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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뻐꾸기 둥지 위로...>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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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뻐꾸기 둥지 위로...> (1962)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1.2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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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년 전이다. 부러 날짜를 찾아 봤더니 2012년 3월이었다. 그 때의 그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살아 숨 쉬고 있다. 뇌 절제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된 맥머피의 끔찍한 모습.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를 밀로스 포먼 감독이 1975년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한 것을 본 날. 그 날 나는 의약뉴스 ‘백채기의 내생애 최고의 영화’ 코너에 다음과 같은 머리글로 영화평을 시작했다.

“정신병동에 신규 환자가 들어온다. 이 환자는 절망뿐인 병동에 희망을 불어 넣는다. 새 길을 내고 모든 사람이 같이 걸어가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기대는 완고한 고집에 막혀 좌절된다. 희망이 사라진 인간의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영화로 보기 전에 오래전에 읽었다. 1970년대 중반쯤 서울의 한 길거리 리어카에는 책이 넘칠 만큼 쌓여 있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던가.

저작권 개념이 흐릿해서인지 그 시절은 책 표지는 다른데 제목은 같은 여러 종의 <뻐꾸기...>가 널려 있었고 나는 그 가운데 새가 날아가는 표지장식을 단 책 하나를 샀던 역시 흐릿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제목은 생생하지만 읽고 난 후의 기억은 그 정반대였다. 그러니 이번이 두 번째 독서이지만 실제로는 첫 번째인 셈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장면 때문이었는지 읽는 동안 내내 불안했다. 그것은 아련한 독서의 추억 때문이 아니라 영화에 각인된 배우들의 환영 때문이었다.

브롬든 추장역의 거인 월 샘든이 잭 니콜슨이 연기한 맥머피를 살해하는 순간을 간이역의 완행열차처럼 지나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와 달리 책은 맥머피가 콤바인으로 불리는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끌려오는 장면대신 이미 도착해 병동의 일상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는 초등학교 교과서처럼 일사천리로 읽힌다. 어려운 부분이 없고 이야기의 진행방향도 곡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수간호사 랫치드 휘하에 모인 환자들은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전쟁터의 병사들과 다름없다.

먹으라면 먹고 씻으라면 씻고 모이라면 모이고 자라면 잔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어쩌다 그런 생각이 나도 말을 하거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수간호사가 보기에 불순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런 꼬락서니를 보는 맥머피의 기분이 어떤지 좀 상상이 가시는지. 아무리 봐도 미치지 않았는데 간호사는 미친 사람 취급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동에 가둬두고 치료라는 미명하에 꼭두각시처럼 환자를 다루는 간호사 앞에 병원의 구성원들 역시 환자들처럼 속수무책이다.

겨우 약물중독 정도의 약점에도 담당 의사는 랫치드 앞에 서기만하면 사무장병원의 오너인 행정원장에게 고용된 페이 닥터처럼 한없이 작아지고 다른 의료진 역시 방관차원을 넘어 적극 동조에 나서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고 수간호가 말하는 소위 매끄러운 병원운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의료진들도 이런 처지이니 환자들은 간호사의 말을 하느님 말씀처럼 감히 거역해서는 안 되는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으로 삼을 수밖에.

간호사의 명령에 따른 반항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간호사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격성이 강하다느니, 통제할 수 없는 환자라는 말 한마디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빨간약을 먹거나 온 몸이 솜으로 적신것처럼 땀으로 젖는 전기치료를 받거나 뇌를 톱으로 잘리기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환자들은 기억을 잃지 않고 논리적 생각을 할 수 있고 하루 종일 바지에 오줌을 싸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생존의 기술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분출기로 안개를 뿌려대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 희미한 병동, 동일한 내용의 방송을 하루 종일 틀어 대고 환자 모르게 녹음해서 서로 감시하게 만드는 분위기는 박제된 인간이 살기에 좋은 조건이다.

이곳의 환자들은 따라서 치료해서 나가기보다는 되레 병이 깊어져 병동에서 생을 마쳐야 하는 운명이다. 그나마 오늘이라도 살아 있기 위해서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단기 환자든 장기 환자든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맥머피는 다르다. 그는 왜라는 의문을 품고 품은 의심을 말하고 머뭇거리는 환자들을 선동하고 제멋대로인 병원규칙을 위반하고 더 많은 자유를 위해 큰 소리로 떠들고 아무때나 웃으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한다.

