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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귀여운 여인>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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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귀여운 여인> (1898)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3.1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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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는 단편 소설로 유명한 러시아 작가다. 동시대서 활약했던 톨스토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올렌카에 대해 “ 올렌카와 같은 주인공이야말로 여성다움의 본질을 순수하게 잘 간직하고 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대가가 여러 번 정독해서 읽고 내린 평가라고 하니 아니라고 반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나도 여러 번은 아니고 두 어 번 읽고 나서는 올렌카를 사랑했던 남자들은 ‘행복했음에 틀림없다’ 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연히 그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올렌카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칭찬도 있으면 반대도 있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다. 역시 같은 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던 고리키는 “주체성을 상실한 온순한 노예 같은 인물”로 올렌카를 깎아 내렸다.

두 위대한 작가의 이런 대비되는 평가를 염두에 두고 <귀여운 여인>을 읽어 보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이 귀찮으면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고 떠들썩하게 읽어도 상관없다. 어렵지 않고 술술 넘어가기 때문이다.

 

앞서 주인공의 이름이 올렌카인 것은 설명했다. 그 올렌카는 퇴역한 관리의 딸 정도로 간략히 설명해 두자. 그녀는 마당 현관 계단에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데 때는 무더운 여름이고 파리 떼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초저녁이다.

그 시각 올렌카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는 쿠킨은 비오는 하늘을 원망한다. 극장주인 그에게 궂은 날씨는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 되풀이 되고 쿠킨의 절망이 길어 질 때 올렌카는 그의 불행 때문에 몹시 괴롭다. 괴로운 정도를 넘어 그에게 감동을 받았고 감동은 곧 사랑하는 마음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쿠킨과 결혼했고 행복했다.

마을 사람을 만나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극장이라고. 인간은 오로지 드라마를 통해서만 진정한 기쁨을 얻고 교양을 가진 인간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그녀는 그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도 그렇게 했다. 배우들이 연습할 때면 직접 극장에 나와서 동작을 고쳐 주기도 하고 신문에 비판 기사가 실리면 신문사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제 그녀는 극장과 배우와 한 몸이 됐다. 쿠킨 보다도 더 연극을 사랑했다. 배우들은 그녀를 ‘귀여운 여인’이라고 칭송했다. 그러 던 어느 날 이었다. 새로운 단원을 구성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던 남편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그녀에게 이제 연극은 의미가 없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지도, 가장 필요하지도 않았다. 3개월이 지났다. 실의에 빠진 또 어느 날 어쩌다 보니 올렌카는 목재상 바실리 안드레비치 푸스토발로프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새까만 턱수염을 단 그는 올렌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은 운명이 정해진 대로 일어나는 법이라고. 우리가 아끼는 누군가가 죽었다면 그건 하느님의 뜻이니 우리는 참고 복종해야 한다고.

집으로 돌아온 올렌카에게 그 다정한 목소리가 밤새껏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목재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올렌카는 극장 업무를 보는 대신 자재창고에서 하루 종일 보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목재 값이 해마다 뛰고 운송료가 오르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버팀목이나 널빤지, 합판과 같은 말들이 극장이나 배우들을 대신했다. 이것은 그녀의 생각이 아니라 목재상 남편의 생각이었다. 그가 방에 있으면 그녀도 방에 있었고 사람들이 극장에라도 가보라고 말을 하면 시간이 없고 가봐야 별거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올렌카의 모든 것은 목재에 있었다. 또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목재를 사러 간다며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 슬펐고 그래서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하지만 그녀의 하숙집에는 아들하나를 두고 부인과 별거해 사는 군대의 젊은 수의사 스미르닌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부인은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고 그 것이 떨어져 사는 이유였다. 가정생활이 불행한 그에게 올렌카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부인을 용서해 주라고 충고했다.

떠났던 남편이 돌아왔을 때 올렌카는 젊은 수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그를 동정했고 어린 아들을 위해 함께 울기도 했다.

올렌카 부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6년간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던 겨울 어느 날 모자도 쓰지 않고 목재를 내리러 갔던 남편은 감기에 걸렸고 유명한 의사의 치료도 소용없이 죽고 말았다.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슬픈 표정으로 교회에 다녔다. 그리고 다시 여섯 달이 지났다.

올렌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던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에는 진정한 수의사가 없고 그래서 돌림병이 생기고 우유에서 사람들이 전염되고 말이나 소들 따위에서 질병이 옮는다고.

어느 새 그녀는 수의사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말만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견이나 주장도 그와 똑같이 하게 됐다.

마음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여자였다면 이런 행동을 비난하거나 비웃었을 것이지만 올렌카에게 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행동이나 말을 당연하게 여겼다. 왜냐고? 올렌카는 ‘귀여운 여인’이니까. 그러던 또 그 어느 날, 이번에는 젊은 수의사가 그녀를 떠났다. 죽지 않고 아주 멀리, 시베리아 부대로 간 것이다.

그녀는 또 다시 혼자가 됐다. 혼자가 됐을 때 그녀의 주관도 사라졌다. 어떤 것에 견해가 없는 끔찍한 일이 다시 벌어진 것이다. 극장의 폭죽소리도 목재의 가격상승도 가축의 위생관리도 그녀 에게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슬픔이 밀려 왔고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서 울었다. 검은 고양이가 가르랑 거리며 몸을 비벼대며 부드럽게 다가와도 조금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던 7월의 무더운 어느 여름 날. 머리가 새 하얀 수의사가 제복을 입고 그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화해하고 아들 샤샤와 함께 하숙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올렌카는 돈도 한 푼 받지 않고 그들 가족을 집으로 모셨다. 지붕을 색칠 하고 벽을 하얗게 발랐다. 그녀의 미소가 예전처럼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소년이 학교에 돌아와서 배운 것을 외우고 있을 때면 아유 내 새끼, 하면서 마치 자신의 아들 인 것처럼 모성본능이 꿈틀댔다.

올렌카는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하면 이렇게 말했다.

어휴, 요즘은 중학교 수업도 아주 힘들어요. 겨우 1학년인데 동화 한편을 다 외우고 라틴어를 번역해 오는 숙제를 내주기까지 한다고요.

그녀는 이제 샤샤가 말하는 대로 말하고 그가 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다시 행복했고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귀여운 여인이 됐다.

: 앞서 톨스토이와 고리키의 평을 언급했다. 이제 다 읽고 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교육적이고 무언가 가르칠 것이 있고 신앙적인 사람이라면 톨스토이의 말에 더 공감이 갈 것이다. 현모양처의 유교적 관점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편을 따르고 아들을 따르는 순종적 어머니상 말이다.

하지만 주체적 여성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고리키의 말에 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올렌카의 줏대 없는 지조는 칭찬 받기 어렵다. 자기의 생각과 주관도 없이 남편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그것만이 행복의 유일한 기준이라니.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전자보다 후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려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작품은 도마 위의 생선처럼 단칼에 도막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렇게도 보고 또 저렇게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귀여운 여인>을 나는 40년 전 쯤 읽었다. 지금처럼 가로 글이 아닌 세로글로 제본된 책이다.

그동안 이사를 수도 없이 하면서 나는 그 때마다 많은 책을 버렸지만 그러지 않고 가지고 다닌 ‘체홉 단편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서 였다.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났고 철에 녹물 들 듯이 얼룩이 져 있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던 기억들이 행간에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독서의 추억은 그 어떤 추억보다도 달콤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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