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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안개(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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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9.08.23  14: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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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상념을 떠올리기에 좋다. 버스 안에서 기준(신성일)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고향길이니 그곳에서 살던 시절이 아니 떠오를 수 없다.

과거의 어느 시점은 흐르는 풍경만큼이나 풍성하다.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짓기도 하고 편한 상태를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심사가 복잡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저 그런 일상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그가 가는 곳은 무진이다. 무진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광주역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를 타고 가는 것으로 보아 남도의 어느 해변에 인접한 곳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진을 잠깐 설명하면 특산물로 다른 지역과 달리 안개가 유명하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다.

그러니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안개>는 영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나는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제약회사 중역이다. 스스로 잘 나서 그런 위치에 오른 것은 아니다. 돈 많고 빽 많은 과부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무진 중학교 출신 중에는 한수(이낙훈)와 함께 출세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에 왔으니 아는 사람들이 반갑게 맞는다. 그중에서도 국어 선생인 박군(김정철)이 형님으로 깎듯하게 대한다. 둘은 한수를 만나기로 한다.

고등고시에 패스한 한수는 세무서 직원에서 일약 세무서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무서장은 끗발 있는 직업이라 집에는 술이 넘쳐나고 음식은 상다리가 휘어진다.

한수의 집에서는 세무서 직원은 물론 여자도 한 명 와서 화투판이 벌어지고 있다. 남자들은 세무서 직원들이고 여자는 음악선생 하인숙(윤정희)이다. 여자 한 명에 남자가 부지기수다.

자연 시선은 여선생에게 쏠린다. 보아하니 국어선생 박군은 하인숙을 좋아하고 한수는 어떻게 해보기 위해 하인숙에게 수작을 부리는 형국이다.

나, 기준은 이런 상황을 한눈에 알아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선생은 사람들의 강권에 못 이겨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아리아 정도는 불러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음악선생은 여기서 자신이 졸업작품으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중 ‘어떤 개인날’을 불렀다고 말했다.)

기준은 유행가를 부르는 음악선생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런 속물 분위기가 싫은지 박군은 먼저 자리를 뜨고 나는 그를 바래다주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

헤어질 때 나는 음악선생을 좋아하면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주문을 한다. 우물쭈물하면 늦는다고. 그날 더 늦은 시각 일생은 뿔뿔이 흩어지고 하인숙은 나에게 집까지 바래다 줄을 부탁한다.

나는 거절하지 못한다. 음악선생은 박군을 꽁생원으로 세무서장을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면서 무진에 실망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여자는 자신을 서울로 데리고 갈 것을 부탁한다. 여기를 어서 떠나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기준은 선뜻 그러마, 하고 대답하지 못한다.

짧은 시간 그들은 오빠니, 인숙이니 하면서 마음을 트고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 같은 기분에 들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박군과는 어느 정도의 관계인지 등 친한 사람도 물어보기 어려운 질문을 한다.

그러는 와중에 기준은 여자가 아주 짧은 순간 팔짱을 꼈다가 금세 푸는 행동을 눈여겨 본다. 헤어지기 전 여자는 오전 수업만 있는 토요일에 만나고 싶다고 한다.

나의 상념은 계속된다.

무진에 온 이후로 병역기피자로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일, 영장을 받아든 어머니의 불안한 눈빛,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군인들의 소리,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뉴스, 통행 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 취업청탁을 하는 사람들의 부탁 등으로 복잡한 심사에 밤잠을 설친다.

다음날 나는 어머니 묘소를 다녀오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여자의 시체를 본다.

순경은 자살로 결론을 내리고 이것저것 묻는 나에게 초여름만 되면 반드시 몇 명씩 자살한다는 술집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다 그것이 기후 때문이라고. (소가 끄는 마차에 실린 흔들리는 시체가 놀랍다.)

하인숙을 만나기 전 세무서에 들른 나는 시체 이야기를 하고 죽은 여자가 섹시하게 보인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인다. 결재도장 찍는데 바쁜 와중에도 한수는 하선생이 네 색시감이냐고 농담조로 물어보는 나에게 정색을 하면서 반문한다. 내 색시감이 그 정도밖에 안 보이냐고.

