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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의 생애에 관한 책을 몇 줄 읽다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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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의 생애에 관한 책을 몇 줄 읽다 그만두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6.2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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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나 점례는 오래 그러지 못했다. 몇 줄 읽다 그만두었던 것이다. 눈은 글자를 따라 갔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흥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흥미로운 것이 그녀의 마음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전선의 유마는 안전할까. 그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만주를 떠나 태평양 어딘가로 떠난다고 했다. 굳이 더 힘든 곳으로 가는 이유를 그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긴 했다. 그런 비슷한 말을. 그냥, 전쟁을 확실히 느끼고 싶을 뿐이야. 일선에서 한번 붙어보는 것지. 이 정도였다. 그는 병사가 아닌 것에 대해 조금 심심하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 못하는 대장 계급을 보며 내게 총은 있느나 쓸모가 없어. 사용할 일이 없거든. 더구나 여긴 후방이야 후방. 전방 사황이 궁금해. 지금쯤 그는 전방에 있을 것이다. 떠나올 때 이미 이동 날짜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날짜라는 것은 그가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숙고해서 정한 것을 이유없이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총을 들고 직접 싸우지는 않겠지. 대장이 그러는 경우는 없어. 여자라도 나는 그 정도는 알아. 그래도 안전이 걱정됐다. 그가 없는 내 삶은 앞으로 나가갈수 없다. 점례는 불확실한 삶 가운데 하나의 확실한 사실을 인정했다. 

하루가 지났을 뿐 인데 점례는 한 달이 지난 것 같은 세월을 느꼈다. 유마가 어떻게 생겼더라. 만나면 알아 보겠지만 얼굴이 안 떠올라. 그래, 군복. 군복을 떠올리면 그가 살아서 다가와. 점례는 숙소에 와서도 군복을 벗지 않고 그대로 생활하는 유마를 떠올렸다. 손으로 잡으면 잡을 듯이 가까이 다가온 유마. 그가 말했었다. 여기서는 이제 같이 있을 수 없어. 그래서 널 보내는 거야. 그러니 경성으로 가서 나를 기다려. 어쩌면 나도 곧 갈지도 몰라. 늦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어디에 방접이 찍혀 있을까. 곧인지 아니면 늦는 것인지. 점례는 아련한 그 말을 귓등에 남겨둔채 글자 대신 책갈피 속에 있는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얼굴에 있는 눈과 차례로 마주치면서 아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빌었다. 당신 아들이 전쟁터에 있어요. 살아서 내곁에 오게 해달라고 빌어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알아서 그러겠지만 제 마음을 실어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점례는 손을 앞으로 모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마음의 고요가 찾아왔고 이제 혼자가 된 그녀는 혼자된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마가 원하던 것만 하면 됐던 점례는 이제는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알아서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내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자유인가. 자유의 냄새는 이렇게 고요하게 찾아오나 보다. 이런 자유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점례는 구속의 안락함 속에서 기차처럼 긴 자유를 원하고 있는 내면을 인식했다. 원래 자유였던 내가 다시 자유의 몸으로 돌아온 거야. 경성의 가서 기다려.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또다시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버리는 구나. 난 언제나 그랬어. 이젠 어떻하지. 그러나 그 순간의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에서도 버려졌고 유마도 그랬다고 처음에는 생각했으나 그것은 나에게 찾아온 자유지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쓰다가 실증이 나서 누가 버려도 좋을 그런 물건이 아니다. 가도 좋다고 말한 주인을 원망하는 노예가 나일 수는 없다. 위태롭게 홀로 떠 있다고 해도 누군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직 내가 가야할 길을 정확히 모르지만 점례는 자신감이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잘 될 거야. 내가 가야 할 방향은 차차 알게 될거야. 그러니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지 말자. 알았지, 점례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거듭했다. 어디로 떠밀려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도착지가 어디든 그녀는 혼자서 닥쳐올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했다.  그것이 무겁든 가볍든 말이다. 헤쳐나가야 하는 숲길이 무거운 돌과 무서운 가시 천지라해도. 그것 역시 내 몫이야. 내가 감당해야 해. 나 대신 누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없던 오기가 갑자기 생겼다. 노가 없으면 손으로 저어 나가면 된다는 그런 식의 오기말이다. 유마는 경성에 가면 삼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것은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전적으로 삼촌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도움을 주면 받되 스스로 뿌리내리지 못하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점례는 알았다. 이쯤되면 점례의 생존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겪은 것이 엄청한 사람에게는 이런 단단한 각오가 생기는 셈이다.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닌 것이니 쉽게 잃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거처를 마련해야지. 유마는 삼촌이 그것도 알아서 한다고 했지만 한 지붕밑에서 살 수는 없을거야. 눈치밥 먹기 싫거든. 난 독립인간이고 자유인이야. 조선은 또 내 고향 아닌감. 무슨일을 하든 내 한몸 호구지책은 못하겠어? 점례는 무슨 일이든 이라는 말을 상기할 때 몸을 조금 떨었다. 그것은 무의적인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아냐, 그 말은 취소할게. 난 먹고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지 않을 거야. 한가지는 예외야. 알지. 난 알아. 그 무슨일이 무슨일인지. 점례는 다리를 오무리고 손을 꼭 쥐었다. 그림을 그릴거야. 그게 날 풀어준 유마의 진짜 이유일 거야. 그림. 내게 그런 소질이 없었다면 내가 경성행 기차에 오를 수 없었을 거야. 여러 어려움과 자신에게 닥칠 불리한 여건을 감수하면서 까지 유마가 내게 베푼 호의는 바로 그림이야.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우린 그것말고 신뢰도 있어. 그러나 신뢰의 바탕은 내 그림 솜씨야. 점례는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이렇게 정리했다. 그림을 그리는 환경이 조성되면 게을리 하지 않겠다. 그럴 시간이 없어. 게을러질 시간이 없다고. 그녀는 다시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게 남자같은 결심이 계속 그녀를 압박했다. 다음 질문은. 점례는 질문하고 답하면서 조만간 닥쳐올 미래를 대비했다. 삼촌은 나를 반겨줄까. 환하게 웃어줄까. 서천 장터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온 아버지를 향해 온 식구가 달려들듯이 그렇게 환영해 줄까. 

