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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그들은 섬을 빠져 나가는 군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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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그들은 섬을 빠져 나가는 군함에 올라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6.2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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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 번 도 해본 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이곳에 와서 벌써 여러차례의 낙태를 감행했다. 처음 수술한 여자는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이때가 처음이었다. 죽은 여자는 자신이 처음이라는 사실도 모른 체 죽었다. 운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죽어서 다행이야. 이꼴 저꼴 안보고 죽다니. 갠 운이 좋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도 있었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두번째 여자는 죽다 살아났다. 살아난 여자는 순서 때문에 그렇게 됐다. 다행이 목숨을 건진 그녀는 운이 좋은 여자가 됐다. 막사의 여자들은 이번에도 운을 꺼내 들었다. 정말 다행이야. 두번째 였기 망정이지 첫번째 였다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어디야.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잖아. 죽어도 다행이고 살아도 다행이었다. 여자들은 그렇게 죽은자와 산자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 대한 위로 였으며 동료에 대한 위로였다. 어찌댔든 다행이라는 말은 그녀들에게 가장 좋은 언어였다. 죽다 살아난 여자는 죽은 것 처럼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를 막사에 집어 넣은 병사는 여자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상관에게 보고 했고 상관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며칠 쉬게 하라고 명령했다. 여자의 방문 앞에는 접근금지 푯말이 붙었고 이유는 성병과 전염병이었다. 가면 죽어. 병사들은 살아남은 여자의 방앞을 지날 때 자기들끼리 이렇게 지껄였다.

며칠은 열흘이 됐고 그렇게 살아난 그녀가 바로 조장이었다. 여순도 그 사실을 이리저리 주워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수는 여순에게서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늦은 밤 잠깐 쉬고 있던 여순에게 말수가 다가왔다. 이제 의사는 실력이 붙었을 거야. 여러 차례 하고도 못한다면 의사 자격이 없는 거지. 난 한 번만 해보면 두번째는 실수가 없을텐데. 말수가 입맛을 다시면서 걱정어린 눈으로 여순을 바라봤다.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런 의심이 든다면 내가 가만있겠어. 내 손으로 하더라도 널 보내지 않을 거야. 말수의 눈이 깊어졌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런 사람도 눈물이 있나. 여순은 말수를 보면서 그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 여순은 그 순간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신이 먼저 눈물을 보였다. 괜찮아. 난 정말로. 매일 보는 게 죽음인데. 그것이 내게 찾아온다고 뭐 다를 게 있겠어. 여자든 병사든 그들은 소리를 지르다 죽어. 하지만 난 아야.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난 입을 닫을 거야. 입을 꼭 다물고 죽음이 어떻게 오는 지 볼 거야. 그런 말 하지마. 무서워. 말수가 정말로 무서운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여순의 등을 두르렸다. 내가 상관에게 말했어. 일본인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라. 여순이 일을 잘 하는데. 하루 라도 빠지면 차질이 있어. 네 건강보다는 네가 일을 하지 못해서 오는 공백을 군의관은 걱정했어. 그런 걱정이라면 네 수술은 다른 여자의 수술과는 다를 거야. 마취도 하고 신경을 더 쓰겠지. 나도 참관해. 손놀림이 좋은 나를 써먹으려는 거지. 여순은 말수가 거든다는 말을 듣고 순간 창피했다. 그 없이 일을 깨끗이 처리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일 하재. 그런 건 뒤로 미룰 일이 아니래. 동맥이 터진 환자처럼 재빠르게 해야 한다고 말하더군. 그러면서 당신은 조선에서 애를 받아 받어. 하고 물었는데 나는 우물쭈물했지. 알아 조선에서 남자 의사가 산부인과는 어림없지. 어림없어. 자신이 묻고 자신이 알았다고 했어. 그러니 나는 보조 역할이야. 그러면서 내일이 괜찮은지 나를 쳐다봤어. 너만 괜찮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말수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여순은 간호를 하면서 의사의 손놀림이 숙련된 외과의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몇 번만에 째고 꿰매는 것이 능숙한데 의사는 그 오랫동안 배우고 실전 경험이 그렇게 많은 대도 영 어색했다. 꽤맨 상처는 컸고 그래서 의사가 한 수술은 여순이 마무리 한 것보다 더 오래가고 더 큰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이 하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말수더 러뭄 게 낫다. 괜히 알렸어. 그리고 말수는 너무 빨리 의사에게 말했고. 신중했어야 하는데. 내 손에서 끝냈을 수도 있었는데. 여순은 어찌해야 고민했으나 해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반반이라고 치자. 잘 될 확률과 그렇지 않을 확률. 그러면 된 거야. 50%라면 성공이면 꽤 높은 거지. 말수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하기 보다는 알아 듣지 못한 듯이 한 귀로 흘려듣고는 어쨌든 배가 불러오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운명이야. 여기서는 모든 것이 운명이야. 사람의 손보다는 하늘에 맡기는 거지. 말수도 운명을 꺼내들었다. 그래 운명에 맡기자. 죽으면 다행인거고 살면 어 그것도 다행인 거지. 너도 알잖아. 어제 부상병이 9명이나 들이닥쳤어. 의사는 한 두 시간 잤을 거야. 나는 뭐 네가 알다시피. 좀 자자. 틈나면 자는 거야. 말수는 그 말을 하고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꺽었다. 그리고는 이내 코를 골았다. 돌아보니 의사는 저쪽 간이침대서 군복을 입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순도 눈을 감았고 여순눈을 떴을 때 말수는 소리 지르는 환자곁에서 힘을 쓰고 있었고 의사는 여전히 벌린 입을 다물지 않고 있었다. 

넌 특혜를 받은 거야. 초기에 할 수 있는 건 네가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수술 후에는 너 자신을 지켜. 그럴 수 있을 거야. 급한 환자를 보고 온 말수가 자신의 옷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 묻은 손을 닦으며 말했다.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고. 그것 역시 특권이다. 그러면 내가 이곳 남양군도의 섬에서 쌍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이네. 특권이 겹쳤어. 여순은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래 나는 별난 여자라서 남들보다 앞서 수술을 받는 거야. 빠를수록 좋지. 암, 그래. 그녀는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문제를 푼 학생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아기는 죽겠지. 이건 정말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다. 한 번도 아기를 염두해 둔 적이 없다. 임신을 알았고 수술을 결정하기로 했어도 한 번도 뱃속의 아기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수술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아기라니. 

내 한 몸 건가하기도 힘들어. 아기라니. 난 그런 거 꿈꿔 본 적 없어. 아기라면 내가 아기야.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기. 아기와 엄마를 연결하자 여순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럴 시간 없어. 여순은 말수가 비명을 지르는 아까 그 환자에게로 달려가자 자신도 뒤따르면서 여순을 고개를 저었다. 아기라니. 시도조차 할 수 없어. 아예 싹을 지워야지. 내일 이라고, 잘 됐네. 하루라도 더 시간이 지체됐다면. 아이, 그냥 지금 당장 해달라고 할까. 그러나 의사는 자고 있다. 자는 자를 깨워서 수술을 부탁할 수는 없다. 군의관을 화를 낼 것이다. 그는 잠에 유달리 집착한다. 잠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화를 낸다. 더구나 다른 이유도 아니고 낙태를 위해 깨운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임시 조치를 마친 말수가 여순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진통제 한 알이었다. 혹시 마취 없이 진행할 지 몰라. 마취약이 없어. 의사가 감춰둔 것을 꺼내지 않는한. 그러니 이걸 먹어봐. 하자고 할 때 바로 먹어. 여순은 그걸 까지 생각해 주는 말수가 고마웠다. 진통제라니. 병사들도 먹지 못하는 진통제 아닌가. 얼른 여순은 그것을 가운에 달린 호주머니에 넣었다.

의사 몰래 먹어. 병상에서 이것 구하기 힘들어.  그러니 의사 몰래 먹어둬. 아픔이 조금은 덜 하겠지. 말수는 이곳에서 낙태는 수술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귀중한 약을 함부로 쓰다가 걸리면 낭패야. 의사는 자신의 지시가 아닌 것을 내가 마음대로 하면 죽이려 들지 몰라. 더구나 마취약이나 진통제 같은 건 더 그래.  요새는 약이 더 줄어들고 있어. 본국에서 오는 물량이 워낙 적어. 그것도 요즘은 한 달이 넘었는데 지급되지 않고 있고. 도대체 전쟁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말수가 전쟁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보급이 부실하면 일본이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의약품 부족이라. 이건 심각해. 부상병들은 항생제 하나로 살고 죽고 하는 경우가 많거든. 여순도 그건 알고 있었다. 감염된 환자에게 항생제는 생명이라는 것을. 여순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는 내용이고 짐작하고 있는데 왜 자꾸 그 이야기를 꺼내지. 주머니속의 그것을 꺼내 다시 줄까. 아까워서 그런가. 진통제라고 했지만 항생제 일지 몰라. 항생제 없이 하는 수술은 아무리 작은 거라고 감염이 무섭거든. 아, 이건 진통제가 아니군. 말수는 혹 여순이 들키기라도 하면 덜 혼이 나는 방법을 찾다가 항생제를 진통제라고 말했구나. 여순은 또 그가 고마웠다. 늘 이런 식이야. 말수는 정말 치밀해. 어디서 저런 머리가 나오지. 나도 배워야 겠어. 이런 시국에는 잘 돌아가야 하거든. 순간적으로 둘러댈 수도 있어야 하고. 그건 그렇고 이젠 정말 이별이야. 아기와의 이별. 이런 이별은 오래 끌면 낭패야. 모든 이별이 이별인줄도 모르게 끝나야 하는 것처럼 내가 온 아이와는 특히 그래야 해. 잘 가라. 내 아들, 딸아. 여순은 잠시 울컥했다. 생명이라는 생각, 그 생명이 자신의 몸에서 자라고 있다는 생각, 그 생명이 잘려 나간다는 불한한 생각을 여순은 지우려고 애썼다. 

말수는 항생제 하나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아기를 지우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다. 의사는 마취는 없으나 항생제는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바로 시작됐는데 어렵지 않게 끝났다. 여순은 의사가 말하기도 전에 잘된 것을 알았다. 이렇게 금방 끝나는 것을 괜히 걱정했다. 의사는 경험이 쌓여서 인지 거침이 없었고 여순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차 생각할 겨늘도 없이 몸을 추스렸다. 말수는 수술중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의사는 중얼 거렸으나 여순은 잘 듣지 못했다. 들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여순은 자신의 몸에서 생명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기 위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후는 쉬는 게 좋을 거야. 하혈이 오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쉬라는 말대신 쉬는게 좋다고 했다. 그것은 급하면 부를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부르면 가야지.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순은 정말 오후를 부상병 처럼 따로 지급받은 침대에서 쉬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누워만 있었고 말수는 끼니때가 되면 군인들이 먹는 식판에 밥을 담아왔다. 

의사가 제법이야. 어떻게 했는지도 몰라. 다음에 나보고 하라면 긴장할 것 같아. 봤으니 다음은 네가 해라. 이 말에 나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답이 나올 거야. 정말 그렇게 쉬원 거였어. 애기 지우는 것이. 아마 초기여서 더 그랬을 거야. 어서 먹어. 기운 차려야지. 그래야 살어. 말수는 입에 걸리는데로 말 했다. 여순은 그 말을 다 들었다. 다음엔 네가 여자들 수술을 해. 여순은 손을 씻는 의사가 자신에게 한 말도 기억했다. 네가 하라고. 의사는 큰 선심이나 쓰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는 나는 이런 하찮은 수술로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여순은 밥을 먹었다. 침대에서 밥을 먹다니. 시중을 드는 사람 앞에서. 물 좀 줘요. 응, 물. 말수가 뭏슨 말을 하려다 말고 급하게 일어나서 물을 갖다 여순의 입앞으로 내밀었다. 물 대령이오. 여순은 살짝 웃었고 행복했다. 식판을 깨끗이 비웠다. 말수가 그것을 가지고 나갔다. 여순은 홀로 있었다. 커튼 하나로 병상이 갈렸지만 얇은 커튼 하나는 완벽하게 여순의 독립을 보장했다. 아무도 날 볼 수 없어. 병상을 내가 독차지 한 거야. 이것은 엄청안 특권이야 특권.

그러나 여순은 만족하지 않았다. 특권을 누리는데 따른 고마움도 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 어디선가 슬픈 기운이 몰려왔다. 기분 나쁜 기운이 다가와서는 가슴을 쳤고 목구멍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아기를 잃었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은 거야. 여순은 거기에 자신의 생각이 닿아 있음을 느꼈다. 이것은 지금까지 겪은 일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건 뭐지. 이 느낌은 뭐냐고.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다 끝난게 아니었어. 여순은 누운채로 울었다. 이 놈의 울음. 도대체 마르질 않아. 여순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이제 영영 아주 영원히 그녀는 아이와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난 엄마가 될 수 없어. 영원히. 이것도 운명으로 퉁칠까. 그래,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석녀. 내게 닥쳐온 운명. 여자들은 또 말하겠지. 잘 된 거야. 다행이야. 말수도 말할 거야. 이 판국에 아기라니.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이구나. 

그러나 여순은 이번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건 다행이 아냐. 아니라고. 그러면서 자신을 학대하고 싶었다. 생명을 죽인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해. 그녀는 꺼진 자신의 배위에 손을 얹고는 배꼽 주변을 세게 꼬집었다. 그리고느 잠이 들었다. 깨고 났을 때는 오후가 다 가고 있었다. 의사는 간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말수가 알아서 여순의 몫까지 하고 있었다. 좁은 병상일 지라도 걷지 않고 달려 다녔다. 정말로 말수는 두 사람의 몫을 했다. 다음 날 여순은 자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것을 알았다. 가뿐했다. 이대로 달려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운을 입고 바로 병상을 돌았다. 말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아예 침대 속에 빠묻혔다. 살았어. 내가 살았어. 삶의 충만함에 여순은 만세라고 부르고 싶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어제는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 아기 때문에 괴로웠지. 이젠 아냐. 아기가 죽고 내가 살았어. 내가 산거야. 그래, 내가 산것은 행운이야 행운. 

여순은 수술한 사람 같지 않았다. 되레 더 건강해져서 간호일을 척척해냈다. 시키지 않은 일도 했고 그래서 죽을 것 같았던 환자를 살렸다. 그런 그녀는 의사는 눈여겨 봤다. 그날 이후 자신을 대하던 의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눈에 뛸 만큼 확연했다. 여순도 눈치를 챘다. 힐끔힐끔 보는 눈이 대놓고 너를 내가 주시하고 있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순은 그것이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처럼 거북스러웠다. 왜이래. 의사가 달라졌어. 눈빛이 그래. 그 눈빛을 보면서 여순은 말수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에게 언짢은 기분을 주어서는 득 될 게 없어. 사로잡힌 그의 눈길에서 그녀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말수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관계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너만 괜찮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신호인가. 여순은 차라리 가부를 말해 줬으면 싶었으나 자신이 말수라고 해도 의견을 내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했다.