그러면서 박군이 그녀에게 연애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하선생이 자신에게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인다. 박군은 선생에게 편지를 쓰는게 아니고 나에게 쓰는 것이라면서. (참으로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편지를 갖다 주는 하선생이나 그걸 읽어보고 비웃는 한수나 저질이기는 마찬가지.)

한수는 자신이 고시 패스하고 세무서장이 된 후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형편없다면서 여자들은 고거 하나만 가지고(원문에서는 성기(姓器)로 표기했다.) 시집을 가겠다는 괘씸한 심보라고 투덜댄다. 그 대표가 하인숙으로 너무 쫓아다녀서 귀찮을 정도라는 것.

세무서를 나온 기준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는 소나무 숲으로 간다.

여자를 만난 나는 한때 바닷가에서 생활했던 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고 그곳에서 여자와 정사를 벌인다. 결혼반지 낀 그 손으로 여자를 어루만지는 흑백 필름은 보아서 아름답다.

문을 열고 바다가 있는 밖을 보는 여자의 허리와 뒷부분에 카메라가 고정될 때 관객들은 이미 그러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기준과의 애정행각은 파격적이라고 느낄만하다. (이 장면에서 헛물을 켠 박군과 한수가 안쓰럽다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왜, 여자가 만난지 하룻 만에 기준과 잠자리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순식간의 감정에 의해서 혹은 복잡 미묘한 마음에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 특히 안개가 자욱한 무진에서는.)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절박한 심정의 이면이 있기는 하지만 야수의 마음으로 달려드는 남자를 거부하는 대신 호응하는 여선생의 정조관이 단단하지 못한 것은 탓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한수는 지난봄에서 절에서 어쩌려고 했으나 여자가 결혼 전에는 못한다면서 완강히 거부해 실패했다. 그러니 정조의 단단하고 무름을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칼자루는 기준이 쥐고 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 아니면 정사 이후 그녀가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진심이 아닌 말 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모른 척 할 것인가.

다음날 서울에서 전보가 오고 기준은 짐을 싼다. 아내로부터 주주총회에 관한 일정이 급하니 바로 서울로 올라오라는 내용이다. 그는 몇 자 끼적인다. 너를 사랑한다. 내가 먼저 서울로 간다. 연락하면 오라. 뭐, 그런 내용이다.

이 편지는 여자에게 전달됐을까. 그래서 기준과 음악선생의 사랑은 하룻밤의 정사가 아닌 긴 사랑으로 이어졌을까. 상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기준은 쓴 편지를 미련 없이 바로 찢어 버린다. 그리고 기차에 오른다. 기준은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을까.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무진 10㎞’라고 쓴 푯말은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로 바뀌고 있다.

국가: 한국

감독: 김수용

출연: 신성일, 윤정희

평점:

팁: 김수용 감독의 <안개>는 감수성의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이다. 작가는 영화의 각색에도 참여했다.

그래서 원작에 있는 대사 그대로 읽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원작의 시작과 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은 아니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먹물들의 행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을 한 번 빌려보자.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의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책임을 인정해 주기로 하자.'

도대체 무슨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왠지 있어 보이는 듯한 표현이다. 이런 애매호한 말을 주인공이심각한 목소리로 중얼대는 장면은 관객들을 현혹한다.

남자의 무책임, 비겁한 도망자, 용서받지 못할 자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여선생 하인숙은 쿨하다.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쓸 때는 속물 그 자체였으나 그러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로 여기 있는 일주일간만 멋있는 연애를 하겠다는 다짐에 이르러서는 기준이 한 수 아래로 보인다. (나, 기준은 이런 여자와 대적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세련됐다. 다른 어떤 표현도 많이 있겠지만 내가 보는 <안개>는 그렇다. 화면이 그렇고 대사가 그렇고 얼개가 그렇다.

김수용 감독을 한국의 잉마르 베리만 (그는 흑백영상 예술을 완성한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제7의 봉인>,<산딸기>, <침묵> 등의 작품을 남겼다.) 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정갈한 음식상을 마주했는데 그래서 보는 눈이 즐거웠는데 먹어보니 맛까지 깔끔한 경우라고나 할까. 눈과 귀와 입까지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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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bgusp@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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