송아지, 송아지 얼굴 송아지아닌 누렁 송아지. 송아지는 자라서 암컷이 됐고 새끼를 낳았다. 그 새끼를 끼우 내다 팔기를 거듭하면서 아버지는 논을, 기어이 논 서너마지기를 동네 앞에 장만했다. 그것은 부자로 가는 길은 아니었으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오로지 그 논은 식구들을 위한 것이었다. 소작을 떼일 염려가 없는 우리집 논이었고 점례는 학교를 오가다가 저기가 우리논이야 하고 언제나 그쪽을 바라 보면서 말했었다. 송아지. 그 송아지가 새끼를 낳고 새끼가 또 새기를 낳고. 그래, 집걱정은 말자.아버지는 식구를 굶기지는 않아. 엄마도 해프지 않으니 살거야. 그러니 집걱정은 말고 내 걱정만 하자. 지금은 내 걱정이 집 걱정보다 앞서야 해. 송아지의 작은 눈망울. 소똥의 텁텁한 냄새. 팔려 나갈 때 눈물 흘리던 엄마소. 송아지는 그런 엄마를 차마 떠나 보내지 못해 우리안을 마치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송아지는 잊자. 장날이다. 오일장이다. 엄마가 천웅 오일 장에 가서 옷감 한 벌과 자수용 실을 사 왔을 때 짓던 자신의 웃음을 점례는 기억해 냈다. 내가 웃었지. 크게 웃었단 말이야. 정말로 기뻤고 그것은 행복이었다. 그런 행복을 삼촌을 통해 다시 받을 수 있을까. 거처는 인사동 근처가 되겠지. 구한 거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시 오라고 삼촌은 또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배려해 줄까. 아니면 집이 크고 빈 공간이 많으니 여기서 살라고 선뜻 인정을 베풀까. 내 집처럼 사용하라는 삼촌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화장대도 사주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좋다고 삼촌은 당연히 해야 할 말이라는 듯이 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작고 아담한 숙모 또한 그렇게 하라고 거든다. 아가씨, 걱정마. 돈은 얼마든지 있어.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바꿔. 점례는 고개를 젓는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과분하지요. 저에게는 이것도. 

그녀는 한꺼번에 많이 먹어 부른 배를 가볍게 치면서 더는 먹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자신의 겸손을 미리 체험했다. 점례는 어느 순간에도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언제든지 그들에게 매달릴 각오가 되 있었다. 그러라고 유마가 시켰어. 삼촌에게 의지하라고. 난 그럴거야. 조선이 고향땅이라고 해도 대명천지에 날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없지. 없어. 그곳은 외국과 마찬가지야. 만주의 숲속이야. 그러니 삼촌을 일단 기대하자. 그렇다고 전적으로는 말고. 기대가 크면 실망이 커. 그 중단 정도면 좋겠네. 그나저나 삼촌의 그림 솜씨는 얼마나 될까. 그림을 보는 안목은. 삼촌은 장사꾼이라고 했어.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고. 또 일부는 일본으로 가져 간다고도 했어. 유내 그림도 거래가 될까. 비싼 갑에 팔릴까. 일단 배워야지. 안목을 키워야 하고. 그러면 기회가 올거야. 맞아. 돈. 생활비가 필요하겠지. 어쩐다. 유마가 준 돈은 아껴도 두어 달 후면 바닥이 날거야. 벌어야지. 내가 벌거야. 신세를 질 수 없어. 신세는 나와 어울리지 않아. 빌리는 것은 내 체질이 아냐. 밑그림을 그릴 연필, 도화지, 칼, 물감, 붓. 다 돈이야. 그건 내것으로 할 거야. 화가의 자존심이지. 그래 그것도 두고보자. 그래도 생각이라는 것은 해두어야지. 아무런 생각없이 맞닥트리면 당황할거야. 그러면 실수할 테고. 삼촌은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하겠지. 그래선 안돼. 난 유마가 추천한 사람이라고. 당연히 보증이 된거야. 그러니 그러지 말아야지. 

일단 기댈 언덕은 마련됐으니 그것으로 족해.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다  이런 여유 때문이야. 자연히 뒤따라오는 그런 두려움. 그런 것 없이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는 어렵지. 오, 그래. 나에겐 또다른 선탟지가 있지. 여차하면 조선청년이 준 다른 곳으로 가보지 뭐. 그 청년은 그 주소에 가서 나를 대면 큰 도움은 아니어도 임시방편으로는 써줄 수 있다고 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희망을 줬어. 정 안되면. 그런 단서를 달았으나 점례는 거기까지 가서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유마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거기다 자신도 위험한 일을 하는 청년처럼 위험한 일에 엮어들까 하는 조심성이 발동했다. 조선청년을 제외하자 이번에는 사진 속의 유마 아버지가 떠올랐다. 

일본에 있는 유력 정치가인 유마 부친 또한 든든한 버팀목이 아닌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들의 눈에 드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점례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유마 호사카를 위해 마음만은 같이 있을 때 보다 더 가까이 있기 위해 여러번 그를 위해  살겠다고 내 삶은 당신의 것이라고 그러니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을 거듭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한 보답이다. 그와 함께 소비했던 다정했던 순간들에 대한 감사였다. 검은 머리 짐승은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가끔 있다. 그러나 점례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그를 배신할 수 있을까. 조선에 있다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헌신짝 버리듯이 유마를 잊을수는 없다.  점례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마구 왔다갔다 했으나 유마에 대한 각오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 지금은 비록 장마철의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지만 다잡을 날이 올거야. 나는 나의 예감을 믿어.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 만큼은 순전히 그의 것이지. 악착같이 일하고 밤새워 배우겠다. 한순간도 빈둥거리지 않을 자신감으로 점례는 뭉쳐 있었다. 군인처럼 철저하게 무장해서 크게 성공하는 조선 화가가 되겠다. 어느 순간 그녀는 홀로 우뚝섰다. 그래서 혼자였을 때 점례는 되레 당당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다음 역에 내려볼까. 이것저것 구경해 볼까. 역 주변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적당한 가격에 흥정한다. 그녀는 방금 사서 손에 든 것을 흔들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호두과자. 그건 천안의 명물인데. 여긴 만주야, 만주. 아직 만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조선땅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좀 더 걸려. 그러니 손에 든 것은 호두과자가 아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두부 한 모. 그걸 조선간장에 찍어 먹자. 맛이 있을 거야. 점례는 군침을 흘렸다. 내린 김에 근처에서 하룻밤 묵어 갈까. 경치가 좋은 여관에 들어 묵고 간다. 그리고 구경하다가, 다시 기차를 타는 거지. 그래도 되는 거야. 암, 되고 말고. 이런 점례야 정신차려. 정신 차리라고. 점례는 거기서 앞으로만 나가는 생각을 멈추었다.

