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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녀석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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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녀석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3.10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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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을 손으로 잡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좀 그렇다. 물론 그 때도 그런 기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에 두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그렇게 바보스러운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의 근거는 나 말고도 다른 애들도 곧장 그런 짓을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흉을 보거나 놀림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하더라도 결과에 따른 어떤 보상이 따르지 않았다면 굳이 똥을 만지거나 들 이유는 없었다. 냄새가 나지 않고 손에 묻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보상이라는 것은 보잘것없었다. 밥이 나오거나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똥이 금일리 없지 않은가. 들었던 똥을 한 번 뒤집어 보고 그대로 내려놓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내려놓기보다는 집어 던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던질 때 손에 힘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될 경우 똥이 손에 잡혀 정말로 똥을 손에 쥐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똥을 던지지 않는 경우는 휙 뒤집었을 때 똥보다 더  검은색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경우였다. 검은색은 움직였고 비틀 댔으며 발버둥 쳤다.

상대가 괴로울 때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퍼져 나갔다. 이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소가 가면서 똥을 누는 것과 마찬가지로 꿈틀거리는 검은 것을 보면 입이 일자로 벌어졌다.

말하자면 보상은 스쳐 지나가는 웃음이었고 순간의 만족이었다.

그 순간 군것질을 못해 허기지거나 숙제 때문에 걱정할 근심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러 개의 검은 발가락들이 꼼지락 거리면 똥을 들었던 손 말고 다른 손으로 그것을 잡아끌었다. 검은 것은 똥과 분리돼 내 손안에서 간지럼을 탔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지금 나는 손바닥에서 느끼고 있다. 추억은 이런 것이다. 사라졌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서 감각의 일부로 살아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여러 마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많다고 해서 그것을 어디에 용이하게 쓰는 것은 아니었다.

모아서 팔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많을수록 기분이 좋았던 것은 허탕 칠 때를 대비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쇠똥구리는 그 당시 아주 흔했다. 너무 흔해서 그것은 지나가는 개미와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개미는 너무 작았고 모양도 나지 않았으며 경단을 만들지도 못했다.

경단은 가지고 놀기에 좋았다. 소의 똥이나 흙이나 짚이 섞여 있었는데 조심하면 잘 부서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단은 그 모양새가 아주 죽여줬다.

원형이 거의 완벽했던 것이다. 자기 몸무게 보다 족히 5~6배는 더 나갈 경단을 뒷발로 밀고 다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지구를 굴리는 소년의 굴렁쇠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어느 순간 주걱처럼 생긴 넓적한 발을 가진 녀석이 자취를 감추었다. 사라진 것조차 알지 못했던 것은 녀석에 무심했던 탓이다.

그 세월이 아마도 십 수 년에 걸쳐 일어났겠지만 어느 순간 녀석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많던 쇠똥구리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개미는 그대로 인데 왜 녀석만 보이지 않는지 궁금해 할 겨를도 없이 녀석은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졌다.

현상금이 붙은 것은 나중의 일이다. 무슨 죄를 지어서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귀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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