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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그가 써준 추천서는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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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써준 추천서는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 의약뉴스
  • 승인 2023.06.2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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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주일 교육을 받고 휴의는 만주의 한 부대로 투입됐다. 열차 안에서 그는 배운건 없지만 사상이 건전한 시골 청년이라는 완용의 추천서를 읽었다. 친구는 친구다. 나를 위해 이런 걸 써줄 사람은 누가 있겠나. 휴의는 점례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를 불편하게 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에게 미안했다. 아버지를 주먹으로 팬 것도 용서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아버지 아닌 그의 편에 섰다. 이 추천서는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런 친구를 둔 게 얼마나 든든한가. 그는 고향을 떠나 먼 이국에서 이런 상념에 잠겼다. 그는 추천서를 소중히 간직했다. 

어디로 배치될지 어느 전선으로 갈지는 이 붉은 인장이 찍힌 종이 쪽지 하나로 갈리게 돼 있었다. 도장의 옆 공란에는 천황을 위한 애국심이 각별한 조선 청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 있었다. 이것이 사상이 건전한 판단 기준이었다. 그래 난 천황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돼 있어. 추천서를 꼼꼼이 읽은 담당관은 휴의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그를 저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저쪽은 이쪽과는 달리 사람이 적어다. 휴의는 그 순간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좋은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맡은 기억이 있는 냄새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저쪽은 항일 독립군을 색출하는 토벌대가 속한 부대였다. 이 정도로 뚜철한 애국심이 있는  조선인이라면 동족이라는 하찮은 이유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배치를 결정하는 일본군은 휴의와 눈이 마주치자 알듯 모를 듯한 짧은 미소를 지었다. 넌 토벌대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휴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난 선택을 받았고 명령을 따르면 된다. 휴의는 그런 마음 그대로 행동에서도 군인다운 패기를 드러냈다. 시키는 일은 의심하지 않고 따랐다. 배우는 능력도 탁월하다고 평가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동기들보다 앞서 나갔다. 각개훈련을 하고 구보를 하고 사격하는 솜씨도 선두권이었다. 내부반 생활도 열성이었다. 군대체질이라는 말이 나올정도였다. 소대원 이름을 외우고 대원간의 다툼을 해결했다. 소대장은 그를 분대장으로 앉혔다. 입대 한 달만이었다. 그만큼 적응이 빨랐다.  배운 것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머리 덕분에 휴의는 신병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다. 

체력도 나무랄데 없었다. 완전군장으로 한 시간 구보도 힘들지 않게 해냈다. 같이 간 동기 80명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을 만큼 우수했다. 나는 잘 하고 있어. 이대로 죽 가자. 진작 올 걸 그랬어. 완용이 말이 옳았어. 이곳에 있으니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 잠자리에 누으면 휴의는 이런 마음으로 다음날을 맞았다. 이런 휴의를 부대는 각별히 관리했다. 따로 써먹을 수 있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는 의협심도 있었다. 훈련 중 넘어진 동료가 일어나지 못해 위험에 처하면 뒤돌아서 일으켜 세웠다. 다가가서 상처를 살폈고 괜찮다고 용기를 심었다. 그리고 부축해 함께 뛰었다. 낙오하면 안돼. 빌미를 주지 말자. 대검을 꺼내 들고 달려드는 교관은 그런 휴의를 보고 화난 눈으로 노려 봤으나 군인정신을 높이 샀다. 이런 자가 조선에도 있었나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구보 중에 쓰러져 눈이 돌아가 더는 뛸 수 없는 동료를 비틀거리면서도 등에 엎고 달렸다. 그는 동료의 수치를 감춰주고 자존심을 지켜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여기서 지지 말자. 훈련은 곧 끝나. 전선에 배치되면 살만 할 거야. 그때를 위해 참자. 열흘만 견디자. 넌 앞서간 동료보다 못할 게 없어. 그러니 힘을 내자. 그러면 넘어졌던 자는 일어났고 일어나서는 달렸다. 그러나 끝내 그러지 못한 동료도 있었다. 그는 다음날 점호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실전 배치를 앞둔 3일전에도 그런 사태가 발생했다. 