행복하던 점례가 샛길로 빠진 생각을 갑자기 바꾼 것은 헤어진 조선 청년이 눈 앞을 가로막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점례는 청년을 보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유마를 걱정하던 그녀는 조선 청년의 앞길에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가 산을 넘을 수 있을까. 산 너머에는 그가 원하는 세상이 있을까. 그 너머에 혹시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보러 그가 달려올 수 있을까.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쓰며 청년이 나를 부르고 있다.그녀는 마주 달려나가다가 멈칫했다. 아니다. 그를 만나는 것은 유마를 배신하는 것이다. 배신. 그럴 순 없지. 그가 달려와도 나는 그대로 있을 거야. 산을 넘지 못하고 그는 죽어. 그는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어. 내가 은혜를 베푼 거야. 그러니 난 조선청년에게 빚이 없어. 그러니 그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그녀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느린 속도로 가는 기차는 그녀에게 무엇을 상상하든 자유라고 일깨워 주고 있었으나 가끔 점례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생각의 자유는 다른 생각으로 멈출 때가 많았고 점례는 그것에 불만이 없었다.

어려운 시기는 끝났고 지금은 만족하는데 또다른 어려움에 봉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자는 것이 점례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 암 옳고 말고. 점례는 이를 들러내지 않고 얼굴 표정을 감추고는 속으로만 웃음을 지었다. 난 좋아. 점점 좋아지고 있어. 최악의 상황은 지났어. 어떤 것이 닥쳐오든 난 견뎌내고 이겨낼 거야. 그런 희망의 마음이 점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마침 계절도 점례를 따라오고 있다. 봄을 맞는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의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었고 초원은 회색의 때를 다 벗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차 안은 가득한 사람들이 내 뿜은 열기로 늘 후끈거렸다. 

이제는 춥기는커녕 되레 더울 지경이었다. 그럴 때는 창밖을 보면서 몸을 식히는 것이 좋았다. 먼산의 흰눈을 보면 덥다가도 오싹하는 한기가 느껴졌다. 마음은 이런 거야. 점례는 마음에 따라 사람몸도 변하는 것을 알았다. 몸보다 마음이 중요한 거지. 덥다가도 추운 건 마음이 변하기 때문이야. 점례는 하나 하나 세상의 이치를 깨닫아 가면서 알고 싶은 것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느꼈다. 멀리 보이는 풍경은 한가했다. 간혹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초가를 볼 때면 그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식사하는 단란한 가족들이 슬쩍슬쩍 눈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런 행복이 앞으로도 죽 이어지길. 그녀는 바랐다. 저런 집에는 정이 있어. 밥한숟가락에도 그게 담겨 있어. 기차는 계속 달렸다. 의식적으로 남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실재로 남으로 가는지 북으로 가는지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길고 긴 여행이었다. 기차는 때가 되면 경적음을 울리며 역마다 섰고 선 다음에는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멈춘다음 빨리 가지 않는 것을 탓했으나 이제는 얼마간의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그래서 기다리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때가 되면 떠나. 그러니 조급해 하지 말자고. 그런다고 기차가 내 마음같이 움직여주지 않아. 기차의 마음을 내가 어쩌겠어. 

멈춘 기차로 일경들은 간혹 올라탔으나 만주에서와 같은 심한 검문은 없었다. 대개는 한 번 눈으로 훑어보고는 그냥 내렸다. 그런 것이 습관이 되자 이제는 순사를 보고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괜히 올라와 시간 낭비만 했다는 표정이 그들의 뒷모습에 고스란히 찍힐때면 이런 구경거리가 더는 없었으면 싶기도 했다. 검문 때문에 늦어 지는군. 이유는 많았다. 석탄을 중간에 받아 오기도 하고 어떤 귀한 손님이 기다리라고 하면 연락을 받은 기차는 기다렸다. 점례는 기차를 마음대로 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유마도 그럴 것이다. 그가 명령하면 기차는 멈추고 가라면 가겠지. 하지만 난 그게 좋아 보이지 않아. 태생이 높은 곳을 싫어하나봐. 너무 낮은 것도 아니고 적당히 높은 곳. 그곳이 점례가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다시 일경들이 올라섰다. 승객들은 완장 찬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는 그들이 내리면 이내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각자 떠들던 대화에 열중했다. 그들도 이런 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느리다고 불평하던 기차는 어느 날 평양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습관처럼 일경들이 올라왔고 별다른 잡음없이 내려서는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 왔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말하고 걷고 돌아서는 모습도 그랬다. 완용이 의심스러웠다. 점례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확인하기 위해 창가에 눈을 바짝 기댔다. 틀림없다는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완용이 맞는 것 같다. 저 걸음걸이. 젊은이 답지 않은 조금 굽은 듯한 어깨. 같은 것이 아니라 완용이었다. 도완용. 맞아. 그다. 그가 아니면 점례가 본 듯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얼굴을 보여 주면서 내가 완용이라고 알아 보겠니 하고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됐다. 어디 가겠니. 네 본 모습이. 아무리 세월이 널 갉아 먹었어도 넌 완용을 벗어나지 못해. 경찰이 됐군. 순사 심부름 하더니 이제 완장을 찼어. 그 완장도 널 감출수는 없어. 꼭꼭 숨어서 순사질이나 하지 여기까지 왜 왔어. 시골 마을 경찰이 평양까지 오다니 출세했네. 죽마을에 인재가 났어. 그러나 점례는 환영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완용. 점례는 그가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는지 궁금했다. 설마 나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감사함을 표하려고 왔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그냥 너대로 살면 그게 고마운 거야. 난 너에게 빚진 게 없어. 넌 그런지 몰라도. 넌 동네방네 떠들면서 마을로 왔어. 말탄 순사를 안내하려고. 난 그때 여순네 집에 놀러 갔었지. 네가 순사를 데리고 왔던 그날을 왜 잊겠어.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인가 집을 떠났어. 명목은 돈을 벌러 일본에 간다는 것이었지만 어땠는 줄 알아. 갈기 갈기 찢어 죽일 놈. 저놈이 여순과 나를 순사에게 밀고했어. 처녀 두 명이 있다고. 순사의 박차 소리에 오금을 저렸던 그 순간. 점례는 그 생각을 하면서 다리를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무렸다. 생생해. 이불 속에서 발을 꼬면서 긴장에서 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었지.

