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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논 이야기(1946)- 논 문서를 가져와 사또에게 바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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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논 이야기(1946)- 논 문서를 가져와 사또에게 바쳐라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06.05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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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원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나라는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각인돼 있을까.

거창하게 조국이니 나라를 서두에 꺼낸 것은 그가 한때 주권 없는 식민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 된 그에게 조국과 나라는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일단 식민지 시절부터 이야기해보자.

농사 짓는 그는 다른 농민들과 비슷하게 늘 궁핍을 달고 살았다. 툭하면 벼 공출에 솔뿌리 공출에 마초 공출에 채소 공출에 시달렸다.

그런가 하면 구장과 면의 노무계 직원과 부락 담당 직원에게 연실 굽은 허리를 굽신거리고 쌀을 보내고 음식 대접을 하기에 바빴다.

아무리 농사일이 몰려도 그들의 논에 모심고 김매어 주고 하인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찍이 애비를 여긴 열여덟 살배기 손주 용길이 놈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런 식의 수탈정책은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만들었다.

다들 일본이 조선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한 생원 사례를 들지 않고도 아는 일이다.

그러면 이제 일제가 침략하기 전 구한말 시대로 돌아가 보자.

한 생원의 아버지는 부지런했다. 남의 일 해주고 품삯 받아 푼푼이 모으고 악의악식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열 서너 마지기와 일곱 마지기의 두 자리 논을 샀다.

말하자면 그 논은 한 생원네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오 년 후 한 생원네는 목숨과도 같은 그 논을 고을 군수에게 빼앗겼다.

▲ 농군에게 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 논을 고을 원님에게 강제로 뺏길 때 한생원 아버지 한태수는 국가란, 나라란 어떤 것인지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농군에게 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 논을 고을 원님에게 강제로 뺏길 때 한생원 아버지 한태수는 국가란, 나라란 어떤 것인지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군수는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였으니 조선 정부가 가난한 농민의 논을 강제로 수탈한 것과 다름없었다. 갑오,병신 하는 병신년이었고 한 생원의 나이 스물한 살 적이었다.

동학란으로 쫒겨 갔던 군수 대신 새로 부임한 김 아무개는 동학 잔당을 비질하듯이 쓸어 죽였고 피비린내는 그해 봄까지 계속됐다.

이제 안도해도 되겠다 싶은 여름 어느 날 한 생원의 아버지 한태수는 이유도 없이 원두막에서 동헌으로 잡혀갔다. 동학에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동학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한태수를 옥아 가두고 매일 끌어내어 실토하라고 주리를 틀며 문초했다.

육십이 넘은 정강이가 살이 으깨어지고 뼈가 아스러졌다.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는 이름 아무나 대었다. 하루는 이방이 와서 자백했으니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더니 태수의 아내와 아들을 불렀다. 이방은 모자를 앞에 놓고 살아낼 궁리를 하라면서 한 가지 묘책을 알려주었다.

불속으로라도 뛰어가겠다는 심정인데 묘책이라니 귀다 번쩍 띄었다. 그러나 다음 말은 두 모자를 얼어 붙게 만들었다.

'논문서를 가져와 사또께 바쳐라. 왜 아까우냐.'

'애비의 목숨보다 논문서가 더 귀중하냐.'

그들은 목숨처럼 아끼는 논문서를 진짜 목숨과 맞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이런 조선과 일제 강점기를 비교해 보면 한 생원은 나라라는 것이 왜놈이 지배하던 세상에 비해 나을 게 하나도 없다. 이 판국에 해방이 됐다고 한 생원이 좋아서 만세 부르면서 내 나라 내 조국 외치겠는가.

: 경술년에 나라가 망했다.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합병했다고 원통히 여겼다.

그러나 한 생원은 달랐다.

“그깟 놈의 나라 시언히 잘 망했지.”

그에게 나라는 백성에게 고통이지 하나도 고마운 것이 없었다.

또 꼭 요긴하거나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 나라를 되찾았다고 해서 감격해서 만세 부를 처지도 아니다. 그래봤자 여전히 남의 세토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더 되겠는가.

천상 가난한 소작농 신세를 벗어날 길 없다. 해방됐다고 느닷없이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원, 아전, 토반이나 일본놈 대신에 권세 있는 양반들이 농투성이들을 핍박하면서 개도야지 취급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생원에게 정령 반전은 없는가.

해방 전 일본인 길천이 시세의 두 배로 논을 사주자 그것을 팔아 빚 갚고 헐하게 다시 논을 사 이득을 보려는 계획은 제대로 실현됐을까. 왜놈이 물러갔으니 길천에게 판 논을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까.

어쨌든 일본인들은 도망가면서 논에다 말뚝을 박고 어영차 어영차 하면서 땅을 떠가지고 가지는 못했다.

그 땅은 지금 누구 땅이 됐을까. 한 생원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옥토로 남아 있을까. 하릴 없이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은 그의 인생이 아니 당시 백성들의 인생이 박복했기 때문이다.

여린 백성을 핍박하던 조선이나 일본이 없었다면 시대의 탁월한 작가 채만식의 <논 이야기> 같은 작품은 나올 수 없었다. 우리는 나라와 국가에 그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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