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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박하사탕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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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박하사탕 ( 1999)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7.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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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지는 여행의 단골 테마다. 유명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제천 근방을 지나다 우연히 <박하사탕> 촬영지라는 푯말을 보았다.

그래서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래전의 일이다. 이중 철길이 있었고 그 아래 강물이 흘렀다. 여럿이 둘러앉을 만큼의 공간이 있었고 모래사장은 곱기보다는 거칠었다.

그런데 한 번쯤 와본 듯한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도 이런 유의 대사가 나온다.) 여름철이어서 물속에 잠시 발을 담갔던 기억도 있고 물수제비를 날리기도 했다.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그 시간만큼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세월이 흘렀다.

마흔 살이 된 영호(설경구)도 그런 정도의 세월을 보냈다. 야유회 현장에 뒤늦게 나타난 그는 조금 실성한 듯 비틀거린다. 놀이판의 훼방꾼처럼 거친 행동을 하는 그는 참석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마침내 철길 위로 올라가 다가오는 기차와 마주 서는 영호. 그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못하고 지나온 시간을 저주하고 절규한다. 

도대체 그 세월 동안 영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푸른 제복으로부터 영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순임(문소리)은 그의 애인이었다. 군대에 간 그를 면회한 것도 다름 아닌 순임이었다. 순임이 온 날 하필 비상이 걸렸다. 

면회는 거절됐다. 그는 50 트럭( 나도 그 트럭을 여러번 탄 기억이 있다.  태풍의 나무처럼 심하게 흔들거리면서 여기 저기 다녔었다.) 에 실려 계엄군으로 남쪽 어느 도시로 급파됐다. 그들이 차에 실려 떠날 때 부르는 군가와 흙먼지 너머의 순임의 모습은 영화의 흥분한 미래를 암시했다.

부상한 영호는 어둠 속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M16 소총을 발사했고 여고생은 그 자리서 죽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어느 날이었다. 사람을 죽인 영호. 풋풋했던 그의 영혼은 바람처럼 흔들린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그는 형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고참 형사들은 고문의 기술자로 이력이 났다. 그도 그들의 세계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순수한 내면에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났다. ‘악의 평범성’을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잡혀 온 청년을 때리고 밟고 마침내 물속에 처박으면서도 일상이 평화롭다. 잡담하고 회식 때 무엇을 먹고 말썽을 부린 아들의 학교 선생을 만날 일을 걱정한다.

여기에 순임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5년 만에 그는 전혀 다른 영호가 돼 있었다. 다시 3년이 흘렀다. 영호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부럽지 않다. 그 냄새 잘 안빠진다는 선배의 농담조차 가볍게 무시한다.

손에 묻은 똥을 씻을 때 그는 초상화 속의 대통령처럼 근엄하기까지 하다. 정의사회구현은 그의 똥 묻은 손에 달려 있는듯했다. 화장실 거울 속에 그가 있다. 고문하던 그 손을 씻으며 거울 속의 나를 본다.

그러나 그의 심지는 단단하다. 군산의 어느 곳에서 잠복근무를 하다 술집 여자와 눈이 맞았다. 만삭의 부인( 김여진)과는 애정이 없던 터라 둘은 쉽게 어울린다. 여자의 모습에서 잠깐 순임이 어른거리지만 그뿐이다.

1994년 여름은 더웠다. 영호는 이제 경찰복을 벗고 가구점 규슈방 사장으로 변신했다. 아내는 운전 강습소 직원과 바람이 났고 그는 경리 미스리(서정)와 차 안에서 그 일을 섬세하게 즐긴다.

새집으로 이사해 집들이하던 날, 그는 강아지를 발로 차고( 나중에 그는 거지꼴로 부인을 찾아온다. 뽀비 보고 싶다며. 뽀피는 그가 발로 찬 반려견이다.) 짜증을 내고 아내는 식전 하느님을 찾는 장황한 기도를 한다.

