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7 06:01 (토)
청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재빨리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상태바
청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재빨리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11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용희의 기타 솜씨는 능수능란했다.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하는 그녀가 기타 줄을 가지고 놀았다. 길고 하얀 손이 줄을 잡고 이리저리 옮겨 갈 때면 흡사 무리지은 학들의 군무처럼 예뻤다.

배우는 것이 빨랐던 그녀는 타고난 음악가였다. 가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노래도 제법 구성지게 뽑았다. 이제 용희에게 피아노와 기타는 뗄 수 없는 친구가 됐다.

가장 친한 친구. 말이 없어도 눈짓만으로도 통하는 그런 지란지교와 같은 친구 말이다. 사실 그녀는 친구가 별로 없다. 아니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친구가 없다고 해서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심심하거나 위로를 받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위로를 받고 싶을 만큼 정신이 허한 상태도 아니었다. 배우면서 채워지는 지식의 힘에 그녀는 깊이 빠져들었다.

더구나 병원 일은 종일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바쁜 가운데도 한가한 시간은 늘 있기 마련 이다. 짬이 나면 용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타에 눈길을 주었다.  수다의 재미가 이보다 어찌 나을까.

목포의 눈물이나 황성옛터는 수백 번을 더 불렀다. 단골로 오는 그곳 중국인 환자들도 노랫말을 흥얼거릴 정도였다. 요즘에는 그 노래에 더해 애수의 소야곡, 왕서방 연서, 오빠는 풍각쟁이야 등 조선에서 유행하는 노래들을 익히는데 재미를 붙였다.

부를수록 신이 나고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것보다는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노래를 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 졌다. 그러면 다시 차트를 보고 오늘 본 환자 상태를 체크하고 내일 올 환자에 대한 정보로 치료 방법을 그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이 왔다. 말수는 환자를 보기 무섭게 저녁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남편은 늘 약속 핑계를 댔고 늦은 밤에 술에 취해 들어왔다.

어떤 날은 너무 늦으면 기다리지 말라고 하면서 아예 새벽이나 아침 이후에 귀가했다. 용희는 그런 말수가 걱정이 됐다. 다른 무엇도 아닌 건강이 염려됐다. 그가 없으면 병원은 어찌되나. 이제 막 자식의 정을 느끼는 비록 양자지만 들인 아들의 앞날이 우려스러웠다.

당신이 있잖아. 나보다 유능한 여자 의사, 하면서 용희가 병원은 어쩌고 자꾸 밖으로 도느냐고 물으면 약간은 비꼬는 투로 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수술은 당신이잖아요. 난 당신의 손끝도 못 따라가요. 아들이 커서 아버지 병원을 물려받을 수 있을 때까지는 안심하면 안 되요.

또 그 소리. 아들 타령이오. 애들은 태어날 때 제 먹을 것은 타고 난다고 하지 않소. 알아서 하겠지. 내버려 둬도 됩니다.

말수는 그럴 말로 용희를 달래는 것인지 아니면 되레 화를 복돋는지 모를 소리를 하고는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외출하고 술을 먹는 것 말고는 말수는 낮 동안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책임감이 있어. 그렇게 늦게까지 푸고도 제 일을 해. 내가 너무 오버하고 있나. 간섭이 심하면 남자는 밖으로 돈다고 했으니 모른 척하고 입 다물고 있을까.

용희는 하다못해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대개는 중도에서 끊어지기 마련이다. 환자가 들어오거나 아들이 놀아달라고 칭얼대거나 간호사가 구매 물품 목록을 들이밀기 때문이다.

페이 닥터는 자기 일을 잘 해내고 있다. 눈치빠른 그는 환자가 몰릴 때면 용희가 신경쓰지 않도록 자신이 잘 관리했다. 젊은 청춘이 눈치가 제법 있었다. 저런 사람으로 아들이 자라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 내일은 주말이니 어디 야외에 나가서 스트레스를 좀 풀고 올까. 아니면 점례 소식이 있는지 미술관이나 구경 갈까. 편지를 보냈는데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점례가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분명히 잡지에 나온 파리 주소를 정확히 썼는데 어이된 일인지 두 달이 지나도 점례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러다가 한인촌에서 발생하는 조선소식이라는 비정기 간행물을 통해 점례가 잠시 귀국한 사실을 알았다. 파리 유학 중에 그린 그림과 그곳 화가들의 몇 점을 합쳐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점례야, 나 용희다. 보고 싶구나.

