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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마음에 한 사람이 들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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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마음에 한 사람이 들어 앉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7.0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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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점례와 헤어진 조선 청년은 한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을 만큼 그녀에 빠져들었다. 남자가 휘청일 만큼 빼어난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정한 호감을 보여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딱 부러지게 어떤 것이 그리로 끌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저울추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뭐지? 이 감정. 조선청년은 점례가 떠나고 난 후 좁은 방안을 서성이며 자신에게 닥쳐온 변화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마음의 깊은 구석에 그녀가 오래도록 자리잡을 것을 예감했던 것이다. 외모나 성적 매력 외의 것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고나 할까. 갖춰 입지 않아도 그녀는 차려입은 사람보다 더 정숙해. 내가 왜 이럴까. 이러면 안 되는 데. 생명의 은인. 그런 감상은 벌써 잊었다. 그것은 갚아야 하는 의무감이고 이건 그와는 다른 것이다. 조선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너머의 세계에 그녀가 있다고 생각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인간의 자격 같은 것이 점례를 싸고돌았다. 마치 이른 아침 강가의 물안개처럼 말이다. 단정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만주에 온 지 삼 년 만에 청년은 따뜻하고 다정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한 발 다가온 것을 알았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동지가 있다면 그녀에게도 어울릴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그녀를 애인이 아닌 동지로 받아들였다. 그도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을까. 나의 스승말고 그의 스승이 따로 있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스승이 되어 독자적으로 무엇을 꾸미고 있을까. 온기가 넘치는 국밥 같은 그녀 얼굴이 시도때도 없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러지 말자. 응, 이러지 말자고. 원복아, 정신차려. 그녀는 가고 없고 넌 할 일이 있어. 크고 원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에 넌 목숨을 걸었어. 왠 같잖은 국밥이냐. 그러나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그녀는 아지랑이처럼 자꾸 눈앞에서 어른 거렸다. 말랐다 싶은 만큼 작은 체구에 조용히 다문 입술에서 떠올랐던 작은 미소. 뭐지. 이런 느낌은 뭐냔 말이다. 조선청년은 자신에게 닥친 것은 위기가 아니지만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며 나쁜 쪽으로 그녀를 몰고 가기로 했다. 그러자 여러 시간을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잠결에서 보는 꿈결처럼 아득하게 사라졌다. 하루 만에 일어난 비현실적인 것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거울앞에서 선 청년은 변장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어제의 차림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모양을 바꾸기 위해서 였다. 그는 어떤 것을 하더라도 어울렸다. 바꾸 입는 옷마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 모자를 벗거나 써도 마찬가지였고 지팡이를 집거나 그 대신 작은 서류가방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달라진 모습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 순간 그는 쫒기거나 숨어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늘은 그저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그래서 조급할 것도 여유로울 것도 없이 그저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점례를 잊기 위한 나름대로의 대책이었다. 그러나 그 대책은 먹혀들지 않았다. 청년은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여자는 잊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청년에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공작원에게 이성은 금기였고 그것 때문에 일을 도모하기 전에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스승은 늘 그것을 지적했다. 조선의 독립만을 생각하고 그것은 나중에 하라고 경계한 이유를 조선청년은 지금 잊고 있었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경험이 많은 공작원이라고 해도 그리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명령과는 다른 것이었다. 지키지 않아도 알 수 없는 지휘체계 밖의 일이었다. 조선청년에게 하루는 우연과 필연과 운명이 겹쳐져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기차에 탄 것도 기차에서 자신을 도왔던 것도 모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끌려온 것이다. 운명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있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것을 끌어들였다. 운명이라면 그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나의 운명이지 그것은 그녀의 운명이 아니었다. 그녀를 위한다면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그래도 괜찮아, 하는 정반대의 움직임에 그는 정신이 빙빙 돌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에 왔을까. 그림 공부 때문이라고 했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스케치나 물감은 신분 위장용이 아닐까. 물론 언뜻 본 스케치 수준은 화가라고 해도 믿을 만 했으나 의심 살 만한 이유를 대자면 못 댈 것도 없었다. 더구나 만주에서 화가 수업은 어울리지 않았다. 조선에서도 얼마든지 화단에서 이름을 날 릴 수 있었다. 이런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으나 답을 할 그녀는 이제 없다. 인생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깨지자 단단한 그의 마음도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구멍이 난 작은 상처는 덧나기 전에 치유해야 한다. 무엇이든 혼자 척적 해결했으나 이것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어딘지 모를 신비로움에 숨겨진 그녀의 비범한 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 세상에 유용하게 써야 하는데 그 역할에 자신이 적임자로 여길만큼까지 왔다. 그럴수록 가슴은 답답했다. 

권총으로 누군가는 쏘고, 쏘지 않아야 하는 상황과는 달랐다. 딱 부러지게 정리하기에는 자신에게 너무 벅찼다. 할 수 없다는 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조선청년은 낙담했다. 그래서 청년은 거룩하게도 조선독립의 과정을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꿈을 꾸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그녀가 끼어들어 어떤 의미로 남기를 바랐다. 그러나 떠난 그녀가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성의 주소에 그녀는 나타날리가 없다. 더구나. 청년은 더구나 앞에서 절망했다. 그녀는 유마의 통행증을 보여줬다. 그가 누구인가. 만주 독립군에게는 척살의 제 1 대상이 아닌가. 독립군 토벌대를 진두지휘하는 일인자. 청년도 그 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조선 여자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나는 너무 앞서 나갔다. 그녀는 기차안에서 당찬 모습을 보였으나 자신이 제공한 숙소에서는 거의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마치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정확히 그녀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드러난 것은 유마의 통행증을 소지했다는 것과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 통행증은 나도 눈으로 확인했으니 틀립없다. 그런데 임신은 아니다. 청년은 기차안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거짓을 확신했다. 믿는 왜경들이 한심할 정도였다. 조선청년은 이쯤에서 그녀에게 대한 모든 기대와 환상을 접었다. 목숨에 대한 값은 보답했다. 숙소를 제공했고 독립군 본부에 알려 그녀를 체포했을 수도 있다. 유마의 근거지를 알아내 본거지 기습도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청년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살린 그녀에게 그런식의 보답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정리되자 홀가분해졌다. 조금전까지의 들뜬 마음은 사라졌다. 


그러나 청년의 가슴은 훈운하게 더워져 왔다. 철저하게 만주에서 이방인이었던 청년은 이제 이곳이 이제 고향 같이 아늑하다고 느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이방인으로 쫓기면서 살았을지도 몰랐다. 청년은 길게 한 숨을 쉬웠다. 이 한 숨 조차도 그녀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그녀는 고마운 나의 그 무엇이었다. 그는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있다.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도와준 용기를 어떻게 무슨 수로 갚아야 하나. 하룻 밤 자신의 집을 내준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으로 됐다고 한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뭐, 체포한다고. 말도 안돼. 독립군 지휘에 알린다고. 터무니 없는 소리다.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그녀가 말을 하지 않을 때 말을 시키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퍽이나 잘한 결정이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를 내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 난 잘했어.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 중 최고로 잘 한 결정이야. 그게 가능하냐고. 그 순간에 그런 기지가 어떻게 나와. 나 같으면 그 순간에 어땠을까, 청년은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몰리면 인간은 남보다는 먼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점례는 태연하게 자신을 위험에 빠트렸고 나는 보기 좋게 벗어났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조선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랬더라면. 지금 난 산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어제 죽은 자가 오늘 살아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내 성격에 그들이 고문이든 무슨 짓을 한다고 내가 불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나는 내 할말만 하고 입을 닫는다. 일제는 그런 날 죽일 것이고 죽였다.  죽은 내가 이렇게 살아서 그녀를 생각한다. 모르지. 고문에 못이겨 내 의지와 다르게 헛소리를 마구 지껄였을지도. 지금쯤 나무에 매달려 찬물을 뒤집어 쓰고서 조직의 비밀이란 비밀은 다 털어 놓았을수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거기에 숨어 있소. 아니오. 삼십명이 아니라 삼백명이오 하고 대답하는 장면에 이르자 조선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문의 아픔과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조직의 선생이 체포되고 만주 지역 항일 조선인 단체가 와해 되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어렵게 일군 업적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비참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지 뭐야. 조선청년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기차를 조사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검문이 반드시 정보를 사전에 안 일경이 항일 단체를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것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일경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쫓고 있는 용의자가 탑승했다는 확실한 첩보를 입수하고 반드시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보았던 것이다. 누군가. 정보를 준자가. 조직 내에 밀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조선 청년은 알지 못해 자기 가슴을 쳤다. 기차에 타기전 그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내 행선지를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선생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지. 조직내 밀정이 있어. 정확한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 달내 나의 경성행을 아는 자들은 제법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그러나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누가 밀정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언제든지 위험한 상황은 닥치기 마련이다. 지금 이순간도 밀정이 따라붙고 있는지 모른다. 뒷덜미가 서늘한 것은 그 때문인가.

한동안 조선청년은 은거지 주위를 쉽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도 앞서 말한 것처럼 늘 변장을 했다. 하루는 청년이었다가 하루는 노인이었고 여자였고 아줌마였다. 그의 존재는 변장을 통해 순식간에 바뀌었는데 그는 그것을 아주 쉽게 처리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날은 하루는 꼼짝 않고 방안에 처박혀 있었다. 선생에게 보고할 것도 뒤로 미뤘다. 감시자를 따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자가 있다면 말이다. 한적한 곳보다는 시내의 번잡한 곳에 터를 잡은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은 허점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도 안심할 수 없어. 안심하다고 여기는 순간 털리게 되는 거지. 그래서 그날 오후 청년은 작은 짐가방 하나만 챙기고 아지트를 빠져 나왔다. 조직 상부를 만나는 일정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접선을 시도했다. 여러 차례 장소와 시간을 바꾼 끝에 그는 허름한 중국 음식점에 접선자와 마주 앉았다. 청년은 중국말을 쓰지 않았다. 일본말도 피했고 조선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음식을 주문할 때는 옆 사람이 먹는 것을 눈짓으로 시켰다. 사방에 늑대들이다. 첩자들이 우글거린다. 왜경이 매수한 음식점 주인들은 수상한 자를 잡기 위해 음식주문보다는 그것에 더 신경을 쓴다. 걸려들지 않도록 조선청년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안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탄로 난 것이다. 일정이 사전에 노출됐다. 한 번도 아니고 연달아 두 번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그는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원망할 일이 없겠다. 새 나가다니. 내 동선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기차역에서 나를 뒤쫓고 음식점에서 나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인가. 졸졸 병아리 새끼처럼 날 따라다니며 일제에 보고를 하고 있다. 제일 먼저 처단할 자는 조직내 밀정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이번에도 조선청년 편을 들었다. 운이 좋았다. 그 운은 허술한 일본군 때문에 찾아왔다. 혼자서 들이닥쳤다. 토벌대 놈들도 별 거 아냐. 아무리 훈련을 받았어도 그렇지 혼자서 들이닥친다고. 독립군이 어디 당나라 군대 출신들로만 모였다더냐. 조선청션은 토벌대를 비웃었다. 안가에 도착한 조선청년은 그날의 일을 복기했다. 밀정이 아닌가. 우연히 들어왔다가 아무나 덥쳤나. 아니면 이거다 싶은 감 을 낌새로 알았나. 아니면 아무나 잡아서 건수를 올리려던 수작이었나. 특진을 노린 소영주의자가 날뛰다가 내가 걸려들었나.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으나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현장을 덮쳤던 휴의가 유일했다. 만주군 소위 휴의는 사복으로 갈아 입고 만주 시내를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토벌대장이 준 공작금은 유용했다. 잦은 외식은 감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다. 사람들을 구경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생김새를 관찰하다 보니 어떤 자가 요주의 인물인지 나름대로 판단이 섰던 것이다. 사람을 가르는 기분이 잡히자 휴의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그에게 잡히는 자들은 독립군과 연결된 끄나풀도 있었지만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인 항일분자도 있었다. 일제가 보기에 그들은 조선독립군과 마찬가지로 제겨해야 할 불량자들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의 작은 미끼로 그는 커다란 월척을 낚아 올리는 수완을 발휘했다. 어떤 날은 중국 국민당 첩자를 잡는 개가를 올렸고 모택동 부대의 주력군이 이동하는 경로를 정확히 알아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휴의는 국제 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만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일제가 세운 괴뢰 만주국이나 중국, 조선 독립군이뿐만 아니라 러시아 영국 미국이 얽키고 설킨 문제였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어.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자부심이 일때 휴의는 조선청년과 마주했던 것이다. 

