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273. 물레방아(1966)
상태바
273. 물레방아(1966)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1.20 14: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낫은 시골생활의 필수품이다. 농사를 짓는데 꼭 필요한 연장이기 때문이다. 그 낫이 때로는 살인의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만희 감독의 <물레방아>에는 낫이 딱 한 번 등장한다.

풀을 베기보다는 주인의 목을 베기 위해서. 시인 김남주는 그의 시 ‘낫’에서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 버렸다/ 바로 그 낫으로”라는 섬뜩한 시를 쓴바 있다.

영화에서는 지주( 허장강)가 종 방원(신영균)의 낫에 목 뒤를 찔려 죽는다. 무시한 것은 둘째 치고 아내와 통정했기 때문이다.

어느 시골, 딱 봐도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마을로 접어든다. 흥겨운 춤과 풍악 소리에 끌렸는지 그는 노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다. 탈을 쓰고 농악대에 맞춰 신이 났는데 즐기는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씨름판도 벌어진다. 사내는 씨름왕을 냅다 꽂아 버린다. 그가 힘자랑을 할 때 탈바가지를 벗은 젊은 여자의 눈과 마주친다. 죽은 남편의 막 3년 상을 치른 금분이(고은아)다. 장사 머슴과 젊은 과부 가 정분이 날 것만 같아 절로 미소가 번진다.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여자의 원귀를 쫓기 위해 벌이는 한바탕 잔치가 끝나 갈 무렵 방원은 종살이를 자처한다. 분이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분이도 그가 싫지 않다. 김가인지 박가인지 성도 없는 종놈 이지만 병자 남편과 재미 한 번 못 봤으니 그녀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분이를 노리는 것은 머슴뿐만이 아니다. 지주도 굶주린 늑대처럼 기회만 엿보고 있다. 치정극의 최종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이때쯤 들게 마련이다.

노련한 이만희 감독이니 쉽게 관객들에게 결과를 내놓지 않는다. 초반은 방원이 조금 앞서 나간다. 그는 벼 열섬에 지주의 평생 머슴을 자처한다.

호색한 지주가 안 갚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분이를 탐하자 머슴이 역공을 취한 것이다.

그 날부터 종과 분이는 지주 댁의 한 쪽에서 살림을 꾸린다. 지주의 식모로 추정되는 여자는 평생 거지꼴로 사느니 비단 이불 속에서 기분 좀 맞춰 주면 호강 할 수 있다고 뚜쟁이처럼 분이를 꼬드긴다.

나 봤자 종의 자식이니 성공할 수 도 없으니 부인도 없는 지주의 애를 배기라고 하면 안방마님이 될 수도 있다고 은근한 눈빛을 보낸다. 타고나기를 뜨거운 여자인 분이는 그 제의가 솔깃하다.

지주는 분이의 나이가 22살 인지 23살 인지 가늠해보고 틈나는 대로 침을 흘린다. 대령하라고 말한 꿀물을 가져오면 은근히 손을 잡고 허리를 껴안으면서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는데 위태롭기가 바람 앞의 등불이다.

지주는 꾀를 낸다. 산 속에 있는 가마터로 그를 쫓아 보낸다. 말하자면 열흘 간 귀양살이다. 분이에게 주기 위해 딸기를 따다 실수로 독을 몇 개 깨드린 잘못을 이유로 농사일 대신 숲으로 쫒아 낸 것이다.

 

일꾼들은 지주의 속셈을 공공연히 떠벌이지만 순진한 것인지 모자란 건지 머슴은 고개를 젓는다. 밤이 기울고 하늘에 달이 뜨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슴은 눈을 번득이며 한 달음에 마을로 향한다.

별일 없는지 요리조리 겉으로만 확인하고는 안심하는 머슴을 미련한 종놈이라고 누가 탓하랴.

그는 시장에서 빼돌린 항아리와 고무신을 바꾸고는 신이 났다. 헌데 그 보다 앞서 흰 고무신이 분이에게 먼저 배달된다. 지주가 선수 친 것이다. 그는 잃기 직전의 짝을 찾아 한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물은 엎어졌다고 직감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염없이 흐르는 물레방앗간에서 그는 어머니의 은비녀를 발견한다. 소달구지를 함께 타고 오면서 분이에게 꽂아 줬던 바로 그 비녀다. 분이는 남편 몰래 비녀를 빼고 머리를 푼 것이다. 누구를 위해 그렇게 했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머슴이 눈이 멀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낫이다. 기둥에 박혀 있는 낫을 빼는 머슴은 얻어 터져 만신창이지만 낫을 휘두를 만큼의 힘은 남아 있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누워 있던 남녀를 향해 그는 잡았던 낫을 높이 치켜든다. 부끄러운 모습을 겨우 수습한 연놈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그는 네, 이놈하고 외치는 지주의 등을 향해 그 낫을 휘두른다. 지주의 등 뒤로 피가 흘러 흰 옷을 적신다.

그 다음 그의 살기는 지조 없음을 탓해서는 안 되는 분이에게 향한다.

그 짓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죽이기 위해 분이의 허리에 올라탄 그는 목을 조르고 주먹을 휘두른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세상에 둘 도 없는 처절을 몸부림을 농악대에 맞춰 탈춤을 추듯이 친다.

국가:한국

감독: 이만희

출연: 신영균, 고은아, 허장강

평점:

 

: ‘요절한 천재’로 불리는 나도향이 25세에 죽기 한 해 전인 1925년에 발표한 원작을 배경으로 했다.

전체적인 폼은 비슷하나 죽고 죽이는 과정이 약간 다르다. 지주가 종놈의 낫에 뒷목을 찔려 죽는 장면은 한국적 리얼리즘의 진수로 평할 만하다.

간직한 분노를 가슴에만 품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머슴과 지주의 대결에서 굳이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를 가릴 필요는 없다. 그 때 일어난 슬픈 현실의 회상, 죽은 원귀를 쫒는 한바탕 굿, 영원을 빌어 달라는 간곡한 기도 그것이면 족하다.

화면은 영어 자막에 한글어로 말하다가 아예 목소리가 한동안 들리지 않는 상황도 연출된다. 점프 컷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출연진의 연기력을 평가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광릉수목원에서 햇빛에만 의존해 촬영할 때 고은아의 벗은 몸은 햇살보다도 더 빛난다. 그런 고은아에게 군침을 흘리는 허장강의 훔쳐보는 눈은 음욕을 품은 사내의 전형적인 눈은 이렇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린다.

갓을 벗고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을 때 그는 돈도 있고 힘도 젊은이 못지않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개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웃어 제키는 고은아의 색기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최정상이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분이, 내 분이를 뺏긴 신영균의 몸부림은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처럼 간장이 끊어지고도 남는다.

계급, 가난, 애정, 본능이 흔히 말하는 한국적 에로티시즘과 엮여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그 얼굴에 그 배우, 상영관 싹쓸이, 여기저기서 그러모은 짜깁기로 한가한 관객을 홀리는 허접한 천만 영화에 끌려가기보다 이런 웰 메이드 영화 한편 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으니 시간 날 때 조용히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