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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흥선대원군과 석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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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흥선대원군과 석파정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09.0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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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모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3명은 사후에 나머지 한 명은 생존시에 그런 칭호를 얻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12살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통해 조선 말기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살아서는 물론 사후 지금까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데 그런 것과는 달리 북문 근처에 있는 석파정에 얽힌 이야기를 잠깐 해보면 이렇다. 

<매천야록>을 지은 황헌은 그의 책에서 "김흥근은 북문 밖에 별장을 가졌는데 경관이 서울에서 가장 빼어났다"고 썼다.

안목 있는자의 이런 평가가 있을 정도 였으니 대원군이 눈독을 들였을만도 하다. 

김흥근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로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대원군의 세도에는 미칠 수 없었다. 

대원군은 그에게 별장 석파정을 팔라고 했다고 한다.이에 김흥근은 사실인지 아닌지 믿기 어렵지만 그러기를 거절했다.

이에 대원군이 왕인 아들인 고종에게 한 번 석파정에 다녀오라고 했다. 고종은 그렇게 했고 그 후 김흥근은 그 근처에 발을 딛지 못했다. 왕이 다녀간 곳에 백성이 살 수는 없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석파정을 빼앗은 대원군은 아예 자신의 호도 석파로 바꾸었다.

지금은 의약품유통업체 대표인 개인이 소유한 서울미술관을 통해서만 석파정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 때문에 석파정의 아름다움이 가려져 있어 외부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시민들에게는 큰 손실이다. 미술관은 돈을 내고 입장해야 한다. 이름과는 달리 서울시와는 무관하다.)

 커다란 소나무와 그 앞을 흐르는 계류가 과연 이곳이 대원군이 탐낼 만한 명당이었음을 입증한다.

안에는 작은 서양식 별장도 있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는 인왕산 자락을 감싸고 도는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 아래에는 백일홍이 흐드러 지게 피어있고 제 때 맞춰 우는 매미 소리가 역사의 흔적을 상기시킨다.

1820년 태어난 대원군은 1898년 사망했으며 이판은 물론 좌판에 영의정까지 했던 김흥근은 1870년 75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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