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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공적처방전달시스템, 사상누각의 길에서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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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공적처방전달시스템, 사상누각의 길에서 벗어나야
  • 의약뉴스 이찬종 기자
  • 승인 2023.06.14 0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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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고(故)신영복 교수가 감옥에 수감됐을 때 이야기다. 어느 날 신영복 교수와 대화하던 노인 목수는 무언갈 설명하며 땅바닥에 집을 그렸다. 노인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과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광경을 보고 신영복 교수는 “그때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지붕부터 집을 그리는 보통 사람과 달리 목수는 그림에서도 주춧돌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신영복 교수는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라고 감상을 남겼다.

최근 대한약사회는 공적처방전달시스템 구축에 회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최광훈 회장은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을 두고 회원들을 위해 지난해 12월부터 디지털특별위원회를 통해 은밀히 준비해 온 비장의 수라고 설명했다.

5월 30일 실체를 공개한 이후로는 회원 약국을 직접 방문하며 공적처방전달시스템 가입을 독려하는 등 회무 역량을 쏟고 있다. 그 결과 가입개시 7일 만에 1만 명이 넘는 약사들이 시스템에 정보를 입력했다.

최광훈 회장은 입력된 회원 정보를 기반으로 조만간 대형 민간 플랫폼 업체와 업무협약을 맺고, 비대면 진료 단계 중 약국과 관련된 부분을 모두 약사회에서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약사회 집행부 내부에서도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는 호평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대한약사회의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을 두고 약사사회 내부에서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최광훈 회장과 집행부가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의 개념을 넘어 실제 모습을 처음 공개하던 순간까지 대한약사회 이사와 대의원들에게 단 한 번도 사업계획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약사회 정관에 따르면 약사회가 진행하는 모든 사업은 상임이사회, 이사회, 대의원총회의 심의ㆍ의결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최광훈 집행부는 어떠한 심의나 의결도 받지 않았다. 이에 일부 지역약사회에서는 임시 대의원총회 소집 건의까지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집행부에서는 약사회가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예산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사업을 진행한 후 사후 보고해도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예산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보고없이 일을 추진해도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약사회가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을 비대면 진료의 핵심 축으로 내세운 만큼, 약사사회의 미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 사업이기 때문이다.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은 집을 짓기 전 땅속에 주춧돌을 박아 넣는 일과 같다. 그래야만 나중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단단한 기초를 기반으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의 구축 과정은 마치 지붕부터 집을 짓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정식으로 의사결정 절차를 거치지 않아 사업의 윤곽을 잡을 수 없고, 외풍이 불어올 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할 수 없다.

최광훈 회장은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을 회원들을 위해 개발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진정 회원을 위한 사업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는 논리를 구축하고, 급변하는 환경 속에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래야만 회원들이 약사회를 믿고 격변하는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 정국에서 하나의 울타리로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집행부는 절대적인 신뢰감을 주지 못했고, 약사사회 내부에서 공적처방전달시스템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은 결국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지붕부터 짓는 집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존재하더라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최광훈 집행부는 모든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할 때다. 신영복 교수가 마주한 목수의 그림에 어떤 마음이 묻어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약사회가 짓는 집엔 약사의 미래만이 아니라 보건의료계의 미래와 이로 인한 국민의 건강도 함께 머문다.

최광훈 집행부는 지금 그리고 있는 청사진이 ‘일하는 사람의 그림’ 인지 다시 확인해야 한다. 주춧돌 하나부터 다시 집을 그릴 시간은 아직 남아있다. 민간 플랫폼과의 협력이라는 지붕이 아닌 비대면 진료의 방향이라는 주춧돌부터 회원들과 다시 논의해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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