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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만다라(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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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만다라(1981)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1.1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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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는 이름난 절이 있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불자 아닌 일반인들도 여행이나 답사로 많이 찾는 곳이다. 오래전에 나도 두 절을 가본 적이 있다.

송광사가 크고 압도적이라면 선암사는 오밀조밀( 그러나 결코 작지 않다.) 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암사에 도착한 때가 봄이어서 경내는 온통 꽃밭 천지였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이곳저곳을 쏘아 다닌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를 보면서 촬영지가 그곳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니 맞았다. 아치형 다리가 예쁜 승선교를 스님 하나가 걸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찍었을 때 이 영화는 영상미가 볼 만 하다는 선입견을 심어 주었다.

과연 그런 감정은 일치했다. 겨울 염전의 쓸쓸함과 바위로 둘러싸인 눈 덮인 산맥이 번뇌에 빠진 ‘잡승’의 심사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영화는 스님에 관한 이야기다. 조용한 절간에서 도 닦는 승려가 아니라 이곳저곳 떠도는 ‘만행’ 스님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 자연 한국의 산하가 화면 가득히 들어오고 길 위에서 벌이는 스님들의 잡설이 귀를 간질일 수밖에 없다.

지산(전무송)스님은 절밥을 어지간히 먹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해탈은 아니어도 고승 대우는 받아야 하는데 여전히 ‘땡초’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수행이 덜 돼서라기보다는 되레 깊어질수록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깊어갔기 때문이다. 법운( 안성기)은 그런 지산과 길동무로 산천을 유랑한다.

겨울 벌판의 롱테이크 장면이 인상 깊다. 바람불고 눈이 날리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이 영화가 결코 아름답게만 꾸며지지 않을 거라는 느낌을 안긴다.

▲ 지산(전무송)이 길위에서 법운(안성기)과 법문을 주고 받고 있다. 동안거 기간 동안 산천을 떠도는 두 스님의 만행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던진다. 뛰어난 영상미는 덤이다.

불심검문( 우리에게 이런 무시무시한 시절이 있었다. 아무 차나 세우고 신분증을 요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끄집어내리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집어처넣었던 끔찍했던 그 시절.)에 ‘땡중’ 지산이 딱 걸려들었다. 주민증은 물론 오래전에 승려증도 없다. 끌려 내려온 그는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다 정말 중이면 염불을 외어 보라는 명령에 받는다.

굵은 목소리가 경내가 아닌 임시 검문소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옆에서 법운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인연은 참으로 모질어 지산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동안거 기간에도 이들은 죽비를 맞으며 벌이는 좌선 수행 대신 전국을 떠돈다. 사는 것은 무언인가 하는 원초적 화두를 던져 놓고 해답을 찾아 헤맨다.

나 같은 땡초 때문에 중값이 떨어졌다는 지산과 법운은 길에서 헤어진다. “부처가 법당에만 있느냐, 나는 ‘쇠주’나 한잔해야겠다”는 범상치 않은 말을 남기고 떠나는 지산의 장삼 자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봄이다. 절 마당에 꽃잔치가 벌어지려고 한다. 그때 어디선가 술 가져오라는 벼락같은 소리가 들린다. 지산이다. 절의 주지와 동문수학했다는 이유만으로 지산은 큰소리친다.

법운이 그와 다시 만난다. 이게 무슨 꼴이냐고 걱정하는 법운. 지산은 그런 법운에게 중이 누구 보란다고 도를 닦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러면 법운도 지지않고 유치하게 옛 고승의 파격을 흉내 낸다고 깔본다.

바랑 하나 짊어지고 구름 따라 물 따라 역마처럼 떠돌다 온 법운이 보기에 지산은 제 얼굴에 맞는 이름을 아직 갖지 못했다. 술에 악이 바친 아귀의 얼굴일 뿐 그 어디에도 관세음보살의 기운은 없다.

주지 스님도 난감하다. 신도들 눈치를 봐야 한다. 그러나 지산은 물러날 기색이 없다. 건강 걱정을 하면 고기와 보약을 달라고 응수한다. 조용히 술이나 먹으라고 술병을 놓고 가는 주지의 뒷덜미에 대고 지금이라도 성불할 생각이 있다면 날 따라나서라, 주지는 심부름꾼이지 벼슬이 아니라고 호통을 친다.

입으로만 도를 닦는 지산에게 법운이 예불 모시러 안 가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지금 그대가 가고 있는 법당에 부처님이 계실까, 그대가 찾는 부처는 법당에 있고 내 부처는 이 술잔에 있다고 선문답이다. 저쪽에서 장엄한 염불 소리가 귓전을 때리지만 지산에게 그 소리를 개소리나 매한가지다.

중이 술 마시는 이유를 알고 싶냐고 묻고는 그대는 생각보다 통속적이군 한마디 날린다. ( 통속적이라는 말 오랜만에 들어 본다. 일찍이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에서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이라고 말한바 있다. 갑자기 이 시가 생각난 것은 지산이 대작하는 사람도 없이 홀로 마시는 술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이 사바세계에서 이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다만 존재할 뿐이다. 던져진 존재. 법운이 끼어든다.

“상당히 오만하시군요.”

그러나 이미 법운은 지산에 빠져 들고 있다. 자신도 6년 동안 몸부림쳤다는 사실을 말한다.( 싯타르타도 6년 고행 끝에 부처가 됐다. 그래서 숫자 6은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속세를 떠나 출가 당시를 회상한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는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헛된 욕심을 버리겠다는 각오다. 이윽고 지켜야 할 계율이 천둥처럼 울린다.

