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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마차가 떠나자 그가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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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떠나자 그가 손을 흔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1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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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점례가 자신의 길로 접어들었구나, 제대로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둘이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번졌다.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이야기는 아마도 경성역에서 헤어진 뒤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다가 용희는 그건 아니다, 라고 못박았다. 굳이 그 시점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상해 병원을 개업한 순간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그 이전에 대한 물음을 점례가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어쩌다 그 순간이 오면 그렇잖아, 전쟁 시기에 다들 어려웠잖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삶이었어. 하고 뭉뚱그릴 참이었다.

점례는 파리 유학부터 꺼내야 한다. 만약 그가 그 이전의 어떤 시점에서 말을 이으려고 하면 일단 나는 점례의 표정을 살필 것이다. 그 표정에 생기가 돌고 있다면 오케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어두운 구석이 보이면 중단시킬 것이다.

'점례야, 네 그림을 내가 상해에서 봤다는 거 아니니. 글쎄 미술관에서 잡지에 실린 네 그림 네 점의 도판을 본 거야. 그것도 파리에서 발간한. 놀랍더라.그럴 줄 알았어. 어릴 때부터 넌 주관이 뚜렷했고 잘 흔들리지 않았잖아. 손재주도 좋았고.'

점례는 아마도 웃을 것이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녀는 웃으면서 용희를 대할 것이다. 그러면 용희는 뜸을 들일 필요도 없어 점례가 그려내는 인생 스토리에 빠져 들것이다.

'나는 뭐 보시다시피 이래. 의사가 체질에 맞는지 몰랐어. 어찌하다 메스를 잡았고 상해에 병원을 차린 거야. 전공이 뭐냐고. 다해. 간호도 하고 아이도 받고 급할 때는 찢고 꿰매기도 하지.'

'아프면 너한테 달려갈게. 아프지 않게 잘 좀 해주라. 난 이제 백 살까지 거뜬하게 살겠네.'

점례의 호들갑에 나도 맞장구치겠지. 그리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를 마시겠지.

'어디 차니, 맛있다 애.'

그런 다음에 이제 남자 차례가 온 것을 알고 서로 누가 먼저 소개할까 눈치를 보겠지. 각자 옆구리에 차고 있는 남자. 그것은 자신들보다 어렵지 않다.

점례는 당당하게 옆에 있는 유지 호사카를 내게 인사시킬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평생 동반자이며 배필자다. 봐, 얼굴도 잘생겼지? 어디서 만났느냐고. 그게 궁금하지. 그냥 오다가다 만났어.'

그러면 우리는 신나게 박수치고 웃겠지. 더는 묻지 않는다. 큰 그림이 중요하다. 디테일 속에 있는 악마를 우리는 절대 꺼낼 일이 없다. 이제 내 차례다.

'말수를 어디서 만났느냐고. 흔들리는 갑판에서 만났다고. 노.'

말수는 용희가 상해에 왔을 때 벌써 유명한 외과 의사였다. 병원을 물색하던 그는 간호사 경력이 있는 젊은 산부인과 의사 용희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만난 날 오후 바로 청혼했지?'

'빠르다.'

'그래 좀 우리가 빨라. 전쟁통이라도 빠른 것 확실해. 어디서 청혼했냐고. 너도 짐작할 수 있지. 인생은 길거리에서 시작된다는 걸. 거리에서 그이가 나를 잡고는 나랑 결혼하자 글쎄 이러지 않겠니?'

이 대목에서 또 한바탕 웃지 않을 수 없다. 놀라는 것은 그다음 순서다. 손뼉을 하도 많이 쳐 이젠 아플 정도다.

용희는 잠깐, 아주 잠깐만에 이런 식으로 앞서 나갔다. 뿌듯 했다. 그러나 의식의 깊은 곳에서 빠져나온 순간 그녀는 무언가 허전한 것을 느끼고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아차, 그림을 보고 있었지.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도판이 있는 잡지의 펼쳐진 부분이 접혀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편은 어디 있지? 점례의 그림이 여기 있어요.'

그녀는 말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여기 흰 옷 입은 조선사람들이 있어요.'

용희는 다시 점례의 세계로 들어갔다.

'점례야, 네가 본 것은 이런 것이고 네가 그것을 표현했구나, 이걸 내 남편에게 보여줘도 되겠지.'

점례가 뭘 그런 걸 허락까지 구하느냐고 핀잔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수가 점례의 그림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용희는 잡지에 눈을 돌렸다.

네 컷의 도판 중 맨 왼쪽의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서로 맞춰 입은 듯 똑같이 흰옷 입은 지게꾼들이 지게를 풀어 놓고 나란히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사실 적이네, 이런 게 파리에서 먹혀들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렸겠지.'

용희는 홀로 묻고 홀로 대답했다. 잡지를 얼추 읽고 나서 용희는 다시 말수를 찾았다. 저쪽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용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방향을 잡고 걸었다.