그녀는 수시로 의사에게 불려갔다. 간호 업무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차트를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새로운 약품을 넣거나 빼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정말 하루가 길었다. 막사에서는 그런대로 일과 휴식이 구분됐으나 이곳에서는 따로 그것이 없었다. 여순은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쉴 때도 허리를 돌리거나 어깨를 주무르고 제자릴 뛰기를 했다. 운동으로 몸의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인지 그녀는 잘 버티고 있다. 쓰러질 것 같은데도 용케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견대내지 않으면 다른 도리가 없다. 여순은 하루에도 여러 번 이겨 내리라, 끝내 그래야지 하는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어떤 때는 정말이지 다 내려 놓고 주저 않고 싶을 때가 있었다. 몸이 아픈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녀는 늘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가 보내는 눈빛을 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는 왜, 의사는 내게 왜? 같은 질문은 무의미 했다. 그런 질문으로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 아주 특이한 자문 말고는 이제는 하나 마나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되레 괜찮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순이 먼저 나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는 한 모른 척 했다. 부탁을 들어준다는 자신의 선심을 그가 받도록 한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유리함은 언젠가 써먹을 때 도움이 될 거야. 저녁도 아닌 대낮에. 물론 말수는 급한 환자 때문에 트럭을 타고 외출한 후였다. 의사는 그렇게 다가왔고 여순은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의사는 필요할 때마다 나타났다. 말수는 아는 지 모르는지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의사의 여순에 대한 칭찬이 도를 넘고 있다는 판단이 서도 말수는 네가 일을 잘해서 그래. 내가 봐도 너 같은 간호사는 없어. 넌 두가지 일을 해. 의사도 하고 간호사도 하고. 그러니 의사가 보기에 고맙지. 군의관은 일본에서도 이렇게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여자는 없다는 투로 여순을 올려 세웠다. 말수가 있으면 남자보다 낫다는 말도 했다. 정말 여순은 좋은 의사야, 좋은 간호사고. 말수는 끼어들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만족한 어떤 날은 대놓고 여순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다 들어 줄게. 말만 해. 처음에 여순은 내게 필요한 것은 없다고 잘라 뗐다. 불쑥 말하면 가벼운 여자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그런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여순은 수시로 바뀌는 의사의 변덕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것을 아끼고 남의 것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도 눈치챘다. 저런 사람에게 쉽게 청을 하면 안돼. 여순은 여기까지 왔다. 삶의 죽음의 경계를 다니면서 터득한 것이 있다는 이런 것이었다. 

의심 많은 자를 안심시키려면 부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됐다고 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간호 업무를 더 잘하는 것이라는 입에 바른 소리를 할 때 의사는 그러지 말고 말하라고 했으나 여순이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았다. 대단해. 전선에서 저런 여자를 만나다니. 여순이 거부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필요한 것도 없었다. 먹고 자고 하는 일은 막사와 견줄 수 없었고 일도 손에 익어가고 있어 일상으로 정착되고 있었다. 의사라고 불러주고 간호사라고 불러주는데 이보다 더 나은 일이 있을까 싶었다. 나은 일. 있지. 단 한가지. 여기를 벗어나는 것. 바로 탈출이다. 탈출. 내가 의사에게 부탁할 일은 탈출이다. 내가 여기서 벗어나고 싶으니 군함을 타고 필리핀으로 도망가게 도와 주시오. 그러면 감사하겠오. 의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잡아 먹으려고 들겠지. 하이애나처럼 물어 뜯겠지. 난 어리석지 않아. 그런 부탁을 내가 할 줄 알아. 두 손으로 빌어도 안해. 안한다고.

여기서 빠져 나가는 것이 내 부탁이니 들어 주시겠어요? 이렇게 말할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내색이라는 것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힘든 내색, 참기 어려운 고통,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어도 반쯤은 즐거운 인상을  썼다. 자신이 한 일의 결과가 좋으면 그것은 전부 의사에게 공을 돌렸다. 모두 의사 덕분이다. 잘 가르쳐 줘서 고맙습니다. 칼을 쥐는 법부터 시작해 어떤 상처부터 치료해야 할지 알려 줬어요. 그걸 배웠고요.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인천에서 난 간호사를 하지 않았어요. 경성의전 간호과를 졸업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도 나를 인정해 주는 군요. 조선이 무얼 알겠어. 이리 줘바, 칼은 이렇게 잡는 거야. 의사가 처음으로 수술칼을 쥐어줄 때 여순은 처음 잡아본 사람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의사는 여순을 의심하기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행태를 비난했다. 제대로 가르치는 의사가 있겠어. 그러면서 여순을 수제자처럼 대우했다. 말수는 그냥 눈치껏 배웠다. 여순은 손에 쥐어주는 것을 받아 먹었다. 말수는 땅에 떨어진 것을 몰래 주워 먹었다. 그렇게 여순과 말수는 군의관을 통해 의사가 됐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은 어떤 이득을 바래서가 아니다. 그냥 내일 이라고 하니 할 뿐이다. 말수를 믿었던 의사는 여순을 믿었다. 

의사는 여순에게 돈까지 주었다. 어떤 때는 됐다고 돈은 충분히 있다고 거부해도 자꾸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미안하니 받아달라고. 내가 미안해서 그래. 정말이야.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해. 그렇게 까지 하니 여순은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다 필요하다고. 여기서는 쓸모가 없지만 당장 필리핀만 가도 크게 도움이 될 거라면서 의사는 여순에게 찔러줬다. 이 종이쪽지가 말이야. 이곳만 벗어나면 황금덩어리가 된다고. 그녀는 받은 것을 그대로 모아 두었다. 그러면서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헌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턱도 없겠지만 군용기 사는데 보태고 싶어요. 의사는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애국심을 본받아라. 의사는 자신에게 하듯이 돈을 내려다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아직도 자신의 귀로 들은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한 얼굴로 여순을 봐라봤다. 충격을 받은 표정이 역력했다.

이것은, 저에게는 필요없어요. 여기 놔두면 분실할 수도 있고요. 국방헌금을 하고 싶어요. 여순은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으로 여순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입증됐다. 더 물어볼 것이 없다. 돈을 거부하는 것에 의사는 처음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지 조금 화난 표정이었다. 그러나 거듭된 여순의 확고한 의사에 의사는 그녀를 신뢰하는 마음이 더 굳어졌다. 저런 사람이라면 믿을 만 하지. 세상에 돈을 싫어 하는 사람을 보다니. 내 생전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의사는 여순의 진심을 알고나서는 그녀가 보통 여자아닌 이상 함부로 대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돈을 집어넣고 대신 전표 책을 가져오더니 수술 때문에 오후에 쉬었던 그 날에도 일한 걸로 기록했다. 그 기록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받을 돈의 목록이었다. 여순은 그렇게 하는 의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일본의사는 양심적이군. 여순은 그러나 그것에 대해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가 주는 돈을 덮석 받았어도 그가 이처럼 호의적으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은 했다. 그러저나 저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돈도 필요없는데 글자를 적어 놓다니. 그걸로 의사는 상관의 책무를 다했다는 듯이 어깨를 폈다. 조선에서 쓸모가 있을까. 설사 그렇다 해도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 갇혀 있으면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잘 한 거야. 휴지에 불과한 것에 집착하지 말자고 여순은 다짐했고 그 결과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했다. 의사는 될 수 있으면 여순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가상한 노력을 여순은 알아챘다. 그래서 자신이 한 발 더 움직였다. 그럴수록 여순의 실력은 날로 늘었다. 간호가 아닌 의사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혼자서 처리하던 의사는 갑자기 두 명의 의사가 더 늘어나자 여유를 조금 찾았다. 진작에 보조를 둘 걸. 왜 그걸 생각못했을까. 그러고 보면 말수가 은인이야. 그가 여순까지 소개 했잖아. 자신이 편안해 질수록 의사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됐다. 

낙태는 이제 여순이 전담했다. 피임을 해도 한 달에 두 세명은 꼭 수술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여순은 자신도 그랬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고된 일과가 끝나고 나면 고민할 시간도 없이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봐야 할 환자들을 걱정했다. 상처가 아물고 있는 환자는 언제 퇴원해야 할지 달력에 날자를 표시했고 복통이나 급성 장염등으로 오는 내과적 환자는 따로 구분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어느 순간 여순은 잠에 빠졌고 대개는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여순이 부지런한 것은 늘 자신을 채찍질했기 때문이다. 막사에 대한 공포를 떨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군의관이 보기에 세 명의 몫을 거튼히 해냈다. 전쟁이 끝나면 저 여자를 데려가야지. 조수로 써먹을 거야. 여기에서 처럼. 돈을 왕창 벌어야지. 대학병원보다 큰 병원을 도쿄에 지어야지. 군의관은 여순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조선인들이 무식하고 게으르다는 말은 다는 맞지 않아. 언제나 예외는 있거든. 의사는 그렇게 여순을 예외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말구도 제 역할을 잘 해냈다. 일도 일이지만 태도와 언행이 확연히 달라졌다. 욕설은 사라졌고 노가다 풍의 건들 거리는 태도는 환자를 대하는 준엄한 의사로 바뀌어 있었다. 단호하면서도 인자한 모습을 보일 때면 저게 저 말수가 맞느냐고 여순은 의아해 했다. 여순이 공부하면 그도 공부했다. 일본어야 그렇다 쳐도 영어로 된 어학책을 읽는 것을 불가능했다. 그러나 말수는 누구를 어떻게 등떠밀었는지 영어도 제법 구사했다. 이것 보라는 듯이 여순앞에서 군의관에게 영어책을 들이밀면서 질문도 했다. 놀라운 변화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지. 말수도 그것을 알까. 자신이 변한 사실을. 말수는 말수대로 여순의 변화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말 한마디, 걸음 걸이 하나에도 여순은 신중을 기했다. 재가 왜 저래. 여순이 조금 한가한 틈에 두꺼운 영어책을 눈 가까이 대고 있으면 말수는 놀라운 환호를 질렀다. 어디서 배운거야. 의사가 가르켜 줬나. 그럴지도 모르지.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떻게 내가 영어책을 읽어. 그러다가도 환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면 경쟁이라도 하듯이 말수와 여순이 소리나는 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환가 곁에 다가갔을 때 말수는 그가 곧 죽을 것을 알았다. 여순도 알았다. 얼굴색이 변하고 있다. 이승의 마지막 외침은 저렇게 상상이상으로 큰 소리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잠잠해지면 저승의 길을 떠난 것이다. 말수는 피가 벌꺽 벌꺽 쏟아지는 가슴쪽을 지혈하면서 버티지 말고 놓아주라고 그래야 가는 길이 편하다고 속으로 말했다. 여순은 말없이 병사의 손을 잡아 주었다. 처음에 온기가 있던 손이 점차 차가워 지고 있다. 죽음의 사자가 부르고 있다. 이제 손을 놓아줘야 할 때다. 그가 잡고 가도록 놔줘야 한다. 아직 아닌가. 병사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누군가 옆에 온 것을 느꼈고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으면 곧 죽을 사람이니 관심을 가져달라는 듯이 마지막 소리를 질렀다.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지르는 소리였고 죽을 힘을 다 쓴 결과 그 병사는 결국 죽었다. 

말수는 돌아섰고 여순은 손을 놓고 일어섰다. 옆 침대의 다른 병사가 나즉한 목소리로 간호사를 찾았다. 목소리가 작아. 이 사람은 조금 더 살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조절할 수 있거든. 의식이 남아 있고 여력이 있는 거야. 마취약이 있으면 좋으련만. 어쩌지. 여순은 말수를 보았다. 잘린 팔뚝을 멀쩡한 손으로 붙잡고 병사는 이쪽이 아프다고 말했다. 여기가 아파요. 잘라야 하나요. 병사는 묻고 있었다.

그러나 여순은 이미 잘랐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만 참으면 한고비를 넘기게 된다며 어머니다운 미소를 지었다. 웃음을 보고 병사도 따라 웃었으나 얼굴을 다펴지는 못했다. 얼굴의 반쪽도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기 안은 다른 쪽의 얼굴에는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감염이 됐구나. 이런, 얼른 항생제를 써야 하는데. 열이 나고 있어. 열을 잡지 못하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거야. 겨우 팔을 잘랐을 뿐인데 죽다니. 여순은 순회를 도는 의사에게 항생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은 건 없어. 너도 알잖아. 본국에서 와야 하는데 한 달 째 소식이 없어. 낸들 어쩔 수 없어. 그러나 여순은 그가 비상용으로 항생제 일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곳 총사령관을 위해 예비해 두고 있는 것인지는 몰랐다. 나라도 못쓸거야. 병사로 태어난 죄야. 장군이었다면 의사가 모른 척 했을까. 

수술 환자가 이마에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떤다면 죽은 목숨이니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의사는 말했었다. 단순히 땀만 흘리면 괜찮다. 땀없이 떨기만 해도 가망성은 있다. 그러나 이 병사처럼 이렇게 땀과 떨림이 동시에 오면 손 쓸 수 없다. 여순은 그의 생이 몇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땀 사이로 앳된 눈동자가 살고 싶다고 호소했다. 여순은 환자의 손을 잡았다. 차디찬 손은 시체와 마찬가지였다. 살 수 있는 가망은 제로에 가까웠다. 좋은 항생제가 있다면 이 환자는 살아날 수 있을까. 손을 잡고 여순은 잠시 환자의 입장이 됐다. 그 때 옆자리의 환자가 자신도 보아 달라고 엄청난 소리로 신음을 냈다. 광산에서 다리를 다친 조선인 환자였다.

그는 살 가망이 있었다. 파편이 뼈를 건드리지 않고 근육을 찢어 놓았다. 상처가 아물면 그는 다시 광산으로 가야 한다. 의사는 눈짓으로 저 놈은 산다는 표시를 했다. 여순이 보기에도 찢어진 근육외에는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곧 상처가 아물거에요. 살아서 고향땅에 가야지요. 조선인 인가요? 그가 물었다. 여순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홍성입니다. 충남 홍성. 알고 있나요? 홍성이라고요? 알아요. 저는 보령입니다. 환자는 살았다는 듯이 안심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순은 냉정하게 등을 보였고 일어나서 다른 환자 쪽으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역겨운 진물 냄새에서 해방되자 여순은 전쟁은 고름이라고 생각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이다. 진짜 그렇다. 전쟁터 보다 더 더러운 곳은 없다. 여순은 날마다 진저리쳤고 날마다 용기를 냈다. 매일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여순은 매일매일 그렇게 환자들과 씨름했다. 습관은 묘한 것이다. 익숙하다 보니 어느 날 병실이 한가할 때면 여순은 무언가 빠진 것 같은 허망함을 느꼈다. 환자의 아우성 없는 병실은 생동감이 없다. 그럴  때면 영어로 된 의학서적을 들었다. 그것은 잠시동안의 사치였다. 사치는 즐거운 것이 계속 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마취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환자들이 지르믄 고함과 억지로 참는 듯한 신음 소리가 화음을 이루면서 병실을 가득채웠다. 누군가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환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 좀 봐다라고 내가 더 아프다고 그러니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서 오래도록 간호해 달라고 한결같이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저들에게 쓰임새가 있구나. 여순은 그것이 고마웠다.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나를 찾고 있구나.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구나. 그때 출입문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후송병이거나 광산 사고자일 것이다. 비명과 울부짖음. 그것은 해변의 파도처럼 갑자기 밀려왔다. 죽마을 오일 장 같은 시끌벅적한 것이었다. 물건을 사라고, 내 목숨을 사가라고 죽기전에. 내 것이 싸고 좋다고 고함치는 소리였다. 병실의 시선이 일시에 그쪽으로 쏠렸다. 이곳은 죽마을의 오 일 장날이다, 여순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장날, 매달 이일과 칠일. 그날은 설레는 날이다. 이처럼 시끄러운 날이다. 그래, 장날. 난 오일장을 그 누구보다도 기다렸어. 아이 뿐이겠어. 어른들도 공연히 손가락을 꼽으면서 그날을 기다렸다. 무언가 구경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의 구경거리, 너덜거리는 살점. 매달린 돼지고기.

장돌뱅이여서가 아니다.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날을 놓쳐서는 안 된다. 노동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낼이 장날이지. 전날 밤부터 여순은 보챘다. 아침이 되면 몰래 떼어 놓고 갈까 봐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엄마는 매몰찼다. 그래, 엄마는 따뜻했던 엄마는 장에만 데려가 달라면 싸늘해 졌지. 알아 엄마 마음. 돈은 없는데 호떡은 사먹여야 하잖아. 미안해 엄마. 다신 안 그럴게. 이제는 내가 엄마 호떡을 사줄게. 여순을 매정한 엄마의 뒤를 따르며 울었다. 오지마, 오지 말래도. 왼손으로 머리에 진 짐을 잡고 있는 손 말고 다른 손으로 엄마는 연신 까불어 댔다. 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이었다. 국묵도 없어. 그래도 여순은 울기를 멈추지 않고 따라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그런 실랑이를 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장으로 가는 길이 짧다. 그쯤해서 엄마는 포기했다. 여순은 슬그머니 어마 옆에 붙었다. 그리고는 호떡을 하나 얻어 먹었고 여순은 행복했다. 행복한 순간이 내게도 있었어. 정말 행복했어. 여기도 호떡이 있을까. 없지. 필리핀에는 있을 거야. 필리핀의 호떡 생각에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그 순간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순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샛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군인들이었다. 황색의 옷 사이로, 이미 은 피 위로 새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인근의 전투에서 당한 황군들이었다. 계급은 대개 보잘 것 없었다. 언제나 이런 중상을 당한 환자는 하급병들이었다. 고급장교가 다쳐서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환자는 장교였다. 계급장이 달라서 여순은 금새 알아챘다. 장교는 팔을 가누지 못했다. 단순히 부러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쪼개지고 갈라져 거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갈 정도로 너덜거렸다.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절단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팔 뿐이 아니었다. 다리 쪽에서도 피가 비처럼 흘러내렸다.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정도 상처면 한 시간 이상 살기 어렵다. 여순은 직감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리면서 장교의 눈을 쳐다봤다. 얼굴은 의외로 말끔했다. 파편이 팔을 치고 다리 쪽으로 내려간 결과였다. 어디서 한 번은 본 듯한 얼굴이다. 젊은 얼굴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죽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방금 전에 질렀던 비명은 뭐지? 그리고 이 차분함은. 한 인간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확 변할수가 있을까. 