직감적으로 휴의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는 수상한 자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무말 없다고 했으나 실은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해도 그들끼리는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신검문이 필요했고 충분히 두 명 중 한 명은 제압 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독자들도 알다시피 휴의의 단독 행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도망가는 자들을 향해 권총을 쐈으나 하나도 명중 시키지 못했다. 사격이라면 그도 할 말이 있었다. 백발백중은 아니어도 명사수 축에 끼는데 세 발 모두 헛방이었다. 조준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은 조순선 밖에 벗어나 있었다. 놓친 것을 알았지만 권총을 발사한 것은 휴의의 계획된 행동이었다. 불안한 치안을 이유러 대대적인 검문을 할 수 있고 수상한 자들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그동안 봐왔던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였다. 쏴. 쏘라고. 토벌대장은 휴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야 우리도 할 말이 있어. 나중에는 용의자 말고도 아무나 쏴.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잡아야지. 죽은 자는 말이 없잖아. 뒤집어 씌우는 거지. 그래야 우리도 상부로 부터 포상도 받지. 안 그래. 휴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점 주인이든 손님이든 부랑자든 쏴서 죽이면 그상은 포상감이었다. 토벌대장은 날 신뢰해. 신뢰가 너무 커 부담이 되는 지경이야. 불신이 아닌 게 어디야. 그나저나 도망친 놈은 뭐지. 뭣 때문에 만주 시내서 얼짱 거려. 독립군도 짜장면이 먹고 싶었나. 썪어 빠진 놈들. 그런 정신으로 퍽이나 독립이 되겠다. 휴의는 자신이 놓친 분풀이를 이런 식의 조소로 날려보냈다. 

토벌대장을 실망시키지 말아야한다는 각오는 휴의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자신보다도 토벌대장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그는 조센징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누군가 먼저 가서 해논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휴의는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무일한 그 길을 헤쳐 나가고 있다. 유일한 등불은 토벌대장이었다. 그 앞에 누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휴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토벌대장 밖에 없었다. 그 위에 있는 만주군 총사령관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휴의는 스스로도 몰라보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무엇이든 변화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기꺼이 거기에 참여했다. 그것이 휴의가 가진 장점이었다. 아직 덜 여문 열매였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때는 토벌대장을 찾아 조언을 구했고 언제나 만족한 답을 들고 돌아섰다. 틈나면 몸을 단련했고 전술을 익혔고 무엇보다 위험에서 물러나지 않는 대범함을 키웠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부대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만주가 일본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형인지도 깨달았고 그래서 이곳을 지키기 위해 토벌대장에게는 전투경험을 물었고 적의 도주로를 사전에 차단하는 기술을 배웠다. 토벌대장은 아낌없는 지원으로 그를 밀어주었다. 대원들 앞에서 은근히 칭찬하거나 그가 내놓은 작전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위상을 높여줬다. 휴의는 그때마다 모든 것은 토벌대장의 지시에 따른 결과일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손자병법 같은 책을 읽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군을 최단 시간내에 잡아들일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책 속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었고 적은 조선 독립군이었다. 단독 검거 작전의 실패 이후로 휴의는 토벌대장이 붙여준 부하를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 너는 항상 내곁에 붙어 있어라. 네 그러겠습니다. 화장실 갈 때도. 휴의는 한 번 쐐기를 박았다. 휴의는 그를 믿어서라기보다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그에게 맡기기 위해서 그를 챙겼다. 휴의는 상사의 변모를 보였다. 토벌대장이 휴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는 부하가 배워야 할 상사의 모델을 보여줬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럴 뿐 속마음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부하가 알아도 상관없는 것만 이야기 했고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토벌대장에게서 배웠다. 

확실할 때까지는 참자. 비밀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말해버리면 그날도 비밀이 아냐. 내가 숨겨두는 버릇이 있다는 그 때문이다. 난 늘 비밀이 있어. 그건 누구에게도 말 안해. 토벌대장에게도. 그는 너는 나에게 만은 비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어.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지 늘. 눈꼽만큼도 날 속여서는 안돼. 그러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휴의는 토벌대장 앞에서도 자신의 속마음을 숨겼다. 날 봐라. 내 눈을 똑바로 봐. 토벌대장은 의심많은 눈으로 너 숨기는 거 있지 하고 물었다. 그러면 휴의는 언제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되묻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순진한 얼굴에 토벌대장은 이 놈은 절대 나에게 숨기지 않아, 하고 믿음을 더했다. 그러고 나서도 그는 늘 물었고 대답을 기다렸다. 너 훈춘사건 알지. 네 압니다. 그런 큰 건을 만들어 보면 어때. 사건이 있어야 해결도 있지 않겠니. 언제나 처럼 염탐이나 하러 다니고 운 좋기만을 기다릴 순 없잖아. 독립군 조직을 일망타진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알아들었습니다. 그 즈음 토벌대장은 만주군 총사령관으로 부터 독립군 토벌대의 병력 일부를 지원 요청 받았다. 너, 임마 언제까지 독립군 쫓아 다닐래. 시간 없다. 한 달이면 충분하지. 다 잡아 들이고 할 일이 없으면 우리 부대로 들어와. 연대장 시켜줄게. 새로 연대 하나 만들어야지. 네 조직이면 인원은 충분하고.  토벌대장이 휴의를 닥달했다. 그러나 그는 휴의에게 만주군 총사령관의 이런 제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큰 일은 조직의 나부랭이들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겉으로는 휴의를 우대했으나 속으로 그는 써먹고 버릴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전우애 같은 건 없어. 내가 살기 위해 부하를 이용해 먹는 것일뿐. 토벌대장은 휴의를 불러서 칭찬하고 그가 인사를 올려 붙이고 나가면 늘 이런식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휴의는 자다말고 벌떡 일어나 몇가지를 적었다. 막 삼국지 일부를 읽다 잠이 들었고 장비가 큰 칼을 들고 적의 목을 벨 때 자신이 목을 움쳐쥐고 일어났던 것이다. 애, 뭐 이런 같잖은 꿈이있어. 그늠 머리를 흔들면서 장비를 어떻식으로 피했는지 생각하다가 어깨를 한 뻔 들썩했다. 그래 훈춘 사건이라. 굳이 우리쪽 피해를 만들 필요있을까. 피해를 봤다고 우기면 되는 것 아냐. 귀찮게 시체를 늘어 놓고 이러니 보복하겠다고 허풍을 떨 필요없다. 그냥 선전포고 하는 거지. 너희들이 우리를 기습 공격했으니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겠다고. 그거면 끝이다. 손해를 과장할 필요도 없다. 그냥 너희들이 공격했으니 우리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어 싶어 쳐들어 간다고 포고를 하면 그뿐. 낡은 수법은 현대전에 어울리지 않아. 그래 삼국지 같은 고리타분한 것은 제켜두고 다른 걸 읽자. 아냐, 거기엔 인간의 마음을 좌우하는 고도의  심리전이 있어. 그건 그것대로 읽고. 새로운 방법을 추가하는 거야. 과거의 전술에서. 

휴의는 독립군 일부를 매수하거나 사건을 조작하는 대신 새로운 작전을 짜기로 했다. 그것은 공포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공포. 말 그대로 공갈포로 나는 새를 떨어 트리는 것이다. 대로는 말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지만. 그는 말보다는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순전히 이는 그의 경험에서 오는 감이었다. 공포 만큼 대중을 끌어내는 좋은 방법은 없다. 공포는 어디서나 통한다. 조선이든 일본이든 만주든 연해주든 러시아든 어디서든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공포는 먹힌다.