거기에는 그림 대신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앞에서 말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어떤 사진일까. 궁금한 용희가 슬그머니 말수 뒤로 다가가 사진을 슬쩍 보았다.

그때까지도 말수는 용희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듯이 앞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용희는 갑자기 어느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말수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한 장의 사진은 본 듯하고 아니 본듯한 그 중간쯤에 있었다. 그러다가 안개가 걷히듯이 서서히 아니 본것이 아닌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었다.

하얀 파도가 그보다 더 하얀 모래에 걸려 넘어지는 한가롭고 여유 있는 바닷가가 배경이었다. 그것을 뒤로 십여 명의 여자들과 총을 든 군인 오륙 명이 사진기를 보고 웃고 있었다.

군인들은 여자들을 감시라도 하듯이 양쪽에서 둘러싸듯이 포즈를 취했다. 군인들은 웃고 있는 여자들 사이에서 근엄한 표정을 억지로 짓지 않고 따라서 웃고 있었다. 조선인위안부와 점령지 태평양의 일본군이었다.

용희가 얼어붙어 있듯이 말수도 땅에 박힌 말뚝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굴속으로 들어가는 기차처럼 아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을 찾기라도 하듯이 손가락을 집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용희는 그가 알지 못하도록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서 헛기침을 했다.

'여기 있었어요. 한 참 찾았네요.'

말수가 뒤돌아보면서 용희 쪽으로 다가왔다.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어, 그냥 뭐 시답잖은 사진을 보고 있었어.'

'그래요. 다 봤나요?'

'그래 볼 것도 없어. 그냥 심심해서 보고 있었을 뿐이야. 나가서 점심이나 먹자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

말수가 손목시계를 보면서 용희의 소매를 급하게 잡아끌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행위였다. 용희는 못 본 척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오후의 태양이 눈부셨다. 무너진 갱도에서 겨우 살아 나온 광부들이 처음 맞는 햇살처럼 용희는 두 손으로 해를 가렸다. 그대로 놔두면 실명이 올 것 같은 강렬한 빛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더 따갑게 아래로 내려와 급기야는 태양이 머리 위에서 지져대고 있는 것 같았다. 두서없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하나의 질문이 어렵지 않게 나왔다.

'사진 속의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던가요?'

용희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말수는 말없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걷는 데 열중했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그러지 않으면 넘어지기라도 할 듯이 발에 힘을 주었다. 그들은 식사 대신 술과 안주를 먹었다.

회포를 푸는 사람들처럼 둘은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술이 들어가자 용희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말수도 지지않고 맞받아쳤다. 온갖 주제들이 다 동원됐다.

전쟁이야기 부터 조선의 운명과 병원의 운영 그리고 점례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당연히 나와야 될것이 다 나왔다. 그러다가 정신이 갑자기 돌아온 용희가 말했다.

'내일 오전에 수술 있잖아요.'

조금 과하게 먹는다 싶어 말수에게 주의를 주었다.

'간단한 거야, 내가 술 때문에 실수하는 것 봤어.'

'믿지요, 믿어. 그러니 더 조심하라는 거예요.'

용희가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말수가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이날 용희도 제법 마셨다. 걸어가기에는 병원까지의 거리가 멀 정도였다. 마차를 불렀다. 마차 안에서 말수는 용희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았다. 용희는 넓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필요하면 나에게 기대세요.'

용희는 자신이 기대면서 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낸 말이 아니라 속으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말수는 마차를 세웠다. 병원까지는 조금 더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용희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먼저 가라고 하고는 자신은 마차에서 내렸다.

'포목점 집에 잠깐 들렀다 올게. 당신도 알잖아. 두 달 동안 보지 못했어.'

용희는 잡을 수 없었다. 마차는 떠나고 있었고 말수는 손을 들었다. 그날 늦게까지 용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말수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설마 지금까지 술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일이 생긴걸까.'

용희는 이런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걱정이 앞섰다. 병원 개업하고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술 때문에 말수는 용희를 기다리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사진을 떠올렸다. 설마 그 사진에 내가 있을까. 그렇다 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단발머리를 서양식으로 볶고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썹엔 커다란 안경이 눈을 가리고 있다.

살도 제법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 볼이 조금 앞으로 나와 있다. 용희는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말수라면 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은 왜 그런 사진을 갖다 걸었을까.

말수가 설사 그림 속에서 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덮었던 생채기가 드러났을 때 말수는 괴로웠다.

그 괴로움을 술로 대신하고 싶었다. 술친구로 배불뚝이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집 안사람이 내오는 안주도 좋았다. 이미 술기운이 있던 말수는 배불뚝이가 내온 독주 서너 잔을 먹고 거의 뻗다시피 했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주절댔으나 그는 먹다 말고 방 안에서 잠들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용희를 둘러싸고 일본군이 웃고 있는 사진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지 마, 안돼, 안된다'고 그는 소리쳤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목을 군홧발이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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