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성품에서 구김살이 없었던 꼬마 대장은 아빠가 없어도 주눅 들지 않았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더 단련했고 부끄러운 행동을 피하는 요령도 터득했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했고 그 아들에 그 엄마답게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면서 살아가기 위해 그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살았다.
모자는 그런대로 삶을 헤쳐나갔다. 그러나 어느 날 경찰 조사를 받고 나서부터 엄마의 삶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청 활동을 하던 형이 연좌제의 덫에 걸려들었다.
평양의 지주였던 아버지가 알고 보니 빨갱이였다고 누군가가 한 말을 꼬투리 삼아 엮은 것이다. 누구보다 앞서서 빨갱이 퇴치 활동에 나섰으나 단장을 노린 그 다음가는 자가 그를 적과 내통하는 자라고 밀고했고 파놓은 함정에 형이 걸려들었다.
형은 자신이 했던 같은 방법으로 어느 날 길거리서 각목 테러를 당했고 그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적이 아닌 동료의 손에 죽은 형을 대신해 엄마는 무고한 아들을 대변했다.
그러나 이미 경찰에게 손을 써 놓은 이제는 단장이 된 부단장은 엄마마저 형의 뒤를 따르게 했다. 아직까지 젊고 단정했던 엄마는 낯선 자를 따라나선 후 삼일 만에 그만 넋 나간 사람이 됐다.
검은 차에서 물건 던져지듯 내린 엄마는 집을 앞에 두고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뒤로 가다가 앞으로 가다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아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나갔다.
엄마.
그러나 엄마는 자신을 부르는 엄마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더이상 숨을 쉬지 않고 죽었다. 가는 길에는 노잣돈도 없어 살아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던 엄마는 저승에서 사자에게 돈을 꾸어야 했다.
그 순간 엄마는 부끄러워 꼬마 대장이 그것을 보고 있는지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대장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죽은 자는 갔어도 삶은 남의 자의 몫이었다. 대장은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을 따랐다.
개학이 시작되자 담임은 고아인 그를 동정했고 선생들은 얼마를 추렴해 졸업 때까지 1년간 학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을 베풀었다. 아이들도 그에 따랐고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웠으나 그것 때문이라도 엇나가지 않기로 대장은 작정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로 찾아온 보안 경찰의 면담 후 담임과 선생들의 태도는 확 변했다. 모두가 자기 눈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저 녀석의 아버지와 형이 빨갱이 짓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그 무렵 돌았다. 은밀한 내조자 역할을 한 것은 엄마였다고 아이들은 수군댔다. 온 집안이 빨갱이 소굴이라는 것.
대장은 그날 이후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의지할 곳 없는 고아가 서울 하늘아래서 살기는 어려웠다. 지금도 그런데 그 당시는 더 심했을 거라고 독자들은 판단할 것이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고 옳았다.
그와 비슷한 애들과 어울리면서 대장은 또래끼리 만나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을 배웠다. 아이이면서 어른 흉내를 내던 그들은 곧 큰 사고를 쳤고 주동자로 대장이 잡혀갔다. 이편에서 한 명, 저편에서 두 명이 죽었다.
그는 소년원에서 4년을 살고 정식 감옥으로 이감됐다.
나이는 어려도 사형수였으므로 대장은 잡범들과는 달리 취급받았다. 먼저 와 있던 그들도 어린놈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을 더 살았을 때 누군가 면회를 신청했다. 종교 관계자 말고 그를 찾아올 사람은 일 년에 하나도 없었으므로 사형수는 잘못 온 것으로 알고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를 맞은 자는 엄마를 면담했던 보안과 형사였다. 나이들어 늙었어도 제대로 그를 찾아온 것이다.
대장은 그날 특수 임무에 대한 설명을 보안과 특별수사과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로부터 들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동의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그는 대북 침투 요원으로 선발됐고 그날로 감방을 나와 인천의 모래섬에 상륙했다. 그 섬은 뱀이 꼬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세로로 길지 않고 가로로 뭉툭했다.
대장이 눈을 떴다. 저쪽으로 넘어갔던 의식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대장은 어린 시절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즐거울 때는 웃으려고 했고 분노가 치밀 때는 주먹을 쥐는 시늉을 했다. 삼일 밤낮을 그렇게 보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중령 복장의 군인이 그를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임마, 일어나.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말을 따르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러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흐릿한 시선 사이로 군복이 보이고 계급이 보이고 턱 밑으로 아침에 깎은 수염이 자라기 위해 푸른 빛을 띠기 시작한 쟁반만한 어떤 사내의 얼굴이 그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쨔샤, 그만 자고 일어나.
한 번 더 그 말이 들렸고 두 번째 말은 첫 번째에 비해 확실히 또렷했다.
어라, 이 노마 눈 떳 부렀네.
중령이 놀라운 듯, 반가운 듯 한마디 더 했다. 그날 저녁 대장은 완전히, 라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80% 정신이 돌아왔다.
제정신을 차리자 대장은 자신의 동료를 살해하고 월북했고 수령의 궁전을 폭파하다 실패한 사실을 떠올렸다.