작은 몸, 가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 맞아 쌍거풀이 있고 짙은 눈썹. 누구더라. 여순은 상처를 헤집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녀가 막사로끌려온 날 처음 왔던 바로 그 사내였다. 첫 남자여서 일까. 이후의 인물들은 거의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그 사내 만큼은 간혹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계급이 제법 있었다. 사병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 여순은 알았다. 지금은 소대장으로 전투에 앞장서다 이 꼴이 됐다. 여순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른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제발 죽기전에 아는 눈으로 나를 보지 않기를 원했다. 너구나. 내가 너를 알아. 너 거기 있었지. 그런 눈으로 나를 봐서는 안돼. 너에게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여순은 얼굴에서 몸을 돌려 다리쪽의 상처를 살폈다. 그가 다치지 않은 손을 뻗어 여순을 잡으려고 했다. 여순이 무의식적으로 피하자 피 묻은 입이 무슨 말을 하려고 달싹거렸다. 차마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여순은 입가에 나온 피를 씻어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넌 이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나는 너와는 달라. 널 치료해 줄게. 가는 날 손잡아 줄게. 조금만 참아요. 살 수 있어요. 그때 소대장의 얼굴에 얇은 미소인지 비웃음인지가 슬쩍 스쳤다.

그도 그녀를 알아본 것일까. 여순은 부끄러웠다. 자신을 아프게 했던 그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죽을 운명이다. 나는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아. 너 따위는 벌써 잊었어. 너 같은 놈은 벌써 잊었다고. 여순은 침묵으로 그를 벌했다. 겨우 입을 뗀 소대장은 허튼소리 할 시간이 없다는 듯 어렵게 입을 열고 말했다. 일본에 있는 엄마에게 편지를 썼어. 그가 눈짓으로 윗주머니에 그것이 있으니 꺼내 달라는 시늉을 했다. 사진 한 장이었다. 가족이 모여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뒤집자 여백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그가 편지라고 말한 것이었다. 여순은 슬쩍 그것을 보았다. 여기서 조선 여자를 만났는데 아주 예뻐. 전쟁이 끝나면 그 여자 이야기를 해줄게 엄마, 그 여자를 내 아내로 맞고 싶어. 여순은 뜨금했다. 뭐지. 이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도 내가 처음이었을까. 그래서 날 잊지 못하고 이런 편지를 써서 갖고 있었을까. 

전쟁터에서 소대장은 여순을 잊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면 소대장은 그날 여순과 있었던 것을 추억으로 꺼내 들면서 위안 삼았다. 내가 그의 유일한 위안처였어. 내가 그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아니지만 왠지 그러고 싶은 걸. 사내 자식이 그래도 그렇지. 뭐 겨우 그걸 가지고 이런 편지를 사진 뒤에 남겼어. 여순은 또다른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게 나인가. 조선 여자라고 부른 여자가 나 인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네가 전장이 아니라면 이런 편지를 썼을리 없어. 여순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화가 났다. 난 사무라이야, 한 번 한 약속은 지켜. 이 눈이 그걸 증명해. 그가 이렇게 말하는 듯 싶어 여순은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허공으로 시선을 향했다. 건성으로 듣지마. 진심이야. 사무라이의 진심. 그러나 사무라이는 자신의 짆심을 확인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여순이 응답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여순은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용히 지켜봤다. 그는 숨을 헐떡인다.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멈췄다 이어졌다 반복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절대 회복할 수 없다는 것, 사무라이도 죽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입은 고정됐다. 눈도 초점을 잃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아닌 척했다. 자신을 억제할 수 없어 체면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여순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사무라이는그런 사람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세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남의 것이었으나 이제 그는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 고개를 들수 없다. 산산히 부서진 팔과 다리를 둘러볼 수 없다. 소대장은 그러나 바로 죽지 않았다. 힘겹게 무슨 말인가를 더 뱉어냈다. 여순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들리면 들으려고 했다. 말을 마친 소대장의 얼굴이 납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피가 빠져나간 얼굴은 창백해 졌다. 여순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 여순 자신도 알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표현인지 아닌지 여순은 알 수 없었으나 그것 때문에 답답하지 않았다.

그는 끄덕이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숨이 끊어진 그에게 여순은 동정의 손짓 대신 병균이 퍼지지 못하도록 시체를 어서 치우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지, 시체는 생명과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여순이 일어서려고 머뭇거리자 의사가 다가왔다. 다른 곳으로 가봐. 죽은 사람에게 허비할 시간 없다. 의사가 팔꿈치로 그녀를 꾹 찔렀다. 의사는 정확했다. 그의 행동은 매정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먼저다. 여순은 병실 창가로 가면서 서쪽 바다를 내려다봤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석양이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소대장의 피보다 더 붉고 검었다.

일이 되려는지 필리핀행 호위함 승선은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마음 속으로는 이제나 저제나 했으나 막상 일이 닥쳐오자 여순의 가슴은 뛰었다. 이곳이 일이 급변하고 있구나. 일본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기는 거야, 지는 거야. 지다니. 여순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불순한 것이 몸에 붙어 있는 양 떼어내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본의 패망은 자신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전표. 그래 전표는 무용지물이다. 돈은. 돈도 쓸모없다. 달러를 모아야 한다고 군의관은 말했다. 달러는 어디서나 쓸 수 있어. 필리핀에 가면 달러와 다 바꿔. 그건 그렇고 전선은 어떻게 가고 있어요. 뭐, 별 걸 다 물어봐. 당연히 우리가 이기고 있지. 그것도 연전연승. 그래서 추가병력이 필요해. 밀려서가 아니라 확실히 끝장내려고. 약품이 부족한 거 알지. 말수가 가서 다 쓸어와라. 필리핀에 있는 병원을 털어서라고 다 가져와. 말수가 대답이 없자 삼일 후에 출발한다고 했다. 처음에 그는 거절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대신 여기 일이 더 급하다는 이유를 댔다. 환자는 어쩌고요. 너 없을 때도 돌아갔어. 네가 일 다하는 것처럼 으스대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해. 그는 자신이 의사 말에 반대 의사를 낸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운지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러나 용기를 냈다. 의사에게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래 내 걱정은 말고. 의사는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감히 조선인 주제에 내 말에 토를 달아. 오냐 오내 했더니 이제는 기어 오르네. 짜식. 너 말이야. 말수, 네 군의관님. 앞으로는 내 앞에서 명령에 토 달지 말어. 알았어. 그가 쐐기를 박았다. 알았어요. 말수는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 사이로 말수는 좋아 죽을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앗싸 가오리. 가라면 가야지. 그럼 너말고 내가 갈까. 의사는 이렇게 큰 소리쳤다. 그러나 군의관은 말수의 의사 정신과 헌신에 대한 믿음은이 커지고 있음을 알았다. 여순 말고 저놈도 데려가야지. 저런 놈이 의사질을 해야해. 그래야 환자가 살아. 저 놈은 태생이 의사야. 할애비라고 했던가. 아니 애비라고 했나. 어쨌든 조선에서 한의사를 했다고 했어. 그 피가 어디가겠어. 사실 필리핀은 될수만 있으면 자신이 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를 비워두고 내가 가겠다고 나설 수 없었다. 더구나 말수는 약품만 구해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일해야 할 노무자와 정신대 여성들 까지 모집해 와야 한다. 그 사이 조선 여자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인력이 부족해. 그렇다고 여순을 다시 넣을수도 없고. 넌 다고 해도 한 사람 갖고는 어림없어. 적어도 열 댓명은 있어야 해. 그런 귀찮은 일까지 겹치자 군의관은 대신 생각해 낸 것이 말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말수를 믿는다고 해도 저 놈이 도망칠수도 있지 않은가. 인파속으로 사라지면 어떻게 찾아. 필리핀은 섬도 많고 인구도 많다고 했는데. 그러나 곧 자신보다 더 의사 일에 적극적인 그를 의심하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의사는 자신의 말이 부탁이 아닌 명령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너도 알다시피 광산 노동자가 많이 부족하다. 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 대규모로 조선과 대만에서 학도병들이 온다. 거기다 위안부까지. 네가 할 일은 하찮은 게 아냐.

말수는 이곳이 걱정되지만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아쉬운 태도를 취했다. 문제는 여순 이었다. 그녀와 같이 갈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여자를 고르는 것은 자신이 자신 없다고 둘러대 봤으나 의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순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의사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고 말수는 거기서 멈췄다. 여순은 다친 병사들을 간호하는 일외에도 할 일이 더 있었다. 막사에 있는 여성들의 위생관리도 그녀 책임하에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간호병동을 떠나 막사로 내려갈 때면 여순은 가슴이 옥죄어 왔다. 처음에는 두 다리가 후둘후둘 떨리기 까지 했다.

지금은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목구멍에 무언가 걸려 있는 거 같았다. 내가 있을 곳은 저기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 오기도 했고 언제 다시 저곳으로 끌려 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순은 그것에서, 막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순이 검사 장비를 챙겨들고 아래쪽 막사로 내려가고 있다. 여성들은 막사 한 곳에 이미 집합해 있었다. 그녀들은 남자 의사가 아닌 여순이 오는 것을 반겼다. 특히 조선여자인 것이 마음에 들었고 그 여자가 한 때 자신들과 같이 생활에 것에 동류의식을 느꼈다. 여순은 그들을 조금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다. 아침 일찍 부터 서두렀기 때문에 급할 것은 없었다. 조장 언니는 여순의 입만 똑바로 쳐다봤다. 무슨 말이 나올지 가슴이 뛰었다. 혹시 병이라고 걸렸다면 낭패다. 모든 여성들이 그랬지만 그녀도 자신의 차례가 오자 두근 거리는 심장을 달랠 수 없었다. 여순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어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담담하게 알려주었다. 표정의 변화도 없고 억양도 차분한 것에 여순은 자신이 의사가 다 됐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약을 먹어야 한다거나 아직은 괜찮다는 말을 전할 때마다 여순은 당사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피했으나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약을 드셔야 해요. 빠지면 안 되고요. 콘돔을 꼭 쓰세요. 이런 말을 전할 때 여순은 그녀들의 사정이 딱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딱한 여성 가운데는 병에 걸리면 일을 하루 쉬는 경우도 있어 약을 받아들고는 웃기도 했다. 조장 언니도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지긋지긋해. 다행이지 뭐니. 하루라도 쉰다는 게.

그녀는 여순에게 기회가 되면 지난번 가봤던 해변에 가자고 했다. 고래가 지난번에 더 많이 왔다 갔어. 군함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언니가 등을 보이고 사라지면서 한 마디 했다. 그래, 저렇게라도 버텨야지. 어쨌든 살아서 나가는 것이 중요하거든. 힘들어도 주변을 챙기는 조장 언니가 믿음직스러웠다. 너스레를 떨면서 다독일 때는 심각한 것보다 가벼운 것이 훨씬 더 위안이 됐다. 여순이 처음에 어떤 상황인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도 용기를 준 것이 그 언니였다. 이번에는 여순이 그래야 할 차례가 왔다. 언니 조금만 참아. 약 잘 챙겨 먹고. 그래야 나아. 안 그러면 위험해. 언니가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여순아 고마워. 우리 전쟁 끝나면 신나게 달리기 시합하자.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이런 대화는 여순은 물론 막사 전체에 위안을 주었다.

여순이 떠나 올 때면 그들은 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손을 내밀면서 꼭 잡아 주는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안 좋은 여자들은 일에서 배제됐으며 광산에 끌려 가기도 했고 다른 모르는 곳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병균이 몸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자신의 생명 위협은 물론 군인들에게까지 위험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 상부는 그런 여자들은 걸러냈다. 여순은 거기에 드는 여자들의 최후가 어떤 지를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약을 더 세게 더 많이 주는 것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항생제 주사를 마음 놓고 놓을 수도 없었다. 주사는 아껴야 했다. 그래서 심한 경우보다는 치료 가능한 초기 병자에게 투여하는 게 원칙이었다. 간혹 여순은 그것을 어기기도 했다.

특히 조장언니에게는. 두 번 낙태까지 경험한 언니는 몸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병까지 얻었으니 곧 위험이 닥칠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언니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 그 약속 꼭 지켜. 해변에서 달리기 시합. 희미한 웃음을 뒤로 하고 여순은 가방을 챙겨 병동으로 올라갔다. 의사는 보고를 위해 들른 여순을 보고 특이사항이 없는지 형식적으로 물었다. 여순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여순이 검사를 담당한 이후로도 간혹 의사 입회라는 이유로 검진시 동행하기도 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했다. 한 번은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인도주의니 베푸는 삶이니 하는 뜬금없는 이야기로 여순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뭔지 아니? 바로 인술이야. 환자를 대하는 태도 말이야. 넌 조선에서 왔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거야. 그래서 내가 알려주는 거야.

의사는 은근한 눈길로 그렇게 말하고는 이 정도로 내가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강제로 하지 않고 인격으로 다스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공손한 여순은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권위에 여순이 복종하자 의사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어느 날 차트를 뒤지던 의사는 필리핀행 군함에 타지 않겠느냐고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인격만큼이나 느닷없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여순은 잠시 얼어붙은 듯 말을 하지 못했다. 의사의 말은 그것이 권유라 할지라도 명령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여순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망설였다. 말수처럼 말이다. 말수에게도 이 말이 전달 됐을까. 그녀는 말수의 오늘 근황을 알지 못한다. 하루 종일 검진을 했기 때문이다. 혼자면 곤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돼. 말수가 있어야 해. 그 순간 여순은 이런 생각을 했다. 어때, 좋지. 의사가 아직 대답을 못하고 있는 여순에게 재차 물었다. 처음 듣는 소리라서요. 필리핀 이라니요. 그녀는 짐짓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다리는 것을 얻었다는 만족감을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여순은 대답을 망설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물었으니 대답해야 한다. 그녀는 편한 대답을 했다. 선생님이 가라면 가야지만 어떤 피치못할 이유가 있는지요. 여순은 복종하는 사람답게 수줍게 물었다. 그러면서 의사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준 선물에 상대가 만족하는지 알아 보기 위해 그도 여순의 표정을 살피고 있어 특별한 표정변화는 없었다. 일이 되려는 조짐이 보인다. 그러나 이 기쁨을 군의관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 거기서 할 일이 있어. 여기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너 없을 때도 돌아갔어. 군의관은 말수처럼 걱정하는 여순에게 말수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했다. 안 돌아가도 할 수 없고. 어, 뭐 그런 서운한 모습 보이지 마.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아니니 너무 아쉬워 할 필요는 없고. 아마 한 달 후면 다시 여기 오게 될 거야. 그러니 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미리 상상해봐. 그녀는 그 순간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거절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여기 생활이 만족까지는 아니어도 정착돼가고 있어 잠시 탈출의 생각을 순간순간 놓치고 있었다. 그런데 알아서 배를 타라니. 배를 타고 섬을 떠나라니.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섬을 벗어 수 있다는 생각에 여순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여기서는 뚝하면 가슴이 뛰었지만 지금의 뛰는 가슴은 기존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의사가 싫으면 관두라는 듯한 태도로 재차 물었다. 여기 일은 어떻하고요? 의사가 부연 설명 대신 묻기만 하자 여순은 더는 물러설 수 없어 이렇게 비슷한 질문 형식으로 자신이 난처함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의사가 침묵했다. 이왕 나왔으니 여순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놔두고 어디를 간다고요? 이 순간 만큼은 여순의 마음이 진실이었다. 내가 빠지면 살 수 있는 환자들 가운데 여러 명이 죽어 나갈 수 있다. 여순은 정말로 사람을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것은 말수가 한 말과 같은 변명이었다. 둘은 기회가 오면 언제나 일을 우선으로 내세우고 떠나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거부하는 것으로 하자고 미리 서로에게 다짐을 한 상태였다. 입을 맞추면서 섬의 인력이 간혹 필리핀행 군함에 오르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의심을 사지 않고 빠져나가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 의견을 지금 써먹고 있다. 여순은 인원이 충원된 것도 아니고 환자가 준 것도 아닌데 급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은 빠지고 싶다고 했다.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나요? 선생님은 아시잖아요, 이곳 사정이 얼마나 험한지. 천연스러운 말에 여순은 순간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의 속마음을그가 알아채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쌓였다. 다행히 의사는 여순의 이런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동안의 여순에게 보냈던 신뢰는 어쩌면 맹목적인 것인줄도 몰랐다. 말수는? 내가 가면 말수는 어떻게 되지? 여순은 순간 말수를 기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말수가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말수 혼자서는 부족하다는 말을 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말수와 동행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련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그래, 이제 새로운 시작이야. 여순은 제가 안 갈 수가 없군요. 선생님 죄송해요. 일이 끝나면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여순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그 일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렸다.