완전군장을 한 상태로 10킬로 미터를 뛰는 강행군이었다. 붉은 벽돌 건물을 돌아서 연병장에 집하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물론 한 시간안에. 그것은 생존연습니었다. 그러나 거의 다 와서 꼭 낙오하는 병사가 나왔다. 다 왔어. 저기만 돌면 돼. 그러나 쓰러진 자는 대답대신 입에 흰 거품을 물었다. 눈은 위로 올라가 흰자위만 보였다. 휴의는 이번에도 쓰러진 자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선두 무리에 섰던 그는 감점을 각오하고 낙오병을 끌다시피하면서 함께 꼴찌로 들어왔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임마. 일본군 교관은 그런 휴의에게 막막을 했다. 그러다가 화가 더 나는지 세워놓고 조인트를 깠다. 그것으로도 분이 안풀린 그는 엎드려 뻣쳐를 명령하고는 마대자루를 가져와 빳다를 쳤다. 수모였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 개자식아, 죽게 내버려 두라고. 저 놈은 어차리 전선에서 싸우지도 못하고 죽을 놈이야. 그러니, 내버려 둬. 이 조센징 놈아. 이 빠가야로 같은 놈.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도도 휴의는 자신을 자책하지 않았다. 그것이 동려애였고 군인정신이었다. 어라, 이 놈이 반성의 기미가 없네. 교관은 씩씩 거리며 주먹을 쓰기도 했다. 꼬라 박아. 그리고는 발길로 냅다 걷어 차기도 했다. 그 모습을 단상의 대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저 놈은 소대장 감이야. 크게 될 놈이라고. 훈련대장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훈련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매타작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보고를 위해 도열한 훈련병들은 부동자세 상태에서 복날 개처럼 맞았다. 때릴 이유를 찾던 교관은 누군가 대열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자 동작그만을 외쳤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사령관님에게 보고하는 마지막 날에도 군기가 빠졌어. 이런 개자식들. 본때를 보여주마. 볼똥은 바람을 따라 옆으로 순식간에 번졌다. 조교들은 달려들었다. 훈련병 하나 하나를 세워 놓고 샌드백 치듯이 서너 대씩 갈겨댔다. 퍽퍽 소리와 함께 자빠지는 자들이 늘어났다. 휴의는 참았다. 이 정도는 맷집으로 이겨낼 재간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은 네 놈들이 아무리 쳐대도 난 버틴다는 오기가 작동했다. 조교는 휴의를 올려다 봤다. 자신보다 키가 커서 어쩔 수 없었다. 째려봐. 그래서 어쩔 건데. 이 놈 내 주먹맛을 봐라. 조교가 점프하면서 어퍼컷을 날렸다. 휴의는 맞았다. 아팠다. 그러나 참았다. 해비급이 못되는 주먹으로 휴의를 한 방에 제압할 수 없었다. 너 분대장이지. 휴의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내가 봐준다. 분대장이니. 하고는 옆으로 갔다. 헛웃음이 나왔으나 휴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있는 훈련대장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멈추라는 신호를 언제 보내야 할지 가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멈춰라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 말을 듣지 못한 조교는 그 순간 손에 힘이 붙었는지 낙오를 일삼던 훈련병의 명치를 제대로 가격했다. 
 
권투선수처럼 상대를 한방에 끝장 내려는 듯이 주먹진 손을 뒤로 밀었다가 앞으로 당기면서 거리를 잰 것이 주효했다. 제대로 맞은 병사는 혀를 내밀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끝내 일어서지 못하면 벼린 대검의 칼끝이 꿈뜰거리는 허벅지를 노릴 것은 자명했다. 관동군 사령부에서 안된다는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더구나 지금은 본보기가 필요했다. 저러다가 사람죽겠다는 상황에 오면 나서지 말아야 하는데도 휴의가 나섰다. 다음에는 낙오가 없도록 하겠으니 이번만은 용서해 달라고 구타가 더 이어지면 죽을수도 있다고 말했다. 교관은 어이가 없었다. 다음에는. 아차 싶었다. 다음은 없다. 오늘만이 있을 뿐이다. 수많은 신병을 받았으나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생각같아서는 권총을 꺼내 머리에 구멍을 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때로는 벌보다 아량을 보는 주는 것이 훈련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꺼냈던 권총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권총집에 집어넣었다. 딸깍하고 단추 잠그는 소리를 들으며 휴의는 충성을 다짐하는 경례를 크고 우렁차게 올려 붙었다. 그것으로 훈련병들의 오늘 일과는 끝났다.  깜깜한 밤이 곧 왔고 훈련병들은 짐승처럼 쓰러졌다.

어제는 무사했으나 다음날에는 사망자가 나왔다. 애초 나약했던 자들 가운데 일부가 견디지 못 했던 것이다. 살려고 죽을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생존연습은 실패로 돌아가 죽음으로 이어졌다. 실려가는 그들은 병원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연병장에 이웃한 유격장 옆의 공터가 병원인 셈이었다. 차출된 조선인들은 땅을 파고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를 그들을 묻었다. 의사의 검시 같은 것은 없었다. 어떤 무덤에는 두 팔이 밖으로 나온 것도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팔을 감출 흙이 부족해서인지 훈련병들은 알지 못했다. 상관이 지시가 없다면 두 팔은 그렇게 계속 나와 있을 것이다. 죽어서야 그들은 두 팔을 내놓고 편히 쉬었다. 땅을 파고 나서 돌아서는 훈련병들은 힘이 빠지기 보다는 되레 힘이 솟았다. 애국심이 부족하면 저 꼴을 당한다는 사실 때문에 애국심은 더욱 고취됐다. 교관은 늘 말했다. 애국심이 없는 자는 낙오한다. 각자의 신체 조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모든 것은 애국으로 통했다. 살아남은 자는 애국심이 투철한 자로 인정받았다. 씁씁했다. 입맛이 썼다. 다들 그랬다. 눈은 충혈됐고 서로는 서로를 의지하기보다는 모른 척 했다. 적대시 하지 않는 것만해도 다행이다. 묻고 난 날은 더 허탈했다. 숫자와 상관없이. 장례도 미사도 없다니. 이거 해도 너무 한 것 아녀. 누구라도 한 마디 해야지. 목사나 신부가 없으면 고참이라도 한 마디 떠들어야지. 잘 가라고. 조선땅에서 태어난 아무개 나이는 20세, 이 정도라도 죽음의 길에 함께 해야 하는 거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다. 

도리를 따질 것도 없다. 천국은 아니더라도 지옥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죽은 자의 영혼은 위로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공동무덤은 자꾸 늘어났고 어느 날 나왔던 두 팔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국 팔도에서 온 장정들은 씩씩하게 시작했으나 처참하게 마무리됐다. 하라는 대로 했으나 말을 잘 들어 끝내 살아남지 못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관의 말에 반대 방향으로 갔다면 죽은 자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명령을 따랐다가 그렇게 됐다. 쫄쫄 굶고 얻어터지다가 죽어 나갔다. 죽는 자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자 역시 내일 그런 신세가 됐다. 비참한 순간이 오고서야 그는 나도 죽는구나 한 마디 했다. 

