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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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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22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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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은 거쳐가는 곳이었다. 잠깐 부모님을 뵙고 하루 이틀 여행을 한 후 바로 파리로 출국하려던 것이 유지와 점례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이들은 조선을 출발할 때 이미 출국 날짜까지 정했다.

그런데 막상 도쿄에 도착하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보았던 평온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승전의 기대 같은 이미 저버린지 오래였다. 경기는 침체였고 상인들은 팔 물건이 없어 애를 태웠다.

서민들은 한 끼 밥걱정에 내몰렸다. 무엇보다 분위기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어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형장의 사형수처럼 핏기가 없었다.

원래 이랬었나.

유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벌써 일주일째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유지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각총리대신의 집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유지는 아무래도 아버지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점례가 따라오려 하자 그는 말렸다.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안다해도 나조차 만나기가 어렵고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댔다.

점례는 실망했으나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유지가 나간 후 그는 자수를 떴다. 학 두마리가 나는 평화로운 그림이었다.

네, 솜씨가 좋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유지 어머니가 칭찬했다.

별거 아닙니다. 변변한 선물도 준비못했는데 부모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부지런히 하면 될 듯도 싶어요.

점례가 점잖은 일본말로 말했다.

그래, 조선의 분위기는 어떻노?

평온하다고 할까요. 전쟁 분위기는 아니에요. 이곳 도쿄보다 조용하고 모든 게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유지가 했던 비슷한 말을 점례는 하고 있었다.

거기 일본사람들도 그렇고?

네, 조선에는 일본사람, 조선사람 구분이 없어요. 내선일체인걸요.

그렇구나. 그렇구나.

일등국민 이등국민이 어디있겠어?

그말을 한 어머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점례는 다시 자수에 눈길을 주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점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언뜻 유지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바늘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곧 멈추었다.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밖은 사람들의 대피 소리로 어수선했다. 일상적으로 하는 훈련의 일종인지 정말 공습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방에 들어갔던 어머니가 황급히 나오더니 지하로 가자고 점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곧 사이렌은 멈췄다. 잠깐 기다려보자. 사이렌은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길게 울리가 짧게 울리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뚝 멈췄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가 찾아왔다. 시끄럽다가 그보다 덜하니 조용한 것으로 느끼는 심리 때문인지 정말로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어머니는 급하면 저쪽 문 보이지? 손가락질을 하면서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켰다.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거라.

점례는 뜨개를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조선에서는 그러지 않았는데 무슨 변고인가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파리로 출국할 걸 그랬나. 점례는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유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간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 무렵 유지 아버지 내각총리대신은 아들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천황을 만났는지 모른다. 오후에도 약속에 잡혀있다.

지금은 대본영 소속 육군장성과 해군장성등 군부 인사와 잇따른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려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군생활과 자신의 직책을 생각해서인지 신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해서든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중간에 낀 그는 결론을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양쪽의 주장은 팽팽했다. 전쟁을 해군이나 육군 주도로 하기 위해 육해군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것은 패전하는 군대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이기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던 것이 지고 있으면 싸우게 마련이다.

그런 것을 논할 만큼 한가한 게 아니오. 지금은 종전선언을 하느냐 아니면 결전을 이어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군부 주도권을 놓고 다툴 시간이 없어요.

내각총리대신은 노골적으로 힘겨루기 싸움을 끝내라면서 화를 버럭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느냐는 투였다. 그러나 군부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육군 대장 출신 선배라고 너무 심하게 하는 것 아닌가.

자리에 참석한 참모총장은 속으로 부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그를 험담했다. 생각같아서는 누구라도 반대하면 바로 처형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덴노만 아니라면 이 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육군대장은 모자를 매만졌다. 해군쪽 대표는 싸울 함대가 없으면서도 큰소리를 쳤다. 전열을 정비하고 기습하면 미국쯤이야 문제없다고. 그러나 그 자신도 그것이 메아리 없이 허공을 맴돈다는 것을 알았다.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오후에 쇼와 덴노를 뵈러갑니다. 우리의 생각을 달라는데 이렇게 싸우고만 있으면 어떻해요.

그렇게 급합니까. 오늘 당장 미군이 도쿄 공습을 한답니까? 아니면 핵무기라도 쏜다고 협박했나요? 

사정을 알면서 왜 이러십니까.

내각총리대신은 전선에서 괴멸적 참패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고 있었으나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 최후통첩이 받았어요. 가부간 답장을 줘야 합니다.

주지 않으면? 

도쿄는 불바다가 되겠지요. 수 분내에 수 십만이 죽겠지요. 건물은 폭삭 가라 앉고 사방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피고.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두 장군은 앉은 채로 군홧발을 딱딱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찍었다.

아시겠지만 소장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어요. 결사항전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이 천만명을 가미카제 특공대로 쓰면 미국을 잿더미로 만든다고, 기세가 대단해요.

1억 인구로 밀자는 말까지 나옵니다. 찌라시가 도쿄 시내에 뿌려졌어요. 우리 7천만 조선과 대만 3천만이 힘을 모으면 됩니다. 어젯밤에 사단장을 처형까지 했어요.

해군총장이 육군 총장의 말을 받아 가담하지 않는 자의 본보기라면서요? 하고 물었다.

그들이 여기로 쳐들어 올지도 모르겠군요.

