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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10-02 15:58 (일)
잠꼬대 같은 말을 생각했으나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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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같은 말을 생각했으나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25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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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는 것은 섬을 탈출하는 것이다. 이곳을 떠난다. 지상의 지옥을 벗어나 낙원으로 간다.

용희는 일과를 설치고 있다. 어차피 낮에 온 한 무리의 부상병들 때문에 단잠을 자기는 글렀다.

임시로 수술하고 진통제로 버티던 그들은 밤에 고래고래 소리칠 것이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약발이 떨어져 저도 모르게 터지는 고통은 순전히 그들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정신이 들면 승리를 외치지만 의식이 가물거리면 비명을 질렀다.

어떤 것이 인간의 참모습인지 용희는 알지 못했다. 둘 다인지 둘 다 아닌지 밤새 용희는 이리저리 괴성을 쫓아다니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밤이 지나면 어두워서 보지 못한 밖의 풍경을 보리라. 용희는 그런 기대로 이미 해가 들어찬 막사 밖으로 나왔다.

습한 공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축축한 기분이 들었으나 눈으로 보는 것이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해는 벌써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떠난다는 사실 하나만을 단단히 붙잡고 그것이 오늘 저녁 일지 아니면 다음 날에 찾아올지 기다렸다.

해변 저 멀리 정박해 있던 군함이 그 배는 아닐까. 괴물처럼 음산하게 보였던 그것이 이제는 애타게 기다려지는 그 무엇이 되었다.

그 날 오후 말수의 예상대로 조선인 노무자들의 반란이 있었다. 말이 반란이지 단순한 소란에 불과했다. 일본인 당직자는 그 날의 일지에 서너 명이 고함을 치며 달아난 작은 소요 사태라고 적었다.

그런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직적이지 못했다. 겨우 일본인 경비병 한 명을 부상입히는데 그쳤다. 반면 그들은 현장에서 두 명이 총에 맞아 죽고 달아난 한 명은 체포됐다.

조선인을 포함한 광산의 인부들이 전부 한 곳에 모였다. 본보기가 필요했다. 군인들 가운데 한 명이 총 끝에 달린 대검을 꺼내 들었다. 그가 그것을 앞으로 세우자 날선 검의 끝 부분이 반짝였다.

그리고는 나무에 묶여있는 그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절뚝 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부상당한 바로 그 경비병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네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다며 악을 썼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껍질을 벗겨냈다. 노무자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는 자는 소총의 개머리 판이 날라왔다. 처참한 광경이었고 그 모습을 말수도 지켜보았다.

도망치다 잡혀 죽은 노무자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작업 중 부주의에 따른 부상에 의한 과다 출혈이었다. 형식적이었지만 당직자는 노무자 죽음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의사는 사인했다.

반란은 막사의 지휘관에 큰 충격을 줬다. 짐승만도 못한 그들도 사람이었고 그래서 반발했고 저항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보이는 것만 믿었던 그는 그 사실을 보고도 이번에는 믿기 어려웠다. 그는 싹을 잘라야 한다고 씩씩댔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더 세게 나가야 짐승의 본능을 꺾을 수 있다고 여겼다.

전쟁도 어려운데 노무자들까지 이러니 지휘관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 권총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하급자를 닦달했다.

‘잘 좀 해 응.’

그러나 말은 간단했다.

'다음에는 이러기 없기.'

이 짧은 말을 남기고 그는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분을 삭이기 위해 서랍장을 열어 술병을 꺼내 들었다.

잔도 없이 병째 들이킨 그는 곧 취기가 올랐고 취한 기분을 또 달래기 위해 부관을 불러들였다. 그는 나갔다가 곧 의사를 데려왔다.

그리고 몇 마디 의사에게 귓 속말을 하더니 돌아섰다. 의사는 정중하게 경례를 올려붙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지휘관이 나가는 의사를 돌려 세워 표정을 봤더라면 그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의사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병실에 온 그는 용희를 찾았다. 그리고 지휘관이 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귓속말을 했다. 차마 마주보고 할 수 없다는 투였다.