숨이 끊어진 그들은 바짝 말랐고 뼈만 앙상하게 드러났다. 얼마나 말랐는지 몸뚱아리를 두 겹으로 겹쳐도 겨우 한 사람 분량이었다. 교관이나 조교는 훈련병을 적처럼 대했다. 잡혀온 포로도 이 정도는 대우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만주의 일본군 훈련장은 보급사정이 지옥이 따로 없었다. 훈련병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도대체 애국이라는 것이 뭔지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싸우려면 먹어야 하고 쉬기도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 차라리 오지 말것을. 도망가서 숨어 살아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자괴감이 밀려 들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교관들은 죽음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살리기 위해 죽인다거나 죽어야 산다는 알 수 없는 말들을 수시로 내뱉었다. 교육훈련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됐다. 날이 밝기 전에 시작해 어두어서야 끝났다. 아니 끝난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야간 훈련이 시작됐고 내무반에서도 교육은 끝나지 않았다. 훈련병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기진맥진한 입술에는 쟁기질로 지친 소처럼 허연 거품이 품어져 나왔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전선에서 견딜 수 없다. 휴의는 죽은 동료를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시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 우선은 내가 살고 볼일이다. 그런 마음이었고 그런 그를 그는 자책하지 않았다. 자신이 산산조각이 났어도 어떻게든 구멍을 메꾸려고 했다. 난파선을 버리지 않고 뗏목을 이어 맞추면서 휴의는 생존의 기술을 터득해 나갔다. 그것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었고 쉬지 않고 거드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그는 쉬는 대신 침울한 훈련병을 다독였다. 마치 내 몫인 것 처럼. 그는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는 몰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이런 훈련을 받으면 생존 확률이 높다는 말에 휴의는 공감했다. 

그런 휴의를 교관들은 눈 여겨보다가 훈련병 분대장에서 소대장으로 임명했다. 어깨에 붉은 견장이 올라왔고 정식 계급장도 달렸다. 그에게는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총이 지급됐다. 그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꼈다. 견장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교관은 소대원이 잘못하면 그를 닦달했고 잘하면 칭찬으로 사기를 높였다. 당근과 채찍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소대 끼리의 경쟁을 부추겼다. 그것은 심했고 잔인했으며 혹독했다. 모의 각개전투에서는 쓰러지는 병사는 서로 먼저 찌르려고 대검을 꺼내드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관은 권총을 쏘아댔다. 일주일이 일년하고 맞먹었다. 앞으로 일주일을 더 버텨야 한다. 한 달간 훈련은 정말로 길고 오래갔다. 

살려면 일어나야 했고 대검에 찔리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했다. 기특한 것은 이런 훈련을 받고도 훈련병들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만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소용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도 있었다. 대들면 죽기 밖에 더하겠어. 그리고 도망친다면 어디로 가겠어. 만주에서 어디로 가느냐고. 그들은 독안에 든 쥐의 신세였으나 고양이를 잡을 만큼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잘도 참았다.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정식 군인이다. 그런 각오가 있어 견뎌나갔다. 그래 일주일, 겨우 일주일이라고. 휴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 일주일이 지났어도 전선 투입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 유일한 불만은 지체하는 전선 이동이었다.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은 혹독하기도 했지만 싸우고자 하는 갈망 때문이었다. 실제로 보름만에 그들은 눈이 달라졌다. 번쩍이는 살기가 가득했고 누구든 걸리면 죽인다는 의욕이 앞섰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살인의지가 채워졌고 피의 향에 길들여진 자들은 피의 냄새를 맠기를 원했다. 피비린내를 맡지 않은 날에는 다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나 두들겨 맞고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흘러야 제대로 잠을 잤다. 쇠버클이 달린 맨 가죽 혁대로 얼굴이 찢어져야 그날 밤이 무사히 지나갔다. 피맛은 그렇게 그들의 일상이 됐다. 짐승처럼 대했던 교관들의 애초 목적이 달성되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늑대가 그들이 원하는 최종 인간이었다. 훈련은 순전히 거기에 집중됐다. 효율을 위해 인간은 거세되고 그 자리에 짐승이 들어찼다. 넘어진 자는 불의한 자이며 그런 자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였다. 넘어지지 않고 찔리지 않는 자들은 정신적 승리감에 도취됐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 같은 것은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순진한 조선 청년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주면 먹고 때리면 맞았다. 드디어 투입이다. 전선으로 이동하는 마지막 날 저녁 교관은 휴의를 따로 불렀다.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순사 완용과는 어떤 사이인지 물었다. 같은 마을 친구로 자랐다고 했다. 그는 완용의 추천서가 마음에 든다며 특수부대로 차출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적은 외부에 있기도 하지만 내부에도 있다고도 했다. 같은 신민끼리 적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증오하면서 그런 놈들을 완전 소탕 하는 임무를 네게 맡긴다고 했다. 그 일은 매우 중요했다. 아무나 맡는 일이 아니었다. 내부의 적은 잘 보이지 않고 숨어서 게릴라 전을 한다고 했다. 폭탄을 투하하고 사라지고 저격하고 숨는다고 했다. 그런 자들을 잡는 것은 애국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고 교관은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막중한 임무를 주는 것은 완용의 추천서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인 순사 완용을 본받아 너도 훌륭한 군인이 돼라고 손을 잡았다. 그냥 군인이 아니다. 알지. 여기 관동군은 최상위야. 거기에 토벌대는 일진이고.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내 말 알아 듣겠어. 교관은 휴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요즘 게릴라들이 준동해. 네가 그들을 단숨에 제압해라. 조센징은 조센징 손으로 잡아야지. 그가 손을 내밀었다. 거친 그 손을 잡을 때 휴의는 깜짝 놀랐다. 잡은 그 손이 얼마나 자주 자신의 뺨을 때렸고 목을 쳤는지 알기 때문에 잡으려는 순간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잡았다. 잡은 손은 거칠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따뜻했다.

