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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176. 노부인의 방문(1955)- 지체된 정의에 대한 여러 단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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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노부인의 방문(1955)- 지체된 정의에 대한 여러 단상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3.05.0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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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필요에 따라 뭉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대개는 흩어지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큰 이익, 공동의 이익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에 합치하면 안 뭉칠 이유가 없다. 이런 대중을 영악하다고 손가락질할 이유 없다. 그것이 인간사이고 세상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스위스의 어느 소도시. 귈렌은 한때는 꽤 잘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파산했다. 시청도 빚더미에 올랐다.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매각됐고 폐쇄됐다. 한때 대문호 괴테가 머물고 브람스가 4중주곡을 작곡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으나 지금은 주 정부도, 거기에 속한 주민도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

기적이 일어나거나 거액의 기부가 없다면 모두가 힘겹게 버티다 굶어 죽을 판이다. 이런 가운데 노부인이 방문한다. 그냥 노부인이 아니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부자다. 세계 전체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노부인의 고향 방문은 시에 아연 활력을 가져온다. 거액의 기부라도 한다면, 공장을 다시 사준다면, 빚을 값아 준다면 귈렌시는 다시 살아난다.

온 나라가 번창하는데 귈렌만 파산하는 경제의 불가사의도 해결된다. 노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은 그럴 준비가 돼 있다. 더구나 한때 그녀와 사랑했던 일은 예비 시장이니 잘된 일이다. 둘의 만남은 귈렌을 부활시킬 것이다. 환영 행사가 어마어마하다.

63세의 그녀는 진주 목걸이와 금팔찌로 온몸을 치장했다. 기괴한 모습이나 아름답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시종과 트렁크 행렬은 끝이 없다. 그러나 차림새 만큼이나 기이한 것은 짐 행렬에 죽은 사람을 담는 관이 따라 다닌다는 사실이다.

관은 죽음이다. 축제와 죽음. 어쨌든 귀향 행사는 무사히 끝나고 그녀는 시장이 예상한 4백 정도를 훌쩍 뛰어넘는 거액의 기부를 약속한다. 무려 10억. 5억은 시에 나머지 5억은 귈렌 시민 각자에게 동등하게 나눠준다. 조건은 단 하나 정의 실현이다.

기가 막힌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정의 실현이라면 아니 받을 이유가 없다. 클레어 자하나시안과 옛 여인 일은 한가한 틈을 타 그들이 사랑을 나눴던 숲속 헛간과 그 밖의 다른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그 옛날의 추억을 되새긴다.

내 작은 들고양이, 귀여운 요술장이. 일이 이렇게 부르면 클레어는 나의 흑표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17살의 그녀와 21살의 일이 나눴던 행복한 사랑의 시절을 회고한다. 이렇게 일이 풀려나가면 뒤렌마크의 희곡 <노부인의 방문>은 행복 그 자체다.

하지만 클레어가 말한 정의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옛 애인 일과의 관계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랑했으나 가난했으므로 헤어졌다. 디테일로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은 그녀와 헤어지고 돈이 있는 잡화상 딸과 결혼하기 위해 법정을 속였다.

일은 독한 술 한 병으로 매수해 두 명에게 위증을 시켰다. ( 두 명의 위증자는 클레어에게 매수당한 두 거인에 의해 거세당하고 두 눈이 뽑혀 맹인이 됐다.) 친자 소송에서 클레어와 함께 잤다고 거짓말을 했다. 뱃속의 아이는 이제 일과는 무관하게 됐다.

▲ 노부인의 방문은 군중의 이익과 지체된 정의에 대한 여러 단상을 제공한다.
▲ 노부인의 방문은 군중의 이익과 지체된 정의에 대한 여러 단상을 제공한다.

패소한 클레어는 마을에서 추방됐고 창녀로 전락했다. (그런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클레어가 제시한 환상적인 급료 때문에 판사질을 그만두고 그녀의 집사가 됐다.) 돈 많은 늙은이가 사창가에서 클레어를 발견하고 금발에 반해 그녀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돈을 쓸어모았다. 아르메이나의 유전을 사들이고 서부철도는 물론 북부 방송국을 소유했고 방콕의 환락가도 그녀 수중에 떨어졌다. 아프리카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혼자서 정글을 기어 나와 살아날 만큼 용맹함도 지녔다.

이제 세상은 그녀의 것이 됐고 그 무엇도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4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일과의 이런 추억과 악연을 떠올린다.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너무 시간이 지체됐다. 잘못된 정의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돈 앞에서 안 되는 것은 없다. 그녀가 오고 나서 귈렌의 살림은 펴지기 시작했다. 고급 담배를 사러 오는 사람이 늘고 코냑이 팔리고 고급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의 딸은 테니스를 배우고 아들은 차를 구입했다. 일의 아내는 모피 코트를 입었다.

다 외상이다. 빚은 늘어난다.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클레어는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클레어가 말한 정의 실현은 일을 죽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는 유럽이고 유럽인은 그런 정의를 원치 않는다. 돈값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시장은 손에 피를 묻히느니 가난하게 살기를 원한다. 과연 그럴까. 2막이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그 정의는 지켜질까. 귈렌 시민들은 이제 사치스럽다 할 정도로 살림이 윤택해지고 있다. 허구한 날 헌 구두만 신을 수 없다며 새 신을 사들인다.

