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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산(1936)- 우리나라 자연인 1호 머슴 중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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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산(1936)- 우리나라 자연인 1호 머슴 중실이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10.19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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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도 좋은 계절이다. 등불 아래서 책을 읽어도 좋고 낙엽을 맞으며 우수에 빠져도 좋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미리 등산 장비를 챙기면서 산이 저기서 부르는데 아니 갈 수 있으랴, 소리치며 대문을 박차고 나설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그런 산을 제목으로 <산>이라는 아주 짧은 소설을 썼다. 분량은 너무너무 짧지만 거기 숨은 서사는 상중하 장편으로 써도 충분할 만큼 크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 주인공 중실이도 등산을 한다. 그의 산행은 살기 위함이 먼저이나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구속된 몸에서 자유를 얻은 그는 날 듯이 산을 오른다.

그에게 산은 주인이고 머슴이다. 실제로 중실이는 김영감네서 무려 칠 년을 머슴으로 일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사경은 커녕 옷 한 벌 제대로 얻어 입지 못하고 맨주먹으로 떠날 때 중실이는 다른 머슴처럼 서러웠다.

장가보내주고 집 사주고 살림 내준다는 말은 애초 믿지 않았다. 누명을 씌우다니 해도 너무했다.

육십 지난 노인이 젊은 첩을 데리고 사는 숙명 때문에 그는 팔팔한 중실이를 의심했다. 나뭇짐을 지고 오다 동구밖 빨래터에서 만난 첩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영감의 눈에 불이 났다. 늙은이의 질투는 오뉴월에도 서릿발을 내렸다.

종살이를 더 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날로 중실이는 빈 지게 하나 달랑 지고 산으로 왔다. 산으로 오니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바람결도 없는데 쉴 새 없이 파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처녀 볼처럼 하얗게 분장한 자작나무,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가 중실이를 반겨준다. 낙엽을 들추면 돌로 바수어 먹을 수 있는 깨끔이 지천이다.

그는 여기가 하늘 아래 자신이 살 곳임을 직감한다. 나무하러 왔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낮잠도 자고 했던 낯익은 곳에 이르자 그는 짐을 풀었다.( 풀 짐이 없으니 지게를 작대기에 받쳐 놓았다는 비유가 적절하겠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곳이지만 자유의 몸이 된 중실이는 그날부터 마치 하늘에서 뚝 딱 떨어진 철학자가 된 듯이 사색을 즐기고 나무처럼 살겠노라고 다짐한다.

▲ 머슴 중실이는 우리나라 자연인 1호다. 그처럼 산을 사랑하는 사람을 과문한 나는 본적이 없다. 중실이의 꿈이 부디 이뤄졌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 머슴 중실이는 우리나라 자연인 1호다. 그처럼 산을 사랑하는 사람을 과문한 나는 본적이 없다. 중실이의 꿈이 부디 이뤄졌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두 발은 뿌리, 두 팔은 가지, 살을 베면 피 대신 나뭇진이 흐를 것만 같다. 산과 나무와 자신의 몸이 틈 없이 한데로 얼렸다. 하루가 지나자 눈에는 푸른 하늘이 물들고 피부에는 산과 나무 냄새가 깊게 배었다.

머슴 중실이는 말한다.

‘나의 몸은 한 포기의 나무다.’

감히 머슴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중실이의 내공은 깊어가고 매일 자연 속에서 마치 자신이 천석고황에 걸린 양 하루라도 산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다.

‘산은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목청껏 외쳐 본다.

‘나와 제일 친한 곳은 산이다.’

그러나 깨금이나 열매나 풀뿌리로만 살 수는 없다. 그런 생각으로 어떤 호구지책을 세워야 할까 고심하던 어느 날 멀리서 산불이 났다.

할 일도 없겠다, 구경하면 불구경이니 중실이는 백일홍같이 새빨간 불길이 이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운 좋게 불에 그슬린 노루 한 마리를 주웠다.

주린 배가 먼저이겠으나 이제 중길이는 누가 시키면 일을 하는 단순한 머슴이 아니다. 먹기전에 불에 타 죽은 외로운 짐승을 불쌍히 여긴다.

그런 마음을 지고 고기를 뜯는다. 그런데 먹어보니 싱겁다. (중실이는 미식가였다.)

소금간이 맞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하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중실이. 나무를 팔아 소금과 좁쌀과 감자와 냄비 하나를 샀다. 산중 생활에 이만하면 다 된 것 아닌가. (요즘 유행하는 차박을 해도 문제 없겠다.)

어쨌든 중실이는 그런 것을 장만하러 장에 갔다가 병든 둥글레 첩과 바람난 것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최서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술집의 떠들썩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제 중실이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거리의 저런 살림에 마음이 당기지 않고 앙상한 사람들의 얼굴이 그립지 않다.