완용이 일제 경찰이 됐구나. 제법 티가 나는군. 완장이 어울려. 점례는 순간 자신의 길을 찾아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완용이 그 목적을 이룬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게 순사가 되고 싶어하더니. 결국 해냈군. 그래 너는 너의 길을 갔구나. 성공했어. 죽마을 동향이 순사라니. 일본인 경찰에서 느꼈던 불안함이 조선인 경찰이라는 데에 이르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래, 그라면 조선인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겠지. 그럴거야. 그게 사람이지. 점례에게 조선인은 모두 같은 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는 그동안의 원한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곳에 있을리 없다. 만주의 막사에서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도 없을 것이고. 같은 편 맞나. 같이 편이 그럴 수 있나. 그는 알았을 거야. 여순과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그렇다면. 그는 같은 편일 수 없어. 적이다. 절례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나의 적이며 우리의 적이다. 그래 적이 아니라면 말해봐. 

내가 치를 떨며 평생 기억속에 있어야할 치욕이 생겨난 이유를. 말해보라고. 머리 긁지마, 비듬 떨어진다. 왜 할 말이 없지. 너도 양심이 있다면. 그러나 지금 결과가 좋다. 완용이 그걸 노린다. 그 점을 파고 든다. 결과가 좋으니 과정은 어떻든 좋다는 건가. 내가 보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여전히 죽마을에서 썩고 있을거야. 완용이 비웃는다. 그래 그것은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럴 가능성이 크니. 하지만 너는 나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어. 너의 선택은 나에게 나쁜 것이었어.  좋은 것이 아니었고. 점례는 또다시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버렸다. 나쁜 쪽으로 몰고가자 속상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했다. 그래, 잊자. 과거만 없다면 지금은 나쁘지 않다. 나는 지금 그때와 비교해 얼마나 성장했는가. 일본어를 조선말처럼 하고 그림도 그린다. 책도 많이 읽었다. 그래, 완용은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그곳으로 우릴 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완용이 나빠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아. 그런 곳으로 자신과 여순을. 설마. 알았더라면 미리 귀띔이라도 했을거야. 

착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본에 가서 돈 벌어 오라고 호의를 베풀었는데 비난이라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거야. 그나저나 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 왜 눈앞에 나타나서 내 속을 긁는 거지. 그런 마음이 없었고 알지 못했다고 해서 내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는 않아. 그런 것도 모르고 떠나기 전날 고맙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아버님은 아들 같은 너에게 고개를 숙였어. 선택받은 사람이 하필 자신의 딸이었기 때문이었지. 그래, 선택은 네가 한거야. 난 선택을 받았고. 싫어. 생각하기 싫어. 자수를 뜬 천으로 내가 스스로 내 목을 묶었어. 그때는 왜 너를 저주하지 못했지. 죽을 때는 다 용서하는 거라서. 그런 마음이었겠지. 아마도. 몰랐어. 그때는. 그런 복잡한 것은. 다만 너무 힘들고 감당할 수 없어서 그런 길을 택한 것 뿐이야. 다른 건 없었어. 지금 같으면 실행하기 전에 많은 생각을 했겠지. 난 성숙했거든. 나도 내가 너무 커버린 것을 알아. 너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 조선인 티를 내지 마. 조선인이라고 더 날뛰지 말라는 말이야. 왜경의 횡포를 막아달라는 부탁같은 건 안해. 넌 그럴 마음도 그럴 의사도 없을거야. 돌아보지. 네 눈을 보고 싶지 않아. 음흉한 놈. 그래도 인사라도 나눠 볼까. 뒤따라가 이름이나 불러볼까. 아는 체를 하면서 해냈구나, 마침내 오빠가 해낸 거야. 하고 추어 올려 볼까. 난 경성으로 가. 만주에서 화가를 하다 인사동에 볼 일이 있어서 가는 중이야. 경성에 오면 들러. 맛있는 거 사줄게. 수많은 말들이 점례의 가슴속에서 오르락 내리락 했다. 

점례가 이렇게 멈칫거리는 순간 기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긴 경적음을 올리면서 앞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잘됐네. 어차피 내릴 생각이 없었는데. 기차 핑계를 대는 거지 뭐. 점례는 그런 마음으로 멀어져 가는 완용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완용에 대한 생각은 바로 휴의로 이어졌다. 완용이라면 휴의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맞아. 아까는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랬더라면 내렸을지도 몰라. 휴의 오빠는 잘 있지? 연락을 하고. 이렇게 물었다면 완용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도 몰라. 혹은 휴의도 나처럼 경찰이 됐어. 점례는 갑자기 휴의의 소식이 궁금했다. 그는 어디 있을까. 만나면 밤을 새도 할 말이 남아 있을 것이다. 배타는 어부가 됐을까. 여전히 죽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지금이라도 내려볼까. 내려서 불러 세우자. 저기 완용 오빠. 휴의 오빠 소식은 들었어. 지금 어디 있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기차는 출발했으나 아주 느려서 내리자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생각도 마음도 그럴 마음이 없다. 아까라면 모를까. 점례는 다시 자신을 합리화 했다. 난 걸을 수 없어. 걷는다 해도 갓난 아이보다도 더 느려. 완용은 사라졌네. 달아오른 몸이 식고 있어. 휴의 오빠가 나에게 그런 존재였나. 

기차가 더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점례는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면서 다가갔을 지도 모른다. 어깨를 잡기 전에 이렇게 묻겠지. 완용 오빠. 돌아보고 나서 내가 점례인 것을 안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상관치 않겠다. 당황하든 말든 모른 척하든 휴의 오빠는 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완용 오빠, 휴의 오빠는 잘 있지? 입속에서 그 말이 자꾸 맴돌았다. 그러나 계산 착오라고 사람 잘못 봤다고 나는 완용아니라고 완용이 머리를 완강하게 젓고 있다. 이해 할 수 없는 말로 둘러대면서 나는 일본경찰이 아냐, 그런 말을 되풀을 하면서 완용이 점례가 볼 수 없는 구석으로 달려 나갔다. 치사한 놈. 쥐새끼처럼 숨었어. 네가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날 제대로 볼 수 없을 거야. 내 입에서 휴의 오빠가 나오는 순간, 넌 찌그러 지는 거야. 점례는 갈팡질팡했다. 생각의 미로 속으로 완용이 치고 들어오자 점례는 그것을 떨치는 것이 힘에 겨웠다. 

