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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을 찼던 사람들이 마을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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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을 찼던 사람들이 마을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9.01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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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옷을 입을 사람이 나라의 주인이 됐다. 그 사람은 나라를 찾는 운동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했고 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제 나라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죽골마을에도 해방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본놈이 도망갔다고 어깨를 들썩였다. 노고지리처럼 마음이 붕 떠올랐다. 하늘 끝까지 닿아서 새처럼 마구 지져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해방이 됐어도 먹을 것은 늘 부족했고 입을 것은 귀했다.

무언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나 시골 사람들에게 닥쳐오는 것은 별것이 없었다.

용기를 냈던 사람들은 점차 시무룩해졌다. 숨어드는 것에 길들여져 있던 애초의 습관으로 돌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옆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행동하는지 곁눈질에만 익숙해져 갔다. 해방 전이나 해방 후나 별다른 것이 없었다. 열 흘이 지났다.

사람들은 금세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벼락처럼 무엇이 올 것 같은 기대감이 시들어 들었다.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반장도 여전히 동네를 다니면서 위세를 부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예전처럼 크지 않았고 명령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반장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사이 이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장을 찼던 사람들이 떠난다는 소문이 읍내에 퍼졌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 소문이 반장 귀에도 들어갔던 어느 날 그는 짐을 꾸리고 마을을 떠났다. 혹시 모를 어떤 봉변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정태는 달구지에 짐을 싣고 떠나는 반장의 뒷모습을 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발로 차고 싶었지만 웬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황토배기 언덕을 올라갈 때 뒤에서 수레를 밀어주면서 언제든지 세상이 조용해 지면 고향에 돌아오라고 되지 않은 말을 지껄였다.

그것이 정태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가 다시 올까 두려웠다. 두렵다기보다는 마을이 시끄럽고 나쁜 일이 생길 것이 걱정됐다.

어디 가든 잘살게나, 그는 반장의 손을 잡았다. 등에 낫을 꼽거나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아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그는 이런 말로 반장을 달랬다.

그가 고마운 표정이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 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하는 소리는 남아 있다.

반장이 떠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가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그를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웠다.

죽골마을은 새로운 반장을 뽑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죗값을 치르지 않은 것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도둑질하고 사람을 팼는데도 그는 멀쩡하게 떠났다.

떠난 것이 죗값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다시 농사를 준비해야 한다. 정태는 몸을 부지런히 놀렸다. 지금 잘하고 있으나 더 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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