의사는 이제서야 말귀를 알아 들었느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심하라고 했다. 여기보다 군함이 더 위험해. 폭격을 피할 수 없거든. 도망갈 데도 없어. 바다에서 어디 숨을 데가 있니. 여기는 산도 있고 언덕도 있지만. 그러니 우리 살아서 만나자. 의사는 이동 중에 군함이 간혹 적의 폭격을 받아 인명 피해가 난다고 말했다. 이곳에 처음 상륙했을때는 흔치 않았으나 근래 들어 적의 공세가 더욱 빈번해 졌는데 우리가 수세에 밀려서라기보다는 단지 적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의사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폭격에 대비해 숙련된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 갑판 위의 쓰러진 병사들을 급한 대로 돌봐야 하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했고 말수와 여순이 낙점을 받은 것이다. 의사는 두 사람을 보내면서 호의라는 것을 강조했으나 실상은 이런 위험에서 자신이 빠지고 싶지않은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여순을 씁쓸했으나 그래서 기쁨은 더 컸다. 

의무병만으로는 어림없어.  군의관도 부족하지. 숙련된 민간인 의사가 필요해. 그러나 폭탄이 떨어지는 갑판 위에서 부상병을 돕는 일은 총을 잡고 돌격 앞으로를 하는 병사들처럼 위험한 일이지. 그 위험한 일을 조선인에게 맡긴 것이다. 지난번 유능한 의사 둘을 한꺼번에 잃은 사건의 책임자였던 이곳 의사는 질책을 받았다. 의사는 전쟁터에서 병사처럼 흔하지 않았다. 장교보다 더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치거나 죽어도 타격을 덜 입을 수 있는 조선인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선인의 죽음에 대해 책임자가 질책을 받을 일은 없다. 그가 호의를 베푼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다. 의사는 뒷걸음질 칠 생각 말고 앞으로 씩씩하게 나가라고 조언했다. 그는 요즘들어 무슨 책을 읽는지 뜻모를 말들을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그 앞에서 싫어하는 내색을 할 수 는 없었다. 그즈음 광산에서는 폭동의 조짐이 일었다. 인부들의 일은 고되고 다치고 죽는 일은 허다했다. 그러나 먹고 자는 것은 짐승과 다름없었다. 노예 생활도 이처럼 처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수는 그 자신이 그것을 보고 직접 겪었기 때문에 참상을 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수술칼 대신 곡괭이 자루를 쥐고 있었다면 폭동은 벌써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이곳 사정은 나빠지고 있다. 전쟁이 심해지면서 군수품은 물론 식량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돌아가는 배급은 열악했다. 종일 일해도 겨우 풀 죽 한그릇이 전부인 때도 있었다. 불만이 하늘을 찔렀으나 먼저 나서는 자는 없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냐. 하는 말을 듣고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자포자기 상황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뼈만 앙상한 몸으로 그가 다시 한 번 불만을 토로했다.  십장놈 죽이고 관리고 날리고 갈데까지 가보는 거지 뭐. 그들은 폭동까지 생각하게 됐다. 말수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런 낌새를 그들의 숨기는 듯한 눈초리에서 감지했다. 살인과 폭동이 일어나면 조선인인 말수도 힘들어진다. 비록 그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가 사건에 대해 사전에 몰랐다면 의심을 받을 것이다. 알면서도 보고 하지 않았다면 일은 더 커진다. 노무자들을 늘 치료하면서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았다면 밀고하지 않는 죄가 클 것이다.

말수는 그런 일이 일어 날지 모른다는 분위기를 상관에게 전하고 조선인들의 처우에 대해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폭동까지는 아니어도 일본인을 해치거나 도주하면 전투력 손실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당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굶어 죽는데 곡괭이질을 할 수 있겠어요. 말수는 좀 더 대담하게 질문했다. 그러자 상관인 의사는 네가 그 일에 나서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며 그들의 일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관리부서가 따로 있잖아. 그리고 설사 우리 책임이라고 해도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조선인들은 너무 욕심이 과하다고 했다. 나중에 고향에 들어가면 수북한 군표로 부자가 되지 않으냐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공짜로 하는 일이 아냐. 군표는 쌓아 놓고 불평불만이라니. 그게 써먹을 수 있는 거냐. 말수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끼니를 해결해 달라는 것인데 왜놈들이 너무 심하군. 말수는 속으로 분을 토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미리 보고했으니 나중에 일이 벌어져도 책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 앞섰다. 그러나 배를 타기 전에 폭동이 실제로 발생하면 어떤 사태로 발전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하는지 그러기 전에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막바른 골목으로 전쟁읕 치닫고 있었다. 의사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전투보다는 부상병 치료가 우리의 책무라고 늘상 말하고 있었으나 늘 한 쪽 귀는 다른 쪽에 관심을 열어 두고 있었다. 부상병을 통해 전황을 짐작하고 스스로 판단하기도 하면서 전쟁이 어느 쪽에 유리한지를 가늠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도 목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떨지를 가늠해 보면서 그는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 양놈들에게 포위 당하거나 포사격으로 막사가 무너지면 내 시체를 찾을수나 있을까. 의사는 하루 하루가 지나가면서 그런 두려움을 느꼈다. 누가 알겠어. 거즈 대신 총을 집어야 할지. 난 칼질은 잘해도 총질은 못해. 내 특기가 아니라고. 취미도 물론 아니고. 난 새장에 갇힌 새야. 벗어나야지. 새장을 벗어나려는 본능은 말수나 여순이나 일본인 의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의사는 그 자신이 배를 타는 것을 꺼려했다. 원했다면 어떤 이유를 대서든지 필피핀으로 옮겼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여기 섬을 나가는 것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지 않고 있었다. 필리핀이 더 위험할 수 있어. 거기는 적들이 완강히 버텨. 사생결단이라고 들었거든. 의사는 언젠가 그런 말을 말수에게 한 적이 있었고 말수는 그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말수와 여순의 생각은 달랐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지상의 지옥을 벗어나 낙원으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설사 잘못되더라도 희망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방법이 있을거야. 의사는 설마 자신이 죽겠어. 하는 마음이고 말수나 여순은 그와는 다른 처지였던 것이다. 의사의 필리핀행 제의를 받고 여순은 일과를 설치고 있다. 군함 승선이 확정된 이후로 몸이 붕 떠 있었다. 그렇다고 환자를 대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 열심히 그들을 돌보는데 진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시간은 더디게 지나갔고 마음은 허전해 늘 배고픈 상태였다. 요즘 따라 환자들은 부쩍 늘었다. 병사들은 무더기로 들어왔고 간혹 광산의 조선인 노무자도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병실 막사로 들이닥쳤다. 환자들은 같았다. 포에 다쳤든 총에 다쳤든 칼에 찔렸든 그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고 그렇게 지르면 피가 더 많이 나와 죽을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혀를 깨물고도 비명을 참았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게 젖먹던 힘을 다해 고함을 치던 자가 감기환자처럼 조용하다. 그러나 죽음을 직감한  병사는 그런 경고가 먹히지 않는다. 죽기전에 마음껏 질러보는 것이 소용이기나 한 듯이 쉬지 않고 악을 썼다. 그러다가 아무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면 비명의 주인공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한다.

여순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리치는 병사보다는 숨죽인 병사들을 더 챙겼다.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손 한 번 잡아 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취약을 줘요. 너무 아파요. 나 살 수 있죠. 환자들은 모두 애가 된다. 이런 애들이 총알이 쏟아지는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정말 전쟁은 무섭다. 얼른 나아야 지요. 천황을 위해 다시 진군할 겁니다. 덴노 반자이. 어떤 병사는 죽은 순간에 이렇게 외쳤다. 여순은 경악했다. 대개는 조용히 죽거나 엄마를 부라다 죽은 것이 상례였다. 죽기전에는 덴노를 외치더라도 죽음의 사신이 손을 내밀었을 때는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그 병사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힘이 가해진다. 무섭다. 여순은 손을 빼고 싶다. 그러나 병사는 더 세게 쥔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덴노를 외친다. 죽은 다음에 손을 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워낙 강하게 쥐었다. 여순은 죽은 자의 손을 치우면서 좀 더 친절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죽음의 순간에 아픔을 덜어 준다는 것은 축복이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축북을 오래 내려 줄거야. 그런데 그 축복하는 의약품이 부족하다. 마지막 순간을 편히 가게 하는 마취약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 여순은 이곳 생활이 끔찍하다고 여긴다.

무슨 미련이 남아 있어. 그리고 왠 자비심. 여순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는 각자의 마지막을 보면서 또다른 상념에 빠진다. 자신의 생이 다했다는 것을 아는 환자는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내 몫의 식사를 그에게 주라고 한다. 잘못알고 있다. 죽으면 네 몫은 없고 그래서 줄 것도 없다. 나를 기억해 주세요. 내 이름은 와타나베입니다. 계급은 오장이고요. 고향은 오사카, 그곳에 어머니가 살고 있어요. 전쟁이 끝나면 이곳으로 편지나 보내줘요. 주소를 적은 종이를 전해 주는 병사는 여순을 천사로 생각하고 있다. 뭐든 부탁만 하면 들어주는 천사. 날개를 타고 지금쯤 오사카 하늘을 날고 있을 거야. 병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돌더니 병사는 숨쉬기를 멈추었다. 

이것이 인간이다. 한 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의 죽음이 지나가는 밤이면 여순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자문에 빠져들었다. 의사처럼 여순도 철학자가 되고 있다.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밖으로 나온다. 죽으면 무슨 소용있어. 인간은 뭐지? 사는 것은 또 뭐고. 의사의 뜬금 없는 말을 지금 자신이 받아 지껄이고 있다. 이러다 미칠거야. 제정신이 되레 이상한 거지. 여순은 정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에 아침을 맞았다. 어두워서 보지 못한 밖의 풍경을 보리라. 여순은 그런 기대로 이미 해가 들어찬 막사 밖으로 나왔다. 습한 공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축축한 기분이 들었으나 눈으로 보는 것이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해는 불쑥불쑥 물 위로 떠올랐다. 마치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그것은 밖으로 나와 크게 요동쳤다. 자신의 몸에 생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여순은 느꼈다. 그녀는 떠난다는 사실 하나만을 단단히 붙잡고 그것이 오늘 저녁 일지 아니면 다음 날에 찾아올지 기다렸다. 기다림으로 그녀는 버티고 있었다. 해변 저 멀리 정박해 있던 군함이 그 배는 아닐까. 괴물처럼 음산하게 보였던 그것이 이제는 애타게 기다려지는 그 무엇이 되었다.

그 날 오후 말수의 예상대로 조선인 노무자들의 반란이 있었다. 말이 반란이지 단순한 소란에 불과했다. 일본인 당직자는 그 날의 일지에 서너 명이 고함을 치며 갣오 밖으로 100여미터 달아난 작은 소요 사태라고 적었다. 그런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직적이지 못했다. 도망치다 말리는 일본인 경비병 한 명을 부상입히는데 그쳤다. 반면 그들은 현장에서 세 명이 총에 맞아 죽고 달아난 한 명은 체포됐다. 반란에 참여한 네 명의 상황은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됐다. 작은 것이었지만 일본인들은 작게 보지 않았다. 작은 것이 커지면 진짜 큰 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광산의 조선인 인부들을 전부 한 곳에 모았다. 본보기가 필요했다. 군인들 가운데 한 명이 총 끝에 달린 대검을 꺼내 들었다. 그가 그것을 앞으로 세우자 날선 검의 끝 부분이 반짝였다. 모여있던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보이코트 하겠다는 신호가 아니라 차마 볼 수 없어 그랬던 것이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도망치다 잡혀 나무에 묶여있는 자신의 동료가 어떤 꼴을 당할지 예상했다. 

통닭처럼 묶인 그는 날선 총검이 다가 오는 것을 느꼈으나 그것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 지는 알지 못했다. 조선인 노무자들의 폭행으로 부상당한 감시병은 다리를 세게 맞았는지 절뚝 거리는 걸음으로 힘겹게 조선인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자신을 다치게 한 조선인 노무자를 쳐다봤다. 총검은 감시병과는 아직 사이를 두고 있었다. 총검을 든 자는 감시병보다 계급이 낮은지 다가오려고 하자 넌 거기 서 있어. 한 마디 말에 더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명령을 끝낸 감시병은 자신을 다치게 한 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마음은 일렁이는 탱양보다 더 강했다. 감히 조센징이 나를 쳐. 그것도 다리를 걸고 넘어졌어. 그는 이런 죄명을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치고는 총검을 받아서 묶인 병사를 푹푹 찔렀다. 그 동작은 빠르고 정확해서 묶인 병사는 금새 사방으로 피를 통해냈다. 조선인들은 돌렸던 눈을 다시 가져와 그 상황을 지켜봤다. 눈과 눈들이 마주치자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던 찔린 노무자가 뻗어 나오는 자신의 피를 보고는 피다, 피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 소리를 곧 찔러총을 하면서 악을 쓰는 감시병의 소리에 묻혔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노무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감시병들이 돌린 고개를 다시 원위치로 하라고 명령하자 그들은 그렇게 했다.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명이 그러려고 했으나 조금 늦게 고개를 돌렸다는 이유로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얻어 맞자 노무자들은 이제는 나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언덕에서 말수는 그들이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병실로 쓰는 막사로 돌아왔다. 곧 의사를 찾는 전갈이 왔다. 사망확인서가 필요해요. 병사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말수를 찾았다. 작업 중 부주의에 따른 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총검으로 찔려 죽은 노무자의 사인은 이렇게 정리됐다. 말수는 그 옆에 사인만 했다. 의사의 형식적인 검시도 끝났다. 살아 남은 자들은 시체를 나무에서 끌어 내렸다. 갇다 버려. 그들은 거적으로 덮은 시체를 들고 이미 파 놓은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런 시간은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았다. 말수는 보고서를 의사에게 내밀었고 의사는 죽음의 보고서를 본 후 귀찮다는 듯이 급하게 사인했다.

반란은 막사의 의사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전혀 예상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들도 인간이었나. 문득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먹고 자는 짐승이 인간에게 저항을 했다. 뭐가 문제지. 의사는 생각했으나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반발과 저항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전쟁터지만 이런 일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만 믿었던 의사는 그 사실을 직접 보고 받고도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사건은 섬의 지휘관에게도 보고됐다. 의사의 말을 들은 지휘관은 싹을 잘라야 한다고 씩씩댔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더 세게 나가야 짐승의 본능을 꺾을 수 있다고 여겼다.