종일 팔리지 않은 만주역의 쌓인 물건처럼 점례는 갑자기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연 깊은 곳으로 자꾸 가라 앉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자기 나라에서 추방된 비참한 인간의 기분으로 점례는 멍하니 눈길을 밖으로 주었다. 평양을 출발한 기차는 목적지인 경성을 향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남으로 남으로 다시 달리니 어느 덧 밤이 지난 지 한 참 이어서 밖은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겼을 때 점례는 깜박 졸았던 눈을 떴다. 개운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잘 자고 난 것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가볍게 허리를 폈고 아차 잊었구나 하면서 동시에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 희미한 불빛 아래서 엽서 크기만한 작은 크기의 노트를 펼치고 초상화를 그려 나갔다. 그런대로 그림이 완성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연필을 잡은 손이 흔들렸다. 그러나 점례는 쓱쓱 대충 대충 그려 나갔다. 어차피 어두워서 그리려고 했던 대상이 틀렸어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례는 마음이 편했다. 날이 밝으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점례는 잡은 연필을 빠르게 혹은 천천히 놀렸다. 그림을 그릴 때 점례는 행복했다. 만족한 마음은 이런 것이다. 밤은 점례의 마음을 이렇게 돌려 놓았다. 완용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다시 점례 앞에 나타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점례는 그를 정말로 깡그리 잊었다. 그를 뒤따라 내리려고 했던 좀 전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아는체 해도 모른 척 할 것은 굳이 나서서 그럴 까닭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너는 마이너스야. 결코 플러스가 되지 못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가 떠나 자리에 유마 호사카 부모의 얼굴이 대신 채웠다. 사진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인자하게 웃던 두 분의 다정한 모습. 그 순간 휴의 또한 완용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조선 청년의 얼굴이 감깐 보였으나 그도 그녀의 의식 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부모님도 사라졌다. 대신 거기에 어머니를 닮은 유마 호사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마가 다가온다. 난 밀쳐 내는 대신 그의 가슴에 손을 댄다. 떨어져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린 이렇게 붙어 있는 거야. 

점례는 거기에서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 그림, 여기선 안돼. 그러자 그릴 마음이 갑자기 떠났던 것이다. 더 그리고 싶은 조금 남은 미련은 아예 없었다. 있었다면 뒤로 미룰 것이다. 갑자기 유마 부모님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기도는 이제 점례의 숨쉬기처럼 습관이 됐다.신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 유마 부모가 지금 순간 신이었고 그녀는 아들을 위해 부모이며 신인 당신들이 그의 안전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두 손을 모았다. 유마 호사카를 살려 주세요. 총알이 비켜가고 파편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그래서 유마가 다치지 않고 온전한 몸으로 나에게 오도록 해주세요. 그녀는 모은 손을 꼭 잡았다. 신의 기도는 어느 새 다짐으로 바뀌었다. 그럴거야. 그는 죽지도 다치지도 않아. 살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경성에서 다시 만나는 거야. 그러나 잠시 후 이런 기도와 다짐도 시들해 졌다. 점례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눈을 감았다.

점례가 평양역에서 본 것은 완용이 맞았다. 그는 점례와 여순이 떠나고 나서 순사가 됐다. 순사 하인에서 정식 부하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2 년이면 충분했다. 순사의 말 고삐를 잡았던 죽마을 하인이 어렷한 일제 순사가 된 것을 죽마을 사람들은 모두 축하했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좋았고 특히 점례와 여순 부모님은 티나게 환영했다. 닭을 잡았고 좋은 옷감을 한 벌 끊어 왔다. 보잘 것 없지만 받아. 이렇게 말하면서 점례 아버지는 순사에게 말을 놓는 것이 잘못됐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여순 아버지도 다를 게 없었다. 딸의 생사여탈권을 완용이 쥐고 있다는 듯이 그에게 납짝 엎드렸다. 여순 아버지는 순사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면서 완용에게 아부했다. 완용은 그런 대우를 마다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죽마을 사람들은 일본인 순사보다는 조선인 순사에 거는 기대가 컸다. 혹시 모를 억울한 누명을 막아주고 부당한 일이 생기면 그게 아니다라면서 속시원히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 더는 이유없이 끌려가서 맞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눈에 띄게 혹은 다른 사람 모르게 완용네 집을 찾아 축하인사를 건네면서 준비한 것을 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자신들에게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완용의 성에는 차지 않을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완용의 눈에 내가 상전이고 너희들은 하인이다라는 마음을 심어줬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내가 순사가 된 것은 너희들을 위한 것이 아냐. 마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순사가 됐다고. 어림없는 수작 하지마. 온갖 수모를 감수하고 일본의 개가 된 것은 나를 위한 거야. 누군가를 잡아들이고 심문하는 것이 내 체질에 맞거든. 호통을 치고 위세를 부리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완용은 순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 시작했다. 상관이 보기에 그는 탁월한 제국주의 순사였다. 

안에서는 굳은일을 도맡아 담당했고 밖에 나와서는 호랑이 두렵지 않을 기세로 민심을 위협했다. 그가 가는 곳은 정말로 호랑이가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이 무서움에 떨었고 일제는 그런 그를 조센징치고는 제법이라고 추어 올렸다. 마을 사람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도 다른 일본인 순사와 다르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되레 일본순사보다 더 악질적으로 나왔다. 무섭게 패고 거침없이 가두었다. 점례아버지도 여순 아버지도 당했다.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트집잡았다. 개망니도 이런 개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그들은 완용을 보고 고개 숙여 인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용은 더 큰 것을 원했다. 자신이 지나갈 때까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차마 그것을 그들은 하지 못했고 그래서 얻어 터졌다. 다짜고짜 이리 오시오 하고는 서 있는 그들을 차례로 쥐먹 쥔 손으로 갈겼던 것이다. 두 아버지는 참을 성 있게 매를 맞았다. 서너 대씩 때리고도 원이 풀리지 않자 완용은 옆차기를 날리기 까지 했다. 그것은 마지막 일격이었다. 두 아버지는 차례로 쓰러졌다. 완용의 이런 패악질은 곧 면에 파다하게 퍼졌다. 순사질을 하지 못할 거라는 수군거림이 있었다. 그러나 지서는 완용을 되레 승진 시켰다. 원하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 하는 그는 일제가 보이게 능력있는 순사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서의 책임자는 그를 눈여겨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재목으로 키워야할 인재로 점찍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주했다. 완용이 왜놈보다 더 심하다고 잔치를 벌인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곧 동정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민심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일본인들 틈에서 버티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수군거렸다. 조선인의 자랑이라고까지 했다. 오죽하면 완용이 그러겠느냐고 우리가 더 좀 조심하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힘앞에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두 아버지는 그런 말에 동조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천웅 읍내는 연일 출병을 모집하고 독려하는 연설로 시끌벅적했다. 휴의도 장터 한 곳에서 서 있었다. 전날 완용이 너도 가보라고 그러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한 말도 작용했다. 넌 애가 왜 그 모양이냐. 뭔가 좀 해봐라. 자식아. 완용이 부하다루듯이 친구인 휴의에게 명령했다. 같잖았으나 휴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이 있고 잘못에 대한 꾸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터는 말 그대로 장터였다.  서둘러 입대해라, 황국신민으로 전선에 나가 승리에 보탬이 되라. 사내 자식이 촌구석이라고 농사짓는 것이 말이 되느냐. 농사일 핑계 대지 말고 전선으로 떠나서 황국 신민의 자존심을 세우라. 대동아공영권에 합세하자.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들이 난무했으나 그곳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싸우러 나가자. 자랑스런 황국신민이여. 집으로 돌아온 휴의는 그 말이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것을 느꼈다. 