그러다가 문득 중실이는 늙은이를 생각한다. 노인 혼자 궁시렁대면서 밤을 뜬 눈으로 지새는 것이 안타깝다. 측은지심이 드는 것은 이미 철학자가 된 중실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김영감이 애매한 머슴을 내쫓았다고 뉘우칠리도 없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실이가 다시 그 집으로 머슴 살러 갈 생각은 없다.

늙은이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친절도 더는 가지지 않는다. (그래야지. 아무리 중실이라고 해도 그런 되먹지 않는 지주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맞다.)

다시 집으로(산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다. 넘치는 힘만 어디론가 보낼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자 불현듯 나뭇가지에 걸린 보름달처럼 용녀가 떠올랐다. 그는 누웠다. 나뭇잎 타는 냄새가 온몸을 구수하게 휩싸고 거기에 담배까지 피워 몸이 훈훈하다.

시린 옆구리를 달래기만 하면 된다. 땅 파고 나무하고 지게질이라면 자신 있다. 그러나 밥 짓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 아직은 2% 부족한 중실이, 밥하는 것이 뭐가 어때서?)

이웃집 용녀라면, 그녀가 옆에만 있다면 이 산속은 그들의 낙원이며 천국에 다름 아니다.

굵은 나무를 베어다 껍질 채 토막을 내 양지쪽에 쌓아 올리면 단간의 조촐한 오두막 완성이오. 펑퍼짐한 산허리를 일궈 밭을 만들고 봄부터 감자와 귀리를 간다.

우리도 세우고 거기다 염소와 돼지와 닭을 친다. 노루를 산 채로 잡으면 우리 속에 같이 기를 작정이다.

아이를 낳으면 산처럼 소처럼 튼튼하게 자랄 것이고 그러면 나와 용녀는 행복의 나라로 뚜벅뚜벅 걸어갈 테야, 콧노래가 절로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용녀가 제 발로 따라오지 않을 경우다. 그러나 걱정 없다. 중실이가 누구인가.

말을 듣지 않으면 업어 오면 된다. (한 번 산에 들어온 용녀가 별수 있겠나. 이것은 중실이의 생각이다.) 그날로 천생연분 부부가 돼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되도록 알콩달콩 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밤이 깊어간다.

장작불도 수그러들고 그만큼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한층 맑다. 일어났던 중실이가 다시 하늘을 보고 누웠다. 마침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다.

어떤 것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가까이 내려왔다. 그러나 지금이 초저녁인지 깊은 밤인지 새벽녘인지 알 길이 없다.

산속 생활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금장 회중시계라도 있다면 모를까, 몇 시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중실이는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고 대꾸할 것이다.

낙엽속에 들어간 중실이는 몸이 비단 이불을 덮은 것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몰려오는 것을 느낀다. 잠시 눈을 뜨자 별은 바로 눈앞에 와 있다.

그는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별 하나, 별 둘, 별 셋을 세면서 나 하나의 몸으로 꿈을 꾼다. 중실이는 자신이 별인지 별이 자신인지 알지 못하는, 자신과 별이 하나가 됨을 느낀다.

: 조선 전체를 통틀어 가장 똑똑하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머슴은 단연코 중실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이런 머슴 본 적이 있는가.

주인 양반이 머슴의 아내를 겁탈하면 그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거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 깔보면 그 낫으로 주인의 목을 벨 줄 아는 머슴은 간혹 있었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아직까지 산과 나무와 하늘과 별과 하나가 된 중실이 같은 머슴은 본 적이 없다.

혜안이라고나 할까. 이런 머슴을 만났을 때 나는 중실이의 앞날이 그야말로 꿈꾼 대로 이뤄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는 예상대로 용녀와 산속에서 생활한다. 업어 오지 않아도 용녀는 제 발로 중실이를 따라왔는데 그것은 그녀가 평생 자신이 의지해도 좋을 남편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8남 3녀가 태어났는데( 놀라지 마시라.) 아들 8형제는 모두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조선의 국운을 빛냈다. 딸 셋 역시 대단하게 자라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이것은 내가 상상해 지어낸 책 밖의 소설이다.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중실이 같이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은 실패가 아닌 성공의 길이다.

나무를 사랑하고 숲과 물과 바람과 별을 그리워하는 사람치고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지금은 뭘 해도 좋지만 등산하기에도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기 전에 등산화 끈을 조여야겠다. 깨금이 보이면 중실이처럼 돌로 깨서 먹고 온몸이 하얀 자작나무를 보면 기대서서 우리나라 자연인 1호, 중실이의 체온을 느긋하게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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