시장은 최고급 담배를 피고 새 넥타이를 매고 수입 신발을 주문한다. 살인교사로 클레어를 체포하라는 일의 요구를 거절한 경찰의 입안은 금니로 번쩍인다. 유산상속이나 로또 복권을 맞지 않고는 이런 호사는 있을 수 없다.

다시 과거의 가난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들떠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일만은 아니다.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자신이 죽어야 하는 시간은 빨라진다. 장전을 하고 모두가 그 순간을 기다린다. 자신이 죽은것을 예상하고 시민들은 행동한다.

시청은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설계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빚을 값지 못하면 다 허사다. 일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세탁기, 텔레비전이 이 집 저 집으로 들어간다. 이 또한 다 외상이다. 여자들은 외모를 가꾸고 남자들도 차려입고 외출한다.

시 전체가 살해 축제로 들떠 있으니 일은 겁나 죽을 지경이다. 그는 성당의 신부를 찾는다. 그러나 신부라고 다를까. 그는 삶이 아닌 죽음을 집전하고 있다. 두려워할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육체의 죽음 같은 것 생각 말고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하라, 고난을 긍정적으로 보라.

돈 때문에 자신이 여자를 배신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돈 때문에 자신을 배신할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다. 참회의 길로 가라, 이렇게 충고한다. 귈렌에 배신의 종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러니 여기 남아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달아 나라고 신부는 외친다.

교장은 애도의 노래를 연습하고 여기가 가장 안전하지만 정 가고 싶다면 호주로 이민가라고, 내가 배웅해 주겠다고 일의 등을 떠민다. 이제 시장도 변했고 교장도 변했다. 돈맛을 안 것이다. 차기 시장을 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은 깨진다.

대신 정의를 실현하기에 알맞은 총을 건네준다. 깨끗하게 자살하면 우리가 처리했다고 보고하고 그러면 너의 허물은 덮어질 것이라고 협박한다. 일은 거절한다. 자신의 손으로 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당신들이 할 일을 면제해 줄 생각은 없다는 것이 일이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한 자존심이다.

대신 저항이나 항의할 생각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시민들이 보기에 일의 이런 판단은 얼마만큼은 품위 있는 인간이 되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는 유감스러운 행동이다. 이 무렵 클레어는 9번째 결혼식을 일과 하기로 했던 귈렌 대성당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올린다. 유용해서가 아니라 그저 전시용으로.

장면은 바뀌어 노랗게 물든 숲속에서 클레어와 일이 앉아 있다. 그녀는 태어날 때 딸을 한 번 본 것이 고작이라고 일에게 말한다. 그 후 딸은 이집 저집을 드나들다 일 년도 안돼 복지시설에서 죽었다.

이제 극도 끝나갈 시간이다. 마을 자치 회의가 열린다. 시장과 교장이 말한다. 빚이 늘었소. 그것도 상당히. 누군가 말한다. 당신이 할 일을 알고 있잖소? 정의를 실현하자. 정의를 실현하자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그것으로 상황은 끝났다.

시장은 기차를 타러 가는 일을 위해 좁은 길을 만들었다. 일이 기차를 타지 못한다는 것을 관객은 다 알고 있다. 미리 준비한 관은 이미 꽃장식이 끝났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를 하기 위해 신부도 이미 준비를 마쳤다. 의사는 일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적는다. 이것으로 귈렌의 정의는 실현됐다.

: 집단 광기는 이런 식으로 흐른다. 가난을 택할지언정 사람 목숨값을 흥정하지 않는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었다. 진정한 정의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 하나의 생명을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귈렌 시민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일의 죽음을 원했고 실천했다. 거기에는 시장과 교장과 의사도 경찰도 신부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심지어 글을 쓴 작가도 공범자였다.( 뒤렌마트는 1955년 취리히의 극장에서 초연할 당시 “저자도 공범자의 한 사람으로서 작품을 썼다”고 부록에서 밝혔다.)

그렇다. 저자까지 공범자에 가세했으니 일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위증과 버림의 대가는 돈 앞에서 더 커지는 법이다. 클레어는 소원을 이뤘다. 정의를 실천한 것이다. 내가 가진 재력이 질서를 만든다. 세상은 나를 창녀로 만들었으나 나는 세상을 유곽으로 만들었다. 단 한 번의 살인으로 귈렌을 사주겠다, 시체 하나면 호경기로 갚겠다는 약속은 지켜졌다.

시민들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정의 때문에 노부인의 기금을 받았으며 살인에 가담했다고 자위한다. 만삭의 몸으로 추운 겨울 귈렌을 떠나면서 손가락질을 받았던 클레어는 비록 의수와 의족 차림이었지만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 입장에서는 지체된 정의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법의 이름으로 볼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닐수도 있다. 참으로 부조리지만 인간세상은 그런 것이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 관객들은 여러 생각거리를 안게됐다. 이 작품은 작가의 또 다른 희극 <물리학자>들과 함께 이차 대전 후 독일 연극의 부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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