가족의 생계 때문에, 자신이 떠나면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지을 인력이 없어 머뭇거리던 휴의는 결심했다. 아버지가 휴의에게 얻어 터졌어도 참았던 그는 입대를 결심했다. 아버지는 그 날 이후 쇠약해졌다. 말도 없고 밥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았어도 그렇게 기쁜지 모를 표정이었다. 휴의는 완용을 용서할 수 없었으나 그에게는 복수할 힘이 없었다. 잠든 사이 몰래 낫으로 쳐 죽이고 도망칠 생각도 했다. 그러면. 우리 가족은. 휴의는 거기서 발목이 잡혔다. 아버지가 그런 건 나 때문이야. 내가 빈둥디니 그 놈이 나 대신 우리 아버지를 팬 거야. 내가 사라져 주마. 네 놈 꼴 보기 싫다. 그렇지 않아도 또래들은 하나 둘씩 전선으로 나갔고 읍내에 남아 있는 청년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휴의는 막차라도 타야 한다는 심정으로 연단에 오른 백발노인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 백발이 된 선생님의 열변에 휴의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겠나로라고 맹세했다. 

소학교 때 교장이었고 지금은 은퇴해 후학들에게 책 대신, 쟁기질 대신에 총을 잡으라고 독려하고 있는 나의 교장 선생님. 가자,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여. 내선일체의 힘을 보여주자. 우리는 자랑스런 황국의 신민이다. 싸워서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자. 백발을 흩날리며 사자후를 토하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심장을 끊게 했고 젊은 피를 뜨겁게 달궜다. 구경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이 모두 마음에 드는 사람인 것처럼 교장은 애정이 듬뿍 담긴 어조로 연단 아래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의 입언저리는 연설에 열중하느라 닦지 못한 침이 소의 거품처럼 뭉쳐서 말을 할 때 마다 보글보글 끓어 올랐다. 그만큼 그도 자신의 말에 감동해 있었다. 군중은 박수로 응답했다. 

마을지주도 연단에 올랐다. 그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애국이라며 자신이 몇 년 만 젊었어도 이 자리에 있지 않고 총을 들고 적과 싸우고 있을 거라며 탁자를 두드렸다. 워낙 큰 소리에 장터의 개들조차 짖기를 멈추고 꼬리만 흔들어댔다. 이런 상황이니 귀를 기울이지 않고 딴청을 부리는 것은 죄가 된다는 듯이 모인 군중들은 서로에게 집중하자고 주의를 주었다. 어떤 이는 너무 집중한 나머지 연단으로 기어 올라 갈 듯이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몸을 떨었다. 한 소리라도 놓치지 말겠다는 숙연함이 군중 사이를 감싸고 돌았다. 지주는 조선의 애국청년들이여, 황국 신민의 역할을 다하라. 지금은 농사짓는 때가 아니다. 책을 들고 허송세월을 보낸다면 조국은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지원서에 서명하라. 여기에 지장을, 붉은 지장을 꾹 눌러라 하면서 종이쪽지를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아니면 누가 대신 써준 것인지 그는 애국과 황국 신민을 강조하면서 싸우러 나가자, 지금이 적기다 라면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그는 자신의 손이 아픈 것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또다시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환호성을 질렀다. 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휴의는 당연히 그래야 하고 더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지주는 연설 막바지에서 자발적으로 영예롭게 가지 않으면 나중에 강제로 끌려 갈 수 있다는 식으로 협박했다. 네 다리로 기어 갈 수만 있다면, 그런 성한 남자라면 당장 전선으로 가라, 꾸물대지 말고 달려가라고 재촉했다.

휴의가 빠져 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는 결심한 것을 털어 놓으려는 듯 얼굴을 굳히고 두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래, 내가 간다. 적들아 숨지 말고 나타나라. 내가 한 방에 다 쓸어주마. 자랑스런 나는 황국의 군인이다. 휴의는 그날 저녁 완용과 마주 앉았다. 한 시간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린 끝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완용은 휴의를 보고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바빠 너를 만날 수 없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는 식이었다. 변해가는 완용에 휴의는 그가 예전의 완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믿을 구석은 친구밖에 없지 않은가. 상의할 사람도 완용밖에 없다는 기분으로 자존심을 눌러 앉혔다. 설사 남보다 못한 친구가 된다고 해도 완용은 지금 휴의가 가장 믿고 기댈 친구였다. 

휴의는 지난 순사 채용에서 완용이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한 것을 알고 있었다. 완용이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모질게 먹었으나 아직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순사가 된 이후 완용은 부족한 순사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재목감을 추천하라는 상부 지시를 받고 휴의 대신 다른이를 뽑도록 했다. 그 사실을  휴의가 알고 있다고 판단한 완용은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휴의를 남처럼 대했다. 그런 완용을 보면서 휴의는 나중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지 완용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선택이 옳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순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 일 이후로 완용은 휴의와 만나는 것도 피하고 어쩌다 만나서도 거드름을 피웠다. 그에게 아버지를 팬 것을 따질 수는 더욱 없었다. 

마주앉은 완용의 눈은 이제 너와는 다른 나라는 거만함이 얼굴 가득 묻어났다. 순사와 농군이 같을 수가 없다. 언제든지 완용은 이유없이 동휴를 체포할 수 있다. 그리고 차고 있는 권총으로 죽일 수도 있다. 네 생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식의 완용의 태도에 휴의는 절망했으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도피처는 전쟁터 밖에 없었다. 아직도 결정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태도에 불만을 품었던 완용은 다짜고짜 휴의를 몰아세웠다. 어쩌자고 너만 이러고 있니, 그러고도 네가 내 친구냐고 닦달했다. 너 당장 지원하지 않으면 내 친구 아니다. 완용이 무섭게 노려봤다.