고깃집에서는 고문했던 청년을 만나 그의 일기장에 적힌 ‘삶은 아름답다’ 말을 지금도 그러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다. 반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은 오늘도 잘 먹고 잘살고 있다. ( 이때까지도 영호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의 당당하고 떳떳한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이제 집도 절도 없다. 떠돌이 신세인 그의 손에 권총 한 자루가 그의 생명을 재촉하고 있다.

관객들은 진작 죽었어야 할 인간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신기해한다. 한편으로는 그가 더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관객들은 그새 그가 고문 기술자로 인간의 영혼을 철저히 파괴한 자라는 것을 잊고 있다.)

아내와 이혼하고 순임과 행복한 나날을 바라는 그런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흔들리고 몸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순임의 남편임을 밝히면서 죽기 전에 영호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한다. 죽어가는 순임과 마주한 그는 잠시 오열한다. 순임이 공장에서 하루 천 개를 포장했다는 박하사탕이 그곳에 있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을 되돌리고 싶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고문 기술자는 빨리 죽어야 한다. (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조금 더 살려 둔다.) 남의 영혼을 파괴했던 그가 온전히 살아간다면 하늘에 있는 신이 노할 것이다. 순임이 선물로 준 카메라를 매만지는 영호.

한때 그는 개망초 등 꽃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순임이 남긴 카메라 필름에는 어떤 사진이 들어있을까, 궁금증은 오로지 관객이 해소해야 한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이다. 노래와 춤판이 벌어지는 야유회 현장. 그는 철길 위에 올라가 있다. 그리고 절규. 나, 다시 돌아갈래.

국가: 한국

감독: 이창동

출연: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

평점:

 

: 한 인간이 파괴되는 과정을 시간 역순으로 그렸다. 80년 광주의 그 날. 그날 이후로 그의 인생은 끝장났다. 

그가 그곳에 오지만 않았어도 그는 순임과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고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가 시위 도망자를 쫓을 때 그는 야수였고 그가 고문할 때 그는 굶주린 짐승이었다. 그가 우연한 만나 고문했던 청년에게 인생은 여전히 아름다운가 따위의 말을 지껄일 때 관객은 허탈했다.

헛소리하기 전에 그는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마도 영화는 바다가 아닌 산으로 갔을 것이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말을 붙이기보다는 피했어야 옳았다. (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면. )

그러나 그는 고문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해도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그러기에 반성이라는 것도 없었고 어떤 책임도지지 않았다.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 앞에 그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당한 자가 여전히 주눅 들어있을 때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피해자가 발길질이나 하다못해 소리라도 쳤더라면 역시 영화는 산으로 갔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용서하지 못한 죄는 신의 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신조차도 침묵했다. 여기서 퀴즈 하나.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1번 영호, 2번 순임, 3번 고문당한 청년, 4번 영호의 아내, 5번 미스리.( 미스리가 보면 서운하겠지만 미스리를 굳이 넣은 것은 오지 선다형을 만들기 위해서다.)

각자 정답을 써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자신이 고른 정답을 놓고 설왕설래해보자. 그런 과정 역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억하는 방법이겠다.

<초록물고기>에 이은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박하사탕>은 외국은 물로 국내에서도 이런저런 상을 많이 탔다. 상을 탄 것이 좋은 영화의 절대 기준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다.

영호를 보면서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괴물이 탄생하는지 괴물 탄생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2018년 재개봉을 놓친 관객은 블루레이로 제작된 화질 좋은 화면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 삽입곡인 샌드라 블럭의 ‘나 어떡해’ 김수철의 ‘내일’이나 군가 ‘용사의 다짐’ 나훈아의 ‘고향역’ 레이 피터슨의 ‘탤 로라 아이 러브 허’ 등의 노래를 여운으로 챙겨도 좋겠다.

기준, 동작 그만, 구령 조정 3회 실시, 부대 차렷, 열중쉬어, 뒤로 돌아 등의 군대 용어들을 따라 해 보니 그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쉬이 목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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