교관이 그 손을 흔들었다. 너를 믿는다는 눈초리가 가슴에 박혔다. 널 믿어. 네 놈은 해낼거야. 조선독립군 잔당들을 확실히 조져야지. 안 그래? 네. 휴의는 짧고 강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교관의 잔인한 얼굴은 사라지고 인자한 얼굴만이 휴의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교관은 두 얼굴이 또다시 한 얼굴이 됐고 그 한 얼굴이 활짝 웃었다. 휴의는 대일본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비로소 만났을 때 느끼는 남자의 감정을 휴의도 똑같이 받았다. 이 순간 자신은 이미 훈장을 받은 훌륭한 군인이었다. 완용이 고마웠다. 자신이 잘 된 것은 전부 그의 공이었다. 그는 그날 부로 독립군 토벌대의 특수부대 소속이 됐다. 군복을 입을 때도 있었고 만주 시내를 돌때는 사복 차림이었다. 현장을 급습하고 의심분자를 색출하는 일은 고도의 심리전이 필요했다.

그는 조선인이 조선인의 마음을 잘 알고 행하라는 교관의 말을 늘 되새겼다. 그리고 같은 신민이 돕지는 못할망정 무슨 독립이냐고 화를 내면서 자신이 반드시 그런 자들을 일망타진 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독립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빨갱이를 때려 잡자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독립군 토벌은 그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덫을 놓고 기다리기도 했고 깊은 산속이나 밀집한 민가를 덮치기도 했다. 때로는 진창을 기어가거나 오물 속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총을 겨눴다. 사람이 아닌 짐승을 잡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임무는 충분히 자랑스러웠다.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내 피는 얼어 붙지 않고 뛰고 있어. 가슴에 손을 얹고 휴의는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피로써 맹세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훗날 그는 이런 기분으로 혈서를 썼다. 피로써 맹세합니다.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 폐하 만세. 

혼란은 사라졌다.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망설였던 지난날은 잊자. 그에게 이제 그런 것은 없었다. 디딜 곳은 확실히 정해졌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대일본 조국을 위한 일이었다. 휴의는 그런 일에 자신이 끼어든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그는 상관의 말에 무조건 따랐고 그를 신처럼 숭배했다. 만주는 휴의와 어울렸다. 그가 애초 목적했던 훌륭한 군인의 길로 가는 적합한 곳이었다. 이 일에 일생을 바치기 위해 그는 흠뻑 빠져들었다. 고향과 몹시 떨어져 있어 잡념을 떨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늘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휴의는 최전선에서 때로는 육박전을 벌여야 하는 그런 곳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그는 대규모 적과 싸우기보다는 밀정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숨어 지내는 자를 찾아내거나 그들이 밖으로 나와 무언가를 도모하기 전에 처치하는 임무였다. 그것은 엄청난 정보력과 상대의 마음을 읽는 전술을 필요로 했다.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애초 계획했던 대로 딱딱 떨어졌다. 운도 따랐다. 결과가 좋을수록 그의 사상 무장도 더 들어찰 곳이 없을 만큼 충만했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그걸 휴의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부대 분위기도 그걸 인식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휴의는 이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은 것이다. 잔당은 여전히 암약하고 있었고 그것을 완전히 소탕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러나 일망타진은 쉽지 않았다. 하나를 제거하면 어디선가 또다른 하나가 나타났다. 독초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휴의는 독립군을 증오했다. 그말 자체를 싫어했다. 독립이 가당찮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활동을 하는 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쁜 짓에 정의감이 불타올랐던 그의 심성과도 맞아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복무했고 그것은 부대의 자랑거리였다. 

이럴수가 있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자고 돈도 벌다니. 휴의는 자신이 군인이 된 것이 만주군 토벌대의 일원이 된 것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이 좋은 것을 진작에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이었다. 현재의 위치가 만족 스러울 수록 완용에 대한 고마움도 커갔다. 한때 그를 미워했고 대결해 이기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일이었다. 자신을 탓하면서 휴의는 오늘도 전투화 끈을 바짝 동여맸다.  그의 팀은 최근 목숨값으로 최대치가 걸린 독립군 두목격인 인물을 사살하는 임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체포하면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자, 일들 하자고. 놈을 체포하든지 시체를 가져오든지 한 번 해보자고. 그러나 그를 체포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다. 현상금이 걸린 자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함께 다니는지 아니면 홀로 사람을 만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귀신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휴의는 더 전의에 불타올랐다. 누구도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치우고 싶었다.