교전 중에 사지를 들려 이동하는 것까지 기억해 내자 대장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신기한 듯이 여기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낯 설은 인제, 원통 같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했다. 소년원인가, 감방인가, 인천 섬의 막사인가 대장은 또 한 번 정신이 혼미해 뜨려던 눈을 다시 감았다.
아버지인지 아닌지 분간 못할 어떤 아저씨와 엄마가 확실한 밥 퍼주는 아줌마와 몽둥이를 들고 종로 거리를 달리는 형의 모습이 이어졌다가 끊어졌다 반복했다.
흠뻑 땀에 젖어 일어났을 때 주변은 아무도 없었다. 손목에 꽂힌 링게르 선이 어깨까지 이어져 있었고 머리에는 무언가 묵직한 것이 눌려 있었다.
대장은 정신이 돌아온 사람답게 여보시오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감겼으나 그래도 한 번 더 소리 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발을 움직여 제법 세게 문에 부딛쳤다.
문이 열리고 중령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 너는 내 사람이다.
주인 할아버지는 자기 사람으로 삼은 대장을 정식 군인으로 만들었다. 상부 어딘가와 여러 차례 만나더니 넌 특별케이스다, 한 마디했다.
그것으로 번호로만 불리던 그는 338번에서 원래 이름과 정식 군인 계급을 갖게 됐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을 중령은 어렵지 않게 해냈다.
병실에서 나오면서 소위 계급장을 단 대장은 그의 부대에 배속된 뒤 한 달 만에 대위가 됐다. 중령은 대장이 삼일 밤낮의 고문을 견뎌낸 것을 높이 샀다.
그가 북쪽이라고 넘어갔던 곳은 사실 남쪽의 어느 지역이었다. 요원들이 포로로 잡혔을 때 부는지 안 부는지 시험하기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가짜 북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사실이었다. 총도 진짜 총이었고 따라서 맞은 자는 진짜로 죽었다. 대장은 온갖 고문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임무를 띠고 어디서 왔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직접 고문에 가담했던 중령은 이놈이라면 자신의 부하로 삼을만하다고 판단했다. 참모가 입이 무거워야 한다.
지금 있는 참모는 머리는 좋았으나 불어난 강물에 떠다니는 스티로폼처럼 입이 둥둥 떠다녔다. 큰일을 맡길만한 놈이 아니었고 중령은 언제나 자신을 위해 죽을 만한 자를 찾고 있었다.
데리고 있는 동안만 참모는 필요 없다. 중령은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고 사타구니에 전선을 감고 손톱 밑에 바늘을 박으면서도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이 자라면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직속 선배를 찾았다. 선배는 그를 반겼다. 서울 방위를 맞고 있는 사령관은 전방에 있는 그를 후방에서 약을 먹는 진짜 아들보다 더 신임했다.
그래서 그가 오자 내 아들, 하고 소리쳤다.
사령관은 그날 오후 구중궁궐로 들어가 반신반인을 만났고 반신반인은 사령관이 보는 앞에서 국방장관에게 특명을 내렸다.
아들이 하라면 해야지.
반신반인은 사령관이 중령을 아들로 여기는 것처럼 그를 아들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체면 때문인지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아들이라는 말 대신 임자나 자네라고 불렀다.
그러니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대장에게 반신반인은 할아버지인 셈이다.
중령은 다음날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와 대령을 다투던 인근 연대의 중령은 진급 기간도 아닌데 대령이 됐다는 말을 듣고 연줄이 깡패라고 한숨 지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수습했다. 그는 연이 날아가지 않도록 연줄을 단단히 잡기 위해 대령을 찾아가서 대령님의 진급을 축하한다고 넙죽 엎드렸다.
조금 전까지 동기였던 자존심은 연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대령은 이러지 마, 왜 그래, 우리끼리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으나 엎드린 그를 일어나라고 말하지 않고 한동안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지켜봤다.
내가 별 달면 넌 대령이다.
대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년에 별 다셔야죠.
중령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나 출신성분이 이들과는 달랐던 대장은 진급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소장에서 졸지에 대위로 강등됐으나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제대로 자신이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굴러 왔으나 떠돌지 않고 단단히 박히리라.
대장은 박힌 돌을 발로 툭툭찼다. 그러면서 조국에서 일하도록 자신을 알아 봐준 특별 보안 수사관 대령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틈만 나면 다짐했다.
자신은 벌써 여러 번 죽은 사람이었으므로 지금 삶은 죽기 위한 것이라 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조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는 몸을 떨었고 벅차오르는 가슴 때문에 숨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그는 엎드려 기도했다.
아버지, 아버지를 위해 죽겠습니다.
대위는 대령의 수족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까지도 읽었다. 그와 대령은 이제 한 몸이 됐다. 심기를 살피는데 타고난 재주를 묵히지 않고 써먹었다.
내 사람에 대한 확신이 선 대령은 술에 취한 어느 날, 북쪽으로 떠나고 남은 모래사막의 요원들에 대해 궁금하면 말해주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