용희는 신파조의 연극 대사를 읆조리듯이 한 번 입 밖으로 말해 보았다.

점례가 누구요?

어느새 들어왔는지 말수가 물었다. 용희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기척도 없이 들어오면 어떻해요?

내 집인데 노크를 해야 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깜짝 놀랐잖아요.

점례가 누구냐고?

아, 점례요. 내 고향 보령 죽마을의 죽마고우. 간혹 이야기 했잖아요. 기억 안나요?

그렇군. 그런데 그 점례는 왜?

점례가 조선 제일의 화가가 됐군요.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최근에 귀국 전시회를 열었대요. 지금 잠시 조선에 다니러 왔나 봐요. 인사동이 북적였고요.

그래, 당신에게 그런 멋진 친구가 있었단 말이지. 자랑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대.

몇 번 아마 이야기했을걸요. 당신은 언젠가 좋은 시절에 한 번 보고 싶군.

그렇게 말했잖아요. 잊었어요?

미안해 건성으로 들었나 봐. 그 때는 친구는 사치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그 친구를 만나면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요. 풍금을 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고요. 내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아마도 놀라 자빠질걸요.

글쎄, 우리가 한 번 파리로 놀러 가볼까. 아니면 상해로 초청하는 건 어때?

여보, 진심이세요. 농담 아니죠?

물론이고 말고. 자, 친구를 만났다고 치고 노래를 한 번 불러봐. 당신 노래 들은 지 오래됐어.

말수는 기타가 놓여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 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청을 기다린 것처럼 용희가 재빨리 노래를 시작했다.

얼씨구 말수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 노래는 언제 배웠대.

오래됐어요. 당신이 관심 없으니 모르지요.

그것도 미안해요.

이번엔 왕서방 연서를 부를까요. 아니면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여보, 그런 허당 노래 말고 이런 노래 어때.

말수는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팔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나랏님의 병정되기 소원입니다.

용희는 차렷 자세를 하고 팔을 위아래로 힘차게 휘두르며 부르는 말수를 올려다 보았다.

여보, 그 노래는 군가인가요? 처음 들어봐요.

조선에서 지금 최고 히트송인 혈서지원을 모른단 말이요. 이런 이런.

노래를 멈춘 말수가 자리에 앉으면서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 이런 노래를 불러야지.

여보, 난 전쟁이 싫어요.

싫어도 현실인데...말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고는 다시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부르다 만 나머지 부분을 마저 불렀다. 작정하고 부르니 말릴 수도 없었다.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랏님의 병정되길 소원합니다. 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 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 감격에 못이겨 손끝을 깨물어서 나랏님의 병정 되길 기원합니다.

여보 여기 나랏님은 쇼와 덴노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당신 알고 있어구료.

말수가 얼굴을 활짝 펴고 다가 앉았다.

그런데 가사도 그렇고 그런 노래를 상하이에서 굳이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차라리 독립군가를 불러보면 어때요?

용희가 다시 기타 줄을 잡고 몇 번 튕겨 내더니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이절 마저 부를게요.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이 너와 나로다.

여보, 가사를 어찌 외웠어. 하나도 안 틀려.

말수가 놀래면서 물었다. 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당신이 늘 불렀잖아요. 어려운 시절에. 틈만 나면 불러서 그냥 외웠지요.

그래 맞어. 그런데 지금은 아냐. 그 노래는 아냐. 여보, 난 이 행복 깨고 싶지 않아. 우리들의 행복 말이야.

물론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아들도 있고.

지금까지 잘해 왔어요. 앞으로도 우리 잘해나가요.

그래 그러러면 줄을 잘 타야 해. 줄을.

말수가 자신있는 어투로 말했다.

조선 줄은 썩은 동아줄이오. 당신도 알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