일본 순사를 피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숨어서 죄지은 사람처럼 떨었던 것은 공포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휴의는 완용이 순사와 함께 마을 순찰을 돌 때를 떠올렸다. 순사는 언제나 말을 타고 왔다. 깔끔한 복장에 긴 가죽 장화를 신었고 칼을 차고 권총을 품속에 품고는 왕의 행차처럼 비켜서라 소리를 지르면서 멀리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다.길가던 흰옷 입은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한쪽으로 공손히 비켜섰고 일부는 아예 바닥에 엎드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 가운데 순사는 아무나 채찍으로 때리면서 조센징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고 소리쳤다. 맞는데 순서는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맞았고 그런 날은 운이 나빴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순사는 조선사람 다루는 방식을 몸소 시범보였다. 매타작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 

그러면 맞지 않은 조선인은 자신도 이유없이 곧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바짝 엎드렸고 맞지 않기 위해서는 배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야 한다는 복종심이 더 강하게 몰려왔다. 휴의도 그런 경험을 숱하게 했고 거기서 받은 공포심이야 말로 인간의 내면에 숨은 두려움을 극대화 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때 배운 기술을 써먹기로 했다. 아무나 잡아서 족치기로 한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은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지나가는 길잃은 개처럼 취급했다. 마구 때려도 된다는 의미였다. 마구 치다보면 어떤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작은 실마리가 큰 해결책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봐 오지 않았던가. 그래, 오늘은 놓쳤지만 내일은 잡는다. 도망간 독립군을 반드시 색출해 토벌대장의 체면을 살려주고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휴의는 자신을 따돌리고 도망한 조선청년에 대한 적개심으로 눈을 크게 떴다.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생각한 것을 꾸물 거리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단독으로 치고 들어갔다가 놓친 음식점이 첫 번째 목적지였다.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릴 휴의가 아니었다. 맞은 곳에서 두 배로 갚아줘야 다시는 그런 자들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휴의는 이번에는 홀로가지 않고 토벌대장이 붙여준 부하를 데리고 갔다. 두명 이면 괜찮아.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열려있는 중국집 문을 열고 그는 거침없이 들어갔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보다는 복장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번쩍이는 군복이 아니라 양복으로 제대로 빼입었다. 토벌대장이 먹고 마음대로 쓰라고 준 돈으로 옷을 장만한 그는 점잖은 사업가 흉내를 내면서 음식점을 휘둘러봤다. 마치 공장을 시찰하는 사장처럼 눈에 걸리는 사람들이 다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지시를 내릴까. 아니면 일장연설을 할까. 휴의는 앉기 전에 두리번 거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주인장는 긴장했는지 선뜻 무얼 먹겠느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휴의에게서 풍기고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았으나 겸손한 것 같으면서도 당당했기에 주인장은 스스로 자신을 낮출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업을 하면서 얻은지혜였다. 까다로운 자를 만나면 거기에 대항하기보다는 일단 실체를 아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 다음 굽실 거릴지 아니면 내 찰지를 결정해도 늦지 안핬다. 주인장은 일단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주문하라고는 묻지 못했으나 드시고 싶은 것을 말하면 바로 대령하겠다는 의미를 휴의는 알아차렸다. 혼자가 아니고 둘이라서. 아니면 슬쩍 보여준 허리춤에 찬 권총 때문에. 휴의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는 것은 전과는 다른 자신의 위엄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심 이었고 여기에 반말을 하거나 위협조의 질문을 한다면 공포에 공포가 더해지는 꼴이라는 것에 확신을 걸었다. 어, 이거 좋은 방법이군. 그는 공포의 값어지를 새삼 일깨워 준 자신의 아이디어에 후한 점수를 줬다. 느것하게 자리를 잡은 그는 음식을 시키고 술을 약간 먹었다. 음식을 내오면서 주인장은 연신 입에 아첨하는 기색을 드러냈으나 휴의는 아무말없이 배를 채운 다음 다시 주인장을 불렀다. 그러지 않아도 서비스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니오. 이 정도면 충분하니 그것은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주시오. 진정그렇고 싶다면 말이오. 휴의는 점잖게 나왔다. 그리고 이 정도면 먹을 만 하오. 얼마요. 거기에 이것은 주인장 성의에 대한 팁이오. 값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주인장은 이게 왠떡이냐 싶어 좋아했다가 낯빛를 급히 바꾸고는 나랏일을 하는데 음식값이 왠말이냐고 펄쩍 뛰었다. 이 자는 보통 내기가 아니군. 미리 보험을 들고 있어. 지난 번 일을 기억하고 있는거야. 나도 물론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지. 후환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나저나 주인장 자식들은 다 어디 간 거요. 부인은 얼핏 주방에서 본 같다만. 휴의는 넘겨 짚었다. 아들 둘인데 북경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똑똑한 모양이오. 그래 열심히 노력해 국가에 충성해야지요. 

그리고는 말을 뚝 그쳤다. 알고 싶은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말하도록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돈을 주지 않아도 고맙다고 할 판인데 더하기 까지 했으니 주인장의 황공함은 말할 수 없었다. 죄지은 자처럼 공손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를 어째. 일이 꼬여가고 있어. 일을 어쩌면 좋아. 주인장은 머리를 굴렸으나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주절주절 지껄였다. 이 자리에서 중국집을 한 지는 십년이 넘었고요.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것이 이렇게 시간이 흘렀답니다. 식은 땀을 닦으면 주인장은 휴의의 눈치를 살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휴의 일당이 점잖게 나오고 예사로운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 이상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말할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예절을 차리는 이들이 무서운 자들이야. 차라리 깡패는 나아.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거든. 돌려 말하지 않아. 그런데 이들은 뭐지. 공작원인가. 그런데 이런 궁금증은 곧 풀렸다. 휴의와 같이 온 부하가 자신들은 일본군 소속으로 독립군 토벌대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굳이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은 이유가 있었다. 너 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좋은 소식이 있으면 모았다가 우리가 올때 꺼내 놓으라는 의미였다. 우린 나남사단 소속이요. 19사단 이야기 들어봤지요?

얼굴색이 변한 주인장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십니다. 내가 그런 말 들으려고 소속을 밝힌 건 아니오. 휴의의 부하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말했는데. 주인장도 속시원히 털어 놓으시오. 휴의는 한 번 더 주인장에게 너의 소개를 빼지 말고 자세히 부탁한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점령군의 부탁은 말이 부탁이지 사실은 그것이 명령이라는 것을 음식점 주인이 모를리 없었다. 명령을 피할 수 없었던 그는 언제부터 일했고 하루 수입은 얼마며 단골은 누구이며 그들이 와서 하는 대화는 어떤 것인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아까 했던 말은 빼고. 다른 할 말은 없소. 이 정도면 됐지 않았느냐고 상대의 얼굴을 살피던 주인장은 더 내놓으라는 휴의의 말에 진땀을 흘렸다. 원하는 것을 말하면 좋을 텐데. 그가 애간장을 태울 때 휴의는 그를 구제했다. 이만 가보시오. 다음에는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요. 뭏슨 말인지 알겠소. 주인장은 정확히 알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음번에는 꼭 대접하겠다고 말하고는 두 손을 앞에 모으고 뒷걸음질 치며 공손히 물러났다. 문밖으로 나온 주인장은 손님이 밀렸으니 이제 가도 좋은지 처분을 기다렸던 좀 전의 상황은 잊은채 우선 숨부터 크게 내쉬었다. 참았던 숨이 돌자 흑빛이었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휴의는 주인장이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너는 주인장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더냐. 글쎄요. 착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짜식. 휴의는 부하의 말을 무시했다. 아직 너는 햇병아리야. 어린 놈이 무얼 알겠어. 그는 입맛을 다시며 손에서 볼페처럼 돌리고 있던 담배를 물었다. 

숨을 돌린 주인장도 그 시각 휴의처럼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역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뱉지 않고 안에 숨기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위세를 부리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그러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까지말할 수는 없었다. 주인장은 그래서 답답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어서 꺼져야 할텐데. 그러나 방안의 기색은 그럴 기미가 없다. 아녀자에게 내색 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언젠가는 알려야 할거야. 그나저나 저 놈은 언제 나가지. 그리고 내가 받은 돈은 내 돈인가. 그는 주머니속의 돈을 잊었다가 호주머니에 잡히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면서 뱀을 만지는 것처럼 돈을 밀어 넣고는 얼른 손을 뺐다. 돈을 멀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떨지말자.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사납고 곧 큰 봉변이 떨어질 것 같이 불안해도 참자. 참아내자. 그러면서 용기를 냈다. 그러자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생긴것이다.

그는 다시 휴의의 방문에 앞에 섰다. 그리고는 종이에 싼 것을 휴의 앞에 내밀었다. 약속합니다만 받아 두세요. 제가 어찌 음식값을 받겠습니까. 그리고 값에 더한 값을 받았다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주인장의 태도에 휴의가 잠깐 눈을 치뜨자 그는 곧 내민 손을 거둬 들이면서 언제든지 오시면 오늘의 보답을 하겠다고 납작 엎드렸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서요. 내가 알려줄까요. 그럴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거요. 납작 엎드려 있던 사내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잘못했어. 어쩌면 오늘 밤을 넘길수 없을지도 몰라. 이게 큰일인걸. 그래, 그거야. 주인장은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꾀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젊고 잘 생긴 놈이라. 그런 놈은 호색한이 분명해. 내 경험으로 알지. 알고 말고. 그걸 노린거야. 내가 왜 진작 눈치를 채지 못했지. 못난 놈. 주인장은 자신을 자책하면서 작은 소리로 그러나 분명히 상대가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저쪽에 예쁜 조선족 여자가 대기 하고  있어요. 아주 예뻐요. 하라는 대로 하는 성격이라 아주 고분고분하고요. 그는 헤헤 거리면서 눈짓으로 방문쪽을 가리켰다. 어렵게 해답을 찾은 자의 여유가 주인장의 살짝 든 얼굴에 가득 배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장의 오산이었다. 휴의가 오늘 온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들여 한 제의를 깡그리 무시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필요하면 부르지요. 오늘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오. 그는 그러면서 주인장이 가리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주인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놓고 몸을 팔지는 않았으나 손님 가운데 제법 큰 돈을 내고 청하면 마지 못해 대령하는 그런 여자들이 있었고 그런 여자 가운데 미모가 괜찮은 여자가 휴의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요. 아닙니다. 저 여자는 제 아내고요. 그 옆에, 아 방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네요. 가서 불러 올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인장이 호들갑을 떨며 일어서려고 했다. 됐어. 그만 해요.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오. 주인장은 이번에도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았다. 휴의 일당처럼 힘으로 무엇을 하려는 자들에게 방패막이로 써먹기로 한 작전이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휴의는 화내지 않았다. 그는 아까음식을 들고 온 바로 그 여자가 그 역할을 하는 여자인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군. 그런 공기를 느껴. 방안이 후텁지근해. 이쯤해서 그만두자. 그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야. 휴의는 곧 제정신이 들었다. 그 여자의 모습에 실망해서가 아니다. 방으로 들어간 여자에 대한 궁금증도 하나도 없었다. 

휴의는 주인장으로 다시 눈길을 향하고 다른 말 할 것은 더 없는지 물었다. 제발로 들어온 이상 무언가 기대한 것을 대답하라고 다그쳤다. 글쎄요. 뭘 원하시는 지. 답답했던 주인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휴의는 화가 났다. 아니 화난 척 했다. 사실 그는 주인장을 체포할 생각이 조금전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러고 싶어졌다. 대답을 망설여. 말성이는 것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얘기지. 휴의는 억지로 갖다댔다. 주인장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술책이었다. 거짓말 하면 국물도 없어요. 다시 말해봐요. 이번에도 주인장은 입을 열었으나 제대로 된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안 되겠군. 여러차례 기회를 줬는대도 사람을 무시하는 습성은 고쳐지지 않아. 휴의가 피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껐다. 그와 동시에  다짜고짜 부대로 가서 혼 좀 나야겠어. 이 자를 끌고가.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옆에 있는 부하에게 눈짓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따라오라, 소리내면 죽는다고 품속에 있는 권총을 그가 볼 수 있도록 눈앞으로 가져갔다. 

