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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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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4.0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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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은 생소한 경험이다. 서울에서 시골로 오는 것도 그렇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특히 아직 소년기의 아이들이라면 조금은 주눅이 들고 위축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서울서 잘난체하게 살았던 병태(고정일)도 이 상황을 피해 가기는 어렵다.

그 해 가을 오학년 이학기에 병태는 강원도 산골 마을 학교로 옮긴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곳으로 좌천됐기 때문이다. 규모나 시설도 그렇고 아이들도 꾀죄죄하니 병태는 시큰둥하고 화난 표정이다.

그러나 상황을 모면할 수는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급장 석대(홍경인)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다. 선생이 정해준 자리 대신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석대의 지시가 먹힌다.

점심시간에 물 당번이 그에게 물컵을 대령하는 것은 물론 사과나 배 등 먹거리를 챙겨준다. 소풍 간 선생님에게 하는 아이들의 행동과 비슷하다. 병태는 혼란스럽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석대는 말하자면 선생 대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학급을 운영하고 있다. 병태는 그런 상황을 참지 못한다.

똑같은 학생인데 반장이라고 해서 선생님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이 이런 불합리한 사태를 바꿔 보리라고 병태는 다짐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러나 석대의 아성은 견고한지라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병태는 좌절한다. 최 선생님(신구)에게 일러바쳐도 석대의 잘못이 아닌 자신의 실수로 결론이 나고 아버지에게 어렵게 말문을 꺼냈을 때는 되레 역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석대를 저주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선하기를 바랬는데 네가 석대와 같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반장이 되라고 오히려 지청구를 받는다. 힘으로, 말로도 석대를 당해낼 재간이 없고 똘똘 뭉친 아이들은 병태를 서울서 온 이상한 아이로 취급한다.

 

그가 선택할수 있는 방법은 끝까지 석대에게 저항하든가 아니면 그의 우산속으로 들어가 보호를 받는 방법 밖에 없다. 병태는 거듭된 좌절에 저항 대신 그의 품에 파고든다.

마주 오는 기차 대결에서 석대가 상대방을 제압하자 더는 그와 대결해서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선 것이다. 저절로 무릎 꿇었을 때 병태에게는 솜사탕이 주어졌다.

일인자는 아니더라도 일인자의 보호를 받는 이인자의 삶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석대의 성은 더 커졌고 더 높아졌으며 담임선생은 변함없이 석대 편이었다.

그런데 둑은 어느 순간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담임선생이 그해 겨울 새로 부임한 것이다. 젊은 선생( 최민수)은 반장 선거를 실시하고 석대에게 산수 문제를 풀어 보게 시키는 등 선생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

위기의 순간이 석대에게 닥쳐왔다. 더구나 시험을 아이들이 대리 쳐준다는 사실도 발각됐다.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학급에 감돌았다. 석대는 아이들 앞에서 선생에게 매를 맞는 치욕을 당했다. 과거도 탄로났다.

따르던 아이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혁명적 상황이 왔다. 석대는 잘 해라 개새끼들아, 시같은 말을 내뱉고 도망쳤다. 그는 비록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선생 앞에서 굴복하지 않았다.

학교를 떠난 그는 늦은 저녁 석유를 뿌리고 교실을 불태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개가한 어머니를 찾아갔다는 소문만 흉흉하게 떠돌았다. 병태도 다시 서울로 전학을 갔고 성장하면서 그 시절을 잊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옮기기도 했다.

지금은 학원 강사로 3개월째 일하고 있다. 그럭저럭 인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창생에게 그 시절 담임선생이 죽었다는 부고 소식을 들었다.

30년의 전의 일인데 그는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석대가 온다는 말에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간다. 성장한 아이들은 술을 먹으면서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긴다.

석대의 똘마니 역할을 하면서 기세등등하던 체육부장은 택시 운전을 하고 맞지 않기 위해 석대에게 아부를 심하게 했던 아이는 부자가 돼서 떵떵거린다.

상갓집은 자정으로 향하고 있다. 일어나야 할 시간인데 석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석대를 몰아냈던 젊은 선생은 국회의원이 돼서 나타났다.

병태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때 석대 이름을 단 조화가 들어온다. 석대는 그 어디에서 지금도 급장 노릇을 하고 있을까. 병태는 생각한다.

국적: 한국

감독: 박종원

출연: 홍경인, 고정일

평점:

 

: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선생님이다. 선생이 제대로만 했다면 석대 같은 괴물은 나오기 힘들었다. 물론 그 아류는 그때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교실에서 서성이고 있지만 석대 만큼은 아니었다.

지금도 석대 담임과 같은 선생이 교육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선생에 대한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것은 누가 했다기보다는 선생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괴물은 석대가 아닌 담임 선생님이라고 봐야 옳다.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아이들의 심리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교육자라는 탈을 쓰고 강단에 서있는 우리의 최 선생 같은 선생들은 두 손들고 반성해야 한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이승만 정권이 끝을 향해 달리던 1959년에서 1960년이었다. 라디오에서는 학생들의 시위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독재자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고 끝내 자유를 거부하고 동족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요즘 같은 시대에 엄석대 같은 놈이 확 휘어잡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입을 놀린다. 독재자의 하수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세월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두운 진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한편 새로 온 선생님은 이제 의원님이 됐다. 그가 거들먹거리며 상가에 들어섰을 때 그 역시 또 다른 괴물로 자라나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외쳤던 그 역시 그런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우리는 되돌아보게 된다.

남녀 공학이지만 철저히 남학생 위주로 그려졌다. '댄서의 순정'이 배경음으로 깔릴 때 여학생이 등장한다. 석대의 여자 친구쯤 되는 소녀가 석대와 이제는 확실히 그의 꼬붕이 된 병태에게 눈웃음 짓는 장면에서는 아연 실색한다.

대병 소주 같은 것을 들고 파먹은 사과에 술을 따르는데 이는 매우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다. 나의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한다. 영화와 크게 다를게 없다.

동급생끼리의 폭행은 예사고 선생이 아이들에게 가했던 폭행 역시 비일비재했다.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회초리로 손바닥을 내리치는 살기 어린 폭력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됐다.

우리는 학교폭력이 국가폭력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 시대 국가는 국민을 상대로 거리낌 없는 폭력을 자행했고 학교에서도 그런 폭력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폭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석대는 더 큰 폭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센 주먹 앞에서 석대의 죄상을 낱낱이 고백하는 숨은 용기를 끄집어냈다.

과연 이것을 양심에 따른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병태는 석대의 잘못을 모른다고 외면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는 지킨 것일까. 너희들 역시 공범이라는 친구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이문열 원작이다. 책과 영화는 조금 달라 비교해 보는 맛도 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새겨진 100센트 짜리 동전을 모닥불에 던져 넣을 때 혹은 성인 병태가 자유가 위협 받을 때 지키지 못하고 빼앗겼다고 말하면서 쓰는 리버티라는 단어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잔설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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