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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19 17:26 (화)
318. 301 302(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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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301 302(1995)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1.0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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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요리의 시대다. 유명 요리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요리사라는 말 대신 ‘세프’라는 근사한 단어를 쓰는 것은 이들의 지위 상승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요리계의 경쟁도 덩달아 달아오른다. 좋은 재료를 공수해 오는 것은 기본이다. 늘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더 기세를 올리고 있는 먹기 위해 산다는 이들을 위해 도마 위의 칼질은 더욱 세련되고 있다. 평점 높은 음식점을 찾아 줄을 서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이럴 즈음 세프는 재료의 한계를 탄식한다. 지구상의 모든 식재료는 이미 경험했을 터.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육 재료가 등장했다. 물론 영화에서지만.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은 1989년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원제: The Cook The Thief His Wife And Her Lover)에서 오븐에 통째로 구운 인육을 선보였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인육이 불빛을 받아 빛날 때 관객은 경악했다.

한국에서도 인육 요리 영화가 등장했다. 오늘 소개할 박철수 감독의 <301 302>가 바로 그것이다. 애완견 요리도 충격이었는데 사람 요리라니. 인육의 등장은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왜 사람 요리가 나왔는지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새희망바이오아파트 302호에 누군가 이사를 왔다. ( 아파트 이름 좋다. 이 정도라야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 참 뜨고 있는 바이오라는 이름을 정확히 24년 전에 썼다. 감독의 놀라운 선구안이다. 이 아파트를 소개할 때 부동산 중개인은 생명공학적으로 설계 시공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 온 여자(황신혜)는 말랐다. 맞은편 301호 여자( 방은진)와 비교하면 그렇다. 뚱뚱한 여자와 마른 여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겠다. 두 여자는 체형도 다르지만 요리하는 여자와 글을 쓰는 여자로 하는 일도 영 딴판이다.


*방은진은 광기어린 요리사 역을 잘 소화해 냈다.

그중에서 압권은 음식이다. ( 왜 서두에서 장황하게 음식이 나왔는지 독자들은 이해하리라 믿는다.) 301호 여자는 음식 만들기가 취미다. 취미를 넘어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세프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그 남편(박철호)은 행복했었다. 와이프가 맛있게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니 복 받은 남자였다. 아내는 음식만 잘 하는게 아니라 밤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음식과 육욕은 대개 함께 한다.)

남편도 그것을 좋아하니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남편은 매번 맛있어? 어때? 하고 묻은 아내가 지겹다. 어느 날 남편은 다른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유지하다 창밖으로 내다보는 아내에게 적발된다.

음식에도, 그 일에도 질린 남편과 아내는 헤어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쌓인 불만이 누적됐어도 불쏘시개가 나와야 한다. 말티즈 ‘쫑쫑이’가 그 역할을 한다. 식재료에 늘 목말랐던 아내는 남편의 애완견을 삶는다. 그러기 전에 털을 뽑고( 뽑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머리를 몸통과 분리해 낸다.

웬일인지 남편은 무슨 고기냐고 묻지도 않고 맛있게 먹어 준다. 나중에 알았을 때 그는 더는 이런 미친 여자와는 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다. 그저 요리와 그릇과 섹스밖에 모르는 여자와 작별을 선언한다.

한편 301호 여자는 302호 여자에게 음식 서비스를 한다. ( 301호 여자는 앞서 남자와 이혼한 바로 그 여자다.) 정성스럽게 만든 따뜻한 음식은 감동 그 자체다. 그런데 302호 여자는 그것을 먹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을 해댄다. 그런 것도 모르고 301호 여자는 계속 음식을 만들고 302호 여자는

버린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301호 여자는 자신의 음식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현장을 적발한다. 내 음식을 버렸다?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저런 폭행이 없을 수 없다. 버린 이유가 궁금했다.

여자의 아픈 과거 때문이었다. 자신도 상처가 있었던 301호 여자는 동병상린의 아픔을 느낀다.

302호 여자는 학창 시절 정육점을 하는 의붓아버지에게 수시로 몹쓸 짓을 당했다. 정육점에 매달린 시뻘건 고기와 육욕의 몸부림. 칼질이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죽어 갔다.

트라우마와 음식 혐오증. 301호 여자는 302호 여자를 위로하고 이해하려고 애쓴다. 302호 여자도 301호 여자가 남편의 애완견을 요리해 먹인 후 이혼당한 사실을 안다.

색소가 다 빠져나간 마네킹 같은 여자라거나 저 여자 젖가슴은 수십 명 애들에게 빨려도 남을 거라고 빈정됐던 지난 과거는 잊었다.

그러다 어느 날 302호 여자가 죽는다. 수사관( 김추련)은 행방불명 된 302호 여자의 흔적 찾기에 분주하다. 여자의 죽음에 301호 여자가 관여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302호 여자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그녀였으니까.

주인공이 죽었으니 영화도 끝났다. 배가 고파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은 싹 가셨다. 인육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끝나고 나서도 막혔던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불편함이 남았기 때문이다.

국가: 한국

감독: 박철수

출연: 방은진, 황신혜, 박철수, 김추련

평점:

 

: 두 여자의 대비가 극적이다. 요리하고 섹스 좋아하고 글 쓰고 섹스 싫어하는 여자. 이들 두 여자가 대문을 마주 보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남자에게서 벗어났으나 그 삶이라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내 요리, 내가 만든 요리’에 자부심이 강한 여자. 요리 일기를 매일 적을 만큼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여자. 그 여자의 음식이 버려졌을 때 그녀는 무너져 내렸다.

요리 때문에 이혼까지 당했는데 종 주먹질이야 싱겁다. 그녀는 여자가 대인기피증에 거식증에 음식 혐오증에 신경성식욕부진증에 걸린 병든 몸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302호 여자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도 정성스레 만든 그녀의 요리를 먹고 싶다. 그러나 음식만 보면 구역질이 나는데 어쩌란 말이냐. 남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요리뿐만 아니라 남자든 무엇이든 세상 그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좋을 것을 301호 여자는 그런 여자에게 무차별적으로 대시한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말은 301호 여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네가 싫어하는 소시지 빼고 억지로라도 먹여서 70킬로 그람을 만들겠다고 덤비는 여자와 받는 족족 쓰레기통에 버리는 여자.

그러니 둘의 사이는 좋기보다는 나쁘다. 위험의 순간이 지나자 둘은 어느새 서로의 아픔을 공감한다. 그녀의 내면과 나의 내면에 있는 상처가 서로에게 드러나고 둘은 화해의 손짓을 해 본다.

표현의 자유와 권리가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다.

잘 닦인 은식기 부딪치는 소리, 크리스탈 잔이 서로 스치며 만들어 내는 명료한 소프라노 소리가 아련하다. 박철수 감독은 이 영화 이듬해 <학생부군신위>라는 멋진 영화를 만들었다. 이전보다 이후가 더 기대됐던 그는 2013년 음주 운전 차량에 치어 64세의 일기로 사망해 영화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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