전쟁도 어려운데 조센징 노무자들까지 이러니 지휘관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 권총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그것이 마치 의사의 책임인 것처럼 화를 냈다. 여기 조센징 의사도 있어요. 네, 부하로 쓰고 있습니다. 손재주가 좋아요. 누가 그걸 물어봤나요. 그 자는 지금 어디 있소. 시체 수습을 확인하고 있을 겁니다. 여기로 오라고 부를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수가 들어왔다. 선생님, 일은 처리됐습니다. 보고 드리려고요. 거기 않으시오. 지휘관이 말수에게 명령했다. 그는 그대로 따랐다. 의사가 의자를 내주는 척 몸을 한번 움직였다. 지휘관은 말수를 노려봤다. 말수는 그가 이미 취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눈동자가 풀렸고 입에서는 거친 알코올 냄새가 풍겨왔다. 잘못 걸려 들었군. 생긴 것은나 보다 더 험해.  예상대로 지휘관은 말수를 닦달했다. 네가 십장이었잖아. 십장, 십장이 그것도 책임못져. 미리 알았어야지. 몰랐으면 넌 자격이 없어. 말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채기 못했어. 의사라고 그쪽일에서 아주 손을 떼면 어쩌란 말이야. 그가 식탁위에 권총집에 손을 턱하고 올려 놓았다. 이자는 입이 거칠어. 입이 거친 자는 사고를 치지. 말수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제 잘못입니다. 이제야 실토하는군. 너, 의사라고 함부로 굴면 재미었어. 그가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는 시늉을 하닥 그만두었다. 에, 귀찮아. 귀찮다고. 다들 나가봐. 지휘관이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놈이 다쳐서도 그렇게 큰 소리 칠래. 내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할 주제에. 나가라고 했으나 지휘관은 말수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말수의 상관인 의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나가라고 했던 지휘관은 권총집을 허리에 차고 자기 방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갔다. 의사는 별 거 아니라는 식의 표정을 짓고는 우리일이나 하자고 함깨 막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휘관은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서랍장을 열어 술병을 꺼내 들었다. 사실 그는 화를 낼 핑겟거리를 찾고 있었다. 노무자 서너명이 달려 간 것이 뭐 대수겠는가. 따지고 보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에게 좌천성 문책이 올 것을 알았다. 거듭된 전투에서 성과를 올리기 보다는 연속해서 지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래, 해군 중장인 나를 어쩌겠어. 그러나 중장은 그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에 내몰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랜 군생활에서 오는 눈치와 감이 그랬다. 군복을 벗어야 하는 치욕이다. 그래서 그는 오버를 했고 낮부터 술을 먹고 있다. 조센징 놈. 입으로 그렇게 외쳤으나 조센징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양놈에게 패한 뼈아픈 전과만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그가 소리쳤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들어와 척 하고 인사를 올려 붙였다. 다 꼴보기 싫었다. 됐어 임마. 목이 마르다. 물은 왜 없니. 찾으면 없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너 여기 앉아. 물을 가지러 가는 부관을 앉힌 그는 빈 물잔에 가득 위스키를 부었다. 마셔., 원샷이다. 지휘관은 망가지고 있었다. 술로 자신을 달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 너, 왜 여기 있어. 나가. 당장 나가. 지휘관이 어떨떨한 표정으로 명령에 따랐다. 


부관이 나가고 나서 지휘관은 남은 술을 병째 들이켰다. 갑자기 취기가 올랐고 취기를 달래기 위해 다시 부관을 불러들였다. 상관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부관은 상관이 자신의 귀를 잡아 당겨 무슨 말을 하자 곧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의사에게 부관에게 했던 것처럼 귀를 잡아 당기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대고는 뭐라고 뭘라고 중얼거렸다. 의사도 부관처럼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어서 가봐. 가보라고. 의사 선생. 지휘관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의사는 구부정하게 등을 구부리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게 뭔 일이래. 내가 똥개야. 오라 가라 오늘은 너무 심하네. 의사는 의사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에 울컥했다. 지휘관이 나가는 의사를 돌려 세워 표정을 봤더라면 그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의사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무례한 놈. 뭐, 이런 것도 부탁이라고 들어줘야 하나. 아니, 군복을 벗으면 벗는 거지. 꼭 전역하는 그 순간 까지 군바릴 티를 내야겠어. 
 

병실에 온 의사는 환자를 돌보고 있는여순 옆으로 다가왔다. 마치 여순이 환자인것처럼 돌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온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지휘관이 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고개를 기울여 귓속말을 했다. 차마 마주보고 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이 미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여순은 돌아봤다. 의사는 초점 없는 여순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빛나던 여순의 눈이 생기를 잃었다. 서리 맞은 작물처럼 순식간에 푸른 빛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왜 변명안했겠니? 위안소에 여자 많다고 했지. 지휘관이 뭐라는 줄 알아. 난 의사가 좋아. 이러는 거야. 그래도 좀. 내가 버텼어. 그랬더니 그 조센징 여의사도 원래 막사 출신 아냐. 이러는 거야. 내가 거기에 졌어. 끝까지 방어하지 못해 미안해. 의사는 이 말을 여순에게 들려 주고 싶었다. 자신이 중간에서 장난친 것이 아니라고. 사실 의사가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 자신도 여순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고 말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놈, 전쟁터라고 민간인을 함부로 해도 돼. 의사는 지휘관 놈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나도 남자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해. 일본으로 데려가 함께 병원 차리겠다고 누차 애기 했을텐데. 의사는 정말로 지휘관을 죽여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달을 보고 감상에 젖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는 있지만 산 자를 죽일 수 있는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권총을 이미 쏘고 있었다. 꽝 꽝, 아니 한 발 더 꽝. 확인 사살을 위해 나머지 한 발은 대가리에. 의사는 그렇게 총 네 발을 지휘관의 몸통에 박아 넣었다. 도대체 지휘관이라는 자는 남의 기분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장교용으로 배정된 여자들을 놔두고 굳이 여순을 꼭 지목한 것에 의사는 배신감을 느꼈다. 지금껏 누구한테도 당해보지 못한 경험에 의사는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분한 것은 여순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여순은 어떻게 해야 옳은지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의사는 그녀가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제의를 왜 끝까지 거부하지 못 했느냐고 스스로를 타박했다. 성병을 핑계로 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는 당황한 나머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 병 있어요. 여순은 의사가 하지 못한 말을 울음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지휘관에게 전달하라는 뜻이었다. 의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사실은 지휘관의 명을 따르지 말라는 거부 의사 같은 것으로 인식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의사는 옷을 고쳐 입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중요한 것을 놓고 왔는데 급히 찾으러 가는 표정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지휘관 숙소로 향했다. 그가 어떤 답을 가져올지 여순은 미리 짐작하지 않았다. 어떤 것이든 결정된 것을 이제는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의 거부는 죽음이외에는 없었다. 의사의 재방문에 지휘관은 무심한 표정을 지었으나 성병이라는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바로 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는 얼굴로 나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걱정말라며 되레 의사를 다독였다. 만약 그러면 네가 고쳐주면 되지 않느냐고 지휘관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독주를 먹는 이유를 알고 있지. 모른다고. 이게 40도가 넘어. 소독 되는 거 알지. 지휘관이 의사를 놀렸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여순은 오늘 밤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하나는 내일 아침 일찍 군함을 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휘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다. 싫은 기색도 할 수 없었다. 배를 타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지휘관의 청을 들어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한꺼번에 닥쳤어. 이것도 세상 공평하다고 해야 하나. 여순은 힘없이 돌아서는 의사를 보면서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도 저와 비슷하다고 한탄했다. 여순은 지휘관이 있는 숙소로 가기 전에 말수가 준 권총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신 다른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사가 자리를 빈틈을 타 약병 몇 개를 챙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느냐고 독자들은 물을 필요가 없다. 궁지에 몰린 여자는 못할 것이 없다. 용기는 나약한 낼 때 더 크게 발휘되는 법이다. 

독자들 중 일부는 뜯어 말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탈출할 절호의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는 위험한 행동이니 당장 멈추라고. 눈 한 번 꾹 감으면 그만이라고. 어떤 사람은 차마 밖으로 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하고 여순을 설득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은 아니지. 여순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순 자신도 지금은 이렇지만 조금후에는 어떨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순의 마음은 분노로 끊고 있다. 막사의 여순이 아냐. 385번 방 번호의 주인이 아니라고. 난 의사이며 간호사야. 내가 얼마나 살린 줄 알아. 할 만큼 했다고. 그래서 탈출의 기회도 온 거고. 그런데 하필 운명도 야속하지. 오늘 밤에 지휘관이 부르다니. 이를 어째. 말수는 어디갔어. 필요할 때는 안 보여. 아냐, 말수까지 위험에 빠트리게 할 순 없어. 이 일은 전적으로 내 일이야. 다른 누구의 일도 아닌 바로 내 일이라고. 

사람은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힘이 생길 때가 있고 이성에 앞서 어떤 주체할 수 없는 자존심에 전신을 맡겨 버릴 때가 있는 법이다. 나를 거꾸러뜨리면 너도 거꾸러져야 한다. 여순은 한 번 먹은 의지를 되돌리지 않고 다지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여순은 안 하던 분칠을 하고 의사가 언젠가 내민 화장품도 발랐다.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옷은 깨끗한 흰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른 아침에 남편 생일 꽃을 사러 가는 부인의 차림새로 변신한 여순은 예뻣다. 손거울 속의 그녀는 뽀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드러나는 속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심의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이전의 서투른 간호사를 독자들은 잊어야 한다. 그리고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녀는 무서운 결행에 대한 대가를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자, 두번째 청을 받은지 삼 십 분이 지났다. 더 지체할 수 없다. 그녀는 멀리 있는 권총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대신 가까이 있는 약을 챙겼다. 여러 약물을 혼합하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여순은 저쪽에서 힐끔 거리는 의사에게 다가가 새벽 5시 출발이면 지금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애써 웃음 지었다.

어색한 순간을 깨기 위해 그는 길어야 보름이면 올 텐데, 뭐 작별까지야. 그런 눈으로 여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조심해. 잠깐이면 돼. 참아. 모든 일은 지나가고 지나간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때가 있어. 그러니. 오늘 따라 의사는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은 목구멍에 걸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 대신 그는 의자를 당겨 잘 갔다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말 없이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 행동에는 어딘지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여순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여순이 안쓰럽다. 일본에 있는 부인에 대한 생각은 그 순간 들지 않았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의사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듯이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로 여순을 바라봤다. 살인죄를 짓고 사형 구형을 외치는 재판관을 응시하는 피고인의 심정이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의사를 덮쳤다. 그도 나처럼 여순을부르는구나. 그는 체념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계급이 높은 그를 의사가 상대할 수는 없었다. 여순이 의사를 상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의사는 앞으로 솟아 엄격해 보이는 지휘관의 이마를 떠올렸다. 그 이마라면 총알이 들어 박히기에 좋겠군. 정말 보기 좋을거야. 그러나 의사는 침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떠오른 나쁜 생각에서 도망치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지휘관을 상대로 대들어 봤자 창피만 당할 뿐이다. 저 여자는 내 여자요. 의사는 잠꼬대 같은 말을 생각했으나 그 생각을 곧 후회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언제나 기어이 온다. 가지 말았으면 하는 시간이 가는 것처럼. 여순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했다. 다 팔자소관이겠지. 내가 의사라고.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한 때 나는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살아난 사람에게 고마운 인사를 받았을 때는 훌륭한 사람이라도 된 양 으스대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내 처지를 보라. 팔려가고 있다. 쌀 한 되에 팔려가고 있다. 아냐, 난 거부 할 수 있어.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란 말이다. 두 생각이 여순의 머리에서 서로 삿대질을 했다. 그러나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쪽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다 운명이야. 팔자 센 여자가 어기 가겠어. 바로 여기 있잖아. 여순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그렇게 작정했다. 그것이 편했다. 다른 방도가 없을 때는 인정하는 것이다.지금도 마찬가지다. 선택지가 없는데 버텨봤자 자신만 더 손해인 것이다. 그래, 인정하자. 나에게는 숱한 일들이 일어났어.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간호사 일을 하다니. 그래 이런 것이 기적 아니고 뭐겠어. 한 번 온 기적은 다시 올지 몰라. 기적은 때론 연속으로 오니까. 기대라도 해보지 뭐. 단 후회할 정도가 아닌선에서.

여순은 일어섰다. 조금전만 해도 오물을 뒤집어 썼는데 지금은 조금은 털어낸 기분이었다. 그러나 냄새는 빠지지 않고 있다. 그것까지는 무리인가. 좋다. 갈데까지 가보는 것지 뭐. 냄새야 몸을 한 번 털면 되지. 실제로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여순은 펄쩍 뛰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춤추듯이 몸을 흔들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강아지가 온 몸을 털어 물기를 제거하듯이 그렇게 자신도 흉내를 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니 정말 냄새마저 떠난 것 같았다. 할 일을 마친 여순은 자신에게 닥쳐 온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지휘관 숙소로 향했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했을때 오는 심한 가슴 통증이 숨을 헐떡이게 했다. 현기증이 왔다. 그러나 여순은 쓰러지지 않도록 두 발에 힘을 주었다. 나는 힘없는 사람이야. 비틀거리는 건 당연해. 겨우 버티고 있어. 몸도 그렇고 정신도 그래. 오 분여 거리를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다시 버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 버려지는 것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재차 버려지고 있었다. 겨우 진창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그곳에 빠지고 있다.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럼 그렇지, 내가 오죽하겠어. 정해진 팔자가 바뀌겠냐고. 그렇게 자학하면서 여순은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지휘관을 만나러 길을 따라 걸었다. 치료하러 가는 거야. 병든자를 치료하러 가는 거야. 여순은 억지로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그가 고맙다고 하겠지. 아픈 몸을 치료했으니 당연하지. 그것도 못하면 그게 어디 사람이야 짐승이지. 나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어. 죽어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겨우 손만 잡고 있었지. 떨리는 손은 어찌나 힘이 세던지 죽고 나서도 떼어내는데 고욕이었어. 그래도 마지막을 보냈다는 마음에 마음이 편안했었지. 그럴 때면 막사의 일은 까마득히 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자신이 고마웠어. 내가 자랑스럽기 까지 했다니까. 세상에서 쓰임새 있는 존재가 바로 나야 나, 여순이라고. 이렇게 외치고 싶었어. 나, 이런 사람이야. 이거 왜이래. 혹은 나도 괜찮은 사람이지. 하고 물어보고 싶었어. 

그럴 때 여순은 살아 있다는 생동감이 들었고 그것은 남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손을 내밀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도움을 받아서 고마운 사람 그러니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드나무 신세로 전락했다. 누구 책임인가. 말수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일부러 여순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궁지에 몰아넣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득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 나의 이 길은 지휘관이 독단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서는 혐오의 느낌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녀는 주머니 속의 약병을 손에 꼭 쥐면서 자신의 운명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문은 열려 있었고 지휘관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여순은 그가 자신을 여기로 데리고 온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조금 구부정하게 숙인 뒷모습에서는 어떤 위엄의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늙은이 아닌가. 이런 늙은이가 나를, 감히 나를 여기로 오게했어. 이 놈 어디 죽어봐라, 이런 마음으로 여순은 떨리는 발길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러나 그는 열린 문을 두드리는 노크에 반응이 없었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도, 거의 등이 닿을 정도로 바로 뒤에 섰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늦게 온 것에 대한 불만인가. 자신의 권위가 상처를 입어 화를 내려다 잠깐 멈춘 동작인가. 일부러 그럴 것이다. 오래 산자들은, 권위를 버린 적이 없는자들은 늘 이런 모습이다. 

지금이 기회다. 순간 여순은 준비한 주사기를 전투복 깃 사이로 드러난 목 뒤에 깊이 찔러 넣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주사라면 자신있다. 수백번 수천번 아니 수만번을 찔렀다. 얼마의 힘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떤 순간에 찔러야 제대로 들어가는지 여순은 눈을 감고도 알았다.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아프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주사하나는 잘 놓거든. 아픈 줄로 모르는 데 벌써 약을 몸에 들어가서 혈관을 따라 돌고 있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몸 속에 넘쳐나는 알코올은 마취약을 세게 끌어 당길 것이다. 알코올과 마위약의 조합은 떨어지는 폭푸수처럼 재빠르다.  넌 모를 거야. 네가 어떻게 알겠지. 명령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지. 세상에 안 되는 일도 있단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야. 네가 아차 싶을 때는 이미 저승세계로 가는 마차에 올라탄 뒤지. 울고 불고 해봐야 소용없어. 넌 죽은 목숨이니. 네 피는 굳었고 더는 돌지 않아. 