독립군 수배자는 이미 한차례 조선의 내각인물을 암살했고 그보다 더 큰 또 다른 일을 도모하기 전에 만주에 잠입했다는 첩보를 토벌대는 입수했다. 만주 시내 일대는 수배령이 내려졌고 곳곳에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의 얼굴을 노려 보면서 휴의는 이 자는 대체 어떤 사상이길래 이런 모진 일을 하는지 새삼 궁금했다. 사방팔방으로 그의 행적을 좇아 종일 머리를 짜내고 시내를 염탐하다 지치면 휴의는 문득 왜 그는 그런 일을 벌이는지 의아했다. 그 정도 도피능력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먹고 살만할 텐데 굳이 목숨을 걸고 행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조선 신민이 대일본 제국의 인물과 그에 협조하는 자를 해치는 일이 과연 온당키난 한가. 더구나 조선독립이라니. 그 얼토당토 않는 일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그 가상한 용기의 원천을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일본이 조국이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신민인데 그는 왜 독립을 외치는지. 독립하면 떡이 나오나 술이 나오나. 되레 문명과는 멀어지는 비인간적이 일의 연속이지 않은가. 더구나 일제는 본국인과 반도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공표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토벌대에 입대한 것만 해도 그렇다. 차별이 있다면 과연 내가 당당하게 만주군인으로 행세할 수 있을까. 설사 좀 차별이 있을수는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렇지만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그것조차도 조만간 없어진다고 하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가. 일본인 지배는 눈먼 조선인을 눈뜨게 만들었다. 그렇잖은가. 차별은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내선일체는 그걸 증명한다. 기다리면 될 것은 조선인은 정말 급해. 잠시도 참을 수 없으니. 수배자는 잘못된 결심을 했다. 이국만리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대단하게 여기고 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해야 한다. 생포하고 휴의는 그 자를 꼭 심문하고 싶었다. 네 불온사상의 근거가 뭐냐고. 불량선인으로 전락하는데 일조한 것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잘못된 결심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쓴 맛을 봐야 한다. 나는 그에게 고귀하게 행동할 이유가 없다.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걸 늘 가슴에 새긴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는 것을. 금지된 것을 하는 것에는 합당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일망타진, 발본색원. 휴의는 내부반 벽에 걸려 있는 구호를 나즉이 외쳤다. 조선독립군을 반드시 일망타진하고 발본색원하겠다. 휴의는 자신의 이런 결심에 스스로 감탄했다. 그것은 자신이 꼭 해결해야 하는 어떤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는데 생각이 모아졌던 것이다. 난 공적인 인물이다. 사적으로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공적인 일을 하는데 사욕은 있을 수 없다. 그는 골목길을 돌아 시내를 어슬렁거렸다. 단서가 없을 때는 그저 인파속에 섞여 이리저리 떠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뜻하지 않게 독립군 하부조직을 검거할 수 있었던 것도 배회하다 얻은 정보 때문이었다. 수상한 자네. 누군가를 기다리나 봐. 그런데 손은 가슴속에 있고. 마적단인가. 아니면. 휴의는 낮 시간 데리고 나온 부하를 심부를 시키고 혼자서 거닐다 모였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바로 음식점 앞이었다. 이쑤시개를 물었던 사람은 그 말을 하고 난 후 입에 있던 것을 빼내서 땅에 떨어트리고는 꽁초라도 되는 양 발로 비볐다. 

안에 있다는 얘기네. 들어가 볼까. 그 생각과 동시에 휴의는 짜장면 냄새를 풍기는 중국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식당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를 발견했다. 그는 조용히 그를 불러냈고 그가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슴속에 손을 댄 것은 권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잃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가슴속에는 적지 않은 돈이 있었던 것이다. 휴의는 그 자를 부대로 데려와 심리전담 부서에 넘겼다. 심문 결과 그는 독립군 끄나풀이었는데 아무리 문초를 해도 근거지에 대한 성과를 얻어 낼 수 없었다. 일회용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휴의는 이런 식으로 거물을 잡을 수 있다는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틈이 나면 홀로 시내를 거닐었고 음식점 앞에 모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일부러 그 옆에서 담배를 피면서 오가는 대화를 슬쩍 엿듯곤 했다. 그 날도 휴의는 그런 임무를 가지고 시내를 나왔다. 오늘도 건수가 있다. 그런 예감이 들었고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로 돌아갔다. 지난번 처럼 팀이 아닌 단독으로 쳐들어갔는데 한 번 늦었던 것이다. 그들이 남기고 간 미쳐 먹다 만 국그릇은 아직 따뜻한 김이 올랐고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수저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결국 휴의는 실수를 저질렀다. 급히 뒤를 따랐으나 불량선인은 군중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적을 찾는데 허탕을 치고 그는 부대로 복귀했다.