주인장은 누가 들을새라 작은 목소리로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 와중에도 이 자는 창피한 줄을 알아. 대단한 놈이야. 죽는 순간에도 체면은 지키겠다 이거지. 그래 그렇게 해주마. 그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한테 달려 있어. 괜히 소란을 피워 사태를 키우지 마. 손님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는지 알지요. 휴의는 다시 점잖은 상태로 돌아왔다. 화를 내다가도 평정심을 곧 찾는 것이 휴의의 특징이었다. 주인장은 그 말에 그만 입이 다물어졌다. 부하가 가볍게 그의 팔을 잡았다. 돈을 드릴게요. 얼마든지 있어요. 부하가 잡은 손이 떨릴 정도로 주인장의 몸은 심하게 요동쳤다. 휴의와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팔을 잡은 부하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앞서나간 빈틈을 노려 부하에게 애걸 작전을 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명령한 터여서 부하는 그러고 싶었어도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도 주둥아리 놀리지마. 하고 생각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끌려가면 안돼. 내 집 밖으로 나가면 난 죽어. 살아도 반죽음 상태일거야. 이거 어쩌지. 주인장은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곤두섰다. 조금 전까지 그러니까 이 자를 체포해 라고 말하기 직전까지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람. 내가 잘못한 게 뭐지.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냐. 일단 버텨야 하는데. 주인장은 그 방법을 몰라 정말이지 머리를 잘라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때 탈출하라고 붙어 있는 머리인데 전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머리로 생각나는 것은 군부대로 끌려가서 제대로 살아온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살려만 주세요. 제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달게 받겠어요. 주인장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체 그렇게 몸을 뒤로 버티면서 지껄여 댔다. 돈, 돈이 있어요. 그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앞서가던 휴의는 주인장이 버티고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그래서 뒤돌아 보니 과연 그렇게 하고 이었다. 그래서 휴의는 몇 발자국 앞선 걸음을 뒤로 돌려 식당안에서 이쪽 상황을 보고 있는 손님들의 눈을 의식해 그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뭐, 가서 한 두 가지만 조사하면 됩니다. 저녁 식사 전에는 돌려 드릴게요. 그는 조용히 말하는 척 했으나 실재로는 다들을 수 있도록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애초 목적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끌려가는 주인장이라니. 이 것은 공포 아닌가. 한 자리에서 십년 넘게 장사한 사람도 끌려가는 판국이다. 그러면 우리같은 서민들은 말해 뭣해. 이같은 소문을 퍼트리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목적은 말 하지 않아도 당연히 달성됐다. 아, 주인장, 우리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잖소. 음식값도 후하게 쳐줬고. 돈이 없으면 그냥 갔겠지. 주인장은 네, 충분히 받았습니다. 값보다도 더 많이요. 주인장은 어차피 손님들이 알고 있는 상황이니 조용하게 일처리는 틀렸다고 판단해 조금 더 크게 휴의 일행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손님들이 알도록 말했다. 자, 돈타령은 그만 하시오. 이제 됐으니. 부하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등을 밀었다. 

돈으로 내가 매수될 사람으로 보였나. 돈이라면 나도 있어. 이 자식아. 부하는 주인장이 문 밖으로 나오자 그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나에겐는 안통해. 앞으로도 그럴거고. 그러니 그런 태도는 버리는게 좋아. 내가 돈으로 보여. 부하는 몇 걸음 더 갈 동안에도 그 말을 반복했다. 돈으로 매수될 사람으로 자신을 본 것에 대한 나쁜 감정도 품었다. 그러나 주인장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이 자는 돈으로 매수될 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부정을 계속 말하는 자 치고 그 반대의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 자와 협상해야 한다. 저 놈은 아냐. 앞서가는 놈과는 타협할 생각을 말자. 대신 그 자가 없는 틈을 타서 이 자와 해결하자. 마침 주머니에 돈도 조금 있겠다. 틈나면 다 찔러 줘야지. 주인장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부대로 끌려오면서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숙지하고 다짐했다.  

휴의는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요식행위였다. 그는 음식점에서 부대로 이동하는 동안 이 자를 없애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공포. 누군가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주인장이 그렇게 됐다. 이것은 그의 운명이었지 나의 운명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미안했다. 그의 부인과 북경에서 공부한다는 두 아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감상은 금물이다. 토벌대장는 늘 그것을 경계했다.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헛된 감상은 큰 일을 하는데 방해꾼이야. 안됐지만 그런거야. 적어도 나는 수많은 사람을 그렇게 하지 않아. 겨우 한 사람 뿐이야. 겨우 한 사람이라고. 한 사람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산다면 그건 내가 잘 한 일일 거야. 지하실은 습했다. 나쁜 냄새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왔다. 휴의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안았다. 그래서 일부러 내려 오지는 않았다. 꼭 필요한 때 지금처럼 심문이 불가피 할 때만 지하실을 이용했다. 그래서 여러 번 왔으나 언제나 낯선 곳 처럼 여겨졌다. 책상 하나와 의자. 찍찍한 조명이 전부인 그곳이 좋을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때로는 좋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기에는 좋은 장소였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지 뭐야. 휴의는 그러기 전에 윗통을 벗어 제켰다. 런닝 셔츠 안으로 그의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겁에 질린 주인장은 살려만 달라고 두 손을 빌었다. 인간은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의 얼굴을 보라. 사색이 된 것이 마치 송장처럼 보이지 않는가. 

주인장은 귀한 재주를 가졌소. 남을 숨겨주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소. 이것은 뭐지. 질문 하나에도 살아갈 구멍을 찾아내려는 애처로운 표정이 얼굴이 식은땀으로 묻어났다. 얼굴이 이러고 있을 때 그 아래 심장은 숨이 턱 막혀 뛰는지 걷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제 할일은 잊은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숨겨주다니. 누굴. 머리를 짜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 어째야 쓰나. 주인장은 정말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숨겨준 자가 있나. 그런 자는 없다. 내가 모르게 숨어 있을 수는 있다. 그것 까지 내가 알수가 있나. 주인장은 사실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그런 재주 제게 없습니다. 짜장면 만드는 것이라면 몰라도요. 정말입니다. 그 말을 하고 주인장은 입을 다물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자세로 휴의의 선처를 바랬다. 자신의 집에서는 그래도 작은 희망을 봤으나 이곳 부대의 지하실에서 그는 그런 희망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절망이다. 난 죽는다고. 음식점은. 아내는. 아들은. 그런 생각이 밀려와 주인장은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가는 심문도 받기 전에 숨이 끊어지지. 주인장이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이 휴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야기를 돌려 말하지 않아요. 다시 묻는데 그 자는 지금 어디있소? 어디에 있느냐고요?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인장의 잘못은 없어요. 말하면 그것으로 지금까지 잘못은 모두 무죄가 되요. 알겠어요? 그러니 급하게 대답하시오. 어디에 숨겨 두었소? 

정말이지 그런 일 없어요. 사람 잘 못 본 것 아닌가요? 우리집 말고 중국집은 여러 군데 있어요. 혹시 다른 곳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주인장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곳은 아닌지요? 주인장이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그것은 센스있는 답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러나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주인장은 죄없는 자신이 설마 잘못되기야 하겠느냐는 일말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잔혹한 일본군이라고 해도 증거도 없는데 무턱대고 불라면서 윽박지르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서 마무리 짓자. 빨리 나가서 짜장면 만들기 위해 마련한 밀가루 반죽을 해야 한다.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없어 음식을 팔지 못하면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겠는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오후는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겠다. 그는 음식점을 걱정했다. 그러나 자신을 걱정해야 옳았다. 그래, 아무거나 불자. 이것저것 나불대다 보면 그가 원하는 답이 나올지도 몰라. 일단 풀려나고 보자. 그 다음은. 도망을 치든 뭐를 하든 그 때가서 하고. 한 가지 꾀라고 생각한 것이 이것이었다.

숨겨놓은 것 말고 그가 알고 싶어하는 다른 내용이 있다면 숨김없이 말해서 진실을 보증받고 싶었다. 이 순간 억울해서 미칠듯한 기운이 주인장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다른 사람을 불기 위해 아는 사람 이름을 떠올렸다. 불어도 좋을 사람이 누구인가. 사촌이라도 좋다. 얹그제 논을 샀다고 자랑했지. 그래 사촌이름을 대면 믿어 줄거야. 친척을 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가 관심을 가지면 훈춘으로 도망갔다고 말해버리지 뭐. 아니면 연해주. 그도 아니면 러시아에서 엽서가 왔다고 꾸며대자. 엽서에는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으니 오면 바로 연락 준다고 하자. 주인장은 어떤 식으로든 마구 던져야 할 시점이 왔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정리했다. 

그 순간 휴의가 의자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죽도를 치켜 들었다. 그는 치벼든 죽도를 마치 벼린 칼날을 만져 보듯이 만져 보고는 말로 해서는 안돼.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왜 조선놈들은 다 말로 해서는 안 되고 손을 대야 입을 나불대지. 조선놈은 매를 들어야 해. 매를 들어야 한다고. 따끔한 맛을 한 번 보시오. 그리고는 목표를 조준하듯 한 발 뒤로 물러나다. 휴의는 죽도를 뒤로 힘껏 뺏다가 주인장 앞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뒤로 빼고는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목을 내리쳤다. 그러나 맞은 곳은 목이 아니라 머리통이었다. 주인장이 머리통을 쥐고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을 때 휴의는 자신이 조준한 것이 빗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목이 었는데, 분명 목을 조준했어. 연습이 필요해. 휴의가 연습 부족을 탓하고 있을 때 억하는 외마디 비병을 질렀던 주인장은 다시 그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에서 손을 떼고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다시 억하고 소리를 질렀다. 손쓸 새가 없이 당했다는 자책이 아니라 이렇게 피가 많이 나올 수 있을 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손을 댄 머리에서는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다 불게요. 분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그자를 숨겼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 자 이름은. 그러나 휴의는 무시했다. 빠져 나갈 기회는 아무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맞은 그자가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 이름이나 대고 언제 오기로 했다고 꾸며댈 것을 알았다. 이런 자들은 약아빠져서 일단 여기를 모면하고 보려는 심사를 휴의가 모를리 없었다. 다들 그래요.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다가 한 방 얻어 터지고는 이름을 대지요. 여러차례 그러지 말라고 알려 주었을 텐데요. 휴의는 다시 죽도를 겨냥했다. 넘어진 자가 스스로 일어나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조준점이 다시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의는 이번에는 죽도를 뒤로 빼지 않았다. 두번째로 목을 겨냥하고 싶은 생각이 순간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점은 주인장에게 좋은 징조였다. 한 대 더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운명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 주인장은 이때다 싶어 아까 생각한 이름을 줄줄이 불었다. 