옷 속에 쥔 주사기를 잡고 부들거리는 심정으로 여순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 반발 정도다. 이제 옆 모습이 보인다. 지휘관은 왼손으로 술병을, 오른 손으로는 식탁을 모서리를 잡고 균형을 잡은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아까와 같은 동작이었다. 누가 동작그만 명령을 내리고 쉬어 라고 구령을 넣지 않은 자세 그대로 였다. 여순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열 얼굴을 쳐다봤다. 솜털이 자욱한 왼 뺨은 붉게 상기됐고 턱에는 깎지 않은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 있었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늙은 군인의 모습은 아니어도 그런데로 군인정신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사라졌다. 그는 몸은 지탱했으나 정신은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들어 들어온 누군가를 확인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 살았으나 죽은 자가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여순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다. 여순이 모르는 것처럼 지휘관도 그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려고 온 여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것은 지휘관이나 여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순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러나 빈손이었다. 여순은 빈손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나왔다. 왔습니다, 지휘관님. 어디서 그런 첫 말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왔다니, 내가 왔다니, 그래 이것은 보고다. 지휘선상에 있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는 보고다. 여순은 자신이 불려온 하급자라는 신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명령만 내려주세요. 명령에 따라 왔으니 하라면 하라는대로 따르지요. 이건가. 이것을 여순이 바란 건가. 그녀는 주머니 속의 주사기를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말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다. 

제가 왔습니다. 병동에서 일하는 조선 간호사 여순이가요. 그러나 이번에도 지휘관은 대꾸가 없었다. 단정한 그의 몸이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을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순간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그가 앉은 채로 잠에 빠졌다. 잠을 자는 자는 지휘관이든 부하든 다를 것이 없었다. 자는 순간에는 모른다. 여순은 혼란에 빠졌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인가, 아닌가. 이럴 때 해치우면. 비겁하다. 비겁이라니. 날 해치는 자를 해치는 것이 비겁한 짓인가. 아닐 것이다. 여순은 그런 것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망설였다. 기회라면 기회고 아니라면 아니었다. 무방비 상태의 그와 위험한 물건을 소지한 그녀.

여순은 자신의 몸에서 혼내 주려는 생각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을 그녀가 확실히 인식한 순간 그가 어이 없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몸을 길게 뻗었다. 다행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의자의 폭이 넓었고 길었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꼴이 된 것이다. 너도 별수 없구나. 그래 푹자라. 자고 일어나서 간밤의 일을 생각해 보라. 간호사는 어디있어? 고함을 칠래. 그렇다면 해봐라. 난 군함에 몸을 실었다. 네가 숙취로 무언가를 찾아 해맬때 난 유유히 흐르는 태평양 바다를 노 저어 간다. 알았니, 이 놈아. 여순은 제법 용기를 냈다. 가야지. 여기 머물 이유가 없어. 넌 살았어. 덕분에 나도 살았다. 고맙다. 

여순은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네가 내 명령을 어기고 도망치려고 그러느냐고 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여순은 그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가가 가볍게 어깨에 손을 댔다. 그러면서 그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 떠졌던 눈이 반쯤 위로 올라갔고 입에서는 심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그는 인사불성으로 취해있었다. 여순은 다시 주머니 속의 주사기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코를 골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역겨운 알코올 냄새가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여순은 에, 더러워, 더러워 속으로 외치면서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그냥 이곳을 이 상태로 남겨두고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결정의 순간은 여기를 걸어 올 때 느꼈던 그 시간 만큼이나 느리게 지나갔다.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로 했던 마음을 돌려먹었다. 어차피 이자와는 당분간 떨어져 있다. 곧 날이 밝으면 나는 군함에 올라탄다. 뒤늦게 술이 깼다고 해도 자신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려고 했던 목적이 사라지자 여순은 긴장이 풀렸는지 사방을 둘러 보는 여유를 찾았다. 한 면 벽을 꽉 채운 주변 지도와 지도 옆에 걸린 긴 환도가 눈에 띄었다. 환도, 그렇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 그것이 달리는 말에 매달려 절거덕 거렸었지. 여순은 칼을 떠올릴 때마다 죽마을 순사가 거침없이 다가왔던 환영에 시달렸다.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났나 싶었는데 다시 그것을 보자 여순은 움찔했다. 고정된 그것이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정신을 수습했다. 사쿠라 꽃이 활짝 핀 다른 쪽 벽의 위쪽에 걸린 커다란 시계의 바늘이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더 둘러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몇 발짝 걸으면서 등 뒤에서 어떤 기운이 오는지 살폈다. 오싹하지도 그렇다고 따뜻한 전송의 느낌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그녀는 들어갈 때 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을 알았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서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녀는 발길을 빠르게 움직였다. 한시 바삐 여기서 달아나자. 포위망을 벗어나는 병사의 심정으로 여순은 달리듯이 언덕을 내려왔다. 남은 시간은 푹 자자. 그래야 준비된 계획을 실천할 수 있다. 몽유병 환자가 아침이슬을 맞고 정신이 깨어나서 자기 방을 찾아 들듯이 서둘러 자기 자리를 향해 여순은 움직였다. 등 뒤에서는 어떤 따까움도 없었다. 그녀는 말수가 깨우러 오기전에 일어나 있었다. 자신을 안내하는 수병 장교가 문 앞에서 서성였다. 여순은 잠시 후 도착한 말수와 함께 소병 장교를 따라 해안가로 행했다. 

갑판은 생각보다 넓었다. 넓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처럼 넓을 줄은 몰랐다. 학교 운동장보다 훨씬 넓고 길어서 여순은 끝을 보기 위해 손을 모아야 했다. 이렇게 넓은 것이 바다에 떠서 움직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작은 보트를 타고 동아줄 사다리에 의지해 어렵게 올라온 군함의 갑판에는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급박했던 상황이 얼마전에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굴러다니는 탄피와 갑판 주변에 맞은 총알 자국들이 어지러웠다. 여순은 심하지는 않지만 구토를 느꼈다. 끌려올 때 가졌던 그 느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었다. 여순은 침착하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설사 멀미가 와도 그 때의 그런 처참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내가 아니지 않는가. 새 옷을 처음으로 입은 아이처럼 실수로 더러워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압박이 그녀를 지배했다. 스스로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신으로 그것을 이겨내려고 열중했다. 당장 치료해야 할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순은 옆에는 군복을 입고 팔뚝에 의사를 표시하는 붉은 십자가 완장을 찬 말수가 그런 여순을 다독였다. 넌 참을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여순이 바로 너야. 멋져. 멋지다고. 이렇게 용기를 주었다. 여순은 그 말 보다는 군복을 입은 말수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짜 일본 의사처럼 보였다. 갑판 위에서 호통치고 쌍욕을 하던 말수의 그림자가 어른 거렸다. 그래. 갑판에 섰을 때가 예전의 모습이지. 그에게 칼 잡은 의사의 모습이 어울릴까. 아냐, 그는 갔어. 아주 멀리 갔어. 그리고 새로운 말수가 온 거야. 사람이 어쩜 저렇게 변할 수가 있지. 여순은 말수를 볼 때마다 놀라웠다.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어. 군의관 완장을 찼어. 말수가 일본 장교라고. 여순은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멀미를 밀어내고 있었다. 난 뭐야. 군복을 입었어도 계급장이란 것이, 달려 있긴 해. 그녀는 일본 군대의 계급 체계를 알지 못했다. 관심이 없는 분야라서 지금도 병사나 장교를 계급장만 보고는 잘 모른다. 자신도 군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군복에 어떤 계급장이 달려 있는 거야. 군의관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은 섬에서 생활하던 의사가 간혹 말수와 똑같은 군복을 입고 일을 할 때 봐왔기 때문이었다. 계급이 밥 먹여 주나. 높다고 치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총알은 피해가기는 커녕 돌아가다가도 오겠지. 그러니 장교가 아닌 병사의 계급장을 단 간호사가 어울려. 제멋대로 여순은 생각했다. 아무런 생각이라도 해야 이 평화의 시간을 즐길 수 있거든. 여순은 그런 심정이었다. 

하지만 갑판위는 잠시의 평화뒤에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 소란의 소용돌이에 갇히자 군함은 조용한 시간이 없었다. 깊은 바다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포소리는 더 가깝게 들려왔다. 진짜 전쟁이 실감나는 군. 살았다고 좋아했는데 바다에 수장되는 거 아냐. 그런다고 해도 여순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신세가 신세를 한탄하기보다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포는 군함 주변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켰으나 직접 갑판을 타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인지 병사들은 물보라를 맞으면서도 전투 훈련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줄지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그렇게 왔다 갔다를 되풀이했다. 저것이 전쟁을 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여순아, 넌 모르면 빠져. 빠져 있을라고. 간호가 필요할 때 그 때 나와. 그러니 지금은 그 때를 대비해 쉬고 있으렴. 쉬려는 생각이 들자 병사들도 마침 쉬어야 할 때라는 듯이  멈춰서 군가를 부르더니 십분간 휴식을 취했다. 그 틈을 타서 구령을 붙였던 장교에게 말수가 다가갔다.

그는 능숙한 일본어로 돌봐야 할 환자가 있는지 물었고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조금 머쓱했는지 함장실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안내를 부탁했다. 함장의 건강을 살핀다는 이유에서였다. 의사가 탑승했으니 필요하면 이용하라고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듯한 행동에 장교는 그렇게 하겠다고 따라 오라는 시늉을 했다. 여순도 그 옆에 달라붙었다. 한 사람이 빠져나가기도 힘든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여순은 막 해내고자 했던 일을 마친 것처럼 홀쭉한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그녀는 홀쭉했다. 그래서 남자들이 어렵게 몸을 옆으로 비킬 때도 똑바로 걸어나갔다. 그래, 난 날씬해.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웃던 그 시절로 한발 다가서고 있다고 여순은 생각했다. 배가 속도를 냈다. 엔진음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함장은 들어온 이들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하기 싫은 일을 마지 못해 한다는 듯이 팔을 들어 손을 뻗었다. 더 들어오지 말고 거기 있으라는 제지의 제스처였다. 이리로 오지 말고. 거기 의자에 앉으시오. 그는 들어온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마저했다.

그리고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면서 두 어 걸음 걸어와 자신을 위해 마련해둔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많이 해본 절차라서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에게는 늘 하던 형식적인 절차였으나 말수에게는 처음 보는 행동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수는 다가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청진기를 함장의 가슴쪽으로 댔다. 한 참 후 뗀 말수는 걱정 없다는 투로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건강 이상무’를 군인처럼 외쳤다. 정말 건강하시군요. 함장님.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말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군인에게 건강은 필수요. 아픈 사람은 전투할 자격이 없어요.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없고요. 함장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응수했다. 여순은 함장이 제복에 어울리는 군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섬의 지휘관이 입은 것과는 사뭇 다른 함장의 제복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이게 진짜 군인이지. 술 먹고 댓자로 뻗어서 누가 왔는지도 모르면서 지독한 술냄새나 풍기는 자가 군인은 아니지. 지금쯤 그자는 뭐하고 있을까. 숙취로 지근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떠오르지도 않는 지난밤을 복기하려고 애쓰겠지. 못난 놈. 여순은 함장을 보면서 지휘관을 욕했다. 나쁜 자식. 

여순은 그러나 표정만큼은 들어올 때 그대로 바꾸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신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해 좁은 공간을 이러 저리 옮겨 다녔다. 각종 기계 장치로 어지러운 좁은 함장실을 여순은 지휘관을 방문했을 때처럼 호기심어린 눈으로 살폈다. 눈은 함장을 향했지만 시선은 이곳저곳을 훝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함장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함장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순은 입보다도 전등불 아래 반짝이는 훈장인지 계급인지 모를 앞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을 눈겨겨 봤다. 여순과 마주치자 그가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더위서 인지 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벗어서 한 손으로 들고 있자 마치 염색한 것처럼 머리칼이 모두 흰색인 것이 드러났다. 빠지지 않은 풍성한 머리칼이 하얗게 빛났다. 백두. 하얀 머리. 

함장은 백발노인이었으나 그 아래 눈썹은 검고 짙었다. 그리고 두 눈은 붉고 강렬했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여순을 내려다봤다. 여순이 그를 평가했듯이 자신도 그를 평가하려는 태도였다. 그런 모습에서 여순은 그가 이래 봬도 나는 아무 까닭 없이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넘쳐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라도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강고하게 얼굴 근육을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여순은 그와 마주친 시전을 내렸고 습관처럼 옷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함장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는 알았다. 마치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눈길이 영 꺼림칙했던 것이다. 함장은 형식적으로 몇 마디 묻고는 쉴 수 있을 때 쉬워 두라고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언제 포사격이 있을지 몰라. 지금은 부상병이 없지만 감당 못할 수도 있으니 나중에 허둥대지 말고. 눈 좀 부치고 있으라고. 의사 양반. 말수가 함장을 햐향해 하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 분도 의사신가? 말수는 그 말을 들은 동시에 여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급작스런 질문이었으나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말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간호 업무가 주 지만 의사 일도 척척해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얼떨떨 할만한데도 말수는 그새 자신감을 찾고 있었다. 그렇군. 내가 다치면 이 분이 나를 치료하나. 아마 그럴겁니다. 아프지 않게 살살해줘. 그나 저만 함장님이 다칠 일이 있겠습니다. 안내하던 장교가 끼어들었다. 아냐, 그건 몰라. 전쟁터에서 사람일이란 아무도 몰라. 총알이든 폭판이든 그것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면 피할 수 없어. 생각해 봐. 여기서 어디로 피하겠니. 그래서 선제공격이 중요해. 먼저 발견하는 자가 이기는 거지. 탱크처럼. 그러니 자세도 장담하지 마. 피를 흘릴때 누구나 의사를 찾게돼. 나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여기 있는 의사선생들에게 잘해. 하이. 안내했던 장교가 말수와 여순을 번갈아 보면서 그렇게 하겠다는 듯이 충성스러운 얼굴을 들이댔다. 됐어. 그만하면 됐고. 

함장은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뒷말을 끊고는 자신이 말의 주도권을 다시 잡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싸울 인원이 부족해. 부족하다고.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너무 많이 죽었어. 본국에서는 어째 지원이 없어. 있다고 해도 더디고,. 필리핀에 도착해서는 될 수 있으면 많은 병력을 승선시켜해. 탈 수 있는 인원은 모두 태우자고. 그곳 섬도 위험해. 요충지인데 그곳 뺏기면 보급로가 차단되는 문제가 있어. 함장은 작전지휘관을 모아놓고 해야 할 이야기들은 무슨 신나는 일처럼 말수와 여순앞에서 늘어 놓았다. 그리고 무기와 의약품도. 그건 말수가 승선하기 전에 이미 전달받은 사항이었다. 의약품이 부족해. 간단한 부상환자가 감염으로 죽어나가고 있어. 항생제가 없단 말이야. 필리핀 병원을 싹 뒤져서라도 다 챙겨야지. 의사 양반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막중한 책임이 있어요. 말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긴장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질문을 해도 되는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았다. 기회는 여러번 있을 것이다. 지금 모두 털어 놓을 필요는 없어. 말수는 속으로 다짐했다. 

