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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태준의 흔적 수연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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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태준의 흔적 수연산방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2.19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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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태준은 1904년 태어났으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연보를 찾아 보면 태어난 해는 있으나 죽은 해는 물음표로 표기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월북 이후 행적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1930년대 살았던 집은 수연산방(壽硯山房)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북동에 있는 그의 옛 고택은 지금은 후손에 의해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먹으면 맛있는 대추차가 인기다.

묵직한 찻잔을 받쳐들고 그의 과거 행적을 잠시나마 뒤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다.

일찍이 고아 였으며 어린 시절 철원에서 살았고 고교시절부터 문재를 드러낸 것이나 일본 유학 혹은 귀국 후 <문장>지 발행인 겸 편집인 활동을 한 것 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도 1988년 해금되기 전 까지는 언급되는 것조차 불온시 됐다. 이념으로 갈라진 남북 분단의 숙명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상의 변천을 거쳐 급진주의 사상에 빠져 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런 그도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1940년 무렵부터 다른 작가들처럼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기 때문일까.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와 더불어 전쟁 통에 월북을 감행한 그는 한 때 그곳에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어느 시점에서 부터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버림받았을 것이라는 추측만이 무성하다.

그의 이름이나 작품은 이후 북에서도 남에서도 금기시 됐으나 해금 이후 작품 연구는 많이 이루어 졌다.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 당대 최고 문인들이 소속됐던 구인회(九人會)의 창설 멤버로 활약했다. 근대문학의 틀을 다졌다는 ‘가마귀’ ‘달밤’ 등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시대를 풍미했으며 아파했고 적극 동참했으며 반성했고 버림받았던 파란 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이태준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비극으로 남아있다.

대추차를 마시면서 이런 감상에 빠져 보는 것은 낡은 한옥이 주는 정감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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