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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휴를 만나면 친구가 아닌 적으로 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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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휴를 만나면 친구가 아닌 적으로 대할 것이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1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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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일대를 떠돌았다. 배고픈 개처럼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구석진 곳만 돌았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이방인 이었다.

어쩌다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 걸리면 그 때야 휴의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동물이 아닌 것에 안도했다. 

그렇게 그는 버텨냈다. 어떻게든 살아온 것이다. 간혹 조선인을 만나면 시베리아 강제 이주 한인으로 행세했다.

때에 따라서는 남만주 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조선을 떠나 온지 십 년이 지나 이제는 고향 생각 같은 것은 나지도 않는다고 둘러댔다.

혹시 모를 첩자나 일경의 끄나불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도피생활에 지칠 즈음 그는 어렵게 임정 요인들과 끈이 닿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원한 것은 아니었다.

쫓고 쫓기는 삶에 대한 환멸을 아직 떨치지 못할 때였다. 그들이 먼저 휴의에게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다면서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하자고 제의했다.

나를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휴의는 그 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주소와 접선 방법 등을 숙지한 후에도 한동안 홀로 지냈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토벌대장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지금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받아 줄지 모른다.

잘못한 것이라고는 이미 죽은 청년을 풀어 준 것 뿐이고 사전 보고 없이 부대를 이탈한 죄가 전부였다. 물론 이것 저것 뒤집어 씌운다면 살아 남기 어렵다.

그렇지만 살려주려고 마음먹으면 죽일 이유보다도 더 많았다. 내친 김에 임정의 아지트를 불어 볼까도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 자신이 일부로 꾸민 자자극이라고 둘러 댈수도 있다. 결과가 좋아 임정의 우두머리나 아니면 간부급을 체포하면 그동안의 죄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고생은 그를 과거 편했던 시절로 이끌었다. 쫓기는 삶보다는 쫓는 삶이 좋았다. 눈알을 부라리면서 억압하는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휴의는 그런 결정을 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조선 사람이었고 가슴 밑바닥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흘러 내렸다.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미워졌다. 그는 미행자가 있는지 살피면서 청년이 알려준 장소를 찾았다.

처음 만난 지 세달 만이었다. 독립군 아지트를 여러번 스쳐 지나가면서 휴의는 자신에게 닥친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최후까지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임정에서는 휴의를 요긴하게 쓰기 위해 아껴 두지 않았다.

그는 궂은 일을 자청했다. 위험하고 나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작전에 참여했다. 전투 지휘를 하고 왜경을 암살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신참을 훈련 시키고 정규군으로 키우는 일도 휴의가 담당했다. 그는 활동가였다. 처음에 임정은 그를 일제의 밀정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이었다. 일거리는 주로 잡혀도 아무 문제 없는 하찮은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진심을 읽기 시작했다.

업적이 쌓이고 그 전에 많은 대화가 있었다. 임정은 그를 믿었다. 토벌대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여러번 목숨을 잃을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번번히 살아 돌아왔고 전과를 올렸다.

부상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다. 현장을 보지 않은 요인들은 그 말을 작전에 투입됐던 동료들부터 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휴의를 추어 섬겼다.

한 두 번도 아니어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전투는 수시로 이어졌고 죽어 나가는 대원들도 많았다. 생사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처럼 진실된 것은 없었다.

겨우 굶어 죽지 않았는데 다시 죽음의 길로 휴의는 뛰어들었다.

아직 젊고 혈기왕성한 그에게서 무엇이 그를 이길로 이끌었는지 그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한 반발심은 아니었다. 잘못을 뉘우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성직자 같은 본보기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독립운동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주군관 학교 출신의 조선인 토벌대장 밑에서 이인자 노릇을 했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 때의 실수 였으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될 것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침묵했다. 그럴 때마다 고문으로 살점이 뜯어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보호했던 청년을 그는 늘 기억했다.

고문한 사람이 바로 휴의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휴의의 부하들이 쏜 총알에 맞아 죽었다.

그에게서 그가 감화를 받았다면 조선인이라는 말 한마디였다. 다른 것은 없었다. 조선인이 왜놈을 위해 충성하는 것에 대한 직설적인 거부감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점례를 떠올렸다. 점례를 그리워했다. 청년이 죽으면서 남긴 수첩은 여전히 그의 가슴안쪽에 간직돼 있었다. 청년은 죽었어도 점례는 살아 있었다.