휴의는 죽도를 거둬 들여 왼손으로 잡고는 의자를 끌어 당기면서 말해 보시오, 진작 그랬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니오. 같은 말을 할 필요도 없고요. 휴의는 다친 주인장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런 목소리를 입에 담았다. 아직 쓰러져서 정신을 온전히 차리지 못한 주인장은 겨우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다 말해버렸다. 사촌이라고요. 어허, 이거 큰 일이군. 휴의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그러다가 주인장의 얼굴에 언뜻 스쳐가는 속았지 이 놈아 하는 분위기를 느끼고는 한 번 더도 죽도를 꺼내 들었다. 내가 속을 줄 아시오.  나를 바보로 알다니. 만주군 독립군 토벌대를 뭘로 보고 하는 수작입니까. 하고 옆에 세웠뒀던 죽도를 다시 들어 올려 이번에는 정확히 목 부위를 가격했다. 제대로 맞았어. 제대로 맞았다고. 휴의가 기뻐서 인지 흥분해서 인지 지하실 바닥을 몇 번 뛰어 오리면서 씩씩거렸다. 이거 뭐지. 다시 쓰러진 주인장은 잃었던 정신이 돌아오자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였다. 불지 않는다고 때리고 분다고 때리니 나더라 어쩌란 말이냐. 그는 절망한 가운데 맞은 부위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는지 다시 확인하기 위해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움푹 패인 느낌이 들었다. 이러고도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거기가 아냐. 이번에는 제대로 맞았어. 목을 만져봐. 목. 목이라는 말에 주인장은 놀랐다. 목이 잘렸나. 목을 보라니. 다행이 목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심줄이 만져지는 부위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손에 잡히는 부위가 욱신거리다 못해 상처에 소금을 뿌린듯이 쓰라려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다. 살려 주시오. 주인장은 갑자기 살려 달라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의자에 묶여 있는 몸이라 그런 시늉을 낼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데요. 말로 하면 들어 줄게요. 휴의가 점잖게 나왔다. 그는 언제나 조심성있게 말했다. 그것이 주인장은 더 무서웠다. 차라리 이놈 저놈 혹은 개새끼 소새끼 하고 욕설을 퍼붓는 것이 나았다. 그러면 주종의 관계가 확실히 정립된다. 난 철저히 종이고 싶다. 그런데 주인 대접을 해주고 있다. 그러니 마. 그러지 말라고. 주인장은 애결했으나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휴의는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네가 알아서 하라는 눈짓을 하고 지하실 계단을 올라왔다. 

휴의가 떠나고 부하가 그 자리를 대신한 토벌대 지하실 장면을 그대로 여기 옮겨 놓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신호로 멈추지 않는 매타작이 시작됐다는 것은 알려둔다. 그 후로 사정없이 때리기를 한 시간 정도 했다. 심문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문이 목적이 아니라 구타가 목적이었고 공포가 목적이었으니 원했던 것은 이룬 셈이다. 반죽음 상태의 주인장은 사진이 찍힌채 마차에 태워졌다가 자신의 음식점 문앞에 버려졌다. 소문이 금새 퍼진 것은 아니다. 한두명 본 것만으로는 더디고 부족했다. 그런데 중요 장소마다 사진이 붙고 나서 상황은 달라졌다. 흑백의 사진으로도 그가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보는 사람들은 마치 사진속의 인물이 자신인 것처럼 치를 떨었다. 무슨 중죄를 졌기에 이런 상태냐고 어떤 사람들은 사진 속의 인물을 나무라기도 했다. 보시오. 불량한 자의 최후를 똑똑히 보시오. 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내용을 보기 위해 글자를 아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런 사람 가운데는 뉸으로만 글자를 읽는 사람도 있었다. 못된 놈이다. 맞아도 싸다. 신고하자. 이런 말들이 오고 갔고 그런 대화를 휴의는 군중속에서 보고 들었다. 
조선 독립분자를 숨겨둔 자의 마지막은 언제나 이렇다. 누구든 조선독립을 외치는 자는 이런 꼴을 당하게 된다. 사진 속 주인장의 눈은 사라졌다. 눈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부어서 보이지 않았고 코는 원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밀려났고 벌린 입에는 앞니는 물론 도합 8개 이빨이 빠져 있었다. 8개가 빠진 것은 어떤 이가 나름대로 세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얼굴만 크게 확대한 사진에 만주 시민들은 공포 그 자체에 빠졌다. 마적단 소탕을 빌미로 무차별 시민을 학살한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은 물론 한인들의 피해가 무지막지했고 그것을 어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집은 불타고 여자나 어린애까지 수 백명이 학살당했다. 압록강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떠오르는 시체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처음에는 장사 지냈으나 나중에는 하도 많아 보고도 못본척 눈을 돌려야 했다. 그 날의 악몽이 재연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진 아래에 조선독립분자를 숨겨둔 자는 앞으로는 주인 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돈의 팔촌까지 멸족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붙었다는 사실이다. 방 아래서 그 내용을 읽던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혹시 네가 그런자를 숨기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금슬금 자리를 내뺐다. 공포로 통제하려는 휴의의 작전은 이 정도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아니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려면 얼마나 더 잔인해져야 하는지 알았다. 얼마나 많은 피 냄새를 맡고 얼마나 많은 짐승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애국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험난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가 휴의가 애창하는 애창곡의 한 구절이었다. 

내키는 일을 하려면 내키지 않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중국집 주인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미움도 없었다. 주먹을 지르고 욕을 하고 걷어 찰때도 그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분자가 싫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가 찬 것은 따라 주인장이 아니라 놓친 조선청년이었던 것이다. 주인장은 희생양이었고 희생양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따로 고통받지 않아도 됐다. 이런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휴의의 장점이었다.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성공한 휴의는 상대를 폭행하면서 되레 정신이 될 수 있었다. 머리가 맑아져. 새벽 공기를 마신 것처럼 상쾌해 지는 군. 지하실의 습한 기운은 간데없고 깊은 숲속의 청량한 향기만이 가득해. 음, 이 냄새는 그걸 증명해. 피비린내 조차 진한 찔레향이 나. 그가 지르는 고함은 꾀꼬리가 부리는 노랫소리. 입에서 나오는 썩은 내는 잘 익은 살구맛이 났다. 아주 조용해. 고요이 극강이지. 이런 장소에서는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어. 이곳이 마음에 드냐고. 그래 나한테 누가 물어 본다면 내 답은 이거야.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요. 대답을 하면서 나는 그것을 확인시켜 주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소유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만족감을 느끼는 거지. 그래, 바로 이거야. 내 오감은 충분히 변화했고 그걸 즐길만한 상태가 된 거야. 난 알지. 내 몸이 이런 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충만한 기쁨이라고나 할까. 휴의는 온 몸으로 그걸 알고 있었고 알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 날 밤 휴의는 편하게 잠을잤다. 일어났을 때 몸이 너무나 개운했고 휴의는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숙면에 들었다고 판단했다.

정말로 그랬다. 남의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한 일 때문에 평가받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그로 인해 그는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토벌대장도 힌트를 준 것이 아니다. 순전히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감각이었고 경험이었다. 휴의는 앞으로 자신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세를 타고 있었다. 나는 성장하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 맷집은 단단하고 정신은 더 단단해. 오로지 이것은 내 힘 덕분이야. 스스로 키운 거지. 그는 안면에 웃음을 띄었다. 부모 잘 만나서 그런 건 아냐, 아냐 부모덕이지. 비록 돈은 없지만 이런 근성을 심어준 건 다 부모 덕분이야. 그 생각을 하자 휴의는 잠시 나약해졌다. 난데 없이 고향이 휴의의 한쪽 가슴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것은 불길한 기운이었다. 나쁘다. 이런 때 부모님이라니. 그는 억지로 생각을 떨쳐 내야겠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다. 그런 생각말자. 부모나 고향이나 어린 시절이나 그런 것들은 없어. 내 과거에 그런 것들은 없다고. 내가 두려움이 없는 것은 그것 때문이야. 과거가 없다는 것. 드러낼 것이 없으니 신경쓸 일도 없다. 자랑도 부끄러움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고 실력은 그를 겁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명을 받으며 일어난 휴의는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새옷을 입고 거울을 보자 거기에는 허물을 벗은 한 마리의 매끈한 뱀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화사했다. 꽃뱀 한마리가 동아리를 풀고 서서히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내 난 새로 태어난 거야. 토벌대 군인으로. 그러나 새로 태어난 휴의는 자신이 그렇게 됐다고 뻐기지 않았다. 오로지 기쁨은 자신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속으로만 자축했던 것이다. 그만큼 철두철미한 사람이 휴의였다. 그의 변신을 토벌대장도 몰랐고 부하도 알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위해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 것은 체험으로 터득한 결과였다. 무덤을 파는 짓이지. 자랑하다가는 골로 가는거야. 토벌대장이 있고 그 위해 사령관이 있는데 부하 주제에 감히 잘났다고 으시댄다? 그런 인간을 좋아할 상관이 있을까.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뽐내는 것은 하류인생들이나 하는 경솔한 행동이었다. 겨우 거기에서 멈출 휴의가 아니었다. 자신도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인지 알지 못하는 나 정도의 큰 인물은 칭찬을 받아도 ,꾸중을 들어도 낯색을 바꾸지 않아야 한다. 그런 내공 없이는 중간에서 무너진다. 그래서 휴의는 철저히 혼자서 감정을 통제했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좋아도 나빠도 그 중간이어도 다른 사람이 보면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을 가진 사람이 휴의였다. 피가 얼어붙어 심장이나 머리로 통하지 않는 냉혈한이 휴의였다. 그는 반대편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길은 오직 외길이고 이 길만이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런 시기에 이런 장소에서 외길은 외줄타기처럼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 길은 안전했고 장미가 깔리 붉은 카펫이었다. 설혹 거칠고 험한 일이 생겨도 순간이었고 빨리 지나갔다. 그 길을 가는데 꿀릴 것이 없었다. 자신에게 조국에게 동료에게 부대장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양심이 온전하게 달려 있었고 그것은 그가 하는 일에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죽마을 떠난 지 불과 사 년에 만에 이룬 성과였다. 농사일 걱정하던 앳된 청년은 이제 만주 벌판을 호령하는 관동군의 초급장교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얼마나 바쁘고 하는 일에 신념이 찼던지 이제는 고향도 부모도 잊었다. 한 번 잊기로 한 것을 굳이 기억 속에서 살릴 필요가 있겠는가. 나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한 달이라도 먼저 입대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큰 사람이 됐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가 들기도 했으니 휴의가 지금의 상황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늦었다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더 늦지 않고 지금이라도 이 위치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토벌대장은 만주군 총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내륙의 깊은 곳으로 출장을 떠났다. 적어도 삼일 정도의 일정이다. 그 사이 이곳 토벌대 연대 본부의 수장은 휴의다. 그는 토벌대장이 없는 곳에서 왕노릇을 할 수 있고 실재로 그렇게했다. 그러나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휴의 마음속에서 그런 기분이 일었을 뿐이다. 짧은 휴식이라도 왕이라는 마음은 그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  그는 자신의 관사 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세월은 좋았고 그 좋은 세월에 꽃들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벚꽃이 만개한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런 때는 고향이 눈앞에 어른 거려도 참을만 했다. 그랬었지. 해마다 봄이면 작은 묘목을 가져와 학교 운동장에 심었고 물을 주었지. 학교앞 큰 길가에 커가는 나무는 모두 벚나무였다. 어떤 날은 어른들 까지 일장기가 그려진 이마에 머리띠를 하고 와서 나라 나무를 심었다. 