노려보는 눈빛보다 휴의는 그가 친구를 들먹인 사실이 아니꼬왔다. 친구라고. 나쁜 놈. 그래 나는 너보다 앞서겠다. 휴의는 속마음을 이렇게 감추면서 자신이 오늘 면에서 들은 연설과 그에 따른 자신의 결심을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완용은 눈치채지 못하고 경찰서에서 내가 챙피해 죽겠다. 너 때문에 내가 순사질에 지장을 받는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친구 잘 못 둔 죄지. 완용이 침을 뱉었다. 그러다가 휴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는 너무 심했다고 느꼈는지 달래는 투로 농사는 어떻게 될 것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아무렴 내가 네 집 식구하나 건사하지 못하겠니. 간혹 살펴 주마. 그러니 걱정말고 결심해라. 그래서 아버지를 팼니. 죽일 놈. 휴의는 완용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 면상에 주먹지를 날려야 맞다. 그러나 휴의는 그러지 못했다. 

완용은 머뭇거리는 휴의에게 친구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다는 듯이 떠벌였다. 옆구리에 찬 칼집을 만지작 거리며 그는 당장 내일이라도 여기를 벗어나라고 위협했다. 언제까지 빈둥 거리고 있을래. 그는 날이 선 제복의 어깨선을 게슴츠레 한 눈으로 따라 내려오면서 흘낏 친구를 노려봤다. 이래도 네가 내 말을 들지 않고 배길 것이냐 하는 노골적인 경고였다. 빈둥거린다는 말에 휴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맞다. 자신은 빈둥거리고 있다. 그는 눈을 들어 완용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순순히 따르겠다는 동의의 표시였다. 완용은 알았다는 듯이 내일 서에 가서 네가 자진 입대하겠다고 그것도 최전선으로 가겠다고 보고 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설득해서 그를 끌어 들였고 그것이 순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보증으로 보여지기를 완용은 바랐다.

조국을 위해 애쓰는 나와는 다른 완용이 휴의는 부러웠다. 신민된 처지에 대일본 제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그는 이미 친구 이상의 그 무엇이 되어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서서 서로에게 자랑 거리가 되고 싶다는 휴의의 계획은 틀어졌다. 휴의는 처음으로 술에 취했다. 그 김에 그는 점례와 여순의 소식을 아느냐고 물었다. 꾹 참았던 하려고 했던 말이었다. 정보에 빠른 너라면 그들이 일본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않느냐고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말했다. 벌써 일년 째 그녀들은 편지 한 장 없어 부모는 속을 태우고 있었고 그것을 완용이 모를리 없었다.

어쩌다 발 발굽 소리가 나면 그들은 먼발치에서 보고 버선발로 쫓아와 우리 점례 소식 아는가, 여순 소식 들었는가 고개를 숙이고는 완용에게 매달렸다. 완용은 그러면 노친네들이 망령 들렸다는 듯이 깔보는 표정을 지으면서 차마 하대는 하지 못하고 잘 있겠죠 라는 간단한 대답을 한 후 매몰차게 그들을 따돌렸다. 완용의 눈에는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하는 그들이 불쌍하기보다 한심스럽게 보였다. 설사 잘못됐다고 해도 그것이 다 신민의 역할을 하다 그런 것인데 그것 하나 견디지 못하는 아둔함을 을 질타했다.

애국심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촌사람들이라고 완용은 그들을 무시했다. 나도 몰라. 잘 있겠지. 완용은 남의 일처럼 지나가듯이 말했다. 휴의는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주먹을 날려야 옳았다. 네 놈이 끌고 가서는 뒤도 봐주지 않고 생사 조차 알려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를 터트려야 한다. 더러운 놈. 내가 죽어도 네 놈을 먼저 죽이고 죽겠다 이런 식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을 내려 놓았기 때문에 생각은 전선에 가 있었다. 휴의는 보란 듯이 완용이 아닌 적과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전과를 올리고 훌륭한 제국의 군인이 돼서 훈장을 달고 금의환향해 완용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굳힌 결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 혀를 가볍게 깨물었다.

너보다 나은 내가 돼서 돌아오리라. 다른 사람의 방식이 아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기겠다는 각오가 휴의의 마음을 불살랐다. 신민 가운데 우뚝 서고 싶은 젊은 피는 조국을 위해 끊어올랐다. 청년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그러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가장 앞서 나가고 가장 먼저 승리의 깃발을 꼽겠다는 각오로 휴의는 술집을 박차고 나왔다. 더 있다가는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괜히 털어 놓았나. 말없이 갔어도 됐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완용에게 추태를 부렸는지 모른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점례와 여순의 안부를 물은 것은 실수였다. 그래 너는 순사로 성공해라. 난 군인의 길을 간다. 휴의는 그 말을 남기고 경찰서 옆의 장터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여기서 죽마을까지는 대략 시오리가 조금 넘었다. 휴의는 느긋하게 한 시간 정도 걷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곳 부터는 인가가 없다. 깊은 골의 초입에는 대신 묘 두 개가 나란히 섰다. 길 옆에 있어 오고 가던 사람들은 눈 짓이나 손 짓으로 늘 묘를 인식했다. 혼자갈때는 서둘러 갔고 일행이 있으면 쌍묘라면서 그것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쌍묘는 장터를 이야기 할 때 끼어드는 화제였다. 이 곳을 지났느냐로 장터가 가까워지고, 집으로 가는 길의 시작점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말하자면 쌍묘는 장터를 향해 가거나 올 때 기준점이 됐다.