경성에 가면 만나리라. 일본으로 돈 벌러 간 그녀가 만주에서 화가가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점례를 확인하고 싶었다.

종로 화상을 수소문하면 그녀의 존재는 쉽게 파악 될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경성행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삼엄한 경계를 뚫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당분간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야 했다.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폭탄 투하에 일제는 조선 독립군 일망타진을 내걸었다.

대단한 현상금이 걸렸고 누구든 독립과 관련된 조선인을 잡아오면 포상하겠다는 포고문이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만주에서 근거지를 잃은 독립군은 상해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만주 토벌대의 일부도 상해로 접근했다.

임정은 몸을 사렸다. 꼭꼭 숨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더구나 독립자금은 바닥이 났다. 밀정을 파견할 기차표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화와이의 동포 들이 보내는 자금과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마른 하늘의 단비와 같았다. 그러나 날로 커지는 조직을 갖춘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적단 처럼 민가를 습격하거나 은행을 털 수도 없었다. 독립군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그것을 행할 독립자금이었다. 그 때 소식 하나가 휴의의 귀에 들어왔다.

조선의 거부가 거액의 자금을 헌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경성에 잠입하는 임무를 휴의가 맡았다. 거부를 만나 거금을 가지고 다시 상해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쉽지 않았다. 임정은 고심끝에 휴의를 선택했고 그와 동행할 인물로 할머니 한 분을 추천했다.

이 할머니는 일제에 자식을 잃은 원한을 품기 위해 자발적으로 임정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남은 생을 원수를 갚는데 쓰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음식이나 빨래며 부상병 치료까지 손이 안가는데가 없었다. 안경쓴 임정의 지도자는 경성으로 떠나기 하루전 둘을 한 자리에 불렀다.

‘동지들, 이 번 일은 우리 조선의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임무요.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바라오.’

그러면서 그는 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러 휴의에게 주었다. 그러기 전에 자신의 돋보기를 벗어 할머니에게 주었다. 할머니는 50대 후반으로 머리가 하얗게 샜으나 정정했다.

다만 노안이 와서 신문 같은 작은 글씨를 읽을 때는 안경이 필요했다. 지도자는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했다.

휴의는 할머니가 엄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둘은 모자지간으로 위장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할머니는 동휴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아들이 휴의와 같은 나이로 올해 24살이라고 했다.

‘그 놈이 살아있다면 당신과 같은 독립군이 됐을 거야.’

할머니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손을 눈으로 가져갔다.

살아 있다면 이라는 말에 휴의는 가슴이 뜨끔했다. 죽은 자식의 이야기를 꺼내는 어미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전해져 왔다.

그러자 고향 부모님이 생각났다. 그러나 기차가 신의주를 출발하자 신경은 온통 점례에게 쏠렸다. 그녀를 어떻게 만날 것이며 만난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임정 지도자에게도 이것은 비밀이었다. 임무를 완수하든 그렇지 못하든 어쨌든 그는 점례를 만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

기차는 평양에서 멈췄다. 잠시 하차한 일행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태평한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칼 찬 헌병들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더 빨리 움직일 것을 종용했다. 군인들이 사라지고 나서 한 무리의 경찰이 박자를 맞추면서 역 구내를 순찰했다.

휴의는 저 무리 속에 동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하면서 그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이제 동휴는 친구가 아닌 적이다. 만난다면 적으로 상대할 것이다. 그는 일제 조선인 경찰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일제는 그를 거물로 키우기 위해 경성은 물론 조선 팔도로 파견을 보냈고 최근에는 만주 관동군을 돕기 위해 그 지역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군경이 한 몸이 돼 만주국을 완성하고 독립군 잔당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다. 자연히 임정은 반드시 뽑아야 하는 손톱밑은 가시로 그를 여겼다.

휴의는 어렴풋이 동휴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가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이곳까지 마수의 손길을 뻗쳐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피할 수 없는 전투를 눈앞에 두고 휴의는 만감이 교차했다. 고향의 죽마고우로 자신을 군에 입대시킨 동휴에게 그는 총을 겨눴다.

동휴도 그에게 맞섰다. 토벌대장으로 부터 휴의의 존재를 확인한 그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잡아 변절자를 혹독하게 다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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