학교를 오가면서 휴의는 자신이 심은 나무가 작년과 다르게 올해 더 커진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도 이 나무처럼 해마다 크고 두꺼워지는 것이 좋았다. 벚꽃은 일본 국화였다. 아니 우리나라 꽃이었다. 그래서 휴의는 만주에서 보는 그 꽃에 더 애정이 갔다. 꽃 때문인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가라앉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는 심해 깊은 곳까지 천천히 니려갔다. 꽃을 보고 쉬다니.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하는 감탄은 짧게 끝났다. 대신 나랏꽃을 보면서 애국심을 더 키웠고 하루빨리 조선독립군을 소탕하고 만주를 넘어 중국 전체를 집어 삼켜야 겠다는 의욕이 앞섰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그 일을 하고 싶었다. 그에게 이 일은 천직 그 이상이었다. 다른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문득 토벌대장이 거쳐왔던 일본 육사의 교관의 길은 어떤가 그려봤다. 본국의 수도 도쿄나 경성에 가서 제자들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그만큼 휴의의 가슴은 넓고 굵게 커져 있었다. 

여기서 배운 실전 경험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그것을 후배들에게 전수시키는 것이 또다른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육사생도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어른 거렸다. 제대로 군사교육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토벌대장처럼 일본육사출신이라면, 그는 그런 꿈을 꾸었다. 그러나 지금도 충분하다. 나는 자랑스러운 제국주의의 소대장이 아닌가. 여기서 뒤로 갈 수는없지. 그것은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후퇴가 아냐. 그냥 후퇴인거지. 후학 양성은 그만두자. 그나저나 토벌대장이 없는 틈에 전과를 올리면 좋을텐데. 그걸 위해 뭐 좋은 수가 없을까. 내가 없을 동안에 잘 하고 있어라. 토벌대장이 떠날 때 한 말이었다. 잘하고 있으라고. 물론이지. 잘하고 말고. 없는 동안에도이곳 연대는 잘 돌아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휴의는 득의만만하게 그를 전송했다. 그렇다면, 그렇지. 지하실의 그 자에게서 뭔가 얻어낼 게 있을거야. 반동의 세력을 족쳐보자. 어는 때든 있기 마련이라지만 지금은 안돼. 왜냐, 내가 있거든. 책에서 보니 그런 자들이 없던 때는 없었어. 그러나 오래 갈 수는 없어. 혹간 뒤집어 지는 수는 있지만 성공확률은 매우 낮아. 후환을 없애야지. 그래서 우리같은 군대가 필요한 거고. 그냥 군인말고 사명감이 투철한 나같은 군인말이야. 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하지. 난 비열하고 때로운 음흉하고 사악한데 얼굴은 평온해. 그게 내 특기지. 그나저나 이 짓도 싫증날 때가 있어. 애국심만으로 하루 왼종일 시간을 보낼순 없지. 이럴 땐 점례를 생각하자. 점례를 생각하면 휴의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면 이때일 것이다. 

점례는 잘 있을까. 잘 있을거야. 그러기를 바래야지. 내가 토벌대 군인이라면 그녀는 잘했다고 칭찬할까. 모르겠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한 번도 나쁘게 말한 적 없으니 이번에도 그러겠지. 그런데 말하고 나니 찔리는 곳이 있네.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한 거. 죄없는 주인장에 미안한 거. 굳이 말할 필요없지. 내 단점은 숨겨야지. 난 예전의 휴의가 아냐. 점례도 그걸 알거야. 죽음 앞에서 사는 것 말고 더 중요한 게 있겠어. 나 살기 위해 남을 죽였어. 그게 내 직업이야. 그렇게 말할 순 없어. 이런 건 어때.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이야. 틀렸어. 난 음지에서 일하지 않아.양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이건 어때. 무슨 말이야. 점례가 놀라겠지. 그냥 그래. 애국하는 일이지. 나랏일이야. 그러니 너무 깊게 알려고 하지마. 이건 점례에 대한 실례야. 그냥 먹고 살만해. 넌 어때. 이 정도면 족할거야. 속 깊은 이야기는 금물이야. 토벌대의 생명은 비밀유지. 점례라고 해도 말할 순 없어. 언젠가 그날이 오기 전에는. 그나 저나 휴식의 시간이야. 모처럼. 쉬자 쉴 때 쉬자. 그러자 마음이 한결 누그러워졌다.

휴의는 쇼파에 다리를 길게 뻗고 누웠다. 얼굴이 바뀌고 있다. 긴장이 풀렸다. 웃고 있을거야. 미소를 지었거든. 불안이 사라졌다는 증거지. 그렇다고 딱히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몰라. 부드러워졌다는 것만 느낄 뿐. 자 그렇다면 점례와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 볼까. 희어, 너무 희어. 그리고 이건 붉어 너무 붉어. 점례는 모래 한 주먹을 쥐고 손가락 사이로 흘려 보내면서 말했어. 정말 그랬어. 흰 모래는 그냥 흰 게 아니라 너무 희었어. 어디서 냄새가 나. 어디긴 바로 옆이지. 점례는 죔스럽게 해당화 잎을 잡다 당겨 코에 댔어. 힘 조절이 중요해. 더 세면 잎이 끊어지고 약하면 당겨 오질 않아.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냐. 그리고 또. 조심해야지. 가시가 있어. 가시. 어 뱀이다 뱀. 내가 소리쳤어. 점례가 해당화 잎을 놓쳤어. 가지가 휘어지면서 손등을 쳤지. 잎은 떨어져 나갔고. 피가 났어. 해당화 보다 더 붉은 피가.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내가 잡았지. 진정해. 이러면 괜찮아 질거야. 그 손등에 내가 입을 댔어. 그리고 아, 말하지 않을 거야. 휴의는 이렇게 잡념의 시간을 즐겼다. 토벌대장이 없으니 이렇게 좋구나. 범이 없는 산에 여우가 호령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야. 완용은. 그에게는 어떤 감정도 없다. 굳이 대자면 나쁜 감정이 좀 많아. 이 자식이 제 부모보다 많은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했어. 그럴 이유가 있다고해도 말야. 그 자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해서 아버지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나. 그 자도 나처럼 흉계를 꾸민거지. 둘러댄 거야. 자기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나보다 한 발 앞섰어. 그 방면에서는. 순사부장. 거기까지. 완용이 순사부장이라. 휴의는 승진을 거듭한 완용이 순사부장의 완장을 차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순사부장이라. 조선인 순사부장. 여간 특출나야 올라올 수 있는 자리인데. 그 자를 만나면 내 직업을 이야기 하지. 떳떳하게. 그가 원하는 게 이거 아니었어. 그를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고. 그와 같은 길을 가는 나, 아니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완용이. 

그런 깊은 생각이 들자 휴의는 완용과 자신이 닮은꼴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 그래 이건 봉사야.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조국을 위한다면 애국하는 일이고. 만나게 되겠지. 조만간 일지 일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조선에 파병될 수도 있고 완용이 만주를 방문할 수도 있지. 서로는 지금 자신의 위치를 모르지만 만나면 놀라게 될거야. 그때 나는 주눅들지 않을 거야. 당당히 맞서야지. 네 시다바리가 아냐. 굳이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어. 태도와 눈빛만으로도 그 자를 이겨내야지. 그게 승자야. 그러나 한 번이면 족해. 더 만날 이유는 없어. 인생에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그게 뭘까. 경쟁심이겠지.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자. 털어놓고 우리 경쟁하자. 너는 경찰의 최고가 되고 난 별을 다는 선에서. 어 그러고 보니 우린 둘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고 있네. 그 자와 내가 엮이고 있어. 아냐, 이건 아냐. 숨겨야지. 난 숨을 거야. 쥐새끼를 피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잠시 자리를 옮기는 거라고. 한 배를 탄 동지라고. 동지, 웃기지 마. 그 놈과 나를 새끼줄 엮듯이 역지마. 그러고 싶지 않은니까. 완용과의 관계는 여기서 마무리 짓자. 휴의가 서둘러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것은 다시 점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본토 근무를 부대장에게 건의해 볼까. 근무는 아니더라도 출장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일본에 갈 수 있을까. 거기 가면 정신대로 간 점례를 만날 수 있을거야. 그녀는 지금쯤 숙련된 모습으로 총알을 만들겠지. 눈 감고도 화약의 양을 알아낼 거야. 점례에게 저울은 필요없어. 그년는 순재주가 비상하거든. 비행기 부품을 조립하는 일은 또 얼마나 잘 할까. 점례 정도의 성실한 사람이라면 작업반장을 하고 있겠지. 그래, 머리에 하얀 천을 두르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작업 지시를 하는 점례를 떠올려봐. 얼마나 멋진 모습이야.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만큼 점례도 나를 생각할까. 그래, 점례는 똑똑하고 야무저. 일본어도 나보다 더 잘할거야. 휴일이면 도쿄 시내를 예쁜 옷을 입고 걸어가는 점례를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휴의는 점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하면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잊었다고 무시했다. 그러면 못써. 그러지 말자. 앞으로는 문득 문득 이렇게 떠오르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떠올리자. 기분이 좋잖아. 거리는 중요하지 않아. 얼마나 멀어. 여기서 일본은. 하지만 점례는 늘 근처에서 얼씬거리고 있어. 나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거야 나처럼. 그렇다면 알겠지. 나의 애국하는 마음을. 이해 할 거야. 그렇다고 해도 고문한 것을 자랑하지는 말아야지. 그게 어디 내놓고 소문낼 일인가. 꼭꼭 숨길거야. 그러면 나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거야. 그럴 거야. 여자는 남자의 지위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자. 내친 김에 대위. 아니 영관급으로 올라야지. 소령. 소령을 하자. 토벌대장은 장군이 되겠지. 명실상부한 장군. 어쩌면 별 두개를 단 투 스타가 될지도 몰라. 이곳 신문에도 나겠지. 조선인 토벌대장 투 스타로 승진, 큰 글자 밑에는 작은 글자로 그의 부관 휴의는 소령으로 진급. 아,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휴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토벌대장보다 더 높이 오를지도 몰라. 휴의는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점례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냐, 점례는 아냐. 자신의 출세에 점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가능하면 일본여자와 결혼해야지. 그것도 평민이 아닌 장교의 자식이나 정치인의 먼 친척이라면 더 좋겠지. 점례는 잊자. 시골 촌뜨기를 기억하다니. 내가 누군데. 감히 점례 따위가 내 앞길을 막다니. 휴의는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듯이 인상을 찌뿌렸다. 그는 토벌대장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스스로 양반이 아니라면 양반의 처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 그래야 뻗어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에는 빠진 곳에서 쉽게 빠져 나 올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이 힘이 아니겠니. 점례를 이런 이유로 제켜 놨으나 그는 점례의 그림자 마저 완전히 떨쳐 낸 것은 아니었다. 생각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실천은 못해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점례는 그것대로 나두기로 했다.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떼내지 않았다. 그러나 상념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는 더 머물면 골치만 아를 것 같아 옷을 챙겨입었다. 나돌아야 잡념을 떨칠 수 있다. 노느니 시내 정탐을 나가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옷을 챙겨 입고 행동에 옮겼다. 