적어도 연대병력이 필요해요. 대포 쏜 인원도 없다니 참, 이래가지고서는 전쟁을 할 수 가 없단 말이오. 본국에서는 왜 증원을 미적거리는지. 원. 육군이 문제야. 우리 해군은 이렇게 잘 싸우는데. 함장은 말수나 여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조금 더 했다. 해군력은 최고야. 우리만큼만 육군이 했어도 미군을 벌써 물리쳤을 거야. 양놈들이 힘을 받는 이유는 우리의 약한 고리인 육군을 쳐서 얻고 있어. 내가 그렇게 말했어도. 어이가 없어, 어이가. 함장이 전쟁의 불리가 전적으로 육군에게 있다는 듯이 그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몰고 갔다. 그러나 그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짧게 요점맘 말해야 했으나 군인답지 않게 길게 말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함장이 공방대에 담배를 말았다. 갑판의 장교가 말수에게 눈짓을 했다. 말수는 원래 있던 자기 자리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떠나는 인사를 받은 함장은 형식적으로라도 한 마디 더 물어야 한다는 듯히 말수에게 의대 시절 전공이 뭐였냐고 물었다. 정작 중요한 질문을 놓쳤다는 듯이 연기를 내뿜으면서 말했다. 말수는 조금 당황했다. 여순은 더 당황했다. 그런 질문이 자신에게 올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 전공? 내 전공이라. 여순은 급하게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순서대로라면 질문을 받은 말수가 머리를 먼저 굴려야 했다. 그런데 말수는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 봤고 거기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섬에서 의사와 생활하면서 그가 해부학이니 생리학이니 내과니 외과니 하는 말들을 하고 다녀서 그 중 하나를 꺼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외과라도 대답했다. 외과의사는 칼을 잘 써야 해. 섬의 의사는 늘 그 말을 했다. 외과라. 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전공을 찾았군. 전쟁터에서 외과의처럼 중요한 사람은 없어. 당신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릴 거야. 섬에서도 능력을 좀 발휘했다고 들었어. 말수는 칭찬의 말에 고맙다고 하기에 앞서 제대로 대답한 것에 대한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는 덧붙여 졸업은 했지만 자원입대해 실습이 부족해 처음에 애를 먹었다고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이번에는 함장의 눈길이 여순에게로 왔다. 네 전공이 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여순이 말했다. 원래는 인천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 의대에 입학해 내과 전공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저도 칼잡이에요. 청진기를 가슴에 대기 보다 칼로 드는 날이 많아요. 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그렇지요. 외과라면 세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 세균균에 대해 내과를 전공한  여의사 선생은 뭐 좀 아는 게 있어요? 

여순은 말수보다 더 당황했다. 뭐, 이런 게 있어. 잘못 걸려들었나. 이러다 산통 다 깨지겠다. 물어 보는데 대답을 아니할 수 없다. 여순은 막사의 여자들을 검진하다 현미경을 다룬 사실을 떠올렸다. 균이라면 현미경으로 봐야 한다. 어떤 균이든 말이다. 현미경을 좀 다룰 줄 알아요. 특히 매독균 등 성병치료 경험은 많이 있어요. 성병이라는 말에 함장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군요. 함장은 여순에게는 존칭의 말을 썼다. 그러나 여순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세균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순은 여순은 균이라면 자신도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생각해둔 나머지 말을 해버렸다. 균이라면 상처 난 곳이 아물기도 전에 감염되는 것에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항생제가 없으면 작은 상처도 사망하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은 정말 치명적 입니다.

그래, 그거야. 자네는 전공이 내과라고 했지. 간호학을 배우고 의사로 내과를 좀 공부했다면 자네가 이 일에 적격일 수 있어. 이 일이라니. 말수도 놀랐고 여순도 놀랐다. 포사격에서 우리가 밀려. 함정수도 그렇고. 미제는 계속 늘어나는데 우리는 계속 줄어. 이러다가 무적 해군이 어찌될지 몰라. 그래서 말이야. 함장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이 세균전쟁을 입에 올렸다가 거기서 멈추었다. 여순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거짓말이 나오는지 거침없는 자신이게 놀라면서 다음 질문은 여기서 끝내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자꾸 들어가면 함장에게 밀릴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실습이라면 자신있었지만 이론으로 들어가면 여순은 달린다. 의학서적을 좀 보기는 했지만 어림없다는 것을 여순을 알고 있었다. 말수는 질문이 여순에게로 가자 여순을 걱정했다. 저러다가 함정에 빠지는 거 아냐. 여기를 어어 빠져나가야지. 그 생각에 골몰했다.  궁지에 몰리면 이로울 게 없었다. 그러나 함장은 더 궁금한 게 있었고 여순과 더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것을 누가 막겠는가. 망망대해에 떠 있는 군함에서 함장은 왕 아닌가. 

그렇지, 세균이라면 외과보다는 내과지. 함장은 아는 체 했다. 세균은 전염이 무서워. 그게 균이 가진 최대 장점이고. 살기 위해 퍼트리는 균의 이동성은 군함보다 몇 배나 빨라. 적에게 균을 퍼트린다. 치명적인 균을. 그러면 싸울 필요가 없어. 다 죽었는데. 균에 감염됐는데. 수월하게 전쟁을 이길 수 있어. 내 생각 어떠시오. 함장이 군화를 신은 발을 앞으로 뻗으면서 말했다. 여순이 대답하려고 무언가 준비하고 있을 때 대화에서 소외됐던 말수가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그렇기만 하면 아주 좋은 작전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걸 써먹을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을 균을 이용한 세균전인데 실제에서 그걸 쓸 수 있을까요. 나도 그게 좀 꺼려져. 균은 상대를 가리지 않거든. 적에게만 들어 맞아야 하는데 우리에게 치명적 피해를 줄수도 있고. 이게 외부로 새면 국제법 위반이다 뭐다 하면서 시끄러울 거고. 그거야 뭐. 우리 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부인 하면 그만이지만. 함장은 말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써먹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은 것이 못마땅했다. 뭐, 의사놈들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어. 써먹어야 하지.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건 또 뭐야. 여순은 함장의 불쾌한 낌새를 눈치 챘으나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들어도 망가진 함장의 기분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함장이 대화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금새 그는 나쁜 쪽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돌렸다. 상황 판단이 파른 군인다운 행동이다. 다행이다. 여순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 너무들 심각한 얼굴 짓지 말고. 의사라고 하니 한 번 물어본 거요. 당신들은 세균 전문가가 아니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외과 의사는 부상병 잘 꽤매면 되고 내과의는 적절한 약을 처방하면 되는 것이지. 당신들 의무는 아니니 신경꺼도 돼. 그걸 할 의사들은 많아. 실험대상이 부족할 뿐이지. 함장은 의사라고 해도 자신보다 못한 햇병아리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말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눈을 돌려 너는 아느냐고 묻듯이 무안할 정도로 빤히 여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수에게 보였던 딱하다는 표정은 아직 거두지 않았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높은 신분의 그가 아랫것들과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들었는지 함장은 거만한 몸짓을 보였다. 오늘은 상견례 했다고 치고 그만합시다. 이런 한가한 대화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니. 각자 위치로. 그가 초급장교가 훈련병에게 하듯이 위치로 라는 말을 하고는 함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자제해야 옳다는 듯이 그의 뒷모습에는 후회의 그림자가 어른 거렸다고 여순은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만남은 아니었다.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자신들 아닌가. 부르면 달려 나가고 울면 달래는 일이 자신의 직업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함장과의 대화는 좋은 위치에서 끝냈을 수도 있다. 내려갔던 계단을 타고 갑판에서 만났던 장교와 말수와 여순은 내려올 때 그 순서대로 다시 갑판 위로 올라왔다. 바람은 불었으나 아직 태양은 지지 않아 갑판위는 이글거렸다. 그러나 포신으로 생긴 그늘에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말수는 그쪽으로 가서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장교보다 앞서 발길을 그쪽으로 옮겼다. 저기 그늘이 있네. 말수는 그렇게 말했고 장교는 대꾸하지 않았으나 그도 말수를 따라갔다. 그늘에 도착하자 작대기보다도 긴 포신 옆에서 병사 몇 명이 쏘아서 죽일적이 있는지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앞을 보고 있었으나 긴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럴 것이다. 아무리 적이 나타났다고 해도 하루종일 그렇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은 몸을 풀어놔야 한다. 언제 포신에 포를 장착하고 발사할지 모르는 그 때를 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병사 가운데 고참은 그늘을 차지하고 똑바로 서지 않고 삐닥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그것은 보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군인은 늘 직선으로 보여야 한다. 말수는 의사 대신 자신이 군인이 되면 어떨까 싶었다. 자신있었다. 부하를 다루는 솜씨라면 여기 있는 장교보다 자신이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시켜만 주면 군복으로 갈아 입고 싶었다. 군복입은 군인이라. 그래 군인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난 의사가 더 좋아. 그런데 세균전은 뭐지. 총쏘고 포쏘고 이런 게 전쟁이 다 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균으로 전쟁을 한다고. 말수는 함장에게서 들은 세균전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세균이라. 균이라면 환자의 몸이 썪어 가면서 생기는 그런 곰팡이 같은 거잖아. 그걸로. 그걸 인위적으로 퍼트린다. 그래서 부상을 입지 않고도 병에 걸리게 한다. 그 세균은 단순한 곰팡이가 아니다. 치명적인 것이겠지. 그게 뭘까. 그리고 어떻게 적군에게 퍼트리지. 

말수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저쪽에서 대열을 이룬 분대급 인원이 이쪽으로 군홧발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면서 다가왔다. 감정을 잘 절제했다고 생각했던 말수는 앞장선 오장 계급장과 시선이 마주치자 마주 다가가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오장은 의사 앞까지 왔고 의사를 보자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작신보가 계급이 높은 자에 대해 하는 형식적 인사였다. 직속 상관이 아니고 군의관이니 이 정도로 하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 싶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말수 옆을 지나쳐 갔다. 갑판 장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행군하는 분대원들은 매우 바쁜 듯한 표정이었다. 말수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말수도 군기가 든 병사들처럼 그들이 지나가는 뒤를 팔을 흔들며 따라갔다. 그리고는 돌아왔다. 그는 돌아올 때는 정면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마주 해를 대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배꼽 부근의 버클이 반짝 하면서 말수의 눈을 자극했다. 

버클이 빛나. 해를 받아 빛났어. 반짝하고. 말수의 말에 여순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여순은 방금 전에 함장을 만나 나눴던 이야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그녀도 말수처럼 세균전이라는 말을 멀이에서 쉽게 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롤 결론을 내렸다. 어서 필리핀에 도착했으면. 그 마음 한 가지만이 여순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래서 갑판위에 지금 상태는 불쾌하거나 좋거나 하는 어떤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였다. 섬들이 지나쳐 갔다. 하나의 점으로 보였다가 크게 다가와스는 다시 작은 점으로 멀어지는 섬들을 보면서 여순은 이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고 가고 있는 위치가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제대로 가는 걸까. 이렇게 가면 정말 필리핀이 나올까. 여순은 함장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세균을 입에 올릴 때 함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의사를 상대하고 있으니. 하지만 함장은 모든 의사가 균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그럴만도 해. 하루 종일 전쟁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 그럴만도 하지. 여순은 이제 함장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러자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지도 않았고 무시당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함장이 다쳤을 때 자신을 찾고 자신이 그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처리했을 때 그가 보여주는 감사와 고마움과 대단하다는 눈빛을 받고 싶었다. 그렇다고 군함이 포를 맞아 다치는 상황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런 상황은 올 것이고 그 때 나의 존재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을 것이다. 실력 발휘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나도 쉬면서 충전좀 하자.  그러면서 군함의 최종 목적지인 필리핀에 대해서 조금 알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함장은 필리핀이 목적지라고 했으나 중간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군함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상황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진다. 목적지가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설사 돌아서 가더라도 필리핀에 상륙하지만 하면 된다. 

상황이 나빠져 필리핀이 아닌 다른 곳에 상륙하면 낭패다. 계획에 없던 일이 벌어지면 처음부터 작전을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작전이라는 것이 있었나. 말수는 필리핀에 도착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적이 없다. 거기 상륙하기만 하면 탈출의 길이 보인다고 했을 뿐이다. 여순도 거기까지만 생각했었다. 그러니 필리핀이 아닌 다른 곳이라고 해도 탈출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는 일이다. 전에 있던 섬보다 더 크기는 한데 허술하고 육지로 나갈 기회가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 없었다. 이것은 전투가 격렬해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는 단서가 붙으면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갑판 위에서 듣는 사이렌은 육지에서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정확이 무엇이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더 절박하고 더 위험한 소리로 들렸다. 어디 피할데가 있는가. 육지는 아무데나 달려 나갈 수 있지만 바다에서는 풍덩하고 빠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래서 사이렌 소리도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는 구나. 

 

비상 사이렌에 말수가 움직였다.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말수를 따라 여순도 움직였다. 그늘에는 이제 말수와 여순 둘 뿐이었다. 병사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포신을 잡고 있던 오장도 사라지고 없다. 사이렌이 울렸으면 피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공격을 할 병사마저 숨으면 어쩌란 말이냐. 말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급한 것은 말수였다. 저쪽에서 비행기 엔진음 소리가 들렸고 군함의 근처에서 포가 터지는 소리가 말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미쳐 피할 공간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포탄은 군함 밖 수 백 미처 앞에서 펑펑 터지고 있었다. 함장은 이 순간 뭐하고 있을까. 세균 그림을 손에 들고 이 놈들이 적을 물리쳐 주기를 기대하고 있을까. 반격해야 한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가 아니야. 그런데 우리쪽 군함에서는 반격의 기미가 없다. 다들 어디 간거야. 말수는 자신이 작전 장교가 된 것처럼 눈을 부라리면서 어디가 공격 원점인지 가늠이라도 하듯이 목을 빼서 갑판 너머를 살폈다. 고개 숙여요. 여순이 말수를 잡아 끌었다. 머리 위로 작은 폭탄들이 터졌고 이어서 파편들이 검은 비 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갑판위는 그야말로 불난 시장터처럼 아수라장이 됐다.
 

엎드린 말수는 포가 함포 사격인지 비행기에서 퍼붓는 것인지 알아 내리라고 하려는 듯이 눈을 갑판에서 떼지 않았다. 도망가야지. 그런데 어디로. 말수는 여순의 어깨를 팔로 안으면서 함장실을 생각했다. 거기라면 여기보다는 안전할 것이다. 그런데 계단까지 가려면 가로 질러야 한다. 그때 지금 터진 것처럼 포가 터지면 살기 어렵다. 말수는 기다리기로 했다. 머리위에 있는 철판이 다행이 파편을 막아주고 있다. 사이렌이 멈추면 그 때 이동하자. 그런데 계단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그쪽 말고도 바로 말수의 발 근처에 있었다. 밑에서 병사들이 급하게 위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말수는 그곳도 비상 통로라는 것을 알았다. 소대 병력은 좀 못되는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면 갑판위로 마치 물고기처럼 뛰어 올랐다. 그들은 뛰어올라서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낙담하는 물고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바로 흩어져서 자신들의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찾아냈다. 병사들은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빈통로를 이용해 말수와 여순은 일단 피하고 보자고 고개를 숙이고 갑판 아래로 내려가 아쉬운 대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곳이 갑판보다 안전한 곳인지를 알 수 없었다. 함장실이라면 모를까.그러나 말수는 거기로 가지 않기로 했다. 나 살자고 함장실 근처에서 서성이는 의사를 본다면 함장이 좋게 생각할리 없었다. 이런 때는 상관의 눈을 피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재수 없으면 가서 싸우라고 차고 있는 권총을 내주면서 갑판으로 밀어 올릴지 모른다. 그런 상황은 피해야 한다. 아니라고 거부하면 조인트가 깨질 것이다. 그것은 망신살이 뻣치는 것이다. 

그래서 말수는 함장실 쪽으로 이동하기 보다는 계단에 기대 귀를 기울였다. 어짜피 눈으로는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보이는 것은 계단의 천장 뿐이지. 다행히 전투기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눈으로 봐야 한다. 말수는 계단의 틈으로 생긴 작은 공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응시했다. 눈으로 확인해도 아직은 전투기가 날아 다니는 모습은 없었다. 공중 폭격은 아니라는데 말수는 조금 안심했다. 아무래도 비행기 폭격은 명중률이 높고 군함에 치명적이다. 군함이 발견하기도 전에 먼저 비행기가 군함을 만나면 그 군함은 그날이 제삿날이다. 말수는 섬에 있을 때 상관으로부터 이런 말들을 들었다. 그래서 비행기가 보이지 않자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고 판단했다. 사이렌 소리는 멎는가 싶다가 다시 울렸다. 소리는 되레 더 커졌고 그 신호에 맞춰 갑판위의 병사들은 반격하기 위한 채비를 마쳤다. 발사 명령만 내려다오. 그야말로 일사분란하게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말수는 갑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기 위해 게단을 몇 단계 올라갔다. 그의 눈에는 잘 훈련 된 부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진 연출이 이미 끝나 있었다. 뻗다리를 한 병사를 모욕했던 것을 잊고 말수는 일직선으로 서 있는 오장의 자세가 듬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저 정도라면 싸울만 하지. 여순이 올라오려는 기색을 보이자 말수는 손을 내려 저지했다. 그래도 부족한지 말로 올라오지 마, 곧 포격이 시작될 거야. 하고 말했다. 그냥 해 본 소리였다. 곧 포 사격이 시작될 지 하늘도 모르는 것을 말수가 어찌할 겠는가. 

