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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생활비는 화실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우면서 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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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비는 화실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우면서 벌 수 있을 것이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04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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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열려 있는 문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그리고는 주인장을 찾았다. 두리번거리지 않는 침착한 태도였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례는 한 번 더 주인장을 불렀다.

그러면서 눈은 조용히 좌우를 살폈다. 출입문의 정면으로 보이는 벽의 빈 공간에는 몇 점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 위에는 일장기가 눈에 띄었다.

그 아래 바닥에는 서내개의 그림이 포개져 세워져 있었는데 대부분 서양 유화였다. 한눈에 보아도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팔기 위한 완성품이었다.

표구된 것도 있고 아직 그러기를 기다리는 작품도 있었다. 조선에서 그림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점례는 한 발 더 들어설까, 아니면 돌아서 나갈까 망설였다.

그때 안에서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례는 유지 삼촌의 가계를 찾는다는 미리 준비한 말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대신 여기가 유지 삼촌의 화랑이 맞느냐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힐끗 보더니 안색을 바꾸고 표정을 부드럽게 지었다.

‘유지 삼촌을 찾는다고요. 내가 그 사람이오.’

제대로 찾아왔으니 이제 용건을 말하라는 듯이 그는 점례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점례는 어렵지 않게 삼촌을 찾은 것이 반가워 웃음 지으며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앞에 있는 남자와 눈을 맞췄다. 삼촌이라고 해서 머리가 조금 벗겨진 중년을 넘긴 초로의 사내로 생각했다. 그러나 40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체구는 작았으나 자기 관리를 하는지 약하지 않았다.

점례의 눈을 보면서 그는 유지가 말한 그 여자가 이 여자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했다. 그는 한 번 더 눈여겨보았으나 뚫어지게 해서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와 서양식 옷을 입은 점례를 보고 사내는 점례가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유지가 생각할 만큼 기품이 있는 조선 여자였다.

위에는 흰옷 아래는 검정 치마의 한복 차림이 아닌 양식 옷을 입을 세련된 조선 여자를 삼촌은 반갑게 맞았다.

‘화랑이 마음이 드오.’

화랑 주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대일본조선일등화랑이라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물었다.

점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정도 화랑이면 조선에서 제일 크겠다고 화답했다. 점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검정 구두를 내려다봤다.

‘나나미 아이 저녁은?’

그가 점례를 걱정했다.

‘제 이름을 아시네요.’

점례는 이름을 묻지 않고 말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배가 고프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배가 푹 꺼졌어요.’

그 말에 삼촌은 어서 나가자며 점례를 등 떠밀었다. 이렇게 올 줄 알았다면 준비를 했을 텐데, 지난 번 편지에서 유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거든. 그러니 오늘은 밖에서 먹자고 삼촌이 말했다.

‘나나미 아이.’

창씨개명한 이름에 삼촌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나나미 아이를 부르며 앞장섰다.

유지는 조선에 가면 일본식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나나미 아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러나 유지는 전선에서 나나미 아이라는 말 대신 점례라고 불렀다.

‘조선에서는 점례 대신 나나미 아이를 자주 쓰게 될 거야.’

유지는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했다. 새삼 그가 고마웠다. 점례는 앞서가는 삼촌을 불렀다. 문이 잠기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삼촌은 괜찮다며 안에 아내가 있다고 했다.

인사를 시키지 않은 것은 아파서 자고 있기 때문이고 지금쯤 일어나 있을 거라고 했다. 둘은 식사를 했다. 점례는 먹으면서도 묵을 곳에 대해 걱정했다.

유지는 삼촌이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했지만 당장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먼저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어떤 제의를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이 맞았다. 눈치를 챈 삼촌이 입을 열었다.

삼촌은 이 층에 방이 세 개나 있으니 당분간 거기에 머물라고 했다. 고향에 가느냐는 말은 묻지 않았다. 그게 다행이었다.

점례는 당분간 죽마을에 갈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도 뵙고 휴의나 용희의 안부도 확인하고 싶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떠나 올 때도 유지가 올 동안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점례는 다짐했고 유지도 그것이 좋다고 동의했다. 더구나 실제로 만나본 삼촌도 같이 지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점례는 삼촌 곁에 있으면서 화풍을 익히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것은 유지가 여러 번 부탁한 일이었다. 점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생활비는 그림을 팔거나 화실의 자질구레한 일을 돕고 가사를 하면서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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