잡을 수 있는 것을 놓쳤다. 허탈감했다. 적은 나보다 한 발 빨랐다.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 한테 있다. 휴의는 자신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벌을 내렸다. 막사의 운동장을 훈령병처럼 돌았고 팔굽혀 펴기를 수도 없이 했다. 나중에는 수저를 들지 못할 정도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자책하면서 휴의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 실수야. 그러기 전에 포위망을 짰어야지. 그리고 단독은 무리야. 적어도 부하 한 명은 있어야지. 뒷문을 막았더라면. 분노로 그는 얼굴이 붉어졌으며 자신의 주먹을 토벌대장이 부르기 전까지 시멘트벽에 마구 치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마침내 직속상관인 토벌대장이 그를 호출했다. 작고 왜소한 몸집에 안경을 낀 그는 담배를 물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가 들어섰는데도 그는 아무런 기척이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휴의는 부동자세를 유지하면서 토벌대장이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죽으라면 그 자리에서 할복하겠다는 자세였다. 한참을 자신의 앞에 세워둔 토벌대장은 옆으로 오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재떨이를 들어 휴의의 머리를 내리쳤다. 담뱃재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오래 묵은 니코틴 냄새가 코로 스며들렀다. 동시에 흐르는 피가 입술을 적셨다. 오랜만에 보는 피맛이었다. 이 조센징 새끼, 오냐 오냐 대해 줬더니 제멋대로야. 이 새끼야 일을 그렇게 그르치고도 살겠다고 찾아왔어. 거기서 죽었어야지. 놈을 놓치고도 네가 사람이야. 조센징놈은 이래서 안돼. 분을 못이겨 벌떡 일어선 그는 벽에 걸린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내가 네놈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배신해. 칼집을 빠져 나온 칼이 피가 흐르는 얼굴 앞에서 어른 거리는 것을 휴의는 느꼈다. 그 순간 휴의는 두렵기 보다는 되레 홀가분했다. 죽고 싶었다. 그 칼로 목이 댕갈 잘려 죽는다면 그것이 충성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휴의는 죽여달라고 한 마디했다. 죽여 주십시오. 정말 죽을 각오였다. 겁에 질렸다기 보다는 잘못을 달게 받겠다는 각오가 부동자세에서 목을 앞으로 내민 상태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대장이 갑자기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너란 놈은 분명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서 칼을 다시 원래 자리에 놓았다.사태파악을 아직 하지 못한 휴의에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다정한 눈빛을 보였다. 방금전의 성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휴의의 얼굴에 묻은 재를 털고 이마의 상처도 닦은 다음 스스로 붕대를 감아 주었다. 자네, 고생했어. 자네. 내 본심이 아닌 걸 알지. 토벌대장은 휴의를 직책으로 부르지 않고 자네라고 불렀다. 그것에 휴의는 불만이 없었다. 부리는 자와 불리는 자 둘만이 아닌 어떤 비밀스러운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네, 대단해.  어떻게 그자의 소재를 알았어. 묻는 말에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아무리 칭찬을 해도 모자라다는 듯한 저음이 휴의의 가슴 언저리에 와서 박혔다. 휴의는 자초지정을 말하면서 부족한 자신을 저주했다.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다 들은 토벌대장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됐어 그 정도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향을 꺼내들었다. 니, 대구 가보았제. 참 좋은 곳인 기라. 그가 그쪽 지방 사투리를 꺼내 들었다. 왜 그랬을까. 휴의는 토벌대장의 그 때 그 심정을 헤어려 보았다. 그도 조선인이다. 나도 조선인이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는 얼마나 험난한 여정을 버텨냈을까. 내가 그의 길을 가고 있다. 내 모습에는 토벌대장은 병아리 시절의 자신을 보았다. 내가 그곳 출신 아닌교. 니는? 전 충남 보령이구만유. 휴의가 농담으로 받았다. 그가 웃었다.  베포한번 크구나. 내 앞에서 농담을 받다니. 자, 이리와라. 그가 가까이온 휴의의 어깨를 툭툭쳤다. 난 너같은 조센징을 원했어. 내 후계자로 너를 삼을거야. 토벌대장이 괜찮느냐고 의사를 묻듯이 휴의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휴의가 바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가 뭐야 이놈아, 하이 하고 외쳐야지. 하이. 휴의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잘해보자. 우리 조센징끼리. 밖으로 나온 휴의는 그가 잡은 손의 온기를 느끼면서 손을 입쪽으로 가져갔다. 날 인정해 주는구나. 역시 조선사람은 달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내가 못할게 뭐가 있어. 그런 심정으로 휴의는 하루종일 붕뜬 기분이었다. 

일본은 두 갈래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일진은 순수 본토인으로 구성했고 이진은 바로 대구 출신의 토벌대장이 맡았다. 두 조직을 경쟁시키면서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 전략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토벌대장은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그래서 자부심이 대단했고 진짜 일본인보다 우월감을 가졌다. 생도시절 그는 생도내에서도 실력이 뛰어났다.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조선인으로의 자부심이라기보다는 일본인으로 그랬다. 난 일본인이야. 그는 잠잘 때도 이 말을 중얼거렸다. 졸업식날 그는  생도 가운데 으뜸으로 뽑여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대표로 썼다. 조선에서는 그를 크게 보도했다. 조선인이 일본 육사에서 우등을 차지한 뉴스거리였다. 지금 그의 책상앞에 걸려 있는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다는 신문기사는 그때 나온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부적처럼 아꼈다.  그래서 일까. 악수한 손에 끈적한 피가 묻어 있는 느낌을 휴의는 받았다. 