감히 수간호사와 맞짱을 뜨는 것이다. 월드시리즈 기간 동안 TV시청을 하고 농구 시합을 벌이는가 하면 낚시대회를 열기도 한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조금씩 바뀌자 조마조마하던 환자들은 동요한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가 하면 감히 탈출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간호사의 힘은 건재하다. 검은 속마음을 감추고 언제나 예의 바르며 때로는 침묵으로 환자들을 압도한다.

맥머피는 탈출하기로 작정 한다.차라리 이곳에 오기전에 수용됐던 교도소가 더 낫다는 생각이다. 위탁환자로 오면 좀 편할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히 지옥의 소굴이 아닌가.

그는 거대한 파티를 연다. 병동에서 술을 먹고 창녀를 불러들인다. 31살이 되도 여전히 동정인 빌리에게 그녀를 소개한다. 진탕 먹고 마시고 논다. 그리고 간호사가 출근하기 전에 창문너머로 탈주할 계획이다.

하지만 깨워주기로 했던 동료가 늦잠을 자고 맥머피 역시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그만 흑인 보조원들에게 수갑이 채워져 2층의 중환자실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한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장이라는 것을 맥머피는 안다. 그녀와 결투를 피할 수 없다. 최후의 순간에 그는 그녀의 거대한 젖가슴이 드러나도록 그녀의 흰 옷을 찢는다.

간호사도 정면대결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회만 노리던 뇌 절제술을 명령한다. 얼마 후 표정 없는 얼굴에 코까지 부러져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맥머피가 흑인보조원들이 밀고 온 이동침대에 실려 내려온다.

수 차례의 전기충격에도 견뎌냈던 맥머피는 의료 기술자들에 의해 전두엽이 잘리자 더는 사람구실을 할 수 없다. 브롬든은 식물인간이 된 맥머피를 그대로 살려 둘 수 없다.

간호사에게 반항하면 맥머피 조차도 이렇게 되는 참혹한 결과를 동료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는 베개를 이용해 질식사 시킨다. 그리고 누구도 들 수 없는 거대한 건조물을 번쩍 쳐들어 유리창을 박살낸다.

그리고 달린다. 인디언 시절 거친 들판을 뛰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는 달리면서 냄새를 맡는다. 자유의 냄새가 그의 온 몸을 따뜻하게 감싼다. 한 마리 새가 되어 그렇게 바람을 가른다. 맥머피도 지금쯤 하늘 높은 곳으로 날고 있겠지.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평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정작 미친 인간은 양처럼 온순한 머저리를 원하는 허위와 기만에 가득 찬 사회라는 통렬한 고발은 ‘유쾌 상쾌 통쾌’하다. 규격화된 통제에 대한 강력한 잽인 것이다.”

: 가스 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1940년대 영국에서 연극과 영화로도 인기를 끌었던 <가스등>에서 유래했다.

조지 쿠커 감독이 만들고 잉글리드 버그만이 주연을 맡은 <가스등>(참조-본지 252번째 영화평으로 소개됨)은 남편이 멀쩡한 아내를 정신병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가스등 불빛을 흐리게 하는 인위적 조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후 이 용어가 사용됐다. (미쳐가는 잉글리드 버그만의 표정 연기가 볼만 하다.)

주로 타인이 처한 심리적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 그 사람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 것을 말한다.

가족관계나 연인 사이에서 빈번하며 수간호사처럼 갑의 위치에 있을 때 조종당하는 사람은 더욱 철저히 그 사람 말을 믿고 따르게 된다.

잘못이 없으면서도 잘못한 것 같고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어 그 사람의 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는 심리적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수간호사는 환자들의 심리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 철저히 자기 수하에 두고 로봇으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환자 빌리가 창녀와 함께 있자 네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겠니? 라는 압박을 반복적으로 가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빌리를 결국 자살로 내 몰기도 한다.

무명의 캔 키지는 이 작품으로 일약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으며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록음악과 히피문화가 꽃피었으나 억압적이고 체제 순응을 강요하던 물질만능주의에 강력한 반항심을 심어 줬던 것이다.

작가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작업에 적극 참여 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롬든이 책과는 달리 나의 관점이 아닌 제3자로 나오는 것에 불만을 품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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