를 쓸듯이 깨끗하게 쓸어주세요.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신은 공정해서 신도를 차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만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을 위한 기도라면 괜찮을 듯 싶었다. 저 남자와 이 여자를 살려주세요. 여순은 아픈 오른손 때문에 두 손을 모으고 오래 있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짧게 기도를 마쳤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간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걷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어깨에 닿은 앙상한 다섯손가락의 주인공이 옆에 있었다. 하나님은 손길이 어쩌면 이렇게 갸냘플까. 그러니 내가 부축해야지. 저를 잡아요. 여순이 손을 내밀었으나 거기는 빈 공간이었다. 여순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밖으로 나간 스님은 이미 이승과 작별한 사람 같았다. 저기 솟은데가 있지요. 어렵게 신부가 입을 열었을 때 말수의 눈은 봉분이랄 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 두개가 있는 곳을 확인했다. 저 곳에 나를 묻어 주시오. 이거 초면에 너무 실례가 많아요. 수고를 덜기 위해 내가 조금씩 땅을 파 놨으니 새로 땅을 팔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 내가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쓰러지면 거기다가 팽개쳐 주기만 부탁합니다. 그 말을 할 때 이미 신부의 눈은 초점 없이 흐릿한 상태였다. 검은 동공은 사라지고 흰자위만이 눈 전체를 덮고 있었다. 죽음을 천사가 가까이 아주 가까이 왔구나. 말수는 신부를 안다시피 하면서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축복의 말씀도 없이 이렇게 가시는 구나. 고해성사를 받지도 못하고. 말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힘들어서 잠깐 쉬려는 의도보다는 자신이 돌아갈 곳을 잃을 까봐 길을 알아두기 위해서였다. 어렵지 않겠어. 겨우 10여 미터 쯤 전진했군. 앞으로 30미터는더 가야해. 이러다가 날이 새겠는걸.
그 순간 신부의 몸이 자신에게 완전히 쏠리는 것을 말수는 느꼈다. 무게가 상당했다. 비쩍 마른 몸이 이런 힘으로 나를 누르고 있다. 말수는 문쪽으로 나오는 희미한 형체가 여순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손을 까불며 따라 오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 말을 알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순이 발길을 자신쪽으로 옮기자 말수는 소리쳤다. 거기 그대로 있어. 곧 올게. 그 말에 여순이 멈칫했으나 안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말수는 잠시 후 여순이 여전히 자신쪽을 보고 있는 무너진 성당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들어가자. 신부님은 가셨어. 갔다고. 어디로. 여순은 말수의 갔다는 표현에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곧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가슴에 성호를 긋고는 느린 걸음으로 성모상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늘 하던 익숙한 방법인 것처럼 보였다.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돼. 한 발자국이라도 걷는 길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한줄기 햇빛이 성당안으로 비쳐 들었다. 빛은 일직선으로 성당의 깊은 안쪽으로 뻗어 나갔다.
여순은 성모상을 끌어 안지 못하고 이마를 거기에 박았다. 편하게 가셨어. 험한 꼴 안당하고. 총맞지 않고 피 흘리지 않고 그렇게 가셨지. 영험한 재주가 있었던 거지. 하늘나라로 가신 거야. 이제 부터 시작일지도 모르지. 고행의 길. 멀고 먼 성지순례의 길을 막 떠난 건지도 몰라. 그게 신부의 일생이거든. 그렇다면 신부님은 돌아가신게 아니네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지뢰를 밟고 먼저 마을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지금쯤 반갑게 해후했을 거야. 그 명성 때문에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했던 다른 신도들도 영접에 나섰을 거고. 그래요. 그렇다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네요. 이런 죽음이라면. 그만해요. 우린 신도가 아니잖아요. 당신 십자가아래 고개를 숙였잖아. 그거면 신도지. 아직 멀었어요. 난 한번도 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면 진실하게 다가간 적이 없어요. 신도는 내게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그만. 그나저나 신부의 죽음은 꽤 좋아 보였어. 높은 수준의 최후를 보여준거지. 울고 불고 떼쓰지 않고 엄마를 찾지도 않았어. 그 나이에 엄마는 좀. 여순은 말하려고 했으나 그만 두었다. 논쟁을 할 이유가 없었다. 신부의 최후를 본 말수의 느낌을 들어보는 것이 더 쓸모 있었다. 아마도 신부님은 이익을 챙기는데는 남보다 뒤졌을거야. 몸안에 달랑 이거 하나 뿐이더군. 그냥. 묻지 왜 가져왔느냐고. 신부님의 마지막 선물이야. 가지라고 하더군. 이건 내것이 아니고 이젠 당신거라고. 유언이라고 봐야지 이쯤이면. 당신 가져. 싫어요. 당신을 준 거예요. 내것이니 내가 마음대로 해도 돼. 받아. 여순은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목에 걸었다. 어울려. 말수가 말했다.
종소리가 울렸다. 분명 종소리지. 희미하지만 종의 마지막 울림처럼 은은하게 그것은 성당안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에 종 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신부는 아냐. 내가 구덩이에 던져 넣었어. 그리고 주변에 있는 흙을 이 손으로 밀었지. 그렇다면 성당의 종지기. 여순은 새로운 호기심으로 잠시 기도를 잊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종소리가 아니었다. 폭발음의 여파였다. 그것이 종을 때렸다. 아닐 수도 있지. 내가 좀 정신이 나갔나. 어젯밤 고열이 있어 희미해 졌거나. 말수가 여순을 의지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옆으로 나오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와, 어서. 몸을 낮춰. 교전이 다시 시작됐다. 밥을 먹은 군인들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성당안에 울려 퍼졌다.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자의 지휘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소리, 누가 들어도 서정성이 넘쳐났다. 쾅쾅쾅 이것은 큰 북이 울리는 소리였다. 바이올린의 음이 높아진 것은 따발총이 연달아 발사됐기 때문이다. 기관총이 탄피를 쏟아낸 것은 피아노 연주가 절정에 달한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