이때는 잡생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비록 사복이지만 옷을 입고 나갈 때 휴의는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잠시라고 엉뚱한 곳에 한눈을 팔았어. 제국주의에 이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휴의는 가급적 혼자 있는 시간을 멀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보면 삼천포로 빠진다니까. 섣부른 감상으로 일을 망칠수는 없어. 가난한 때를 이제 막 벗었다고 정신마저 썩을 수는 없지. 다시는 그러지 말자는 의미로 휴으는 거울 속에 비친 붉은 뺨을 조금 세게 꼬집었다. 정신 차려 이 놈아. 이곳이 어디라고 그깟 점례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니. 완용 같은 건 잊어. 네 상대가 아니잖아. 어, 그러고 보니 여순은 잘 있나. 점례와 같은 날 끌려 갔었지. 아니 끌려가다니. 제발로 걸어서 갔잖아. 돈 벌어서 논 산다고. 내가 신는 이 군화를 여순이 만들었는지도 모르겠군. 발에 착 감기는 것이 솜씨좋은 여자의 손길이 느껴져. 그래, 여순이 만든 군화를 신었으니 어디 슬슬 나가 볼까. 군홧줄을 위로 잡아 올리며 휴의는 이렇게 중얼 거렸다. 그가 끈을 조이고 막 나가려고 할 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부하가 급히 다가왔다.

엊그제 잡아온 조무래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고문 끝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휴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 죽는 놈이 어디 한 두 놈이냐. 임마, 그런건 네가 알아서 처리하지. 바쁘신 내가 그것 까지 챙겨야 해. 목구멍까지 이 말이 나왔으나 휴의는 반짝 반짝 빛나는 구두를 내려다 보며 다시 목구멍안으로 주어 삼켰다. 어, 그래. 뭐가 다른데. 이 말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죽든 말든 죽으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듯이 담겨 있었다. 가볍게 응수했으나 부하는 그대로 물러나기에는 왠지 꺼림찍하다는 듯이 머뭇거렸다. 나는 시내 정탐좀 하고 온다. 넌 오늘 좀 쉬어라. 쉴 때 쉬어. 이런 기회 아무때나 오는 것 아니다. 독립군 상부 조직을 알고 있는 듯 싶습니다. 어째 그런 분위기가 풍겨요. 다른 놈들하고는 다른. 아무리 지져대도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고 그냥 견디기만 하는 것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상부 조직을 안다고. 휴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가 어떤 자인지는 간략히 보고 받았었다. 만주 시내 건달이라고 했다. 아니면 일본 깡패 밑에서 일하는 조선 깡패라고나 할까. 깡패가 깡다구가 있지. 아무래도 좀. 알았다. 그러면 내가 좀 조사를 해보지. 그 정도라면 자신이 직접 취조해 볼 가치가 있었다고 판단한 휴의는 그동안은 쉬게 해줘라. 먹을 것도 주고. 그래야 내가 대하라는 것을 하지. 물도 충분히 주고. 화장실도 다녀오게 하고. 사람꼴을 만들어 놔. 하이. 이건 네가 자초한 거다. 누굴 탓하지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너를 탓해.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다 잡아들여싸. 그래서인지 만주 시내서 얼쩡거리는 조선 출신들이 한달새 벌써 삼십 명이나 그렇게 됐다. 중국집 주인장이 반죽음 상태로 버려지고 나서 분위기가 바뀌었으나 건달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래서 두목급으로 두 명을 거리에서 매달기도 했다. 그 결과로 일이 잘되어 간 측면이 있다. 죽음의 효과는 컸다는 말이다. 그런 자 가운데 하나겠지. 독립군 상부가 이런 자들과 엮이겠어. 만주의 조선인이 사라지자 아무나 잡아들인 결과겠지. 독립군 대신 깡패 소탕이 목적이 되버렸어. 이거 왜이래. 잡으라는 독립군 대신 깡패만 득실 거리니. 휴의는 담배를 불을 붙이면서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작금의 사태에 실망을 드러냈다. 알았어. 알았다고. 휴의는 부하에게인지 자신에게인지 모를 말을 하고는 박차를 울리듯이 하면서 부대 밖을 빠져 나갔다. 그가 탄 차량이 뿌연 먼지를 날리는 것을 부하는 지켜보았다. 그가 떠나자 부하는 기운이 빠졌다. 긴장이 풀리자 그는 그의 부하를 불러 휴의가 명령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하고는 그 자신은 좀 쉬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주는 소강상태야. 다 어디로 간거지. 최근 두 어달 동안 독립군은 자취를 감췄어. 상하이로 갔나. 훈춘아니면 충칭인가. 부하는 혼잣말을 하면서 쉴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휴의가 외출이나 한다면 기분좋게 나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너무 세게 몰았어. 말도 쉬어야지. 시내를 거닐면서 휴의는 연습삼아 혹은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편 작전을 떠올렸다. 일주일 전이었다. 눈짓 하나로 음식점을 소대병력이 순식간에 애워쌌고 삼십분에 주인장을 포함해 13명을 부대로 끌고 왔다. 

신분이 확실한 중국인 주인과 나머지는 그날 밤 다 석방됐는데 조선 청년 하나는 잡아 두었다. 이 청년도 의심 때문이 아니라 출타에서 돌아오면 토벌대장에게 자신들이 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냥 잡아둔 것이었다. 그래서 휴의도 직접 심문에 가담하지 않고 졸병이 심심풀이로 아무거나 묻고 형식적인 보고서를 쓴 다음 토벌대장이 오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석방하려고 했다. 조선 청년 하나를 잡았으나 의심점이 없어 석방하려고 합니다. 임자, 알아서 해. 토벌대장은 이렇게 말할 것이고 휴의는 풀어주면서 인자한 자신의 내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했다. 내가 너무 잔인했어. 내 진심을 그게 아니었는데. 희생양이라면 할 만큼 했어. 이제는 진짜만 잡자. 가짜는 잡았어도 놓아주고. 잔혹한 짓이 되레 역풍이 불어 민심이 이반 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은 아니었다. 공포는 그만 하면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의 비명이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좀 살살해라. 너무 심했어. 그동안. 휴의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화책을 쓰겠다는 전술적 변화 같은 것이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변해 갔던 것이고 그것에 대해 부하들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해볼만큼 해봤으나 성과는 미진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죽여 놓고 내 영혼이 편하겠니. 그런 마음이 부하들에게도 들었던 것이다. 휴의는 그날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걸어 다녔고 지치면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배가 고프면 만두를 사 먹었고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책갈피에 꽃아 놓고 보기 위해 엽서를 몇 장 구입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걸어서 부대로 복귀했다. 저녁을 먹고 점호가 있기 전이었으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그는 아까 나갈 때 부하가 한 말을 깡그리 잊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뭘? 그 조선 청년말입니다. 그제서야 휴의는 생각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낮의 기분을 그냥 이어가서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 내가 한 번 내려가 볼게. 그러기 전에 보고서좀 가져와. 특별할 게 없습니다. 말 한마디 없다. 음식도 먹지 않는다. 비병도 지르지 않는다. 뭐 이정도가 다가 되겠습니다. 

알았어. 넌 따라 오지마. 혼자 가겠다. 휴의는 귀찮다는 듯이 말하고는 부하를 쉬도록 했다. 그는 그냥 조선청년을 석방하려고 마음 먹었다. 어두운 지하 계단에 발을 디딜 때 부터 그는 그런 마음 가짐이었다. 야, 별 거 없어. 석방해. 대신 보고서는 알맞게 써라. 조선청년과 마주 하기 전에 휴의는 그 말을 이미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때 보다도 편안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풀어 준다는 것은 잡아 올 때보다 느긋하기 마련이다. 아량을 베푼다는 마음이 거기에 더해지면 잠시 나는 착한 놈이 되는 것이다. 얼마든지 잡아들일 수 있지만 마음이 착한 내가 한 번 너를 용서해 준다, 그러니 넌 나에게 빚이 있고 고맙게 생각해라. 뭐 이런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휴의도 그런 상태에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끝내자. 적당히 하고 보내자. 그런데 그와 의자를 마주하고 앉는 순간 휴의는 이 자가 생각보다 거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직감이라는. 몸에서 느끼는 어떤 살기 같은 거. 아니면 범접하기 어려운 어떤 기운 같은 거 말이다. 그런 것을 휴의는 느꼈다. 이 자가 정말로 독립군 상부 조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고생한 것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다. 실마를 풀 수 있다는 생각에 휴의의 두 눈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나갈 때 처럼 자신의 군화를 한 번 내려다 보고 묶여 있는 조선청년을 바라봤다. 

고개가 한 쪽으로 기울었고 눈은 반쯤 감겨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그는 호인이었다. 눈썹에는 고문의 흔적으로 상처가 났고 피가 엉겨 붙어 있었는데 이마에서 광채같은 것이 난다고 느꼈다. 이 놈이 상부조직의 자체일지 몰라. 자신이 직접 심문하기를 잘했다고 판단한 휴의는 요모조모 몰골을 훑어 보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휴의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상처난 얼굴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목 조차 가누지 못할정도로 팼군.적당히 하랬더니 이거 아예 반 죽여 놨어. 자신이 직접 한 고문의 결과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은 확실히 싫은 느낌이었다. 너무 심했어. 인간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 짓을 해. 그는 부하를 나무랐다. 옆에 있다면 이 자식아, 내가 살살하라고 했니 안 했니 하면서 닦달했을 것이다. 이제는 적당히 하자. 부대장님의 지시도 있었잖아. 그런데도 말을 안들어. 에잇. 휴의는 자신에게 하듯이 화를 냈다. 상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요한 상태 그대로 있었다. 한바탕 회오리가 지나가면 잠시 쉬어가는 타임이 그에게 찾와왔다고 판단한 듯 싶었다. 그렇지. 어떤 폭풍도 종국에는 끝나게 되 있어. 지금이 그 순간인가. 

