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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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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1.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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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인생은 고달프다. 일류는 아니더라도 이류는 돼야 한다. 그래야 자존심 세워도 봉변을 당하지 않는다. 잘못은 실수라고 덮어둔다.

작가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평론가를 구워삶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효섭(김의성)은 알량한 그 무엇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빈정대고 시비 걸다 쪽박을 찬다.

그 세계에서 하류 취급을 받으니 울고불고 소리쳐도 큰 동정을 얻지 못한다. 주접으로 치부된다.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 후배는 서랍에 넣어 놓고 읽어 보지도 않는다. 바쁘기도 하겠지만 별 볼 일 없기 때문일 것이다. 효섭은 화가 치미나 꾹 참고 원고 뭉치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 방면에서 알아주기보다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 알고 조심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올라서지 못할 바에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늘 겸손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도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얕잡아 봤을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했을까. 작가라는 그 무엇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친다. 언젠가는 일류를 무너뜨리는 대작을 쓰리라, 그런 용기도 있고 재능도 있다고 믿는다.

그런 효섭에게 민재(조은숙)는 좋은 먹잇감이다. 필요하면 찾고 귀찮으면 버린다. 문단에서 받은 멸시를 그는 민재에게 푼다. 수준 낮은 인간들이 범하는 공식을 효섭도 그대로 따른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보경(이응경)이다. 꼴에 두 명의 여자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재는 그에게 충성을 다한다. 영화관 매표 일을 하면서 사장 몰래 녹음하는 알바에 되잖은 원고까지 교정해 준다. 세상사가 묘한 것이 한쪽이 달려들면 다른 쪽은 피하는 경향이 있다.

작가도 삼류, 됨됨이도 그 언저리서 맴도는 인간이 뭐가 좋다고 민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귄 지 2년째 되는 날 민재는 모은 돈을 털어 선물과 케이크를 사서 효섭이 사는 옥탑방을 예고 없이 방문한다. 기쁜 마음으로 불러 보지만 맨발로 그는 뛰어나오지 않는다.

방에는 보경이 먼저 와 있다. 민재의 존재를 알아챈 보경은 애초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나간다. 효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전화 한 통 없이 불쑥 찾아오다니.

민재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돼지 몰듯 구석으로 그녀를 밀어붙인다. 우는 민재. 맞아서 아프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걷어차였다는 것이 더 속상하다.

 

그 모습을 멀지 않고 가까운데서 지켜보는 남자가 있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영화관 관리자 정도라고 하자. 차분한 그는 저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는 네가 아니라 유부녀라고 외치지만 민재는 그에게는 마음에 없다.

그래도 그가 조금은 안쓰럽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자신을 송두리채 던진다. 마침 발동한 모성애가 홧김에 서방질과 한패가 되자 그녀는 그에게 내 몸을 가지니 좋지 라는 말까지 하는 극한 상황으로 끌고 간다.

한편 한바탕 난리를 핀 효섭은 도끼 맞은 돼지처럼 풀이 죽어 있다. 작가의 길도 연애의 길도 어둡다. 문단 모임에서는 참아도 될 상황에서 맥주병을 깨고 미친 짓거리를 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다. 저런 골통을 누가 좋아할까. 하지만 여자들은 다르다. 민재처럼 보경도 그에게 빠져 있다. 그가 왜 그를 좋아하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

다만 조금 수줍어하는 남편 동우(박진성)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 정도로만 해두자. 동우는 먹고 살기 위해 지방에도 내려가고 나름대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다.

일이 꼬여 하룻밤 자고 가게 되면서 그도 남자인지라 여행지에서의 로맨스인지 무엇인지를 찾게 되고 다방 아가씨가 상대로 지목된다.

그는 주저하다가 그녀와 허겁지겁 일을 치르고 터진 물건 때문에 안절부절이다. 서울에 와서는 비뇨기과를 찾아 예방주사를 맞는다.

얼핏 보경과 동우가 스쳐 기나 가는 장면들이 있다. 서로 엇갈리면서 부부는 존재를 모르지만 관객들은 아는 장면이 몇 차례 잡힌다. 보경이 골목길에서 동우를 보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가 병원에서 나가자 보경이 뒤따라 올라가 간호사에게 그에게 무슨 주사를 놨는지 따지기도 한다. 뭐 묻은 돼지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나무라는 격이라고 할까.

어느 날 보경은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온다. 편한 얼굴이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저 정도로 한심하니 나의 바람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일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죄책감 같은 건 아예 무시하고 효섭에게 더욱 매달린다. 둘은 서로, 서로에게 집착한다. 여행을 가려고 상봉터미널에서 기다리는 보경. 하지만 효섭은 나타나지 않는다. 연락이 없는 그에게 보경은 전화를 걸지만 녹음된 메시지만 흘러나온다. 

삐삐도 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사는 옥탑방으로 간다. 문을 두드리고 창문을 열어 본다. 피투성이 남녀가 엎어지고 누워 있다. 돼지가 죽을 때 멱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주변이 피바다가 되듯이 남녀도 그런 상태다. 

보경은 집으로 돌아온다. 놀라거나 괴롭거나 아쉬운 표정이 아니다. 남편과 일을 치른 그녀는 더 그런 상태가 된다. 동우는 의심한 것을 미안해하면서 넌 깨끗한 여자라고 보경을 추켜세운다. 

그가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일어난다. 아침이 밝아 오고 있다. 그녀는 배불리 먹어 걱정거리가 없는 돼지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커튼을 연다. 

봄바람 같은 미풍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녀는 떠난 사랑을 잊고 또 다른 사랑을 찾는 행복을 꿈꾼다. 마치 큰일을 치르고 나서 잠시 쉬어 가겠다는 여유가 온몸에 가득 묻어난다.

국가: 한국

감독 : 홍상수

출연: 김의성, 이보경, 조은숙

평점:

 

: 믿고 보는 홍상수 표 영화의 전형이다. 보고 나서 씩 웃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다. 무슨 메시지를 왕창 얻어 가는 것도 아니다. 속이 시원하거나 울화통이 터지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한 번 더 웃으면 그만이다. 엄청 지루할 것 같은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만도 한데 전혀 아니다. 

벌써 이렇게 지났나, 하는 생각은 앤딩 자막이 올라가서야 알아챈다. 몰입했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홍감독의 첫 번째 영화다. 스쳐 지나가는 송강호가 보인다. 이 인물이 이렇게 클 줄 홍 감독은 알았을까. 

관객들도 홍감독이 이렇게까지 클 줄 알았을까. 입봉작 에서부터 싹수를 보일 줄을. 돼지해를 맞아 돼지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면 어떨까 생각하던 차에 이 영화를 봤다. 

그 전에 한 번 봤으니 이번이 두 번째인 셈이다. 익히 알고 있었으나 식상하다거나 재미없지가 않고 처음처럼 새로웠다. 

주인공들이 돼지여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돼지해에 돼지 자가 들어간 영화를 돼지처럼 웃으며 봤으니 올해는 운수대통이렷다. 

한편 지난해 나온 홍감독의 23번째 작품 <강변 호텔>은 올해 개봉이 예정돼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에서 열린 제 56회 히온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각본상, 남우 주연상(기주봉) 등 3관왕을 차지했다고 한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그의 작품들을 서두르지 말고 시간이 나거나 기회가 되면 하나씩 봐야겠다.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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