내각총리대신은 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끝내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입에 무언가를 넣은 것처럼 우물거리던 두 대장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

무고한 시민을 살려야지요. 얼마가 죽어도 상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대신 우리는 천황제를 지키고 군부의 기득권을 확실히 챙길 겁니다.

우리가 뭐... 그것 때문에 물러서자는 것은 아니고요.

육군 대장이 말끝을 흐렸다.

천황제만 지켜진다면.

해군 대장도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손을 들 생각은 없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연승과 태평양 전쟁의 초반 기세를 생각하면 하늘이 뒤집어 질 일이다.

그러지 말고 신사 참배나 하고 옵시다. 머리도 식히고...결단이 필요할 때는 바른 정신이 필요하지요.

육군대장이 해군대장을 보고 말했다. 

내각 총리대신은 순간 이들이 시간을 끌려고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런다고 전세가 역전되는 것은 아니다. 더 험한 꼴만 당할 뿐이다. 덴노의 위치가 위협받고 군부도 안전하기 못할 것이다.

내각총리대신은 일어서려는 그들을 잡았다. 그리고 강제로 자리에 앉히려는 듯이 어깨를 눌렀다.

이거 왜 그래.

장군은 몸에 손을 대자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유지가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왔다. 내각총리대신은 어깨를 떨면서 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급한 순간에 아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일주일 째 아들 생각은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온다는 전보를 받은 사실조차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비서는 뭣하는 거지? 이놈은 또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대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버지, 접니다.

아버지라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라니. 내 정신이 어찌 된 거지. 유지가 앞으로 다가왔다.

접니다. 조선에서 막 도착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아버지에 앞서 두 장군은 악수를 청했다. 총리대신의 아들이 최전선에서 싸우다 부상당해 대령으로 전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민간인 신분이지만 유지는 부동자세를 하고 손을 올려붙였다.

좋아 좋아. 그만하고 앉으시오. 지금 아버님과 긴한 얘기를 하고 있었소. 유지군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일본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어요. 포츠담 선언을 받자는 쪽과 끝까지 싸우자는 쪽이 대립하고 있어요. 그 와중에 군부 소장파에서 쿠데타까지 발생했고요. 아주 심각해요. 조선은 그런 사정을 모르지요?

예, 금시초문입니다. 곧 일본의 승리로 종전될 그런 분위기를 안고 왔습니다만.

틀렸어요. 다 틀렸어.

육군 대장이 체념한 듯이 말했다. 유지는 일본이 진다는 말보다는 의기소침한 대장의 태도에 더 놀랐다. 당장 죽어도 사기로 먹고 살아야 하는 대 일본제국의 육군대장이 이렇다니.

도대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어려운 것은 나름대로 짐작했지만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다.

유지야, 넌 나가 있어라. 이따 집에서 보자.

아닙니다. 아버지. 저도 엄연한 예비역 장교입니다. 전시에는 군인이지요. 여기 제 육사 선배님과 해군 장군님 앞에서 제 의견을 낼 수도 있지요.

그래요.

육군 대장이 거들고 나섰다.

한 번 얘기나 들어보지요. 글을 쓰는 작가 장교라면 우리와는 다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들은 유지가 파리에서 그림과 작가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이렇게 물었다.

군인이 항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우리가 지다니요. 

유지가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너는 나가 있어라.

아버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비서, 들어와라. 

내각 참모대신이 비서를 불렀다.

이분을 모시고 나가라.

아버지.

나가 있어. 오후에 덴노를 만나러 가야 해. 시간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냉혹하게 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항복 동의를 받아야 하는 시점에서 거의 다 의견 일치를 봤는데 결사항전 같은 말을 하면 사태가 꼬인다.

유지는 일어섰다. 아버지의 말을 계속해서 거역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온 유지는 벽에 걸린 덴노의 사진을 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충성을 맹세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그리고...

조선독립군 때문에 태평양 전선의 중요 부대를 조중 국경으로 차출했다고. 휴의라는 자를 잡지 못한 때문이라고. 아버지의 뒷말이 자꾸 목에 걸렸다.

조선에 있을 때 내가 그렇게 소극적이었지. 점례는 굳이 숨기려 들고. 그것이 지금 수세에 몰린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

유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기 위해 닥치는대로 걷어차고 싶었다. 무엇이든 앞에 나타나면 일본도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싶었다. 숨어 있는 분노의 질주 본능이 살아나고 있다.

일본 육사에서 배웠던 악과 깡과 그리고 초기 전선 투입 당시 보였던 살의가 되살아났다. 그림이다 글이다 점례다 뭐다 하면서 자신의 군인 정신이 흐리멍덩해진 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그래, 다 그것 때문이야. 내가 했어야 하는데. 내가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대본영 육군 대장은 됐을거야.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난 죄인이야. 국가의 대역죄인.

그는 분노하다 울다 가슴을 치다 자기 뺨을 번갈아 사정없이 쳤다. 그는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직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의 주범은 점례다. 그가 휴의를 감췄다. 그가 조선에서 벌인 일들이 떠올랐다. 

탈출해서는 상하이 독립군 사단을 몰고 두만강을 넘고 있다. 우리의 귀중한 군대가 전방이 아닌 후방으로 빠졌다. 내가 반드시 휴의란 놈을 처단하겠다. 난 다시 조선으로 간다. 그러기 전에 점례는? 점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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