불살생이니 살생하지 말라. 불투도이니 도둑질하지 말라, 불사음이니 간음하지 말라, 불망어이니 음주를 하지 말라 등이다. 계율을 착실히 지켰다면 입구는 좁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은 병에 서 자란 큰 새를 꺼낼 수 있다. 과연 지산과 법운 이런 화두를 깨쳤을까.

어느 날 지산이 나무 부처를 깎고 있다. 멋있고 잘생긴 부처가 아니라 못생기고 엉터리다. 묻지 않아도 의아해 하는 법운에게 지산은 부처를 무시한 듯한 발언을 쏟아 낸다.

부처가 왜 요지부동 앉아만 있느냐는 것. 지금 순간도 숱한 중생들이 배고파서, 병들어서 옥에 갇혀서 돈 가진 자들에게 억눌려서 신음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빙그레 웃고만 있느냐고 묻는다. 병 속의 새를 꺼내는 방법을 알아내기는 꺼녕 깨버렸다고 말한다.

지산은 절을 떠난다. 산신각을 새로 지어준다는 국회의원 출마자를 위해 십 일간 당선기원제를 지내는 것이 못마땅하다. 비위가 거슬린다. 그놈의 공양주에게 행패를 부린 경험도 있다. 죽음을 술병처럼 옆구리에 차고 지산이 떠날 때 법운도 부처 대신 공양주나 모시는 이런 절이 싫다고 보따리를 싼다.

길에서 지선은 여름 참선 중에 여자와 이층을 쌓은 경험을 털어놓고 강간범으로 몰린 일화까지 들려준다. 그리고 육체를 정신의 하위개념으로 두었던 자신의 어리석음, 인식의 오류에 대해 한탄한다. 경계를 허물어트리고 계율을 어긴 자신의 우매한 과거.

그로부터 삼 년 후 서울역 인근의 으슥한 골목길에서 창녀가 됐던 과거의 여자를 다시 만난다. 비구승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지산은 또 그렇게 이층집을 쌓고 파계와 윤회와 번뇌와 본능으로부터 도피생활을 이어간다.

해인사로 가서 죽도록 공부해 보자는 법운의 제의도 거절한 채 지산은 떠돌이 잡승의 길을 계속 간다. 그러면서 부처는 행복의 조건으로 무소유라고 했는데 자신은 한 벌의 누더기밖에 없는데도 왜 이다지도 괴로운 것인가,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다.

미친개처럼 방황하는 길,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셈 치고 제대로 한 번 살아 보고 싶은 욕망. 견성하고 돌아와 이 잡승에게 계도해 달라고 법운에게 부탁한다. 숙명, 체념, 죽음 허망, 번민, 무의미. 애욕. 사창가의 불빛. 돌아서 온 곳이 겨우 제자리다.

사방이 절이고 사방에 부처가 있다는 지산은 득도하고 성불했을까. 어느 추운 겨울, 지산은 얼어 죽는다. 공처럼 몸을 말고 눈 속에 파묻혀 죽었다. 그런 지산에게 법운은 염주와 목탁을 안겨 주고 집채 화장한다. 해탈인가.

국가: 대한민국

감독: 임권택

출연: 안무송, 안성기

평점:

: 목탁 소리, 염불 외는 소리가 아주 장엄하다. 깊은 산 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 단조로운 가사는 사람의 심장을 파고드는 깊은 울림이 있다.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을 외면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속세의 아픔을 잊는다. 이때는 누가 부처이고 누가 비구이며 보살인지 알기 어렵다. 누구나 부처이며 누구나 비구이고 보살이기 때문이다.

병 속의 새는 어찌 됐을까. 내 마음속에 새가 있다고. 다 헛수작이다. 고승의 선문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부질없는 짓이다. 손가락 세 개를 촛불에 태우고도 깨닫지 못해 하나 더 태우는 스님에게 병속의 새가 살았든 죽었든 그것이 무슨 대수랴.

석가세존도 6년 고행 후 신체 학대는 헛되다고 만류했는데 남은 손가락을 태우는 나의 심보는. 수행의 길은 깊고 멀다. 누구나 목적에 도달하고 싶으나 아무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천 리 길을 걸어도 여전히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나와 있지 않다.

인생은 그런 것이고 부처는 그런 인생을 보듬어 주는 대신 무관심하다. 망상의 물줄기를 몸 밖으로 밀어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실의 육성에 귀 기울이고 번뇌에서 참된 자기를 끄집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수도 생활이 아니라 현실도피이며 참을 알기 위한 고행이 아니라 위선의 탈을 쓴 인생 패배자가 아닌가. 중생의 구제는 어렵다.

득도의 도량은 누구나 품을 만큼 품이 넓지 않다. 어려운 한자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지껄인다. 내 속에서가 아니라 타인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허무의 첩첩산중. 산세 역시 그렇다. 첩첩산중에서 지산과 법운이 점안식을 거행하면서 중얼거리는 법문과 목탁과 눈 내림은 연말로 가는 들뜬 기분을 차분하게 한다. ( 법운이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 쿨하게 헤어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한편 이 영화 첫 촬영 날은 전두환 정권이 취임한 첫날이었다고 한다. 임권택 감독은 화가 나고 분노를 표현할 방법이 없어 영화를 수묵화처럼 찍자고 정일성 촬영감독과 합의했다고 한다.

2008년 CNN은 역대 최고의 아시아 영화 18편 가운데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함께 <만다라>를 넣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오늘의 임권택 감독을 있게 한 작품이다. 김성동 원작으로 두 스님의 만행을 통해 불교에 대한 애증을 넉넉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은 왜 태어나서 우릴 이토록 못살게 구나”하는 한탄은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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