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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5-17 20:40 (금)
18. 누나, 형이 오래~ 박복한 인생 누구 탓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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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누나, 형이 오래~ 박복한 인생 누구 탓하랴
  • 의약뉴스
  • 승인 2009.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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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어머니는 어디론가 도지세 받으러 가시고 집에 없었고 그녀의 아버지가 아침밥상을 받아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융배형은 자기 아버지께 자기의 후배라고 얼버무리며 나를 인사시키는 것이었다.

밥상을 받아 놓고 계신 어른께 어떻게 인사 할 줄 몰라서 나는 넙죽 큰 절을 올렸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이가 어떻게 잘 맞아 돌아가는것 같지 않았다.

숟가락을 뜨는둥 마는둥 아침식사를 마치고 건너방으로 돌아오니 융배형 하는말

“밥상 앞에서 절하는 것은 죽은 사람한테나 하는거야” 하는것이었다.

일부러 밥상앞에서 절 한것이 아니고 어른께 인사는 해야겠는데 그놈의 밥상이 버티고 있으니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넙죽 절을 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이래도 탈 저래도 탈 재수 없는 놈인가 보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 집에 더 머물러 봤자 별 소득도 없이 실수만 저지르고 있으니 떠나는게 상책인듯 싶어 나는 융배형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서울 집을 향해 그녀의 집을 나섰다.

순이가 알아차리고 나보다 빨리 동구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탐탁치 않은 융배형의 차가운 시선을 뒷통수로 느끼며 그녀의 뒤를 쫓아 논두렁 길에서 그녀와 어깨를 같이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우리들은 방향도 없이 길가는 대로 걷고만 있었다.

우리가 걷는 비포장 신작로 양 옆으로는 얼기설기 바둑판처럼 논두렁이 그물을 치듯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겨울논인지라 야박스럽게도 모든 구석구석까지도 텅텅 비어서 얻어갈 것이라고는 눈을 까집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년 전 서울에서 그녀와 만났을때에는 온 세상이 따뜻했고 풍요로웠으며 그녀와 나는 황홀해서 걸어도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었으며 앉아도 서있어도 서로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곳 청주는 폭풍한설에 부재온정인가?

하기야 그녀도 불시에 찾아온 내가 큰 부담 이었을것이다.
보수적인 아주 좁디좁은 시골에서 외간남자의 접근은 정서상 그리 쉽게 용납 되는것이 아니었었다.

감정에 치우쳐 현명한 사리판단을 못한 나의 과실이 지금의 딜레마를 초래한것이었을것이다.
저 멀리서 신작로 길을 따라 키 작은 어린 소년이 우리에게 달려 오고 있었다.
그녀의 막내 남동생이었다. 그가 우리 앞에 멈추면서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몇 마디 뱉는데
“누나” 형이 오래 였다.

그 말은 그 놈 가거나 말거나 배웅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단호한 전갈이었다.

융배형! 자칭 영웅은 그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나봅니다.

멀리서 그렇게 고생하며 찾아왔는데 그리고 어머니 잃은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달랠까 싶어 찾아왔는데 자기 자랑만 실컷 하고 차 타는 데까지 바래다 주는 것도 인색하게 그렇게 할꺼야?

나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일년간의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나는 구태여 어려운 어머니 얘기는 삼가고 있었으나 내가 계모 밑에서 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 고 있었다.

지금 역겨운 이 순간에 나의 어머니 애기를 꺼낸다는것도 부자연스러운 분위기였음으로 나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시간조차 없었다.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서로간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아니 어린 막내 동생을 달음박질 시켜 급히 그녀의 배웅을 방해한 정황은 나의 쓸쓸한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는것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나의 눈은 절망과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 있었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만이 조바심치며 떨고 있었다.

그녀는 오빠와 나 사이에서 곤란한 샌드위치가 되어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 있었다.

드디어 나는 입을 열었다.

순애씨 돌아가 오빠가 부르잖아?
아니... 차 타는데까지만...
아냐. 필요없어, 그냥 돌아가...

그녀는 멈칫멈칫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럼 안녕히! 하면서 용감히 돌아서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또박또박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미루나무가 치솟은 큰길을 건너 동네 어귀로 사라질때까지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원래 박복한 놈, 이 세상 누가 나에게 따뜻한 온정 베풀어 주겠나?
너 자신을 알아야지 너 여기 올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잖아? 다 버려! 이놈아
너에게 진실로 위안을 줄 만한 여자는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을걸?
너는 니 어머니도 너를 버리고 떠나셨잖아!
어머니 사랑 한번이라도 받아보지 못한 놈.
언감생심 어디다 대고 기대려고 해?
지금 나의 처지는 무엇일까?
퇴짜 맞은 놈. 아니 버림 받은 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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