그러나 여순을 아래에 계속 머물게 한 결정은 잘한 것이었다. 정말로 잠시 후에 갑판 근처로 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갑판으로 떨어질 것이다. 적들이 영점을 잡아서 쉬지 않고 재차 공격하기 때문이다. 갑판이 포를 맞으면 아무래도 이쪽보다는 아래쪽이 더 안전했다. 침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침몰까지 생각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았으나 언제나 말수는 최악을 예상했다. 그러다가 그보다 나으면 좋은 것이다. 과연 포는 갑판 주위를 때리다가 어느 순간 갑판위에 떨어졌다. 정신 없이 여기저기 터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으나 말수는 정확하게 한 발이 군함의 갑판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포탄이 갑판과 부딛치는 순간 정확히 말수는 몸을 바닦에 깔았고 두 손으로 귀를 꼭 말았다. 그러면서 말수의 놀라움과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커진 눈도 꼭 감았다. 긴장 때문에 쪼그라든 몸은 더 쪼그라 들 수 있도록 새우처럼 말아올렸다. 

가까이에서 이런 전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포 소리는 많이 들었어도 직접 떨어져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을 보다니. 장관이 따로 없어다. 한 바탕 회오리가 지나갔다. 어인 일인지 적들은 갑자기 포사격을 멈추었다. 서너 발만 더 갑파에 명중했더라면 말수가 예측한 최악의 상황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적들은 왜? 멈추었는가를 생각할 겨늘이 없었다. 이제 우리쪽의 반격 기회다. 흩어졌던 병사들이 언제 도열했는지 거리를 재고 포신에 포를 채운 여러 구호와 몸짓이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호각 소리 요란하고 승천한 욱일기가 힘차게 내려오고 이어서 포신의 앞으로 갔다 뒤로 가면서 엄청한 굉음을 울려 퍼졌다. 공격 당하는 모습보다 공격하는 모습이 더 볼만했다. 역시 전쟁은 연습이 아닌 실전이다. 실전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 탄피가 벼락처럼 쏟아졌다. 소리도 엄청났다. 마른하늘에 치는 날벼락보다 더 심하고 끔찍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령이라는 것이 제대로 전달될까 싶었다. 각자 알아서 움직이는수밖에. 그래서 평시 훈련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아직도 귀가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가늠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말수는 욍욍거리는 소리를 떨쳐 내기 위해 손가락을 귓구멍에 넣었다 뺏다를 반복했다.

귀가 이렇게 제정신을 못차리고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을 때 코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소리 대신 이번에는 무언가 타는 냄새가 군함을 지배했다. 병사들의 몸에서 나는 탄약 냄새였다. 포신을 빠져 나온 탄피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모락모락 올라서는 금방이라도 붉게 타오를 것만 같은 것이 진한 냄새까지 실어왔다. 젠장, 이젠 화약냄새다. 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의 공포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었다. 이곳은 병상과는 달랐다. 진짜 전쟁이다.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처럼 복판에 있지는 않았다. 실려 오는 환자들의 치명적인 상처를 보고도 견뎌냈던 말수였으나 포사격의 위력은 색다른 고통이었다. 저 정도라면 맞고 견기기 힘들 것이다. 계단 아래서 몸을 숨기고 있는 여순도 마찬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갑판 아래라고 해서 충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덜했을 뿐이지 아래쪽에서 느끼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운동장 보다 넓은 군함이 지진에 걸린 것처럼 사방으로 흔들릴 때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 전쟁구경만큼 신나는 일도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나만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 이런 상황에서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군함에 올라 탔는데 군함이 가라 앉으면 죽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말수나 여수이나 이런 생각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굉장을 것을 보고 있다는 기억만큼은 간직하고 싶어했다. 가능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보려고 엎드려 있으면서 눈을 돌렸고 들을 수 있으면 들으려고 귀를 막았다가도 잠잠하다 싶으면 열어 두었던 것이다. 이쪽의 반격도 시들해졌다. 다들 뒷수습하는 절차만 남았다. 말수는 일어섰고 계단 아래의 여순도 본능적으로 위로 올라왔다.  철판 위에 떨어진 포탄은 갑판에 구멍을 냈으나 군함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예상된 항로를 벗어나기는 했으나 군함은 원래 목적지를 향해서 게속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안 맞으만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포를 정면으로 맞은 갑판 부위는 철판이 종이쪼가리처럼 찢겨져 나가고 찢겨진 구멍속으로 갑판위에 있는 병사 몇 명이 떨어져 내렸다. 갑판을 치고 반동으로 위로 올라오던 파면은 마침 포를 보고는 포신의 앞부분에 가서 강하게 부딪혔다. 충격을 컸던 포신은 기울어지다가 도저히 제자리를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병사들처럼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애인처럼 자신을 다루었던 병사들이 사라졌으니 그 물건도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갑판에 올라온 여순은 그런 모습을 보고 마침내 거대한 군함이 침몰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내가 탄 군함이 가라 앉는다. 정말 그럴까. 여순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는 말수부터 찾았다. 그라면 무슨 수가 있을지 모른다. 통영 뱃놈이라고 했잖아. 바다위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뱃놈말고 누가 있겠어. 그런 심정으로 여순은 말수가 자신을 찾아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말수라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다. 적에게 노출된 군함은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도대체 함장은 어떤 명령을 내렸길래 이 지경인가. 군함의 피해는 전적으로 함장에게 있다. 육군을 욕하더니 해군도 엉망이야 엉망. 이제 여순은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말수는.  그래, 뱃놈이 아니라 이젠 의사지. 여순은 환자위에서 심장 마사지를 하는 구부러진 등을 보고 그가 말수임을 직감했다. 책임감은 대단해. 함장을 시켜도 잘 할 거야. 아니 임금은 못하겠어. 그런 든든한 마음으로 말수쪽으로 여순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봐, 병사가 살아나잖았아. 그는 갑판위의 신이 따로 없어. 그에게 급한 불을 껐다면 당장 선실로 내려가라고 할까. 함장의 지휘봉을 뺏어 군함을 지휘하라고.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살아서만 나가면 된다. 승자가 누구이든 관계 없는 일이다. 누가 이기든 살아 있기만 하면 자신은 곧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그래 전쟁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군함아 건재해다오. 이제는 그 생각이 여순의 머릿속을 압도했다. 말수는 참 대단해. 그 혼란의 와중에도 침착함을 잊지 않았다. 부상병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붕대를 감고 진통제를 찌르는 행위가 마치 잔잔한 물살을 가르는 나룻배처럼 부드럽기가 그지 없었다. 보기 좋았다. 자기 일을 알아서 저렇게 잘 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니. 여순은 뭐 도와줄 일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말수 옆으로 다가갔다. 대충 일은 끝났어. 생각보다 부상병이 적어. 군함이 이렇게 상처를 입었는데도 병사들은 용케도 잘 도 피했어. 다행이다. 피 묻히지 마. 닦기도 힘든데. 말수가 달려드는 여순을 말렸다. 붕대도 다 했고. 진통제도 놨고. 환자를 옮기는 일은 다른 병사들을 시키면 돼. 그나저나 함장은 뭐하고 있지. 나도 그 생각이었다. 군함은 살리겠지. 일단 몸을 숨겨야 할 텐데. 적에게 완전히 노출됐어. 공중 공격을 요구하면 살기 힘들거야. 일단 섬의 안쪽으로 가거나 적의 레이더를 피하는 곳에 있어야 해. 당신은 함장을 해도 잘할 거예요. 그런 걱정을 하는 말수에게 여순이 진정어린 말로 칭찬했다. 농담하지마. 그럴 기분 아니거든. 농담이라고 생각해.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여순이 입을 샐죽하게 내밀었다. 첫인상과 이렇게 다른 사람이 있다니. 평생 기대고 싶어도 좋을 사람이야. 이 와중에 사랑타령인가. 이봐, 정신차려. 저 병사는 죽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죽음이 진행되고 있는데 사랑이라. 말수가 핀잔을 주었다. 죽는 사람은 죽는 사람이야. 우린 아직 살아있잖아. 그게 무어 어때요. 자랑스러운 당신에게 내 인생을 거는 게. 말수가 흐뭇한 눈으로 여순을 바라봤다. 그런 여순을 위해 반드시 탈출에 성공해야 한다. 

탈출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말수는 온통 탈출에 신경을 집중됐다. 나는 군인이 아냐. 전쟁에 길들여 지기보다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지. 여순이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 나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어서 빠져 나가 좀 더 자유유를 찾아야지. 아, 벌써 피가 말랬네. 어디서 파리가 날아왔는지 마른 피 위로 내려 앉아서 입맛을 다셨다. 말수는 손을 털었다. 온전한 병사들이 부상병들을 들것으로 날랐다. 죽을 거라는 병사는 죽었다. 그래서 얼굴을 가렸는데 흰천이 아니고 전투복 상의였다. 여기서는 예절을 차릴 수 없어. 그것이 전쟁이 주는 무서운 교훈이지. 그들만의 잔치는 여기서 끝내야 해. 빠져 나가자. 살아나면 우리는 영원히 산다. 살아 나가자. 말수와 여순이 눈을 마주쳤고 둘은 서로의 눈에서 애정과 신뢰를 느꼈다. 

군함은 포를 맞았지만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니 엔진이 이상일리 없다. 함장은 이 정도로 피해가 적은 것은 자신이 미리 적의 공격을 대비한 때문이라고 여겼다. 정상적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함장은 그러면서 육군을 다시 욕했다. 이 놈들은 도대체 육지에서 어떻게 싸우는 거야. 또 공중은 뭘하고 있지. 미리 나가서 적을 해치워야지. 모든 걸 다 해군에만 맡겨 놓으면 어쩌라는 것야. 함장은 짜증을 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에 빠졌다. 겨우 6명 부상에 한 명이 죽었다. 갑판에 좀 구멍이 났으나 기계 장치는 아무 문제 없다. 포신이 망가졌으나 다른 쪽은 멀쩡하다. 우리는 전과는 적의 순양함 3대 완파라고 하지 뭐. 함장은 상부에 보고할 내용을 벌써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 소나기 처럼 퍼붓던 포탄도 멈추고 나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나기도 내렸다. 거칠게 내린 비는 갑판의 핏자국을 씻겨냈다. 발빠른 병사는 커다란 빗으로 굳거가던 피가 물에 젖어 이때다 싶어 구멍뚫린 곳으로 피를 몰아갔다. 그 동작은 비가 그치고 해가 뜨면서 멈추었다. 해가 떴다.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함장은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머릿속은 적이 다른 공격지점으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폭탄이 다 떨어졌는지 그도 아니면 우리측 공격으로 타격을 입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모르는 것은 아는 것만 못해서 그는 답답했다. 전황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침 레이더와 통신은 고장났다. 함장은 답답해서 가슴을 몇 대 쥐어박았다. 그런다고 답답함이 벗어질까. 함장은 기수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그것 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의 공격지점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오랜 군생활을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왜 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안전을 확보했으나 함장은 최고 속도를 지시했다. 확실히 하자. 영점을 잡고 조준 사격을 했다면 일부러 잠시 놔돌 수도 있다. 허술한 틈을 노려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른다. 우리 뒤를 은밀히 추격 하면서. 함장은 여기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부관을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이곳을 빠져 나가자. 거기로 가자. 거기가 어디인지 함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관은 그가 가리키는 지명을 알고 있었다. 안전한 곳이 정해진 모양이니 함장이 긴장이 풀었다. 엔진 출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군함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만과 만 사이로 숨어들었다. 

이것은 함장이 잘한 결정이었다. 적들은 정확하게 군함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레이더의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공 요청을 할 수 없었고 경고의 의미로 사격을 했던 것인데 적들의 입장에서 보면 운이 좋았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로 군함의 갑판을 때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당첨은 자주 올 수 없다. 적들은 군함을 놓쳤고 뒤쫒기를 포기했다.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방어선을 지키자. 적들은 이런 작전 태세로 나왔다. 함장도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사생결단으로 나왔다면 그의 생존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함장 뿐만이 아니다. 말수도 여순도 그렇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떼어냈다. 우리에게 살 운명이 닥쳤나 봐. 닥치는 것은 나쁜 것 아냐.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것이 오늘처럼 삶이 닥쳐 올 수도 있잖아. 말수가 능청을 떨었고 여순은 스스로도 운이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했다ㅏ

말수가 칼을 찾았다. 어디있게어요. 가방안에 있지.아까 응급처치 하면서 쓴 칼은 어디에 뒀어요. 그걸 찾으면 되지. 여순이 조금 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상기시켰다. 그래 칼이 들어 있는 가방. 그는 왕진 가방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아 눈을 굴렸다. 저기 그대로 있네. 열린 채로. 군인이 총을 잃어 버린 꼴이네. 여순이 놀렸다. 그래, 나도 할 말이 없어. 가져 가져 올게. 말수가 일어났다. 일어날 때 말수는 순간 어지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도 긴장했고 긴장이 풀리면서 뭉쳐 있던 피가 한꺼번에 머리쪽으로 쏠린 듯 했다. 비틀 거리며 걸어가는 말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순은 취한 사람이 저렇게 하고 다녀. 내 참, 생사의 와중에 취하다니. 딱 취하기 좋은 시간이네. 여순은 왔다갔다 하면서 말수가 가방을 들고 올 때 까지 고정된 시선을 바꾸지 않았다. 

난 너무 진지했어. 조금은 풀어지자. 그러는 것이 사리에 맞아. 여순이 말수가 자신 옆에 가방을 던져 놓고  풀썩 주저 앉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치료 해야지. 지금은 치료의 시간이야. 알아. 그런데 병사들은 다 어디 간거야. 병실로 내려갔겠지. 그러면 우리가 그쪽으로 가야해. 그늘에서 있을 순 없어. 임시로 싸맨 상처도 살피고. 힘들어도 할 일은 해야지. 그래, 우린 이걸 피해 갈 수 없어. 총알을 피하고 포탄을 피해도 치료는 피할 수 없어. 괜찮지 여순아. 말수가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반대쪽 계단을 향해 걸었다. 왕진 가방을 든 말수의 그림자가 길고 컸다. 우린 부상을 안 당했어. 멀쩡해. 두 손 두 발 다 제자리에 붙어 있다고. 머리도 있고. 가방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말수가 여순의 머리를 위에서 눌렀다. 뜨거워. 안 만져도 나도 알아. 목위에 붙어 있는 것이 머리인 것을. 우린 산 거야. 

살아 있는 느낌이 너무 좋아.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여순은 팔꿈치로 말수의 옆구리를 뚝쳤다. 그렇게 까불면서 둘은 부상 병사들이 있는 숙소 겸 병실로 내려갔다. 산자들은 직감적으로 안다. 살아 날 수 있을지, 산다면 얼마나 더 살지. 부상 병사의 생명은 잠시 유예된 것일뿐 길고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축복하자. 여전히 산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사실이 그랬다. 기절했다 깨어난 부상병사는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알고는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극적인 순간이었다. 산자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을 죽었다 살아난 자가 흘리고 있다. 그것은 차지 않고 뜨거웠다. 그 다음 한 일은 엄마를 부르는 것이었고 정신이 더 들어서는 데노 반자이를 불렀다. 어떤 자는 기미가요를 불렀다. 대단한 군인정신이었다. 이런 자들은 자신보다 더 심한 자들을 외면했다.

심한자들은 심한자들끼리 뭉쳤다. 심리적으로 뭉친 그들은 저승길을 같이 가자고 눈으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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