집에서 출발해 쌍묘를 벗어나면 장터가 멀리서 아른거렸다. 반대쪽에서 보면 가파른 길이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정도로 좁게 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로 접어 들면서 휴의는 조금 비틀거렸다. 일부러 넘어지려는 흉내를 내 보이기 까지 했다. 술취한 김에 빡 고꾸라질까. 그런데 정말로 몸이 쌍묘 쪽으로 쓰러졌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따라온 것이다. 그대로 폭싹 가라앉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그대로 됐다. 그러나 쓰러지고 났는데도 어디 아픈데가 하나도 없었고 되레 휴식의 느김이 들었다. 오월의 흙은 춥지도 덥지도 않고 적당했다. 언제나 손질이 잘 된 쌍묘의 표면에 잔디가 자라고 있었다. 살갛에 닿아도 아프지 않은 것이 막 나온 연한 새싹이었다. 새싹은 보드랍게 꺾였고 쓰러진 자리에서는 풀 냄새가 풍겼다. 그는 쓰러진 채로 한 동안 그대로 있었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혼자인데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각오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두려움은 죽은 사람 앞에서 용기를 가져왔다. 그런 사실은 휴의가 쌍묘의 가운데 골에 있어도 안심하는 이유가 됐다. 죽은 사람은 무섭지 않아. 산 사람이 무섭지. 노인들이 말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귀신 따위는 믿지 않아. 그런데 막상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몸이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의 감정은 수시로 바뀌었다. 미로에 빠졌다가 빠져 나왔다가 다시 미로에 빠지는 형국이었다. 

죽은 귀신이 방황하고 있다. 눈을 떠볼까.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이 입에 피를 흘리고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지 모른다. 서늘한 기운은 그래서 일까. 죽은 자의 원혼이 왜 방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불효라고 저질렀나. 억울한 죽음이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거기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고갯마루 까지 와서야 사람들은 쉬었다. 지게에 무거운 짐을 진 농군들도 그렇게 했다. 힘든 것보다 귀신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의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죽은 귀신이 산 귀신을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다 말 뿐이라는 것을 알만큼 그는 성숙해 있었다. 그런데도 몸이 떨리자 이것은 귀신이 짓이 분명하다고 벌떡 일어섰다. 예상대로 아무석도 보이지 않았다. 짐승의 움직임도 없었고 흔한 날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휴의는 옷을 털면서 손에 닿는 풀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꼈다.

쌍묘의 자식들은 효자구나. 잘 다듬어 놓았어. 저승에서도 부모님은 행복하겠네. 휴의는 헛움을 지었다. 어둠속에서도 은은하게 자태를 보이는 쌍묘가 아름답다고 여긴 것은 잘 가꾸어진 잔디 때문이었다. 효자구나. 자식은 부모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 나쁜 기운이 있다면 그 사람 탓이지 쌍묘 탓은 아냐. 다시 휴의에게 따뜻한 감정이 몰려왔다. 서늘한 것은 사라졌어.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여기 있지 않아. 곱다 살다 제명이 죽은 혼백이 산 사람을 위로하고 있네. 날 위로 한다고. 내 처지가 어때서. 나도 처지가 바뀔거야. 완용만 그러난 법은 없지. 내일이면 그렇게 될 거야. 쌍묘도 당분간 볼 수 없겠어. 이쯤에서 안녕을 고하자. 두 번 다시 쌍묘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눈을 들어 보니 희미한 달빛이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해 산정을 어스푸레 하게 밝히고 있었다. 가야지. 어서 가서 쉬어야 내일 일찍 출발하지. 휴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몸이 휘청였다. 그러나 꺾이지 않고 다시 고집스럽게 몇 걸음 걸어 나갔다. 그러니 익숙해 졌다. 운명아 기다려라. 내가 어디로 흘거가든 걱정하지 말지어다. 훈장은 내것이다. 조국을 위해 공을 세워 당당하게 귀향하리라. 대문간에 들어선 휴의는 의기양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습을 사라지고 대신 가슴에 총을 맞고 쏟아지는 피를 보면서 낭패감이 깃든 자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 죽었어. 살 가망이 없어. 이런 생각이 들 때 누군가가 구덩이 속에 있는 자신을 흙으로 자신을 덮고 있었다. 헛 것을 본 것이야. 그럴 리 없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휴의는 올라오는 취기를 억지로 누르면서 산길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물이 들어오고 있다. 밀물이다. 마침 사리다. 급하게 들어온다. 이때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어 가자. 지금 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면서 산다. 순사 못됐으나 군인은 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은 자신의 운명이고 닥쳐올 것은 닥쳐 오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 달을 벗 삼아 한티재를 오르기 위해 휴의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똑바로 걸으려고 애썼다. 그리고는 엉거주춤 제자리에 섰다.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그는 군인처럼 딱 소리가 나게 손을 이마에 갖다 붙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적당히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소리내어 웃었다. 웃음이 그칠 무렵 지금 부터 나는 멋진 군인이다. 충성. 덴노 반자이.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정말 그는 총든 군인이었다. 이 총으로 적들을 죽여야지. 사정없이 그렇게 할거야. 그는 총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팔을 위아래로 휘두르면 제식훈련에 나선 멋진 군인이 된 것이다. 

앞으로 일 킬로 정도 산길을 타면 고개에 닿고 다시 그 정도 내렸갔다가 그보다 작은 산을 한 개 더 넘어야 한다.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휴의는 서두르지 않았다. 급할 게 뭐 있어. 오늘 중으로 가면 되지. 술이라는 것은 이렇게 좋구나. 결심을 하거나 털고 일어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알려주니. 짜식, 내 말을 가로 막았어. 내눈에 내일도 띄면 넌 친구아냐. 불량선인일 뿐이야. 완용이 너 많이 컸다. 나한테 불량선인이라고. 불순한 조센징이라는 거지. 그런 딱지를 붙이고 날 체로하려는 수작이지. 네 뜻대로는 안될 걸. 여순과 점례는 그렇게 했지만 난 안당한다. 그 꼴 보기 싫어서라고 군대에 간다고. 이를 가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부러졌나. 낭패다. 그러면. 아무도 없는 숲길에서 휴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주절댔다. 혼자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모습을 봤다면 누군가 저 놈이 미쳤다고 동네방네 소문 낼 것이다. 괜히 마셨어. 아까운 돈을 내고. 처음이니 용서하자. 그래 내가 용서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용서했으니 용서가 된 거야. 정신을 차리자. 그런데 몸이 말을 안들어. 내 의지대로 안돼. 너무 마셨어. 멍청한 놈. 비적대다니. 휴의는 가고 싶은 방향으로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경례 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발 길을 서너 발 떼고 나서 휴의는 무슨 생각에서 인지 다시 무덤가를 향해 갔다. 그리고 무덤의 주인이 부모인양 두 번 절을 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잘 있거라 쌍묘야. 나는 간다, 피터지는 전쟁터로. 그는 이렇게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았고 그런 기분으로 입대하면 부상당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올 것 같았다. 휴의가 어깨춤을 추는 모습을 달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은 그의 안전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는 듯이 구름 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던 휴의도 입을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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