그의 절반만이라도 하자.휴의는 다짐했다. 출정을 떠날 때는 토벌대장처럼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다는 각오를 새겼고 덴노 반자이를 만세 삼창으로 불렀다. 그런날은 일이 더 잘풀렸다. 아무도 그의 충성심과 노력을 따를 수 없었다면 이제는 아냐. 내가 있잖아. 비록 일본 육사는 못나왔지만 그곳 출신의 제일 부하게 됐어. 스승을 뛰어 넘어야지. 그러고 말거야. 승부욕이 발동했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스럽다는 토벌대장을 뛰어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어려운 일을 휴의가 해내려고 한다. 가상하지 않은가. 그 가상한 일이 독립군을 때려 잡는 일이다. 어쩌나, 이제 우리 독립군은 지략과 열성으로 가득찬 휴의와 상대해야 한다. 더구나 그 상관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대구 출신의 토벌대장이 아니냐. 이런 소문은 만주의 조선독립군들 사이에 공포로 다가왔다. 난 네가 한 일로 평가한다. 누구의 추천이나 말은 안통해. 휴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한 행동의 결과로 평가받는 것. 그것이 온전한 것이다. 토벌대장은 여러모로 휴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넌 조센징이 할 수 있는 일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이다. 토벌대장의 이 말을 휴의는 또박또박 적어 수첩에 끼어 넣었다. 어려울 때면 힘들면 일이 잘 안풀리면 그는 그것을 꺼내 읽었다. 그 무렵 휴의는 담배를 배웠다. 그것 역시 토벌대장 때문이었다. 그는 애연가였다. 언제나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다. 너도 피워. 고급군인이면 나름대로 위엄이 있어야지. 언제까지 병아리 신세를 져서는 안 되지. 받아라. 그가 서랍을 열고 담배 한개비를 꺼내 던졌다. 얼떨결에 휴의는 그것을 받았다. 다행히 담배는 땅에 떨어지기 직전 휴의의 손에 가까스로 걸쳤다. 잘 받는군. 그래 순발력이 있어야지. 피워. 그가 말했다. 그러나 불이 없었다. 이리와. 그가 휴의의 손에 있는 당배를 받아 자신의 담대불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길게 빨았다. 그것을 휴의에게 주었다. 더러운 놈. 휴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입으로 빤 것을 나에게 준다. 에잇. 그러나 휴의는 겉으로는 황공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담배 피우는 법까지 알려 달라고는 않겠지. 맞담배다. 괜찮아. 토벌대장이 거듭 권했다. 휴의는 마지 못해 하면서 처음으로 담매 맛을 봤다. 

괜찮아, 어제 일은 잊어. 오늘 실수를 내일은 하지마. 단독으로 치고 나가지도 말고. 앞으로 수족처럼 부릴 부하 한 명을 붙여줄게. 수족을 붙여 준다는 말은 그것이 없어서 독립군을 체포하지 못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것은 휴의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네, 책임이 아니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나라도 그랬다고. 이것은 그와 내가 동급이라는 말인가. 돈이 필요할 거야. 그는 그 말을 끝내고 서랍속에서 꺼낸 한 뭉치의 지폐를 휴의에게 주었다. 그것은 토벌대장이 주는 개인돈이었다. 가서 쓰고 와. 기분 좀 풀어. 사내 자식이 주눅든 꼴을 나는 못봐.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는 듯이 토벌대장은 그런 식으로 휴의를 대했다. 네가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마. 휴의는 감격에 겨워하면서 토벌대장실을 나왔다. 부대장은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열정과 강한 충성심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저 놈은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 써먹어야지. 넌 이제부터 나의 노예야. 난 노예를 소유한 몸이고. 그것도 튼튼하고 똑똑한 노예를. 

휴의는 상관의 칭찬을 받자 힘이났다. 혼이 나고 나서 받은 칭찬은 그에게 보약이됐고 비로소 새알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어둡고 껌껌한 굴 속을 나왔다. 나는 갇힌 몸이 아니야. 봐, 날개를 달았다고. 그는 알 속의 노른자가 더는 아니었다. 세상 밖으로 나와 젖은 날개를 말리고 비상하는 한 마리의 맹금류였다. 날아야지. 높은 곳에서 날아서 달아나는 늑대를 발톱으로 찍을 거야. 먼저 눈을 빼먹어야지. 휴의는 만주 하늘을 나르는 독수리였고 조선독립군은 쫒기는 굶주린 늑대였다. 싸움의 결과는. 대볼 필요없다. 이 정도면 답은 나와 있는 것 아닌가. 기껏해야 수 백 명 정도에 불과한 독립군을 전멸시키지 못하는 것은 대일본 제국의 수치였다. 때려 잡아야지. 빠를 수록 좋아. 지금이 어느 때라고. 조선인이 할 일은 항일이 아니라 절대복종과 충성으로 가득 차는 일이야. 삼천만 동포가 수그리고 있는데 겨우 수백명이 아니라고 준동을 해. 민족반역자들이 따로 없어. 때려잡자 독립군 무찌르자 조선 독립군. 휴의는 코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군홧발로 박자를 맞추듯이 흥얼 거렸다. 반역하는 무리들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말로 타이를 수 없다. 오직 소탕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 탕탕. 그는 토벌대장이 직접 수여한 오연발 리벌버 권총을 마치 카우보이가 꺼내서 발사하듯이 권총집에서 꺼내 겨냥했다. 내게 남은 것이 뭐더라. 

