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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집에 정태가 도착했을 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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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정태가 도착했을 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8.23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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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는 면 지서를 찾았다.

분하고 억울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일본인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해도 이유 없이 닭 잡아먹고 사람을 패기까지 한 것은 벌을 받아야 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모른 체하고 눈 딱 감으면 그만이다. 마을 소문이야 시간이 지나면 지나간다. 그러나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그런 일은 또 일어난다.

반장은 기고만장할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아무도 그에게 대들지 못한다. 그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정태는 이런 생각을 했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자신이라고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냈다. 그러나 그는 지서 앞에서 발발 떠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가고 다시 돌리기를 몇 차례 했다. 제 발로 순사를 찾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집으로 가던 발길을 바꾸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등에 긴 칼이 위에서 아래로 쫙 그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결심했다. 이왕지사 아직 엎어지지는 않았으나 엎어진 물이라고 판단했다.

서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정태는 찔끔 오줌을 지렸다.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는 순사에게 말을 걸었다.

난생처음 순사에게 하는 말이라 말은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중간중간 끊기거나 떨렸다. 듣기를 마친 순사는 다른 순사와 함께 큰 칼을 차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 뒤를 따라 20리를 정태는 달렸다. 숨이 턱에 찼다. 그러나 지치지는 않았다. 눈에 익은 마을들이 스쳐 지나갔고 작은 언덕 하나만 넘으면 죽골 마을이다.

이때만 해도 정태는 내가 잘못했으면 벌 받고 네가 잘못했으면 네가 벌 받는다고 눈을 부라렸던 반장의 말을 믿었다.

말이 언덕을 넘어섰다. 순사는 말을 멈추고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박차를 가했다. 말이 한 번 히잉 울더니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동네는 벌써 순사가 반장 잡으러 온다는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사립문에서 그 모습을 보던 반장은 부인에게 술상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고는 마을 앞길을 걸어 순사를 마중 나갔다.

그는 말을 가로막고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그 자리에서 이러쿵 저러쿵을 말을 했다. 그는 순사에게 처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서 중간에 끊기거나 떨리지 않았다.

반장은 순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하얀 쌀밥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순사는 차려진 밥을 먹었다.

반장 마누라는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숨겨 놓은 밀주가 진한 냄새를 풍겼다. 마누라는 순사 옆에서 곱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잔에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을 순사가 눈여겨보더니 따른 술을 벌꺽벌꺽 단숨에 비웠다.

먹기를 마친 순사가 밖에서 어쩡 거리고 있던 정태를 손짓해서 불렀다. 각반을 찬 순사는 손을 앞으로 모으라고 정태에게 말했다. 정태는 그렇게 했다.

그 손에 순사는 줄을 감았다. 오랏줄에 두 손이 묶인 상태로 정태는 지서로 끌려 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갈 때 정태는 울었다. 나중에는 엉엉 소리가 났다. 순사가 뒤돌아보자 그는 울음을 그쳤다. 

먼저 멱살을 잡고 시비를 건 것은 반장이 아닌 정태였다. 주먹을 휘두른 것은 정태였고 코피를 흘린 것은 반장이었다.

무생사람을 잡은 것은 정태였다. 폭행에 무고가 더해졌다. 석 달을 옥에서 살다 온 정태는 상심에 빠졌다.

다행히 농한기라서 큰 피해를 보지 않았으나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다. 정태가 집에 도착했을 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반장은 정태가 돌아온 날 붉은 줄이 쳐진 죄인 놈과 상종 말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일렀다. 정태는 이제는 늙었으나 아직 정정한 반장을 볼 때마다 속이 느글거렸다.

그와 만나기를 의식적으로 정태는 피했다. 무리 속에 그가 있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어쩌다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을 닫은 대신 손발을 부지런히 놀렸다. 죄를 지었으나 죄짓지 않았으니 수그러 들 필요가 없다고 다잡았다. 그보다 마을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어 속으로는 반장을 미워했다.

그러나 속마음일 뿐 겉은 반장에게 쏠려 있었고 반장이 무슨 말을 하면 모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순사는 그대로 순사였고 옆구리 칼도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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