적당히 둘러대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니? 내 나이 또래인데. 참는다고 능사는 아냐. 그게 남자답게 구는 것도 아니고. 적당하게 타협좀 하지. 조선놈들은 왜 한결같이 이 모양이야. 도 아니면 모라니. 친일분자 아니면 독립군이니 이거야 원. 휴의는 침을 그러모았으나 뱉지는 않았다. 질펀한 바닥의 습기찬 구석에 그것을 날려 보낼 용기가 없었다. 그는 침을 삼키면서 이상한 의문에 빠졌다. 아무 잘못이 없다면 굳이 입을 봉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난 잘못이 없어요. 그냥 시내 나왔다가 영문도 모르고 체포됐어요. 하면 됐을 것을. 지난번에는 그런 수작이 안 통했지만 일주일 전에는 통했는데. 믿지 못해서 일까. 그럴 거야. 나도 못믿는데 관동군을 믿는 조선인이 있을까. 그러저나 많이 상했어. 살고 봐야지. 미련한 놈이야. 남자는 개뿔,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남자야. 처음에는 부하하게 들었던 억하심정이 이제는 조선청년에게로 곱지않은 시선이 가는 것을 휴의는 느꼈다. 나라면 적당히 불었을텐데. 그 까짓게 다 뭐라고. 사람이 어떻게 저 지경이 되고도 참을 수 있지 하는 지독함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이 몰려들었다. 차라리 짐승이 되지 그랬어. 아무나 막 불어 버리지. 의자에 묶인 그는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휴의는 돌아서서 그냥 나갈까 생각했다. 곧 죽을지도 모를 녀석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 냄새도 싫어. 난 지하실 체질이 아닌가봐.

휴의는 군화가 젖을 까봐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려다 다시 돌아섰다. 섬뜩한 무엇이 뒤를 잡아 당겼다. 지금까지의 용의자와는 달리 어떤 이상한 기분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에게 물을 끼얹어 정신이 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찬물을 맞은 얼굴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다시 물이 쏟아졌고 청년은 약간 정신이 돌아온 모양인지 실눈을 겨우 뜨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눈에 힘이 없었다. 눈뜨기 조차 힘에 겨운 표정이야. 의자에 앉아 있기도 벅차. 풀어줘. 자빠질지 모르니 좀 거들어 주고. 부하는 그렇게 했다. 몸무게 때문에 자신에게 쓰러져 피묻은 옷이 몸에 닿자 부하는 벌레를 떨어내듯이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조선청년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조금하라고 했잖아. 이 놈아. 휴의가 역정을 냈다. 알았어. 수고했다. 고개를 푹 숙인 부하가 안쓰러웠던지 휴의는 너는 나가 보라고 했다. 가서 자라. 오늘 불침번 누구냐. 문 앞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하고. 휴의는 부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구사하고 싶었다. 고문 말고 색다른 취조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문이 가장 빠른 자백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정신이 강한 사람에게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자신만이 세운 원칙이 그 순간 작동했다. 이런 자에게는 안 통해. 다른 수를 써야지. 

처참해 졌음에도 이름이나 나이조차 밝히지 않은 이런자에게는 고문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무단통치대신 문화정책을 써보는 거지. 나도 많이 안다. 그걸 여기에 갖다 붙이다니. 휴의는 그 와중에도 자신이 배운 지식을 써먹는게 신기한지 약간의 웃음을 지었다. 그래 기다려 보자. 별로 할 일도 없고 마음도 싱숭생숭 하니. 그는 쓰러진 조선 청년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옷자락의 단추 하나를 풀어줬다. 그리고 양동이의 물에 수건을 적혀 얼굴에 들러붙은 핏조각을 씻어냈다. 입에는 주전자의 깨끗한 물을 흘려 넣었다. 흐러 나오는 그 물이 얼굴에 닿을 때는 세수하듯이 씻겨 주었다. 그리고 몸을 똑바로 눕폈다. 장신은 아니었어도 체구가 작은 편은 아니었다.어깨는 벌어졌고 팔뚝은 굵었다. 운동가다운 체격이었고 이런 근육이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지금 숨쉬고 있는 원동력이었다. 시간은 흘렀으나 휴의는 답답해 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저 자의 숨소리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재미있었다. 재미라고 말하면 그렇다. 관찰한다고나 할까. 생물 시간에 개구를 해부를 눈여겨 보는 것처럼 휴의는 쓰러진 조선청년의 작은 움직임에도 눈기길을 주었다.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의식이 돌아오면 팔리 돌아가거나 다리뼈가 깨지면 아무리 독종이라도 신음을 지르게 돼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없는 것을 보면 강한 타박상은 있었도 뼈는 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새 기술이 많이 늘었어. 처음에는 부러지고 깨지는 것이 예사였는데. 요즘은 아니란 말이야. 휴의는 고문 기술이 늘어난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속으로 중얼 거렸다. 휴의는 응급으로 배운 의학지식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약통을 가져와라. 실과 바늘도. 그는 위를 향해 소리 질렀다.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삼십 분 쯤 후에 준비한 것을 들고 나타났다. 어디 갔다 왔니? 의무실에서 가져왔습니다. 잘했다. 아까 그 자리에 대기하고 있어라. 휴의는 먼저 상처를 씻었다. 그리고 소독약을 바르고 상처를 꿰맸다. 환자는 실눈을 떴으나 예의 비명 같은 것은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지 않은 곳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조선청년은 그것이 어떤 행위인지 알고는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으나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고문할 때처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삼 일간 안정을 취한 조선청년은 거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휴의는 밥을 들여보냈다. 씻을 수 있는 따뜻한 물도 제공했다. 나름대로의 대접이었다. 그 다음날 휴의는 조선 청년을 찾았다. 그리고 귀중한 보석을 감정하는 듯이 청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대는 무안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 기력을 다 찾지 못했다. 토벌대장은 베이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 내일 예정이었으나 하루 늦는다는 전갈이 왔다. 그가 없어도 부대는 잘 돌아갔으므로 휴의는 그의 부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부하를 내보낸 뒤 다시 단둘이 남자 휴의는 조선 청년에게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로 질문을 시작했다. 말해야 될 시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휴의는 긴말 대신 짧은 말의 문답을 원했다. 친절한 행동을 했으니 너도 그에 보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미안한 감정이 들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친절하려고 노력했다고 봐야 한다. 비굴할 정도로 웃기도 했고 목소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이렇게 부드러웠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심했다.

자, 시작합시다. 준비됐죠. 시작은 우리가 먼저 했으나 매듭은 그가 져야 한다. 애처로웠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독리군과는 관련이 없지요. 네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기를 바랬다.  아무말 이나 한다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풀어주기로 작정하지 않았던가.  별 일 아니오. 바로 풀려날 것이오. 여기 기록도 없앨 터이니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오. 여기 오기전과 후에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휴의는 공손했다.  어차피 곧 상해로 떠나야 한다. 휴의는 토버대장이 오면 상해로 떠나기로 미리 정해져 있었다. 독립군을 지휘하는 지휘소를 타격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떠나는 마당에 선의를 베풀고자 했다. 이런 것이 인정이다. 말하자면 만주와 작별하면서 선한 일을 하고 싶고 조선청년과 화해를 하고 싶어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고도 싶은 심정이 너무 강해 휴의는 그냥 나가시오 하려고 말하기 까지 했다.

나가시오. 그러나 조선청년은 나갈 수 없었다. 그에게 통행증은 발급되지 않았고 밖은 부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아, 통행증이 있어야지. 조금만 기다리시오. 휴의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친절하게 조선청년을 대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잖는가. 내가 독립군에 잡혀 취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때 이 선행이 보답을 해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눈곱만큼도 바라지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할 정도로 휴의는 조선청년에게 마음이 가 있었다. 휴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대신 말을 걸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사슬에 매어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이니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도 좋다고 허락했다. 여기 사슬을 풀어줘. 휴의는 다시 위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병사가 내려왔고 뒤로 묶인 두 손은 철거덕 소리를 내면서 힘없이 무릎쪽으로 쓰러졌다. 손이 조금 떨렸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알고 있거든 말하고 모르거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둘러댈 것도 거짓으로 말할 것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은 해도 좋다. 그래야 죽어도 속 시원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어서 이곳을 떠나 애초 네가 놀던 곳으로 가라. 이것이 휴의가 꺼낸 첫마디였다. 대답을 거절한다고 해서 내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인상도 주지 않았다. 윽박지르지도 않고 불어라, 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잘못 잡아 왔으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돌려보내겠다.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아서 이런 방식으로 대하는 나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 이야기든 보고서에 적을 한 두마디만 하면 됐다. 그것이 휴의가 원하는 전부였다. 내가 밑천이 달려 새로운 방법을 쓰는 건 아니오. 알아 듣겠지요. 내가 나섰으니 불든 죽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그냥 말만 하세요. 약속합니다. 조선청년은 약속 잘 지킵니다. 오늘 따라 휴의는 자신이 조선청년인 것을 조선청년 앞에서 서너 차례 꺼내 들었다. 동질감을 일부러 얻으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네 기억에 자신이 없으면 기억나는 것만 말해도 좋다. 무언가 무서운 일이 남아 있다는 공포는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된다. 변명해도 괜찮다. 사슬에서 놓여난 조선청년이 꿈틀거렸다. 동면에서 막 깨어나 아직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아직은 잘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금세 꺼져 갈 것 같은 그의 흐릿한 눈이 기름 먹은 심지를 타고 올라온 불길처럼 잠깐 빛이 났다. 미리 준비한 말이 있기라도 한듯이 조선 청년이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도 좋을 인물인지 아닌지 판가름 하려는 듯 두 눈이 상대의 눈을 응시했다. 휴의는 누군가의 든든한 보호자가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너보다는 내가 훨씬 침착하니 아무말 잔치라고 해보라고 그래야 억울함이 풀리지 않겠느냐고 은근한 눈빛을 보냈던 것이다. 고요와 침묵. 오늘은 휴일이오. 그 날의 일로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날 이라니. 조선깡패 심부름 말이오. 이득도 얻지 못하고 잡혀서 이꼴이오. 예상대로군. 조선깡패였어. 어쩌다 만주까지 와서 깡패질을 하게 됐소. 먹고 살기 위해서.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순 없지 않소. 않소? 내가 무섭지 않소. 그저 그렇소. 아까 얼핏 들으니 나가시오 했던 것 같은데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오. 하오? 그러하오. 휴의가 말장난을 했다. 그 말에는 난 조선깡패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해 줄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어디 또 그럴 수 있으면 해보시오. 상처를 치료해 주다니, 내 생전 처음이오. 그래서 고맙습니다. 습니다? 알겠습니다. 휴의는 또 조선청년의 말을 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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