용희는 오늘 밤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하나는 내일 아침 일찍 군함을 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휘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싫은 기색을 할 수 없었다. 배를 타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지휘관의 청을 들어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사는 자신의 독점물이었던 것이 타인과 공유하게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씁씁했다. 그는 남자였고 그래서 지휘관이 미웠다.

뱀장어처럼 미끌거리는 지휘관의 얼굴에 총알을 박고 싶었다. 조국의 승리만 아니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안 그러면 말로라도 네 머리에 총알을 박고 싶다, 그렇게 해야 한다.

꽝 꽝, 그는 발로 바닥을 차면서 총알이 나갈 때 내는 소리를 입으로 내뱉었다.

‘피융 피융.’

도대체 지휘관은 남의 기분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는가. 장교용으로 배정된 여자들을 놔두고 용희를 꼭 지목한 것에 의사는 배신감을 느꼈다. 지금껏 누구한테도 당해보지 못한 경험에 의사는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용희의 감정을 살폈다.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어떻게 해야 옳은지 자신에게 묻는 것 같은 표정으로 용희는 숨을 길게 쉬었다.

의사는 그녀가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제의를 왜 거부하지 못 했느냐고 타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일종의 야속함 같은 것이었다. 성병을 핑계로 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는 당황한 나머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 병 있어요.’

용희는 울음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지휘관에게 전달하라는 뜻이었다. 의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사실은 지휘관의 명을 따르지 말라는 거부 명령 같은 것으로 인식했다.

의사는 옷을 고쳐 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요한 것을 놓고 왔는데 급히 찾으러 가는 표정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지휘관 숙소로 향했다.

그가 어떤 답을 가져올지 용희는 미리 짐작하지 않았다. 어떤 것이든 결정된 것을 이제는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의 재방문에 지휘관은 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는 얼굴로 나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걱정말라며 되레 의사를 다독였다.

만약 그러면 네가 고쳐주면 되지 않느냐고 지휘관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의사를 돌려보냈다.

용희는 지휘관이 있는 숙소로 가기 전에 말수가 준 권총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의사가 자리를 빈틈을 타 약병 몇 개를 챙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느냐고 독자들은 물을 필요가 없다.

탈출할 절호의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는 그런 일로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멈추라고 설득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힘이 생길 때가 있고 이성에 앞서 어떤 주체할 수 없는 자존심에 전신을 맡겨 버릴 때가 있는 법이다.

나를 거꾸러뜨리면 너도 거꾸러져야 한다. 용희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용희는 안 하던 분칠을 하고 의사가 언젠가 내민 화장품도 발랐다.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옷은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아침에 남편 생일 꽃을 사러 가는 부인의 차림새로 변신했다. 손거울 속의 그녀는 뽀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드러나는 속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심의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이전의 서투른 간호사를 독자들은 잊어야 한다. 그리고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녀는 무서운 이 위안에 대한 대가를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여러 약물을 혼합하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용희는 의사에게 새벽 5시 출발이면 지금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애써 웃음 지었다.

어색한 순간을 깨기 위해 그는 길어야 보름이면 올 텐데, 뭐 작별까지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용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손을 잡기 위해 의자를 돌리고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 행동에는 어딘지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용희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일본에 있는 부인에 대한 생각은 그 순간 들지 않았다.

그에게도 요즘 들어 부쩍 죽음의 공포가 수시로 찾아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듯이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로 용희를 바라봤다. 살인죄를 짓고 사형 구형을 외치는 재판관을 응시하는 피고인의 심정이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의사를 덮쳤다. 그도 나처럼 용희를 부르는구나. 그는 체념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계급이 높은 그를 의사가 상대할 수는 없었다. 용희가 의사를 상대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는 돌아 나오면서 앞으로 솟아 엄격해 보이는 지휘관의 이마를 떠올렸다.

의사는 침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떠오른 나쁜 생각에서 도망치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지휘관을 상대로 대들어 봤자 창피만 당할 뿐이다.

‘저 여자는 내 여자요.’

의사는 잠꼬대 같은 말을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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