그렇지. 토벌대장에 진 신세를 갚아야지. 은혜를 갚는 것은 좋은 일이야. 그런 의무감에 휴의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토벌대장의 평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평생동안 배운 것보다 오늘 이 시간 배운 것이 훨씬 더 많고 깊었다. 꼭 필요한 곳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득안고 밖으로 나온 그는 받은 돈을 쓰기 위해 술집을 가거나 여자를 찾지 않았다. 이 돈이 어떤 돈이야. 이걸 내가 마음대로 쓸수 있나. 거기 가보자. 
내 실수로 놓친 음식점 주변을 배회하는 거지. 누가 알아. 어떤 정보를 얻을 지. 아냐, 그 집은 아냐. 그 옆의 음식점으로 들어가자. 그러다가 그는 이곳도 아니라는 듯이 나와서 골목을 돌아 다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에는 요행이 따라야 해. 그는 음식점을 나왔다 여기 사람이 오지 않았으냐고 물은 다음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다시 나오기를 반복 한 후 편한 마음으로 시내를 걸었다. 걸으면서도 그의 눈은 놓친 독립군이 자신의 옆에서 혹은 앞에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심한 관찰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올려다 본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구나. 그는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한 마리 독수리였다. 저 꼭대기에 내가 있어. 선회 비행을 하면서 먹이를 노리다 이때다 싶으면 맹렬한 속도로 내리 꽂혀. 어떤 짐승도 나를 피할 수 없어. 내 눈에 걸려들면 오직 죽음만이 있는 거야. 이 자들 가운데 분명 불량한 자들이 있을거야. 다 잡아 족칠 수는 없고. 자 오늘 기분 좋게 나왔으니 한 건 해야겠는데. 대일본제국 만세. 휴의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만세를 부르고 팔을 휘두르며 만주 시내를 이리 저리 돌았다. 그런 시간이 지날수록 저축해 놓은 재산처럼 그의 신념은 날로 불어났다. 그는 점점 더 강하고 독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더 높은 곳에 오르면 안 보이는 곳도 보이겠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높은 곳이 어떤 곳인지 올라와 본 자만 이 느끼는 충만감. 아랫것들은 모를 거야. 이 의욕, 넘치는 의욕의 끝이 어디인지 휴의는 알지 못했다. 손쉬운 일을 하면서 쉽게 승리를 따오지는 않겠다. 그런일은 자신이 아니어도 할 사람이 충분히 많다. 휴의의 발걸음은 늑대를 낚아챈 독수리의 발톱처럼 강인하게 땅을 박차고 나갔다. 

휴의를 내보낸 후 토벌대장은 이번 부하의 단독 작전은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 일부 성공이라는 보고서를 상부에 보냈다. 잘하면 원점을 타격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고 부연설명했다. 토벌대장은 토씨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쓴 내용을 여러번 살폈다. 결정적인 단어는 없었다. 자신도 빠져 나갈 구멍이 있어야 한다. 일부성공이니 잘하면 같은 표현은 이런 고심끝에 나왔다. 쪽바리 놈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나도 살아야지. 토벌대장은 다 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다른 하나를 꺼내 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직 가슴속에서만 맴돌았다. 혹시 아는가. 날 미행하기 위해 첩자가 있는지. 도청당하고 있을지도 몰라. 토벌대장은 과연 그 직책에 맞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 대장이라고는 하지만 나를 감시하는 놈들은 있어. 그들에게 책 잡힐 일은 하지 말아야지. 그는 후하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자 감시에서 오는 주눅든 마음이 사라지고 휴의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내 후계자로 삼을만한 놈이야. 잘 키워서 필요할 때 써먹자. 내가 자네라고 불러줬을 때 그 놈 표정을 잘 봤어. 아주 황공해서 죽을 지경이거든. 내가 그 마음 알지. 상관이 인정해 줄때 남자는 그 순간 죽을 수도 있는 거야. 그 놈은 그  때 내가 가졌던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어. 좀 더 밀고 나갈 걸 그랬나. 확실한 충성서약을 받을 걸 그랬어. 혈서를 썼겠지. 그래 다음 기회가 오면 한 번 떠 보자고. 토벌대장은 그를 이용해 공을 세우고 싶었다. 믿을 만한 놈이야. 만주 벌판에서 휴의가 굴러오다니. 이건 넝쿨 째 온 호박이야 호박이라고. 날카로운 눈이 그 순간 얇게 펴졌고 웃음기가 얼굴에 슬적 비쳤다. 그러나 그는 타고나기를 냉혈한으로 타고났다. 그래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데는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싸늘한 표정, 시체와 같은 감정없는 눈매. 그가 휴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계산했다. 나와 어울릴만 놈이야. 그런 놈을 얻다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어. 토벌작전이 끝나면 난 장군이 될 거야. 조센징 최초의 일본 육군에서 별을 다는 거지. 그러면 왜놈들도 함부로 못하겠지. 난 누가 날 함부로 대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성격이 아냐. 토벌대장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해온 장군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아까와 같은 엷은 미소가 올라왔다가 역시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런 때는 같은 말을 반복해도 돼. 장군. 하하하. 

내가 가는 길에 휴의는 도움이 될거야. 자네, 그거 알아. 내가 일본 육군의 장군이 된다고. 이조센징이 말야.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는 알아도 상관없는 비밀을 마구 털어 놓을거야. 덫을 놓는거지. 넌 내 손아귀에서 못벗어나. 죽기전에는. 그 때 까지 날 위해서 살아다오. 넌 조선놈이 아닌 일본놈으로. 우린 같은 일본놈이고 일본을 위하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태어났어. 말 안해도 안다고. 그렇지, 넌 어린애가 아냐. 넌 날 상관이 아닌 아버지로 모셔야 해.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을 수는 없어도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는 거지. 자네, 자네 어디있나. 토벌대장은 자네가 아직도 안에 있는지 찾기 위해 눈을 두리번 거렸다. 의도적으로 그는 감정을 계속해서 끌어 올렸다. 넌 내 아들이야. 임마. 휴의. 이놈도 괜찮아. 의자가 들어가잖아. 의로운 놈. 의 다음에는 뭐겠어. 죽음이지. 의로운 죽음. 하하하. 그는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 들였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연기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천천히 식도를 타고 콧구멍으로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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